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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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과정
4. 결과
5. 영향과 의의



1. 개요[편집]


/ Glorious Revolution

1688년에 일어난 잉글랜드 왕국의 역사적 사건. 의회가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그의 딸을 메리 2세로 옹립한 사건이다. 하지만 메리 2세 본인의 역할은 크지 않았고, 그녀의 남편 네덜란드 공화국의 통치자 오라녜 공 빌럼이 의회와 연합하여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윌리엄 3세로 즉위한 사건이라 볼 수 있다.

명예혁명은 사건이 발생한 당대에 Revolution이라 불린 최초의 사례이다.[1] 청교도 혁명 등 명예혁명 이전의 revolution들은 전부 사건이 발생했던 당대에는 반란, 전쟁, 내전 등으로 불리다가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revolution이라 이름붙여진 것이다

피를 흘리지 않고 혁명을 이뤄냈다하여 명예혁명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투도 있었고 사상자도 나왔다. 다른 정쟁에 비해 그 유혈이 적었을 뿐이다.

종종 최후의 잉글랜드 정복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우연찮게 이전 정복자와 이름도 같다.


2. 배경[편집]


발단은 이렇다. 올리버 크롬웰이 죽은 후 국민들의 강력한 열망에 의해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고 그 자리에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 왕자가 찰스 2세로 즉위했는데, 그 뒤를 이어서 왕위에 오른 제임스 2세는 독실한 가톨릭교도로서 에스파냐 같은 가톨릭 국가와의 수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며, 정치적으로는 왕권 강화에 힘을 쏟았기 때문에 개신교가 주류였던 의회와의 사이가 악화되었다.[2]


3. 과정[편집]


이 와중에 제임스 2세가 늘그막에 왕자 제임스를 보자[3] 위기의식을 느낀 의회는 당시 제임스 2세의 맏딸, 메리 공주와 결혼한 네덜란드의 통치자 오라녜 공 빌렘에게 "두 분께 잉글랜드의 왕위를 양도할 테니 부디 잉글랜드에 와주십시오"라는 편지를 보내면서 그를 런던에 초청한다. 당시 네덜란드와 잉글랜드는 제3차 잉글랜드-네덜란드 전쟁이 끝난 지 15년밖에 안 된 적대관계였으나 신교국인 네덜란드 입장에서도 잉글랜드가 가톨릭 국가가 되면 대단히 위태로운 상황이라 윌리엄 공은 의회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잉글랜드에 상륙하고 잉글랜드군은 제임스 2세에게 등을 돌리고 윌리엄 공에 가담한다.

제임스 2세: 뭣이!! 윌리엄 짜식이 군대를 몰고 쳐들어온다고!! 사위가 장인을 노리고 쳐들어와? 햐, 세상 한번 말세로다!! 당장 윌리엄 놈의 군대를 콩가루로 만들어 버려랏!!

신하1: 군대가 있어야 콩가루건 미숫가루건 만들죠......

제임스 2세: 그......그런가? 그러고 보니 이거 큰일났구나야~~!!

제임스 2세: (의회에 가서)이제부터 너희들 안 무시하고 같이 일할게! 싸인할 거 시원히 다 해 줄게!!

의회: 때는 늦으리!!! 폐하께 드릴 말씀은 오직 두 단어... '잉글랜드를 떠나라!'

제임스 2세: 얘야, 너라도 이 애비를 위해 뭔가 말좀 해 다오!

앤 공주(차녀): 잉글랜드를 떠나쇼!

제임스 2세: 브루투스, 아니 앤...너마저 이러기냐?

먼나라 이웃나라 4권 中

결과적으로 제임스 2세는 자식들에게도 버림받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결국 그는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프랑스로 망명했고, 런던에 입성한 윌리엄 공과 메리는 각각 윌리엄 3세와 메리 여왕으로 공동 국왕이 된다.[4] 윌리엄 3세의 부재 기간 동안에는 메리가 국왕으로서 직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사실 위에 인용된 먼나라 이웃나라의 설명은 오류가 있다. 제임스 2세에게는 상당한 수준의 병력이 있었고, 제임스 2세의 권력기반인 스코틀랜드에서도 그의 명령에 따라 군대가 소집되고 있었다. 다만 부대의 소집과 이동에 시간이 많이 소모된 탓에, 소규모 정예부대를 동원하여 전격적으로 밀고 들어온 윌리엄에게 반격할 시간이 부족했을 뿐이다. 제임스 2세 또한 실전 경험이 풍부한 유능한 군인이었다.

그리고 사실 영란전쟁이 끝난지 14년밖에 지나지 않았고, 네덜란드의 명장 미힐 더 라위터르 제독이 템스 강 하구를 습격해 잉글랜드 함대를 불사른 기억이 런던 시민의 뇌리에 아직 생생했을 사건이라 이로써 영란전쟁이 네덜란드의 승리로 끝났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4. 결과[편집]


단기적으로 볼 때 이 사건의 결과 제임스 2세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메리 2세윌리엄 3세가 왕위에 올랐다.

명예혁명이 무혈혁명이 아니었다는 견해가 존재한다. 실제로 윌리엄 공의 상륙 이후 제임스 2세의 군대와 몇 차례 크지 않은 규모의 무력충돌이 있었고, 스코틀랜드아일랜드에서 제임스 2세를 옹호하는 대규모 반란과 전쟁이 일어났다. 특히 아일랜드에서 전국을 뒤엎고 두고두고 문제가 된 윌리어마이트 전쟁[5]이 터졌고, 잉글랜드 밖에서 제임스 2세가 왕위를 탈환하려고 프랑스를 끌어들여 윌리엄 3세 하의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스페인과 9년 전쟁을 벌였다.

다만 9년 전쟁은 명예혁명 이후 이에 대한 반발로 벌어진 전쟁이라 별개로 취급하며, 내부적인 문제는 당시 잉글랜드-웨일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는 현재와 같이 연합 왕국이라는 하나의 국가 체제에 묶인 상태가 아닌 엄연히 별개의 독립 국가였다. 다만 같은 왕을 모셨을 뿐이다. 즉, 잉글랜드-웨일스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충돌은 당시 기준으로는 내전이 아닌 국제전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 사건은 잉글랜드 내에서는 명예혁명이라는 이름에 맞게 큰 유혈사태 없이 마무리 되었으나, 이후 얼마간 브리튼 제도와 서유럽 국제 관계에서 유혈 분쟁의 빌미가 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5. 영향과 의의[편집]


잉글랜드에서 최초로 시민사회가 성립되는 데 크게 기여했고, 궁극적으로는 산업혁명에 영향을 주었다. 한마디로 영국이 근대 시민사회로 이행하는 밑바탕을 닦은 사건이다.#

실제로 혁명이라기보다 국왕에 맞서 귀족과 젠트리의 이권을 보장한 측면이 강하다. 사실 민주주의와 민중을 강조하기 위한 역사왜곡도 있고 실제로도 프랑스에서 여러 차례 발생한 민주주의 혁명의 영향을 받은 이후에야 영국에서도 투표권 같은 부르주아들의 권리가 간신히 보장되었으며 심지어 보수파나 귀족파들은 진정한 민주주의적 사상들의 발흥을 보고도 민주주의의 원리가 귀족제의 원리를 침범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 혁명의 결과 권리장전이 통과되며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개인의 권리를 중심으로 재정리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이는 영국에 전 세계 최초로 시민 사회가 형성되는 계기가 된다. 이후 권리장전의 조세와 대표권에 관한 내용을 바탕으로 미국 독립 혁명이 시작되었으며, 차티스트 운동여성 참정권 운동으로 대표되는 참정권 확대 운동 또한 명예혁명과 권리장전의 정신 아래 진행됐다.[6]

또한 명예혁명 이후 여러 차례의 개혁으로 정치가 안정되고, 법과 규칙으로 규정된 개인의 권리에 따라 개인의 경제적 활동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함께 진행되고 있던 과학 혁명과 시너지를 일으키며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데 기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정치적 안정과 경제의 혁명적 변화는 영국이 최초로 근대 시민 사회를 설립하며 근대 사회의 문을 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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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영국의 정치가였던 국회의원 존 햄던(John Hampden)이 1689년에 이 사건을 glorious revolution이라 이름붙였다.[2] 청교도가 주류인 휘그파(現 자유민주당) 뿐만 아니라 제임스 2세의 왕위계승을 옹호했던 왕당파인 토리파(現 보수당)까지 들고 일어날 정도면 말 다한거다(...) 토리파는 성공회 교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3] 당시 제임스 2세는 50세가 넘는 고령이었고 슬하에 딸만 메리, 앤 둘이었던 데다, 딸들도 전부 성공회 신도였고 개신교 국가에 시집갔기에 사위들도 개신교 신자였다. 당초 신하들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제임스 2세가 늘그막에 덜컥 아들을 본 것이었다.[4] 이때 제임스 2세는 도망가면서 국새와 의회 소집장을 챙겨 달아났고 강에 버렸다는 말이 있다.[5] 또는 자코바이트 전쟁이라 불린다.[6] 결과적으로 여성까지 포함한 평등 선거는 영국의 자치령이었던 뉴질랜드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이후 영국에도 상대적으로 빠른 시기에 여성 참정권이 도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