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종(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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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막응우옌타인(Mạc Nguyên Thanh|hn/莫元淸, 막원청, ? ~ 1681년)은 대월 막 왕조의 제10대 황제(재위: 1661년 ~ 1681년)로 명종 막낀지에우의 아들이었다. 베트남 사서에는 명종 막낀부가 청나라에 책봉을 요청했을 때 '막응우옌타인'으로 개명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뉴쥔카이(牛軍凱)[1] 교수는 청나라의 당안(檔案) 연구에 의거해 막응우옌타인은 실제로 베트남 사서에 있는 '막낀투이'(Mạc Kính Thuỵ, 莫敬瑞/막경서)라고 주장했으며, '빈쓰엉'이 막응우옌타인의 연호이고, 자신의 책에 있는 막씨 계보 항목에서 막응우옌타인의 묘호를 '계종'(系宗)이라고 했다. 우군개 교수는 막 왕조는 후대에도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해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2. 생애[편집]
1661년 6월, 청나라는 명종 막낀지에우를 귀화장군(歸化將軍)으로 책봉했다. 같은해 12월, 청나라는 막낀지에우의 아들 막응우옌타인을 안남도통사(安南都統使)로 책봉했다. 막응우옌타인은 청나라에 진공했고, 아울러 주(奏)를 올려 말하기를,
라고 하였다. 청 성조 강희제는 이를 윤허하였다."편방(徧方)이 협소하니, 뒤를 이은 뒤에는 공헌(貢獻)하는 것을 면하도록 하기를 요청합니다."
1662년, 막 왕조가 양산(諒山) 칠천(七泉)에서 후 레 왕조군에게 패배했다.
1666년, 후 레군이 까오방을 공격했으나 막군이 후 레 군의 태원통군공(太原通郡公)을 사로잡으니 후 레군이 철군했다. 이후 후 레군은 다시 까오방으로 진격하여 점령했고, 막 왕조의 궁실을 불태웠다.
1667년, 후 레군이 다시 까오방을 공격하자 막응우옌타인은 운남(雲南)으로 달아났고, 까오방은 함락되었다.
1669년, 강희제가 이선근(李仙根), 양조(楊兆)를 파견해 베트남에 칙유(敕諭)하도록 하여 까오방 4주를 막씨에게 반환하도록 명령했다. 후 레군은 까오방에서 철군했고, 막씨는 까오방으로 돌아왔다.
1673년, 청나라에서 한족 번왕들에 의한 삼번의 대란이 일어나자 막씨가 이를 지지했다.
1677년, 후 레군이 까오방을 공격해 점령하자 막씨 종실들은 광서(廣西)의 용주(龍州)로 도망갔다. 후 레 왕조는 청나라에 막씨가 반란의 수괴 오삼계를 지원했다고 보고하며, 청나라가 막씨를 지지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1681년, 막응우옌타인은 청나라에서 병사했고, 그의 동생 막낀꽝이 뒤를 이었다.
[1] 우군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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