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구정광대다라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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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보 제126호
불국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佛國寺 三層石塔 舍利莊嚴具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분류
유물 / 불교공예 / 기타
수량/면적
일괄
지정연도
1967년 9월 16일
제작시기
남북국시대(8세기)

파일:무구정광대다라니경1.jpg
無垢淨光大陀羅尼經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 개요
2. 형태
3. 발견
4. 논란
4.1. 제작연대 및 최고(最古) 논란
4.2. 제작장소 논란
4.3. 석가탑 중수기문 내용 관련 논란
5. 외부 링크
6. 같이보기




1. 개요[편집]


산스크리트: Rasmivimalavisuddhaprabhanama-dharani-sutra

김대성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불국사석가탑을 세우고 탑 속에 넣은 듯 보이는 불경. 국보 제126호인 불국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의 일부를 이룬다. 불교중앙박물관이 소장했지만 현재는 불국사 성보박물관에서 소장 중이고, 국립중앙박물관국립경주박물관이 복제본을 전시 중이다.

경의 원본은 대승경전이 대부분 그러했듯 산스크리트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한문 외에 호탄어 번역본만 남아 있다.

한국에서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라는 타이틀로도 유명하나, 제작연대가 확실하지 않아서 이설이 있으며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다.

다라니를 봉안하고 독송하는 공덕을 찬양하는 부분을 제외한, 최승무구청정광명대다라니(주문) 자체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이외에도 상륜당 안에 넣는 다라니, 불탑을 수리하는 다라니, 마음의 인발인 다라니, 우바새와 우바이를 위한 다라니, 육바라밀을 만족하는 다라니가 포함되어 있다. #

南謨颯哆颯怛底【顛以反下同】【毘也反脣聲一】三藐三佛陀俱胝喃【奴暗反下同二】鉢唎戍【輸聿反下同】陀摩捺娑【三】【去聲引】質多鉢唎底瑟恥哆喃【四】南謨薄伽跋底阿彌多喻殺寫恒他揭怛寫【五】【引聲六】怛他揭多戍第【七】阿喻毘輸達儞【八】僧𠿒【呵葛反】羅僧喝羅【九】薩婆怛他揭多毘唎耶跋麗娜【十】鉢剌底僧喝囉阿喻【十一】薩麼囉薩麼囉【十二】薩婆怛他揭多三昧焰【十三】菩提菩提【十四】勃地【亭也反下同】毘勃地【十五】菩馱也菩馱也【十六】薩婆播波【引】阿伐喇拏【上】毘戍第【十七】毘揭多末羅珮焰【十八】蘇勃馱㪍第【十九】虎嚕虎嚕莎【引】【引二十】

namaḥ sabatanān samyaksaṃbuddhakoḍinān pariśuddhe manasi abhyācatapaṭiṣṭhanān namo bhagavate amīta ayurṣasya tathāgatāsya oṃ sarvatathāgatāśuddhe ayurbiśodhani saṃharasaṃhara sarvatathāgata biryapalena pratesaṅhara ayusāra sāra sarvatathāgatasamaya bodhi bodhi buddhya buddhya bodhyaya bodhyaya nama sarvapāpaṃ abarabaranabiśuddhe bigatamala charabhiya subuddha buddhe huru huru svāhā


이하에서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약칭하여 '무구정경'이라고 한다.


2. 형태[편집]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경은 너비 약 8cm, 폭 6.5∼6.7cm에 전체 길이 620cm인 두루마리에 1행 8∼9자씩 경문을 적었다. 발견 당시 두루마리 중간까지 부식되고 산화되어 알아보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발굴 후 20여 년 사이 부식이 심해지는 문제가 발생, 1988년에서 1989년 사이에 대대적으로 보수했다.


3. 발견[편집]


파일:무구정광대다라니경2.jpg
파일:무구정광대다라니경3.jpg
발견 당시 함께 나온 사리구
함께 발견된 유물들

1966년 석가탑의 사리함을 노린 도굴[1]로 석가탑이 손상을 입고 붕괴 위기에까지 몰리자 긴급하게 유지, 보수를 위해 해체작업을 하던 중 석가탑 2층에서 사리구와 함께 발견되었다. 이 과정도 순탄치가 않았다. 2층 옥개석을 들어올리던 중 옥개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무지주가 부러지면서 옥개석이 땅바닥에 추락하는 사고가 났다.[2] 이러면서 2층 탑신 내부가 노출되어 그 안의 사리감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4. 논란[편집]



4.1. 제작연대 및 최고(最古) 논란[편집]



한국 국내의 언론이나 서적 등지에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임을 거의 확신하고 있으며, 이러한 내용으로 해외에 소개하기도 한다. 다만 이론(異論)의 여지 없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과는 달리 무구정경의 경우 제작연도와 저자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 때문에 아직 국제적으로 공인 받지는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무구정경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고자 추진하여 유네스코로부터 심사를 받았으나,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한국 사학계에서는 무구정경의 제작 시기를 대략 704-751년 사이로 추정한다. 근거는 산스크리트어로 된 무구정경을 처음 중국에서 한자로 번역한 때가 704년이고 석가탑은 751년부터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한 무구정경에는 지(地)가 埊으로, 초(初)가 𡔈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당나라 측천무후 시기인 690년704년에만 사용된 무주제자(武周制字)이다. 그렇기 때문에 못해도 불국사를 건립한 751년 이전에 만들어졌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 한국 학계의 주장이다.[3] 청주대학교의 김성수 교수는 경주시 구황리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706년에 만들어진 사리외함에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함께 안치했다.'고 새긴 글씨와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경의 필적을 감정하여 동일인이 썼다고 보고 석가탑 무구정경이 706년에 제작되었다고 추정했다.

무구정경의 정확한 제작연도를 모른다는 점으로 인해 중국에서는 690년에 간행되었다고 주장하는 묘법연화경을, 일본에서는 770년에 간행되어 소장 중인 백만탑다라니경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묘법연화경도 제작 연도가 기재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때문에 이들 모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로 인정받지 못했다.


4.2. 제작장소 논란[편집]


이 무구정경은 신라에서 만들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재료인 종이의 성분[4]과 활자의 서체가 8세기 신라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구정경이 발견되자 중국에서는 무주제자(武周制字)[5]가 있으니 중국산이라고 주장했지만, 한국 사학계에서 침착하게 반론을 제시했다.

무주제자는 한반도에서도 쓰였다. 8~9세기 동아시아 사회는 정세가 비교적 안정되어 수많은 신라방이 중국 각지에 형성되었을 정도로 한중 교류가 활발했으므로 중국에서 새로 만든 한자는 한국에서도 금방 들여와 쓰였다.

또한 전근대 중국에서 만든 인쇄물이라면 황제의 이름자를 빼는 피휘를 반드시 했는데, 불교가 탄압받아서 반체제 성향을 띠던 때도 아니고 중국에서 불교가 국가적으로 흥성했던 시대인데도 무구정경에는 당시 중국의 여황제 측천무후의 휘[6]인 조(照) 자가 버젓이 들어갔다. 즉 황제의 이름자를 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짓을 만약 중국 내에서 실수로라도 했다간 장형이나 귀양은 물론 활판 파기 후 재제작은 기본 옵션으로 각오해야 하고, 먄약 인쇄가 되어서 대중들에게 풀렸다면 관계자 전원 황제능멸죄로 모가지가 나갔을 것이다. 하물며 한 국가의 불사와 관련하여 공식적으로 외국까지 나가기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즉 중국 피휘의 영향을 받지 않는[7] 신라에서 제작되었다고 봄이 더 타당성 있다.


4.3. 석가탑 중수기문 내용 관련 논란[편집]


석가탑 중수기문에서 1024년 석가탑을 중수하면서 무구정경을 안치했다는 내용이 있어 통일신라시대가 아닌 고려시대에 제작하여 탑에 넣은 것이 아닌가 하는 논란이 있다. 다만 그렇다면 측천무후 재위기에만 사용되고 그 직후 중국에서 금지되고 한국에서도 잊혀졌던 무주제자(武周制字)를 측천무후 사후 3백 년이 지나 고려시대에 사용했다는 말이 되는데, 고려시대에 굳이 먼 옛날 잠깐 쓰였던 무주제자를 다시 쓴 다른 사례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이런 해석은 설득력이 낮다. 다만 원본을 재인쇄하여 안치하였다면 말이 되긴 한다.


5. 외부 링크[편집]




6.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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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도굴꾼들은 황룡사 목탑지의 사리장엄구도 도굴하였으며, 이후 수사로 황룡사 사리장엄구는 회수에 성공하였으나 사리와 사리함은 사라져 버린 후로 지금까지 문헌기록을 제외한 실물은 존재조차 확인되지 않았다.[2] 나무 지주로 당시에 쓰이던 나무 전봇대를 가져다 썼는데 이 전봇대 중 하나가 속이 썩어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부러졌다. 도굴꾼들의 장비가 체인블럭과 유압잭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직 나라가 가난하던 시절이라 일개 도굴꾼보다 국가기관의 장비가 더 열악했던 것이다. 추락한 옥개석은 일부가 파손되었는데 석가탑 2층 옥개석 모서리에서 볼 수 있는 부자연스럽게 이어붙인 듯한 부분이 바로 그 흔적이다.[3] 불국사에 위치한 불국사 성보 박물관도 해당 내용을 소개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4] 전남 구례 화엄사 서탑에서 발견된 백지묵서경과 같은 재질로 판명되었다. 백지묵서경 역시 무구정경과 같은 시대인 8세기 서책.[5] 당나라 측천무후 제위기에 만들어 쓴 글자. 690년부터 704년까지 쓰였지만 705년 당 중종이 사용을 중지했다.[6] 황제나 높은 분의 이름[7] 물론 신라, 조선 등 한국 역대 왕조도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나, 흥례문 현판처럼 중국 사신의 눈에 띌 확률이 높은 글귀에서는 중국 피휘를 챙겨줬지만 이런 국내용 문서에는 해당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