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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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3대 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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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Michelangelo Buonarroti)
라파엘로 산치오
(Raffaello Sanz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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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Michelangelo Buonarro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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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미켈란젤로 디로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1]
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출생
1475년 3월 6일
피렌체 공화국 카프레세
사망
1564년 2월 18일 (향년 88세)
교황령 로마
묘소
산타 크로체 성당
국적
[[피렌체 공화국|

파일:피렌체 시기.svg
]] 피렌체 공화국
신체
160cm
가족
아버지 로도비코 디 레오나르도 부오나로티 시모니(1444~1534), 어머니 프란체스카 디 네리 델 미니아토 디 시에나(?~1481)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Michelangelo Signature.png

1. 개요
2. 데뷔 전
3. 대표작
3.1. 조각
3.1.1.1. 훼손 사태 방지를 위한 보호 조치
3.2. 회화
3.2.1. 시스티나 천장화
3.2.1.1. 율리오 2세와의 관계
3.3. 건축
3.3.1.1. 미켈란젤로 이전의 상황
3.3.1.2. 미켈란젤로의 설계
3.3.2. 캄피돌리오 광장
3.3.3. 기타
4. 사망
5. 사생활 및 개인사
6. 종합 예술인
7. 대인관계
7.1. 레오나르도 다 빈치
7.2. 라파엘로 산치오
8. 작품에 숨겨진 비밀
9. 대중매체
10. 여담



1. 개요[편집]


이탈리아조각가, 건축가, 화가, 시인. 르네상스 3대 거장 중 한 명이다.[2]


2. 데뷔 전[편집]


1475년 3월 6일에 카센티노의 카프레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로도비코 부오나로티"[3]와 어머니 "프란체스카 부오나로티"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병약해서 그가 6살 때 세상을 떠나 어렸을 때 시골에 있는 유모의 집에 맡겨졌는데, 유모의 남편은 세티냐노의 석수장이였다. 이 사실은, 그가 후에 조각가로서의 재능이 가장 두드러지게 되는 데에 분명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 본인도 후에 자신의 글에서 "어렸을 때부터 조각용 끌과 망치를 갖고 노는 게 가장 즐거웠다"고 했다.

불행히도 그의 소년 시절은 생각 외로 그렇게 순탄치 못했다. 피렌체에서 공부하던 때에는 마을 행정관인 아버지 로도비코 디 레오나르도 디 부오나로티 시모니는 미켈란젤로를 예술가로 키우는 걸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피렌체에는 상업이 매우 발달하고 있어서 상업거래에 따른 계약서의 공증업무가 많았는데, 미켈란젤로의 아버지는 바로 그 공증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의 젊은 시절에는 유럽의 예술가들도 취급이 딱히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몰락 귀족이라도 귀족이라는 자존심이 있던 아버지는 미켈란젤로가 공부로 할 수 있는 직업을 갖길 원했지,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에 굉장히 분노했다. 삼촌들 역시 그런 미켈란젤로를 못마땅하게 여겨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했었다.

아버지와 삼촌들에게 두들겨 맞고[4] 여러 차례 혼나고도,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예술혼이 불타오르는 걸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아버지와 삼촌들도 결국엔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후일 아버지에게 쓴 편지들을 보면 ‘아버지는 제가 번 돈으로 군주와 같은 생활을 하실 수 있다’ 라고 쓸 정도로 경제적으로 성공한다. 아버지 뿐 아니라 그의 형제들 또한 미켈란젤로의 덕을 톡톡히 본다. 그의 형제에게 쓴 편지에서도 본인이 가게를 차려 줄 테니 다른 짓하지 말라고 쓴 내용도 있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허락으로 13세에 당시에는 굉장히 유명했던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제자로 들어가지만, 1년 만에 나오게 된다. 이유는 스승의 능력이 성에 차지 않았다고 한다.[5] 사실 기를란다요의 능력이 떨어졌다기보다 미켈란젤로가 너무 뛰어났던 거다. 또 알다시피 미켈란젤로 본인이 회화보다 조각에 더 흥미를 가졌던 것도 있다.

기를란다요는 예술 역사에서 손에 꼽는 천재를 잠깐이나마 제자로 둔 덕분에 자신의 작품이 미켈란젤로와 철저히 비교당하는 굴욕을 두고있다. 그래도 1년이나마 스승이었기 때문에 미켈란젤로의 회화가 기를란다요에게 영향을 받은 게 조금 보인다. 미켈란젤로와 비교당해서 그렇지 기를란다요 역시 세련되고 뛰어난 화가다.

그렇게 기를란다요의 화방을 나오지만 곧 그의 재능을 알아본 메디치 가문의, 정확히는 당시 메디치 가문의 수장 로렌초 데 메디치의 초빙에 의해 미켈란젤로는 15살에 팔라초 메디치에서 공부하게 된다.

폭군에 독재자라는 시각도 있지만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는 예술을 사랑했고 젊은 예술가에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는 걸로 유명했다. 그는 자기 저택 정원에 '대리석 정원'이라는 걸 갖추어 놓고, 젊은 조각가들이 맘껏 공짜로 대리석에 솜씨를 뽐내도록 해주었다. 현재의 대리석 가격을 감안하더라도, 굉장한 대인이다. 다만 몇몇 역사가들은 이런 씀씀이 때문에 메디치 가문이 기울었다고 하기도 한다.

여기서 미켈란젤로는 연습작들을 몇 개 만드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판의 얼굴과 큐피드(혹은 에로스)이다. 이 2가지 작품은 모두 유실된 상태이다. 하지만 기록에 남겨진 묘사를 보면 어린 미켈란젤로의 담대함과 미숙하지만 재능있는 실력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작품들이었다고 한다. 판의 얼굴조각은 미켈란젤로가 메디치 가의 눈에 들게 되는 가장 큰 계기인데, 로렌초가 이 작품을 보고 미켈란젤로를 크게 칭찬하면서 "판은 나이가 들어서 이가 성하지 않을 텐데"라고 중얼거리자 미켈란젤로는 기뻐하면서 다시 한 번 끌로 뭔가를 조각했다. 로렌초가 "무얼 또 수정하는 거냐"고 물어보니까, 바로 판의 이에 충치를 조각해서 마무리지었다고 한다.[6] 큐피드 작품의 경우, 미켈란젤로가 가장 아끼는 작품 중 하나였다. 작품을 나의 자식, 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본 로렌초의 배려로 메디치 가에서 몇 년 동안 지내게 된 소년 미켈란젤로는 로렌초 및 그의 아들들과 함께 식사를 할 정도로 파격적인 우대를 받았다. 로렌초의 아들들을 가르치기 위해 초빙된 당대의 유명인사들과 학자들을 만나 플라톤 철학을 배우고, 그들에게서 수준 높은 토론을 경청했으며, 라틴어·문학에 대해서도 굉장히 수준 높은 소양을 갖추게 된다. 특히 그는 단테신곡을 좋아한 것으로 보이는데, 훗날 조각과 회화뿐만이 아니라 (사실 저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것도 굉장한 거지만) 건축, 시 등 그의 예술 작품 전반에 걸쳐 자신의 예술작품에 고통과 순교, 그리고 구원의 주제를 늘 나타냈다.

그러나 로렌초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피에로 데 메디치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고, 미켈란젤로는 직감적으로 떠나야 할 때임을 알았다.


3. 대표작[편집]



다방면에서 걸작들을 남겼는데, 본업인 조각에서는 다비드 상, 피에타 상이 있으며, 회화에서는 시스티나 소성당천지창조최후의 심판 등을 남겼고, 건축에서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계획했다.


3.1. 조각[편집]



3.1.1. 피에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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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타, 1498~1499년, 대리석, 174 × 195cm,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성모 마리아의 얼굴 부분
그리고 24세에 그는 〈피에타〉로 순식간에 거장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7] 지금도 이 작품은 모든 피에타에 관한 조각들 중 최고로 평가받는데, 심지어 미켈란젤로 자신의 다른 피에타들도 이걸 능가하지 못했다.

미켈란젤로가 이 피에타를 만들게 된 것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하나 있다. 메디치 가를 나온 후 2년이 지나 미켈란젤로는 오랜만에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아서 저택을 찾았는데 정원에 있는 잠자는 큐피드 상을 보고 지나가던 조각가가 '땅 속에서 찾은 것처럼 만들었으면 좋았을텐데.'라고 한 말에 아이디어를 얻어 미켈란젤로는 그 상을 똑같이 만들어 땅 속에 묻었다가 파낸 후 그을리게 만들어 마치 발굴된 고대 로마 조각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밀라네제라는 로마의 골동품상에게 팔았는데 밀라네제가 이를 포도밭에서 발굴된 로마 조각상이라며 고위 성직자인 리아리오 추기경에게 팔면서 문제가 된다. 후일, 위작에 사기당한 걸 알게 된[8] 리아리오 추기경은 이 조각상을 만든 작가의 솜씨에 감탄하며 전령을 시켜 고작 20세의 어린 미켈란젤로를 찾아오게 된다. 이 잠자는 큐피드 사건은 미켈란젤로를 로마에 입성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리아리오 추기경이 미켈란젤로의 첫 후원인이 되면서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를 만드는 계기로 이어진다. 참고로 이때 밀라네제가 환불해준 큐피드 상은 미켈란젤로가 피에타로 명성을 얻고 난 뒤 더 비싼 값에 팔렸다.

이 피에타는 성모 마리아의 아름다움과 예수죽음을 슬프고도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사실 피에타상의 실제 크기는 2m 이상으로, 굉장히 크다. 이 성모상은 비례학적으로 볼 때 미켈란젤로가 근육에 집착하여 불법 해부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오류가 심한데, 이는 아래쪽에서 석상을 올려다 보았을 때 예수의 시신만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2배 정도 크게 조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2m에 달하는 높이와는 달리 옆면의 두께는 1m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옷자락 주름의 입체감 때문에 깊이 있는 공간감이 효과적으로 나타났다.

또한, 다른 피에타 작품들은 마리아가 아기 예수와 눈을 맞추거나, 뺨을 맞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계단의 성모'를 포함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조각작품에서는 마리아가 아들의 얼굴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마도 이것은 미켈란젤로가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읜 것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라고 추즉하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이 작품에서 마리아가 아들의 얼굴을 외면하도록 해서 아들을 처참하게 잃은 그 슬픔의 표현을 극대화하는 한편, 장래의 부활을 믿기에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분석해본다.

성모상은 재미있는 점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미켈란젤로의 작품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그의 이름이 조각되어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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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서명
미켈란젤로가 이 조각으로 일약 스타로 등극하고 나서도, 사람들이 이 조각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별로 관심을 안 갖자 열받아서는 밤에 몰래 성당으로 가서 자신의 이름을 조각했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의 옷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레이스 옷깃을 자세히 보면 라틴어"MICHAEL. ANGELVS. BONAROTVS. FLORENT. FACIEBAT(피렌체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들었다)"라고 조각되어 있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 너무나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고 한다. 조각가가 조각에 자신 스스로의 사인을, 그것도 성모 마리아의 옷깃에 조각으로 남기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다행히도 이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기행으로 그친다.

일화에 의하면, 그렇게 피에타에 자신의 서명을 남기고 밤중에 길을 나섰는데 밤하늘을 보자 너무 아름다웠다고 느꼈단다. 그런데 미켈란젤로가 생각하기를 세상을 이렇게 아름답게 만든 하느님은 당신의 작품 어디에도 서명을 넣지 않았는데 자신은 고작 조각 하나에 오만하게 서명을 넣은 게 너무 부끄럽게 느껴져서, 그 이후 다시는 자신의 작품에 서명을 넣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혹은 자신이 만든 피에타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기대와는 달리 피렌체에 대한 언급 없이 로마 또는 롬바르디아 출신 예술가의 작품일 거라는 평가를 듣자 화가 나서 한밤중에 대성당에 몰래 들어가 출신지와 이름을 새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2가지 일화 중 어떤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물론 지나치게 젊고 아름다운 성모 마리아[9]에게서 이질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나 보다. 이에 미켈란젤로는 동정녀인 성모 마리아는 속세의 나이에 많은 영향을 받지 않기에, 일부러 젊고 아름답게 조각했다고 한다. 이에 반해 예수의 모습은 그저 힘없이 축 늘어진 인간의 모습이다(그러나 위에서 보면 은은한 미소를 풍기고 있다).


3.1.1.1. 훼손 사태 방지를 위한 보호 조치[편집]

현재 바티칸성 베드로 대성당 내 오른쪽에 전시되어 있다. 혹시라도 바티칸에 들른다면, 시스티나 소성당을 거치고 나서 바로 갈 수 있으니 꼭 들러볼 것. 석상은 방탄유리 안에 보관처리하였다. 그 이유는 테러와 같은 만일의 사태로부터 석상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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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손 사태 직후, 1972.5.21
파괴된 성모 마리아의 코와 왼팔
1972년 5월 21일, 호주인인 토트 라슬로(Toth Laszlo)가 쇠지렛대로 피에타를 훼손시켰다.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던 토트는 "내가 바로 예수다, 우리 어머니는 저렇지 않다."고 망발하며 조각상을 훼손한다. 토트는 범행 후 1년간의 재판 끝에 이탈리아 정신병원에서 2년의 강제수용 치료처분을 받은 후 호주로 추방당했다.

이 사건으로 성모 마리아가 파쇄되고, 왼팔을 비롯한 몇몇 부위가 훼손되어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피에타가 박살나서 사방팔방으로 파편이 튀자 비도덕적인 구경꾼들이 조각들을 자기 멋대로 주워가버린 탓에 회수된 부위는 전체 파손 부위의 43%에 불과했으며 코는 완전히 망실되었다. 결국 1976년이 되어서야 이탈리아 당국은 피에타를 성공적으로 복원할 수 있었고, 사건 이후에는 조각상을 아크릴 방탄판으로 보호함과 동시에 관람에 제한을 두게 되었다.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조각품들은 대개 이렇게 이중삼중 보호를 받으니 이해하도록 하자.


3.1.2. 다비드[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12px-David_von_Michelangelo.jpg

다비드, 1501~1504년, 대리석, 5.17m,
피렌체 갤러리아 델 아카데미아
피에타의 유명세 덕분에 20대 초반의 나이에 거장의 반열에 오른 미켈란젤로는 1501년 8월 16일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위원회(오페라 델 두오모)로부터 성당의 북쪽 익랑(transept)위에 있는 부벽(buttress)에 올려 놓을 다윗을 조각해달라는 주문을 받고 계약서에 서명했다. 돌팔매로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을 통해 압제로부터 시민의 자유를 쟁취한 피렌체를 나타내려는 의도가 담긴 작품이었다.

미켈란젤로에게 주어진 대리석 덩어리는 1464년부터 다른 조각가들이 작품을 만들려고 착수했지만 도중에 번번이 작업이 중단된 채 창고 구석에 방치된 상태였다. 1475년에 조각을 맡았던 안토니오 로셀리노가 초벌 작업으로 돌을 다듬어놔서 다비드가 골리앗의 머리를 밟고 있는 전통적인 자세를 나타내기에는 대리석의 여유분이 모자랐고, 이에 따라 미켈란젤로는 골리앗을 향해 새총을 쏘려는 자세를 선택했다. 밤낮 없이 매달려 작업에 매진한 결과 1504년 높이 5m가 넘는 다비드 상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6톤에 이르는 조각상을 성당의 높은 곳에 올리기가 쉽지 않아서 문제였고, 또 한가지는 다비드 상이 세상에 공개되자 세간의 반응은 가히 열광적이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반응은 아니지만, 동시대의 화가이자 <예술가 열전>의 저자인 조르조 바사리는 훗날 다비드 상을 가리켜 "고대와 근대, 그리스와 로마의 그 어떤 조각상보다 뛰어나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를 본 사람이라면 그 어떤 다른 조각가의 작품도 볼 필요가 없다"고 극찬했다.

이렇듯 장엄한 걸작을 성당 부벽 같은 곳에 갖다 둘 수 없다고 판단한 오페라 델 두오모는 다비드 상이 새롭게 놓여질 장소를 정하기 위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산드로 보티첼리, 줄리아노 다 상갈로를 포함한 피렌체 시민 30인의 위원회를 소집하기에 이른다. 토의 결과 이 조각상을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피렌체 시청 베키오 궁전 앞에 놓기로 결정했다.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다비드 상은 도나텔로가 제작한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청동상을 대체했고, 400년 가까이 광장에 우뚝 서 있던 다비드는 공해로 인한 훼손을 막기 위해 1873년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긴 뒤 복제품을 설치했는데 미술관 측이 다비드만을 전시하기 위한 특별실을 건축할 정도로 대우가 남달랐다.

다만 이 작품의 문제는, 미켈란젤로가 본래 메디치 가문의 지원을 받아 성장한 예술가였다는 점에 있다. 특히 메디치 가문의 군주였던 로렌초 데 메디치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미켈란젤로가 메디치 가문을 무찌른 피렌체 공화국을 찬양하는 조각상을 만들었다는 것이 특기할 점이었다. 실제로 미켈란젤로는 이 의뢰 당시에 이러한 논란에 대한 값까지 피렌체 정부에 요구하였으며, 이후 메디치 가가 피렌체로 복귀하였을 때 미켈란젤로는 한동안 고향을 밟을 수 없어 교황청의 의뢰만을 받으며 숨어 있기도 하였다. 메디치 가 복귀 이후 이 조각상의 파괴 또한 논의된 바가 있었으나, 르네상스의 중심에 있었던 가문답게 메디치 가는 그 예술성을 인정하고 대신 피렌체 공화정부를 밀어낸 메디치 가를 찬양하는 새로운 작품을 발주하였다. 바로 이 작품이 첼리니의 페르세우스로, 이 청동상에서 페르세우스가 들고 있는 메두사의 머리는 피렌체 공화 정부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 다비드 상을 잘 보면, 인체묘사에 진심이었던 천재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임에도 불구하고 인체비례가 미묘하게 맞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특히 머리와 오른손이 상당히 큰데, 이는 본래 다비드 상이 두오모 성당 중앙 돔 천정 아래 끝선에 올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이렇게 되면 얼굴의 높이가 약 50m 지점에 위치하게 되는데, 바닥에서 올려다보는 사람들에게 조각상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게 된다고 판단한 미켈란젤로는 일부러 다비드의 머리 부분을 크게 제작했다는 것인데, 현재는 그 높이에서 보지 않으므로 머리가 살짝 크게 보이는 것. 위의 피에타 상도 비슷한 왜곡이 있기 때문에 현재는 이런 해석이 정설에 가깝다. 혹은 일부러 다비드의 의지와 강인함을 강조하기 위해 돌을 든 오른손과 골리앗을 노려보는 얼굴을 크게 만들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다비드, 1997~2004년, 3D 디지털 스캔 이미지, The Digital Michelangelo Project

또 다비드 상의 눈을 보면 하트 형태로 눈동자가 만들어져 있는데, 이는 햇빛을 받으면 마치 눈이 이글거리는 느낌으로 나타나도록 표현한 것이다. 한편 다비드의 성기가 가려지지 않고 그대로 노출되었기 때문에 영국 런던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에서 전시되었을 때는,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방문을 대비해 30cm 길이의 무화과나뭇잎 석고 조각을 준비했다고 한다. 또한 다비드 상을 3D 프린터로 복제한 복제품두바이 엑스포에서 전시 했을땐 나체를 보여서는 안된다는 이슬람 율법 때문에 하체를 전부 가리고 위에서만 쳐다보게끔 전시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다비드상은 바닥에서 올려다보기 위하여 인체 비율을 일부러 변형한 작품이기 때문에, 두바이 엑스포처럼 위에서 보게 된다면 대두가 두드러져 마치 찐따(...) 처럼 보이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는 미켈란젤로의 의도를 왜곡하고 작품성을 망가트리는 결과가 되었다. 게다가 미국의 한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보여줬다가 '포르노'라는 일부 학부모의 항의로 교장이 물러나는 일이 벌어지자 이탈리아 측이 일침을 가했다.#

여담이지만 사진 찍기가 쉽다. 관람객들의 눈높이에서 한참 위쪽에 전시가 되어있으며, 다비드 상의 크기가 워낙 커서 멀리서 찍든 가까이서 찍든 피사체가 잘 나온다.

3.2. 회화[편집]


사실 미켈란젤로는 어릴 때 회화를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고, 그런 기억때문에 스스로 회화를 꺼리는 것은 물론, 조각의 불완전한 버전이 회화라고 깎아내리는 등 자신을 화가가 아닌 조각가로 여겼다. 하지만, 교황 율리오 2세의 협박에 가까운 의뢰 때문에 강제로 천장화를 맡긴 후 아래 2개의 불세출의 걸작을 만들어내게 된다.


3.2.1. 시스티나 천장화[편집]


파일:external/vr.theatre.ntu.edu.tw/michelangelo-1508ax.jpg
시스티나 천장화, 1508~1512년, 프레스코, 40.5 x 14m,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10]
아담의 창조를 포함한 것으로 유명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에 대해 저명한 미술사가 에른스트 곰브리치 교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회화작품이라 칭찬했다. 미켈란젤로는 성당의 천장을 다 덮은 이 거대한 회화를 경이적인 속도로 마쳤다. 보통 화가들은 그 10분의 1의 크기인 벽화도 3년 동안 그렸지만 이 못생기고 왜소한 예술가가 시스티나 소성당의 천장을 4년, 다비드 상을 3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그것도 남들을 훨씬 능가하는 자질을 보이며 끝내니 주변의 반응은 놀라움을 넘어선 경악. 거기에 벽화와 달리 미켈란젤로는 천장화였다. 더군다나 그는 스스로를 조각가로 생각하며, 그림을 그리는 걸 계속 거부했었다. 교황의 계속된 협박과 달램 끝에 그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시스티나 소성당 천장화 작업을 끝낸 것이다.

하지만 이 시스티나 천장화 작업 때가 미켈란젤로 입장에서 가장 우울한 때였을 거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일단 그가 회화라는 장르 자체를 싫어하는 데다가 하필 천장화. 조금만 잘못 하면 회반죽이 얼굴로 떨어지기 일쑤고, 이런 과정으로 이런 천장화을 그려내려면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려야하기에 매우 하드코어 중에 하드코어이다. 거기에 그림을 그리려고 자세를 잡는 것 자체가 힘들고 전체적인 구도를 살피는 것도 어렵다. 그리고 설치해야 할 장비들도 많고, 결정적으로 매우 위험하다.[11][12]

작품의 제작 과정에도 우여곡절이 있었다. 1508년 작업에 착수하고 처음 1년 동안 제법 빠르게 진도를 나가 1년 만에 50%를 완성하는 무시무시한 속도를 보였지만, 교황청제대로 봉급을 지급하지 않아 조수들이 몽땅 피렌체로 떠나버렸다. 이 때문에 미켈란젤로도 본의 아니게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고, 교황청이 다시 급료 지불을 시작한 1511년 10월에야 새로운 조수들을 고용해 작업을 재개, 1512년 9월까지 약 11개월에 걸쳐 나머지 절반을 완성해 천장화 전체를 완성시켰다. 그러니 실제 작업 기간은 약 2년인 셈. 게다가 후반기의 약 1년 동안은 새로 고용한 조수들이 영 상태가 좋지 않아 결국 미켈란젤로 혼자서 거의 다 작업을 맡아 했다고 한다.

그가 예술가로 사는 것을 반대하던 아버지도 돈은 언제 들어오냐며 화를 돋구었으니 혈압이 치솟을 만하다. 거기에 미켈란젤로에게는 3명의 남동생이 있었는데 그중 1명은 아버지 못지 않은 망나니여서 돈을 요구하며 형의 속을 긁었고, 그가 가장 아꼈던 동생은 이때 건강이 안 좋아서 앓으며 다른 방향으로 형의 속을 태웠다.

이처럼 하드코어하다 못해 지옥 같은 상황에서 작업을 끝내니 나타난 것은 인류의 유산. 본인은 정말 하기 싫어했던 작품이 후대에는 그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남았다. 다비드, 피에타가 있긴 하지만 역시 미켈란젤로라 하면 시스티나 천장화를 떠올리게 되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당시의 작업이 그와 사이가 안 좋았던 건축가 브라만테의 함정이라는 주장도 있다. 조각을 전문으로 하는 미켈란젤로이기에 회화를 맡기면 망신만 당하고 말 거라는 계산에 브라만테가 교황을 부추겨 최고의 '조각가'인 그에게 회화 작품을 맡겼다는 것. 비록 물적 증거가 없는 정황 증거만을 놓고 한 추측이긴 하지만, 저런 추측이 별로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브라만테와 미켈란젤로의 사이는 안 좋았고, 브라만테의 성격 역시 소인배스럽고 음흉하기까지 했다. 그런주제에 브라만테의 건축능력은 미켈란젤로와 같이 당대 최고의 전문가였으며 심지어 사이 나쁜 두 사람조차 건축능력만큼은 확실히 서로 인정했다고 한다.

정황을 첨언하자면, 당시 브라만테는 시스타나 소성당을 개축하는 일을 맡았었는데, 그만 천장이 쩍 하니 갈라지고 만다. 그 결과 대충 은하수 그림으로 가려놓고 외부벽에 축대를 대 건물이 무너지는 것은 막았지만, 교황의 분노를 산건 당연지사. 이를 떠넘기기 위해 미켈란젤로를 추천했다는 것이다. 당시 미켈란젤로는 회화를 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조각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 대충 미켈란젤로에게 덮어씌워 그가 잘 처리해도 좋고, 만약 잘 처리하지 못해도 죽는 건 미켈란젤로가 될테니. 브라만테가 미켈란젤로를 싫어한 이유는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향 출신에 천재로 이름 높았던 라파엘로를 밀어주기 위해서 라고도 한다. 다만, 브라만테가 라파엘로를 단순히 동향 출신이라서 밀어준건만은 아니다.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를 봐도 알 수 있듯이, 당대 예술가들은 한 가지 분야가 아니라 여러 분야를 넘나들면서 활동했는데, 브라만테와 미켈란젤로는 건축분야에서 라이벌이었다. 즉, 정적을 쳐내고 싶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는 것. 라파엘로도 건축가로서 활동했지만, 브라만테와는 연배가 40년이나 차이가 나고, 그에따라 자연스레 활동시기에도 차이가 났기 때문에 경쟁관계가 아니라 후계자로서 밀어줬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라파엘로는 브라만테 사후 성 베드로 대성당의 최종책임자가 된다. 결국엔 71세의 미켈란젤로가 맡게 되지만.

미켈란젤로의 다른 작업들처럼, 이 작업도 하는 내내 장화를 벗지 않아 장화 속 내피가 피부에 붙어버려 벗어낼 때 살점하고 같이 뜯어져 나갔다고 한다.


3.2.1.1. 율리오 2세와의 관계[편집]

반면 성격 역시 개차반까지는 아니어도 꼬장꼬장해서 교황에게까지 대든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는 나쁘게 말하면 굉장히 오만했고, 다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깎아내리는 걸로 유명했다. 당시 교황이 지금처럼 실권이 없는 때도 아니었고, 오히려 후대의 평가로는 아마 '교황의 권력이 가장 강했던 때'라고 한다. 게다가 미켈란젤로가 대든 교황은 여러 번 군사 원정도 나가고 당할 자 없다던 영웅 체사레 보르자를 한순간에 몰락시켜 버린 권모술수의 대가인데다가, 황제전쟁 교황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더러운 성격으로는 유럽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만큼 유명했던 율리오 2세였다.

어느 누구나 미켈란젤로가 조각가이지 화가는 아니란걸 알고 있었음에도[13]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를 기어코 억지로 끌고와서 그림을 그리게 만들고, 그것도 드럽게 그리기 어려운 프레스코화를 드럽게 넓고 높은 성당 천장에 그리게 시킨 것에서 율리오 2세의 성깔과 막강한 권력을 체감할 수 있을 지경.

미켈란젤로만큼이나 꼬장꼬장한 성격의 율리오 2세는 시스티나 천장화를 두고 미켈란젤로와 마찰을 빚곤 했다. 그 사례 중 하나로 언제 그림이 완성되냐고 교황이 따진 적이 있었는대, 미켈란젤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제가 끝낼 수 있을 때, 그림이 끝나겠지요"라고 이죽거렸다. 그 이죽거림에 화가 난 교황이 말 조심하라며 미켈란젤로를 지팡이로 한 대 세게 때리고 만다. 이에 미켈란젤로는 기분이 상해 짐 싸들고 로마에서 고향인 피렌체로 돌아가 버렸다. 당연히 화가 머리 끝까지 난 교황이었지만 당시 이탈리아에 그만한 실력자가 없었기에, 피렌체 대사를 보냈는데 피렌체 대사는 현재 한화로 약 5억원 정도 되는 밀린 임금을 지불하며 사정사정을 한 끝에 간신히 미켈란젤로를 설득하는 데에 성공해 두 사람은 화해했고 시스티나 천장화가 완성될 수 있었다. 당시 대사가 미켈란젤로를 돌려보내며 교황에게 쓴 편지에는 "성하, 한 번만 그를 용서하시고 일을 맡겨 주소서. 이 피렌체의 천재는 세상이 놀랄 작품을 남길 것이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미켈란젤로가 아니꼬왔지만 그의 작품에 대한 기대가 어지간히 컸는지 율리오 2세는 이후에도 미켈란젤로와 여러 다툼을 벌였다. 하루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너무나 보고 싶었던 것인지, 당장 그림을 보여주지 않으면 미켈란젤로를 비계[14]에서 밀어버리겠다고 협박한 적이 있었다.[15] 미켈란젤로는 자기 작품을 중간에 보여줄 수밖에 없었고[16] 기어코 율리오 2세는 작업중인 성화를 미리 구경하는데 성공했다. 이 사건에 대해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성급함이 자신의 작품을 망쳤다고 한탄했다. 그는 교황의 작업 방해(?) 때문에 작품이 자신이 원하는 만큼 완성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골때리게도 율리오 2세는 1511년 8월 11일에 그림을 미리 봤다고 자랑하는 선언을 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해 10월에 마침내 이 대작이 완성되었다. 율리오 2세는 자기가 주문한 이 대작을 고작 4개월밖에 못 보고 선종했다.

교황이 피운 난리가 어지간히 지긋지긋했는지, 미켈란젤로는 작품에 약간의 뒤끝을 남겨두었다. 시스티나 천장화를 보면 율리오 2세의 얼굴을 모델로 그려진 예언자 즈카르야 뒤에 아기 천사가 검지 손가락을 말고 있는 이스터에그가 있다. 이것은 당대 이탈리아의 손가락 욕, 즉 뻐큐였다고 한다. 뒤의 최후의 심판에서의 일화도 그렇고, 레아의 일화도 그렇고 그는 의뢰인의 의뢰를 받아 작품을 만드는 당시의 풍토를 따르는 한편 몰래몰래 예술 작품에 자신의 노골적인 심경을 자주 담아내었다.[17]

원래 율리오 2세가 미켈란젤로에게 지시한 그림은 12사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12사도 성화를 그리기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이 너무나 거대하다고 판단하여, 정작 고용주는 시키지도 않은 대규모 그림으로 작업을 확대하기로 결심한다. 성당의 규모에 걸맞게 천지창조에서 노아의 방주, 모세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성경의 이야기를 시스티나 천장에 그리기로 한 것이다. 당연히 작업 규모가 당초 예상보다 배는 더 커졌고, 율리오 2세는 이 무모한 발상에 어이없어하면서도 주제의 전환을 허락해 줬다.

율리오 2세가 아주 근거도 없이 뜬금포로 미켈란젤로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의뢰한 건 아니었다. 물론 그 근거란게 참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미켈란젤로가 이전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피렌체 시청인 베키오 궁전을 장식할 벽화 대결을 벌인 적이 있었고, 율리오 2세는 이런 실험적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핑계로 "천재니까 그림도 아무튼 잘 그리겠지 뭐" 식으로 의뢰를 한 것이다.

다 빈치와의 그림 대결을 하며 만들어졌던 작품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나,[18] 미켈란젤로가 양피지 위에 그 습작을 그린 것은 남아 있다. 그 습작으로 미루어 보아 미켈란젤로의 회화 실력은 시스티나 천장화 이전에 이미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즉, 아주 백지부터 시작해 그런 대작을 그려낸 것은 아니다.

물론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막무가내로 의뢰를 날린 율리오 2세의 성질이 보통이 아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특히 같은 프레스코화라 해도 벽화와 천장화는 수준이 다른 이야기인데도 미켈란젤로가 횟김에 그린 미완성인 벽화 하나를 두고, 어쨌든 프레스코화 의뢰를 받은 적이 있으니 천장화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거의 막무가내로 맡긴 율리오 2세의 예술에 대한 몰이해도 돋보인다.

시스티나 천장화 이전에 회화 그리는 법을 알았다고 해도, 작업을 시작했을 때에는 한 구획 그리는 데에 3개월이 걸렸던[19] 미켈란젤로가 4년 후 작업 막바지에는 불과 40일이 걸렸다는 걸 보면, 그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필적하는 불세출의 천재였음은 확실하다. 이때 미켈란젤로는 회반죽 위에 스케치도 안 하고 그저 양피지 위에 연습만 몇 번 한 뒤 천장에 올라가서는 슥슥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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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오 2세 영묘 설계안 스케치
모세, 1513~1515년, 대리석, 2.35m,
죽어가는 노예
반항하는 노예
1505년 초안(이후 3차례 설계 수정)
로마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
1513~1516년, 2.5m, 대리석, 프랑스 파리 루브르 미술관
율리오 2세는 죽은 뒤에도 미켈란젤로에게 족쇄를 남겨 주었다. 당시 신축 중이던 성 베드로 대성당 중앙에다가 본인의 무덤을 피라미드 형태로 짓고 미켈란젤로에게 이걸 장식할 조각 40개를 완성하라 명령했던 것. 이 계약은 미켈란젤로에게 평생 부담으로 남았지만, 시스티나 천장화와 달리 이 의뢰는 미켈란젤로가 혼쾌히 수락했다.

조각 1개에 3년 남짓 걸리는 걸 생각해 보면 40개면 120년이니 훌륭한 노예 계약이지만 그걸 지적한 지인에게 그는 "원형 탁자에 대리석 6개 올려 놓고 돌아가며 조각하면 1년이면 돼. 뭐 한 7년 하면 다 완성하겠지."라고 대답했다 한다.

하지만 (의뢰한 양반이 양반이다보니) 나중에는 의욕이 떨어져버렸고, 이 무식한 규모의 의뢰는 미켈란젤로가 하고 싶은 일들을 못하게 만드는 족쇄가 되어버렸다. 율리오 2세 사후에도 유족들이 꼬박꼬박 보수를 지급했기 때문에 배째라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다행히 미켈란젤로에게 다른 작업을 맡기고 싶었던 후임 교황이 율리오 2세의 유족과 협상해서 원래의 계획보다 크게 축소시키는 걸로 타협점을 찾은 덕분에 그는 자유의 몸이 되어 평생 하고 싶은 조각들을 하며 살게 된다.

시스티나 천장화로 괴롭힌 것에 대한 악감정만 아니었어도 미켈란젤로는 진짜로 이 무모한 규모의 의뢰를 완수하고도 남을 기인이었다. 달리 표현하면 율리오 2세는 시스티나 천장화를 어거지로 의뢰한 것 때문에, 역설적으로 자신의 영묘를 미켈란젤로의 걸작으로 둘 수 없게된 것이다.

계약이 바뀌기 전에 완성해둔 조각상이 넷 있는데 하나는 바로 걸작 모세 상으로, 현재 로마의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있다. 모세 상이 완성되었을 때 감격한 미켈란젤로가 망치로 조각의 무릎을 치면서 "왜 말을 못 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이며, 유월절마다 유대인들이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을 찾아 모세 상에 경배를 올리기도 했다. 나머지 둘인 '반항하는 노예'와 '죽어가는 노예' 상은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마지막 하나 '승리의 정신' 상은 피렌체 베키오 궁전에 있다.[20] 그 외에도 4개의 미완성 노예 상이 남아있다.#

예로니모의 오역을 그대로 수용했기 때문에 모세 상의 머리에 작은 뿔 2개가 솟아 있다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시스티나 경당의 비밀>의 저자인 벤저민 블레흐와 로이 돌리너는 다른 견해를 제기했다. 원래 이 조각상은 피라미드 모양의 영묘 윗부분에 설치될 예정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를 받은 후 얼굴에서 빛이 났다는 표현을 보다 현실감 있게 재현하기 위해, 모세의 얼굴을 무두질한 가죽으로 윤이 나도록 문질렀고 아래쪽에서 바라봤을 때는 시야의 제한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에 작은 뿔 2개를 조각해 대성당의 지붕에서 쏟아지는 빛이 모세의 머리에 반사되어 성서에 적힌 것처럼 빛나도록 한 무대적 효과를 노렸다고. 하지만 원래의 계약보다 대폭 축소되어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훨씬 작은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설치하게 되자 미켈란젤로는 처음 의도했던 빛의 반사를 위해 자신이 아꼈던 모세 상에 수정을 가해서 모세의 얼굴을 왼쪽으로 90도 가까이 돌려놓고 성당 벽면에 작은 구멍을 뚫어 빛이 모세의 얼굴과 뿔에 반사되도록 했다. 유감스러운 것은 나중에 성당 측에서 그 구멍을 폐쇄하는 바람에 지금은 그가 연출했던 환상적인 효과를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덧붙여 율리오 2세와는 지겹도록 싸웠는데, 사실 이는 율리오 2세가 걸핏하면 무리한 요구를 하며 미켈란젤로를 착취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는 지지않고 사사건건 대들었다. 이토록 치고박고 싸워대는 고용인과 피고용인이니 둘은 서로 증오하는 사이였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나쁜 사이만은 아니었다. 율리오 2세는 전쟁 시에는 자신의 적으로 돌아서기까지 한 이 예술가를 용서해 주고 당시 예술가의 지위에서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건방진 일을 해도 다 용서해주었다. 미켈란젤로 역시 자신을 착취하고 항상 힘든 요구만 하는 교황을 만나러 갔더니 바쁘다며 안 만나주길래 삐져서 가출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


3.2.2. 최후의 심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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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심판, 1534~1541년, 프레스코, 13.7 x 12m,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
시스티나 천장화뿐만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 역시 굉장한 작품.

미켈란젤로의 여러 작품이 그렇듯 이것도 내막을 알면 알수록 복잡한 심경이 들 수 있는 작품이다. 소빙하기 기간 혼란에 빠진 유럽은 끝내 가톨릭에 대한 실망감에 종교 개혁의 돌풍으로 빠져들어갔고, 그런 혼란한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인 만큼 여러모로 복잡한 배경들이 깔려있다.

이 작품은 클레멘스 7세가 1535년 미켈란젤로에게 이 작품을 의뢰한 것으로, 그 배경에 로마의 황제 카를 5세[21] 로마로 쳐들어와 로마를 약탈한 역대급 참사가 있다.

"명색이 가톨릭 신도이며 로마인이라는 작자가 '로마 황제' 주도로 로마를 박살낸" 참상에 엄청난 분노를 느낀 클레멘스 7세는 "참 의인은 거둬들여지고 거짓된 자는 내쫓겨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란 의미로 이 작품을 기획해 의뢰하였다. 로마를 개발살 낸 것에 대한 분노는 의뢰를 수락한 미켈란젤로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것인지, 의뢰 의도에 아주 걸맞는 그야말로 분노가 가득한 불후의 걸작을 탄생시켜냈다.

상당한 규모의 기획이었던지라 클레멘스 7세는 계약서에 서명을 한 직후 심판을 받으러 하느님의 곁으로 돌아갔으며, 그 다음 교황인 바오로 3세 때에 작품이 완성되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많은 기대를 걸었던 바오로 3세는 1535년 9월 1일, 그를 '교황청의 최고 건축가, 화가, 조각가'로 임명하는 포고령을 반포하며 예우했다.

시스티나 천장화보다도 이쪽을 더 걸작으로 치는 사람들도 많을 만큼 대단한 작품이지만... 사실, 이 작품은 성전에 그려 넣기에는 은혜로움이라고는 1도 찾을 수 없는 그림이다. 당장 중앙의 예수 부터가 성화에 그려지는 모습과는 전혀 딴판인, 예수란 걸 알아보기 힘들다 못해 아폴론을 그린 것 같은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22], 그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종말 속에서 간신히 건져올려지는 의로운 성도들이, 좌측에는 예수에게 가차없이 내쫓겨나는 가짜 의인들[23]이 그려져있다. 게다가 우하단을 보면 그렇게 내쫓긴 거짓 증인들을 악마들이 가차 없이 지옥으로 끌고가고 있으며 심판을 선포하는 천사들도 이들을 혐오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사실 현대에 남아 있는 그림은 일종의 '수정본'으로, 원래는 쫓겨나든 거두어들여지든, 모든 등장인물들이 실오라기도 없는 말 그대로 나체 상태였다. 이는 종말 앞에서 한낱 인생은 그저 하느님께 구해달라고 갈구해야만 할 뿐인 미천한 존재임을 강조한 것이며, 그런 주제에 로마를 약탈한 니들은 지옥에 떨어져라!란 분노의 표현이다.

이러다보니 당대에도 수많은 성직자들이 "이런 나체화는 성당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탄원했다. 하지만, 바오로 3세는 적당히 이 작품을 두둔했고, 끝내 성직자들도 탄원을 그만뒀다. 다만, 당시 교황의 의전담당관 '비아지오 다 체세나' 추기경은 나체로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보고 '나체들은 거룩한 장소에 적절하지 못하며 홍등가에나 어울리는 것'이라고 혹평을 했다.

분명 성도 로마의 가장 성스런 장소에 두기에 좀 뭣한 그림이기도하고, 애초 후원자가 교황청이었기에 미켈란젤로는 이런 혹평에 대해 불만을 표할 수 없었는데, 소소한 복수(?)로 6년 반에 걸친 이 그림 제작 과정에서 4구역의 오른쪽 하단에있는 카논의 배 부분에 복수의 의미로 '지옥의 수문장 미누스'로 표현된 비아지오 다 체세나 추기경을 직접 그려놓았다.

(미누스의 귀는 당나귀귀로 표현되었는데 당나귀의 귀는 무지하다. 즉, 무뇌하단 상징이고, 성기마저 이 물고 있게 그려 인간의 성적 방종에 대한 하느님의 가혹한 심판을 보여준다. 사실상 성직자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모욕을 날려버린 셈.)

이런 미켈란젤로의 장난질에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추기경은 교황인 바오로 3세에게 그림에서 자신의 얼굴을 빼줄 것을 탄원했지만, 바오로 3세는 혹여 자기도 천사에서 악마가 되어버리는 건 아닌가 싶어 "추기경님이 연옥에만 계셨어도 제가 어떻게 해보겠는데, 지옥은 제가 어떻게 해 드릴 수 없겠습니다."라며 묵살해버렸다.

낙성식은 1541년 10월 31일. 일설에는 낙성식 당일 벽화를 본 바오로 3세가 무릎을 꿇고 "하느님, 심판의 날에 저의 죄를 묻지 말아주소서."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바오로 3세 선종 후 율리오 3세, 마르첼로 2세, 바오로 4세까지 이 성화에 대해 별 조치가 없었으나, 비오 4세 이후, 1564년 트리엔트 공의회가 로마 전례를 재정립하며, 기존 가톨릭 내에 잔재로 남은 '부적절한 풍습'을 상당부분 정리하게 되었고, 그 일환으로 천지창조도 덩달아 철거될 뻔 했다.[24]

그러나, 하느님의 진노와 공의의 심판 앞에서 인생은 구원을 구걸하는 미천한 존재란 것을 강조한 의도 만큼은 인정을 받은 것인지, 이 작품을 성화로 인정하기는 하되, 대신 재정립된 로마 전례 상 나체화를 허용하지 않기로 한 것에 따라, '비속한 부분은 모두 가려져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져 대대적인 검열 작업을 받게 되었으며,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다니엘레 다 볼테라가 그림의 인물에 옷을 그려 가리는 것으로 일단락이 된다.[25]


3.3. 건축[편집]


그는 건축가로서 감각적인 변주와 정석 모두에 능한 인물이었다. 본인의 본업은 조각이며, 건축가로서의 자신을 아마추어라고 여겼을 정도로 당대 건축의 정석을 배운 인물은 아니었지만, 워낙 미적인 센스가 뛰어나 걸작들을 남길 수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의 건축물에는 오더를 독창적으로 배치하는 식으로 참신한 파격을 보여주거나 잘 정리된 비례를 보여주는 식으로 공간을 특이하면서도 아름답게 설계했다. 그러나 단순히 파격과 변주만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인생의 후반기에선 르네상스 건축의 궁극적 야심작이었던 성 베드로 성당의 주요 설계를 했다는 점에서 한 시대를 대표하는 양식을 결정한 건축가로도 볼 수 있다.


3.3.1. 성 베드로 대성당[편집]



3.3.1.1. 미켈란젤로 이전의 상황[편집]

교황 율리오 2세는 교황청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1506년 새로운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로 결정하면서 콘스탄티누스 1세 때 세워졌던 낡은 옛 성당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사상 유례없는 대역사가 시작되면서 도나토 브라만테를 시작으로, 줄리아노 다 상갈로, 프라 조콘도, 라파엘로 산치오, 발다사레 페루치, 안토니오 다 상갈로 등 당대의 내로라 하는 건축가들이 설계에 참여했으나 공사 기간이 너무 길었기에 이들 모두 자신의 설계안이 현실에 반영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해당 건축가가 사망하면 다른 사람을 그 자리에 임명하는 방식으로 수석 건축가를 인선했기 때문에 후임자는 전임자의 설계안을 갈아엎고 자신만의 설계안으로 수정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도나토 브라만테는 성당의 평면 구조를 그리스 십자가로 설계했고 라파엘로 산치오는 브라만테의 설계안을 수정해 라틴 십자가 평면으로 바꿨으며, 발다사레 페루치는 라파엘로의 설계안을 수정해 다시 그리스 십자가 평면으로 돌아갔는데, 안토니오 다 상갈로가 전임자들의 설계안에서 이것저것 가져와 자신의 설계안에 합쳐 놓은 것이 바로 미켈란젤로가 수석 건축가로 임명된 1546년의 상황이었다.


3.3.1.2. 미켈란젤로의 설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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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면도/횡단면도
교황 비오 4세에게 성 베드로 대성당 모형을 보여주는 미켈란젤로,
도메니코 크레스티, 1618~1619년, 캔버스에 유채, 236 x 141cm,
이탈리아 피렌체 카사 부오나로티
1546년 안토니오 다 상갈로가 사망하자, 교황 바오로 3세는 70살을 넘긴 고령의 미켈란젤로에게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책임을 맡겼다. 임명 초 내키지 않아 하던 미켈란젤로는 곧 마음을 바꿔 정력적으로 공사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가 젊은 시절 로마에 왔을 때 봤던 유서 깊은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은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바란 율리오 2세의 의지 때문에 확실한 설계안도 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철거되었고, 이렇다 할 진전을 보지 못한 채 종교개혁사코 디 로마로 교황청의 위신이 곤두박질친 것과 맞물려 폐허와도 같은 풍경의 공사 현장은 가톨릭의 위기를 나타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미켈란젤로가 수석 책임자로 내정되기 10년 전인 1536년 당시 공사 현장 그림을 보면 어수선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가 보기에 안토니오 다 상갈로의 설계안은 전임자들의 안을 절충하여 융합시키느라 이도 저도 아니었고, 외벽에는 열주가 지나치게 많으며, 공간도 지나치게 나뉘어져 있던 것으로 보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이 때문에 공사 소요가 길어지며, 채광이 부족해 실내가 어두울 것이라고 보았다.

미켈란젤로가 상갈로 지휘하에 대성당 공사를 맡았던 사람들을 모조리 내쫓고, 설계에 관여하고 싶어하는 건축 위원회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할 일은 공사 비용이 도둑맞지 않게 자금을 잘 관리하는 것뿐'이라며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하자 졸지에 실업자로 전락한 상갈로파 관계자들은 "미켈란젤로가 노망이 났다"며 수석 건축가 자리에서 몰아내기 위한 공작을 벌였다. 결국 교황 바오로 3세가 나서서 "공사에 관한 모든 전권을 미켈란젤로에게 위임하고, 건축 당국은 그의 설계대로만 공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못박으면서 미켈란젤로는 전임자들이 갖지 못한 특권을 얻게 되었다. 미켈란젤로는 그 당시까지 지어져 있던 상갈로의 외벽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미켈란젤로가 젊은 시절에 살아있었던 브라만테는 미켈란젤로와 사이가 안 좋았으나, 미켈란젤로는 브라만테의 비전과 능력은 인정했다. 그래서 브라만테의 사후 이리저리 변질된 설계에 대해 미켈란젤로는 브라만테의 초안을 나름대로 살려 자신만의 스타일로 정리했다.[26] 그리고 사실 상갈로를 포함한 전임자들의 안을 다 버리지도 않았다. 필요한 부분은 남기고, 단순화시킨 뒤 자신의 뛰어난 감각으로 재구성했다. 그는 브라만테의 초안대로, 평면을 입구에서 중심까지 짧은 동선을 가질 수 있는 중앙집중적인 그리스 십자가로 회귀시켜 성당의 돔을 잘 보이게 강조하였으며 가톨릭의 야심작다운 웅장함을 잘 드러내게 바꾸었다. 중앙부를 제외한 다른 내부 공간을 나누는 구획도 전임자들의 안을 단순화해 공간을 크게 만들어 장중한 분위기를 극대화시켰다. 물론 브라만테 설계안의 지나치게 번잡한 외벽 설계 등은 버리고, 두터운 외벽들로 만들고, 평면을 기하학적으로 보다 명쾌하게 정리하여 아름답게 만들었다. 외벽에는 상갈로의 불필요한 군더더기 기둥들을 쳐내고 거대 기둥을 사용하여 장중하게 처리하였다. 돔은 외벽에 맞춰 쌍기둥들과 뼈대(리브)로 이루어지게 만들어졌는데, 이는 상갈로의 안을 단순하게 만들어 아름답게 재구성한 것에 가깝다.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에 있어서 건물 중심부에 거대한 을 얹는 것은 브라만테의 설계안 때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져온 것이었다. 그만큼 돔은 이 건물의 핵심 요소였으며 미켈란젤로도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미켈란젤로는 돔을 설계하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큰 돔이었던 피렌체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 꼭대기까지 올라가 그 구조를 파악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설계한 돔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과 유사하게 두 겹의 벽돌 외피로 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피렌체의 돔과는 다소 다르게 완전한 반구형의 돔을 설계하였으며, 16쌍의 뼈대를 돔 외각에 덧붙이고 그 아래 드럼에는 두 쌍의 기둥들을 배치했다. 그리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의 지름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보다는 살짝 작게 설계되었다.

미켈란젤로는 돔의 완공을 보지 못한 채 드럼 일부만 완성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자코모 델라 포르타가 건축가가 되어 이 돔의 공사를 이어받았으며, 완성된 돔에는 대체적으로는 미켈란젤로의 설계가 반영되었지만 구조적인 이유로 외각 돔의 높이가 몇 미터 정도 높아져 반구형의 돔에서 첨두형의 돔으로 바뀌었다. 이는 원안보다 피렌체 성당의 돔에 가까워진 것.

미켈란젤로의 설계는 현재 지어진 성 베드로 대성당의 기본 설계가 되었다. 다만 이 대성당의 정면과 신랑 등은 미켈란젤로 이후의 건축가들에 의해 변형된 것이다.


3.3.2. 캄피돌리오 광장[편집]


고대 로마 시대에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성지로 여겨졌으나 중세 이후 버려졌던 공간이다. 르네상스가 도래하면서 1537년 미켈란젤로가 이곳을 재개발하기 위해 광장의 설계를 맡았다. 그가 재개발에 참여할 당시에는 언덕에 세나토리오 궁전과 콘세르바토리 궁전(Palazzo dei Conservatori)만 있었는데 균형과 대칭을 위해 콘세르바토리 궁전 맞은편에 누오보 궁전(Palazzo Nuovo)을 세우고, 건물 3채가 자리잡으면서 생긴 광장의 형태는 사다리꼴로 잡은 후 중앙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청동 기마상을 옮겨 놨다. 광장 입구에는 포로 로마노에서 가져온 카스토르와 폴룩스 조각상을 배치했고, 전체적으로 로마 풍의 조각상들을 설치하였다. 건물에는 알베르티가 사용했던, 1층에서 2층까지 관통하는 기둥인 거대 오더(Giant order)를 사용한 것이 특기할만하다. 언덕으로 올라오는 계단인 코르도나타 계단은 위로 갈수록 폭을 넓게 만들어 아래쪽에서 보면 가파르지만 위쪽에서는 완만하게 보이는 착시 효과를 연출했다. 계단은 계단 간의 간격이 상당히 넓은데, 일설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말을 타고 캄피돌리오 광장까지 올라오도록 하기 위한 설계였다고 한다. 캄피돌리오 광장의 건물들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으로 평가받는다.


3.3.3. 기타[편집]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설계와 반구형 돔이 그의 건축가로서의 업적으로는 가장 유명하지만 그 외에도 그가 건축에 참여한 작품은 많다. 메디치 성당의 설계와 그에 딸린 조각들, 로렌치아나 도서관,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 등.

피렌체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드럼 갤러리 공사를 보고 독설을 하여 이 성당이 미완성으로 남게 만들었다.

미켈란젤로는 죽기 전에 자신이 그린 수천점의 스케치 등을 파괴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4. 사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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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ichelangelo_tomb.jpg
론다니니의 피에타, 1552~1564년, 대리석, 195cm, 밀라노 스포르체스코 성
미켈란젤로의 무덤, 피렌체 산타 크로체 대성당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 3대 거장 중 가장 장수하여 르네상스의 말기[27]까지 홀로 생존해 만 88세까지 활동했다.[28] 지금도 그정도면 꽤나 장수한 셈인데 당시 기준으로서는 상당히 오랫동안 천수를 누리다 사망한 셈.

노년에 접어들어 시력이 약해져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촉각에 의지해서 죽기 며칠 전까지 새로운 피에타[29] 작업에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그의 유언은 [[평생교육|Ancora Imparo(나는 아직도 배우고 있다)]].[30] 영어권에서는 I'm still learning이라는 이탈리아어에서 영어로 번역된 문장이 유명하다.

사후 로마에 묻혔다가 고향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대성당에 이장되었다. 이때 미켈란젤로의 유해를 로마에서 피렌체로 빼돌리기 위해 피렌체 측에서는 특공대까지 보냈다고 한다. 장례도 성대하게 치뤄져 피렌체 시민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대대적으로 장례를 치를 때 후배 예술가들이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관을 열었는데, 사후 20여일이 지났는데도 부패하지 않고 몇 시간 전에 죽은 것 같은 상태였으며 훗날 미켈란젤로의 후손인 필리포 부오나로티[31]의 요청으로 18세기에 다시금 관뚜껑을 열었을 때도 부패의 징후가 없이 온전한 시신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무덤에 새겨진 라틴어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MICHAELI ANGELO BONAROTIO
E VETVSTA SIMONIORVM FAMILIA
SCVLPTORI. PICTORI. ET ARCHITECTO
FAMA OMNIBVS NOTISSIMO.
LEONARDVS PATRVO AMANTIS. ET DE SE OPTIME MERITO
TRANSLATIS ROMA EIVS OSSIBVS. ATQVE IN HOC TEMPLO MAIOR
SVOR SEPVLCRO CONDITIS. COHORTANTE SERENISS. COSMO MED.
MAGNO HETRVRIAE DVCE. P. C.
ANN. SAL. CIƆ. IƆ. LXX
VIXIT ANN. LXXXVIII. M. XI. D. XV.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시모니의 오래된 가문의 후손
모두가 그의 작품을 알고 있는
조각가이자, 화가이자, 건축가
레오나르도가 사랑하는 삼촌에게 가장 큰 경의를 담아
로마에서 이 대성당으로 그의 뼈를 옮겨
토스카니 대공 코시모 메디치의 고요한 격려와 함께 그가 친히 조성한 무덤에 안치하다.
서력 1570년 세우다.
향년 88세에 서력 1564년 죽다.
미켈란젤로 사후에도 그 명성은 바래지 않아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시인 루도비코 아리오스토가 미켈란젤로를 가리킨 별명이 '일 디비노(Il Divino)', 바로 성스러운 이였다.


5. 사생활 및 개인사[편집]


르네상스 3대 거장의 다른 2명을 보면, 레오나르도는 기본적으로 성격이 꼬장꼬장하고 성관계를 질색하는 데다가 여자를 경멸했지만 언변이 능했고, 잘생긴 데다가 외출하거나 사람을 만날 때에는 당시로서는 나름 센스 입게 잘 차려입고 다니고 박학다식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의 호감을 쉽게 샀다. 그래서 그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주변에는 늘 그를 숭배하는 젊은 청년들이 따라다녔다.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처럼 꼬장꼬장한 면이 없이 고용주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 데다가 잘생겼고 본인 역시 여자를 좋아했기에 수많은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그 덕에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반면 미켈란젤로는 기본적으로 못생긴데다가, 본인도 자신의 외모에 관심이 전혀 없어서 길거리로 나올 때에도 작업 중 지저분해진 몰골 그대로 다녔다. 거기에 라파엘로처럼 원만한 성격도 아니고 레오나르도처럼 꼬장꼬장하긴 해도 매력적인 사람인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거만한 성격이었고, 독설을 자제하지 않아서 대인관계가 나빠 친구도 없었다. 메디치 가문에서 수학하던 시절 동문들에게 독설을 내뱉었다가 토리지아노라는 친구에게 주먹으로 코를 맞아서 코뼈가 주저앉은 적도 있었으며[32] 심지어 동문들에게 미움받아 따돌림을 당한 적도 있었다.[33] 또한 이 항목에 여러 번에 걸쳐 나오지만 윗사람이라고 예외는 없어서 비위를 맞추기는 커녕 수틀리면 교황에게도 독설을 하고 대들어서 화가 난 교황에게 얻어맞았으며 더는 일하기 싫어서 도망가는 등 위의 두 사람과 달리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천재의 이미지였다.

또한 사보나롤라와 개신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매우 금욕적이었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문학 작품이 단테신곡이라는 데에서 그의 성향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술도 거의 하지 않았고, 소식가였고 여자는 레오나르도마냥 경멸했던 데다가 부양해야 할 가족이 많아서[34] 지출이 많았지 본인의 사치를 위해서는 거의 돈을 쓰지 않았다. 교황에게 돈 안 준다고 보챈 것도 돈을 밝힌 게 아니라 율리오 2세줄 돈을 안 줘서 그런 것이다. 아무리 예술혼에 불타고 있어도 먹고는 살아야 할 것 아닌가. 특히 율리오 2세는 일 시키고 나서 미켈란젤로한테 1년이나 보수를 안 주기까지 했다. 오히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설계를 맡게 되며 자신의 전임자였던 상갈로 파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돈 욕심이 나서 그러지?' 라는 비방을 받자 무보수로 일 할 것이라 천명하기도 했다. 사실 지금 기준으로 보아도 장수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런 금욕적인 생활도 한몫 했을 것이다.

대신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예술에 쏟았고 그 때문에 그의 작품은 동시대 모든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틀어 가장 역동적이다. 기실 현재 각종 패션쇼, 사진촬영에서 모델들이 과장되면서도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하는 것[35]의 시발점은 이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 이전까지의 회화를 보면 모델들이 이렇게 인체의 역동성을 강조하는 포즈를 취한 적이 없다. 회화에 있어서 미켈란젤로의 업적을 한마디로 줄이는 것은 불가능하긴 하지만, 그가 남긴 가장 큰 의의를 꼽으라면 역시 인체의 역동성을 하나의 미학으로 발견한 것을 들 수 있다. 비단 이런 역동성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스케일이 거대하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의 스케일, 최후의 심판의 스케일과 그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미켈란젤로의 작풍을 가장 잘 설명해 준다. 그야말로 활화산과 같았던 예술인. 단순히 스케일만 큰 게 아니라, 남긴 작품도 상당히 많다.

뭐 미켈란젤로도 사람인지라 모두와 원수를 지고 산 것은 아니었다. 못생긴 외모, 괴팍한 성격, 금욕적이기까지 한 일상 생활을 가진 그였지만 인류사에서도 이름을 영원히 남길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그 실력 자체만으로도 카리스마가 있었다. 거기에 금욕적인 생활이 더해지니 어떤 사람들은 그를 마치 현자처럼 우러러 보기도 했다. 사실 바꿔 말하면 미켈란젤로는 수평적인 인간관계는 별로 없었다. 항상 그를 찍어누르고 고용하는 사람들 아니면 그를 일방적으로 숭배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극소수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항상 생활고와 건강 문제, 돈을 요구하는 가족들과의 불화 때문에 한 개인으로서는 굉장히 불행한 삶을 산 사람이다. 회고록에서는 아예 자살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6. 종합 예술인[편집]


다재다능한 천재로 추앙받는 레오나르도와 달리 미켈란젤로에게는 그러한 주목도가 좀 덜한데, 아무래도 남은 기록이 적다보니 그런 감이 없지 않다. 레오나르도와 마찬가지로 미켈란젤로 역시 다재다능했고, 이건 모든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의 특징이다.[36] 르네상스 시대 당시의 조각가들은 돌을 조각하느냐, 나무를 조각하느냐에 따라 다른 역할을 수행하곤 한다. 미켈란젤로처럼 돌 조각을 하는 조각가들은 석공으로서 건축가의 역할을 함께 수행한다. 나무조각가들은 가구제작자. 그렇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조각 작품들을 전시하는 미술관이 디자인 박물관으로서의 역할을 겸한다.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박물관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다만 그 와중에서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만큼 모든 분야에 통틀어 이 정도의 업적을 남긴 예술가는 정말 세 손가락에 꼽고 그렇기에 르네상스 3대 거장으로 불리우는 것이다. 건축에 있어서는 성 베드로 대성당[37], 회화에 있어서는 최후의 심판, 시스티나 성당, 조각에 있어서는 다비드, 피에타. 대중이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것 한두 가지만 꼽아도 이 정도다. 거기에 그의 사후 그가 흠모했던 귀족부인, 비토리아 콜론나[38]에게 써서 보냈던 시가 몇 편 발견되었는데 그것을 보면 시인으로서의 재능 역시 상당했다고 한다.[39]

다만 회화 분야에서 보면,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의 위용이 워낙 대단해서 그렇지 다른 거장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등에 비해서는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있다. 실제로 남아 있는 회화 작품이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 말고는 거의 없다시피하며, 대부분 미켈란젤로의 회화로 알고 있는 천지창조 등의 작품은 천장화 내부의 부분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또 묘사도 과도한 근육의 묘사, 의복의 투박한 선 등 자연스러움이 떨어지고 마치 사람을 덩어리진 물건처럼 표현하였던 것이 특징이다. 실제로 라파엘로와의 싸움에서도 드러나듯 미켈란젤로는 스스로를 "조각가"라고 생각하였으며, 회화에 대해서는 경멸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미켈란젤로에게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조각가는 밀가루를 뒤집어 쓴 제빵사와 다를게 없다" 라며 조각 장르를 폄하하는 발언을 하는데, 이에 미켈란젤로는 "조각은 회화를 닮을수록 불완전해지지만 회화는 조각을 닮을수록 완전해진다"라고 응수했다는 일화 또한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일화가 있는데, 미켈란젤로의 어린 시절 그는 화가를 꿈꾸었으나 돈에 집착하는 성격 때문에 기를란다요 미술공방에서 파문당하여 화가로서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이후 회화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였던 미켈란젤로는 회화에 대한 욕심은 있었으나 제대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실제로 그의 몇 안 되는 회화 중 하나인 "성 가정과 세례자 요한(성가정, Tondo Doni)"은 당시 그의 작품인지 모르고 보았던 결혼식의 하객들의 비웃음을 샀다가 반품당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1주일도 안 돼 그것이 다비드를 깎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라는 것 때문에 유명세를 타면서, 도니는 오히려 내기로 했던 돈의 2배를 내며 이를 가져가기도 했다. 또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또한 그를 엿먹이려던 경쟁자인 브라만테가 그에게 회화를 그리라고 요구할 것을 율리오 2세에게 종용한 결과로 나온 작품이었다. 이를 볼 때 그의 회화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아마 당시 예술 관련 업계에서는 대부분 알고 있었던 사실인 듯.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 그는 벽화 제작법을 그리는 동시에 공부하면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완성해냈고,[40] 그를 통해 회화 분야에서도 거장으로 남게 되었다.

유럽예술가에 대한 세간의 대접은 르네상스 시대 이전까지는 그냥 환쟁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래에도 언급하는 대로, 망한 귀족 가문이라도 귀족이라는 자부심이 있던 미켈란젤로의 아버지는, 미켈란젤로가 조각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 엄청난 반대를 했을 정도. 하지만 이후 르네상스 시대 중세 문명의 발전에 가속도가 붙고, 여러 재능들이 발굴되며 예술가의 위상이 조금씩 올라갔다.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예술가의 지위를 높이는 데 선구자적 역할을 했던 세대 중 한 명이다. 물론 미켈란젤로 혼자서 이런 일을 이룩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전 세대부터 이런 발전의 토양이 만들어져 왔지만 한 번에 과실을 맺은 것은 미켈란젤로와 이후 세대이며, 그 과정에서 미켈란젤로는 예술가 중에서는 가장 큰 영향을 발휘한 인물 중 한 명이고, 미켈란젤로만큼 예술가의 위상을 끌어올리는 데에 한몫한 예술가는 있어도 능가했다고 거론될만한 예술가를 찾기 힘들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41]


7. 대인관계[편집]



7.1. 레오나르도 다 빈치[편집]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비해선 한 세대 뒤의 인물로 젊었을 때는 대선배인 레오나르도에게 경쟁심을 불태우는 루키 포지션이었다. 레오나르도와 피렌체 베키오 궁전 벽화 대결까지 벌였던 것은 유명한 이야기. 완성되었다면 미술계의 영원한 보물이 되었겠지만 두 사람 다 완성시키지 못한다.[42] 특이하게도 이 선의의 대결에서 두 사람은 모두 서로 부담감과 특이한 호기심으로 탐색하는데 그쳤다. 실제로 몇몇 그들의 당시 스케치는 서로의 스타일을 반영해보려고 흉내낸 티가 보이기도 했다.

그 뒤에도 이 둘의 라이벌 관계가 유지되었다. 미켈란젤로는 회화를 '사람의 눈을 속이려 드는 수작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조각만 못하다.'고 깎아내렸고[43], 레오나르도는 '조각가의 모습은 마치 머리에 빵가루를 잔뜩 뒤집어쓴 제빵사 같다.'고 했다.[44]

두 사람은 나이가 스무 살이 넘게 차이가 났는데, 대선배 레오나르도를 존중할 줄 몰랐던 미켈란젤로의 싸가지와 20년이나 어린 친구의 치기를 기를 쓰고 이기려 들었던 레오나르도의 유치함이 합쳐져 저 둘은 정말 초등학생들처럼 유치하게 싸우며 살았다. 그나마 두 사람을 이해해주자면 당시 예술가라는 직업은 결국 지금의 프리랜서와 비슷한 개념이었고, 조금 더 실력이 있고 명성이 높은 쪽이 더 좋은 계약을 따내게 되어 있다. 연상에 대한 존중을 챙기거나 연하에 대한 관대함을 생각할 정도로 여유있는 처지가 아니었을 것이다.[45]

두 사람의 싸가지 & 속좁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는데, 잘생긴 외모와 언변으로 인기가 많았고 젊은 추종자를 많이 이끌고 다녔던 레오나르도에게 어느 날 광장에서 추종자 한 명이 단테의 시에 대해 모르는 걸 물어보았다. 레오나르도는 마침 그때 지나가던 미켈란젤로를 보았고 항상 패션에 신경을 쓰던 레오나르도와 달리 넝마같은 옷을 입고 대리석 가루를 뒤집어 쓴 미켈란젤로를 보자 곯려주고 싶었는지 "저 젊은 친구가 나보다 더 잘 알 거요."라고 했다.

사실 한 번 봐도 늬앙스를 이해할 수 있듯이 '쟤 한테 물어봐'라기보다 '저기 쟤 옷 입은 꼴 좀 봐. 단테를 알긴 지가 쥐뿔 알겠어?'에 가까운 놀림이었다. 그리고 위에서 나와 있듯이 로렌초 공방은 젊은 예술가들에게 높은 수준의 교양을 쌓게 했고 더군다나 단테는 미켈란젤로가 가장 좋아하는 문인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레오나르도의 추종자들은 미켈란젤로의 몰골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자기 무시하면 교황한테도 대드는 미켈란젤로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사실 레오나르도는 지뢰를 밟은 정도가 아니라 그 위에서 점프를 해 댄 셈.

당연히 미켈란젤로의 성질머리는 폭발했는데

"당신이 알려줘도 되잖소? 뭐 당신이란 인간은 밀라노에서 만들던 동상[46]

도 완성하지 못하고, 뭐든지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인간이지만!"[47]

하고 쏘아붙였다. 그리고 말하다가 화가 더 났는지 2차로 폭발해 극딜하길

"그 동상을 완성시킬 줄 알고 네놈한테 일을 맡긴 그 밀라노 놈[48]

은 천하에 둘도 없는 돌대가리야!"

라고 했다 한다. 레오나르도는 그말에 대꾸도 못하고 입만 뻐끔뻐끔 했다고. 애초에 레오나르도에게 이 따위로 말을 뱉을 수 있는 인간은 별로 없었다.

이 일화 말고도 두 사람 사이의 키배 및 분쟁에 관한 일화는 수도 없이 많다. 상기한 피렌체 베키오 궁전에서 앙기아리 전투(레오나르도) vs 카시나의 전투(미켈란젤로)로 서로 경쟁할 당시에는 사이좋게 쌍욕을 면전에서 교환할 정도로 사이가 최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레오나르도의 작업 중 니스가 녹아내려 그림이 엉망이 되었을 때 레오나르도의 안티가 그걸 보고 "영감탱이 꼴 좋게 됐군"이라고 했을 때에는 미켈란젤로가 그의 턱에 주먹을 날렸고 "너 같은 게 진정한 예술을 알기나 하느냐"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다.[49]

일례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이 성당 부벽을 장식할 '다비드'의 조각을 맡을 사람을 물색하다가 당시에는 떠오르는 신성이었던 미켈란젤로에게 그 일을 맡겼을 때 레오나르도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그나마 만들다가 망하기라도 했으면 모르겠는데 걸작이 태어났으니 분노는 2배. 위에도 써 있지만 이 다비드 상의 질이 생각보다 너무나 좋자 성당 측은 '이걸 부벽이나 장식하려고 놓는 건 낭비다' 라는 판단하에 새로운 거치 장소를 물색하고자 회의를 여는데, 이 회의에는 레오나르도 역시 끼어 있었다. 그리고 레오나르도가 '그냥 구석탱이에 처박아두죠' 라는 늬앙스로 말한 것 역시 유명한 일화. 당연히 미켈란젤로의 뇌 속에서는 레오나르도에게 영원히 떼어지지 않을 '혐' 마크가 붙어 버렸다.

하지만 동족혐오였는지 둘 사이에는 공통점도 많다. 둘 다 동성애자 의혹을 받고 있다.[50]일단 미켈란젤로는 남성의 근육미에 집착한 것도 그렇고, 평생 독신으로 산 인물인데다가 미청년들과의 편지 왕래도 있다. 물론 비토리오 콜론나라는 부인과 깊은 교류를 하기도 했으나, 비토리오 콜로나는 남성적인 여성이었다 하고, 이조차도 정신적인 교감이었지 육체 관계는 없었다. 레오나르도가 여자를 혐오했고 동성애 혐의로 피소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거기에 둘 모두 자신의 지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릴 줄 몰랐다. 레오나르도도 미켈란젤로도 교회의 허가를 받지 않고 불법으로 인체 해부를 해 댔으며 사실상 그들의 재능이 교황 등 윗줄에서 인정받고 소중히 여겨지지 않았다면 엄벌을 받았을 것이다.

미완성작이 많은 것 역시 공통점. 다만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와 비교했을 때에 완성품이 더 많기도 하다. 애초에 미켈란젤로가 미완성작이 많은 건 레오나르도처럼 하나 만드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집중을 못 해서가 아니라 젊은 시절 자신의 기력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되도 않게 계약을 많이 잡아서 그렇다. 미켈란젤로가 수락하고 완성못한 프로젝트는 율리오 2세의 영묘를 위한 40개의 조각, 12사도 조각, 카시나 전투 벽화 등이 있다. 미켈란젤로 특유의 엄청난 작품 제작 속도를 감안해도 하나에 1년이 걸린다 치면 이거 다 만드는데 53년이 걸리는 꼴.


7.2. 라파엘로 산치오[편집]


또 다른 3대 거장인 라파엘로하고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라파엘로가 처음에 먼저 경의를 표했다고 하는데, 미켈란젤로가 후배 대접은커녕 자신의 경쟁자로 생각하고 까칠하게 대하자 이후 라파엘로도 미켈란젤로를 탐탁치 않게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놓고 쌍욕까지 면전에서 나누던 레오나르도와는 달리 연하여서 그랬는지 자신을 무시하든 말든 그를 존중하기는 했다고 한다.

다만 아테네 학당에서 미켈란젤로의 얼굴을 비관론자 헤라클레이토스의 얼굴로 써먹기도 하고 여러 그림에서 미켈란젤로 화풍의 불끈불끈 근육질 캐릭들이 찌질한 모습으로 죽거나 꼴불견이 되는 모습을 넣어 미켈란젤로를 은근히 조롱하며 깠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인데 이는 과장이다. 본래 라파엘로는 선배 예술인들의 걸작을 많이 연구하고 오마주하면서 자신의 화풍을 형성하기로 유명했는데 특히 레오나르도의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와 스푸마토 기법, 미켈란젤로의 인체 묘사를 연구했으며 스승인 페루지노의 그림 구성은 거의 베끼다시피 차용한 적도 있다. 특히 미켈란젤로의 작업을 지척에서 지켜보면서 그의 인체묘사법을 연구했다.[51] 소문에 의하면 경쟁심이 강했던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가 자신의 그림을 보는 것에 신경이 쓰여 라파엘로가 그림을 못 보도록 천장화 작업시에 아예 문을 걸어잠갔다고도 하는데 미켈란젤로와 앙숙이었던 브라만테가 라파엘로에게 열쇠를 주어 은밀하게 볼 수 있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성당 천장화 제의가 들어왔을 때 처음에는 라파엘로에게 이를 맡기는게 어떻겠냐고 교황에게 간언했었고,[52]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제작 이전인 1511년 성모승천 대축일에 중간점검 차원에서 천장화를 대대적으로 공개한 적이 있음을 고려하면 소문에 불과할 것이다.

아테네 학당에서 미켈란젤로를 헤라이클레이토스의 모델로 쓴 것은 이 천장화의 공개 이후에 크게 감명을 받은 라파엘로가 추가적으로 그린 것이다. 개인적인 알력이야 어떻든 간에 다른 예술가를 자신의 작품에 등장시킨다는 것은 경의의 표시이며 생전 라파엘로의 성격을 생각해봤을 때 이는 미켈란젤로의 디스라고 보기 어렵다. 다만 미켈란젤로는 완성작 속의 자신이 외톨이처럼 있는 모습에 무척 불쾌해했었다고는 하나 생전 미켈란젤로가 주변인들에게 보여주었던 독고다이스러운 모습을 생각하면 라파엘로가 그를 헤라클레이토스로 묘사한 것은 실은 라파엘로의 관찰력이 정확했다는 뜻이다. 후에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가 그린 헤라클레이토스의 모습을 차용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를 그리기도 했다.
한번은 바티칸에서 라파엘로가 귀족들에게 에워싸여 있는 것을 본 미켈란젤로가 "귀족 도련님처럼 찬미자들에게 둘러싸여 어디를 가나?" 하고 묻자,[53] 라파엘로가 "그럼, 당신은 사형집행인처럼 혼자서 어디를 그렇게 가시나요?"라고 응수했다.
그래도 라파엘로의 뛰어난 실력은 인정했는지, 로마 산타고스티노 성당에서 의뢰해 라파엘로가 그린 프레스코화 <예언자 이사야>에 대해 주문자가 너무 비싼 값을 치렀다며 투덜거리자 성당으로 가서 그림을 보고는 "그 돈은 그림에 그려진 사람의 무릎 값밖에 되지 않는다"라며 비웃은 적도 있었다.[54] 생전에 이들의 관계야 어찌됐든 성 베드로 대성당 건립시 많은 공헌을 했던 예술가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는 현재 바티칸 뮤지엄 입구에 나란히 부조로 조각되어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8. 작품에 숨겨진 비밀[편집]


레오나르도 다 빈치다빈치 코드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아서 그렇지 미켈란젤로 역시 찾아보면 그림에 이스터 에그같이 숨겨둔 요소가 굉장히 많다. 하지만 이 중 몇몇 개는, 500년이 넘는 세월을 지나다보니 확실히 그가 숨겨둔 건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다.

당장 시스티나 천장화만 하더라도 수많은 이스터 에그 추정 요소들이 많다. 아담의 탄생으로 유명한 구획은 잘 보면 뇌의 단면도로 추정되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어깨 관절의 모습이 숨겨진 무녀의 다리, 폐와 기관지의 모습이 숨겨진 하와, 콩팥의 단면도를 나타낸 형상과 뇌의 생김새를 묘사한 목 부분 등등 찾아보면 수도 없다.[55]

물론 미켈란젤로가 '이건 이거다'라고 하고 가진 않았으니 논란이 있긴 하지만 이런 식의 인체 해부도와 유사성을 가진 구도가 굉장히 많이 나온다는 점, 그가 근육 묘사에 광기에 가까울 정도의 집착을 보여주었으며 해부를 직접 해 보지 않았으면 모를 정도로 인체에 통달해 있었다는 점 때문에 상당히 유력한 추측이다. 습작으로 그린 그림 중에는 피부를 없애고 근육을 직접 그려낸 그림도 있었다. 당시 허가받은 사람 외에 해부를 하는 것은 중죄였지만 미켈란젤로가 해부를 어떤 경로로든 했다는 것은 이제 미술학계에서도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론 당시 사회가 해부학을 금기하기는 했지만, 미켈란젤로나 다빈치 같은 경우는 허락받으면 연구용으로 정식 기증을 받아 해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더 빠르고 편하게 어둠의 경로로 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중죄처벌을 받는 경우도 빈번했다. 여담이지만, 다빈치도 이 시체 해부 때문에 재판에 회부된 적이 있다. 어떤 젊은 남자의 시체를 해부했는데, 알고 보니 유력한 귀족 자제의 시체였던 것. 당연히 그 집안은 발칵 뒤집혀서 난리가 났고, 다빈치에게도 이 불똥이 튄다.

최후의 심판에서는 이런 이스터 에그가 조금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림을 잘 보면 전체적으로 해골(다스 베이더)의 형태를 띄고 있으며, 바르톨로메오가 들고 있는 살가죽에는 미켈란젤로 본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작업이 진행되던 도중 교황청 의전관이었던 바지오 체세나 추기경예수를 비롯한 모든 유명한 성인들께서 나체로 벌거벗고 있다는 이유로 그림이 불경하다며 이 그림이 가장 어울릴 만한 장소는 창녀촌밖에 없을 것이라고 한 마디 하자, 미켈란젤로는 그를 그림 구석에 지옥의 왕 미노스로 묘사해 그려 넣어 복수했다. 이 악마 그림을 발견한 추기경은 교황 바오로 3세 앞에 엎드려 울면서 자길 지워달라고 애원했지만 바오로 3세는 "미안하네, 연옥에 있다면 내 어떻게 해보겠네만, 지옥에 있는데 내가 자넬 어떻게 구해주겠나"라면서 미켈란젤로의 승리를 선언했다. 사실 최후의 심판을 그리고자 한 취지 자체가 사코 디 로마 사건에서 입은 상처를 기억하고자 하는 감정적인 입장에서 기획된 것이니,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는 것도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시킨[56] 바오로 3세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기[57] 때문에 교황이 미사를 집전할 때 신자들의 시야로는 그의 머리가 그림의 지옥의 입구에 걸리도록 해 놨다.

추기경보다도 예술가를 선택한 교황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정말 황송한 처사를 내려주었음에도, 애초에 마음에 안 든다고 미켈란젤로는 그런 교황에게도 좋은 대접을 해주진 않았던 것이다.


9. 대중매체[편집]



  • 2008년 미국 드라마 튜더스에 2번 살짝 나왔다. 모두 바오로 3세가 등장하는 시즌 2의 장면. 하나는 벽화를 그리면서 조수들을 닦달하는 모습인데, 장발을 늘어뜨린 형색. 바오로 3세는 "괴팍하지만 천재이니 용서해 줘야 한다"며 넘어가준다. 이후 그에게 최후의 심판 그림을 의뢰했다는 언급이 나오는 것으로 끝.

  • 가면라이더 고스트에서는 르네상스 3대 예술가 중 한 명,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혼이 담긴 아이콘을 사용해 그 능력을 얻은 안마. 몸에서 뱀의 형상을 만들어내 공격할수 있다. 10년전 세상에서 다빈치 안마를 되살리기 위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강한 동경을 가진 어린 아카리를 끌고 가려다 당시 고스트 헌터로 활동하던 텐쿠지 류에게 저지당한다. 그러다 미켈란젤로 아이콘을 사용하여 안마 슈피리어 미켈란젤로로 변신해 류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하지만 텐쿠지 타케루토마리 신노스케가 뒤늦게 류를 발견했을때 류가 미켈란젤로 아이콘을 가진것으로 보아 결국 류에게 당한것으로 보인다.

  • 대항해시대 5에서는 열전 퀘스트에서 상인으로 활동하는 아이린 브라운이 고객의 의뢰에 맞춰 고객의 저택에 장식을 꾸미도록 디자인을 부탁하기 위해 피렌체에 찾아와 후원자가 되겠다고 하자 이를 수락하며, 고객의 저택에 장식할 보석을 논의해 아이린과 주인공 일행에게 호박, 산호, 공작석, 대리석 등을 가져오라고 한다. 주인공 일행, 아이린 브라운이 물건을 한가지 구할 때마다 뜬금없이 아이린을 엄마라고 부르기도 하며, 의뢰 내용에 해당하는 조각한 보석으로 장식되어 빛이 들어오는 양에 따라 색이 변하거나 모양이 다르게 변하는 꽃병처럼 장식할 수 있는 대리석상이나 아이린이 딸에게 줄 수 있게 한 대리석으로 조각한 새끼손가락 정도의 크기인 고양이를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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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바일 게임 냥코 대전쟁의 등장인물인 의 외형은 미켈란젤로의 작품들을 패러디한 것이다. 신 버튼을 클릭했을 때와 우주편 1장에서의 모습은 아담의 창조를, 우주편 2장에서의 모습은 다비드상을, 우주편 3장에서의 모습은 최후의 심판을 패러디했다. 신 말고도 고양이 브•론즈라는 레어 캐릭터의 진화형태인 예술의 고양이 스태츄라는 캐릭터는 ‘죽어가는 노예’의 모습을 패러디했다.

  • Fate/Grand Order에서는 라이벌 다 빈치의 막간 이야기에서 망령의 형상으로 등장. 다 빈치는 망령이 돼 버린 일생일대의 라이벌을 보고 안타까움을 내비치며 성불시켜준다. 다빈치는 미켈란젤로에 대해 영령의 좌에 머무르지 않아 다행이라고 표현하기 때문에 미켈란젤로는 영령이 될 수 없는것으로 보인다. 또 다빈치는 그의 다비드 상을 처음 보았을 때를 일생일대 최대의 충격으로 묘사했다. 그외에 발렌타인 데이에 그의 다비드 상 머리를 모티브로 만든 초콜릿을 선물한 다비드의 모델 본인도 있다. 다윗이 다비드 상과 닮게 디자인된건 덤.



10. 여담[편집]


  • 1530년 카를 5세의 군대에 피렌체가 침공당했을 때(가비나라 전투)에는 방위 대책 위원 중 한 명으로 뽑혀 성벽 건축을 맡기도 했다.[58] 간혹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약간 황당한 성벽을 이 때와 연결시켜 그가 방위 대책 위원으로 훌륭하진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성벽은 다른 때에 설계한 성벽이다. 오히려 임기응변으로 양가죽을 이어만든 천을 이용해 대포 공격을 막는 등 굉장히 현실적이면서도 기발한 방위대책 위원이었다. 건축공학이란 건 엄연히 전략기술에 속하며 레오나르도도 미켈란젤로도 예술 이전에 전략기술자였던 것. 하지만 어쨌든 그가 몸담은 피렌체는 결국 졌다.

  • 그의 외모에 대한 평가는 추남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큰 특징은 크게 비뚤어진 코인데, 어린 시절 공방 제자 시절에 다른 공방학생의 작품을 신랄하게 까내렸다가 분노의 수정펀치를 얻어맞고 코가 부러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로 미켈란젤로는 남을 까는 것에 대해 많이 신중해졌다나. 물론 옛날에 비해서는 말이다. 그 후 예술가로서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다시 독설이 독해졌다가 말년에 이르러서는 조금 유해진 경향이 있다.

  • 미켈란젤로의 또 다른 유별난 행동은 자신의 스케치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 남아있는 스케치들도 확실하게 미켈란젤로 것인지 알수있는 것들은 매우 적다. 위작으로 판명난 것도 굉장히 많은 편. 정확히는 모든 작품에 스케치를 하기는 했지만, 작품이 끝나고 혹은 말년에 대부분 다 모아서 불태워버렸다. 미켈란젤로의 완벽주의적인 성격상 보기에 별로 좋지 않았던가, 그런 흔적들 따위는 필요없다고 생각했던 듯 싶다. 다빈치가 스케치북과 노트를 몇 십 권이나 남겨 놓은 것에 비해 대비된다.

  • 베네치아의 화가인 티치아노 베첼리오의 그림 <다나에>을 보고 한마디 하기도 했다. "우아한 양식을 터득했고 생생한 기법을 구사하지만 데생의 기본을 배우지 않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훈련이 부족한 것 같다. 만일 그 단점만 보완한다면 완벽한 화가가 될 텐데."라고 했다. 훗날 티치아노는 당대 최고 슈퍼스타 국제화가로 성장한다. 특히 티치아노는 유럽의 군주들의 의뢰를 받고 그들의 생동감 넘치는 초상화들을 그려주고 후한 사례를 받는 등 군주와 예술가가 본격적으로 계약을 통해 미술품을 주고 받는 관례를 확립시키면서 예술가의 재정 기반을 크게 확대해놓는다. 로마를 털어버린 카를 5세 황제와 그의 콩라인 라이벌인 프랑수아 1세의 초상화까지 그릴 정도로 권력자들에게 인기 있는 사람이었으며 스페인 바로크 시대를 열어 미술사적으로는 피카소의 등장에도 영향을 미쳤다고까지 평가받는 인물. 그러나 이는 미켈란젤로가 후배 예술인의 작품에 대한 심미안이 부족했다기보다는 인체를 묘사하는 기법의 차이로 인한 이견이었다고 보면 된다. 미켈란젤로가 인체의 형태 묘사에 주력했다면 티치아노는 자유로운 색채를 표현하는 데에 능했다. 물론 티치아노는 사실적인 묘사에도 매우 능한 화가라서 그가 그린 군주들의 플레이트 갑옷을 보면 갑옷의 질감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해놨다.

  • 한 성당에서 성가정[59]을 소재로 한 그림을 의뢰한 적이 있었다. 본좌급의 실력으로 매우 잘 그려놓았지만, 요셉의 얼굴이 매우 우울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에 신부가 왜 이러냐고 물으니 미켈란젤로 曰, "친아들이 예수가 아니잖아요."

  • 미켈란젤로의 그림이나 조각에 나오는 여인들을 보면 근육미가 남다르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보면 여성마저도 남성적으로 그려놓았다. 실제 여성에게 없는 근육이 묘사되어 있기도 한데, 여기에 대해서 앞서 언급된 대로 금욕주의자라서 여자를 멀리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고, 당시에는 나체 모델이 되어줄 여성이 없기에 남자 모델을 보고 여자를 그렸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편으로 주요 의뢰주였던 성직자들을 비꼬거나 골탕먹일 속셈으로 그랬다는 주장도 있다.[60] 또 여성의 신체를 균형미가 없다고 폄하하기도 했다. 여성을 비하했다기보다 미켈란젤로 본인의 미적 감각이 남성의 신체적 미를 더 선호했다는 편으로 이해하자.[61] 미켈란젤로 본인이 남긴 로맨틱한 시를 보면 괄괄한 성격의 거장이 의외로 수줍은 면이 많았다는 걸 알 수 있다.

  • 근육에 대한 집착, 그리고 그 묘사는 너무나 뛰어났고 이 과정에서 불법으로 해부를 했다가 옥살이를 할 뻔한 기록도 남아 있다. 하지만 기실 미켈란젤로는 사실적으로 묘사를 하는 주의의 예술가는 아니었으며, 눈치채기 힘들지만 극적인 표현이나 더 나은 전달력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비율조차 희생하는 편이었다. 그의 대표작인 피에타와 다비드 상 모두 정면이나 위에서 바라보면 비율이 심히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에타 상은 성모가 예수보다 더 큰 체구를 가지고 있으며, 다비드 상은 황금 비율은 어디 팔아먹은 대두다. 이는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 보게 되는 조각상의 특성상 비율을 정확히 지켜서 만들면 오히려 위쪽에 있는 얼굴 부분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눈치채기 힘들다고 말한 것처럼, 미켈란젤로는 이를 사람들이 '이상한데?' 라고 느끼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눈을 속이는 기술이 뛰어났다. 사실 미켈란젤로가 이 기술에 뛰어났다기보다 본격적으로 이러한 기법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라고 하는 게 어울릴 듯. 그 이전의 예술가들도 이런 과장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의 스승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그림에서 느껴질 수 있듯이 의도적인 게 아니라 그냥 인체 비례를 잘 못 맞춰서 이런 경우도 있고, 도나텔로의 다비드에서처럼 앞쪽의 곡선미를 강조하다가 뒷 쪽의 사실성을 포기해 버리는 등 미켈란젤로만큼 능수능란하진 않았다. 무엇보다 미켈란젤로는 이런 과장을 통해 당대에는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던 인체의 역동성에 대한 표현을 극도로 끌어올리는 데에 성공한다. 바로 이 점이 미켈란젤로가 미술사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이기도 하다. 그 이전의 회화들 그리고 그와 동시대의 회화들을 본다면 미켈란젤로만큼 인체의 역동성을 탁월하게 잘 살린 예술가는 없다.

  • 글을 읽지 못하는 하인을 위해서 식료품 목록을 그림으로 그려서 남긴 메모가 화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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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나머지 두 명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산치오이다.[3] 미켈란젤로가 6살 때 아내와 사별 후 홀아비가 된다.[4] 그의 아버지는 굉장히 악질적 성격으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삼촌들과도 사이가 나빠 걸핏하면 다투어 형제관계가 무척이나 나빴다. 심지어 미켈란젤로가 자기 아버지를 절도죄로 직접 고소한 적이 있다![5] 사실 도메니코 기를란다요는 당시 뛰어난 화가였지만, 회화를 하는 것보다는 노는 것을 더 좋아해서 매일 미켈란젤로에게 일만 시키고 본인은 놀러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반발심에 스승이 그려놓은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들어갈 벽화 중 하나를 본인이 살짝 고쳐놓았으나 스승이 그것조차 알아채지 못하자 대단히 실망하여 도망가게 된다.[6] 로렌초 데 메디치가 떠난 이후에 이를 수정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자존심이 강했던 미켈란젤로가 한밤중에 정원에 몰래 들어가서 수정한 뒤 시치미를 떼었다는 버전도 있다. 김태권의 르네상스 미술 이야기에 관련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7] 잘 모르면 헷갈릴 수 있는데, 문서에 가보면 알겠지만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작품명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 주제이다. 물론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모든 피에타 중 가장 대표적이긴 하다.[8] 고대 조각상에는 없는 인물의 생기와 생생한 표정 변화가 있어 깨달았다고 한다. 물론 고대 조각상의 얼굴 표정이 한결같이 무표정하다는 속설은 이후〈라오콘의 군상〉이 발견되며 깨지게 되었지만.[9] 확실치 않은 정보지만, 이 성모 마리아의 얼굴이 미켈란젤로 어머니의 얼굴이라는 말이 있다.[10] 가운데를 자세히 보면 아담의 창조가 보인다.[11] 시스티나 성당은 20m가 넘고, 천장도 아마 10m대 후반은 되었을 테니 최소 건물 5층 높이는 될 법한 환경이다. 작업하다가 실수로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환경이다.[12] 만화 갤러리 페이크에서 보면 전 교도소 건물 천장에 한 죄수가 그림을 그린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여기서 천장화 작업에 대해 묘사한 것을 보면 위험도를 제외하더라도 정말 사람잡는 작업이라는게 느껴질 정도다.[13] 율리오 2세는 미켈란젤로가 한번도 그려본적 없는 그림을 그려도 엄청난 걸작을 만들 불세출의 천재라고 인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결론적으로 옳은 생각이긴 했지만.[14] 飛階, scaffolding. 천장화를 그리기 위해 설치한 사다리 같은 지지대. 한국 업계 용어에서는 주로 '아시바'로 칭함.[15] 앞의 각주에서도 설명했지만 발 삐끗하면 떨어져 죽을 수도 있는 환경이니 그야말로 죽여버린다는 협박이다. 율리오 2세의 성질머리도 정말 장난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16] 그는 이 작품의 작업 과정을 그 누구에게도 보여줄 생각이 없었다. 다만, 라파엘로는 용케 몰래 훔쳐보면서 그의 스타일을 순식간에 흡수했다.[17] 사실 이건 미술, 특히 종교 미술의 오랜 전통이다. 비슷한 것으로, 죄인을 심판하는 장소를 지키는 있는 천사 앞에 자신이 건축한 성당의 미니어처를 보여주며 선처를 사정하는 건축가 본인이 성화에 슬쩍 들어간 경우나, 하기아 소피아에 결혼 문제로 논란이 있었던 황제의 일화가 반영된 성화가 그려진 경우 등, 사족을 달은 작품들이 상당히 많다.[18]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앙기아리의 싸움"이란 주제로 그리다가 프레스코화의 마지막 건조에서 실수를 하는 바람에 물감들이 전부 녹아내리고 말았다. 미켈란젤로는 "카시나의 전투"를 그렸는데, 레오나르도가 그림을 망친 이후 미켈란젤로 본인도 다른 초청을 받아 떠나면서 결국 대결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19] 이것도 말도 안 되게, 무지막지하게 빠른 작업 속도다. 보통 화가들은 미켈란젤로가 한 구획으로 잡은 공간을 천장화가 아닌 벽화로 그리는 데에 1년에서 3년을 잡았다. 물론 미켈란젤로만 못한 퀄리티로.[20] 단, 승리의 정신 상은 율리오 2세 무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21] 정확히는 그가 고용한 란츠크네흐트 용병대. 용병대도 원래 로마까지 처들어갈 생각은 아니었다. 황제가 급료를 불성실하게 주기 전 까지는.[22] 이것은 잠들어 있다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면 내쫓기고 잔치 주인이 너흴 알아보지 않을 것이라 한 것에서 따온 듯하다. 즉, 최후의 때에도 회개하지 못한, 진정으로 선하지 못한 자는, 그때에 예수가 전혀 딴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외면할 것이라는 것이라는 강경한 표현이다.[23]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등의 잔혹한 묘사까지 잔뜩 있다.[24] 종교 개혁으로 뚜들겨 맞은 가톨릭 전체가 반성의 필요성에 크게 공감하는 바였기 때문에 로마와 연락이 거의 안 되는 외딴 곳의 성당들도 너도나도 나서서 로마 전례서를 따라 교회 일치에 나섰을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이렇게 로마 전례를 재정립한 로마 전례서를 출판하는데 1등 공신이 된것은, 바로 성경 번역본을 찍어내어 종교 개혁의 1등 공신이된 한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였다. 정보혁명을 일으킨 인쇄기가 어느 방향으로든 개혁의 선두였던 것이다.[25] 이 일로 인해 볼테라는 후대에 '기저귀 그리는 화가'라는 놀림을 당하게 되었다.[26] 한편 그는 이 과정에서 전임 설계자 상갈로 휘하의 사람들을 대거 잘라 버렸는데, 미켈란젤로와 상갈로는 생전에 사이가 절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같이 브라만테에게 대적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상갈로가 사망하기 이전에 이미 상갈로의 설계도를 보고 '구려.' 라고 평한 탓에 사이가 벌어졌다고.[27] 종교개혁은 르네상스와 시기가 상당부분 겹쳐있다. 문화와 경제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풍요가 찾아온 시기임과 동시에 한편으론 소빙하기라는 자연의 힘 앞에 영육이 모두 피폐해져가던 아이러니한 시기였다. 아니, 종교개혁 자체가 로마로 돌아가자라는 복고 운동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28] 한편,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왕의 품에서 죽고, 미켈란젤로도 편하게 자연사로 세상을 뜬것과 달리, 라파엘로만은 추운 날씨에 여인을 만나려 다니다 폐렴으로 사망. 그때 그의 나이가 37세에 불과했다.[29] 로마 론다니니 궁에 있었기 때문에 '론다니니의 피에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현재는 밀라노 스포르체스코 성에 소장.[30] '이제야 조각을 조금 알 것 같은데 죽어야 한다니….'라는 버전은 Ancora Imparo가 각색된 것이다.[31] 정확히 말하면 미켈란젤로의 동생의 후손인데, 프랑스로 건너가서 프랑스 혁명에도 가담한 사상가였다.[32] 이후 토리지아노는 로렌초의 총애를 받는 미켈란젤로를 구타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피렌체를 떠나게 된다. 다만 미켈란젤로가 심각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토리지아노에 대한 독설을 내뱉는 걸 멈추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애초에 미켈란젤로의 성미를 고려한다면 설득력이 없진 않는 대목이다.[33] 이 토리지아노라는 양반은 훗날 미켈란젤로의 죽빵을 날린 일화를 조르조 바사리에게 자랑스럽게 떠들었다고 한다. 주먹이 코에 닿는 순간 뼈와 연골이 흘러내렸다고[34] 아버지와 동생들이 걸핏하면 돈을 달라고 하니 이 때문에 스트레스를 굉장히 많이 받았다.[35] 이를 '콘트라포스토'라고 한다. 사람은 일부러 하지 않는 이상, 자연스러운 상태에선 뻣뻣하게 어깨와 골반이 평행되게 서있지는 않다. 자연스러운 포즈는 어깨와 골반의 불균형에서 가장 쉽게 드러나기 때문이며, 이 포즈 기법을 통해 묘하게 뻣뻣하고 자연스럽지 못했던 미켈란젤로 이전의 예술품들은 이 때를 기점으로 '자연스러운' 포즈, 더 나아가 과감한 포즈로까지 발전하게 된다.[36] 영어 단어 '르네상스 맨'(Renaissance man)이 팔방미인, 다재다능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통할 정도.[37] 그 외에도 캄피돌리오 광장과 같은 여러 건축물들을 설계했다. 또 다른 뛰어난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와는 사이가 안 좋았는데 미켈란젤로도 그의 재능은 인정했다. 다만 그 특유의 강마에적인 까임의 대상에 브라만테도 들어갔기에 문제였다. 당연히 브라만테는 열폭. 브라만테와 사이가 안 좋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이야기가 많다. 브라만테가 건축을 하며 이익을 남기기 위해 재료를 빼돌렸고 미켈란젤로가 이를 지적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확실한 것은 둘 다 성격은 별로였다는 것.[38] 그러나 아름답진 않고, 남성적인 면이 강했던 귀족 과부였다고 한다. 둘의 관계는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관계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녀가 죽었을 때 그는 거의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폐인이 됐다고 적혀 있다.[39] 그는 생전에 이것들을 친구들에게만 낭송하거나 혼자서 재미로 하는 정도로 했었다. 후에 그의 조카, 작은 미켈란젤로라 불리는 인물이 이 시들을 모아서 시집으로 출판한다.[40] 이러한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듯,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에서 초기에 그가 그린 부분과 후기에 그린 부분은 작화 능력에서 차이가 나타난다는 평가가 있다.[41] 미켈란젤로뿐만이 아니라, 다빈치 등 당대에 시대를 초월한 전설적인 거장들이 다수 존재했던 덕분에, 위상은 굉장히 높아졌다. 미켈란젤로는 살아있을 때 '신'이라고 불릴 지경이었고, 레오나르도는 예술가로서는 죽을 때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직접 와서 지켜봐줄 정도였다.[42] 레오나르도는 자신이 개발해서 칠한 니스의 성분 문제로 말그대로 그림이 녹아내려 버리는 등 거듭되는 실패, 미켈란젤로는 특유의 변덕스러움과 교황의 부름에 의해 끌려나갔다. 그나마 남아있던 흔적들조차 전란 중에 사라져버린다. 다만 레오나르도의 작품(앙기아리 전투)의 경우엔 라파엘로가 모사한 스케치가 남아있다. 그리고 2012년에 들어와 베키오 궁전에서 레오나르도가 그렸던 '앙기아리 전투'의 흔적이 발견되어 고고학계를 흥분 시켰다.[43] 미켈란젤로의 조각 사랑은 말년에 최후의 심판을 하기 전까지 계속 된 듯 싶다. 그의 이런 성격은 너무나 유명했기에, 시스티나 경당 천장화를 강요한 교황에게 얼마나 큰 반감을 가졌을지 상상이 간다. 그래도 말년에 그는 '조각과 회화를 서로 비교하며 우위를 가르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정했다.[44] 조각가라고 말을 하긴 했지만 사실상 평상시에도 조각하다 씻지도 않고 밖으로 나와 돌아다니는 미켈란젤로를 겨냥한 말.[45] 사실 선배 예술인에 대해 존중하지 않았던 건 레오나르도도 마찬가지였다. 산드로 보티첼리수태고지를 보고 천사가 성모를 위협하는 듯이 그렸다며 주변인들에게 그림을 저따위로 그리지 말라며 대차게 깠던건 유명한 일화다.[46] 루도비코 스포르차[47] 레오나르도는 현대 정신과ADHD 진단 기준에 전부 들어맞는다고 한다.[48] 밀라노의 영주 스포르차를 지칭한다.[49] 일본 슈에이샤에서 나온 '세계의 역사' 제8권에 실려 있는 내용.[50] 레오나르도의 경우에는 의혹 정도가 아니라 양성애자라는게 학계의 평론이다.[51] 바티칸 미술관 내에 있는 <헬리오도루스의 추방>이라는 작품을 보면 쫓겨나는 헬리오도루스의 모습은 천지창조의 아담의 신체 구도를 반전시켜놓은 것과 다름없다.[52] 이는 바사리의 말에 따른 내용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미켈란젤로는 프레스코화와 거기에 쓰이는 화구의 사용법을 전연 모른다는 구실로 그 일을 라파엘로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은밀히 그를 시기하는 자들의 농간이었으며, 특히 브라만테의 사주에 넘어간 교황의 마음만 자극할 따름이었다.'[53] 라파엘로는 매우 사교적인 성격으로 유명했고, 미켈란젤로는 그 정반대로서 유명했다.[54] 비슷한 일화는 다빈치보다도 선배격 예술가인 도나텔로도 가지고 있다. 스폰서였던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의 중개로 의뢰를 받아 청동상을 만들었는데 의뢰인이 너무 비싸다고 불평하자 '너 따위의 의뢰를 받느니 콩이나 파는 게 낫겠다'고 말하면서 청동상을 내던져버렸다. 그러고 나서야 의뢰인도 후회하고 코시모도 다시 만들어달라고 권했지만 도나텔로는 듣지도 않았다나.[55] <미켈란젤로 미술의 비밀>이란 책에서 이걸 매우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림 화질도 뛰어나고, 소소하고 재미난 이야기도 간간히 들어있다.[56]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분명 어느 정도 기쁜 마음으로 이 일에 임했다. 원래 벽에 있던 예술가의 프레스코 벽화를 구식이라고 늘 욕해왔던 그이기에, 이걸 대치하고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건 큰 기쁨을 주었을 것이다.[57] 바오로 3세는 해당 항목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듯이, 누나가 알렉산데르 6세의 애첩이어서 그 빽으로 추기경이 된 사람이었고 교황이 된 후에는 가톨릭의 보수반동화에 앞장선 사람이었다.[58] 우습게도 이 피렌체를 침공한 카를 5세와 교황은 한 편이었다. 교황은 사코 디 로마에서 로마를 털린 이후 결국 자존심을 굽히고 카를 5세와 화해해 같은 편을 먹었다. 한 마디로 이 위대한 예술가는 자신의 고용주를 배반한 셈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전투에서 피렌체가 패망하고 카를 5세가 승리해버렸기에 사형당할 수도 있었지만, 교황이 앞장서서 미켈란젤로를 그냥 용서해주고, 다시 일하라고 독려한다. 다만 이 교황도 나름대로 뒤끝은 있던지라, 과거 로마를 털었던 카를 5세에게 여전히 앙금이 있어서 그 분노를 담아 '최후의 심판'을 그리기로 하는데 그 적임을 다름 아닌 미켈란젤로에게 맡겼다.[59] 예수, 성모 마리아, 나자렛의 요셉.[60] 그니까 성직자가 지적하면 '여자 알몸을 잘 아시네요?' 같은 식으로.[61] 사실 이 같은 경향은 미켈란젤로만의 태도라고 보기 어려운 면도 있다. 미술에서 여성 누드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의외로 최근이고, 당시 '육체미'와 같은 표현들은 어디까지나 남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