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모토 시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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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게임 개발자. 現 닌텐도 대표이사 펠로우. 대표작으로는 마리오 시리즈, 젤다의 전설 시리즈, 동키콩 시리즈, 스타폭스 시리즈, 피크민 시리즈, Wii Sports, Wii Fit, 닌텐독스 등이 있다.
1984년부터 2015년까지 닌텐도 정보개발본부의 본부장직을 맡았으며, 2002년부터 2015년까지는 회사의 전무이사직을 동시에 역임하다가 이와타 사토루가 타계하고 키미시마 타츠미 사장이 부임한 해인 2015년 이후로는 닌텐도의 CTO격인 타케다 겐요와 함께 대표이사 펠로우[1] 직을 맡았고 타케다 겐요가 은퇴한 2017년부터는 현재까지 단독으로 닌텐도의 펠로우직을 역임하고 있다. 닌텐도의 사장인 후루카와 슌타로 바로 아래 자리로, 경영 부문에만 집중하는 후루카와 사장을 대신해서 크레에이티브 부문[2] 을 총괄하는 중이다.[3]
대내외적으로 비디오 게임 산업 최초의 스타 개발자로 평가되며[4] 이른바 게임계 5대 시상식[5] 의 공로상을 전부 수상한 경력이 있는 현재 유일한 게임 개발자이기도 하다. 그밖에 리카싱, 모리타 아키오, 정주영, 락시미 미탈, 안도 모모후쿠 등과 함께 2006년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아시아의 가장 위대한 기업인들' 중 한명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2. 생애[편집]
1952년 11월 16일, 일본 교토부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 평범했다고 하며 예체능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중학교 때는 농구부에 입문했다가 상급생과 사고를 친 바람에 그만두었고 만화부 동아리에서 만화가를 꿈꾸려고 했지만 주위 사람들과의 실력 차이를 느낀 바람에 좌절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경음악부에서 기타를 배웠지만 숙달되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었다.
성인이 된 이후 가나자와미술공예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6] 장난감 디자이너를 꿈꾼 미야모토 시게루는 아버지의 연줄을 이용해 1977년, 닌텐도에 취직하게 된다. 참고로 당시의 닌텐도는 화투와 트럼프 카드 외에 디즈니 보드게임, 그리고 광선총이나 유모차 문구 등 여러 가지 사업을 하는 회사였는데, 미야모토 시게루가 면접을 볼 때 가지고 간 포트폴리오의 내용은 '유아용 행어', '유원지용 기발한 시계', '아이가 3명 탈 수 있는 그네가 달린 시소' 등의 장난감들이었다.
당시 닌텐도는 전자 사격장 등 무리한 사업확장 때문에 막대한 빚을 진 채로 망해가고 있던 시절이었는데, 게다가 1차 석유파동의 후폭풍이 설상가상으로 겹치면서 신입사원을 아예 뽑지조차 않았다. 그랬는데도 미야모토가 닌텐도에 입사할 수 있었던 건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과 친구 관계였던 아버지가 특별히 소개를 해준 덕분이라고. 야마우치 사장은 친구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그를 채용하는 것을 내키지 않아했으나, 미야모토가 본인을 위해 준비된 특례면접에서 직접 만들어 가지고 간 포트폴리오 제품들을 열정적인 태도로 소개하며 적극적으로 응했던 터라 마지 못해 억지로 자리를 하나 만들어서 채용시켜주었다고 한다.
처음 맡은 일은 게임기의 외장을 색칠하는 디자이너 일. 그러다 당시 닌텐도 오브 아메리카[7] 에 급히 게임을 보낼 일이 생겨서, 사내 게임 제작 공모에서 뽀빠이 게임의 초안을 만들면서 게임 디자인에 발을 들인다.[8] 뽀빠이 게임은 라이선스 획득 실패로 뽀빠이는 배관공[9] , 올리브는 히로인, 브루투스는 고릴라로 바뀐 동키콩이라는 게임이 된다.
자기도 모르는 포텐셜이 폭발한 전형적인 일본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 당시 게임 제작이란 게 대부분 게임 프로그래머가 직접 도트 찍고 사운드 만들고 해서 내러티브 등이 아예 없었던 데 반해, 만화를 좋아하던 시게루는 동키콩을 구상할 때 종이에다가 여자를 납치해가는 킹콩을 쫓는 남자를 그리는 걸로 시작을 했고, 테마 멜로디도 기타로 직접 작곡했었다.
동키콩의 출시 이후 마리오브라더스를 포함한 여러 게임을 히트시키면서, 미야모토 시게루는 그 능력을 인정받아 요코이 군페이의 개발제1부(R&D1)로부터 독립하여 새롭게 신설된 개발제4부(R&D4)[10] 의 수장이 되어 패밀리 컴퓨터 전용 게임을 제작하게 된다. 테즈카 타카시, 콘도 코지 등 신입 사원들이 주축이 된 이 부서는 1985년 슈퍼 마리오브라더스를 만들어내었고, 북미 시장에선 아타리 쇼크 이후 무너진 비디오 게임 산업을 다시 부흥시켰을 정도로 유례없는 대흥행을 이루게 된다. 이후 젤다의 전설,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3과 같은 후속작이 연이어 히트를 치고 이 때부터 미야모토 시게루는 닌텐도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 되면서 전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현재 전체 조직 안에서 경영부문의 후루카와 슌타로 사장을 빼면 게임 개발 부문에 있어서 닌텐도의 대장이라 생각하면 된다.[11] 이미 이와타 사토루가 대표이사로 취임했을 때부터 사실상의 닌텐도의 대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나 이와타 사토루의 사망 직후에는 임시로 타케다 겐요와 함께 2인 체제가 되었으며 타케다 겐요의 은퇴 이후 현재는 단독으로 닌텐도의 펠로우직을 역임하고 있다. 닌텐도 내에서 미야모토가 내린 지시는 최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동키콩에서부터 시작한 그의 커리어는 닌텐도의 게임 개발 역사 그 자체.
특히나 그는 게임 개발뿐만 아니라 게임패드를 비롯한 하드웨어의 인터페이스적 측면에도 마찬가지로 심혈을 기울이기 때문에 슈퍼 패미컴[12] , 닌텐도 64[13] , 게임큐브[14] , 닌텐도 DS[15] , 닌텐도 Wii[16] 등등 하드웨어 제작에도 전반적인 개발이나 디자인에 참여했다. 오늘날 게임패드의 디자인을 확립시키는 데 선구적인 영향을 미친 셈. 다만 Wii U부터는 더이상 깊게 관여하고 있지 않으며 닌텐도 스위치의 경우 미야모토의 후임들인 코이즈미 요시아키와 카와모토 코우이치[17][18] 가 대신 직접 관여했다.
그의 대표작인 슈퍼 마리오와 젤다의 전설은 패미컴 시절에 창조되어 현재진행형으로 전설을 써내려가고 있다. 소위 게임계의 거장들이 자기가 만든 회사에서 쫓겨나고 판권을 빼앗기고 다시 부활하기도 하고 심지어 먹튀로 전락하고 하는 와중에서도 이 사람만큼은 세계에서 제일 잘 나가는 게임 회사의 개발 수장으로 제일 오래 해먹고 있으며 심지어 지금도 잘 나가고 있다.
다만 현재는 슈퍼 마리오 갤럭시 2를 기점으로 직접적인 게임 개발에선 물러나 있으며 2000년대 이후로는 마리오 시리즈나 젤다의 전설 시리즈 같은 작품의 검수(프로듀서)를 주로 맡고 있었으나 그것도 2017년작인 ARMS,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를 끝으로 더 이상 프로듀서로 게임 개발에 참여하는 작품은 없으며, 이후로는 전부 검수 정도로만 게임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그가 주로 맡아왔던 제너럴 프로듀서 직은 현재 닌텐도 EPD 본부장인 타카하시 신야가 맡고 있다. 즉, 이 시점부터는 완전히 게임 개발에서 손을 뗐다고 봐도 무방하다.
사실 그는 일찍이 후임들을 양성하며 닌텐도 내부개발팀의 체계를 잡아놓았기 때문에, 본인이 대표이사 펠로우로 승진한 이후에는 게임 개발을 전적으로 후임들에게 맡기고 대신에 자신은 슈퍼 마리오 애니메이션 영화나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슈퍼 닌텐도 월드 등 외부 프로젝트에 집중하고 있다. 실제로 한동안은 닌텐도 다이렉트에서 보기 어려웠으나 슈퍼 닌텐도 월드 다이렉트에서는 오랜만에 본인이 직접 단독으로 나와 다이렉트를 진행했을 정도.
회사에 엄청난 공헌을 한 개발자답게 특별 대우를 받고 있으며, 닌텐도의 전 사장 야마우치 히로시가 후임인 이와타 사토루의 후견인으로 뽑은 5명의 대표이사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연봉은 2010년까지 1억 2600만 엔 정도였으나, 2011년 닌텐도의 판매실적 저조[19] 로 삭감되었고, 이후 또 한 번 삭감되어[20] 5000만 엔 정도로 줄어들었지만 2015년에 대표이사 펠로우로 승진함과 더불어 닌텐도 스위치가 대성공을 거둔 덕분에 연봉이 다시 상승하면서 2023년 기준으로 2억 9000만 엔의 연봉을 수령하였다. #
한때 마이크로소프트가 게임계에 진출하면서 그를 닌텐도에서 재직했을 때 연봉의 10배를 주는 조건으로 스카우트[21] 하려고 했으나 미야모토는 "닌텐도엔 동료들이 있으니까 떠날 수 없다."[22][23] 라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알려져 있다. 나중에 이루어진 인터뷰에서 이유를 직접 구체적으로 밝히길, 게임 개발은 본질적으로 혼자가 아니라 마음이 맞는 이들이 뭉쳐서 해야하는 것이고 닌텐도에는 그렇게 같이 동고동락한 친구들이 있기 때문에 결국 마이크로소프트의 영입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24] 한편으로 저건 에둘러서 말한 것뿐이고 실제로는 닌텐도에서 게임을 제작하는 환경이 더 좋기 때문에 가지 않은 거라는 예측도 많다. 제시한 연봉의 10배를 연구 개발비로 쓸 수 있는 회사는 닌텐도뿐이라는 말도 있다.[25] #
서양 게임계에서도 그에 대한 평가가 높고 인기가 많다. 아타리 쇼크 이후 닌텐도를 비롯한 일본 기업의 독무대가 된 북미 콘솔 게임 시장에서 대부분의 게이머들이 그의 게임을 플레이하며 자라왔고, 그중에 개발자가 된 사람들은 그의 게임을 플레이하며 게임 개발자의 꿈을 키워왔기 때문이다. 젤다의 전설, 마리오, 동키콩 등등 전설적인 게임 시리즈의 아버지이자 그리고 현역으로도 계속해서 좋은 게임을 만드는 데 노력 중이니 평가가 높을 수밖에 없다. 단순히 평가가 높은 정도 수준이 아니라 아예 비디오 게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원탑으로 여러 매체에서 거론된다.[26] 타임지는 그를 두고 현대 비디오 게임의 아버지라 평했고 뉴욕타임즈는 비디오 게임계의 월트 디즈니라 평할 정도.
3. 어록[편집]
자세한 내용은 미야모토 시게루/어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작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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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를 쭉 보면 알겠지만 엄청난 다작왕으로, 정보개발본부의 본부장이었기 때문에 90년대까지는 웬만한 닌텐도의 게임 개발에 전부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2000년대 이후로도 참모직으로 승진하기 직전까지 참여하는 게임에 밥상 뒤집기를 시전하는 등 닌텐도 게임 다수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특히 2001년과 2005년 사이에는 "이런 게임도 미야모토 시게루가 프로듀서로 참여했나?" 싶을 정도로 많은 게임의 프로듀싱을 맡았다.
사장이 묻는다 마리오 카트 Wii 편에서 본인이 프로듀서가 아닌 '제너럴' 프로듀서라고 직함이 붙는다면 제작에 거의 관여를 하지 않는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런 작품들은 주로 디렉터나 프로듀서로부터 제작에 대한 보고를 받고, 조언을 해주는 방향으로 게임 제작에 간접적으로 관여한다.[27] 하지만 마리오 카트 Wii 같은 경우 Wii 핸들이나 Wi-Fi 통신에 관한 부분은 아주 약간 관여를 했다고 하며, 뉴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Wii 같은 경우 그토록 원했던 최초의 다인 플레이가 가능한 마리오여서 그런지 개발 현장에 오래 머물렀다는 언급이 있었다.
디렉터로 참여한 작품은 굵게 표시. 검수나 원 제작진 등 직접적으로 게임 개발에 참여하지 않은 작품은 기울임 표시.
4.1. 20세기[편집]
4.2. 21세기[편집]
이밖에도 페이퍼 마리오 스티커 스타[39] 나 별의 커비[40] , 007 골든아이[41] 등이 빠진 것을 보면 실제로는 저것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엄연히는 발매원이 닌텐도가 아닌 포켓몬 GO까지도 직접적인 관여는 아니지만 어느정도 피드백이 들어갔다고 한다.[42]
5. 개발 철학[편집]
그의 게임은 모험과 탐구를 중시한다. 그러다보니 조작성과 인터페이스를 매우 중시하고[43] 이 때문에 그의 게임은 매우 직관적이다. '저건 이렇게 해보면 될 것 같은데?' 하고 해보면 된다. 예를 들어 머리 위에 있는 발판으로 점프하기 위해서 공중에서 >궤도로 움직이려 해보면... 된다. 관성의 법칙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지만, 모험 게임의 기본조건인 게이머가 가고자 하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어야 한다라는 명제를 이만큼 적절하게 실현시킨 게임은 많지 않다.[44] 그는 게임을 제작할 때 캐릭터가 이동할 때 발생하는 마찰, 관성, 중력을 매우 섬세하게 설계하며 그가 만든 게임의 예술적인 조작감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정말 게임 속에 빠져들어간 듯한 느낌을 준다.
이렇듯 그는 게임의 조작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동시에 디자인하는 방식을 추구하는데 가령 닌텐도 64에 아날로그 스틱을 도입하면서 그 기능을 백분 활용한 슈퍼 마리오 64를 같이 만든다든지, 닌텐도 DS에 터치 스크린을 도입하면서 동시에 터치펜을 통한 심플한 조작을 특징으로 하는 닌텐독스를 기획한다든지, 혹은 닌텐도 Wii에 모션 컨트롤을 도입하면서 동시에 기존의 조작 방식을 탈피한 Wii 스포츠나 Wii Fit 같은 게임들을 내놓는다든지 등등 자신이 디자인에 참여한 하드웨어들 각각의 고유한 기능을 어떻게 게임(소프트웨어)에 자연스럽게 접목시킬 것인지에 대해 그는 본인 나름의 답안을 항상 제시해왔다.[45][46]
반대로 그는 게임이 스토리나 설정에 얽매이는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싫어하는 편이다. 이른바 '영화 같은 게임'에 대해서 그가 꾸준히 반감을 드러내왔다는 사실은 유명하기도 하고[47] , 슈퍼 마리오 20주년 기념 인터뷰에서는 마리오 시리즈가 지금처럼 규모를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마리오라는 캐릭터에 24-25세의 젊은이라는 것 외에는 이런저런 쓸데없는 설정이 없다는 점을 꼽았을 정도다.[48] # 젤다의 전설 시리즈는 탄생 당시부터 나름의 스토리를 갖추었던 만큼 지금까지도 스토리에 어느 정도 신경을 쓰고 있지만, 반대로 슈퍼 마리오 시리즈는 의도적으로 스토리를 배제시키려고 하는데, 특히 코이즈미 요시아키가 3D 마리오의 수장이 된 이후 제작된 슈퍼 마리오 선샤인과 슈퍼 마리오 갤럭시에서는 마리오를 나름 멋있어 보이게 하기 위해 연출이나 스토리를 만들었지만[49] 미야모토 시게루는 이에 대해 어느 정도 방관하면서도 마리오가 젤다처럼 되어가는 게 아니냐며 불만을 가졌다.[50] 슈퍼 마리오 갤럭시 2의 개발 때는 이건 아니다라는 것을 느끼고 결국 코이즈미와 담판을 벌여 과잉 연출을 배제하게 되었다고 하며 그 결과 갤럭시 2 이후로는 3D 마리오도 2D 마리오와 큰 차이가 없는 가벼운 스토리로 바뀌었다. 중요한 것은 위에 그의 어록에도 나와 있지만 "게임에 스토리는 필요없다"가 아니라 "스토리는 게임플레이를 중점적으로 설계한 후, 그에 어울리게끔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장이 묻는다 번역 Wired 인터뷰[51] 이는 스토리가 비교적 중시되는 편인 젤다의 전설 시리즈에도 적용되는 원칙으로서, 전작들보다 더 스토리가 강화되었다고 평가받는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조차도 핵심 게임플레이 요소를 구상하기 전까지는 스토리를 전혀 짜지 않았다고 한다. #
조작성과 마찬가지로 탐구 역시 그의 게임에서 중요한 과제다. 이는 젤다의 전설 시리즈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젤다 시리즈에서는 액자가 걸려있는데 활로 위의 줄을 쏘면 액자가 떨어진다든가 표지판을 베어버리는 게 가능하다.[52] 슈퍼 마리오 시리즈도 어릴 때의 '파이프 안에 들어가면 무엇이 나올까?'라는 생각에서 토관 안에 들어가는 것과 배관공인 주인공을 착안했다고 한다.
사운드에 대해서도 상당히 신경을 쓰는 편이다. 그가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만큼 게임의 스토리는 매번 단순하게 만듦에도 불구하고 음악의 경우는 또 그렇지 않은데, 그는 일종의 무성 영화가 그런 것처럼 게임 내에서의 음악 역시 하나의 기능을 나타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게임의 사운드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한다. 그래서 슈퍼 마리오 갤럭시 제작 당시 요코타 마히토가 오케스트라 음원을 쓰고 싶다고 했을 때 미야모토 시게루는 안 될 게 뭐가 있냐면서 흔쾌히 허락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효과음의 경우는 상당히 엄격하게 선정하는 편인데 슈퍼 마리오브라더스는 효과음에 대해 상당히 많은 미야모토의 요구 사항이 있었다고 하고, 젤다의 전설은 패미컴 디스크 시스템의 새로운 음원을 오로지 효과음에 할당했다고 하며 워프 피리의 소리를 더욱 신비롭게 했으면 좋겠다는 그의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닌텐도의 사운드 제작부서는 효과음에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그는 무성 영화와 같은 접근법으로 게임을 만들기 때문에, 사운드에 신경은 써도 더빙이나 보컬곡 같이 직접적으로 목소리가 들어가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몰론 성우 더빙이 아예 없진 않지만, 대부분 효과음 정도로 쓰이는 수준이고 그가 제작한 게임 중 직접적인 대사가 포함된 더빙이 들어간 게임은 슈퍼 마리오 선샤인,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포켓몬 스타디움, Wii Fit, 스타폭스 시리즈 같은 극소수의 게임이고 그 중에서도 스타폭스 시리즈는 슈팅 게임이라는 특성 상 화면이 바쁘므로 음성을 지원한다고 말한 바 있다. Wii Fit 역시 몸을 움직이는 피트니스 게임이기 때문에 화면을 계속 보기가 힘드므로 음성 지원이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슈퍼 마리오 선샤인과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도 정작 주인공인 마리오와 링크는 말을 하지 않는다. 보컬곡이 들어간 게임은 슈퍼 마리오 오디세이가 거의 유일하며, 노래가 있더라도 동물의 숲 시리즈의 K.K.나 스플래툰 시리즈의 시오카라즈 같이 현실 언어로 부르지 않은 노래들이 많다.
또한, 그는 항상 보편적으로 재밌는 게임을 지향한다. 본인 말로도 '만인을 위한 게임'이 자신의 지향점이라고 하는데 이는 '가족용 게임', '난이도가 낮은 게임'이 아니라 말 그대로 '만인을 위한, 만인이 만족할 수 있는' 게임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게임을 제작한다. 적어도 그가 만든 게임 중 쓰레기 게임은 없다. 품질 관리를 그만큼 잘 하는 것이다. 이처럼 완벽주의자 성미라 게임 제작 중 재미가 없으면 뒤엎고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경우가 잦은데, 보통 그런 게임일수록 더 재밌다. 자기가 기획하거나 프로듀싱하는 게임이 아니라도 뒤집는다. 별의 커비도 주문 다 받아놓은 발매 직전에 미야모토에 의해 뒤집혔다는 설이 있다. 다만 별의 커비 시리즈의 프로듀서 사쿠라이 마사히로 왈, '당시 닌텐도가 해준건 별의 커비라는 제목을 지어준 것과 롬 용량을 2배로 늘려준 것밖에 없었다'라고.
이를 팬들은 "미야모토의 밥상 뒤집기"라고 하며 미야모토가 밥상을 뒤집어 발매가 연기되면 오히려 환호한다. 2년 동안 판을 수 차례 뒤엎어서 완성했다는 젤다의 전설 시간의 오카리나가 게임사의 전설이 된 걸 봐도 그렇다. 물론 판을 뒤엎으면 제작진은 그만큼 죽어나간다. 초대 스타폭스의 핵심 개발진 중 한명이었던 딜런 커스버트는 그를 아주 약간 더 친절한 스티브 잡스라고 평했으며 메트로이드 프라임의 제작 당시 미야모토가 레트로 스튜디오에 개발 과정을 점검하러 방문하곤 했는데 올 때마다 밥상 뒤집기를 시전하여 레트로 스튜디오의 제작진은 인터뷰에서 "미야모토 시게루의 방문은 다스 베이더급의 공포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더 무서운 건 작정하고 퇴근도 거의 안 한다는 것이다. 개발이 난항을 보인다 싶으면 집에도 안 가고 현장에서 매의 눈으로 제작진을 감시한다고 한다. 젤다의 전설 황혼의 공주를 같이 작업한 아오누마 에이지는 "나이를 50살 넘게 잡수신 분이 나보다도 더 개발 현장에 오래 남아있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겨지지가 않는다." 라고 토로한 적이 있으며, 슈퍼 마리오 갤럭시를 제작한 코이즈미 요시아키의 인터뷰에 따르면 퇴근해서 집에 가서 자고 있었는데 새벽 3시에 새 아이디어가 생각났으니 당장 튀어나오라고 해서 새벽에 회사로 출근했었다고 한다.
미야모토가 기획하는 게임들은 대부분 높은 퀄리티를 유지하고 있어서 간과하기 쉽지만 그는 만인을 위한 게임을 지향하기 때문에 게임의 예술성보다도 상업성을 더 중요시 생각한다. 평론가나 게이머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을 게임[53] 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게임들을 만드는 셈이다. 당장 Wii 시리즈(Wii Sports, Wii Fit)만 보더라도 평론가 평점은 높다고 보기 힘들지만 그 참신한 컨셉 덕분에 여태까지 게임을 전혀 하지 않았던 사람들한테도 체감형 게임이라는 점을 어필할 수 있었고 그 결과 2008년에 닌텐도는 창사 이래 최고의 영업이익을 기록할 수 있었다. 상업성과 예술성은 완전히 별개의 영역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 때문인지 미야모토는 자신이 마리오 시리즈를 만들 때 마치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부모가 언제나 안심할 수 있는 게임'을 지향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만인을 위한 게임을 추구하는 그는 게임의 사회적이고 커뮤니케이션적인 측면을 늘 강조하는데 그는 여러 인터뷰에서 '게임이란 매체는 단순히 코어 게이머들만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인의 생각을 명확하게 밝힌 적이 있다. 이같은 철학을 반영한 제품들의 대표적인 예로 닌텐도 Wii와 닌텐도 DS를 들 수 있으며, 닌텐도가 슈퍼 마리오 64, 젤다의 전설 시간의 오카리나, 메트로이드 프라임 등 당대 최고의 기술력을 선보인 블록버스터 게임들을 만들어온 것과는 별개로 Wii 시리즈, 동물의 숲 시리즈, 닌텐독스 등 커뮤니케이션적 측면을 강조한 게임들을 꾸준히 내놓는 것도 그의 철학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포켓몬스터 레드·그린에 게임보이의 링크 케이블을 이용한 통신 교환 기능을 적용한 것도 커뮤니케이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야모토가 특히 강조한 부분이었다.
특히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멀티플레이 게임[54] 에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인데, 슈퍼 마리오 시리즈는 무려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3 시절부터 다인 플레이 기능을 실험했었지만 당시 성능상의 한계로 무산되었고, 대신 세컨드 파티인 HAL 연구소가 제작하는 별의 커비 슈퍼 디럭스에서는 기획서가 제출되기도 전에 제작사에 다인 플레이 기능을 꼭 넣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55] 이후로도 3D 마리오에 이르러서까지 다인 플레이 기능을 실험했지만 번번히 무산되다[56] 슈퍼 마리오 갤럭시에서는 2인 플레이 모드로 제한적으로나마 구현시켰고, 시리즈 처음으로 다인 플레이를 완전하게 구현한 뉴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Wii는 미야모토가 개발 현장에 들어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고 했을 정도로 깊이 관여했었다고 한다. 슈퍼 마리오 카트도 멀티플레이 버전의 에프제로를 목표로 만든 게임이였고, 젤다의 전설 시리즈도 4개의 검 이래로 2D 시리즈에서는 꾸준히 멀티플레이 요소를 구현시키고 있다.
그 외에도 동시기의 유명 창작자들과 가장 차별화되는 부분으로, 후임을 아주 잘 키웠다. 대개 이 나이대 일본 게임 개발자들이 자신이 감을 잃는 시점까지도 끝까지 자기가 손을 대면서 욕심을 내다가 후계자 양성도 하지 못하고 네임밸류도 갉아먹는 경우들이 비일비재한데, 닌텐도는 미야모토 시게루 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90년대 초중반에 미리 후계자들을 점지해 두고 아주 열심히 키워뒀다. 테즈카 타카시가 좋은 예인데, 그는 입사 1년차에 미야모토 시게루 옆에서 슈퍼 마리오브라더스를 같이 디자인하고 입사 2년차에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더 로스트 레벨즈, 젤다의 전설,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3의 디렉터가 되었다.
그래서 1대 개발자들이 지나간 이후 마땅한 2세가 없거나, 능력 있는 2세들이 곳곳을 방황하는 일이 잦았던 여타 일본 개발사들과는 달리 닌텐도는 테즈카 타카시, 코이즈미 요시아키, 아오누마 에이지 같은 2세 개발자들이 잘 이끌어가고 있다. 당장 슈퍼 마리오 월드만 하더라도 미야모토 시게루는 이 때부터 프로듀서 직에 있었으며 총 디렉터는 테즈카 타카시, 맵 디렉터는 콘노 히데키, 코스 디렉터는 에구치 카츠야가 맡았다. 그리고 테즈카 타카시는 훗날 슈퍼 마리오 시리즈를 필두로 한 여러 게임의 프로듀서가 되었고 콘도 히데키는 마리오 카트 시리즈의 프로듀서, 에구치 카츠야는 동물의 숲 시리즈, Wii 시리즈의 프로듀서가 되면서 2세 개발자의 계보를 잘 잇고 있다.[57]
그 외에도 사쿠라이 마사히로, 타지리 사토시[58] 같이 닌텐도와 밀접한 외부 회사들에서도 이러한 계보를 충실히 이어나가고 있으며, 심지어 미야모토 이후 2세 개발자들도 또 3세 개발자를 양성하고 있어서, 옆동네 스튜디오 지브리처럼 불행한 사고라던지, 업계의 사정이라던지 등으로 2세, 혹은 3세 개발자 중 한 두명이 개발을 접더라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닌텐도는 지금의 닌텐도를 있게 해준 요코이 군페이를 버추얼 보이의 실패 및 교통사고로 일찍 잃었던 경험이 있었고, 이와타 사토루가 사장 재직 중 타계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휘청이지 않았다.
실제로 닌텐도의 경우 '기본 틀'만 유지하면서 그 외의 변화에는 매우 관대하다는 것이 특징인데, 당장 기존의 마리오 시리즈와 이질감마저 느껴지는 슈퍼 마리오 갤럭시의 경우 아주 호평을 받고 있고, 이후 또 다시 기존의 마리오와는 뭔가 많이 다른 슈퍼 마리오 오디세이의 경우에도 최고의 작품 줌 하나로 꼽혔을 정도다. 슈퍼 마리오 갤럭시는 게임랭킹즈에서 부동의 1위를 유지 했을 정도이다.
이것은 젤다의 전설 시리즈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이 쪽은 한 게임의 역사에서 크게는 3번이나 큰 틀 자체가 뒤바뀌기도 했다. 2D와 2D 횡스크롤, 3D와 오픈월드까지. 심지어 2017년 발매한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의 경우에는 개발 초기 기획 중 하나로 '외계인의 침략' 에피소드가 진지하게 논의되기도 했을 정도라고 한다. 게다가 이 외계침략 에피소드는 말단에 가까운 개발자가 제출한 시나리오라고.
여기까지 읽었다면 느끼겠지만 그의 게임 철학은 2020년대 현재 서양 게임업계를 중심으로 개발되고 있는 AAA 게임의 흐름과 반대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AAA 게임은 영화같은 게임을 추구하며 평론가들의 평가를 중시하며 만인을 위한 게임이 아닌 매니아들을 위한 게임이라는 특징이 있다.
6. 평가[편집]
그는 비디오 게임을 사회적 혁명으로 전환시켰고 그전까지 이러한 종류의 엔터테인먼트를 접하지 못했던 인구에 이를 대중화시켰으며 (비디오 게임을) 성별, 연령, 사회적 혹은 문화적 계급에 관계없이 사람들을 한데 모이게 만들 수 있는 매체로 만들었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가족과 사회의 통합을 위한 요소로서, 그리고 참여자들에 의해 공유될 수 있고 그들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경험으로서 비디오 게임을 고안해냈다.
을 수여한 이유 (출처) (시상식 영상)
비디오 게임계의 스티븐 스필버그이자 현대 비디오 게임의 아버지.
디지털 세대의 월트 디즈니 앞에서 그보다 더 재미를 잘 아는 이는 없다.
닌텐도의 지도 정신(Guiding Spirit).
닌텐도의 가장 거대한 두뇌.
미야모토 시게루만큼 현대의 비디오 게임과 동일시되는 인물은 없다. 그의 선구적인 비전과 창의성은 완전히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분야를 만들어냈다.
오직 그 자신만이 미야모토의 진정한 경쟁자일 것이다.
— 바이스(Vice) (출처)
미야모토가 남긴 유산은 비디오 게임 업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뿐만 아니라, 다른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가장 거대한 업적을 이룬 그 어떤 사람과도 비견할 수 있다.
그가 만약 영화 제작자였다면 알프레드 히치콕이나 스티븐 스필버그처럼, 음악인이었다면 비틀즈나 베토벤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을 것이다.
닌텐도의 장인(Master artisan)이자 가장 명망 있는 프로듀서.
이와타와 미야모토는 십대들의 취미생활을 가족과 함께 하는 즐거움으로 확장시켰다.
마리오의 큰 형님.
미야모토는 지금껏 줄곧 게임 산업을 가르쳐왔다. 하지만 섬세함과 상상력의 가치, 그리고 발현의 예술(the art of emergence)[62] 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게임 산업이) 배우지 못 한 교훈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게임 산업 역시 아직 그를 가르치지 못했다. 그리고 아마도 평생 그러할 일은 없을 것이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게임을 만들었지만 사실 새로운 세상을 창조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내 롤모델이자 영웅, E3에서 직접 만난 순간 꿈을 이뤘다
— 닐 드럭만
7. 수상 이력[편집]
- 일본 문화 디자인 상 (1990)
- 제1회 일본 소프트웨어 대상 MVP (1992)
- 아사히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대상 '홈 부문 개인 상' (1996)
- AMD Award 96 'Best Producer / Director 상' (1997)
- 제5회 일본 소프트웨어 대상 MVP (1997)
- 제1회 상호예술과학원(AIAS) 명예의 전당 헌액 (1998)
- 제13회 멀티미디어 그랑프리 1998 MMCA 회장상 수상 (1998)
- 골든 조이스틱 어워드 '명예의 전당 올해의 업계인상' (2003)
- 제7회 게임 개발자 회의 공로상 (2005)
- 타임지 선정 아시아의 가장 위대한 기업인들 (2006)
- 프랑스 문예공로훈장 3등급 슈발리에 (2006)
- 제12회 AMD Award 공로상 (2007)
- 가나자와미술공예대학 영예 (2007)
- 이코노미스트 소비자 가전 부문 혁신상 (2007)
- 타임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2007)[63]
- 제1회 CEDEC AWARDS 2008 특별상 수상 (2008)
- 제1회 일본 게임 대상 경제산업대신상 (2008)
- 제3회 ELAN 어워드 비디오 게임 명예의 전당 헌액 (2009)
- 제13회 문화청 미디어 예술제 공로상 (2009)
- IGN 선정 역대 최고의 게임 개발자 1위 (2010)
- 영국 영화 텔레비전 예술 아카데미 펠로우십[64] (2010)
- 제61회 예술 선장 문부과학대신상 미디어 예술 부문 (2011)
- 아스투리아스 공상 커뮤니케이션 및 인본주의 부문 (2012)
- 일본 문화공로자 (2019)[65]
8. 기타[편집]
- 애칭은 미야혼이다. 성인 宮本에서 本만 음독으로 읽은 것. 80년대 게임업계에는 인력유출이 빈번하여 닉네임이나 별칭으로 스탭롤을 표기 하는 경우가 많았다. 미야혼도 이런것에서 비롯된 것.
- 별명으로 "마리오의 아버지", "게임계의 월트 디즈니", "게임계의 스티븐 스필버그" 등이 있다.[67][68] 이 중 스필버그와는 E3 게임쇼에서 서로 Wii 스포츠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 이명을 좋지 않게 생각한다. 인터뷰에 따르면 이유는 게임이 영화보다 못 하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69] 게임 웹진이나 리뷰에서도 미야모토를 가리키는 별명으로 다른 업계 인물을 끌어오기 보다는 그냥 게임의 신이라는 호칭을 쓰는 경우가 많다.
- 한때 미국 게이머나 게임 제작자들 사이에서 일본 게임 디렉터의 평가가 다소 박해졌던 시기가 있었으나[72] 그 시절에도 미야모토 시게루의 명성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2017년 이후 게임시장의 주도권이 다시 일본에게 넘어가자 미야모토 시게루 뿐만이 아니라 아오누마 에이지, 사쿠라이 마사히로, 츠지모토 료조, 코지마 히데오, 미야자키 히데타카 등 기존의 유명한 일본 제작자들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 아래는 시게루 하면 유명한 영상 중 하나. 2004년 E3에서 젤다의 전설 황혼의 공주를 발표한 뒤 직접 링크의 칼과 방패를 들고 휘둘러 엄청난 환호성을 이끌어냈다. 이 장면은 워낙 유명해서 이후 E3 시즌이 돌아올 때마다 역대 명장면 중 하나로 꼭 나오기도 한다. 1분 이후부터
- 개발자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아 전 세계 게임 개발자를 대상으로 자신들의 영웅을 뽑는 설문 조사에서 30%의 득표로 1등을 한 적이 있다. 2등은 존 카멕, 3등은 윌 라이트. 게임 철학에 있어서 반대 방향이라 할 수 있는 닌자 가이덴의 이타가키 토모노부마저도 인터뷰에서 젤다빠임을 인증했다. 실제로 닌가 1의 퍼즐들은 젤다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 포켓몬스터 1세대 게임과 일본판 포켓몬스터 애니메이션 시리즈에서 주인공 레드/사토시(한지우)의 라이벌인 그린/시게루(오바람)의 모델이다. 이는 자신의 이름을 주인공에게 차용한 타지리 사토시가 지은 것으로, 말 그대로 동경할 수밖에 없는 라이벌이라는 의미와 상통한다. 극중 두 캐릭터의 관계와 매우 흡사. 실제로 타지리 사토시는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포켓몬스터는 미야모토 씨가 지금까지 만든 그 어떤 게임보다도 유명해졌는데, 이를 청출어람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질문을 받자 "절대로 아니다. 포켓몬스터는 미야모토 씨의 조언들을 참고하여 만들어졌으며 그는 언제나 나의 멘토이자 롤 모델이다." 라고 말하며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엄연히 미야모토는 포켓몬스터 시리즈의 첫 작품인 포켓몬스터 레드·그린의 프로듀서 직책으로 개발에 참여했으며, 통신 기능의 측면에서 조언을 주었다고 한다.
- 테트리스가 전세계적으로 유행하는 데 직간접적인 도움을 주었는데, 테트리스의 닌텐도 발매를 위한 계약을 협상할 당시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테트리스가 과연 성공할 만한 게임인지 미야모토에게 답을 물었고 미야모토는 '회사 직원들이 전부 테트리스에 빠져 있는 것을 보면 괜찮은 게임인 거 같다' 라고 대답하여 야마우치 사장을 설득하였다. 이후 테트리스는 닌텐도의 지원을 받아 패미컴과 게임보이로 출시되어 글로벌 히트작이 되었고, 닌텐도 테트리스라는 최초로 공식 라이선스를 받은 테트리스 제품군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 #
- 2012년 4월 17일에 열린 기자 간담회에 참석하기 위해 처음으로 내한했다. 개그맨 안상태와 닮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수 년 전 루리웹의 한 용자가 교토 구석 닌텐도 본사를 쳐들어갔다가 우연히 그를 직접 만나 사진찍고 사인받은 것을 올렸다. 수수한 차림에 일수가방을 들었다. 웃음과 포즈에서 숨길 수 없는 본좌의 여유가 나온다.
- 1992년, 현재는 폐간된 잡지인 <패밀리 컴퓨터 매거진>에서 미야모토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대담을 수록한 적이 있다. 붉은 돼지에 대한 감상평으로부터 시작되어 비디오 게임과 영화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제시하는 모습이 흥미로운 부분. 인터뷰 번역
- 이와타 사토루에 대해 회고한 책 《이와타씨에게 묻다》중 이토이 시게사토와 미야모토의 인터뷰도 포함되었는데 미야모토는 그에 대해 '무엇보다도 가장 소중한 친구'였으며 '절대로 그가 나의 상사처럼 느껴지거나 내가 그의 밑에서 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던 적은 없었다'고 하면서 그를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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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젤다의 전설 스카이워드 소드 발매 기념 25문답을 한 적도 있다.
- 2014년 5월 3일에 출제된 SAT에서 그의 일생에 관한 문단과 문제가 출제되었다.
-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개발 당시 최종보스의 이름을 강렬해보이는 이름을 붙이려고 개발진들이 의논할 때 누군가 무심결에 고깃집에서 국밥을 먹고 싶다고 말했는데, 이를 들은 미야모토 시게루는 국밥의 일본어 발음인 'クッパ'를 듣고 강렬하고 멋진 이름이라고 느껴 이름을 쿠파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고깃집 언급을 했기에 고기 요리라고 여겼다가 나중에 그냥 국에다 밥을 말아먹는 음식임을 알았다고 한다. 그래도 어감 자체는 좋아서 그대로 쿠파로 결정했다. 2012년 4월 17일 그가 방한했을 때 직접 언급한 이야기다. 일본어판 언사이클로피디아도 이 일화가 잘 알려졌는지 쿠파는 한국에서 요리재료로 쓰인다는 말이 적혀있다.
- 게임큐브 시절을 스스로 공식적인 흑역사로 인정했다. 이 시기 미야모토는 각종 기자 회견이나 게임 행사에서 게임큐브로 독점 발매를 결정한 일본 대형 서드 파티 회사의 기획자들(대표적으로 미카미 신지, 코지마 히데오) 혹은 임원진들과 직접 만나 악수를 하거나 격려를 해줄 정도로 크게 신경을 썼지만 결국 서드파티들 대부분이 게임큐브에서의 부진한 판매량을 견디지 못해 떠나게 되었다. 거기에 게임큐브의 총 판매량도 2,175만 대로 전세대 기종인 닌텐도 64의 총 판매량 3,293만 대에 미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같은 6세대 게임기 경쟁기기이자 게임기 시장에는 처음으로 진출을 시도한 마이크로소프트의 Xbox의 총 판매량 2,400만 대에도 패하는 등 충분히 닌텐도 입장에서는 굉장히 굴욕적인 시기였기 때문에 미야모토가 게임큐브를 흑역사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인터뷰에 따르면 게임큐브가 실패한 이유는 성능에 대한 집착과 더불어 다른 회사들과 같은 방향으로 경쟁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그후에 절치부심하여 고안해낸 것이 바로 닌텐도 DS다. 야마우치 히로시가 처음 듀얼 스크린의 아이디어를 냈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미야모토가 나중에 터치스크린의 아이디어를 추가시켰다.
- Wii U에 이어 NX의 개발에도 참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하드웨어보다는 게임 개발 자체에 주력하고 싶다고.
- 젤다의 전설 시리즈는 그가 어릴 적 뒷산 동굴 탐험과 집의 미닫이문들 사이에서 놀던 경험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 다른 회사의 게임에 대해 잘 언급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포탈과 마인크래프트는 인터뷰 중에 놀라운 게임이라고 호평한 적이 있다. 특히 마인크래프트에 대해서는 닌텐도가 만들었어야 했던 게임처럼 느껴졌다고 말한 바 있다. 참고로 닌텐도도 N64 시절에 비슷한 컨셉을 실험해 봤지만 실제 발매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런 실험적 컨셉이 나중에 마인크래프트라는 완성품으로 출시된 것을 보고 매우 인상깊었다고. 그 외에 스페이스 인베이더, 팩맨, 심시티, 테트리스, 포켓몬 GO 등에도 호평을 하였다.
-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인디아나 존스라고 한다. 젤다의 전설의 개발도 이 영화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되었다고. 영화 자체가 액션 어드벤처물의 교과서격인 영화인데다 탐험의 요소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그의 성격을 생각해봤을 때 어떻게 보면 당연해 보이기도 하다.
- 한 인터뷰에서 디즈니의 미키 마우스(TV 시리즈)에 슈퍼 마리오브라더스의 레퍼런스가 등장한 것에 대해 소감이 어떤지 질문받았는데 그 자리에서 처음 영상을 본 그는 "이거 저작권 문제에 걸리는 거 아니에요?(웃음)"라며 유머러스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또 미키 마우스가 향후 그의 게임에 등장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고개를 저으면서 '그들은 매우 엄격해요.(웃음)'라고 말하는 건 덤.
- 닌텐도가 캐주얼 게임에 집중하는 이유에 대해 2007년 GDC 강연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가 보기에 게임 산업의 규모가 점점 커지는 것과는 반대로 시장이 코어 게이머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폐쇄성이 심해지고 산업을 바라보는 대중의 인식은 나날이 부정적으로 변하고 있음이 명백해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게임인구의 확대'라는 목표가 설정되었고 그는 자신의 아내가 어느정도 흥미를 가지는지를 게임의 접근성을 평가하는 척도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아내는 본인이 생각할 때 당연히 재밌게 즐길 것이라 보았던 테트리스는 물론, 딸이 즐기고 있던 시간의 오카리나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동물의 숲에는 조금씩 관심을 보이더니 자신이 제작한 닌텐독스의 경우 먼저 말을 꺼내기 시작했으며 두뇌 트레이닝에 이르러 그녀도 진심으로 게임을 즐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기사[81]
- 2019년 초 주주들과의 문답에서 더 많은 개발자들을 고용해 닌텐도 스위치의 게임 라인업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필요성이 느껴진다는 지적을 받은 것에 대해 그는 개발팀의 규모 확대는 반드시 게임의 퀄리티를 유지할 수 있는 선에서 이루어져야함을 강조하면서도 자신도 직원들의 수를 늘리라는 요구가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만 닌텐도는 단순히 더 많은 개발자를 뽑는 데 집중하는 대신 회사에 적합한 개발자를 길러내는 데 더 집중한다고 대답했다.
- 2004년 BBC에서 제작한 'Outrageous Fortunes'라는 다큐멘터리에서 '사장인 야마우치 히로시는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는데 본인은 모든 저작권료를 몰수당하고 그저 월급쟁이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정말 말도 안 되는 거 아닌가요?'[82] 는 리포터의 질문에 그는 자신이 추진하는 프로젝트들에 본인이 원하는 만큼의 충분한 돈을 지원받고 있으니 상관없다고 답한 적이 있다. 본인을 야마우치의 자식과도 같다고 표현한 건 덤.[83]
“그렇게 평가해줘 기쁘다. 하드웨어 설계는 축적된 경험이 있어야 하지만, 소프트웨어는 세상을 넓고 깊게 보고 사용자를 이해하는 능력이 있으면 단기간에 히트작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이게 소프트웨어의 매력이다. 한국도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하다.”라고 국내 게임산업에 대해 덕담을 해주었다.
- 더 머펫 쇼의 팬이라 하며 그 덕분인지 2015년 E3 당시 닌텐도에서 미야모토와 이와타 사토루, 그리고 레지 피서메이의 모습을 본뜬 머펫이 나오는 인형극을 선보이기도 했다. 후에 이 인형들이 어디서 제작되었는지 밝혀졌는데 다름 아니라 짐 헨슨 스튜디오에 닌텐도가 직접 의뢰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아래는 미야모토와 테즈카 타카시가 직접 스튜디오를 방문해 비하인드 스토리를 얘기하는 영상인데 인터뷰에 따르면 미야모토는 짐 헨슨을 존경하기는 했지만 그와 같은 인형사보다도 인형을 직접 제작하는 사람이 되는 게 어렸을 적 본인의 꿈이었다고 밝혔다.
- 최근 들어 닌텐도가 VR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 중이라고는 하는데 본인은 VR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 이유로 VR 게임이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만든다'는 닌텐도의 모토에 어긋난다는 점을 들었다. 그가 만든 게임들로부터 부분적으로 영감을 받아 하프라이프 알릭스라는 VR 대작 게임이 탄생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부분. #
- 애플의 아이폰 7 공개 이벤트 당시 슈퍼 마리오 런을 발표하기 위해 깜짝 등장하기도 했다. 이후 사업 차 일본에 방문한 팀 쿡은 닌텐도 사내에서 미야모토, 그리고 테즈카 타카시와 함께 찍은 사진을 트위터에 올리기도 했다. #
- 2016년 12월 7일, 슈퍼 마리오 런의 홍보 차 지미 팰런의 투나잇 쇼에 깜짝 출연해 게임을 시연한 이후 더 루츠와 함께 슈퍼 마리오 테마곡을 기타로 연주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날은 레지 피서메이가 공동 게스트로 출연하여 정식 발매를 앞두고 있던 닌텐도 스위치를 팰런과 함께 세계 최초로 시연하기도 했다.
- 2020년 12월 18일, 닌텐도 다이렉트에 단독으로 등장하여 이듬해 개장 예정인 유니버설 스튜디오 재팬의 슈퍼 닌텐도 월드를 소개하였다.
- 참고로 그는 데이비드 존스[84] 의 '바디 하베스트'라는 게임이 닌텐도의 투자를 받아 N64용으로 개발이 진행되고 있을 때 폭력성 때문에 가족용 게임으론 어울리지 않다고 거절했고 수정을 요구했으나, 존스도 거절했고 결국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아 데이비드 존스와 DMA 디자인은 닌텐도와의 퍼블리싱 계약을 파기하게 되었다. 후에 존스는 락스타 게임즈의 창업자 하우저 형제를 만나 GTA 2를 기획하게 되고 이 게임을 마지막으로 DMA 디자인을 떠났다.
- E3 2018의 유비소프트 컨퍼런스에서 유비소프트의 신작인 '스타 링크'가 발표되었는데, 발표회 도중 스타폭스 시리즈와의 콜라보가 발표됨과 동시에 시게루 본인이 깜짝 등장해서 스타 링크 제작진들로부터 모형을 선물받았다. 다만 닌텐도 컨퍼런스가 아니라 유비소프트 컨퍼런스였으며, 정식으로 나온 게 아니라 깜짝 등장이어서 그랬는지 시게루에게 마이크도 쥐어지지 않았고, 통역도 나오지 않아서 서로 인사만 하고 돌아갔다.
- 과거 한 블로거(백금기사)가 그에 대한 미담을 올린 적이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고 꽤 감동적인 일화이지만 일본어 원문의 출처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게 흠. 지금은 블로그 자체가 삭제되어 스크랩된 글밖에 남아있지 않다. #
- 2020 도쿄 올림픽의 개막식을 준비하는 데 관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원래는 개막식 때 슈퍼 마리오 시리즈의 캐릭터들이 등장해 경기 종목을 소개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원작자인 그 역시 개막식의 준비 과정에 참여하였으나, 준비 도중에 올림픽 홍보의 총책임사인 덴츠 측이 기존의 계획을 엎어버리면서 닌텐도 측에서도 올림픽에서 완전히 손을 떼버렸다는 후문이 있다. #
- 한 트위터 유저에 의해, 그의 역대 모든 인터뷰들을 한곳에 모은 아카이브 사이트가 개설되었다. #
9. 외부 링크[편집]
- 네이버캐스트 - 미야모토 시게루
- '사장님이 묻는다' 미야모토 시게루 편
- '겜프의 게임 이야기' 미야모토 시게루 편
- '더게임툰' 미야모토 시게루 1편
- '더게임툰' 미야모토 시게루 2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