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성당/논란 및 사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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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 2011년 비정규직 노동자 해고 사건
5. 2017년 장애인 출입 거부 및 추기경 면담 요청 거부 사건
6. 2017년 희망원대책위 기습시위 사건


1. 개요[편집]


명동성당의 논란 및 사건 사고를 다루는 문서이다.


2. 1995년 한국통신 파업 사태[편집]


1995년 5월 사상 최초로 명동성당에 경찰이 진입해 한국통신(현 KT) 노조원들을 체포한 사건이다.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가, 전두환도 진입하지 못하던 명동성당에 진입한 셈이다. 이후 1997년 한총련 농성을 비롯해 1998년 퇴출은행 노조 농성, 2000년 한국통신 노조 등도 성당 측이 직접 개입해 해산시킴으로서, 명동성당은 농성장소로 사용되는 빈도가 줄어들게 된다.


3. 2011년 비정규직 노동자 해고 사건[편집]


명동성당에서 다년간 근무했던 외주 비정규직 청소노동자와 경비원들 수 명을 직접고용한다는 이유로 해고하여 사회적 물의를 빚었다.#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의 주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가운데 사회적 약자를 돌본다고 표방하는 종교기관의 이런 이중적인 모습은 세간에 의아함과 더불어 실망감을 안겼다.

서울대교구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에게 선처를 호소하는 서신을 보냈으나, 만나주긴커녕 아무런 답변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파일:external/www.catholicnews.co.kr/13963_32259_1056.jpg

▲ 진성철(프란치스코) 씨 등 해고자 7인이 염수정 추기경에게 보낸 편지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돌보는 곳이 성당이라면서요. 엄동설한에 왜 해고하는지 설명도 없이 쫓아낼 수가 있어요? 용역업체 소속이었지만 명동성당에서 일한 거잖아요. 그런데 한 마디 사과도 없이… 양의 탈을 쓴 늑대 같아요.” (명동성당 전 경비노동자)”

“모든 종교를 포용한다는 게 추기경님 말씀 아니었느냐(명동성당 전 경비노동자)”


개별 입장 표명은 자제한 체 명동성당은 “직접고용으로 고용 주체가 바뀌었기 때문에 새로 직원을 모집한 것”이라며 “기존 경비원들이 해고됐다기보다 새로운 구직자들에게 기회를 준 것이라고 보면 된다. 무조건 기존 경비원들을 수용해야 할 의무는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며 고용절차와 관련하여 발생한 문제일 뿐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하여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라면 해고했을까?"라며 단순 행정상의 문제가 아닌 김수환 추기경 이후의 바뀐 사목 성향이 문제의 원인으로 꼽는 비평도 제기되었다.

이번 사건은 ‘박애’를 외치는 교회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박해’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으며, 성당 측의 책임회피성 태도는 가난한 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교회가 이윤을 최고 가치로 생각하는 기업처럼 노동자를 대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게 하였다.

기존 노동자들이 교적이 없어서, 교파가 달라서 고용 심사조차 제한된 이 사건은 2가지 견해로 볼 수있다. 교적이 없다면 가톨릭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성사를 주려고 시도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고 옳은 것이다. 성당이 세워지고 존재하는 이유가 복음을 전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성사를 거행하기 위함이지 다른 이해득실과 타산에 그 목적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종교에 따른 차이를 두는 것이 뭐가 문제냐는 시각이다. 이러한 문제는 왕왕 벌어지는 일로 미션스쿨과 같은 종교적 목적을 가진 시설에서 종교에 따른 차이를 두는 것은 해당 운영단체에 있어서는 당연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종교적 자유를 요구한다고 보기도 한다.

해고된 청소노동자들의 용역 공백을 메우기 위함인지, 이 일로부터 몇 달 후 명동성당에 <봉사뱅크>가 생겼다. 이 아이디어를 착안하여 도입한 주임신부는 "피정하는 마음으로 한 3시간 정도 잡초를 뽑아보거나, 담배 꽁초 약 20개를 주워보거나, 성당을 자기 집처럼 여겨 화장실 휴지를 교체해보라." 는 등의 말로 도입 취지를 설명했다.



명동성당, 소망교회의 비정규직 해고를 다룬 《뉴스타파》 영상


4. 가톨릭합창단 지휘자 성희롱 사건[편집]


명동성당의 합창단 지휘자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적 비하 발언이 논란이 되어 성당 안팎으로 파장을 일으켰다. 연합뉴스 보도
합창 연습 중 평소에도 목소리를 예쁘게 낼 것을 요구하면서 “요즘은 술집에 나가는 여자들이 말투도 예쁘고 훨씬 고상한 것 같다. 반대로 술집 밖에 돌아다니는 일반 여성들은 훨씬 술집 여자 같다.”는 망언과 자신이 평소 성가대 지휘자 신분으로 "접대 차 술집에 자주 다닌다"고 자랑스럽게 밝힌 게 화근이었다.

공식 석상에서의 발언으로는 적절하지 못함을 인지한 어느 합창단원이, 지휘자에게 장문의 메일을 작성하여 주의해 줄 것을 정중히 요청하였다. 그러나 지휘자가 “할 말 없어요.” 라고 단답하며 무시하자 사태가 커지게 되었다.[1]

논란이 일자 합창단 지도신부가 해당 합창단원과 3차례 면담을 하게 되었는데, "지휘자에게 구두경고하겠다"고 하면서도 당사자의 성적 수치심 등 정신적 피해에 대한 상담이나 위로는 없이 "개인적인 발언을 전체적인 문제로 삼는 절차가 적절하지 못하였다"고 거듭 질책하였다. 그리고 "공동체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몰아 합창단원에게 "처분이 있을 것이며, 납득하지 못하겠으면 그만두라"고 으름장을 놓는 등 지도신부로서 사건의 공정한 중재와 갈등의 올바른 조정이 아닌 피해자의 입장만 억압한 결과를 도출하였다.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는 데에 기여하였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2] 지도신부나 지휘자나 똑같은 놈이다




《스브스뉴스》에서 다룬 〈명동성당에서 성희롱을 당했다는 고 씨, 진실은?〉 영상

결국 2019년, 문제의 지휘자가 물러나고 사제 신분의 새로운 지휘자가 부임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5. 2017년 장애인 출입 거부 및 추기경 면담 요청 거부 사건[편집]


대구 희망원 사건의 해결과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자 장애계 인사들이 명동성당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서울대교구염수정 추기경에게 면담을 요청하였다. 대구 희망원에 대한 대구광역시의 지원 예산이 횡령되어 대구대교구 사목공제회에 불법 비자금으로 빠져나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마당에 이 사태를 대구대교구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라는 것은 공범에게 범죄 수사를 맡기는 것과 다름 없으며 사태의 심각성은 한국 천주교 전체의 신뢰에도 직결되는 것이라 지역교구만의 일로 치부할 수 없다고 밝히면서 한국 천주교의 상징적 대표 기관[3][4]을 방문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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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희망원 사건의 해결과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대책위원회의 기자회견
그러나 장애계 대책위원회와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과의 면담은 성사되지 못했으며, 대책위원회가 전달하고자 한 '염수정 추기경 면담요청서'도 전달되지 못하였다. 명동성당 측은 '본 성당(명동성당)은 유사 이래 면담요청서를 받은 적이 없다'고 밝혔다. 이후 명동성당 측은 경찰에 시설보호요청을 하여 대책위원회의 진입을 막았다. 대책위원회 측은 "야간 10시 30분까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하도록 되어있는 명동성당이 장애인들의 출입을 차단한 이런 조치는 비상식적이며 장애인 기본 인권에 대한 침해"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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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 중인 대책위원회와 경찰
이후 대책위원회와 경찰은 명동성당 앞에서 약 20분간 대치하였고, 대책위원회는 면담요청서를 명동성당 입구에 부착하고, 발길을 돌렸다.

서울대교구의 위와 같은 대응이 현명했는지는 별론으로 하고, 서울대교구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 면담요청은 처리하기가 난감한 상황이다. 한국의 지방자치제에 비유하자면 대구광역시립시설에서 일어난 사건을 서울시장에게 해결해달라고 면담요청이 들어온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한국 천주교회의 대통령과 같은 분에게 면담을 요청했다고 생각한 것이지만 대통령이 아닌 서울시장에게 갔으니 면담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것. 보통 서울대교구 교구장이 추기경, 대구대교구 교구장이 대주교이기 때문에, 서울대교구가 한국 천주교 전체를 대표한다는 오해가 있을 수 있으나, 대한민국 내 각 교구는 엄연히 상호 개별적으로 독립되어 있다. 다만,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상호 의견을 교환할 뿐이다.


6. 2017년 희망원대책위 기습시위 사건[편집]


대구 희망원 사건에 대한 적극적인 해결 촉구를 외치며, 사건을 은폐하려는 대구대교구의 동향에 대해 규탄하는 기습시위가 명동성당의 미사 집전 중에 발생했다. 이 날 미사는 ‘프란치스코 교황 선출 기념 미사’로,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히지노 대주교(광주대교구)와 주한 교황대사를 중심으로 각 교구주교들이 한 데 모인 자리였다. #1 #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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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 중 일어난 기습시위
이 기습시위는 곧바로 본당 사제단과 성당 관계자들에 의해 진압되었고, 운동가들은 성당 바깥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시위를 벌인 '희망원대책위'는 그간 수차례 대구대교구조환길 타대오 주교와의 면담을 요청하였고 한국 천주교의 수장 격인 서울대교구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에게도 면담을 요청하였으며 주한 교황청대사관에도 서신을 보냈음에도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하자 이 같은 시위를 계획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설에서 죽어나갔습니다. 사람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천주교 재단이 운영하는 시설이었습니다. 천주교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동안 30번이 넘게 성명을 내고 15번이 넘게 기자회견을 하면서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외면합니까. 세상이 떠들썩했고, 천주교가 모르지 않을 것 아닙니까. 신부가 구속됐습니다. 책임감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면담요청서 하나 전달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가. 희망원 사건 터진 지 8개월이 지났지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대구대교구가 37년간 시설을 운영했다. 이건 대구만의 문제가 아니라 천주교 전체의 문제이며 교단 전체의 반성이 필요한 문제다. 명동성당이 이래선 안 된다."


한국 천주교의 본산인 명동성당에서 미사 집전 중에 교회의 부조리한 행태를 질타하는 기습시위가 발생한 것만으로도 교계에 경종을 울릴 사안이다. 시위를 진압·수습하는 과정에서 보인 성당 측의 배타적인 대처 방식은 자비와 이웃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는 교회의 가르침에서 크게 엇나간 모습으로 부각되었다. 또한 불우한 이웃의 구제를 위한 ‘대화’를 원했으나, 성당에서 쫓겨나는 인권운동가들의 모습도 사회에 안타까운 시선으로 공개 되었다.

반면 이러한 기습시위에 대해 "뜻은 이해하겠는데, 거룩한 미사 중에 저렇게 하는 것은 방법론 측면에서 옳은 것이 아니었다."는 비판도 있다. 장례식등방해죄로 시위자 전원이 입건될 수 있는 사안이며, 세속의 관점에서 봐도 엄연히 업무방해에 해당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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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당 전국장애인위원회 정중규 베네딕토 위원장은 이를 두고 "사회의 기준도 못 따라가는 교회의 행태" 라 지적하며 개인 칼럼을 통해 "희망원 사태를 대구대교구의 개별 문제로 몰아가려는 한국 가톨릭교회의 태도는 가톨릭 교계제도의 특성[5]을 고려할지라도 비난 받아 마땅하다."고 밝혔다.


[1] 갈등이 심화되자 지휘자가 해당 합창단원에게 “원래 음악계에서는 선생에게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아도 ‘감사합니다.’하고 인사하는 것이 법도다.”라며 역으로 면박을 줬다는 증언도 있다.[2] 논란의 원인이 된 지휘자의 발언에 대해서는 '(성당은) 사랑의 단체이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해 (처벌 등을) 명확하고 세세하게 할 생각은 없다.'고 하였다.[3]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대표 기관은 광진구 중곡동의 한국천주교주교회의 · 중앙협의회이다. 대구대교구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 해도 서울대교구에서 해결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한국 가톨릭의 구조는 서울대교구가 일방적으로 타 교구를 통솔하는 구조가 아니라, 여러 교구들이 동등한 주교로서 주교회의에 모여 협의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아래 명동성당 측의 대응이 옳은 것은 아니다.[4] 실제로 역대 추기경 3명 모두 서울대교구장인 상태에서 추기경이 되었다.[5] 교황 중심의 중앙집권 특성상 성공회, 정교회에 비해 덜하긴 하지만, 개별 교구는 그 자체가 독립적인 지역교회로서의 기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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