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는 엉뚱해

덤프버전 :

모모는 엉뚱해
ちびまる子ちゃん / Chibi Maruko-chan


파일:마루코는.jpg

장르
일상
작가
사쿠라 모모코 (1~132화)
사쿠라 프로덕션 (133화~)
출판사
파일:일본 국기.svg 슈에이샤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원씨아이
연재처
리본
주니치신문 계열
레이블
파일:일본 국기.svg 리본 마스코트 코믹스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이슈 스페셜 코믹스
연재 기간
리본, 사쿠라 모모코판(정기)
1986년 8월호 ~ 1996년 6월호
리본, 사쿠라 모모코판(비정기)
2002년 1월호 ~ 2016년 1월호
리본, 사쿠라 프로덕션판(비정기)
2019년 11월호 ~ 현재
주니치신문 계열
2007.07.01 ~ 2011.12.31.
단행본 권수
파일:일본 국기.svg 17권 (2018. 12. 25.)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4권 (1999. 01. 26.)

1. 개요
2. 발매 현황
3. 특징
6. 미디어 믹스
6.2. 극장 애니메이션
6.3. 드라마
6.3.1. 일본
6.3.2. 대만
7. 기타
8.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일본의 일상물 만화로, 사쿠라 모모코슈에이샤의 소녀만화잡지 리본에서 1986년부터 1996년까지 연재했다. 이후 부정기 연재를 하다가 2018년 8월 15일 작가가 유방암으로 타계하자 그녀가 세운 사쿠라 프로덕션 소속 스태프들이 이어받았다. 단행본은 2018년 12월 25일 발간된 17권이 최종권이다. 또한, 무대를 현대로 옮긴 4컷 만화판이 2007년부터 2011년까지 주니치신문[1] 계열 일간지(도쿄신문 등)에 연재된 바 있으며, 단행본은 쇼가쿠칸에서 총 13권으로 완간되었다. 리본 연재판의 단행본 발행부수는 약 3,000만부.

이 만화의 주인공인 마루코의 풀네임은 작가의 이름(펜네임)과 같은 '사쿠라 모모코'이다. '마루코'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이유는 작가의 어릴 적 별명이 마루코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마루코는 작가의 분신격인 캐릭터로 오너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의미는 캐릭터 설명란에 서술.

저자 본인이 추억/성장담을 풀어나가는 자전적 만화라는 점으로 보아 신영식-오진희 부부의 <짱뚱이 시리즈>와 위기철/이희재의 <아홉 살 인생>, 라트의 <캄펑의 개구쟁이>와 궤를 같이 한다.(관련 논문(pdf 파일 다운로드))

중화권에서는 '櫻桃小丸子'라고 한다.


2. 발매 현황[편집]


한국에선 1996년에 도서출판 독서당에서 해적판 <쫑아는 못말려>로 개명해서 국내에 최초로 소개했는데, 원작과 달리 제목과 표지는 <크레용 신짱>을 모방했다.(참고) 이듬해에는 도서출판 대원에서 <모모는 엉뚱해>라는 이름으로 정식 출간됐으나 14권까지만 나왔다. 번역은 순정 편집부 명의로 했다.


3. 특징[편집]


기본적으로 평범(?)한 초등학생의 일상 생활을 그리고 있는 코미디. 작가가 어렸을 때의 추억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작중 배경은 1974년(쇼와 49년)의 일본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 시미즈구[2]로 되어있다.

명랑, 코믹물의 대모격인 만화이기도 하다. 크레용 신짱, 아따맘마같은 일상물부터 국내의 검정 고무신, 안녕 자두야같은 작품들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

엉뚱한 꼬마 캐릭터라는 점에서 크레용 신짱의 선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원래 성인잡지에서 연재되었던 크레용 신짱과는 달리, 마루코의 경우 소녀만화 잡지에 연재되었으므로 크레용 신짱에 비하면 상당히 건전하다.

채색도 그렇고 칙칙한 분위기나 쓴웃음을 자아내는 블랙 코미디적 요소[3]가 많이 가미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크레용 신짱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요소가 많이 희석되었다. 후지키 시게루, 마루오 스에오, 나가사와 키미오처럼 음침하고 칙칙한 분위기로 요상한 개그를 치던 캐릭터들도 밝아진 작화 분위기에 동화되어 분위기가 조금 희석된 편.


4. 등장인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모모는 엉뚱해/등장인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검정 고무신, 안녕 자두야와의 비교[편집]



같은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안녕 자두야 등의 한국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당시 한일 양국간의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격차를 짐작할 수 있다. 같은 시기에 한국은 이제 막 전쟁의 상처를 지워내고 본격적인 산업화에 돌입했던 반면, 일본은 1958 도쿄 아시안 게임1964 도쿄 올림픽을 통해 화려한 부활을 알린 뒤, 1970 오사카 엑스포까지 개최하면서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기 시작했으며 '일억총중류'(一億総中流)라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로 중산층이 두터워지고 삶의 질이 상향 평준화되기 시작한 시대였다.[4] 이 작품 속에서 볼 수 있는 일본의 풍경을 한국에 대입하면, 아무리 빨라도 1980년대 정도이니 적어도 13~18년의 격차가 있는 셈. 이 시기에 나온 아기공룡 둘리달려라 하니, 영심이 등 한국 작품의 배경이 마루코와 더 비슷하다.

예를 들면 1970년대 일본은 자가용 자동차와 유채색 TV 방송이 이미 1960년대부터 보급되기 시작하여 1970년대에는 완전 대중화 되어있었고 컬러영상과 컬러사진도 진작에 보급되어서 대중화가 된 것은 물론, 여객선, 비행기, 기차도 신칸센 개통 및 전일본공수, 일본항공 등의 성장으로 일찍이 대중화가 되었으며 지하철은 이미 1930년대에 개통하기 시작하여 노선을 제법 확보하여 1970년대에 이미 지하철이 대중화가 되었으며 게다가 지하철에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도 많이 설치하고 있었다. 고속도로도 1960년대에 준공하기 시작하여 나름대로의 노선을 확보해 나가고 있었으며 터널 역시 많아지기 시작한데다가 장대터널들도 제법 건설이 되고 있었다. 또한 비포장도로도 1950년대에 포장도로로 바꾸기 시작하여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많은 도로들을 포장했다.

전화기 역시 대중화가 되었으며 버튼식 전화기도 많이 도입하고 있었고 카폰 역시 제법 있는 집이 많아졌다. 또한 은행의 현금 자동 입출금기 역시 슬슬 보편화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서양 음식, 중국 음식을 비롯한 고급 요리, 뷔페 및 패스트푸드 및 육해공 음식들도 일찍이 대중화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패스트푸드 체인점 브랜드들이 이미 70년대에 진출을 했으며 모스버거라는 일본 버거 브랜드도 70년대 초에 설립되었고, 선풍기와 에어컨도 상당히 대중화가 되었다. 또한 고속도로 휴게소도 이미 70년대에 대중화가 되었고 휴게소 음식들과 간식들도 제대로 된 음식들과 간식들이 나왔으며 편의점도 70년대 후반에 이미 대중화가 되었다.

그리고 드레스, 웨딩드레스, 양복, 넥타이, 와이셔츠, 블라우스, 방한복, 스웨터, 외투, 가운, 티셔츠, 산타복, 원피스, 츄리닝, 후드티 및 정장, 연미복도 일찍이 대중화가 된 것은 물론, 잠옷, 내복, 민소매러닝, 브래지어도 일본에서는 일찍이 대중화 되었으며 각종 패션에 그림과 글씨 및 컬러도 일찍 새겨졌다. 가방도 대중화가 이뤄졌고 장신구, 액세서리, 모자, 안경, 시계, 우산, 수건, 양산도 일찍 대중화가 이뤄졌다.

장난감 역시 일본에서 일찍이 대중화가 되었다.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도 일본에서는 이미 일찍 대중화가 되었으며, 비상구도 필수적으로 설치를 했으며 비상구의 픽토그램 도입도 빨리 이뤄져서 70년대 중반에 시범적으로 적용하다가 1982년에 픽토그램이 정식으로 도입되었다. 또한 백화점과 호텔도 일찍이 대중화가 되었다. 그리고 대형마트도 꽤 일찍 생겨서 대중화가 되었고 복합쇼핑몰 역시 대중화가 많이 되었다. 또한 아파트도 일찍이 대중화가 되었다. 또한 병원도 최신 건물들과 최신 시설들이 많이 설치되었고, 대학교도 발전을 거듭하여 최신 시설도 설치하고 엘리베이터도 설치할 정도였으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도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최신 시설들을 설치했다. 그리고 목욕탕도 많이 늘어나서 온천과 스파가 많이 발달하였고 목욕탕 내 편의시설도 많이 늘었다. 그리고 수영장도 획기적으로 발달하고 대중화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중화가 된 것은 물론, 워터파크도 상당히 많이 지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축구장, 야구장, 농구장 등도 많이 발전하여 축구장, 야구장, 농구장에서도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지하공간도 일찍이 발전하여 지하공간에 상당한 쇼핑몰, 아케이드, 카페, 음식점 등의 발달로 일찍이 대중화가 되었고 지하주차장도 많이 확보했다. 그리고 병원 역시 일찍이 대중화가 되어서 대형 병원들도 많이 준공했고 병원 시설도 많이 갖추었으며 병원 치료도 많이 활성화가 되었다. 또한 해외여행도 일찍이 자유화가 되었고 해외여행도 일찍이 활성화가 되었다. 심지어 공중화장실도 일찍이 개선이 이루어지고 개인별 소변기도 많이 설치되었으며, 일찍이 각 집에 화장실이 설치되었으며 욕조가 설치된 화장실도 많았다. 또한 초등교육(대한민국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일본의 소학교)과 중등교육(중학교, 고등학교)도 일찍이 활성화 되었으며 대학교를 비롯한 고등교육도 일찍이 활성화 되었다. 그리고 지폐의 경우에도 일본은 일찍이 한국의 5만원권에 해당하는 5천엔 지폐와 10만원에 해당하는[5] 1만엔 지폐를 이미 만들어 두었고, 과거 고액에 해당했던 금액도 거의 낮아져서 그 금액들도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이미 일본은 보편적인 금액 가격이 갖춰졌고 고액 중에서 예전에 일부 최고 고액이었던 금액들도 중간 고액으로 가치가 꽤 낮아졌다.

반면에 안녕 자두야의 배경인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의 한국에서는 아무리 검정 고무신의 배경시대였던 1960년대보다는 경제사정이 확연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1970년대에는 컬러 TV 판매와 방송은 논의만 나왔고 컬러 TV는 있어봤자 해외수출품이거나 AFKN과 일본방송 시청용에 가까웠다.

자가용 자동차 역시 중산층들의 사치품이었고 일반인들은 자가용의 가격도 가격이지만 세금 문제와 연료비 때문에[6] 자동차 가지기가 참 힘들었다. 컬러TV가 보급되기 시작한것은 1980년 컬러방송 시작때부터이고 대중화 된것은 1980년대 중후반이며, 자동차는 1980년대 말이 되어서야 대중화가 시작되었다. 다만 컬러영상들은 1960~1970년대부터 볼 수 있었고 컬러사진은 1950년대부터 볼 수 있었으나 이것 역시 지금 컬러영상이나 컬러사진이 넘쳐나는 것에 비하면 이때 컬러사진과 컬러영상은 부유층들 대상이었다. 컴퓨터는 지금은 국민의 필수수단이 되었지만 이때 당시는 1960년대보다는 제법 늘어났지만 여전히 연구용이거나 부유층들 대상이었고 PC의 경우는 1980년대에 설치되기는 했지만 지금 PC가 전 국민이 애용하는 것과 달리 이때는 일부를 제외하면 PC가 많이 설치되지 못했으며 인터넷의 경우에도 지금은 전 국민이 이용하는 필수수단이 되었지만 이 당시는 PC통신도 거의 설치되지 않아 인터넷은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잘 이용되지를 못했으며 아직 타자기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던 시절이며 지금의 컴퓨터는 인터넷을 통해서 각종 SNS도 할 수 있고 그 외에도 정보 공유 및 찾아보기, 인터넷 쇼핑, 드라마, 영화 다시보기, 뉴스 보기, 음악 듣기, 사진, 동영상 올리기나 보기 등 각종 기능을 편하게 이용할 수 있고 각종 앱도 설치를 할 수 있으며 뉴스 제작, 운전 및 조종기능, 제조업 기능 생산도 수행할 뿐만 아니라 프린팅, 프린트도 쉽게 많이 할 수 있고 문서 만들기 및 편집도 쉽게 할 수 있지만 이때 당시 타자기로는 문서 만들기 선에서만 그쳤으며 수정할 수도 없었고 문서 작성 과정에서 실수를 하면 다시 새로 종이를 꺼내 작성 해야만했다.[7][8]

그 외에도 다른 교통수단인 여객선, 비행기, 기차도 지금은 KTX, SRT의 개통과 대형 항공사의 성장 및 LCC 항공사의 설립, 비행기의 다양화와 여객선의 다양화, 해운산업의 발달 및 디지털 운전기기 및 인터넷 운전시스템의 발달, 무인운전 및 자동운전의 발달 등으로 나름 대중화가 되었지만 이때 당시는 대한항공이 광동체를 도입하고 새마을호, 무궁화호가 기차의 주력이었으며 여객선 산업도 발달하고 있었지만 이때 당시 일반인들이 이 교통수단들을 타는 것은 쉽지 않았으며 그 교통수단들은 부유층들이 많이 탔고, 현재는 여러 노선의 개통 및 연장, 자동운전 및 무인운전이 가능한 신형 전동차 도입, 지하철 객차 증가, 에어컨 등 냉방장치 설치 등으로 국민의 중요한 대중교통 수단이 된 지하철도 이 당시에는 지금보다 노선이 적었고 지하철 객차의 량도 지금보다 적었던지라 다른 교통수단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부유층, 중산층이 제법 탔으며 이 당시 지하철에는 에어컨도 없었으며 지금은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가 많이 있지만 이때 당시 지하철역에는 엘리베이터는 없었고 에스컬레이터는 1982년에야 겨우 일부 역에만 설치되었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서울에서 같은 수도권을 다니거나 부산, 대구, 대전, 광주의 각종 지역이나 그 주변을 다닐 때 곳곳에 퍼져있는 각종 지하철 노선으로 인해서 빠르게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도권 전철로는 충청도까지 갈 수 있게 되었고 철도를 이용해서 지방을 갈 때도 KTX 등으로 빠르게 갈 수 있게 된 것은 물론 해외로 가는 비행기나 여객선도 나름 탈 수 있게 되었고 국내선 비행기나 여객선 역시 쉽게 탈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이때 당시에는 서울에서 같은 서울 지역이나 수도권을 다닐 때도 5~60년대만큼은 아니어도 시간이 꽤 많이 걸렸던 구간이 있었고 부산, 대구, 대전, 광주의 지하철은 아직도 개통이 되지 않았으며 철도를 이용해서 지방을 가도 시간이 많이 걸리던 시대였으며 당시 해외로 가는 비행기나 여객선은 부유층이나 권력층을 빼면 탈 수가 없었고 그마저도 해외 여행을 할 때 규제가 있었으며 국내선 비행기나 여객선도 부유층이 많이 탔으며 심지어 지금 비행기의 이코노미 석이 나름 대중화가 되었고 퍼스트클래스 석이나 비즈니스 석의 경우 비싸기는 하고 여전히 부유층 전용이긴 해도 나름 타는 사람들이 꽤 많아졌고 여객선이나 기차의 특등석도 현재는 나름 비싸기는 해도 사람들이 꽤 많이 타지만 당시의 비행기의 퍼스트클래스 석이나 비즈니스 석은 말할 것도 없고 이코노미 석마저도 돈 있는 사람들이 많이 탔고 여객선이나 기차 역시 특등석은 부유층이나 권력층이 많이 탔다.

그리고 이 당시 한국의 고속도로들은 경부고속도로 준공을 계기로 계속해서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있었지만 이 당시에는 고속도로가 노선이 다양해지고 차선이 확장된 지금에 비하면 차선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으며 터널 같은 경우에도 설치가 나름 이뤄지고 있었지만 지금 터널들이 장대터널들이 많이 설치되고 터널들이 많이 대중화 된 데 비하여 이때 당시 터널들은 주로 작은 터널들밖에 없거나 장대터널도 서울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부산에도 1980년에야 장대터널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서울에서 지방으로 갈 때 편하게 갈 수 있지만 이때 당시는 서울에서 지방으로 갈 때 5~60년대만큼은 아니어도 서울에서 지방으로 갈 때 시간이 많이 걸리는 지역들이 여전히 많았다.

그리고 비포장도로도 1960년대에 비하면 적어졌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비포장도로 대부분을 꽤 포장했으나 여전히 이 때만 해도 거의 모든 비포장도로가 포장된 현재에 비교하면 이때 당시에는 비포장도로가 꽤 남아있었다.

전화기의 경우 현재는 대중화가 되었으나 1970년대 당시에 전화기는 버튼식 전화기도 조금씩 도입되고 있었고 대중화가 조금씩 이뤄지고 있었지만, 이 때만 하더라도 전화기는 부유층들이 많이 이용했으며 지금은 널리 대중화가 된 휴대폰의 전신인 카폰도 이 당시에는 부유층이 많이 이용했으며 버튼식 전화기가 슬슬 도입되고는 있었으나 여전히 다이얼식 전화기가 주류였다. 그리고 현재 휴대폰이 카메라, 메시지, 게임 등 다양한 기능을 이용할 수 있고 인터넷 같은 것도 이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카카오스토리, 카카오톡,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지도, 지하철 노선도, 배달앱, 메신저, 음악, 드라마 다시보기, 금융앱 등도 이용할 수 있는 것에 비하면 이때 당시 휴대폰의 전신인 카폰은 그냥 전화 용도로만 쓰였다.

그리고 지금은 역시 대중화가 된 중식, 일식, 양식이나 뷔페, 고급 한정식 등을 포함한 소고기, 돼지고기 등의 고기류, 해산물류, 치킨류 음식, 케이크, 머핀, 과자를 포함한 제과류, 제빵류, 아이스크림, 음료수 등도 이때 당시에는 1960년대보다 대중화가 이뤄지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일반인들보다는 중산층, 부유층이 많이 먹었다. 그리고 피자나 치킨, 햄버거, 샌드위치 등을 포함한 패스트푸드 같은 경우도 현재는 체인 수가 난잡해질 정도로 상당히 많이 대중화가 되었지만 이때 당시에 패스트푸드점은 1979년에 생긴 롯데리아밖에 없었고 이것 역시 대부분 중산층이나 부유층이 많이 먹었다.

은행에 있는 현금 자동 입출금기의 경우에도 지금은 최첨단기기가 많이 설치되고 출금하기도 편해졌으며 모니터도 최첨단화가 된 건 물론, 많이 대중화가 되었지만 이때 당시 현금 자동 입출금기는 설치되기는 했어도 일부만 설치되거나 출금할 때 불편한 점들도 꽤 있었고 검은색 바탕에 녹색 글씨가 나타는 현금출금기가 많았다.

고속도로 휴게소 분야에서도 이 당시에는 지금 고속도로 휴게소가 각종 꼬치류에 버거류, 도넛류, 튀김류 같은 각종 간식과 패스트푸드, 각종 다양한 음식 및 매점이 있고 위생도 괜찮은 것에 비해서 이 당시 고속도로 휴게소는 음식 메뉴도 얼마 없고 위생도 좋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대중화가 된데다가 각종 도시락과 패스트푸드, 즉석식품까지 판매하는 편의점도 이때 당시에는 편의점이 1982년에야 롯데쇼핑에서 시작을 했고 점포도 많이 찾기가 쉽지 않았다. 또 지금은 대중화가 된 선풍기도 이때 당시에도 대중화가 이뤄지고 있었지만 이 때만 하더라도 돈 좀 있는 사람들이 주로 선풍기를 샀다. 지금은 필수품이 된 에어컨도 이때 당시는 부유층, 중산층 전용이었다. 또한 의류 중에도 드레스, 웨딩드레스, 양복, 넥타이, 와이셔츠, 블라우스, 방한복, 스웨터, 외투, 가운, 티셔츠, 산타복, 원피스, 츄리닝, 후드티 및 정장, 연미복 등은 지금은 대중화가 된 패션들이 상당히 많고 그림과 글씨, 컬러가 새겨진 패션들도 많아졌지만 이때 당시에 그 패션들은 1960년대에 비하면 나름 많아졌지만 이 당시 그 패션들은 부유층, 중산층 또는 그들의 자제들이 많이 입었고 뿐만 아니라 특히 이때 당시에 정장과 연미복은 높으신 분들의 전유물이자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을 정도다. 그리고 당시 그 패션들에는 컬러는 어느정도 있었어도 그림, 글씨를 새긴 것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리고 지금은 대중화가 많이 되었고 그림, 글씨와 컬러가 새겨진 것들이 많아진 잠옷도 이때 당시에 1960년대보다 잠옷을 입는 사람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잠옷은 대부분 부유층, 중산층이 많이 입었고 부의 상징이기도 했으며 컬러는 어느정도 있었어도 그림, 글씨가 새겨진 잠옷을 많이 찾아보기가 힘들었으며 설사 그림, 글씨가 새겨진 잠옷들이 있어도 많지 않거나 색이 짙지 않거나 그림, 글씨가 많이 새겨지지 않았으며 이 때 잠옷을 입을 때는 지금과 다르게 침실에 있을 때 외에는 잠옷 위에 가운을 걸쳐야 했다. 또한 지금은 대중화가 되었고 역시 그림, 글씨와 컬러가 새겨진 것도 많이 있는 내복도 1960년대에 비해서 내복을 입는 사람들이 제법 많아졌지만 이때 당시만 하더라도 잠옷만큼은 아니어도 부유층, 중산층이 많이 입었으며 이 때 내복도 컬러는 어느정도 있어도 그림, 글씨가 새겨진 내복은 찾기 힘들었고 설사 그림, 글씨가 새겨진 내복이 있더라도 많지 않거나 색이 짙지 않거나 그림, 글씨가 많이 없었다. 역시 현재는 대중화가 되고 그림, 글씨 및 컬러가 새겨진 것들도 많은 민소매러닝도 1960년대보다는 입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이때 당시만 하더라도 부유층, 중산층이 입은 경우가 많을 정도이고 그림, 글씨가 새겨진 민소매러닝을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설사 있더라도 지금에 비해 색이 짙지 않거나 그림과 글씨가 많이 새겨지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대중화가 된 패션이자 여성들의 주요 속옷이기도 하며 그림, 글씨와 컬러가 새겨진 것도 많이 있는 브래지어도 1960년대에 비해서는 입는 사람들이 제법 많아졌지만 이때 당시만 하더라도 부유층, 중산층 여성들이 많이 입었고 컬러가 있는 브래지어는 어느정도 볼 수 있기는 했으나 이때 당시 그림, 글씨가 새겨져 있는 브래지어는 많이 보기 힘들었다. 또한 지금은 대중화가 된 가방도 이 당시에는 부유층이나 중산층이 많이 샀었다. 또한 장신구, 액세서리, 모자, 안경, 시계, 우산, 수건, 양산도 현재는 대중화가 많이 이뤄졌지만 이때 당시 이 물건들은 부자들이나 중산층들이 주로 샀었다. 지금은 대중화가 된 테디베어를 비롯한 인형류도 이 때는 단순한 인형정도로 생각하거나 주로 부유층, 중산층 중심의 어린이들이 사는 경우가 많았고, 또한 지금은 어린이들의 놀이감이 된 장난감들도 이때 당시는 부유층, 중산층 어린이들의 전유물이었다.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도 1960년대보다는 많이 설치되었고 많아졌다지만 이때 당시만 해도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는 여전히 고급장비였다. 물론 70년대~80년대 초는 고층건물들이 많이 준공되고 고층 아파트도 많이 들어오고 대학교에도 70년대부터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기 시작하면서 60년대보다는 대중화가 되었지만 여전히 서울, 부산, 대구, 대전, 광주 등의 대도시를 제외하면 지방에서는 엘리베이터를 보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전층운행을 하는 엘리베이터들도 많아졌고 아파트 엘리베이터들도 전층운행을 많이 하고 있고 2,3층도 운행하는 엘리베이터가 많아진 것에 비하면 이 때는 엘리베이터가 나름 대중화가 되었어도 절전운행을 하거나 짝수층, 홀수층, 고층, 저층으로 운행하는 엘리베이터가 제법 많았고 아파트 엘리베이터의 경우에는 지금에 비해서 홀수층, 짝수층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었으며 2,3층을 통과하는 엘리베이터도 있었다.[9]

백화점 같은 경우도 지금은 거의 대중화가 되었고, 국민들 다수가 백화점을 이용하며 백화점 식당가와 푸드코트, 식품관도 대중화가 되었지만 이때 당시 백화점은 1960년대보다는 나름 발달을 거듭하고 백화점이 계속 늘어나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부유층과 중산층이 백화점을 이용했고 호텔 역시 지금은 거의 국민들 절반이 호텔을 이용하고 호텔 레스토랑도 꽤 대중화가 되었지만 이때 당시 호텔은 1960년대보다는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고 고층 호텔도 계속 준공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호텔의 주 이용객은 부유층들이나 중산층들이 많았다. 그리고 대형마트의 경우에도 지금은 대중화가 많이 되고, 창고형 대형마트도 나왔지만, 이때 당시에는 한국은 대형마트가 한 개도 없었다. 복합쇼핑몰 같은 경우도 지금은 거의 대중화가 되었지만, 이때 당시에는 고속터미널 등을 제외하면 복합쇼핑몰을 보기가 힘들었다.

아파트 같은 경우도 지금은 거의 대중화가 많이 되었고 국민의 상당수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70년대~80년대 초 당시에 아파트는 1960년대보다는 건립되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이 당시만 해도 아파트는 부유층이나 중산층의 전유물이었다. 비상구 같은 경우는 1960년대보다는 대중화가 많이 되었지만 여전히 허름한 곳이나 학교 같은 경우에는 비상구를 설치하지 않는 경우가 여전히 있었고 비상구에 픽토그램 또한 도입되지 않았다.[10] 또한 목욕탕의 경우에도 지금은 찜질방과 각종 편의시설, 식당과 매점을 보유한 목욕탕이 많고 각종 스파산업이 발달한데다가 대형 목욕탕들이 많을 정도로 목욕탕이 다양해 졌지만 이 당시에 목욕탕은 1960년대에 비하면 호텔 등에도 목욕탕이 생기고 스파도 생기고 대형 목욕탕들도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그 목욕탕은 주로 부자나 중산층들이 많이 썼고, 이때 당시만 해도 일반인들과 서민들은 대중목욕탕을 많이 이용했다. 또한 수영장도 이때 당시에는 1960년대보다는 설치빈도가 늘었지만 부유층들이 많이 이용했고 지금 워터파크가 상당히 많고 수영장도 많아진 현재에 비하면 이 때 워터파크는 부곡하와이 한 곳이 들어온 것에 그쳤다. 테마파크 같은 경우도 지금은 거의 서울랜드, 롯데월드, 에버랜드를 비롯해서 대중화가 많이 이뤄졌지만 이때 당시에는 테마파크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는 수준이긴 했지만 아직까지 크게 대중화가 된 편은 아니었다. 또한 축구장, 야구장, 농구장도 지금은 구장이 많이 발전한데다가 구장 내에서 다양한 음식과 과자 등을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1980년대 당시 축구장, 야구장, 농구장은 대중화 수순을 점점 밟고 있긴 했어도 구장 음식이 많이 없었으며 먹을 수 있는 게 음료, 소주와 마른 오징어, 옛날과자 뿐이었다. 그리고 이 당시 화장실만 보더라도 1960년대보다는 어느정도 화장실이 많아졌고 집 안에 화장실이 설치되거나 욕조가 생긴 화장실들이 제법 많아졌으며 공중화장실 개선도 나름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지금 화장실들이 최신식 화장실들로 위생이 괜찮고 화장실 벽에 그림도 그려져 있고 음악도 나오는 것은 물론 개인별 소변기가 많고 집 안에 화장실이 많고 욕조가 구비되어 있는 화장실이 대중화 된 것과 다르게 당시 그 화장실들은 주로 부유층, 중산층이 많이 썼으며 깨끗한 공중화장실도 주로 고층건물에서나 볼 수 있었으며 그 당시 대부분의 공중화장실은 흔히 생각하는 개인별 소변기가 아닌 시멘트바닥, 타일바닥에 홈을 파놓거나 물이 항상 흘러내리게 되어있는 대형 철제 소변기가 많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화장실들은 물낭비는 둘째치고 냄새가 지독하다는 비판을 많이 들었다.

또한 지하공간 같은 경우도 지금은 지하공간을 쇼핑몰, 마트, 백화점, 음식점, 카페, 디저트집, 박물관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고 지하주차장도 곳곳에 있을 뿐만 아니라 지하 층수 역시 지하10층까지도 있을 정도로 지하공간이 다양하게 쓰이고 있고 대중화도 많이 되었지만 이 당시 지하공간은 1950년대~1960년대보다는 발전하여 음식점, 다방, 카페, 디저트집, 쇼핑몰 등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있었고 층수도 꽤 확대되었지만 이 당시는 많이 내려가봐야 지하4층이었고 지하공간 역시 완전 대중화가 되지는 않았고 지하공간도 부유층이나 중산층이 제법 많이 썼으며 지하주차장도 대형 건물 위주로만 있었다.

그리고 해외여행 같은 경우도 지금은 국민들이 좋아하는 여행 수단이 되었지만 이때 당시에 해외여행을 갈 때 1960년대만큼은 아니어도 여전히 통제가 심했고 일부 자유화가 되었지만 해외여행도 부유층만 거의 갈 수 있었다.

병원 같은 경우도 지금은 대중화가 된데다가 대형 병원도 많이 준공이 되고 최신 시설도 많이 갖추고 있고 편의시설도 많이 갖추고 있으며 치료시설도 많아지고 높은 건물로 지어진 병원들도 많지만 1970년대 후반 ~ 1980년대 초반 당시에 병원은 1960년대에 비하면 나름 높은 건물로 지어진 병원들도 슬슬 많아지고 치료시설도 슬슬 많아지고 있었지만 이 당시 병원 치료는 여전히 부유층이나 중산층이 꽤 받았다.

대학교 같은 경우에도 지금은 최신 건물들이 많이 설치되고 편의점도 많이 들어오고 매점 메뉴도 많아지고 최신 쇼핑몰도 들어오고 최신 기숙사도 들어오고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건물들도 많아지고 정보화도 많이 진행되고 최신 시설도 많이 설치되고 대학 교실도 많이 좋아졌지만 1970년대 후반 ~ 1980년대 초반 당시 대학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는 건물도 나오고, 1960년대보다는 어느정도 상황이 나아졌지만 대학교 기숙사나 대학교 교실은 꽤 좋지 못했다. 그 외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같은 경우 지금은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건물들이 꽤 있고 나름대로 쾌적한 시설과 최신 시설도 갖춰진 경우가 많아졌지만 이 당시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는 엘리베이터도 없고 냉방 시설 같은 것도 없었다.

그리고 고등교육인 대학교 및 전문대학, 교육대학 등 고등교육기관 진학률만 해도 졸업정원제 등으로 인해서 1960년대보다는 대학교 진학률이 늘어났지만 지금은 거의 모든 젊은 층들이 대학교에 갈 수 있는 현재에 비하면 대학교를 진학하기가 거의 까다로웠고 이 때만 해도 대학은 거의 엘리트나 중산층 이상이 많이 가는 곳이었다. 그래도 중등교육인 중학교, 고등학교는 거의 엘리트들만 가던 1960년대에 비하면 1960년대~1970년대에 중학교 무시험 정책, 고교 평준화 등으로 활성화가 되었고 초등교육인 초등학교는 해방 이후나 1950년대에 활성화가 되었지만 이 때만 해도 지금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비하면 도시권의 중학교, 고등학교 역시 엘리트들이 가는 이미지가 제법 있었고 초등학교 역시 도시권은 여전히 엘리트들의 자녀가 가는 곳이란 인식이 강했다.

지폐의 경우에도 지금은 5만원권도 나오고 1천원권, 5천원권, 1만원권도 많이 보편화가 되었고 10원, 50원, 100원, 500원 동전도 보편화가 되었지만 이 당시에 한국은 10전, 50전에 1원, 5원, 10원, 50원, 100원, 500원이 지폐였던 1960년대에 비하면 1원, 5원, 10원, 50원, 100원이 지폐에서 동전으로 바뀌고 1천원권, 5천원권, 1만원권도 등장했지만 당시에만 해도 이 지폐들은 꽤 고액권에 해당했고 아직 5백원이 지폐였고 5만원권도 아직 등장하지 않았을 시절이며 현재는 평범한 금액이 되었고 국민들이 많이 사용하는 금액도 이때 당시만 해도 꽤 고액이거나 높으신 분들이 많이 사용하는 고액권이었다. 또 수표 역시 지금은 일반 국민들도 수표를 제법 사용하지만 이 때만 해도 1960년대만큼은 아니지만 높으신 분들이 사용했던 고액권에 가까웠다. 그리고 지금은 보편적인 가격이 된 금액들도 이 때만 하더라도 최고액에 해당되었던 1960년대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고액에 해당되었던 가격들이 많았으며, 지금은 중간 고액이 된 금액들도 이 때만 해도 가치가 커서 60년대만큼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최고 금액에 해당되는 금액들이 많았다.

사실상 일본 경제의 리즈 시절이 시작된 시기를 배경으로 삼다 보니, 상당히 밝고 코믹한 분위기 위주로 에피소드가 진행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개요에 상기했듯 음침한 블랙 코미디적 요소도 많았고, 감동적인 에피소드도 있는 편.

사실, 극중 마루코네 집은 당대 기준으로도 중산층에 살짝 못 미치는 수준에 속한다.[11] 1970년대 일본 중산층의 생활은 타마에네 집이 대변해준다고 보면 된다. 또한 마루코 집은 그냥저냥 먹고사는 수준 정도로 나오지만 작중에 나오는 동네는 꽤 부촌이다. 학교 친구 중에는 부잣집 아이도 있고 동네 전체가 개발이 잘 되었다. 동시기의 영화나 만화를 봐도 이 정도로 잘 사는 동네가 나오는 작품은 드믈다. 한국에서는 안 알려져 있지만, 일본 내에서 마루코는 아홉살과 대조되는 작품이 있는데 바로 꼬마숙녀 치에다. 이 만화는 오사카 슬럼가를 배경으로 해서 마루코 가족보다 훨씬 가난하고 서민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이 세 만화 모두 주인공의 나이가 초3인 공통점이 있다.


6. 미디어 믹스[편집]



6.1. TV 애니메이션[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마루코는 아홉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2. 극장 애니메이션[편집]


중화권에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사쿠라 프로덕션이 중국 광저우 서브라임 미디어(广东昇格传媒股份有限公司)와 합작해 <앵도소환자: 기환필기(樱桃小丸子:奇幻笔记)>란 제목으로 풀 3D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든다고 하며, 2022년 춘절 개봉을 목표로 했지만 2022년 1월 개봉이 취소됐고, 아직도 제작 중이라 한다.(관련 기사, 익스트림무비 글)


6.3. 드라마[편집]



6.3.1. 일본[편집]


실사판이 가끔 특집으로 제작되는데, 2006년 4월 18일 후지 테레비의 예능프로 <카스페>를 통해 애니메이션 방영 15주년 기념 특집으로 방영되었고, 반응이 좋아서 그 해 10월 31일에는 애니메이션 750화 기념으로 방영되었는데, 원작자가 직접 감수 겸 각본을 짜고 공동 극본은 카시다 쇼코, 연출은 니시우라 마사키 감독, 음악은 나카무라 노부유키 등이 맡았다.

그리고 2007년 4월 19일부터 2008년 2월 28일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7시마다 <마루마루 마루코는 아홉살(まるまるちびまる子ちゃん)>이란 제목으로 아예 총 33화 정규 편성으로 제작되었다.[12] 드라마 파트 감독은 히라노 신과 코바야시 카즈히로, 예능 파트는 나카무라 하지메 PD, 연출보는 아사히 나요코, 극본은 카시다 쇼코 등이 맡았으며, 마루코를 맡은 아역 배우가 각각 모리사코 에이와 이토 아야카인데 이들을 비롯한 다른 배우들 또한 캐릭터와의 매칭이 잘 맞았다.

사실, 애니메이션 방영 15주년 기념이라면 2005년에 처음 방영되었어야 하는데, 마루코에 맞는 배우를 찾지 못해서 결국 계획이 미뤄졌다고. 그러다가 원작자가 매우 마음에 들어해서 낙점된 게 바로 모리사코 에이.

파일:maruko06-07.jpg
왼쪽이 이토 아야카. 오른쪽이 모리사코 에이. 2007년판 제작이 확정되었을 당시, 모리사코 에이와 이토 아야카의 바톤터치. 나이가 1살 차이도 안 나는데[13] 보다시피 모리사코 에이의 키가 커져서(…) 마루코 역은 이토 아야카로 교체되었다.빠른 성장이 이럴 때는 원망스러울지도 이토 아야카 또한 마루코 특유의 천진난만한 캐릭터를 잘 살려낸 덕분에 10년 넘게 지난 현재까지도 모리사코 에이와 더불어 마루코 시청자들 사이에 추억으로 남아있다.[14]

2007년판 드라마에서는 극중 배경인 1970년대를 풍미했던 연예인이 가끔 스페셜 게스트로 출연했는데, 심지어 20화에서는 그 사이조 히데키가 동네 생선가게 주인으로 등장해서는 극중의 그 샤방샤방한 사이조 히데키를 남들이 어설프게 따라한다고(…) 툴툴대는가 하면, 나중에 사이조 히데키를 따라한답시고 왕년의 자기 노래를 열창하는 장면도 나온다.

2013년 10월 1일에는 후지 테레비 개국 55주년 특집으로 <카스페>를 통해 방영된 게 마지막이며, 실질적으로 일본 팬들 사이에선 근 1년간 편성되었던 2007년판 드라마가 실사판 대표로 등극한 듯.

아역 배우의 경우는 당연히 매번 바뀌었으며, 성인 캐릭터의 경우에도 할아버지 역의 모토 후유키/담임 선생님 역의 카사이 신스케[15]를 제외한 전원이 매번 바뀐다. 두 사람 모두 외모에서나 연기에서나 캐릭터를 완벽하게 표현해 냈는데, 특히나 모토 후유키의 경우에는 아예 등장할 때마다 빵빵 터뜨리면서 가히 원작초월급 캐릭터를 만들어버렸다.


6.3.2. 대만[편집]



2017년에는 중국 iQIYI가 <櫻桃小丸子 真人版電視劇>이란 제목으로 리메이크하여 대만 CTV를 통해 방영됐다. 주인공 소환자(小丸子, 마루코) 역은 1989년생 배우 린신레이(林芯蕾)가 연기했다.


7. 기타[편집]


  • 예전에는 마루코와 사키코, 스미레의 눈은 단추 구멍 같은 형태가 기본이었으나 현재는 게슴츠레한 눈에서 어쩌다가 단추 구멍 눈이 된다.


  • 마루코의 단짝 친구로 등장하는 인물은 타마는 실제 사쿠라 모모코 화백의 초등학교 시절 단짝의 별명에서 따 왔다. 메탈슬러그[16][17]

  • 마루코가 자주 언급하는 '모모에 언니'는 바로 1970년대를 대표하는 아이돌 야마구치 모모에다. 역시 1970년대의 시대 배경을 방증한다.

  • 단행본 미수록 에피소드가 있다. '마루코 꿈을 생각하다'인데 사유는 작중 내용이 기괴해서 만화와는 어울리지 않다고…그림체 때문에 생각보다 무섭지 않지만 훈훈따뜻한 내용과 괴리감이 심해서 충격받은 사람도 있는 듯.[19]
    • 이 에피소드가 나온 이유에 대해서 작가 본인은 밝히지 않았으나 일웹에서 추측하기로는 우울증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단 회고록에서 작가 본인에 의하면 1995년은 장남이 태어나고 마루코 인기도 하염없이 올라가던 시절이였다고 한다. 코지코지 연재를 시작한 데다가 에세이 마감이라던가 애니 재개 등으로 미칠듯이 빡빡한 일정에 휴식도 없는 상황에서[18] 심한 우울증에 빠졌고 결국 문제의 에피소드를 그리게 된 것. 훗날 단행본 작업하면서 정신적인 여유가 생겼는지 고민 끝에 결국 미수록된듯 하다. 실제로 문제의 에피소드가 연재된지 1년이 지난 1996년 6월호에서 연재가 종료되고 부정기 연재를 하기 전까지 10년 동안 침묵 상태에 빠지는데, 당시 작가가 마루코를 그리는데 굉장한 압박감을 느꼈다는 정황 증거로는 충분하다.

  • 2014년도에 스크래치 복권이 발매되어 팔리고 있다. CM에서 마루코가 복권을 사라고 종용하는 다소 충격적인 모습으로 광고되었다. 참고로 한국과는 반대로 일본에서는 아이들도 스크래치 복권을 구매할 수 있기 때문에 CM 애니메이션이 BPO에 거론되었다.



  • 1995년코나미세가 새턴으로 마루코쨩 대전 퍼즐 구슬이라는 이름으로 출시했다. 플레이 방식은 뿌요뿌요 피버처럼 각 캐릭터마다 구슬이 떨어지는 패턴이 다르며 대전하기 이전에 대화가 나온다.

  • 1995년타카라네오지오로 마루코쨩 디럭스 퀴즈라는 이름으로 출시했다. 최초 판매가는 확인을 바라며, 2020년 현재 기준으로 매물이 씨가 마를 정도로 구하기 어렵다. 대충 4~90만엔에 나올 정도다.[20][21] 각 인물마다 일종의 스킬(?)이 있는데[22] 공장출하 기준 레벨 4에서는 카운트다운이 보통으로 지나가는데 레벨 1은 엄청 느리게 지나가며 레벨 8은 대부분 퀴즈게임이 그렇듯 고수 전용으로 했는지 카운트가 엄청나게 빠르며[23] 다른 레벨에 비해서 문제 할당량이 2배 쌓인다. 특히, 마지막 스테이지는 12개다.

  • 배구안산 OK저축은행 러시앤캐시몬테네그로 출신의 전 외국인 선수 마르코 보이치[24]가 경기장에 나타나자, 마르코는 스물 아홉살이라는 치어풀이 TV 화면에 뜬 적이 있었다.


8. 외부 링크[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8 05:10:29에 나무위키 모모는 엉뚱해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주니치 드래곤즈의 모기업.[2] 당시 행정구역으로는 시즈오카현 시미즈시. 마루코가 작가 본인의 오너캐인 만큼 해당 지역 또한 작가의 출신지.[3] 인물들의 자학 개그나 망상, 병맛을 가미해주는 BGM, 내레이션의 일침 등.[4] 자세한 것은 일본 경제의 역사 참고.[5] 현재까지도 한국은 10만원권을 발행하지 않는다.[6] 1970년대 초반에야 자동차 1대 가격이 그야말로 억소리 날 정도로 비쌌기 때문에 소수의 부유층들이나 가졌던 사치품이었고, 현대 포니의 등장으로 자동차의 국산화가 진행된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 시기까지는 승용차의 가격이 일반인들이 아예 부담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승용차를 보유하면 세금 부담이 컸던 데다가 오일쇼크로 기름값이 고공행진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유지비용이 비쌌다. 그러다보니 자동차를 가졌으면 잘 사는 사람인것은 여전했다.[7] 심지어 이때는 전자타자기도 거의 도입되지 못했다. 일부 기계식 타자기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는 하지만.[8] 일본도 퍼스널 컴퓨터 및 비디오텍스(PC통신)가 1980년대부터 대중화되었다. 다만 일본의 경우 전자타자기나 기계식 타자기는 한국보다 훨씬 앞서서 도입되었다.[9] 심지어 엘리베이터가 대중화가 되고 있던 90년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아파트에 홀수층 전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사례가 있었고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2층을 운행하지 않는 아파트 엘리베이터들이 많았다.[10] 한국 같은 경우 비상구의 픽토그램 시범 도입은 1980년대 중반~후반, 비상구의 픽토그램 완전 도입은 1992년이다.[11]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정고무신의 이기영 일가보다 훨씬 안락한 살림 수준을 보인다. 그리고 기영이네는 당시 대한민국 기준으로는 집에 TV도 있고 서독에서 일하는 친척이 있는 등 중산층에 무난히 들어가는 집안임을 알 수 있다. 같은 시대임을 봤을 때 양국의 경제 규모 차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부분.[12] 드라마 30분 + 출연진/게스트의 예능 30분 = 총 1시간 편성이었으며 그중 2화는 1시간 전체를 예능으로 편성했기 때문에 실제 드라마는 31화.[13] 모리사코 에이가 1997년 9월생, 이토 아야카가 1998년 5월생.[14] 하지만 마지막에 웃은 건 모리사코 에이다. 그녀는 아직도 연기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토 아야카는 2012년 이후 출연작이 없다.[15] 배우는 아니고 후지TV 아나운서. 지금은 나이 든 티가 나지만 드라마에서는분장의 힘으로 실제 나이에 비해서 젊은 모습으로 나온다.[16] 실제로 의 이름을 응용한 패러디가 인터넷 상에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이쪽도 마루코처럼 애칭이며, 본명은 '호나미 타마에'.[17] 그리고 이 둘의 한국판 성우인 정선혜와 김선혜는 명탐정 코난에서는 정반대로 소년 캐릭터들을 맡았다.[18] 여기까지는 회고록에 언급된 사실.[19] 마루코가 눈에서 죽을 상(死相)이 보인다고 말한다던지 시체가 나온다던지 하여튼 정상적인 내용은 아니다. 일웹에 "まる子、夢について考える"라고 치면 나온다.[20] 그 비싸다는 사무라이 스피리츠 제로 스페셜의 무수정판이 17만엔, 메탈슬러그 5가 20만엔인 점을 고려하면 거품이 심하다.[21] 이 게임의 스토리는 오프닝 기준으로 마루코가 타마에게 디럭스 퀴즈라는게 있는데 아느냐로 시작한다. 어느 날 낮잠 잘 시간에 우편물이 도착하는데 스미레가 편지가 왔다고 해서 열었는데 토모조한테 가서 디럭스 퀴즈 참가권이 당첨되었다고 알려주며 우승하면 남국행 초대권이 주어진다고 얘기한다. 이에 토모조도 당연히 참가한다고 했으며 3인1조로 정해야 한다고 알려줬다. 절대 지지 않겠다는 투지를 보여주는 토모조와 프사디를 만날 생각에 기뻐하는 마루코로 끝난다.[22] 선택지 2개, 3개, 시간지연, 할당량 차감 등이 있다.[23] 다만, 코타케로 하면 그나마 카운트가 덜하다.[24] 1988년생, V리그 16-17 시즌에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