바늘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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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관용어
2.1. 유래
2.2. 오역 주장과 반박
2.3. 기독교에서 부자는 무조건 지옥행인가?


1. 개요[편집]


바늘구멍 또는 바늘귀바늘에 실을 꿰기 위한 구멍으로, 한자로는 침공(針孔)이라 한다. 한국어에서는 '귀'에 비유하는데, 서양에서는 '바늘의 눈'(the eye of the needle)'이라고 하여 눈에 비유하기도 하고,[1] 한자문화권에선 침비(針鼻)[2]라고 하여 '코'에 비유하기도 한다.


2. 관용어[편집]


'작은 구멍을 통과할 정도의 어려운 난이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한데, 이는 아래 성경 구절에서 유래했다.


2.1. 유래[편집]


πάλιν δὲ λέγω ὑμῖν, εὐκοπώτερόν ἐστιν κάμηλον διὰ τρυπήματος ῥαφίδος διελθεῖν ἢ πλούσιον εἰσελθεῖν εἰς τὴν βασιλείαν τοῦ θεοῦ.[3]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마태오 복음서 19장 24절)[4]

εὐκοπώτερόν ἐστιν κάμηλον διὰ [τῆς] τρυμαλιᾶς [τῆς] ῥαφίδος διελθεῖν ἢ πλούσιον εἰς τὴν βασιλείαν τοῦ θεοῦ εἰσελθεῖν.[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마르코 10장 25절)

ὐκοπώτερον γάρ ἐστιν κάμηλον διὰ τρήματος βελόνης εἰσελθεῖν ἢ πλούσιον εἰς τὴν βασιλείαν τοῦ θεοῦ εἰσελθεῖν.[6]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루가 18장 25절)

예수 그리스도가 이 말을 했던 당시 상황은 예수를 찾은 한 부자 문서를 참고할 것.

개역개정판과 같은 옛 번역 성경에서는 낙타를 '약대'라고 표기하기도 하는데, '약대'는 낙타의 순우리말이다.


2.2. 오역 주장과 반박[편집]


굉장히 극단적인 표현이라 일부에서는 오역이라고 주장하는 등 이 대목을 논파하려는 시도가 빈번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구원과 가진 자의 봉사와 자선을 중요시하는 신약성경이지만 특히 이 구절은 직접적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기독교의 구원 대상인가)를 알려주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길드와 대항해 시대를 전후하여 수많은 부를 축적했던 옛 부자들은 이 대목을 굉장히 두려워했다.

  • '낙타'가 아니라 '밧줄'이라는 주장
대표적인 오역 주장으로는, 아람어에서 밧줄을 '감타(gamta)', 낙타를 '가믈라(gamla)'라고 했는데, 이를 그리스어로 받아 쓰는 과정에서 복음의 서술자가 착각했다는 것. 즉, 원래는 "낙타가 아니라 밧줄을 구멍에 통과시키는 것이 어렵다고 하신 거였다." 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서기 4세기경부터 꾸준하게 제기되었다. # 이렇게 해석하면 낙타를 바늘귀에 넣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지만, 밧줄은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굵기가 천차만별이니 단지 '어렵지만 해볼 만한 일'이므로 상대적으로 그 난이도가 경감되는 꼴이다.

  • 실제 '바늘 구멍'이 아니라 《바늘 구멍》 이라는 이름의 고유명사였다는 주장
다른 설로는 예루살렘에 바늘구멍이라는 별명의 좁은 성문이 있었는데, 그 문으로는 낙타가 지나가려면 짐을 다 내리고도 구부정하게 구부려야, 심지어 무릎을 꿇어야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통과하기 어려운 문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주장한 학설로 알려져 있는데, 근대 이후 부르주아 시민계급에 영합해서, 부지런히 일해 성공한 소위 '선한 부자'들을 옹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청교도들이 지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위의 오역 주장들은 모두 근거 없는 억측에 불과하다.

속담상 가장 큰 동물과 가장 작은 구멍에 관한 이 말씀을 한번 듣고 나면, 누구든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선명한 대비 때문만이 아니다. 한 치의 착오도 없는 강렬함 때문이다. 물론 이 말씀은, 부자들은 모두 100퍼센트 원칙적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런 종류의 말씀은 통계학적인 정확성에 관심이 없다. 이 말씀은 인간을 깜짝 놀라게 하고 인간의 마음을 흔들어 깨우고 마음을 부수고 철벽 같은 인간의 무관심을 깨뜨리려는 의도를 지녔다. 이것이 얼마나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지는, 중세 신학자들이 예루살렘에 '바늘구멍'이라 불리는 좁은 성문이 있었다고 주장한 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의 말씀이 지닌 충격을 완화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문은 없었다. 그것은 지어 낸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8세기 한 아일랜드 수사의 환상이 낳은 결과였다.[7]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예수 마음 코칭 ㅡ 평신도를 위한 역사 비평학》[8]

, 김혁태 옮김, 184쪽


우선 바늘구멍을 '작은 성문'으로 독해하는 건 8세기에 생겨난 낭설에 불과하다. 또한 최상단의 그리스어 발췌에서 보듯, 극도로 발달한 본문비평의 결과물인 Nestle-Aland 비평본에서도 여전히 '밧줄'이 아닌 '낙타'(kamēlon)로 표기하고 있다. 애당초 독자의 마음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본문을 이해하기 쉬운 단어로 대체하는 건 오늘날의 본문비평에서 피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밧줄설'은 원문이 충격적이라는 것 외에 그 어떤 근거도 없기에, 본문비평에서 피하고자 하는 바로 그 케이스에 정확히 부합한다.

오역이라는 주장에는 '오역일 것 같다'는 공허한 심증 외에 어떠한 근거도 없으며, 비유대상의 과장을 주장하는 견해도 아래와 같은 유사 사례들에 의해 충분히 반박 가능하다. 당대의 많은 문언에서 '코끼리와 팔뚝', '메뚜기와 코끼리', '바늘과 소', '하루살이와 낙타'와 같은 이질적인 대상을 비교하는 예들을 찾아볼 수 있다.

다섯 마리 코끼리를 한 쪽 팔 아래 숨기는 게 더 쉬울 것이다. (그리스 속담)

한 마리 메뚜기가 코끼리를 낳는 게 더 쉬울 것이다. (로마 속담)

눈먼 이끔이들, 그대들은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구나! (마태 23:24)


예수의 이 발언은 당대 기준으로도 상당히 충격적인 발언이었음은 분명하다. 공관복음서 셋에서 모두, 예수의 해당 발언 다음에 사람들이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마르코 10장 26절, 공동번역)[9]라고 의아해한 점에서 이 점은 분명해진다. 더군다나 여기에 대한 예수의 대답 또한 '애당초 충격을 주려고 쓴 비유'임을 보여준다.


2.3. 기독교에서 부자는 무조건 지옥행인가?[편집]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이다.(마르코 10장 26절, 공동번역)[10]


결론적으로 말해, 애당초 충격을 주려고 한 비유를 문맥 무시하고 '충격적이지 않은 것'으로 바꾸려는 근거 없는 낭설들일 뿐이다.

위 성경 구절에서 예수는 부자 청년에게 '너는 천국에 못 간다.'고 못박은 적은 없다. 대신 '자신의 부를 가난한 사람을 돕는데 쓰고', '나(예수)를 따르라'는 해법을 제시했다. 따라서 부자라고 해서 무조건 지옥행이라는 법은 없다. 다만, 청년이 실망하여 돌아간 것처럼 어떻게 모은 돈을 나눈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결단일 뿐이다.

실제로, 성경에는 당대 기준으로 재력가에 꼽힐 만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일단 아브라함부터 부자였으며[11], 야곱, 이사악도 부자였다. 도 많은 가축을 거느린 큰 부자였고, 요셉은 한 술 더 떠서 부자일 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총리를 역임한 고관대작이기까지 했다. 예수의 애제자이자 천국 열쇠를 받았다는 베드로의 경우에도 갈릴리 호수의 어부 출신으로, 당시에 자기 소유의 배가 있었다. 유대인들은 당시나 지금이나 구약에서 허락한 음식인 코셔 푸드를 먹었는데 '물에서 나는, 비늘이 있는 생물'[12]물고기는 이들에게 필수적인 음식이었고, 고기를 잡아 파는 베드로는 가난한 사람이라기보다는 부자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또한 예수에게 무덤을 드린 아리마태아의 성 요셉도 부자였다.

결국 성경 속 부자였던 성인들은 천국에 갔을 것이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심(聖心)이며, 자신의 부를 통해 가난한 자를 돕는 등 하느님의 뜻에 합치되게 살아간다면 아주 가난한 자가 아니더라도 구원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해서 재물을 자기 욕심대로 다루는 부자는 천국에 가지 못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재물을 자신의 뜻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청지기는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 올바른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다만 가진 재물이 많을 경우 평범한 사람들보다 각종 유혹에 미혹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사실이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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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려 성경에서도 확인되는 유서 깊은 표현이다. 아래의 성경 구절에 나온 '바늘귀'도 그리스어를 직역하면 '바늘의 눈'이다.[2] 북주 유신(庾信)의 '칠석부(七夕賦)' "縷條緊而貫矩, 針鼻細而穿空" 등[3] 로마자 전사: palin de legō hymīn eukopōteron estin kamēlon dia trypēmatos rhaphidos dielthein ē plousion eiselthein eis tēn basileian tou theou.[4] 그리스어 본문은 Nestle-Aland 28판, 한국어 본문은 공동번역 성서에서 인용. 나머지 병행구절들도 이하동문.[5] 로마자 전사: eukopōteron estin kamēlon dia
[
tēs
]
trymalias
[
tēs
]
rhaphidos dielthein ē plousion eis tēn basileian tou theou eiselthein.
[6] 로마자 전사: ykopōteron gar estin kamēlon dia trēmatos belonēs eiselthein ē plousion eis tēn basileian tou theou eiselthein.[7] (책 속 주석) Ulrich Luz, Das Evangelium nach Matthäus.3. Teilband(EKK I/3), Zürich/Neukirchen-Vluyn 1997,128 각주 59 참조.[8] 원제: Jesus von Nazaret - Was er wollte, wer er war[9] 병행구절 - 마태오 19장 25절; 루가 18장 26절[10] 병행구절 - 마태오 19장 26절; 루가 18장 27절[11] 창세기 13:2.[12] 레위기 11:10.[13] 특히나 믿음이 약한 사람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믿음을 성장시키겠다는 건, 음식에 대한 절제력이 약한 사람이 눈에 잘 띄는 곳에 고칼로리 음식들을 잔뜩 들여놓고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 환경에서는 체중 유지조차 못하듯이, 돈으로 온갖 것들을 할 수 있어 하나님을 찾을 필요성을 느끼기 힘든 환경에서는 그나마 조금 있는 믿음조차 지키기 어려운 것이다. 죄인인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육신을 포함한 모든 물질을 올바르게 다스릴 수 없고 물질들로는 죄를 짓는 것 밖에 못하는 존재인데, 믿음을 발휘하여 은혜를 받을 때 비로소 물질을 올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그리고 죄의 유혹을 받기 쉬운 환경일수록 그런 유혹들을 이기기 위하여 큰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처럼 마음이 둔해지지 않으면서 많은 재물을 장기간 동안 올바르게 다스리는 것은 어지간한 믿음으로는 안 된다. 또한 많은 재산, 높은 지위, 뛰어난 외모 같이 다른 사람들의 욕망 또는 시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조건을 가지고 있을 경우, 매우 쉽게 육신의 정욕으로 가득 찬 사람들의 표적이 되기에 그 사람들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죄성이 쉽게 옮게 되고, 이것은 신앙생활에 있어 상당한 악조건이며, 이런 조건들을 자신의 영혼을 위해 포기하기 위해서는 큰 믿음을 동반한 결단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