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타 아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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盛田昭夫
1921년 1월 26일 - 1999년 10월 3일

1. 개요
2. 생애
3. 소니를 창업하다
4. 말년
5. 여담
6. 어록
7. 서훈


1. 개요[편집]


일본의 기업인. 이부카 마사루와 함께 세계적인 가전 메이커 소니를 창업한 공동 창업주다.

이부카 마사루와 함께 오늘날의 소니를 있게 한 거장이자 가전제품으로 세계를 평정한 전자업계의 제왕이다.

그의 인생사를 자세히 알고 싶다면 다음백과- 모리타 아키오를 참고.


2. 생애[편집]


모리타 아키오는 1921년 아이치현의 나고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1665년부터 아이치 현 서부해안의 치타 반도에 위치한 코스가야(현 토코나메 시)에서 간장, 미소, 그리고 사케등을 제조해 판매하는 것을 가업으로 삼고 있었다. 장남이었던 그는 아버지 규자에몬으로부터 가업을 이을 수련을 받고 있었으나[1], 수학과 물리학에서 자신의 진로를 찾았고 1944년 오사카제국대학 이학부 물리학과를 졸업한 후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제국해군에서 장교로 복무한다. 그리고 당시 일본해군 전시개발위원회에서 복무하던 이부카 마사루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된다.


3. 소니를 창업하다[편집]


종전 후인 1946년, 모리타는 이부카 마사루와 함께 20여명의 직원과 자본금 19만엔을 들여 도쿄통신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창업 당시 이부카는 38세였고, 모리타는 25세로 모리타가 13살 어렸다. 그러나 모리타의 가족이 당시 창업한 회사에 투자한 까닭에 실질적인 주주는 모리타의 집안이었다. 어쨌거나 처음 창업 당시 직책은 일단 이부카가 높았으며, 회장도 이부카가 먼저 하고 이부카가 일선에 물러날 때에야 모리타가 회장에 취임했다.

이후 1950년 최초로 테이프 레코더를 개발, 일본내 판매를 하게 되었고, 그 후 1955년 일본 최초로 포켓사이즈로 된 휴대용 라디오를 생산해냈으며[2] 이듬해인 1958년 사명을 소니로 개칭하게 된다. 초기 휴대용 라디오를 개발해냈을 때, 셔츠 주머니에 넣기엔 너무 크다는 지적을 받게된 모리타는 직원들로 하여금 약간 큼직한 주머니가 달린 셔츠를 입게 해 그에 맞는 규격의 라디오를 생산해낸 것이었다.

그후 1960년 세계최초의 트렌지스터 텔레비젼을 개발해 시장에 내놓았고, 1973년 트리니트론 텔레비전 기술로 에미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 1979년에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워크맨을, 1984년에는 워크맨의 휴대용 CD 플레이어 버전인 '디스크맨'을 출시, 소니가 세계적인 가전업체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3]

이같은 실적으로 인해 1960년 소니의 미국법인인 소니 아메리카 코퍼레이션이 설립되고 다음해인 1961년,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되기에 이른다. 여기에 1988년 미국의 CBS로부터 CBS 음반사를 인수하고 이듬해 1989년 역시 콜롬비아 픽처스를 인수해 종합 미디어사로 발전하기에 이르게 된다.


4. 말년[편집]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광고에 출연한 모리타 아키오. 발음이 전형적인 재플리시다.

1994년 11월 25일, 모리타는 바로 전년도에 테니스를 치다가 뇌출혈로 쓰러진 것이 화근이 되어 소니 회장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후임으로 오가 노리오가 임명된다. 그 뒤 1999년 10월 3일, 폐렴으로 인해 향년 78세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5. 여담[편집]


  • 혼다 소이치로와 더불어 학교 교육에 지극히 부정적인 인물이었다. 1966년, "학력무용론"이란 책을 펴냈을 정도. 이 책에서 그는 개인의 사업능력이나 성공여부에 있어 학력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했다[4].

  • 그러나 한편으로는 논란에 서있던 인물이기도 한데 1991년 집필한 "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란 책을 공동저자로 펴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공동저자가 하필 이시하라 신타로였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책의 내용 때문이었다. 이 책에서 모리타와 그 작자미국의 경영방식을 비판함과 더불어 일본 기업들과 일본의 세계경제 선도자 역할을 강조해서 당시 미국 내에서도 신랄한 비판을 받고 있었다. 당시에는 일본 경제가 미국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일본의 경영방식을 치켜세우는 주장이 그럴싸해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이 책이 나오고 불과 몇년 후 일본은 버블붕괴로 인한 장기 경기침체를 겪었고, 소니를 비롯한 일본의 대표적 기업들도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나 훗날 영어판을 냈었을 때 그가 저술한 장은 생략되었으며 책에 관련한 어떠한 연관도 짓지 않으려 했다.

  • 스스로 소니를 '전자기기캐딜락'이라 표현한 바 있으며 서양에서의 평가 역시 메이드 인 재팬에 대한 인식이 밑바닥을 치던 시절 토요타와 더불어 '믿고 사는 일본 제품'[5]이라는 이미지로의 변화를 이끈 선구적인 기업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타임지 기사 뉴욕타임즈 역시 그를 '의심의 여지 없는 일본의 가장 유명한 기업인'이라 평가하기도 했다. 다만 뉴욕타임즈는 기술자로서 회사에 더 큰 공헌을 한 사람은 이부카 마사루 쪽이며 모리타는 경영자이자 마케터로서의 역할에 더 집중한 인물이었다고 둘을 구분지었다. 더 가디언 또한 제품 개발자로서의 업적보다는 회사의 대변인이자 마케터로서 그가 이룬 업적을 더욱 강조하였다. 스티브 잡스스티브 워즈니악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보면 될 듯.[6]


  • 스티브 잡스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기업인이기도 하다. 존 스컬리의 회고에 따르면 잡스와 같이 소니 본사에서 직접 초기 형태의 워크맨을 만져볼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전무후무했던 개념의 제품이었기에 그 점에 매료되었다고. 매킨토시의 공장을 디자인할 때도 또한 소니의 공장을 모티브로 삼았으며 잡스의 트레이드마크인 터틀넥 역시 소니 직원들의 유니폼이 부러워서 잡스가 일본의 패션 디자이너인 미야케 이세이에게 직접 의뢰를 해 제작된 옷이 그 탄생배경이다. 출처 1999년 그가 사망했을 때 잡스는 애플의 제품 발표회 도중 그를 추모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출처

  • 플레이스테이션 1의 기획 과정에서 책임자였던 쿠타라기 켄은 CEO인 오가 노리오의 공식적인 승낙을 받은 이후에도 예의 차원에서 당시 소니의 회장이었던 모리타의 앞에서도 프레젠테이션을 하였는데, 이를 지켜본 모리타는 자신이 그토록 기다려왔던 종류의 제품이라며 쿠타라기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플레이스테이션'이라는 네이밍이 본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를 바꿀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미팅이 있은 후 얼마 안 되어 모리타가 뇌출혈로 쓰러지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네이밍 변경은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


6. 어록[편집]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나 똑같은 실수를 다시 하지 않도록 하라!!"


"나의 경영이념은 '소니와 이해관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직원들의 행복이 나의 최대 관심사다. 그들은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기를 소니에게 맡긴 사람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행복해져야 한다. 직원에 대한 나의 최대 사명은 그들이 세상을 떠날 때 '소니에 근무해 정말 행복했다.'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시장조사를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의 목표는 일반인들을 이끄는 것이고, 그들은 무엇이 가능한지 모른다. 만약 헨리 포드가 일반인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면, 아마도 자동차가 아니라 더 빠른 말을 원한다고 대답했을 것이다."[7]


"아이디어가 좋은 사람은 아주 많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용기 있는 사람은 매우 적다."


"우리의 근본적인 목표는 항상 우리의 기술을 통해 대중들에게 새로운 편리함, 새로운 방법, 그리고 유익함을 제공하는 것이다."[8]



7. 서훈[편집]



[1] 일본에서는 장남이 가업을 잇는 풍토가 정착되었다. 일본에 수백년동안 내려져오는 음식점이 유독 많은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2] 세계 최초의 휴대용 라디오는 텍사스 인스트루먼트1954년에 내놓은 Regency TR-1 모델이다. 그러나 소니의 제품이 훨씬 더 상업적으로 흥행해서 미국에서는 아직도 소니가 세계 최초로 휴대용 라디오를 발명했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3] 다만 실제로 상기된 제품들을 개발한 것은 이부카 마사루가 이끄는 엔지니어링 팀이었고 모리타 자신은 해외를 돌아다니며 판로를 개척하는 데 더 공을 들였다. 그래서 그런지 포춘지는 이부카 마사루를 인터뷰한 기사에서 그를 소니의 '진짜 천재'라 표현하기도 했다.[4] 다만 이는 학력에 연연하지 않는 일본의 풍토와 연관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일본 만화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일본의 학풍이 반드시 "모두 대학에 가야한다"는게 아닌 갈 수 있거나 능력이 될만한 사람은 가라는 식이어서 한국같이 대학 입학에 목숨을 거는 일이 없다. 또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가업 역시 반드시 이어가야 하는것이란 개념이 강해서 이를 잇기 위해 자진해서 물려받는 경우도 흔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이란 참화를 겪은 뒤 남북분단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 가운데 전후 복구 이후 경제개발및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고급 인력들을 필요로 했고 이러한 까닭에 이에 걸맞는 고등교육을 받은 인재들이 요구되어 대학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던 한국과는 달리 일찌감치 상업화가 이루어지고 현대화를 이른 시기에 경험한 일본과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5] 단 토요타는 렉서스를 제외하면 싼맛에 쓰는 저가형 브랜드의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진짜 미국 제품에 견주거나 그것을 능가하는 하이엔드 브랜드라는 평가를 받은 회사는 소니가 최초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의 애플과 같은 이미지를 그 당시 가지고 있었다 생각하면 될 듯.[6] 실제 여느 일본기업과 마찬가지로, 역대 소니의 최고경영자로서 기술자 출신인 사람은 이부카 뿐이다. 이후에는 모리타를 시작으로 히라이 가즈오까지 계속 마케터(하워드 스트링어는 굳이 따지면 컨텐츠 제작자)가 사장을 맡았고, 현임 요시다 겐이치로는 재무통이다.[7] 워크맨의 출시 준비 당시 전문가들과 회사 내 직원들의 회의적 반응을 마주한 후에 이를 반박한 말이다. 훗날 스티브 잡스도 자신의 제품 개발 철학을 설명하며 이 말을 인용했다. #[8]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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