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라르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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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모로코의 삼국시대. 바르가와타, 이드리스 왕조, 미드라르 왕조 +살리흐 왕조..
1. 개요
2. 역사
2.1. 파티마 조의 1차 침공
2.2. 순니 개종과 칼리파 참칭
2.3. 파티마 조의 2차 침공
2.4. 멸망


1. 개요[편집]


아랍어 بنو مدرار
영어 Midrarid

중세 모로코 동부 타필랄트에 있던 베르베르계 연맹 국가. 수도의 이름을 따 '시질마사 토후국'이라고도 불린다. 757년 수도로 건설된 시질마사는 사하라 횡단 교역으로 번영하였다. 수프리 카와리지파를 신봉하던 미드라르 왕조는 말리키 순니파를 수용한 후 944년 칼리파를 선언하였다. 이로써 파티마 왕조의 침공을 받아 쇠퇴하였다가 결국 그에 복속하였다. 그러나 파티마 조와 대립하던 후우마이야 왕조의 침공을 받아 977년 멸망하였다. 미드라르 조는 베르베르 인들 중 처음으로 칼리파를 칭한 국가이다.[1]

2. 역사[편집]


파일:모로코 시질마사.png
시질마사 유적

베르베르 대항거에 참가한 미크나사 부족장 아불 카심 삼쿠가 757년 현지 족장 이사 벤 야지드를 비롯한 40명의 동료들과 거점 시질마사를 건설하며 세워졌다. 그후 이사 벤 야지드가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는데, 흑인이었던 그는 772년 베르베르 인들의 반발로 폐위되었고 나무에 묶인 후 모기에 물려 죽었다. 그후 아불 카심 삼쿠가 통치하다가 785년에 사망하였고, 아들 일야스를 거쳐 790년 친척 알 야사가 아미르로 선출되었다. 알 야사의 치세에 시질마사는 사하라 횡단 교역으로 번영하였고 이때 성벽, 궁전, 사원, 하맘 등이 건설되었다. 823년 알 야사가 사망하자 아들 미드라르가 계승하였는데, 그는 867년까지 44년간 장기 집권하였고 세습제를 확립하였다. 따라서 '미드라르' 왕조라 일컫는 것이다. 다만 미드라르의 사후 내전을 겪다가 883년 야사 이븐 미드라르의 등극과 함께 안정을 회복하였다.

2.1. 파티마 조의 1차 침공[편집]


한편 그 무렵 동쪽 이프리키야에서는 일곱이맘파 쉬아 운동인 파티미야 혁명의 불길이 일고 있었다. 그의 정신적 지도자인 압둘라 알 마흐디는 시리아에서 이집트를 거쳐 마그레브로 향하였는데, 905년 (예언대로) 시질마사에 당도하였다. 압둘라 일행은 정체를 숨긴 채로 아미르 야사 이븐 미드라르와 친분을 맺었고 자신처럼 동방에서 온 이들과 함께 머물렀다. 다만 (전설에 의하면) 압둘라의 아들 알 카임이 샘이 솟아나게 하는 기적을 행하자 그들의 정체가 드러났고, 현지 유대인이 압둘라가 지배권을 탈취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동시에 압바스 칼리파가 야사에게 서신을 보내 압둘라 부자와의 친교를 끊으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야사는 압둘라 부자를 감금하였다. 다만 압둘라의 환관들 중 한명이 탈출하여 카이로우안에 있던 파티마 혁명군 사령관 앗 쉬이에게 비보를 알렸고, 앗 쉬이는 서쪽으로 행군하였다.

도중 이바디 카와리지파를 신봉하는 루스탐 왕조를 멸한 앗 쉬이는 시질마사에 당도, 압둘라 부자를 구출하였다. (909년 8월) 야사는 도주하였지만 추격당하여 살해되었고, 풀려난 압둘라는 시질마사를 약탈하였는데 도중 자신을 고발한 유대 공동체에게 가혹히 대하였다. 본거지인 튀니지로 향하며 압둘라는 시질마사에 총독을 임명하였고 (약탈로 얻은) 낙타 120마리에 실은 금과 함께 폐허가 된 도시를 떠났다. 50일이 지난 후 시질마사 주민들이 봉기하여 파티마측 총독을 축출하고 야사의 조카 와술을 아미르로 추대, 독립을 되찾았다. 913년 와술이 사망한 후 동생 아흐마드가 계승하였는데, 921년 파티마 조의 속국인 루스탐 조가 시질마사를 공격하였다. 아흐마드는 그에 맞서던 중 전사하였고, 루스탐 군대는 성벽을 넘어 시질마사를 함락하였다. 이후 그들은 허수아비 군주들을 옹립하였고 파티마 주화를 발행하였다.

2.2. 순니 개종과 칼리파 참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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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중반 시질마사에서 발행된 무함마드 이븐 와술 (앗 샤키르 릴라)의 디나르

그러던 942년 와술의 아들 무함마드가 집권하였다. 젊은 시절을 안달루스에서 보내며 939년 후우마이야 군대의 일원으로 시만칸스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던 그는 현지에 우세하던 말리키 순니파로 개종하였다. 시질마사로 돌아온 그는 정변을 일으켜 13세의 사촌 알 문타시르와 섭정이던 그의 조모를 폐위시키고 집권하였다. 알 문타시르는 감금되었고, 무함마드는 기존의 수프리 카와리지파를 배격하고 안달루스와 마찬가지로 순니 말리키 법학파를 국교로 삼았다. 친우마이야 정권의 탄생에 파티마 조는 긴장하였다. 카외리지 반란에 시달리던 파티마 조를 공격하기로 결정한 무함마드는 베르베르 인들을 규합하는 한편 칼리파만이 쓸 수 있는 아미르 알 무미닌을 선포하고 왕호로 앗 샤키르 릴라 (신께 감사하는 자)를 정하며 종교적 권위에도 도전하였다. 그의 상징으로 944년부터 950년까지 시질마사에서는 무함마드를 칼리파로 묘사한 마싸킬 샤키리야 금화가 주조되었다.

2.3. 파티마 조의 2차 침공[편집]


북아프리카에 또다른 칼리파가 등장한 것에 경악한 파티마 조는 948년 카와리지 반란이 진압된 후 내부를 정비하며 원정을 준비하였다. 953년 신임 파티마 칼리파로 등극한 알 무이즈는 대장군 자우하르를 시질마사로 파견하였다. 도시 인근에 당도한 자우하르는 귀족들을 소환하여 무함마드의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그들은 거절하였다. 그럼에도 무함마드는 가족, 심복들과 보물을 챙겨 시질마사를 탈출하였다. 958년 9월 자우하르는 지도자가 부재한 시질마사에 무혈 입성하였고, 샤키리야 주화를 파티마 주화로 대체하였다. 한편 타사그달트 요새에 숨어있던 무함마드는 피난처를 떠나 정세를 탐색하기 위해 시질마사에 접근했다가 그를 알아본 마트가라 부족에게 사로잡혔고, 자우하르에게 넘겨졌다. (10월) 사슬에 묶인 무함마드는 비슷한 시기 사로잡힌 페스의 마그라와족 아미르 아흐마드 이븐 바크르와 함께 파티마 조의 수도 알 만수리야로 압송되었다. 시질마사 귀족들의 자녀들 일부도 인질이 되어 동행하였다.

2.4. 멸망[편집]


959년 11월 알 만수리야에 당도한 '칼리파' 무함마드는 새장에 갇혀 조리돌림당하는 수모를 겪었고 성채에 유폐되어 옥사하였다. 모로코 지역 대부분을 평정한 자우하르는 시질마사에 총독을 두고 회군하였는데, 반세기 전과 마찬가지로 그가 떠나고 얼마 후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총독을 죽이고 무함마드의 아들 알 문타시르 삼구를 아미르로 추대하였다. (963년) 삼구의 뒤를 이은 동생 아부 무함마드 압둘라는 마침내 파티마 조의 쉬아 칼리파를 인정하고 그에 복속하였다. 그러자 모로코를 두고 파티마 조와 경쟁하던 후우마이야 조는 동맹인 마그라와 부족에게 시질마사 공격을 명하였다. 977년 부족장 카즈룬이 이끄는 마그라와 군대가 침공하자 그에 대적하러 출전한 아미르 압둘라는 패하고 전사하였다. 시질마사 역시 곧 점령되었고, 압둘라의 수급은 정복의 증표로 코르도바에 보내졌다. 이후 마그라와 부족이 페스와 시질마사를 지배하였고, 두 지역의 아미르끼리 내전을 벌이다가 1055년 무라비트 왕조에게 정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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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인 자격으로는 베르베르 대항거를 이끈 마이사르 알 무트가리가 첫번째. 이후 무와히드 왕조하프스 왕조가 칼리파를 칭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