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하메드 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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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메드 아민
Mohamed "Mo" Amin


출생
1943년 8월 29일
영국령 동아프리카 나이로비 이슬리
사망
1996년 11월 23일 (향년 53세)
코모로 그란데 코모레 인근 인도양
국적
[[케냐|

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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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직업
사진작가, 기자
활동기간
1954년~1996년

1. 개요
2. 일생
2.1. 에티오피아의 대기근 취재
2.2. 왼팔을 잃다
2.3. 사망
3. 가정 관계
4. 기타




1. 개요[편집]


모하메드 아민은 케냐 출신의 사진작가, 기자로, 20세기 후반에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중요한 사건들을 포착한 기사들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2. 일생[편집]


1943년 8월 29일에 영국령 동아프리카(오늘날의 케냐) 나이로비의 이슬리에서, 펀자브에서 이주한 가난한 이슬람교도 부부의 일곱 자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철도 공사에서 일하다가 1950년대 초에 탄자니아 지역으로 발령이 났고, 이렇게 탄자니아로 이주한 모하메드는 몇 년 동안 모아둔 동전 40실링으로 11살에 첫 번째 카메라인 박스 브라우니(Box Brownie)를 구매하여 사진 동아리에 가입하는 등 어릴 때부터 사진에 흥미를 보였다.

그러다가 1963년에 아민은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 시내에 카메라픽스(Camerapix)라는 잡지사를 차렸고,[1] 1965년에 아민은 혼란기였던 잔지바르에서 소련 및 동독의 군사 고문이 지도하는 군사 훈련 캠프를 발견하고, 여기서 찍은 모의 군사 훈련 사진을 생애 처음으로 독점 제공하게 된다. 그러나 아민은 이 사진으로 인해 KGB에 의해 체포되어 잔지바르의 교도소에서 28일 동안 수감되며 고문까지 당해 체중이 무려 28파운드(약 12.7kg)가 빠지게 되었다. 1969년 7월 5일에는 케냐의 경제 기획 개발부 장관이던 톰 음보야(Tom Mboya, 1930~1969)이 총에 맞은 후 그를 구하기 위한 의료진들의 분투를 취재하는데, 이 취재로 아민은 케냐에서 명실상부한 최고의 기자 자리에 오른 것은 물론, 처음으로 올해의 영국 카메라맨 상을 받았다.

이후 아민은 아프리카 전역의 전쟁과 쿠데타에 대해 보도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알리며 가장 신뢰받는 아프리카 사진 기자 중 한 명이 되었는데, 실제로 아민의 독점 보도는 종종 서구의 언론에서도 사용했다. 그 예시들을 들자면 모하메드 아민은 이디 아민[2] 시기의 우간다에 공식적으로 우간다 출입이 허용된 유일한 기자이기도 했으며,[3] 폐위된 에티오피아의 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새로운 실세인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의 명령으로 침실에서 암살되기 직전에 정원에서 노황제의 최후의 사진을 찍은 사람도 모하메드 아민이다. 그리고 1977년에 프랑스 언론은 중앙아프리카 제국의 참칭 황제인 장 베델 보카사대관식을 기록할 독점권을 확보했으나, 아민은 지역 극단에서 빌린 모자와 꼬리를 착용하고 잠복하여 보카사의 대관식을 취재하고 이를 해외에 보도하게 된다.

아민은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중동도 취재 범위로 삼았다. 1970년 9월에는 요르단을 장악하기 위한 검은 9월단의 봉기를 취재했는데, 아민은 서방 언론인들이 갈 수 없는 팔레스타인 군대 사이를 이동하여 이 사건을 취재했고, 1976년에 아민은 메카의 순례 장면을 TV 다큐멘터리로 촬영할 수 있다는 허가를 받은 최초의 기자가 되었다.

2.1. 에티오피아의 대기근 취재[편집]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그가 우리의 숨겨진 비극을 폭로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느낍니다. 에티오피아인들에게, 우리는 그를 사랑합니다. 그는 정말로 우리의 영웅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매우 특별합니다.

비스라트 알레무(Bisrat Alemu)[4]


카메라 앞에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어요. 그것이 저를 변화시켰습니다. 내가 촬영한 모든 것은 단지 이야기일 뿐입니다.

모하메드 아민


당시 실제 뉴스 영상, 워낙 기근의 현장이 참혹한 나머지 연령 제한까지 걸려 있다.[5]

1984년 10월 19~20일에 에티오피아 북부에 있는 코렘(Korem)이라는 마을의 임시 난민 캠프에서 에티오피아의 대기근 현장을 촬영하면서 아민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실제로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에티오피아에서는 가뭄의 영향으로 북부 지방에 집중적으로 일어난 이 기근으로 약 3,800만 명에 달하던 에티오피아 인구 중 775만 명이 기근의 영향을 받았고, 20만 명의 아이들이 고아가 되었으며, 30만~120만 명이 사망하는 끔찍한 참사가 발생했다.

1984년 10월 23일에 아민이 촬영한 영상은 BBC 9시 뉴스에서 송출된 7분짜리 뉴스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는데, 당시 영국 성인 인구 중 거의 1/3이 이 뉴스의 본방송을 시청했으며, 이 뉴스를 보도한 방송사 수는 세계 각지에 무려 400개가 넘었다고 한다.

이렇게 퍼진 뉴스는 국제적인 반향을 일으켰는데, 특히 아일랜드의 싱어송라이터 밥 겔도프라이브 에이드 등의 자선 콘서트를 열며 에티오피아 기근에 대한 구호 기금을 마련하고 당대의 세계적 가수들이 대거 참여한 We Are the World도 이 자선 활동의 일환으로 발펴되었다.

이 취재는 아민의 취재에 대한 가치관도 바꾸게 되었는데, 그 이전까지 아민은 '세상을 퍼뜨리고 싶다'는 취지로 취재를 하며 '특종'에 집착을 해왔다지만, 이 기근을 접한 후에는 '이야기에 진정으로 연결된' 취재를 하는 방식으로 바꾸게 되었다. 그리고 아민은 후에 "25년 동안 전쟁, 재난, 폭동, 심지어 이전에 있던 에티오피아의 기근까지 취재해 왔지만, 그동안 목격한 그 어떤 것도 이 기근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고 술회했다.

2.2. 왼팔을 잃다[편집]


1991년 6월 4일에 아민은 아디스아바바에서 에티오피아 내전을 취재하다가 탄약고 폭발 사고에 휘말리는데, 이 사고로 아민은 왼쪽 팔을 잃었으며, 심지어 음향 녹음가 1명은 아예 죽기까지 했다.

아민은 수술을 마치고도 하루도 안 있어서 침대에서 서류 작업을 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을 구했지만 카메라를 두고 온 동료 콜린 블레인(Colin Blane)을 꾸짖으며 카메라를 찾게 하라고 했다고 한다. 이후 아민은 의수를 달고 특수 제작한 카메라와 함께 3개월 후에 다시 업무에 복귀한다.

이후 아민은 국제 보도가 만들어낸 아프리카의 부정적인 이미지에 반발하며 1994년부터 아프리카 대륙의 발전상을 다룬 아프리카 저널(Africa Journal)이라는 주간 TV 쇼를 만들게 되고, 이 프로그램은 20여개국에 수출될 정도로 성공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 외에도 아민은 동아프리카의 야생동물과 우간다의 철도 등 다양한 분야들을 취재하기도 했다.

2.3. 사망[편집]


1996년 11월 23일에 아민은 에티오피아 항공[6]보잉 767에 탑승했지만, 이 항공기가 에티오피아 항공 961편 납치 사건에 휘말리며 바다에 비상 착륙하며 사망하게 된다.

아민은 조종석 입구 근처에 서서 납치범들을 설득하려고 했으며, 비행기가 해상에 착륙하자마자 벽에 부딪혀 죽을 때까지도 구명조끼를 입기는 커녕 좌석으로 돌아가지도 않았다고 한다.

아민이 사망한 후, 에티오피아의 기근 구호를 위해 10억 달러를 지원할 것을 약속한 조지 H. W. 부시 미국 전 대통령[7]은 "모하메드 아민이 몇 번이고 목숨을 걸고 살아왔기 때문에 오늘날 수백만 명이 살아 있다"라고 말했고, BBC의 토니 홀[8] 국장은 "최근에 있어서 모하메드 아민보다 더 큰 영향력을 미친 뉴스 카메라맨은 없었다"고 말했다.

3. 가정 관계[편집]


부인은 다르에스살람에서 만난 5살 연상의 돌리 카키(Dolly Khaki, 1938~)였는데, 카키는 파리에서 모델 제안을 받은 적까지 있을 정도로 미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니파였던 아민의 부모는 시아파 계열인 이스마일파 신도였던 카키를 별로 안 좋아해서 이 둘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고, 이 둘은 살림(Salim, 1970~)이라는 아들 1명을 낳는다.

엄청난 일 중독자였던 아민은 집을 너무 자주 비운 나머지 집안의 모든 중요한 의사소통을 메모로 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로 모하메드 아민의 아들인 살림 아민의 말로는 바쁠 때에 아버지는 8~9개월 동안 집을 비웠으며 어렸을 때 같이 있었던 적이 저녁 식사을 한 번 했을 때밖에 없었다고 한다. 다만 후에 아들이 아버지의 회사에 입사했을 때에는 아버지를 자주 보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아들에게 특혜를 주지 않기 위해 다른 직원들보다 아들을 더 박하게 대했다고 한다.

참고로 아민은 1980년대 중반부터 카메라픽스의 런던 지부 이사인 데비 게이저(Debbie Gaiger, 1958~)와 친한 관계를 맺기도 했으나, 의수 착용 후 우울증에 시달린 후에는 관계를 끊었다고 한다.


4. 기타[편집]


  • 상술했듯 지독한 일 중독이었는데, 실제로 아민은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 촬영 도구를 손에 들었고, 카메라픽스 사무실에 가장 먼저 출근해서 가장 늦게 퇴근한 사람이기도 했으며, 이런 일정을 자신의 직원들에게도 요구했다고 한다. 심지어 아들의 말에 따르면 모하메드 아민은 "주말, 공휴일, 크리스마스에도 매일 오전 2시부터 오후 8시까지 일을 했다"고 한다.

  •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며 필름 영상과 스틸컷을 동시에 촬영할 수 있어 별명이 '식스-카메라 모(Six-Camera Mo)'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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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로 카메라픽스는 1966년에 케냐로 본사를 옮겼고, 후에는 아프리카의 22개국에 분점을 차리게 되는 거대한 미디어 아젠시로 자라게 된다.[2] 모하메드 아민은 이디 아민과는 혈연 관계가 전무했지만, 성씨가 같았기 때문에 우간다에서는 이디 아민의 친척으로 간주되어 좋은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3] 물론 모하메드 아민은 이디 아민의 인권 탄압과 관련된 사진들을 찍은 후 이를 익명으로 보도했다.[4] 에티오피아 항공 961편 납치 사건에 휘말린 에티오피아인 사업가였으며, 아민의 마지막 모습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었다.[5] 실제로 이 기사에 논평을 단 영국인 저널리스트이자 BBC 특파원이던 마이클 버크(Michael Buerk, 1946~)는 이 기근을 '20세기의 성경적 기근', '지상에서 지옥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일컬었다.[6] 참고로 아민은 에티오피아 항공의 기내 잡지인 셀람타(Selamta)의 발행인이기도 했다.[7] 아민이 에티오피아의 기근을 취재할 당시에는 미국의 부통령이었다.[8] Tony Hall, 1951~. 2013년부터 2020년까지 BBC의 사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