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튜 B. 리지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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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 벙커 리지웨이
Matthew Bunker Ridgway


이름
한국어: 매튜(매슈)[1] 벙커 리지웨이[일본식]
한자: 이기위(李奇威), 이격위(李格威)[2]
출생
1895년 3월 3일
미국 버지니아 주 포트 먼로
사망
1993년 7월 26일 (향년 98세)
미국 펜실베이니아 폭스 샤펠
신체
165cm, 86kg[3]
복무
미합중국 육군
복무 기간
1917 ~ 1955
최종 계급
미국 육군 대장
지휘
NATO 사령관
미국 육군참모총장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바나나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서훈 내역
수훈십자장
퍼플 하트
훈공장
대통령 자유 훈장
그 외

1. 개요
2. 생애
2.1. 소년 시절부터 2차대전까지
2.2. 한국전쟁에서의 활약
2.3. 유엔군 사령관에서 퇴역까지
2.4. 말년
3. 평가
4. 그 외



1. 개요[편집]


"전쟁터에서는 어느 하나 귀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보실 때는 장군이 전사한 것이나 소총수 하나가 쓰러진 것이나 똑같이 귀한 목숨입니다. 각 개인의 존엄성이야말로 서구 문명의 기초라는 사실을 부대장들은 모두 명심해야 합니다."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pp. 750 - 751


미국 육군 군인.

제2차 세계대전에는 미 육군 공수부대 사단장군단장으로 유럽전선에서 참전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23일교통사고로 순직한 미 제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사후 대장으로 추서)의 후임으로 6.25 전쟁에도 참전하였고 맥아더의 뒤를 이어 유엔군사령관에도 취임하였다.

제8군 사령관으로 취임하자마자 강인한 카리스마와 뛰어나고 과감한 전략, 전술을 통해 그 직전까지만 해도 유엔군의 패색이 짙던 전세를 1951년 봄부터 다시 역전시켜 버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엔군은 더글러스 맥아더가 1950년 10월 이후 중국 인민지원군에게 밀리면서 절망적인 후퇴를 거듭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미군 합참본부는 한반도에서 철군하기로 의견을 이미 모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8군사령관 리지웨이가 중공군에게도 약점이 있음을 설득하여 합참의 철군 의견을 무력화시켰다.[4] 그리고 중공군 참전으로 핵무기 사용을 주장하며 이성과 리더십을 상실해버린 나머지 1951년 4월 해임되어버린 맥아더를 대신하여, 제2대 유엔군 사령관 및 미 극동군 사령관으로 취임하여, 중공군의 진격을 끝내 저지하고 대한민국을 지켜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건대 6.25 전쟁에서 한반도의 적화통일 저지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2. 생애[편집]



2.1. 소년 시절부터 2차대전까지[편집]


1895년 3월 3일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포병 장교였던 아버지 토머스 리지웨이 대령과 어머니 루스 리지웨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레 미군 기지의 기관총과 대포를 보고 자랐고, 기상나팔과 소등 나팔소리를 들으면서 군인의 꿈을 키워갔다고.

고등학교 졸업 후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재수 끝에 입학했다. 1917년 졸업 후 1년 뒤 모교의 스페인어 교관으로 보직되었고, 당시 학교장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5]의 지시로 생도대 훈육관과 체육처장으로 근무했다. 그는 이 당시에 유럽 대륙에서 벌어지던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한다. 당시 군인들에게 있어서 이 전쟁은 악의 세력으로 규정된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에 대항한다는 의미가 강했다. 특히 독일 제국 해군 잠수함 부대가 펼친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많은 미국인들이 사망한 사건 이후로는 더더욱 그랬다. 이 때문에 리지웨이는 1차대전 참전용사들 앞에서는 기를 못 폈다고 하지만, 정작 전선의 상황은 시궁창이라서 안 갔던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1924~25년에 6년간의 사관학교 근무를 마치고 포트 베닝 미국 육군 보병학교의 고등군사반 과정에 입교했고, 전술교관의 경험을 살려 고등군사반을 2등으로 수료하면서 중국 톈진에 있는 미국 육군 제15보병연대에 전속된다. 당시 이 15연대의 연대장이 훗날 미국 육군참모총장이 되는 조지 마셜 중령이었고 여기서 마셜과 인연을 맺게 된다.

1930년대에는 제6군단 참모장 보좌관, 제2군 부참모장, 제4군 참모장 보좌관을 지낸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마셜의 명령에 따라 전쟁기획국에 보직하게 된다. 그곳에서 리지웨이는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참전시 라틴아메리카와 우호관계를 돈독히 할 목적[6]으로 1939년 마셜과 함께 브라질을 방문하였고, 그 덕에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브라질의 항구와 공항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육군 제82공수사단장을 맡아 북아프리카 전역에 처음 참전했다. 1942년 1월에 준장으로 진급, 1943년 7월에 허스키 작전[7], 1944년 6월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시행될 공수강하계획에 지원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그는 부하와 함께 낙하산으로 강하하여 33일 간의 전투를 경험했다. 9월에는 제18공수군단장에 임명되어 독일로 진격하는 작전을 지휘했다. 다만 독일군의 반격이 벌어진 아르덴 대공세 때는 마침 우연히 회의를 위해 전선을 떠나 있던 상황이라서 작전을 지휘하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18공수군단의 지휘는 예하 부대장인 제임스 가빈 82공수사단장이 대행해서 맡았다.
루르 지역을 공격할 때는 당시 서부전선의 독일군 주력이었던 B집단군의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서한을 보내 B집단군이 해산되는데 일조하였으며(모델은 항복하지 않고 자결했다.), 독일에서는 전투 중 적군의 수류탄으로 인해 어깨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 1년 후 그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유럽에서 연합군이 승전한 뒤에는 아직까지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군과 전쟁 중이던 옛 상관 맥아더 장군의 휘하로 들어가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리지웨이는 지중해, 카리브해 지구 사령관을 거쳐 1949년에는 미 국방부 육군부의 행정 담당 참모차장(Deputy Chief of Staff for Administration)직을 맡게 된다.


2.2. 한국전쟁에서의 활약[편집]


파일:리지웨이1.jpg
1951년 2월, 막 부임해 전선 상황을 시찰 중인 리지웨이. 한쪽 가슴에 보란 듯이 수류탄을 차고 있다.[8]


왜 이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를 지켜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미국의 합법적인 정부가 내린 합법적인 명령에 따라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디뎠고, 적과 끝까지 싸울 것이다.

리지웨이 회고록, Matthew B. Ridgway, Soldier: the memoirs of Matthew B. Ridgway, as told to Harold H. Martin. Greenwood, 1974

1950년 12월 23일, 미8군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이 교통사고로 순직한 후 리지웨이가 신임 미8군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리지웨이는 워낙 일처리가 빈틈없어서 도쿄 극동군사령부와 워싱턴 D.C. 정부 모두 그를 워커의 유일한 후임으로 지목했다. 맥아더는 워커의 부고를 듣자마자 리지웨이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입지는 워싱턴에서 훨씬 더 대단했는데, 당시에 어떤 인재가 나왔다는 소문이 돌면 "이 사람은 리지웨이만큼 잘하고 있나?" 또는 "리틀 리지웨이라고 부를만한 인재인가?" 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고. 그 정도로 리지웨이는 당시 미 육군 최고의 인재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다만 맥아더는 자기 라인의 사람만 좋아하여 리지웨이같이 자기가 잘 알지 못하거나 전략에 대한 생각이 다른 사람을 싫어했고, 이에 따라 맥아더와 리지웨이는 6.25 전쟁 기간 중 많은 마찰을 빚게 된다. 이미 리지웨이는 낙동강 전선에 도착했을 때부터 맥아더가 무능하다고 생각했으며 맥아더의 지시와 별도로 단독작전을 수행시켰다.

리지웨이는 25일 미 제8군사령관으로 임명된 날 오전, 미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맥아더를 만났다. 그는 맥아더에게 "전황이 우리에게 유리하다고 판단될 때 제가 공격을 개시한다면 반대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맥아더는 "제8군은 자네에게 달렸네, 매튜. 자네가 좋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하면 되네"라고 답했다. 리지웨이가 이러한 질문을 던진 이유는 맥아더가 하급부대의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해서 결국 한반도 북부에서 다 이긴 전쟁을 말아먹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맥아더가 자기의 행동에 간섭하기를 꺼렸던 리지웨이는 선수를 쳐 맥아더에게서 전권을 부여받은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부대기동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됐다.

26일 오후, 한국에 도착한 리지웨이는 곧바로 전선 시찰에 나섰다가 경악하게 된다. 여태까지 중공군에게 미친 듯이 깨졌던 충격 때문에(청천강 전투장진호 전투 참조) 아군 장교들은 안될거야 아마라는 패배주의적 태도로 일관했고 장병들의 사기도 땅에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중공군을 피해 남쪽으로 달아나는 데 급급한 나머지 정찰도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가 들렀던 본부마다 걸려 있는 지도에 나타나 있는 적군의 규모나 위치마저 부정확하다는 사실을 안 리지웨이는 격노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정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48시간 안에 중공군을 보았을 때만 지도에 붉은 깃발(중공군)을 표시한다는 규칙을 공표했다.

리지웨이가 전방을 시찰하고 서울로 돌아간 31일 오후부터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시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부전선에 큰 구멍이 뚫리고 북한군 수개 사단이 눈사태처럼 밀고 내려오자, 리지웨이는 이를 방치해두면 북한군이 대구대전 부근을 향해서 돌진하여 제8군과 제10군단을 동서로 양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1951년 1월 3일, 리지웨이는 UN군 전군에 다음 진지선인 37도선(평택-원주-삼척선)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월 4일, 중공군의 수색병이 서울 교외에 출몰하는 상황이 일어나자 한국 정부는 다시 한번 부산으로 천도하고, 유엔군의 전방지휘소는 대구로 이동했다. 서울 철수 때도 평양에서처럼 군사시설은 물론이고, 적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은 모두 소각시켰다(1.4 후퇴).

리지웨이는 사기가 떨어진 장병을 추스르기 위해서는 전투에서 승전하는 것만이 방책이라고 판단하고, 전투에 앞서 유엔군에 대한 대대적인 수술에 들어간다.

우선 그는 미국 정부에 방위부대 10여 개 및 예비 포병대대를 추가 파병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미국 정부가 한국에 충분한 자원을 투입하지 않고 중국과 협상하려고 한다는 것과, 미국이 무기나 탄약 면에서는 부족한 점이 없었지만 병력 파견에는 인색한 편[9][10]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중공군에 비해 부족한 병력 수를 포병 중심의 강력한 화력으로 보완하기로 했다.

유엔군은 부산 등 항구를 통해 풍부한 물자를 보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장기전으로 갈수록 매우 유리했다. 반면에 중공군은 중화기를 들여오는 데 한계가 있었고 미 공군의 폭격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리지웨이는 장거리 포탄으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대응하기로 하고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새로운 포병사단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리지웨이는 공세 위주의 전략을 선호했기 때문에 자신의 공세 위주 전략을 따르지 않는 장교들을 전부 잘라버리고 자신의 견해에 찬성하는 장교들을 등용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중공군의 위협에 벌벌 떨며 삽질만 해대던 한국군을 통제하는 한편, 진지를 설치한 여러 겹의 방어선을 한반도 중남부 지역 곳곳에 설정해 두었다. 이 작전은 부산까지의 300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역을 이용하여 사전에 진지를 준비해 두었다가 이 진지를 이용해 아군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화력으로 적에게 최대의 손실을 주고, 이 방어선이 돌파될 위험에 빠지게 되면 다음의 제2선 진지로 후퇴하는 방법을 되풀이한다는 내용의 작전이었다.

이는 얼핏 생각하면 지연작전과 비슷하지만, 목적이 단순한 방어와 지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방어의 반복에 의해 중공군과 북한군의 출혈을 강요하면서 적의 전의를 약화시켜 가급적이면 그들의 전진을 저지하고 공세로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즉 간단하게 말하자면 한타 막고 역러쉬인 셈. 또한 그는 정찰을 매우 중시하였기 때문에 모든 부대원들에게 적군의 전투물자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아오도록 명령하고, 자신도 저고도 비행을 하는 정찰기를 타고 직접 적군의 동태를 파악하기까지 했다.[11]

마침내 중공군이 전투물자 보급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1951년 1월 중순부터 리지웨이는 매 전투마다 중공군에게 결정적인 손실을 입히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리지웨이는 정찰기를 타고 중공군 진지를 살핀 끝에 중공군의 보급선이 지나치게 길어져서 더 이상의 효과적인 공격을 할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중공군이 피로하고 보급이 여의치 못한 틈을 타 대대적인 반격을 해오곤 했다. 특정 시점이 되면 제아무리 많은 인구[12]를 보유한 중국이라도 자국 군대의 적잖은 인명 손실에 어려움을 겪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리지웨이는 51년 1월 15일부터 이른바 ‘자석전술'을 구사했다. 대규모의 교전에 앞서 탱크 등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기계화 부대로 끊임없이 중공군과 접촉해 소모전의 형태로 중공군 병사들의 움직임을 제약해 중공군이 예전과 같은 기습공격을 못하도록 억제했다. 유엔군에게 유리하면 중공군을 밀어붙여 요충지를 점령하는 반면 불리하면 잽싸게 물러나버리는 것이었다.[13]

한국에 온 지 한 달가량 지난 1951년 1월 25일, 리지웨이는 드디어 썬더볼트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첫 번째 공격을 가했다.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조심스럽게 진군했다. 중공군이 이들을 뚫고 지나가거나 후방이나 측면에서 공격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리지웨이는 방어선이 중간에 끊어지게 하거나 주요 지점에 남한군을 배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썬더볼트 작전의 목표는 아주 제한적이었다. 리지웨이는 북쪽으로 30킬로미터 정도 가서 한강의 남쪽 강둑에 도착하되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서서히 부대 규모를 늘리려 했다. 후방에서 부대를 더 보내려면 처음에 출발한 부대에 아무 문제가 없어야 했다. 리지웨이는 무조건 북쪽으로 밀고 갔다가 중공군의 규모를 과소평가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공격이 아닌 방어에 급급해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걸 원치 않았다.

31일, 유엔군은 중부전선의 홍천군-횡성군 축선을 따라 공격을 실시했는데, 비록 홍천 탈환에는 실패했지만 전선을 30km 이상 북쪽으로 밀어올리는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에드워드 알몬드가 제10군단을 이끌고 진행하는 라운드업 작전은 2월 5일에 시작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작전을 시작하기도 전에 리지웨이는 심장부에 몰려드는 중공군의 규모가 날로 커지는 것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다. 그 지역은 썬더볼트 작전이 계획된 장소 바로 동쪽 편에 있었다. 리지웨이는 거기 나가 있던 아군이 수적으로 열세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원주시와 지평리가 중공군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용납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결국 그는 1월 28일에 제23연대 소속 부대를 하나둘 지평리로 보내기 시작했다. 2월 3일에 미 제2사단 23연대가 북진을 개시하여 전선의 서부와 중부를 연결하는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한편 2월 11일에 중공군의 제4차 공세가 시작되고 횡성 전투에서 한국군 8사단단 4시간 만에 사단이 해체될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고 패배하자 전선 중앙에 큰 구멍이 뚫리게 된다. 결국 중공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미 제10군단은 전선의 붕괴를 막기 위해 열흘 전의 진격로를 뒤돌아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지평리를 점령했던 미군 제23연대와 프랑스군 대대도 여주군 인근으로 후퇴하려고 했다.

그러나 지평리를 포기하게 되면 중부전선을 돌파한 중공군이 이제 막 선전하기 시작한 서부전선의 유엔군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게 된다고 판단한 리지웨이는 23연대에 지평리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무조건 사수하도록 명령했다. 이것이 바로 지평리 전투다.[14]

지평리 전투 중 리지웨이는 전투 상황을 주시하면서 공군과 보급품을 지원해주었으며, 14일 전투가 절정에 달했을 때는 지평리의 23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마셜 C. 크롬베즈 대령이 이끄는 미 제9군단 제5기병연대를 주축으로 한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를 지평리로 보내 16일에 드디어 승전보를 듣게 된다!

만약 지평리가 중공군에게 함락되었다면 중공군이 서부전선의 유엔군을 측면에서 공격했을 것이고, 유엔군은 다음 방어선인 금강 방어선으로 후퇴했을 것이다. 당시 미국 극동군사령부와 합동참모본부에서는 중공군이 금강 방어선과 그 동쪽 방어선인 소백산맥 방어선에까지 도달했을 경우 유엔군을 일본으로 철수시키고, 한국 정부와 한국군은 제주도로 철수시켜 항전을 이어가도록 한다는 내용의 계획을 극비리에 검토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지평리 전투의 승전이 정말 극적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3. 유엔군 사령관에서 퇴역까지[편집]


1951년 4월에 상관 맥아더가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 의해 해임되자, 대장으로 승진한 리지웨이는 맥아더의 뒤를 이어 제2대 유엔군 사령관 및 미 극동군 사령관, 그리고 제2대 일본 점령 연합군 최고사령관 자리에 올라 연합군 점령하의 일본을 통치하면서 한반도의 유엔군을 지휘하게 된다. 정전협상에서 리지웨이는 일찍이 서울을 압박할 개성시의 전략 전술적 가치를 알아차려 개성을 대한민국이 반드시 차지하거나 적어도 중립지대로 할 것을 미 본국한테 강력히 요청하였으며 개성을 되찾을 군사활동 또한 고려하였으나 전쟁에 질려 있었던 미 정부와 언론한테서 사소한 일에 집착하고 있다는 영 좋지 않은 반응만 나와 개성 되찾기를 결국 포기하였다. 결과적으로 휴전선에서 서부전선이 남하하여 서울을 위협하는 코리안 리스크가 한국의 고질이 된 북한의 대남 도발사를 생각한다면 실로 리지웨이의 식견이 탁월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1년 뒤인 1952년 4월 28일, 미국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연합군의 일본 점령을 해제하고 일본을 서방 자유진영에 편입시킴으로써 리지웨이는 일본 점령 연합군 최고사령관직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 5월, 리지웨이는 미국 대통령선거 후보에 오르게 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뒤를 이어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직에 올랐다. 한편 한국전쟁을 지휘하는 미 8군 및 자리는 제임스 밴 플리트 중장이 이어받게 된다.

1953년, 리지웨이는 조지프 로턴 콜린스 장군의 뒤를 이어 미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왔다. 역사가들은 그가 육군참모총장이 된 뒤에 베트남 전쟁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을 늦추었다고 간주한다.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미군이 프랑스군과 합동으로 베트남전에 개입하는 것에 대해 리지웨이의 의견을 구했는데, 그는 아이젠하워에게 베트남에 개입하지 말라고 말했다. 베트남 전쟁의 실상을 보면 알겠지만 이는 현명한 판단이었다. 한국에서 중공군을 상대해본 경험을 통해 제한전에서 다수의 보병을 중심으로 운용하는 상대에게 육상화력, 공군력과 해군력의 우위만으로 승리를 거둘 수 없으며 보병전력으로 상대 땅에 깃발을 꼽지 않는 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 결국 베트남 전쟁은 리지웨이의 예측대로 돌아가게 된다.

그렇지만 이 제안은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리지웨이와 아이젠하워가 유지하고 있었던 친분 관계를 시험하게 만들었고[15], 결국 리지웨이는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른 시기에 퇴역을 강요당했다. 하지만 본인은 자신의 능력이 미치는 한 나라에 봉사했다고 확신했다. 결국 그는 1955년에 육군에서 퇴역했다.


2.4. 말년[편집]


군을 나온 뒤로 펜실베이니아피츠버그의 멜론 산업조사연구소 이사회 회장을 1955년부터 1960년까지 맡았다. 퇴역한 지 1년이 지난 1956년에는 <군인>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후로도 그는 자서전인 <The Memoirs of Matthew B. Ridgway>와 6.25 전쟁을 다룬 전기인 <The Korean War: How We Met the Challenge: How All-out Asian War was Averted: Why MacArthur was Dismissed: Why Today's War Objectives Must be Limited>(1967)을 출판했다. 1986년에는 '대통령 자유 훈장(Presidential Medal of Freedom)'[16]을 받았다.

리지웨이는 군에서는 성공한 인물이었지만, 사생활에 있어서는 불행한 삶을 살았다. 결혼을 3번이나 했고, 1971년에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리지웨이의 친구나 동료의 말에 의하면, 그 뒤부터 점점 더 기운이 빠지고 감정의 기복이 심해졌다고 한다.

1993년 7월 26일, 피츠버그 교외의 자택에서 98세의 나이로 사망한 뒤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3. 평가[편집]


6.25 전쟁에 투입되기 직전에도 뛰어난 인재로 평가받고 있었고, 1.4 후퇴 직후 사기나 전략면에서 개막장 하이웨이를 달리고 있었던 유엔군을 빠른 시간 내에 재정비하여 곧바로 38선까지 치고 올라가는 등 전세를 역전시킨 공로는 많은 전쟁사 연구가들에게 크게 호평받고 있는 부분이다.

또한 그는 직접 정찰기에 타 저고도 비행을 하면서 적진을 살피거나,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최전선에 나가서 부하들을 독려하고 지휘하는 모습을 보여 많은 장병들을 감동시키기도 하였다. 그가 한국 전선에 있을 때의 사진들을 보면 군복의 가슴 부분에 수류탄 한두 개가 꼭 달려 있는데, 그가 말하길 자신도 군인이므로 만약 적군의 기습을 받게 된다면 자신의 몸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17]

한편, 그가 장병들에게 보낸 글 속에서 그가 어떤 마음으로 6.25 전쟁에 임했는지를 뚜렷하게 나타낸 문장이 있는데 그 문장은 다음과 같다.

핵심적 문제는 서방문명이 공산주의의 도전을 극복할 수 있는가, 아니면 포로들을 사살하고, 시민들을 노예화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지배층이, 개인과 개인의 권리를 神聖視(신성시)하는 정부를 무너뜨릴 것인가이다. 우리의 동맹국인 한국의 자유뿐 아니라 우리의 자유, 우리의 자주독립과 생존을 위해 우리는 싸우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공산주의와 개인의 자유 중 兩者擇一(양자택일)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최대의 위기에 직면해 있으나 동시에 最善(최선)의 기회를 부여받았다. 군인이란 직업의 명예를 드높여, 우리를 믿고 지원해주는 사람들에게 최선의 의무를 다할 기회가 왔다.


프랑스군이 고전하고 있었던 베트남에 미군을 투입시키려고 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말린 일화에 대해 역사가들은 리지웨이가 육군참모총장으로 재직한 덕에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이 10년 정도 늦추어질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퇴역 크리...

또한 베트남 전쟁 당시 6.25 전쟁에서의 경험에 비추어 제한전 상황에서 공군력의 우위는 단지 허상일 뿐이라며 미 공군의 북베트남 폭격을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해군력과 공군력에서 절대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었던 미군이 사실상 제해권과 제공권 자체가 없었던 인구빨 중공군을 한반도 북부에서 끝내 몰아내지 못한 사실, 그리고 이후에 전개된 베트남 전쟁의 전황에서 알 수 있듯이 정확한 것이었다.

이렇게 군대 지휘나 자문에 있어서 뛰어난 성과를 거둔 리지웨이였지만, 6.25 전쟁 참전 초기 자신의 공세적 전략에 따르지 않는 장교들을 해임하고 전부 자기 주장을 지지하는 장교들로 갈아치운 일,[18] 북대서양 조약기구 최고사령관직에 있던 시절 자기 주위를 자기 부하들로만 꽉꽉 채워넣는 행태 때문에 다른 유럽 국가 군 사령관들의 반발을 샀던 일을 보면 그 역시도 인간으로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그래도 핵무기를 전쟁에서 쓰겠다고 위험한 소리하던 맥아더보다는..

또한 그는 횡성 전투 당시 한국군 8사단이 맥없이 후퇴하면서 전멸하고 같은 전선을 형성하던 미군까지 큰 피해를 입힌 사례를 두고 "나는 한국인들의 유전자 속에 중국인에 대한 경외감이 새겨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는 내용을 자서전에 기술하기도 했다. 당시에도 국군 지휘관들이 소위 인해전술이라는 단어까지 조어해 낼 정도로 끊임없는 기동으로 화력방면에서 전술적 수적우위를 이끌어내는 중공군의 기동전술을 사대주의적 사관인 대륙의 이미지로 부풀려 내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굉장히 거슬렸던 모양이다. 우리 입장에서만 보면 썩 유쾌하지 않은 서술인 것은 분명하지만, 횡성전투를 비롯한 한국전쟁 초중기에는 한국군이 중공군에게 대패하여 전선 전체가 다대한 위험에 빠진 경우가 실제로 여러 번 있었기에[19] 리지웨이의 평가는 결코 과장되거나 악의적인 것은 아니다(...).[20]


4. 그 외[편집]


  • 월튼 워커 미8군사령관이 교통사고로 사망하기 이전까지 리지웨이는 유엔군의 군수물자 지원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그는 중공군 참전 이후부터 한국군과 미군이 중공군을 만나 대패하면서 막대한 군수물자를 챙기지도 않고 후퇴하는 바람에 아까운 물자들이 유실되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 미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이후 그는 예하부대에 군수물자를 소중히 간수할 것을 지시했다.

  • 6.25 전쟁 당시의 다른 유엔군 지휘관들과 마찬가지로 리지웨이도 지휘력이 부재하고 훈련 상태도 엉망인 한국군을 불신했다. 리지웨이의 한국군에 대한 불신을 잘 보여주는 예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1951년 초,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군 10개 사단을 무장시킬 장비를 추가적으로 지원해 달라고 미국 측에 요청하자, 리지웨이는 같은 해 5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쳐서 워싱턴의 육군부에 이승만의 요청을 거부해 달라는 내용의 비밀전문을 보낸다. 그가 이러한 내용의 비밀전문을 보낸 이유는 한국군이 그 군수물자들을 가지고 있다가 중공군에게 빼앗기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21] 리지웨이는 비밀전문에서 아무리 한국군에 장비를 지원해 주어 봤자 그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지금의 한국군에게는 무엇보다도 다수의 유능한 지휘관 및 엄격한 훈련 체계를 갖추게 하는 일이 더 시급하다고 강조했다.[22]

  • 이와 같이 6.25 전쟁 당시의 유엔군 지휘관들은 졸전만 하던 한국군을 믿지 못한 나머지, 위에서도 언급한 유엔군의 한반도 철수 계획 시에는 아예 한국군을 미군에 병합시키는 방안도 검토했다.[23]

  •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게 하는 데에 제일 큰 공을 세운 인물이지만 한국에서 그의 평가는 의외로 박한 편이었다. 아무래도 이승만과 사이가 좋았던 맥아더, 전쟁 후에도 한국을 돕는데 노력한 밴 플리트와 달리 리지웨이는 사이가 그다지 좋질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반인들의 시선이지만) 인천 상륙작전과 같은 임팩트 있는 사건이 부족한 것도 한 몫 한다. 이 결과 리지웨이가 큰 관심을 못 받았고, 심지어 북진통일을 달성하지 못한 졸장으로 인식하는 사람도 있다.


  • 2021년 8월 24일 클리앙에 리지웨이가 남긴 자서전의 리뷰가 올라왔다.# 내용을 요약하면 한국의 우파와 좌파 모두가 불편해할 이야기인데, 우파 입장에서는 맥아더가 중공군을 너무 깔보다가 참패를 당하고 "한국군은 국방부장관에서 일반 사병에 이르기까지 리더쉽이라곤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다. 한국군의 지휘관들은 함량 미달의 인물들이 정치적 빽으로 임용된 경우가 많았고, 이들은 능력도 없는 주제에 자기 체면만 생각하고 부하직원의 충언을 들으려 하지 않았으며, 전투에서 패했을 때는 부하들보다 자기들이 먼저 도망가는 데 앞장서는 게 다반사였다."고 혹평한 것에 대해 불편하고, 좌파 입장에서는 "공산주의의 발호를 막는 것이 자신의 국익에 부합한다는 판단을 하고 미국이 참전한 건 분명 맞지만, 미국 역시 많은 희생을 치렀다."는 점이 불편하다. 그 밖에도 리지웨이는 자서전에서 "어떤 희생을 감수하든 적들을 박살내고 무조건적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는 프로파간다는 핵무기가 만들어진 현대 세계에는 설 자리가 없어졌다. 전쟁에 있어서는 분명한 목표를 정해야 하고 그 목표가 달성되면 전쟁을 멈추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는 제한전 개념은 민주국가의 주권자인 시민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어야 폭주하는 정부나 군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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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어 위키피디아에는 '매슈'로 표기되어 있지만, 2000년대 이후 출판되는 대부분의 6.25 전쟁 관련 서적에서는 '매튜'로 표기되는 일이 많으므로 여기서는 '매튜'로 통일한다. 외래어 표기법에 맞는 표기는 매슈이다.[일본식] 발음에서 따온 것인지는 몰라도 '릿지웨이'라고 표기한 서적도 눈에 많이 띈다.[2] 중국어로 읽으면 각각 리치웨이(Lǐqíwēi), 리거웨이(Lǐgéwēi)가 된다. 중공군을 대상으로 한 삐라에서 이런 표기를 사용했다.[3] 출처[4] 당시 미군 합동참보본부는 중공군의 공세가 계속 거세지자 '한반도를 포기하고 가능한 빨리 철수' 할 것을 대통령에게 건의하고 승락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리지웨이 장군은 미군 합참본부의 한반도 철수 의견에 반대하였다. 그리고 철군을 지휘하러 온 미군 육참총장 콜린스 대장이 보는 앞에서 정찰작전(울프하운드작전)을 성공리에 수행함으로써 보급이 이미 한계에 달한 중공군이 더 이상 총공세를 펼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이 결과 미군 합참본부는 철군 계획을 보류하고 반격을 결심하게 되었다.[5] 그는 웨스트포인트 역사상 최연소 교장으로 기록되어 있다.[6] 2차 세계대전 당시 아르헨티나와 칠레 등 남미 국가들은 역사적으로 남미에 강대국이 들어서는 것을 수시로 방해했던 미국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친독일 성향이 강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나치독일과 추축국의 전범과 정치범들이 죄다 아르헨티나와 칠레 등지로 도주하고, 아돌프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잔당들이 남미로 도망가 거기서 자연사했다느니 하는 주장이 심심치 않게 들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7] 이탈리아 본토 상륙작전의 전(前)단계로써 시행된 시칠리아 섬 상륙작전이었다.[8] 참고로 항상 수류탄을 메고 다녀서 별명이 '강철 유두'(Old Iron Tits)였다.[9] 12월 19일, 맥아더 원수가 유엔군 파병으로 주일미군의 수가 부족해진 일본을 방위하기 위한 신규병력을 미국 정부에 요청했지만, 정작 미국 본토에는 제82공수사단밖에는 남아있지 않았고 편성 중인 주(州)방위사단도 다음해 3월경이나 되어야 파병이 가능한 상태였기에 미국 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공수사단은 세계전략상 예비 병력으로 남아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미국은 있는 모든 병력을 한국에다 쏟아붓고 있었던 것이다.[10] 그러나 이는 미군이 태평양전쟁 이후 대규모 군축 중이었기에 그랬던 것이다. 미국은 실제로 한국전쟁 당시 극도로 적은 전비로 싸웠고 전력도 태평양전쟁 당시의 미군에 비하면 한참이나 약해진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당시 미군의 전력은 유럽에도 상당수가 파견되어 있었고 해군으로도 상당히 분산되어 있었다.[11] 이런 점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발터 모델 원수와도 비슷하다. 그 또한 정확한 전황 파악을 바탕으로 한 공세적 방어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12] 당시 중국의 인구는 약 5억 6000만~7억 명 정도였다.[13] 중공군 지휘부는 리지웨이가 이렇게 빨리 미8군을 정비해 반격해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1월 8일에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끝났는데 미8군은 불과 1주일 뒤인 15일부터 곧바로 탐색전 성격의 공격을 개시했기 때문이다.[14]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도 제4차 공세의 최종목표가 전선 전체를 37도선 이남으로 일거에 밀어붙이는 것이었기 때문에 서부전선의 유엔군을 후퇴하도록 압박하기 위해서는 지평리를 반드시 차지해야만 한다고 판단했다. 지평리 전투에서 미군의 주역으로 활약했던 미 육군 제23보병연대장 폴 프리먼 대령은 몇 달 전 청천강에서 벌어진 미 2사단의 참사에서 그나마 그의 연대를 건제 유지해서 후퇴한 적이 있다. 그는 훗날 4성장군까지 올랐으며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7년 퇴역했다. 복무기간: 1929~1967년.[15] 당시 베트남의 지도자였던 호치민은 프랑스와 중국을 경계하면서 미국의 지원을 원하고 있었다. 호치민은 일찍이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8차례나 서한을 보내 베트남의 독립을 지지해주길 호소했으나 불간섭 소리만 들으며 묵살당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정권도 마찬가지로 호치민 정권과의 교섭을 일체 거부하고 남베트남 정부 수립을 방해할 시 미군을 투입하겠다고 호치민을 위협하기까지 했다. 1954년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남베트남에 대한 원조 약속을 하였고, 이듬해인 1955년부터 군사 훈련, 무장 등 일련의 원조가 시작된다. 이런 상황에서 육군참모총장이 군사 개입을 반대하니 대통령이던 아이젠하워의 입장에서 기분이 좋을리가 없었다.[16] 미국에서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위급 훈장. 수여대상자는 "미합중국의 국익이나 안보, 또는 세계평화의 추진, 문화활동, 그 외의 공적, 개인적 활동에 대하여 상찬(기리어 칭찬함)할 만한 노력이나 공적을 행한 개인"이다. 이 훈장은 1945년에 트루먼 대통령이 제정하였고, 1963년에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대통령령 11085호에 따라 이를 부활시키고 대상자를 확대시켰다.[17] 실제로 리지웨이는 아주 강직하고 용맹한 군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하나 받기도 어려운 미육군 수훈십자장 2회 수훈과 무훈과 뛰어난 전공을 세워야 수여되는 은성무공훈장 2회 수훈한 점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18] 그 덕에 패전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쫓아낸 인물들이 전임 미8군사령관이었던 워커의 부하들이었으며, 리지웨이의 상관이었던 맥아더가 워커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비추어 리지웨이가 일부러 워커의 부하들을 쫓아냈다는 의견도 있다.[19] 중공군은 국군이 상대적으로 약체인 것을 파악하고 공세마다 국군을 우선 공격하곤 했다.[20] 물론 이는 당시 한국군 입장에선 조금 부당한 비판이다. 애초에 미군이 국군을 전혀 믿지를 않았던 데다 오죽 못 싸우면 부산까지 밀려있었느냐는 식의 무시와, 개전전 미군 군사고문단원들이 통역과 문화의 차이로 인해 본격적인 개전 전 38선을 기준으로 중소규모 국지전이 일어나던 당시의 국군 지휘관들을 완전한 멍청이들로 소개하는 문서가 파다하게 퍼져있었기 때문. 1951년의 한국군은 개전 초보다는 나았지만 여전히 각종 화력을 충실히 제공할 중장비 등은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이 때문에 UN군 지도에선 한국군 기관총 진지라고는 적혀있지만 실상은 연발로 나가는 총이니 기관총으로 취급한 자동소총 M1918 브라우닝을 두어서 다른 곳보다 화력이 떨어지는 진지가 많았다. 이 때문에 여전히 알보병대를 면치 못하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알보병대로는 당연하지만 숫적 열세를 극복하기 어렵다. 더군더나 한국군은 급하게 팽창하고 있었으므로 병력 운용의 노하우나 병력의 질 등이 중공군에 비해 나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1951년 당시에 한국군만으로 숫적 우위를 살려 기동전을 벌이는 중공군을 막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1952년 이후 리지웨이나 밴 플리트 등이 미국 정부에 줄기차게 요청한 각종 중장비와 탄약이 충분히 제공되어 한국군이 독자적이고 강력한 포병 화력을 지원할 수 있게 되고, 리지웨이와 밴 플리트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한국군의 훈련도가 상승하고 우수한 장교 자원이 배출되기 시작하고부터 한국군은 중공군에 전혀 밀리지 않고 호각지세로 싸울 수 있게 됐다.[21] 실제로 횡성 전투 당시 한국군은 황급히 후퇴하면서 미국이 지원한 야포 등을 제대로 파기하지도 않고 죄다 버리고 물러났다. 당연히 이 무기들은 중공군이 노획하여 미군을 공격하는데 쓰였다. 횡성전투 한달 후 다시 해당지역을 수복하는 전투에 참가한 미군의 수기 여러곳에 이에 대한 증언이 나온다. [22] 리지웨이는 이 비밀전문에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의 의견(우수한 국군 인재 양성)을 덧붙여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리지웨이 장군의 이러한 기본적인 구상은 제주도에 체계적인 병사 양성을 위한 육군훈련소, 밴 플리트 장군에 의해 1951년 10월에 한국군의 전문적인 장교단 양성을 위해 경상남도 진해육군사관학교 를 건립하는 것으로 결실을 보게 된다.[23] 유엔군의 한반도 철수 계획안에서는 한국 정부와 한국군이 제주도에 남아 공산군에 항전하든지, 아니면 제주도를 포기하든지 일단 한국군을 미군에 병합시키는 일 자체는 기본적으로 해야 할 사항으로 못박아 놓았다. 출처: <미국 비밀 문서로 본 한국 현대사 35장면> - 이흥환 편저, 삼인출판사, 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