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천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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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무명천 할머니는 제주 4.3 사건 당시인
토벌대의 총격으로
아래턱을 소실하였다.
그 후, 정상적으로 말을 하거나 먹지 못한 채
2004년 9월 8일 향년 나이 90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현재 생가에 남아 있는 소개글
본명은 진아영(秦雅英)으로 제주 4.3 사건 당시 총상으로 인해 턱이 사라진 채로 평생을 산 인물이다. 본관은 풍기(豊基).
2. 전란이 뒤흔든 생애[편집]
1914년 전라남도 제주군 구우면 판포리(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판포리)[2]#에서 태어나 해녀로 일하며 오빠 내외의 농사일을 돕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으나, 제주 4.3 사건이 진행 중이던 1949년 1월 12일, 고향 마을에 난입한 남로당 무장대를 소탕하기 위해 작전중이던 신원 불상의 토벌대[3] 가 발사한 총에 얼굴을 맞았다. 이 때 그녀의 나이 36세였다.
"4.3사건 당시에도 그 할머니는 귀가 멀어났주.[4] 토벌대가 들이 닥치자 울담 쪽에 숨었는데 경찰이 쏜 총에 턱을 맞은 거라. 그 때가 판포에 폭도[5] 가 들어온 때였어. 그때 턱이 없어져 버렸지. 내가 가 봤는데 걸레로 상처를 싼 채 할머니에 의해 눕혀있었어. 죽은 사람을 왜 눕혀놨는지 하며 생각했는데 살아있었어. 근데 턱이 없었져서 차라리 죽는게 나았었지. 어려운 시절이어서 그냥 내버려 두어도, 살이 썩어 가면서도 모진게 생명이라 살아나더라..."
사촌 진위현 씨 증언
그 이후 한 달간 의식을 잃고 투병생활을 하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으나 이후 아래턱을 소실하는 중상을 입었고 이후 평생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음식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하는 불편한 삶을 살아왔다. 부상 이후 그녀는 부상당한 아랫턱을 하얀 무명천으로 가렸는데 이로 인해 '무명천 할머니'라는 별명이 생겼다.
"잠깐 집을 비울때도 할머니는 안팎으로 자물쇠를 꽁꽁 잠그고 다녔지. 자물쇠를 얼마나 자꾸 열고 닫았는지 반들반들 길이 잘들어었주.
할머니는 턱이 없어서 입안이 심하게 헐었지. 턱이 없으니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고 말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지. 잔치집이나 상가집에서 음식을 주어도 꼭 싸가지고 집에 가서 혼자 먹었주."
이웃 송민순 할머니 증언
부상당한 이후엔 부모님을 여의어 사촌과 언니가 있던 제주시 한림읍 월령리로 옮겨와 남은 여생을 보내왔다. 턱 부상으로 인해 먹는 것도 어려워 죽으로 연명했으며 이로 인해 늘 위장병과 영양실조가 따라와 고생했다고 한다.
부상 후유증으로 평생을 약과 링거에 의지하여 살아야 했으며 턱이 없어 말을 못하니 손짓 발짓으로 대화를 했다.[6]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꺼리게 되어서 병원비를 벌기 위해 톳이나 해안선인장 열매[7] 를 뜯어 파는 일과 일주일에 두번 읍내에 있는 병원으로 가는게 외출의 전부였다. 또한 부상 당시의 트라우마로 인하여 다른 이들 앞에서 절대로 무언가를 먹고 마시지 않았으며, 대문과 방문에는 늘 자물쇠를 걸고 다녔다.
이후 조카와 뜻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
3. 대중매체에서[편집]
4.3 사건의 아픔을 대변하듯 너무나 비극적인 삶을 살았었기에 그녀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 많다.
무명천 할머니 타계 10년 후인 2014년 무명천 할머니를 추모하는 음악회가 열렸다.
4.3 사건 70주년을 맞은 2018년에는 그녀의 일대기를 쓴 그림책이 출판되었다.
민중가수 연영석은 자신의 4집 앨범에 내 이름은 진아영이라는 곡을 수록했다.
4. 여담[편집]
현재 무명천 할머니가 살던 제주 한림읍 월령리의 자택은 추모관으로 개조되어있다. 무명천 할머니가 살던 2001년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11]
5. 외부 링크[편집]
본 사건을 다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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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족들이 공개한 부상을 입기 전 젊었을 때의 사진이다. 아래 영상을 보면 정말로 턱뼈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2] 인근의 고산리와 함께 풍기 진씨 집성촌이다.[3] 경찰관이었다고 한다.[4] 해녀들은 오랜 세월, 오랜 시간 동안 잠수 작업을 하면서 수압 차이로 인한 중이염, 외이도 염증, 난청같은 청각장애를 얻는 경우가 많다.[5] 남조선로동당, 일명 남로당의 무장대.[6] 글을 써서 대화하면 되지 않느냐 싶겠지만 그녀는 문맹이었다. 그래서 물건을 살때는 지인이나 친척이 뜻을 짐작하고 써준 글을 들고 다녔다.[7] 생전 고인이 살던 월령리는 선인장의 자생지로, 주민들은 해안선인장의 열매를 따다 팔기도 했다.[8] 시인이자 제주일보 시민기자[9] 상복을 입어야 하는 가까운 친척.[10] "밝은 세상"을 뜻하는 제주어[11] 주방이었던 곳에 추모공간이 있으며 추모의 의미라면 약간의 선물을 올려놓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