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모토 무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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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iyamoto_Musashi_Self-Portrait.jpg
미야모토 무사시의 초상화

宮本武蔵

(1584년? ~ 1645년 6월 13일)

1. 개요
2. 간류지마(巖流島)
4. 예술가로서의 일면
5. 허구성과 과대 평가
6. 기타
7. 대중문화 속의 무사시


1. 개요[편집]


일본의 유명한 검호로 두 자루 칼을 쓰는 니텐이치류(二天一流)시조다. 간류섬에서 사사키 코지로와 겨룬 이야기로 유명하다. 소설,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 각종 대중문화 매체에서 수없이 등장해 대중에게 친숙한 인물이기도 하다.

오륜서에서 무사시가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60여 회 실전을 치렀다고 한다. 이 시절에는 아직 대결에서 호구와 죽도가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실전이란 목검이나 진검으로 싸워서 둘 중 하나가 머리가 터지거나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혹은 죽어야 끝나는 혹독한 승부를 뜻한다. 만약 이런 것을 실제로 60회나 한 번도 지지 않았다면 대단한 실력가였을 것이다. (자칭이긴 하지만) 일단 이 실전이라 할 승부가 진짜라고 가정한다면, 그 횟수는 일본 검사 중에 최다이다.

당시 일본의 한 검술가는 "무사시의 검술은 귀신의 검술이며, 다른 사람이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미야모토 무사시에게서 나온 유파로 엔메이류(円明流), 니텐이치류(二天一流)와 분파인 니텐류(二天流)가 존재했으며, 엔메이류는 젊었을 때 자기 검술을 자처하고 다닐 적에 쓰던 이름이고, 니텐이치류는 늙어서 다시 정리해서 세운 유파이다. 엔메이류는 계보가 끊어지고 관류등에 일부 남아있지만 니텐이치류는 아직 계승되고 있다. 니텐류도 계승자가 있으나 대외적으로 활동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왼손잡이라서 후학을 길러내지 못 했다는 설도 있다.

이도류로 유명한 무사시지만, 말년에 저술한 오륜서를 살펴보면 '니텐이치류는 긴 대도로도 이기고, 짧은 소도로도 이긴다. 따라서 대도의 길이를 이렇다 저렇다 정하지 않고, 어떠한 무기로도 이길 수 있다는 정신이 니텐이치류의 도인 것이다'는 내용이 있으며, '병법에서는 무기의 효용을 알아야 한다'라는 식으로 서술하는 것으로 보아 니텐이치류는 이도류를 고집하기보다는 상황과 상대에 맞춰 무기를 사용한다는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게 올바르다. 오륜서의 땅의 서에 보면 각 무기가 쓸모있는 상황과 장소를 써 놓는다. 예로 창과 나기나타는 넓은 곳에서 강하지만 좁은 곳에서 불리하다든가, 단도는 좁은 곳에서 유리하다든가.

1584년생이 정확하다면 임진왜란 당시 그의 나이는 고작 8세라 임진왜란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검호라는 면에서 검술이나 검도에 관심이 있는 마니아들에게 거부감 없이 상당한 인기를 누린 인물이기도 하다.


2. 간류지마(巖流島)[편집]


파일:attachment/miyamotomusashi.jpg

간류지마(巖流島)의 결투. 공중에서 목검을 내려치고 있는 사람이 미야모토 무사시, 밑에 있는 사람이 사사키 코지로다. 다만 이 그림처럼 간류지마의 결투에서 무사시가 목검 두 자루를 쓰는 식으로 묘사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커다란 목도 한 자루만 사용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후술할 무공전에서의 서술에 기반한다.

미야모토 무사시와 간류(사사키 코지로)의 대결로 유명한 간류지마(巖流島)는 실제로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앞바다에 있는 섬인데, 간류지마에서의 결투 역시 실제로 존재는 했었던 것으로 보이나 그 과정은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무공전[1]에 따르면 미야모토 무사시는 승부의 시간을 알리는 파발꾼이 계속 와도 늦잠을 자다가, 일어나서 천천히 아침밥을 먹고서는, 유유자적 노를 깎아 목도를 만든 후에야 비로소 결투장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칼집을 버렸으니 넌 진거나 다름없다'라는 패기를 시전하고는 간류를 패죽였다고 한다.

한편 동시대의 부젠국(豊前国)의 고쿠라번(小倉藩:당시에는 호소카와(細川)씨)가문의 장로, 모지성(門司城) 성주대리 누마타 노부모토(沼田延元)의 문서『누마타가기(沼田家記)』의 기록은 이것과는 조금 다르다. 여기에서는 무사시와 간류의 제자 사이에 어느 쪽의 병법이 더 우위인가 언쟁을 벌이다 사부 간의 대결로 우위를 가리자로 결판나서 무사시와 간류가 맞붙게 되었는데, 간류가 결투에서 패배한 후에 무사시의 제자들에게 살해되었다고 적혀있다.

누마타가기는 전국 시대의 실존 가문인 누마타가(沼田家)에 관한 기록이므로 그 신빙성은 비교적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간류지마 결투와 간류(사사키 코지로)의 실존에 대해 중요한 증거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을 따른다면 의문스러운 점이 엄연히 일대일 결투에서 간류는 혼자 나타난 데 반해 미야모토 무사시는 혼자 오지 않고 제자들이 같이 왔다는 점, 스승이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제자들이 간류를 죽일 충분한 이유가 없다는 점, 게다가 미야모토 무사시가 승자임에도 불구하고 섬의 이름이 간류지마가 되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차라리 승자의 이름을 딴 무사시지마가 되었다면 더 납득이 갔을 수도 있다.

이에 관해서 간류지마가 있는 시모노세키 지방에는 한 가지 색다른 일화가 전승되고 있다.

"무사시는 제자를 여러 명 거느리고 먼저 후나지마로 건너갔습니다. 다수에 혼자, 혼자서는 당해낼 수 없습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그러나 간류는 이렇게 말하며 억지로 후나지마로 건너갔다.
"무사는 두 번 말하지 않는다. 굳게 약속한 이상, 오늘 건너가지 않는 것은 무사의 수치, 만약 다수로서 나를 치려 한다면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무사시다."
어부가 말했던 대로 무사시의 제자 4명이 가세해, 마침내 간류를 죽였다. 그러나 간류를 말렸던 어부들이 간류의 의로운 마음에 감동해 묘를 세웠고, 지금처럼 간류섬이라 부르게 되었다.

어느 쪽이 사실이든 정확한 진위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느 정도 의심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3. 오륜서[편집]


무사시가 검술가라기보다는 전술가에 가까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분명 무사시가 남긴 병법서 오륜서는 현대에도 교본으로 통하는 명저이긴 하다. "천千일의 연습을 단이라 하고, 만萬일의 연습을 련이라 한다. 이 단련이 있어야 만이 승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문구 등을 보면 현시대에도 배울 만한 점이 많이 있다. 그러나 병법서라고 해서 무사시를 손자(손무), 오자 같은 병법가로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가 말하는 병법은 일본에선 군략(軍略)이라고 한다. '군략'이라는 단어 자체는 일본식 한자어가 아니고 한국과 중국에서도 쓰인 한자어다. 그리고 일본에서 병법兵法이란 통상 무구 즉, 병기를 다루는 기술이다. 오륜서를 살펴보면 무사시는 병법이라는 용어를 이 둘을 포괄하는 의미로써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무사시가 무술가가 아닌 전술가에 가까웠다는 주장은 아예 틀린 것이고, 검술가이면서 전술이나 군략도 염두에 뒀다는 지적이 적절하다.

이러한 오류가 생긴 것은 무사시 시대 즉, 에도 막부 초기의 시대상을 간과한데서 생겨난다. 일본의 병법은 철저히 무사계급에만 한정된 것이며, 개인으로 봐서는 무예가인 사무라이가 전쟁에 임하여서는 중급 내지 상급 지휘자로 전투를 지휘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개 병기의 운용법인 무예를 넓은 의미를 아울러 병가兵家의 전반을 아울러 생각하여 병법이라 부르게 된 것은 당시 시대상을 고려해볼 때 자연스러운 단어 의미의 확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야모토 무사시의 시대에 이르게 되면 세키가하라 전투를 끝으로 더 이상 대규모의 항쟁 즉, 무사인 병법가가 군대를 지휘하여 싸우는 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고로 전쟁 전반을 아우르던 병법이 이제는 일개 개인의 수신修身의 방도로 전용되는 것이다. 바로 이 고민이 오륜서에 나타난다. 즉,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방략인 병법이 어떻게 개인의 단련을 위주로 하는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수신서로 귀결되느냐를 보여줌으로써 이제는 전쟁터가 아닌 도장에서 칼을 휘두르는 무사의 신분 변화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4. 예술가로서의 일면[편집]


검객뿐만 아니라 화가나 예술가로도 유명하여, 무사다운 패기가 넘치는 직선적인 그림체로 일본 미술계에서는 '니텐(이천)'이라 불리며 추앙받고 있다. 수묵화를 잘 그렸으며 그림이 장기였다고 한다. 불상을 조각했다는 말도 있다. 특히 유명한게 본인의 자화상으로, 유명한 검도가들이 칭찬한 일화가 있다.


5. 허구성과 과대 평가[편집]


미야모토 무사시/허구성 논란


6. 기타[편집]


  • 일본에는 미야모토 무사시와 츠카하라 보쿠덴이 싸운 적이 있다는 일화가 있고 그 일화를 다룬 그림도 존재하지만 실제로 이 2명은 아예 태어난 시대가 다른 인물이다. 보쿠덴은 1489년에 태어나 1571년에 죽었고 무사시는 오륜서 내용 기준으로 1584년에 태어나 1645년에 지바성 저택에서 죽었다. 참고로 그냥 늙어 죽었다.

  • 시구루이의 저자 야마구치 타카유키는 무사시의 성공 비결은 오륜서 등의 저술 활동으로 자기 PR에 힘쓴 점이라고 애둘러 꼬집은 바 있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 이름 없이 스러져간 여타 검객들에 비해 그 점에서 유독 뛰어났다는 이야기다.


  • 무사시의 실력을 현대 검도 기준으로 분석해 보니, 강삼약사-3단을 주자니 강하고 4단을 주자니 약하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그 이유는 거구였기 때문에 검술보다 체격으로 이긴 점이 많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있다. 하지만 사진 한 장 없는 인물의 체격과 실력을 논한다는 점에서 영 신뢰성이 없다. 게다가 이 분석은 무사시가 실전에서 이도류를 사용했다는 가정 하의 분석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무사시가 실전에서 정말로 이도류를 사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이런 이유로 이건 그냥 흥밋거리로 생각하면 된다. 다만 무사시 명성에 비해서 3단이면 짜게 준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현대 검도는 룰이 까다롭기 때문에 검술 실력과 별개로 검도에 대한 적응을 해야 된다. 그래서 막말에 죽도를 사용하지 않은 유파의 검사들이 죽도대련을 죽을 쓴 경우가 많다. 그런걸 감안하면 3단이라고 하면 정말 잘 쳐준 것이다. 그리고 검도 스포츠의 대결이 아닌 진검승부라면 또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죽도로 하는 '시합'에 강하다는 게 목숨을 건 진검승부에서도 통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 평생 아내는 없었으나 동정은 아니었고, 요시와라 유곽의 단골 손님이었다는 말이 있다. 요시와라 유곽의 개조인 쇼지 진에몬이 기록한 세이로렌키코나 도보코엔 등의 기록에 의하면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나기 전까지도 유곽에서 쿠모이라는 유녀와 친하게 지내며 출진 전에 자신의 깃발, 사시모노를 만들게 하고, 유곽의 주인들인 나미키 산노조 등을 제자로 들였다고 한다. 이 기록들에 따른다면 간류지마 이후 정작 에도 외곽까지 가서는, 에도의 강력한 유파들을 상대로 검술 대결은 안하고 유곽에서 세월을 탕진한 것이다.


  • 그 외에도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를 시해한 낭인이 무사시의 자손이라는 루머가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무사시는 미야모토 이오리라는 양자만 있었을 뿐 친자식은 없었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후손은 이 미야모토 이오리의 자손이다.

  • 고바우 영감김성환은 무사시가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평생을 보낸 원인이 무사시 본인이 자초한 것이라고 보았다. 실력이 없진 않았지만 실제보다 명성이 더 높아 무사시를 죽이면 천하제일이 된다는 소문이 퍼져 전국의 어중이떠중이 검객들이 무사시의 목을 노리느라 혈안이 되었고, 그 탓에 무사시는 평생을 떠돌아 다녀야 했을 것이다. 임관은커녕 목숨 보전하기도 바빠 제대로 씻지도 자지도 못해 늘상 피폐한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는 게 무사시 신화의 본모습이었다고 주장했다.


7. 대중문화 속의 무사시[편집]


미야모토 무사시/기타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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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야모토 무사시의 전기. 니텐기(二天記)의 원사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