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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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2.1. 고대사
2.1.1. vs 주르첸 (여진)
2.3. 북원 멸망과 청나라 치하
2.4. 외몽골 독립과 공산주의 치하
2.5. 민주화 이후


1. 개요[편집]



몽골역사를 간략히 다루는 항목.[1]


2. 상세[편집]










2.1. 고대사[편집]


근대 이전에는 유목민족이 다들 그렇듯이 명확하게 혈통을 구분하기 어려우며, 이런저런 민족이 뒤섞여 있었다.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 흉노, 선비, 돌궐, 거란 등 무수한 유목민족이 명멸하였으며 그나마 명확하게 기원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당대 이후 등장한 '몽올실위'라는 부족명 정도. 역사의 전환점이 없었다면 몽골은 지금의 몽골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고,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아예 없었을지도 모른다.

일단, 오늘날의 몽골 영토에는 원시 튀르크인과 동일한 민족이거나 그 후손으로 추정되는 흉노족이 살면서 인류 역사 최초의 유목제국인 흉노 제국을 이루었고, 현대 몽골인의 조상들은 만주의 서부에서 기원하여 오늘날의 내몽골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2021년에 네이처 지에 등재된 논문에 의하면, 고대 몽골인은 기원전 7000년경에 만주의 요하 일대에서 기장 농사를 짓던 정주 농경민에서 기원한 민족이라고 한다.#[2] 때문에 유목민으로서의 몽골인은, 모종의 이유로 만주의 서부에서 몽골 고원으로 흘러들어간 고대 농경민들이 현지의 척박한 환경 때문에 수렵채집민을 거쳐 유목민이 되면서 형성되었다고 추정된다.


2.1.1. vs 주르첸 (여진)[편집]


  • 여진 = 금나라 = 주션
본래 거란 (요나라)에 복속되어 있던 몽골은 1114 ~ 1125년 여진 (금나라)이 거란을 멸하는[3] 와중에 독립하였다. 이때 등장한 몽골의 첫 영웅이 카불 칸인데, 그는 금나라가 남송과의 전쟁에 몰두하는 동안 (1125 ~ 1138년) 세력을 강화하였다. 1135년과 1137년, 몽골은 금나라의 배후인 동몽골 일대를 공격, 초원에서 여진 세력을 몰아내었다. 몽골의 성장은 금나라가 남송과 화의를 맺게 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1146년에 카불 칸이 사망하자, 그의 사촌 동생인 암바가이 칸이 계승하였다. 하지만 그는 타타르 족에게 배신당하여[4] 금나라에 넘겨졌고, 남송 정복을 준비하던 해릉양왕은 배후를 안정시키고자 암바가이 칸을 잔혹히[5] 처형하였다. (1156년) 이때 그는 자신의 후손들이 복수할 것이라 외쳤다고 한다. 뒤를 이은 카불 칸의 아들 쿠툴라 칸 역시 여진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1160년경) 이후로 칭기즈칸 (1189년 칸 선출) 이전까지 칸을 자처하는 이는 없었으며 쿠툴라 칸의 조카 예수게이가 보르지긴 추장을 맡을 뿐이었다.[6]

점점 성장하는 몽골을 경계하던 금나라는 이이제이 정책을 폈고 타타르 족과 동맹하여 몽골을 종종 침략하였다. 많은 몽골인들이 금나라로 끌려가 강제 노동에 시달리거나 시종이 되었다. 그럴수록 몽골인들의 복수심과 통일에 대한 갈망은 더욱 깊어졌다. 예수게이 역시 1171년, '주르첸의 사냥개'인 타타르 족에게 독살당하였다. 이후로 그의 안다 (의형제)였던 케레이트 족의 토그릴과 그의 경쟁자였던 타우치우트 부족이 득세하였다. 한편, 금나라는 만리장성의 외벽이라 할 수 있는 계호를 쌓아 몽골을 경계하였다.


2.2. 몽골 제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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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칭기즈 칸이 등장하면서 몽골의 역사 뿐만 아니라 세계의 역사를 뒤바꿔 놓는다. 13세기 몽골은 온 아시아를 뒤엎고 일부 유럽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등 최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시대 역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몽골 제국 문서 참조.

단순히 군사적인 업적뿐만 아니라, 몽골이라는 민족과 국가의 정체성이 본격적으로 구체화된 것이 바로 몽골 제국 시기였으며 아래에 서술하겠지만 지금의 몽골인 또한 이 시기에 대한 각별한 존경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폭발적인 활력이 쿠빌라이 칸 시대 이후 무리하게 소진되면서 몽골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분할되어 나간 칸국은 점차 현지인의 반발로 그 입지가 축소되어 가거나 현지화되어 사실상 몽골사로 다루기 어려워졌으며, 원나라1368년 만리장성 밖으로 쫓겨나 북원으로 잔존하였다. 그 후 영락제가 북방을 토벌하면서 유목민족의 입김은 다시 한번 약해졌으나 훗날 몽골은 과거 송나라가 당했던 최초의 한족 전체 정복에 이어 명나라에게 토목의 변이라는 중국사 최악의 3대 굴욕 중 하나를 선사해주게 된다.

이 당시 고려를 침공하여 원 간섭기[7]가 시작됐다. 몽골은 고려의 저항이 강력해 점령은 포기하고 대신 부마국으로 전락시키며 내부정치에 간섭하였고, 몽골인들은 고려보다는 대부분이 중국 송나라에 이주하거나 서쪽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 등으로 이주하였다. 그래서 고려로 귀화한 몽골계는 위구르계 장씨 등 매우 적다.


2.3. 북원 멸망과 청나라 치하[편집]


그러나 15세기 후반부터 명나라의 입김이 약해지면서 몽골 지역은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오이라트 중심으로 서몽골이 통일되면서 에센 타이시에 의해 토목의 변을 일으키기도 했다. 에센은 칭기즈칸의 씨족이 아니라서 칸을 칭하지 못했고, 대신 그 아래 지위인 타이시를 칭했다. 이후 오이라트는 분열되어 서쪽으로 후퇴하지만 이번엔 동몽골 쪽에서 정통 보르지긴 혈통의 다얀 칸이 다시 한 번 몽골 세력을 규합해 명나라를 압박하였고, 16세기 중반 다얀의 손자 알탄 칸은 명나라의 수도인 베이징을 포위하기도 했다. 이것이 경술의 변으로 몽골은 다시금 일시적으로 허베이 성을 재정복했다. 그리고 오이라트는 준가르로 이어진다.

하지만 내몽골1635년 후금홍타이지에게 정복당하고, 대칸의 지위도 그에게 넘어간다. 이후 후금은 청나라로 변모하였고 나라가 망할 때까지 몽골의 대칸을 겸했다. 만주족과 혼인 동맹으로 종족이 일체화된 것이다. 이후 청나라는 숙적인 외몽골의 준가르도 멸망시켜 외몽골도 손에 넣는다. 청나라는 자신들의 선조였던 금나라가 몽골에게 망한 것을 상기하여, 몽골이 흥할까 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몽골의 힘을 약화시키려고 했으며, 그리하여 먼저 자신들에게 충성을 맹세한 내몽골은 혼인 동맹 및 팔기군 합류로 일체화시키는 한편 외몽골은 반 독립지역으로 따로 놀게 놔두되 행사에 돈이 많이 들고 비폭력적인 티베트 불교를 몽골인에 장려하였다. 이 시기 청나라는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와 같은 정치적 지도자로 젭춘담바 후툭투(Жавзандамба хутагт)를 선택했으며, 달라이 라마와 마찬가지로 환생하는 존재로 믿어진 젭춘담바 쿠툭투는 8대에 걸쳐 몽골을 통치했다. 1대 젭춘담바는 칭기즈칸의 직계 후손인 자나바자르이다. 14살에 2년간 티베트로 불교 유학을 가서(1649년) 달라이 라마로부터 ‘젭춘담바 쿠툭투(Jebtsundamba Khutuktu)’라는 최고 권위의 이름을 하사받고 돌아와서는 카라코룸의 에르덴조 사원에 머물면서 몽골의 법왕으로 통치했는데, 그가 죽고 나서 환생자로 인정받은 역대 젭춘담바 쿠툭투들은 복드 칸을 포함해서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티베트인들이다.[8] 몽골인의 첫째 아들은 라마승으로 출가해야 했다.

이후 러시아가 남하해 오면서 잦은 전투가 벌어졌으나 옹정제 시기 캬흐타 조약으로 외몽골부랴티아를 가르는 이 지역의 국경선이 정해졌으며, 이는 현대 몽골과 러시아의 국경으로 이어졌다.


2.4. 외몽골 독립과 공산주의 치하[편집]


신해혁명 이후 복드 칸 등은 러시아 제국의 힘을 빌어 복드 칸국을 건국하며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몽골을 청나라의 영향력에서 떼어낸 후 자신들이 차지하려는 야욕을 보였다.

1915년 캬흐타 협정으로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자 캬흐타 협정도 무효화되었다. 그러자 중국은 다시 몽골을 복속하려 했다. 1919년 10월 중국 안휘군벌 쉬수정외몽골 출병을 단행했다. 결국 1919년 11월 복드 칸이 항복했고, 몽골의 자치권은 철폐되었다. 1921년까지 몽골은 중국 북양정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쉬수정은 몽골에서 학정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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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딘 수흐바타르허를러깅 처이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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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이무렵 소련의 영향으로 몽골에도 공산주의자들이 급증하고 있었다. 담딘 수흐바타르허를러깅 처이발상가 이끄는 몽골 공산주의자들은 몽골 인민혁명당을 세우고 소련의 지원을 받아 중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독립된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그러던 1920년, 러시아 백군의 일파를 지휘하던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이 몽골의 독립을 돕겠다는 제안을 했고, 복드 칸이 이를 받아들였다. 운게른은 중국에 유폐되어 있던 복드 칸을 구출하였다. 복드 칸의 몽골군과 연합한 운게른의 백군 부대는 1921년 2월 몽골의 수도 후레를 점령하여 중국군을 몰아내고 외몽골 지역의 지배권을 되찾았다. 이후 운게른과 복드 칸에 의한 연합 정권이 몽골을 다스렸다. 운게른과 복드 칸의 사이는 매우 좋았고, 이 둘에 의한 연합 정권은 마침내 중국과 소련의 양 손아귀에서 벗어난 독립국이 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운게른 남작은 불교에 심취했고,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는 몽골에 숨어있던 러시아인,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을 처형했다.

한편 반공주의자 운게른이 나타나자 수흐바타르와 처이발상이 이끄는 몽골 인민혁명당은 수흐바타르 타도를 내세우며 몽골인민유격대를 조직했다. 또 수흐바타르는 레닌에게 간절히 도움을 요청했다. 레닌은 진작부터 몽골을 노리고 있었지만 중국과의 직접적인 갈등을 피하기 위해 몽골에 간섭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1년 몽골이 반공주의자 운게른의 손에 넘어가자 이전까지 몽골 인민혁명당의 지원을 거부하고 있던 레닌은 1921년 3월 마침내 몽골을 접수하기 위해 비밀리에 극동으로 소련군을 이동시켰다.

1921년 3월 운게른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소련군이 참전했고, 소련군의 지원을 받은 수흐바타르는 그해 7월 8일 운게른 정권을 전복시켰다. (몽골의 현 수도인 울란바토르는 그 수흐바타르를 기념하여 이름 붙인 도시다.) 소련은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복드 칸을 명목상 몽골의 지도자로 계속 남겨 두었지만, 복드 칸의 모든 권력을 강제로 빼았아 7월 10일 수립된 공산당 인민임시정부에게 모든 권력을 넘겼다. 물론 실질적인 정권의 운영은 소련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1924년 복드 칸이 사망하자 형식상 남아있던 왕정이 공식 폐지되고, 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며 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소련의 위성국이 된 대가는 가혹했다. 담딘 수흐바타르가 일찍 사망하자 소련은 허를러깅 처이발상을 몽골의 지도자로 낙점했다. 그러나 소련의 지령에 따라 철저히 움직이던 허를러깅 처이발상은 몽골의 철저한 스탈린주의화를 실시하며 이른바 몽골의 스탈린이라 불릴 만큼 악명 높은 학살을 벌여댔다. 공산당이 집권하자 적색 테러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소련은 외견상 몽골의 독립을 유지시켜줬지만, 이는 중국이 몽골에 대한 종주권을 행사하려는 명분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일 뿐이었고, 위성국으로서 몽골이 소련의 간섭을 받지 않고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것 하나 없었다.

소련은 몽골의 민족적 정체성의 근간이 되고 있는 칭기즈 칸에 대한 존경, 몽골 문자, 티베트 불교, 유목 생활 등을 금지하면서 사실상 몽골 민족성 자체를 말살하려 했다.

일단 국부 칭기즈 칸이 격하되어 칭기즈 칸에 대한 어떠한 찬사도 금지되었고, 심지어 칭기즈 칸에 대해 언급하는 것 조차도 금기시되었다. 심지어 역사 교과서에도 칭기즈 칸이 지워졌다.... 몽골 제국이 세계 지배를 지배했던 역사 전체가 몽골에서는 공식적으로 지워졌고 이에 대해서 어떠한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여담으로 칭기즈 칸에 의해 200여년간 몽골-타타르의 멍에라 불리는 치욕의 시대를 엮었던 러시아에서는 칭기즈 칸에 대해 치를 떨었고 이 때문에 소련이 가혹하게 칭기즈 칸 금기 정책을 펼쳤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공산주의 시절 몽골인들은 부모가 자식으로 몰래 칭기즈 칸과 몽골의 자랑스러웠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고 한다. 칭기즈 칸에 대한 금기 정책은 공산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이어졌다. 지금 40대 이상 몽골인들은 과거 어린 시절 누구나 칭기즈 칸에 대해 알고 있었고 모두 그를 자랑스워했지만 누구도 그의 이름을 말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몽골 문자 사용이 전면 금지되고, 소련과 동구권에서 쓰이는 키릴문자로 강제로 변경되었다. 그나마 중국 내의 내몽골에서 몽골 문자는 살아남아 지금도 여전히 내몽골에서 쓰이고 있다. 한국으로 친다면 남북한에서 한글이 쓰이지 않고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한글이 쓰이는 것 같은 상황. 그러나 (외)몽골에서는 소련의 절저한 문자 말살 정책의 결과, 공산정권이 붕괴되고 민주화된 이후 지금도 몽골에서는 몽골식 키릴 문자가 사용되고 있다. 물론 민주화 이후 몽골에서도 키릴 문자를 버리고 몽골 문자를 사용해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움직임이 있어왔지만 소련의 철저한 키릴 문자 교육으로 민주화된지 35년이 지난 현재도 몽골에서는 여전히 키릴 문자가 사용되고 있다. 다만 몽골에서도 간혹 몽골 문자로 쓰인 간판 등이 보이지만 이는 우리나라에서 일부 중국집이 한자 간판을 쓰는 것과 비슷한 용도로 옛스러운 느낌을 내기 위한 목적일 뿐 의사소통을 위한 목적으로 몽골 문자는 사실상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티베트 불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이루어졌다. 티베트 불교는 몽골의 국교와 마찬가지로 1920년대까지만 해도 전체 남성 인구의 3분의 1이 승려일 정도로 몽골에서는 엄청난 영향력을 과시했다. 공산당은 간단 사원 등 극히 일부 사원만이 외국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용으로 살아남고 나머지 700여개에 달하는 불교 사찰을 파괴되었다. 불교 승려들은 대대적으로 숙청당했다.

몽골 전통과 문화의 근간이자 상당수 사람들의 경제적 토대인 유목마저 금지되었고, 기존 유목민들을 대거 도시로 강제 이주시켰다.

또 소련은 몽골계 지역들을 분열시켜 몽골 민족의 단합을 막고자 했다. 스탈린은 몽골의 북쪽 지방인 부랴티아를 몽골에서 분리시켜 직접 소련에 편입시켰다.[9] 그리고 1930년부터는 몽골과 부라티야 간의 인적 이동을 금지시켰다. 또 당시 몽골에서는 중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내몽골까지 독립하여 통일을 이루려는 범몽골주의의 움직임이 대세였지만 소련은 이마저도 좌절시켰다.

중국의 일부로 계속 남아있던 내몽골은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일본군이 침략, 내몽골 동부 흥안성을 포함하는 만주국, 내몽골의 나머지 지역에 몽강국이라는 괴뢰 국가들을 세웠다.

소련에서 대숙청의 광풍이 불던 1937년 스탈린은 몽골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을 목적으로 대대적인 정치적 피바람을 일으켰고, 1937년에 시작한 이 피바람에 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또다시 죽어 나갔다.

1939년 할힌골 전투가 벌어졌으나 그 밖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풍파를 비교적 조용히 지나갔다.

1945년 8월 9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뒤늦게 허겁지겁 극동 전쟁에 참전한 소련의 만주 작전으로 만주국, 몽강국은 축출되었다. 이 당시 관동군과 꼭두각시 만주군 그리고 몽골기병대로 조직된 몽강국 군대는 소련군의 기병 및 기갑, 기계화보병에 귓밥도 안 되고 발렸고, 아이신기오로 푸이와 몽강국 주석이었던 데므치그돈로브 두 사람은 소련 공수부대에 포로로 잡혀 전범 재판을 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후 마오쩌둥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후 외몽골은 소련에 의해 독립되었고, 내몽골은 1947년 5월 1일 중국 공산당의 행정개혁으로 내몽골자치구가 설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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욤자깅 체뎅발

1952년 처이발상이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의사에게 치료를 받다가 의문사했고, 스탈린은 처이발상의 후계자로 욤자깅 체뎅발을 지명했다. 뒤이어 독재자가 된 체뎅발은 이후 32년간 몽골을 철권 통치했다. 체뎅발 치하 몽골은 소련의 16번째 공화국으로 불려질 만큼 철저한 친소 공산주의 국가가 된다.

그러나 소련의 16번째 공화국 소리를 들을 정도로 철저하게 인민들을 억압하며 소련 똥구멍을 핥아줬던 체뎅발 역시 1984년 강판당했고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모스크바에서 주사를 맞던 도중 갑자기 사망했다...

2.5. 민주화 이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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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몽골 민주화 시위 당시 사진

아시아의 수많은 공산국가들의 체제 전환 중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페레스트로이카를 본받아 80년대 후반부터 개혁, 개방 정책을 실시했고 소련의 붕괴와 발맞춰 민주주의를 일찌감치 도입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면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체제 전환에 성공했다. 다른 많은 공산권 나라들이 민주화 과정에서 크고 작은 혼란을 겪은 것에 비해 몽골은 몽골인민혁명당(현 몽골 인민당)이 추한 꼴 보이지 않고 순순히 세계사의 흐름에 따라 민주주의로 이행해 민주화 이후에도 많은 국민들이 지지하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자원을 개발하는 중이다. 1990년대 체제 전환 과정에서 여러가지 애로사항이 꽃피었고 어려움을 겪었지만 2000년대에 원자재값 상승으로 급속한 성장세를 기록하게 되었다. 다만 경제 전반이 원자재에 너무 의존하다 보니 원자재값 동향에 따라 경제가 흔들리는 문제점이 있다.

한국 언론은 몽골의 제대로 된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 텔레비전에서 몽골 이야기가 나오면 열에 아홉은 그저 초원에서 이나 치고 염소젖이나 짜먹고 게르에서 거주하는 장면밖에 안 나온다. 외국에서 대한민국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를 내보내면서 시골에서 갈고 몰고 돼지 키우는 장면만 줄창 틀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잘 모르는 사람은 대한민국이 아직도 농사만으로 밥 먹고 사는 나라인 줄 잘못 알 것이다. 몽골도 엄연히 도시가 있는 나라다. 단지 상대적으로 '촌'이 더 많을 뿐이다. 한국의 남매 가수인 AKMU의 사례에서 이러한 편견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AKMU는 부모님이 개신교 선교사라 어렸을 때부터 몽골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처음에 몽골에 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소위 몽골의 스테레오 타입, 즉 게르와 초원, 양과 함께하는 생활을 상상했으나 현실은 아파트에서 생활하게 되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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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상에 오류가 하나 있는데, 제국은 몽골 초원이 아니라 이름대로 요하 유역에서 흥기한 나라이다. 몽골과 거란은 같은 민족은 아니지만, 둘다 선비족 계열의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이며, 같은 뿌리의 다른 민족으로 볼 수 있다.[2] 동일 논문에서 한국어일본어족, 몽골어족, 퉁구스어족튀르크어족을 동계로 보는 트랜스유라시아어족이 제안되었으나, 억지로 끼워맞추기를 해서 서로 무관한 어휘들을 동원어라고 우기는 내용이 다반사라서, 주류 언어학계는 트랜스유라시아어족 관련 부분에 대해 맹렬한 비판을 했다.[3] 잔존 세력이 서역으로 도주하여 서요를 세우긴 했다.[4] 그들과 화친하기 위해 그들의 족장과 결혼시킬 자신의 딸을 데려가다가 잡혔다.[5] 목마에 못박아 죽였다고 한다.[6] 근데 미국 학교에선 칭기즈칸을 중국 역사라고 가르친다. 참으로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7] 국내에선 내정간섭으로 배우지만 속국 내지는 속령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8] 훗날 담딘 수흐바타르 시대에 몽골을 지배하고 있던 복드 칸이 바로 8대 젭춘담바이다.[9] 부랴티아는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러시아 영토였다. 네르친친스크 조약 때도 부랴티아는 러시아 영토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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