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 나무에 저주를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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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무화과저주.jpg

1. 개요
2. 원문
3. 해설
3.1. 구약 참고 구절
4. 대중매체
5. 같이보기



1. 개요[편집]


신약성경 복음서마태오 복음서마르코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기적. 마르코 복음서에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줄거리는 같다.


2. 원문[편집]


이튿날 아침에 예수께서 성안으로 들어오시다가, 마침 시장하시던 참에 길가에 무화과나무 1그루가 서 있는 것을 보시고 그리로 가셨다. 그러나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 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무화과나무는 곧 말라버렸다. 제자들이 이것을 보고 놀라서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그렇게 당장 말라버렸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면, 이 무화과나무에서 본 일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산더러 '번쩍 들려서 바다에 빠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믿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21장 18~22절 (공동번역성서)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아에서 나올 때에, 예수께서는 시장하시던 참에 멀리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열매가 있나 하여 가까이 가보셨으나,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 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여, 아무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할 것이다." 하고 저주하셨다.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들었다.

(중략)

이른 아침, 예수의 일행은 그 무화과나무 곁을 지나다가 그 나무가 뿌리째 말라 있는 것을 보았다. 베드로가 문득 생각이 나서 "선생님, 저것 좀 보십시오! 선생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렸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을 믿어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마음에 의심을 품지 않고 자기가 말한 대로 되리라고 믿기만 하면, 이 산더러 '번쩍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잘 들어두어라. 너희가 기도하며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그대로 다 될 것이다. 너희가 일어서서 기도할 때에 어떤 사람과 서로 등진 일이 생각나거든 그를 용서하여라. 그래야만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 11장 12~14절, 20~25절 (공동번역성서)


3. 해설[편집]


예수가 배가 고파 무화과 나무의 과일을 먹으려 해서 갔는데, 무화과 열매가 열릴 시기가 아닌지라[1] 열매가 안 맺힌 것을 보고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저주했으며, 그것이 이루어졌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야훼를 믿으면 믿는 대로 다 이루어진다고 제자들을 설득하며 마무리한다.

고대 문화의 맥락을 무시하고 읽으면, (마르코 복음서에 의하면 무화과 철도 아닌 시기에) 무화과 나무에 갔는데 열매가 열려있지 않았다고 해서 애꿎은 무화과나무에 저주를 내려 말라죽게 한다는 굉장히 황당한 내용이라, 반기독교무신론 측에서 자주 회자되는 성경 구절 중 하나이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자신의 무신론 서적인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도 이 일화를 들어 예수의 인격까지 거론하며 비난하기도 했다.[2]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현대 주석학적 관점을 따라 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여서 읽지 않었기에 나온 감상이다.[3] 성경 역시도 일종의 글이며, 당연히 다른 글들처럼 문자적 의미와 비유적 의미 등을 저자의 의도에 따라서 섞어가며 말한다. 따라서 '문자적으로만 읽자'나 '비유로만 읽자'는 이분법을 거르고, '저자가 의도했을 1차적인 문필적 의미'를 먼저 탐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4]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성경에 대한 주석은 개인들의 주관적이고 감상적인 독후감으로 변질된다.[5] 저자의 문화적 맥락에서 독서하는 건 그리스도교 교리와 무관한, 현대 비평적 주석학의 당연한 전제이다.

이제 문화적 맥락에서 보자. 과일의 결실은 전형적인 고대 유다 스타일의 비유이다. 무화과 이야기와 비슷한 비유인 이사야 5장의 포도밭 비유만 하더라도 1절부터 4절까지만 떼어놓고 보면 고대 유다의 실연(失戀) 노래로, 사랑에 배신 당한 남성이 여인을 포도에 비유하는 노래이다. 여기서 배신한 여인(포도밭)은 이스라엘 집안으로 설명되는데, 이와 비슷한 화법이 무화과 이야기에서 반복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신약이 구약에서 시편 및 이사야서를 특별히 많이 인용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또한 예수의 성전 정화와 연계하여 생각한다면, 무화과를 구약 이스라엘로 읽는 독법의 설득력을 더욱 높인다.[6] 곧 무화과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a fig tree: A symbol of Old Covenant Israel (Jer 8:13; Hos 9:10). Jesus curses it because it is barren and has no figs (Mk 11:21). Symbolically, then, he announces God's curse on the unfaithful of Israel—i.e., those who refuse him as the Messiah and lack the fruits of repentance (3:8-10; 21:41, 43). Israel's faithlessness is a negative example: the Church must learn from the nation's mistakes and pray instead with faith and confidence (21:21; 17:20; Jas 1:6).

무화과: 구약 이스라엘의 상징(예레 8,13; 호세 9,10). 무화과가 열리지 않았기에 예수는 이를 저주한다(마르 11,21). 따라서 상징적으로 그는 이스라엘의, 즉 메시아로서의 그를 거부하고 통회의 결실이 결핍된(3,8-10; 21,41.43)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대한 하느님의 저주를 선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부정적 예시이다: 교회는 그 민족의 실수에서 배워야 하고, 대신에 신앙과 신뢰로 기도해야 한다(21,21; 17,20; 야고 1,6).

Ignatius Catholic Study Bible 마태오 21장 19절 주석


In Mark the effect of Jesus’ cursing the fig tree is not immediate; see Mk 11:14, 20. By making it so, Matthew has heightened the miracle. Jesus’ act seems arbitrary and ill-tempered, but it is a prophetic action similar to those of Old Testament prophets that vividly symbolize some part of their preaching; see, e.g., Ez 12:1–20. It is a sign of the judgment that is to come upon the Israel that with all its apparent piety lacks the fruit of good deeds (Mt 3:10) and will soon bear the punishment of its fruitlessness (Mt 21:43). Some scholars propose that this story is the development in tradition of a parable of Jesus about the destiny of a fruitless tree, such as Lk 13:6–9. Jesus’ answer to the question of the amazed disciples (Mt 21:20) makes the miracle an example of the power of prayer made with unwavering faith (Mt 21:21–22).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의 무화과나무 저주 효과는 즉각적이지 않다; 마르 11장 14절, 20절을 보라. 마태오는 무화과를 즉시 마르게 함으로써, 기적을 들어높인다. 예수의 행위는 독단적이고 심술궂게 보이지만, 설교의 일부분을 생생히 상징화하는 구약 예언자들의 그것과 유사한 예언적 행위이다; 가령 에제 12장 1-20절을 보시오. 이는 이스라엘 위에 닥칠 심판의 표징이다. 이스라엘은 외관상의 경건함과 함께 선행의 결실이 부족하며(마태 3장 10절) 곧 열매 없음에 대한 벌을 받을 것이다(마태 21,43). 일부 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열매 없는 나무의 운명에 대한 루가 13장 6-9절과 같은 예수 비유 전통의 발전이라고 주장한다. 놀란 제자들의 질문(마태 21장 20절)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이 기적을, 흔들림 없는 신앙의 기도가 가진 힘의 예시로 만든다(마태 21장 21-22절).

-New American Bible Revised Edition 마태오 21장 18-22 주석


Mark again sandwiches one story into another, framing the prophetic demonstration against the Temple with the cursing of the fig tree (which is bearing no fruit), a figure for God’s judgment in Israelite tradition.

[
마르코는 다시 한 스토리를 끼워넣는다. 성전에 대한 예언적 입증을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에 대한 저주 이야기로 틀을 잡는다. 이는 이스라엘의 전통에서 하느님의 심판을 비유한다.
]

Michael D. Coogan 편집, 『The New Oxford Annotated Bible with the Apocrypha』,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3판, 마르코 11,12-25

[
26
]
주석


곧 1세기 독자들에겐 무화과 이야기가 복잡한 암호 풀이 수수께끼가 아니었고, 난해하고 뜬금없는 글도 아니었다. 글의 흐름은 독자가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을 무화과나무에 비기면서 탄식하는 구약성경 내용(예레 8,13; 미카 7,1)을 떠올리도록 의도되어 있었고, 예수의 행위에서 복음서의 그리스도론을 유추하도록 문학적 장치를 배치하였다.


3.1. 구약 참고 구절[편집]


1내 친구를 위하여 나는 노래하리라,

내 애인이 자기 포도밭을 두고 부른 노래를.

내 친구에게는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이 하나 있었네.

2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어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

그 가운데에 탑을 세우고

포도 확도 만들었네.

그러고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들포도[7]

를 맺었다네.

3자 이제, 예루살렘 주민들아

유다 사람들아

나와 내 포도밭 사이에

시비를 가려 다오!

4내 포도밭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했더란 말이냐?

내가 해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나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어찌하여 들포도를 맺었느냐?

5이제 내가 내 포도밭에 무슨 일을 하려는지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울타리를 걷어치워 뜯어 먹히게 하고

담을 허물어 짓밟히게 하리라.

6그것을 황폐하게 내버려 두어

가지치기도 못 하고

김매기도 못 하게 하여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올라오게 하리라.

또 구름에게 명령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7만군의 주님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집안이요

유다 사람들은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나무라네.

그분께서는 공정을 바라셨는데

피 흘림이 웬 말이냐?

정의를 바라셨는데

울부짖음이 웬 말이냐?

이사야서 5장 1-7절[8]


하늘의 군대는 모두 없어지고

하늘은 두루마리처럼 말리며

그 군대는 모두 시들리니

포도 잎이 시들 듯,

무화과나무에서 열매가 시들 듯하리라.

이사야서 34장 4절


내가 거두어들이려 할 때

— 주님의 말씀이다. —

포도나무에 포도가 하나도 없고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하나도 없으리라.

이파리마저 말라 버릴 것이니

내가 그들에게 준 모든 것이 사라지리라.

예레미야서 8장 13절


10내가 처음 만났을 때

이스라엘은 광야의 포도송이 같았다.

내가 처음 보았을 때

너희 조상들은 첫 절기의 무화과나무 맏물 같았다.

그러나 바알 프오르에 이르자

그들은 우상에 몸을 바쳐

저희가 사랑하던 것처럼 혐오스럽게 되어 버렸다.

16에프라임은 찍히고

뿌리가 말라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들이 자식들을 낳는다 하여도

나는 그들의 태에서 나온 그 소중한 것들을 죽이리라.

호세아서 9장 10절, 16절


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망쳐 놓고

내 무화과나무를 쪼개어

껍질을 벗기고 내던져 버리니

가지들이 하얗게 드러났다.

요엘서 1장 7절


아, 슬프다!

나는 여름 과일을 수확한 뒤에 남은 것을 모으는 사람처럼,

포도를 딴 뒤에 지스러기를 모으는 사람처럼 되었건만

먹을 포도송이도 없고

내가 그토록 바랐던 햇무화과도 없구나.

미카서 7장 1절


4. 대중매체[편집]


만화 세인트 영멘에서는 예수가 이 말을 한 이유는 진짜로 공복이라서 홧김에 한 거라고 한다. 그리고 예수를 보필하는 천사들도 이걸 따라한다. 가령 고추냉이를 잘못 먹고 예수가 쓰러지자 우리엘이 뛰쳐나와선 '저주 받을지어다! 고추냉이는 앞으로 영원히 열매 맺지 못하리라!'라고 말한다. 하지만 곧 예수가 고추냉이의 참맛을 알게 되자 '열매를 맺어도 좋다'라고 한다.


5.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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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화과는 심고 3년이 지나면 수확이 가능하고, 1년에 2~5번 정도 열매를 맺는다. 철 이른 무화과를 '비쿠라(בכורה)'라고 부르며 보통 먹지 않고 버리고, 늦게 열린 무화과를 '테에나(תאנה)'라고 부르고 먹는다. 예루살렘 입성을 3월 말에서 4월 초로 본다면 비쿠라가 있을 시기이다. 그런데 성경 본문에는 저 시점이 무화과가 열리지 않을 시기라고 서술되어 있는데, 이 '무화과가 열리지 않을 시기'라는 것은 테에나가 열리지 않았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비쿠라를 무화과로 취급하지 않았고, "무화과의 전령"이라 불렀다고 한다. 익지 않아서 안 먹는 것이니 배가 불러서 그랬단 오해는 말자. 사실 먹긴 먹었다. 테에나만큼 달진 않았지만 어린이들의 좋은 간식이기도 했고, 가난한 이들과 여행자를 위해 비쿠라는 남겨두는 것이 관례였다.[2] 러셀은 이 일화 자체를 비판한 것이지 러셀도 예수가 인격자라는 건 인정했다. 다만 석가모니소크라테스보다 한 수 아래라고 평했다.[3] 러셀 시대의 고대 근동학이 초보적 수준이었음을 고려하자.[4] 즉 문자로 읽고 싶을 때 문자로 읽고 비유로 읽고 싶을 때 비유로 읽으라는 게 아니다.[5] 비유컨대, 일본 문학에서 붉은 실 이야기가 나오면 당연히 연애 뉘앙스를 일단 전제하고 읽어야 하듯.[6] 마르코 복음서의 11장을 보면, 예수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이야기의 전반부(12~14절)가 소개된 뒤, 예수가 예루살렘에 들어가 성전을 정화하는 장면(15~18절)이 나오고, 이튿날 다시 그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렸다는 것을 발견하는 장면(19절~21절)이 나오는 것은 이러한 관점에서 서술된 것이다.[7] 과거 한국에서는 이 들포도를 개머루로 해석하였다.[8] 이 노래는 4절까지는 고대 유다의 통속적인 실연(失戀) 노래의 스타일을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