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우크라이나 관계

덤프버전 :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우크라이나 국기.svg
미국
United States of America
Сполучені Штати Америки
우크라이나
Україна
Ukraine
1. 개요
2. 역사적 관계
2.1. 소련 해체 이전
2.2. 소련 해체 이후
2.4.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2.4.1. 젤렌스키 대통령의 이례적인 성토
2.4.2. 전쟁 발발 이후
3. 대사관
4. 관련 기사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미국우크라이나의 관계. 소련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가 점점 반러 성향이 강해지면서 우크라이나와 미국간의 협력이 늘어나고 있다. 양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에서 서로 협력을 추진하고 있는데, 오데사에는 미국 함대가 정박해서 합동훈련을 진행하기도 한다.

오늘날 미국 유대인의 90~95% 이상을 차지하는 아슈케나지 유대인은 상당수가 우크라이나 출신 유대인이기도 했다. 주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동유럽에 만연한 반유대주의를 피해 미국으로 이민한 사람들의 후손으로, 이러한 연유로 당시 이주한 유대인들 및 그 후손들 중에는 우크라이나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경우가 드물었다.

소련 해체를 계기로 미국으로 이민하는 우크라이나인 인구가 다시 증가하고 있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우크라이나 출신 유대인으로, 오늘날 미국 내 우크라이나어 구사 인구는 대부분 친유대주의 성향 기독교 근본주의 선교단체의 지원으로 미국에 입국한 유대인들이다.[1] 우크라이나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국적자는 이런 선교 단체들의 도움이 없으면 애초에 미국 입국 비자를 따는 것조차 어려운 수준이라고 한다. 친유대주의 단체들의 지원으로 미국으로 이주한 경우 외에도 이스라엘로 이주한 우크라이나 유대인들도 적지 않은데, 이는 미국의 일부 사이비 교파에서 유대인들이 전부 이스라엘로 모여야 요한 묵시록에 예언된 심판의 날이 시작된다고 믿기 때문이다.[2]


2. 역사적 관계[편집]



2.1. 소련 해체 이전[편집]


18세기 말 폴란드 분할갈리치아를 제외한 우크라이나 지역이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러시아 제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다르게 유대인들의 권리를 대폭 제한 및 축소하고, 유대인 마름들에게 시달리던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유대인들과 갈등하고 다투기 시작했다. 한 술 더 떠서 새로 독일이나 아르메니아에서 온 상인들이 유대인 상인들의 상권을 장악하자 우크라이나 출신 유대인 상당수는 미국으로 이민을 결정했다.

우크라이나에서 미국으로 이민하던 사람들은 러시아 제국 여권 혹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여권을 들고 왔으며 독자적인 우크라이나인으로는 분류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오늘날 미국내의 우크라이나계 미국인들은 90만명으로 이들 중 상당수는 미국 유대인이기도 하다.

20세기에도 우크라이나인들의 미국 이주는 이어졌다. 우크라이나 본토외에도 폴란드 등 다른 유럽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1950년대초, 미국 CIA는 소련에 맞서 무장투쟁을 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을 지원하기도 했다. 독립 이전에는 우크라이나와 미국은 공식적인 관계가 없었지만, 소련해체되면서 양국은 공식 수교했다.

소련 해체 직전에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을 견제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미국은 멀리 있는 폭군(소련)을 없애자고 현지(우크라이나)의 독재자를 내세우지도 않을 것이고 인종적 증오에 뒷받침된 자기파괴적인 민족주의를 지원하지도 않을 것이다

조지 H. W. 부시가 1991년 소련 해체 직전 행한 연설에서



2.2. 소련 해체 이후[편집]


소련 해체와 함께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선언하자 미국은 이를 즉시 지지했으며 키이우에 대사관을 설치함으로써 양국간 관계는 재편성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에 잔존해있던 구 소련의 핵무기를 우크라이나가 해외에 판매하려는 시도하는[3] 등 우크라이나가 기성립된 국제 핵질서를 교란에 빠트릴 위험에 있자 미국은 넌-루가 협력적 위협 감소(Nunn–Lugar Cooperative Threat Reduction, CTR) 프로그램을 통하여 구소련 영역내 존재하는 이들 핵무기의 감소를 대가로 이들 국가에 막대한 양의 경제적 지원을 실시하는 정책을 공식적으로 추진하였고 그 결과 우크라이나는 핵을 포기하는 대신 주권과 독립성을 인정받고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얻게 된다.

훗날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로 알려진 우크라이나의 핵 포기 약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미국, 러시아, 영국은 우크라이나의 주권, 독립성, 현재 국경선을 존중한다

2. 미국, 러시아, 영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위협이나 무력사용을 자제한다(refrain)

3. 미국, 러시아, 영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경제적 위협을 자제한다

4. 우크라이나가 핵 공격을 받는다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이 사안을 논의한다

5. 미국, 러시아, 영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핵공격을 자제한다

6. 상기 조항에 변경이 있으면 따로 협의한다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가 체결되던 1994년 당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상대로 크림반도 독립과 흑해함대 분할 논쟁#을 벌이고 있던 때였다. 우크라이나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하자 크림반도의 러시아계 주민들은 우크라이나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는데 크림반도세바스토폴은 러시아군의 흑해 진출 요충지로서 소련 해군의 흑해함대가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림반도는 러시아 입장에서도 절대 잃을 수 없는 지역이었다. 양자간 갈등은 러시아가 크림반도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영유권을 인정하고 그 대신 러시아가 세바스토폴을 임차하면서 흑해함대의 관할권을 가짐으로써 1997년 평화적으로 종식되었는데, 이는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로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현존 국경선(the existing border)을 이미 인정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우호조약(Friendship Treaty)을 체결한다.

훗날 러시아에 의한 우크라이나 군사 위협이 현실화되자 '우크라이나가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로 핵포기를 했기 때문에 러시아에게 위협받는 약소국으로 전락되었으니 미국과 영국이 이에 대한 방위 대책을 마련했어야 한다'는 주장은 일었는데 이는 대충 아래와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의도에 반해 (소련 해체와 함께)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즉시 서방의 위협이 됐습니다. 1900개의 핵탄두와 2500개의 전술 핵무기 보유한 핵강국이었기 때문입니다. 미사일 개발 능력도 탁월해서 1962년 쿠바에 배치됐던 소련 미사일이 모두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됐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중국, 프랑스, 영국을 넘어서는 3번째 핵보유국이었는데, 이 때문에 미국은 내부적으로 불안정한 우크라이나의 핵무기가 당시 미국의 안보에 가장 큰 위협이라고 봤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크라이나의 핵을 제거하거나 러시아로 옮기자는 데에 러시아와 미국의 이해가 모처럼 일치하게 된 거죠. 미국은 차라리 러시아가 핵을 갖고 있는게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던 92년 5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두고 충돌합니다. 크림반도 세바스토폴의 러시아 흑해함대 문제로 양 측의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고, 심각한 안보위기를 느낀 우크라이나는 핵 미사일을 포기하는 댓가로 경제 지원, 공식 영토 확정, 안보 보장 등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후 94년 12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러시아, 영국, 미국과 우크라이나가 이른바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를 체결합니다. 핵을 포기하는 대신 이들이 우크라이나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양해각서'였을 뿐 구속력있는 '협정'이 아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만약 '안전보장 협정'이었다면 러시아가 이를 어기면서까지 2014년에 크림반도를 침공하긴 어려웠을 겁니다. 미국과 러시아의 압박이 거센 상황에서 여기에 서명 안하면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경제지원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핵위험이 사라진 우크라이나는 이제 더이상 미국의 중요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별다른 안전보장 장치 없이 러시아와 서방 사이에 어정쩡하게 놓이게 된 우크라이나는 국내 정치적으로도 혼란을 겪었고, 점점 러시아가 눈독들이기 좋은 상황으로 빠져 늘어갔습니다.

(중략)

우크라이나가 핵 포기의 댓가로 명확한 안전보장 장치를 요구했을 때, 미국이 이를 들어줘 러시아가 침공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앴더라면 우크라이나의 지금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


하지만 이는 당시의 부다페스트 각서가 체결되던 당시의 역사적 맥락을 생략한 채 사후적으로 나오는 평가일 뿐이다. 당시 부다페스트 각서에서 언급된 우크라이나의 '안전 보장(Assurance)'은 당시 우크라이나 독립과 크림반도와 흑해함대를 둘러싼 갈등에서 러시아가 신생 독립국 우크라이나의 안전과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인정(Assurance)하는 맥락에서 넣은 것일뿐 애초에 본 각서의 목적 자체는 장차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 공격받을 때 미국과 영국에게 지켜달라고 요청하여 체결한 각서가 아니다. 당시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계 주민이 비중이 높고 러시아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은 국가로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의 위협에 그렇게 큰 위기감을 느꼈다면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다른 국가들(폴란드, 체코)처럼 서둘러 나토에 가입하여야 했겠으나 아래에서 보듯 당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나토 가입 여론은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실제로 위의 각서 내용을 보더라도 '미국, 영국,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위협을 자제한다(refrain)[4]'라고만 당위적으로 선언하고 있을뿐 누가 공격하고 누가 지켜주는지, 실제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격을 예방하는 구체적인 방안이나 우크라이나가 공격받았을 때 이를 보복하기 위한 어떠한 조문도 없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법학자들의 해석도 이와 같이 이 각서가 각서 당사국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을 규정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상기의 기사에서는 본 각서의 목적인 안전 보장(Security Assurances)에 대하여 '안전이 위협받을 때, 미국과 영국은 러시아가 침공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앨 정도로 명확한 안전보장 장치를 우크라이나가 요구했다'는 입장이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예를 들어 2009년 당시 NATO에 주재하던 우크라이나 대표 볼로디미르 바실렌코는 우크라이나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 자체에 큰 권위를 부여하여 이상화하는 우크라이나 국내의 분위기를 비판하면서 각서상의 안전 보장(Security Assurances)이 안전 보증(Security Guarantees)이 아님을 지적하였다.

외교적 보장(Assurances)이 현재 상태의 완전함을 선언하는 것일뿐이라면 보증(Guarantees)은 미래에도 그 완전함을 확보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행동을 취할 것임을 약속하는 개념으로서[5] 각서에서 말하는 보장(Assurances)은 각서 체결 당시(1994년)의 우크라이나의 독립성과 주권과 국경선이 완전함을 확인(Assurances)한 것일뿐, 미래에 그 주권과 국경선이 침탈받는 경우에도 미국과 영국 등이 우크라이나의 독립성과 주권과 국경선의 완전함을 적극적으로 회복시켜준다는 의미의 보증(guarantee)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볼로디미르 바실렌코의 인터뷰에서도 표현되듯, 우크라이나 정부의 친NATO측이 NATO 가입을 서두른 이유 역시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가 우크라이나의 미래 안전에 그렇게 실효성 있는 문서가 아니라는 위기의식 때문도 있다. 즉, 당시 우크라이나가 부다페스트 각서가 체결되던 시점에서 요구했던 것은 독립 당시 확보한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국경선을 미국, 영국, 러시아가 인정(Assurances)하는 것이었지 미래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러시아(혹은 미국, 영국)의 침공을 막기 위하여 명확하고 구속력 있는 안전장치인 군사적 보증(guarantee)이 아니었던 것이다[6]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 이후에도 미국과 우크라이나 관계는 그렇게 개선되지 않고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당시 미국은 우크라이나와 역사적 경험을 공유한 적도 없고 아무런 연고가 없는 나라였던 반면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미국보다 러시아와 더 큰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98년 당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주도로 이란 부셰르(Bushehr)에 핵발전소를 건설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란이 미국의 적성국이었음을 생각하면 이는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는 길이었다. 같은 시기에 미국은 미국대로 우크라이나의 핵 포기 이후에도 우크라이나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아 우크라이나에 핵 발전소를 지어주고도 우크라이나가 이를 군사적인 방향으로 전용할까봐 '미국과 우크라이간 핵 에너지의 평화적 사용에 대한 협정(Agreement for Cooperation betwee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Ukraine Concerning Peaceful Uses of Nuclear Energy)'을 맺으며 우크라이나를 견제하는 상황이었다. 또한 폴란드 등 구소련의 위성국가가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하여 독립 직후 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서둘러 가입하던 것에 비하여 우크라이나에 북대서양 조약 기구가 사무소를 차리던 당시(1997년) 우크라이나내 나토 가입 여론은 찬성 37%, 반대 28%, 미결정 34%로서 그렇게 뜨겁지 않은 반응이었다.

이렇듯 당시 우크라이나에는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 주민들이 많이 살아 친러성향이 높았는데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대한 경제의존도가 압도적으로 높았고[7] 게다가 세바스토폴에는 러시아 해군까지 상시 주둔하는 상황이라 우크라이나가 공공연한 반러 정책을 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미국도 우크라이나와 그다지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다. 당시 미국과 우크라이나가 체결한 유의미한 공식 외교관계는 1996년에 양국이 체결한 전략적 파트너쉽(strategic partnership) 하나가 전부였을 정도.

이런 미국-우크라이나의 상황이 바뀌게 된 것은 미국의 43대 대통령 조지 W. 부시가 취임하고서 부터이다. 군사행동을 통해서라도 독재국가에 미국적 민주주의를 전파해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던 네오콘이 장악한 미국 행정부는 지금까지의 뜨뜬미지근한 대우크라이나 관계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당시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레오니드 쿠치마 역시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는데 레오니드 쿠치마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고 이라크에 파병을 하면서까지 미국의 환심을 사려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국의 언론인을 구소련식으로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미국의 적이었던 사담 후세인에게 군사장비를 팔아먹는[8] 이중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적극적 구애공세에 결국 우크라이나는 2002년 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대한 가입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혔고 오렌지 혁명으로 대통령으로 집권한 친서방파 정치인 빅토르 유셴코는 더더욱 NATO 가입의지를 피력하였다. 하지만 당시 우크라이나의 국내 여론은 북대서양 조약 기구 가입에 점점더 부정적이었고 반미-친러 성향이 짙어졌는데 이는 당시 조지 W. 부시이라크 전쟁과 금융위기 같은 실정으로 미국의 대외적 이미지가 매우 낮았다는 점과 빅토르 유셴코로 대변되는 친서방파가 무능으로 민심을 잃은 결과로 풀이된다.

파일:nato_uk_survey.jpg
2002년부터 2013년까지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NATO 가입 설문조사#. 2013년까지만 해도 우크라이나 내에서 반대가 압도적으로 높았던 이유는 우선 지리적으로 북유럽이나 중유럽보단 동유럽에 훨씬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토 대부분이 탁 트인 평야지대여서 러시아가 침공할 겨우 드네프르 강 외에는 이렇다 할 자연적 방어물이 없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긴밀히 경제교류를 하였으므로 이 점도 고려해야 했다. 반면에 에스토니아를 비롯한 발트 3국은 비록 탁 트인 평야지대여서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에 노출되었을지라도 바다 건너 인접한 스웨덴, 핀란드와 교류하는 것이 경제발전에 유리했고, 따라서 에스토니아인들은 러시아와 협력하기보단 강경 친서방-반러 성향을 띄게 되었다.

국내적으로도 우크라이나의 대외정책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9], 또한 러시아와 인접하여 민일 NATO에 가입을 시도하거나 실제로 가입할 경우 오히려 러시아의 위협이 가중되어 역설적으로 안보가 더욱 위협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토 역시 우크라이나의 지리적 입지[10] 때문에 우크라이나가 가입을 원한다 해도 제스처만 취하던 상황이다.

미국은 미국대로 우크라이나와의 관계개선을 시도하지만 2006년 우크라이나와 공동으로 수행하기로 했던 최초의 합동 해상훈련(see breeze)이 현지 주민들의 거센 반발로 취소되는 등# 민심은 녹록치 않았다.

실제로 2012년 부시 대통령 임기 종료 직후 여론조사기관인 갤럽이 실시한 바에 따르면, 당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미국 리더쉽에 대한 신뢰도는 33%로서 유럽 국가들 중 중하위권에 속하는 수준이었으며# 2008~2009년 당시 구소련국가들의 국민들 대상으로 '러시아'와 '미국'중 양자택일의 상황이 오면 어느 국가를 선택하겠느냐는 문의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러시아를 버리고 미국을 택하겠다는 우크라이나 국민은 겨우 12%에 불과하여 미국을 버리고 러시아를 선택하겠다는 응답 44%보다 훨씬 낮은 수치를 기록하였다. 우크라이나 함께 나토 가입을 줄기차게 요구한 조지아만 하더라도 동일 조사에서 미국을 택하겠다는 응답이 24%, 러시아를 선택하겠다는 응답이 28%로 비등한 수준이었음을 감안하면 우크라이나의 당시 대미 성향이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았음을 알수 있다.

파일:us_uk_survey.jpg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 인구가 상당히 많은데다가[11] 우크라이나인 중에서 과거 같은 소련인이자 동슬라브 계통인 러시아인, 벨라루스인과 결혼한 사람이 많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다.[12] 지리적인 이유(서로 국경을 상당부분 맞대고 있다.)까지 겹쳐서 반러 정권이 마냥 안정적으로 유지되기도 힘들다. 제스처만 열심히 취하고 적극적인 지원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최대한 회피하는, 우크라이나 친서방파 입장에서는 복장 터지는 상황이다. 상술한 것처럼 우크라이나계 미국인들은 대다수가 유대인이다. 미국 유대인들이 적극적인 로비로 미국에 친이스라엘 외교 정책을 강요하고, 아르메니아계 미국인들 역시 아르메니아를 위해 사활을 걸고 로비를 상황과 다르게, 우크라이나계 미국인들은 대다수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반유대주의 박해를 피해서 이주한 유대인들이다보니 우크라이나에 대한 애착이 별로 없다. 일부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신도들이 있지만 미국 정계에 미치는 이들의 영향력은 결코 유대인이나 아르메니아인에 비할 바가 못된다. 이는 미국이 심각한 외교적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이스라엘을 지지하거나, 실익이 없음에도 불구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인정한 것과 다르게, 리스크를 무릅쓰고 우크라이나 친서방 세력을 제대로 지원할 가능성이 더더욱 줄어드는 이유이기도 하다.[13].

그러던 중 우크라이나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으로 손꼽히는 부쿠레슈티의 나토 정상선언문#이 2008년 발표된다. 이 선언문 23조에서 NATO는 “조지아, 우크라이나 두 나라의 나토 가입 염원을 환영하며, 나토의 외무장관들이 (가입 절차의) 다음 순서인 멤버십행동플랜(MAP) 적용 시기를 결정한다"라고 명시한다. 당시 임기말이었던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는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를 하루빨리 나토에 가입시키고자 구체적이고 즉각적인 로드맵을 요구했으나 러시아의 반발을 우려한 프랑스와 독일의 반대로 최종본과 같이 가입만을 약속하는 형태로 수정되었다. 그러나 이 선언문의 파급효과는 생각보다 컸다. 자국의 앞마당인 우크라이나가 언제든지 나토로 넘어갈 수 있다는 무제한의 불안감이 러시아에 심어진 것이다. 이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내 친러 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고 친서방파의 무능에 지친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친러파인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대통령으로 2010년 선출함에 따라 미국과 우크라이나간 관계는 다시 한 번 멀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역학구도는 2014년 유로마이단 사태 이후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2.3. 유로마이단2014년 크림 위기 이후[편집]


유로마이단2014년 크림 위기 당시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반응은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2014년 크림 위기 당시 미국인의 과반수(56%)는 우크라이나 사태에 더이상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고 응답하였는데 이는 개입 찬성(29%)보다 훨씬 높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위협이 장기화됨에 따라 바뀌게 된다. 우크라이나내 러시아 주둔군[14]의 존재가 퇴출되고 러시아의 압박과 그에 대한 반발로 우크라이나의 국내 여론이 친서방파로 크게 기울게 되고 반대로 미국 국민에게도 우크라이나에 호의적인 여론이 크게 증가하여 미국 입장에서도 국내외적 부담없이, 보다 적극적으로 외교정책을 펼칠수 있게 된 것이다. 실제로 2014년 이전까지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극히 미미한 수준이었으나 이후부터는 적극적으로 퍼주기 시작하고 미국내 우크라이나 개입 여론도 훨씬 높아진다.

예를 들어 2014년 크림 위기 당시 미국내에서 실시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군대를 파병해도 이를 지지할 것이라는 여론이 30%에 불과했던 반면 파병에 반대하는 여론은 68%에 달했다. 하지만 2021년 7월 동일 기관에서 수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50%의 미국인이 우크라이나에 파병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오는 반면 파병에 반대하는 여론은 48%로 떨어지는 역전 현상이 나온다#.[15].


파일:nato_uk_survey2.jpg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NATO 가입 의사 설문조사#. 2014년 크림위기를 기점으로 지지여론이 반대여론을 압도하였다.

파일:us_uk_survey2.jpg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미국 호감도 설문조사#
중부, 서부와 북부에서는 미국과 EU에 대한 선호도가 러시아에 대한 선호도 대비 압도적으로 높게 나온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06년 당시 크림 반도의 러시아계 주민들 반발에 부딪혀서 취소되었던 해상훈련(sea breeze)을 2015년부터 다시 개시하는 것을 넘어 연례행사로 못박아 두었고 이 때부터 우크라이나에 군사적, 비군사적 원조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게 된다.

파일:190926_figure.jpg
버락 오바마 재임기간중 우크라이나에 지원된 원조액 규모#
EU의 원조는 비군사적인 방면에 치우친 반면, 미국의 원조는 군사적 원조의 비중이 높다.

우크라이나의 일부 최전방 7개의 대대는 미군 교육 훈련단이 파견되어 미군식 훈련을 받고 있고 FGM-148 재블린 같은 최신형 대전차 미사일 실탄 600발, PSRL-1도 수령 하는 등 개선은 하고 있다.[16] 또한 미국의 EDA(잉여국방물자) 프로그램에 따라 잉여 AH-64 공격헬기를 우크라이나 측에서 도입을 검토 중이며, 우크라이나 내각으로 전달되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정부는 10억달러 규모의 대출 보증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우크라이나 검찰총장이었던 빅토르 쇼킨#을 경질시키기도 하였다. 빅토르 쇼킨은 유로마이단 이후의 친서방파의 공적으로 찍혀있는 상태였는데 우크라이나의 고질적인 부패 수사를 방해했으며 무엇보다 유로마이단 사태 당시 정부군에 의한 시위대 저격 사건 등 이전 정부에 의해 자행된 독재, 인권유린 실태에 대한 조사를 뭉개고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 과정을 주도했던 것은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이었고 당시 빅토르 쇼킨이 경질되었을때 영국, EU, 세계은행 등 서방세력들이 지지의사를 표시했던 것에서 보듯, 당시 미국의 이런 결정은 문제가 없어보였다. 하지만 이는 훗날 엄청난 사건으로 비화하게 된다.

버락 오바마 이후 2017년 미국 대통령 자리에 오른 도널드 트럼프 역시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대폭 증강시켰다. 2019년 기사에 따르면 2014년 이후 5년간 미국이 우크라이나에게 지원한 군사적 지원만 따져봐도 15억달러에 달할 정도였고 내용물 역시 험비, 자벨린 미사일, 무장 경비정 등 다양했다#.[17]

도널드 트럼프 집권기에 있있던 우크라이나 스캔들은 2019년 미국 조야를 흔들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 의하여 경질된 빅토르 쇼킨이 사실은 조 바이든의 아들이었던 헌터 바이든의 로비에 의해서 경질되었다는 트럼프측 주장때문이었다. 헌터 바이든은 당시 우크라이나 에너지 회사인 부리스마 홀딩스의 이사였는데, 부리스마 홀딩스는 당시 빅토르 쇼킨[18]의 수사를 받고 있었으므로 빅토르 쇼킨이 경질된 이유는 부패 척결이라는 대의명분이 아니라 헌터 바이든의 로비때문이었다는 주장을 트럼프측이 제기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럴수 있으나 문제는 그 과정에서 보여준 트럼프의 행동이었다. 트럼프는 당시 우크라이나 대통령이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에게 헌터 바이든에 대한 수사를 재개하지 않으면 미국 의회가 승인한 우크라이나 군사 원조 예산 2.5억달러 규모를 무기한 보류하겠다고 협박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당시 조 바이든은 차기 민주당 대선 후보로서 가장 유력했으며 트럼프의 가장 강력한 맞상대라고 점쳐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즉, 트럼프는 국내 정치 싸움에 미국 국익이 걸린 외교관계를 이용한 셈이었는데 이는 권력 남용과 의회 업무 방해에 해당되었으므로 결국 이로 인한 탄핵 조사가 시작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측이 공개한 바에 따르면, 실제로 헌터 바이든에 대한 조사를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요청한 것은 맞지만 대가 관계는 없었으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일시 중지한 것은 헌터 바이든과 무관하게 유럽에서의 지지를 얻으려는 목적이었다고 항변하였다#.

당시 지근거리에서 트럼프를 보좌하던 존 볼턴은 이러한 우크라이나 스캔들을 '아이스크림 위의 설탕가루 수준'이라 부르며 당시 트럼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원조를 볼모로 헌터 바이든 수사를 압박했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는데# 미국 민주당은 이러한 존 볼턴을 탄핵 조사의 핵심 증인으로 부르려고 했으나 이는 상원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공화당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탄핵시도는 무산되고 만다.

도널드 트럼프 이후 2021년 미국 대통령 자리에 오른 조 바이든 역시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였다. 미국과 우크라이간간 전략적 파트너쉽을 다시 체결하면서 전략적 방위관계를 심화하였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에게 첨단 전략·감시 자산을 동원한 방위 협력을 약속하였으며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을 지지하고 지원하겠다고 입장을 정하였다# #

주 우크라이나 미국 대사관 발표에 따르면 2014년부터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원조한 금액은 누적으로 37억달러(10억달러의 차관 포함)에 달하며 매년 예산액은 더 높아지고 있다. 내용 역시 군사적 지원뿐 아니라 에너지, 전기, 반부패, 사이버 보안, 경제개발, 인권보호 등 다양한 분야에 망라되어 있다# 또한 2014년 이래 미국이 우크라이나에게 지원한 군사원조액만 따져도 누적 25억달러에 달하며 2021년 한 해에만도 4억달러의 군사 예산이 배정되어 있을 정도다##.

파일:나토-우크라이나 관계.jpg[19]
군인금발 소녀를 사이에 두고 있다.
나토 : 걱정 마, 내가 에 있잖아.

그러나 미국에서 생색내는 것과 다르게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지원하는 원조액 액수는 생색내기 수준에 불과하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트럼프 정권 초기까지 미국은 우크라이나보다는 친중국가 파키스탄에 훨씬 더 많은 금액을 원조하는 상황이었다. 2018년 파키스탄에 대한 원조금 총 8억달러 삭감, 중단했던 우크라이나 군사비 원조 재개 2억 5천만달러 책정 이 2억 5천만달러가 유럽 국가 예산으로 얼마나 한심한 수준의 돈이냐면 우크라이나와 인구 규모가 비슷한 폴란드 정부 지출 3,972억즈워티(약 1,103억달러)#의 0.227%에 달하는 금액이다. 무슨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소국 민병대를 지원하는데 충분한 금액일지는 몰라도 영토가 방대한 동유럽 국가 국방비에 보태기로는 택도 안되는 수준이다. 또 다른 비교 사례로 미국이 이스라엘에 원조하는 군사원조 금액은 1년에 38억 달러 정도에 달하는데,#[20] 상식대로 따진다면 가내수공업으로 로켓 만드는 하마스를 상대하는 이스라엘보다 세계 군사력 2위 러시아를 상대해야 하는 우크라이나에 더 많은 원조 액수가 가야한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군사원조로 지불하는 금액은 이스라엘의 그것에 15분의 1도 안되는 수준에다가 그나마 매년 지불되는 것도 아니다. 미국 국민의 일반적인 여론 역시 우크라이나 지원에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입장이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끈질기게 요구하는 미군의 우크라이나 상시 주둔은 미국측에서 부정적으로 나오고 있다[21].

2021년 4월에 미국측은 우크라이나에 군함을 2주 정도 정박한 뒤, 5월 4일까지 머물것이라고 터키측에 통보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국경에 병력을 배치하자 우크라이나 정부는 미국에 패트리어트 미사일 지원을 요청했다.

토니 블링컨 장관이 5월 5일 ~ 6일에 우크라이나를 방문한다고 밝혔다.# 5월 6일에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블링컨 장관은 우크라이나측과 회담을 갖고 안보문제, 러시아를 견제하는 문제 등을 논의했다.#

우크라이나에서 미국에 계속 코로나-19 백신 원조 요청을 보냈음에도 무시당하자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2021년 4월 기준 우크라이나의 코로나 백신 접종률은 동유럽 최하위권이었다,# 이후 미국은 미국 내에서 백신이 남아도는 상황이 되어서야 우크라이나에 모더나 백신 200만 도즈를 지원하였다.#

2021년 6월 7일에 백악관은 젤린스키 대통령을 7월에 백악관으로 초청했다고 밝혔다.# 회담을 앞두고 우크라이나에 6천만 달러(695억원)에 달하는 군사비를 원조키로 했다고 밝혔고 # 실제로 이에 따라 미군의 소화기. 탄약, 자벨린 미사일, 무장경비정 등이 우크라이나로 이관되었다.

7월 27일에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리비우에서 미국, 리투아니아, 폴란드와 군사훈련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11월 22일에 바이든 행정부가 우크라이나 국경 지대에 배치할 무기를 지원하는 방안을 것을 검토 중이라고 CNN 방송이 보도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접경 군사력 증강에 모든 옵션을 검토중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러시아 침공시 우크라이나내 미국인들의 철수를 검토하고 있다.#

2021년 12월에 시행된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 국내의 여론은 아직 우크라이나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적인 지원(17%)보다 협상(34%) 및 경제 제재(22%)를 선호하고 있다#.

미국측이 우크라이나의 기업가에게 미국 항공업체와의 협력중단을 요구했다.#

2022년 1월 19일에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블링컨 장관은 우크라이나를 지원한다고 밝혔다.#


2.4.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편집]


파일:gv012622dAPR.jpg

2021-2022년 우크라이나 위기 관련하여 미국측이 우크라이내 미국 외교관 가족들의 대피명령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크라이나측이 미국에 사드 배치를 요청했으나 무시당했다.#

러시아는 천연가스와 원유가 주요 수출품목이다. 주요 수출처는 서유럽이다. 러시아에서 서유럽으로 천연가스와 석유를 수출하는 파이프 라인 중 노드 스트림처럼 우크라이나를 직접 경유하지 않는 파이프 라인도 있으나 대부분은 우크라이나를 지난다. 2021-2022년 우크라이나 위기 역시 미러 에너지 패권전쟁의 연장선상으로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블룸버그 통신에 의하면 2022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긴장상태가 격화되면서 2월 12일 미국의 액화천연가스(LNG) 하루 수출량이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한다.#

바이든 행정부가 미국인의 우크라이나 여행 금지를 내렸다.#


2.4.1. 젤렌스키 대통령의 이례적인 성토[편집]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이 러시아에 대한 구체적인 제재나 우크라이나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이 미비하고 오히려 불안만 가중시켜 우크라이나 상황만 어렵게 만든다며 이례적으로 목소리 높여 비판하였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19일(현지시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가능성에 대한 서방의 대응이 부족하다고 강도 높게 비판하며 즉각적인 제재를 촉구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인사들이 매일같이 침공 가능성을 경고하는 것과 관련, 젤린스키 대통령은 이러한 행위가 외국인 투자와 우크라이나 환율을 불안하게 하고 자국민들을 공포에 떨게 한다고 비판했다.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에 대한 러시아의 반대와 관련해서는 나토 가입 의사를 재확인하면서 서방이 주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

APTN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파트너들의 지지가 있든 없든 우리는 조국을 지킬 것"이라면서 "(무기·장비 등) 지원에 대해 감사하지만, 이는 우크라이나가 독촉하거나 구걸해야 하는 기부가 아님을 모두가 이해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이는 우크라이나가 머리를 조아려야 할 게 아니다"라면서 "우크라이나가 (크림반도 합병 이후) 8년간 방패막이 역할을 해온 유럽과 국제 안보를 위한 여러분의 기여"라고 주장했다.

- #



2.4.2. 전쟁 발발 이후[편집]


2022년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간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측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있다. 미국측은 우크라이나 피란민을 10만명 수용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구체적인 실행 방안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며 결국 멕시코 국경을 넘어온 1~2천여 명 규모의 우크라이나인 난민의 입국을 받아주는 선에 그쳤다.#

3월 26일 드미트로 쿨레바 외무장관은 미국측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한다고 밝혔다.#

미국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추가 군사 지원을 했다.#

4월 7일 악시오스에서 실시한 조사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을 신뢰한다는 비중이 72%라는 결과가 나왔다.#

4월 15일 젤렌스키 대통령이 바이든 대통령에게 러시아를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라고 요청했다.#

4월 21일 바이든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추가 군사원조를 발표한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또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때 지원하던 소련제 헬기 Mi-17을 우크라이나에 지원하는 것도 알려졌다.#

4월 24일(현지시각 기준), 블링컨 국무장관과 오스틴 국방장관이 키이우를 방문해 젤렌스키 대통령과 회담하였다.

4월 29일 우크라이나 무기대여법이 통과되었다.

러시아군 장성들이 잇달아 우크라이나에서 전사하는 가운데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은밀히 군사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이든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을 지원한다고 밝혔다.# 블링컨 장관은 돈바스 할양은 우크라이나인 스스로가 결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헨리 키신저는 우크라이나가 나토 일원 중의 하나가 취급돼야 한다고 본다고 밝혔다.#

7월 18일, 미국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8억 달러 규모의 무기 추가 지원을 시사했다.#

9월 9일,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부 장관이 우크라이나군이 하르키우, 헤르손에서 성과를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12월 6일, 우크라이나의 공격이 러시아 본토까지 이어진 것에 대해 미국 측이 국경을 넘어 공격하지 않는 것을 권고했다.#

12월 12일, 바이든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200억 달러를 지원한다고 밝히자 젤렌스키 대통령이 감사의 뜻을 밝혔다.#

12월 20일, 젤렌스키 대통령이 21일에 미국을 방문하기로 했다.# 게다가 젤렌스키 대통령의 미국 방문 추진이 극비로 이뤄진 것으로 나타났다.#

2023년 1월 2일, 러우전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미국에서 나왔다.#

1월 4일, 우크라이나 중앙은행은 우크라이나가 지원받은 금액이 320억 달러에 달했고 이중 미국이 40%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1월 5일, 미국과 독일 양국은 우크라이나에 경량급 탱크를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1월 7일,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장관은 시간은 푸틴 대통령의 편이라고 밝혔고 서방 국가들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월 10일, 미군이 미국 내에서 우크라이나군의 패트리어트 미사일 교육훈련을 실시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20억 달러 규모의 우크라이나 지원을 결정하는 한편, 미국의 퓨리서치가 실시한 조사에서 우크라이나에 너무 많은 지원을 한다는 응답이 26%로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2월 10일, 무디스는 우크라이나 신용평가를 하향 조정했다.#

2023년 2월 절대 기밀로 바이든이 우크라를 방문했다. 방문을 기밀로 하기 위해 주고 받은 메일제목은 "골프대회 도착 안내"로 위장했고, 기자도 단 2명만 동행하고 기밀 서약서도 받아 냈다고 한다. #

미국에서 우크라이나 파일럿 2명이 기량을 평가받고 있는 것이 알려졌다.#

4월 24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본토 공격을 계획하다가 미국이 만류한 사실이 알려졌다.#1#2

6월 8일, 미국 국방부는 우크라이나에 20억 달러 규모의 무기 패키지를 지원한다고 밝혔다.#

6월 27일, 미국 국방부가 우크라이나에 5억 달러 규모의 군사장비를 지원한다고 밝혔다.#

6월 30일, 윌리엄 번스 CIA 국장이 극비리에 키이우를 방문했다.#

7월 3일, 미국 측이 바그너 그룹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에 우크라이나에게 개입하지 말라고 했던 사실이 알려졌다.#

3. 대사관[편집]


미국은 키이우에, 우크라이나는 워싱턴 D.C.에 대사관을 두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전쟁 위기를 겪자 미국측은 주 우크라이나 미국 대사관을 철수하고 대사관 직원들을 전부 폴란드로 철수시킨다고 밝혔다.# 키이우의 상황이 잠잠해지자 다시 재개하였다.#

미국은 주 우크라이나 미국 대사로 브리짓 브링크 슬로바키아 대사를 임명하기로 했다.#


4. 관련 기사[편집]



5.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8 20:53:40에 나무위키 미국-우크라이나 관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1989년 기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내 거주하는 유대인 인구는 487,555명에 달했는데, 2010년에는 7만여 명, 2014년에는 6만여 명 수준으로 급감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친유대주의 단체들의 원조를 기댈 수 있는 미국이나 이스라엘로 이민하였다.[2] 칼뱅의 후계자인 테오도뤼스 베자는 예수가 재림하는 세상의 종말 때 모든 유대인이 기독교로 개종하며 그 중심 무대는 팔레스타인이라고 단언했다. 이러한 칼뱅파의 주장은 영국 청교도에게 영향을 줬다. 현세의 종말과 예수가 재림하는 천년왕국의 도래를 주장하는 청교도에 예루살렘의 회복과 유대인의 귀환은 그 전제 조건이었다. ... 이는 나중에 기독교 시오니즘이라는 종말론적 근본주의 신앙의 출발이 됐다.출처[3] 예를 들어 1992년부터 재임한 우크라이나의 3대 제1부총리 이호르 유흐노우스키(Ігор Юхновський)는 우크라이나의 핵무기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소유임을 주장하며 핵무기를 국제 경매에 내놓아 가장 비싸게 부르는 국가에 팔겠다("We can sell these nuclear warheads to the highest bidder (among) nuclear states. That means Russia first of all, or maybe another state, depending on which pays most")고 공식적으로 선포할 정도였다#[4] 금지도 아니고 그냥 자제[5] 실제로 영어에서의 의미도 이와 같다wikidiff 참조[6] 참고로 러시아돈바스 전쟁 당시 NATO가 우크라이나 가입을 포기하여 러시아의 안전을 법적으로 보증하라(legal guarantees)고 명확히 요구하였다#. 국내 기사에서는 부다페스트 각서든 러시아 발표든 전부 '보장'이라고 번역했지만 둘은 명백히 다른 말이다[7] 예를 들어# 1997~2000년 기간중 우크라이나의 대러시아 수출비중은 23~26.2%였고 대러시아 수입비중은 45~50%에 달했다. 특히 가스의 70~75%, 석유의 80%를 러시아에서 수입할 정도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경제에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었다.[8] 이를 카세트 스캔들(Cassette Scandal)이라고 한다[9] 대외노선을 친러로 할것이냐 친미로 할 것이냐에 대해 우크라이나 사회는 오랫동안 갈등에 휩싸여왔다. 이 갈등은 우크리이나의 민족정체성 문제, 지역갈등 문제와 결합되어 해결하기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나 러시아의 내정간섭이 시간이 지날수록 노골적으로 변하고 2014년에는 끝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친러 여론은 급격히 세가 줄어들었다.[10] 국토 대부분이 탁 트인 평야 지대인 동시에 영토가 동서로 긴데, 동쪽은 러시아와 북부는 러시아/벨라루스와 접한다. 서쪽의 헝가리 등 중유럽 국가들과는 카르파티아 산맥의 존재로 인해 교통이 좀 더 불편한 편이다.[11] 1989년 기준 1200만여 명, 2001년 통계 기준으로 8,334,100명인데, 현재 새로 통계가 나오고 있지는 않지만 크림 반도와 도네츠크, 루한스크 문제 등등으로 과거에 비하면 대폭 감소했겠지만 현재도 상당수가 남아있다.[12] 러시아 제국과 소련 시절의 영향으로 러시아인들 중 우크라이나인 친척이 없는 사람이나 우크라이나인중 러시아인 친척이 없는 경우가 오히려 더 드문 편이기도 하다.[13] 별로 애착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과거 기준으로는 서로 증오했다고 볼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의 장본인 중 한 명인 라자리 카가노비치는 우크라이나 태생의 유대인이고, 같은 배경의 트로츠키 역시 "우크라이나어는 러시아어의 일개 방언에 불과하다."라는 망언을 날린 것으로 유명하다.[14]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에는 러시아 흑해함대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었으나 크림반도가 독립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우크라이나 내에는 러시아군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15] 다만 2021년 12월에 시행된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 국내의 여론은 아직 우크라이나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적인 지원(17%)보다 러시아와의 협상(34%) 및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22%)를 선호하고 있다#[16] 링크 링크 (영어)[17] 다만 유로마이단 이후 집권한 페트로 포로셴코가 방산비리로 몰락한 사건에서 보듯, 우크라이나군은 부패와 부정비리로 유명하기 때문에 실제 도움받은 수준은 그보다 약할 수도 있다.#[18] 부리스마 홀딩스가 친러시아 성향을 보였기 때문에 빅토르 쇼킨을 친서방파로 오해할 수도 있으나 당시 서구세력이 일제히 빅토르 쇼킨의 경질을 요구한 것만 봐도 알수 있듯 근거없는 얘기다. 빅토르 쇼킨의 직장동료 다수를 인터뷰한 기사를 보더라도 빅토르 쇼킨은 그저 관료적이고 부패한 구소련 출신의 전형적인, 기회주의적 공무원에 불과했지 친러니, 친서방이니 하는 소신을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19] 2021년 12월 3일 레바논 언론지에서 나온 만평.[20] 아이언돔 문서를 참고하시면 아시다시피 실질적으로는 이보다도 더 많은 액수로 볼 수 있다.[21] 다만 미군의 임시 주둔은 현재도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2015년 초에는 미군 173공수여단 병력 300명이 6개월 정도 우크라이나에 주둔하면서 우크라이나 국경경비대의 창설 및 훈련 업무를 지원하였고# 2021년 12월의 한 기사만 하더라도 플로리다 주방위권 병력 165명이 우크라이나 후방에 배치되어 우크라이나 군의 교육과 시스템 개선 업무에 투입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