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말살 통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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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2.1. 배경
2.2. 정책
3. 결과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민족 말살 통치기()는 일본 제국무단통치, 문화통치에 이어 식민지 조선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한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고 일본인에 동화시켜 중일전쟁태평양 전쟁에 협력하도록 민족 말살을 시키고자 했던 시기이다. 1937년(중일전쟁)부터 1945년(8.15 광복)까지 시행되었다. 간이학교가 이 시기에 생겼다.

용어 자체만 보았을 때는 ‘민족 말살’이 마치 한반도에서 시행된 제노사이드처럼 느껴지지만, 여기서의 민족 말살은 한민족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을 말살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정확히는 ‘민족 정체성 말살 통치기‘.

2. 내용[편집]



2.1. 배경[편집]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붕괴되고, 대공황으로 인한 타개책으로 만주사변이 일어나는 등 일본 내부의 정치적 분위기가 일본군 군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형식으로 바뀌게 되자 식민지 조선에서의 정책도 이전과는 다르게 바뀌게 된다. 특히 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의 인적자원과 물적자원의 확보가 중요해진 상황에서 식민지 조선을 본국과 다르게 보면 동원하는 데 어려움이 생기게 되고, 이러한 점들을 극복하기 위한 정책으로 식민지 조선인들을 일본인화 시킬 이유가 생겨버린 것이라 보면 되겠다.

1936년 조선에 부임한 미나미 지로 때부터 본격적으로 해당 정책을 펼치게 되었다. 이후 중일전쟁으로 인한 여러 문제점들도 더해지게 되면서 일제강점기 시절 중 가장 최악의 시기로 진입했다고 보면 되겠다.


2.2. 정책[편집]


일본 제국은 내선일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조선인일본인에 동화시키려 하였다. 때문에 일본어 교육을 강화하는 등,[1] 적극적으로 신민화 정책을 펼쳤다. 각급 학교의 ‘국어상용패’[2]가 이 때 생겨난 것이다.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정신적으로 굴복시키고 일본의 일부로 완전히 동화하게 만들기 위해 식민지 조선의 주민들에게 역사를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가르쳐서 세뇌 목적으로 만든 사이비 역사 관점이다. 192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준비를 시작했으며, 1930년대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이를 널리 전파하게 된다.

일선 동조론을 내세워 '조선인과 일본인의 조상은 같다'고 주장하였다.[3][4] 물론 일선동조론은 한국인을 일본인에 편입시키기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위에서 추진한 내선일체와 일선동조론의 일환이었다고 보면 되겠다. 우선 황국신민서사라는 맹세문을 외우게 하였고,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궁성요배, 그리고 신사참배의 강요도 이 시기에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본식 성명으로 강제 개명시키는 이른바 창씨개명으로 화룡 점정을 찍었다고 보면 되겠다.[5] 여기에 맞춰서 교육제도도 바꿔 1941년에는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바꾸기도 한다. '국민학교'는 1996년부터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초등학교로 바뀐다.

만주사변 이후 일제는 한국을 공업의 전초기지로 삼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남면북양정책으로 이를 통해 공업원료를 효율적으로 구하고자 하였다. 또한 한반도 북부일대에 각종 공업시설들을 많이 지으면서 만주와의 연계를 뚜렷하게 한 시기가 바로 이 시기다.

중일전쟁이 생각보다 길어지고 군비 문제가 생기게 되자 일제는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고 이를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과 타이완에도 적용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인적수탈과 물적수탈이 자행되게 된다. 대표적인 인적수탈로는 징병징용이 있고, 일본군 '위안부' 역시 이 법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물적수탈도 자행되는데, 금속에 대한 공출령과 식량 배급제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3. 결과[편집]


아마 일제시절이 그대로 쭉 진행되었다면 일본 제국이 원하던 그림이 나왔을 가능성이 높았겠지만,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각각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일본 제국이 결국 1945년 8월 15일에 연합국에게 항복을 선언하게 되면서 식민지였던 조선은 해방을 맞게 되었고, 그렇게 길고 길었던 일제의 통치도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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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언어정책은 일관성이 없었고,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일본어 강습 강화와 한국어 교육 사이를 오락가락하였다. 1930년대 말에서야 농촌 소학교, 일본어 강습회 및 야학을 통한 본격적인 일본어 교육책을 펼쳤지만, 낮은 교육 인프라와 고작 270시간 짜리의 강습회 시간, 조선총독부의 의지 부족 등으로 수업 효율은 바닥을 기었다.(참고: Tsuzuki Tsuguo, 〈일제 시대 야학 및 학술강습회에서 실시된 일본어 강습〉) 근본적으로 말해서, '교육 인프라는 낮은데 신민 의식은 심어놓고 싶다'는 발상부터가 놀부심보였다(…). 학교가 많아야 민족주의이든 내선일체이든 뭘 배우는 법이다.[2] 당시 국어로 불린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은 학생에게 강제로 준 패. 해당 패를 가진 학생에게 갖가지 불이익을 주어 강제로 일본어를 사용하게끔 강제하였다.[3] '일본인의 직접적 조상인 야요이인한반도 남부에 적어도 수백년간 머무르다가 소수의 한국어족 사용자와 같이 일본 열도에 건너가서 당시 일본 열도의 원주민이었던 조몬인피가 섞여 야마토 민족 일본인이 탄생했고, 한반도에 남은 야요이인은 한민족에 흡수됐다'는 것이 현재 가장 유력한 학설이다. 다만 당시 일제가 정말 이런 의미로 조상이 같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말살시켜 일본인에 동화시키고 보다 쉽게 통치하기 위한 의도로 주장한 것이다.[4] 특이한건 전후에 일본은 역으로 일본인과 한국인의 관련성을 최대한 거부하고자 했다. 그래서 이들은 조몬인이 일본인의 직계 조상이며 도래인은 소수가 일본인의 조상이 되었다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 유전자상으로 조몬인에 가까운 후손은 류큐인아이누로 여겨지고 있으며 도래인이야말로 현대 일본인의 조상으로 여겨지고 있다.(현대 일본인에서 유전적으로 도래인의 비율이 87~97%로 여겨진다.)[5] 창씨개명은 대단히 악질적으로 이뤄졌기에 이 시대에 창씨개명 안 한 사람이 드물다. 그래서 창씨개명을 했다고 모두가 친일파로 여겨지진 않는다. 재밌는건 이렇게 창씨개명이 강압적으로 이뤄져서 도저히 하지 않을 수 없다보니 그 반발로 기괴한 방식으로 창씨개명을 해 엿을 먹이는 사례가 등장했다. 야인시대에도 나오는 구로다 규이치도 대표적인 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