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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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욜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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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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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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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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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럼
40대



ADO 덴하흐 테크니컬 디렉터
Alles Door Oefening Den Haag

파일:마틴 욜 풀럼.jpg

이름
마틴 욜
Martin Jol
본명
마르턴 코르넬리스 욜
Maarten Cornelis Jol[1]
출생
1956년 1월 16일 (68세) /
네덜란드 자위트홀란트주 헤이그시
국적
[[네덜란드|

네덜란드
display: none; display: 네덜란드"
행정구
]]

신체
175cm
직업
축구선수(미드필더 / 은퇴)
축구감독
소속
선수
ADO 덴하흐 (미상 / 유스)
ADO 덴하흐 (1973~1978)
FC 바이에른 뮌헨 (1978~1979)
FC 트벤터 (1979~1982)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 FC (1982~1984)
코번트리 시티 FC (1984~1985)
ADO 덴하흐 (1984~1985)
감독
ADO 덴하흐 아마추어 (1991~1995)
SVV 세퍼닝언 아마추어 (1995~1996)
로다 JC 케르크라더 (1996~1998)
RKC 발베이크 (1998~2004)
토트넘 홋스퍼 FC (2004 / 감독 대행)
토트넘 홋스퍼 FC (2004~2007)
함부르크 SV (2008~2009)
AFC 아약스 (2009~2010)
풀럼 FC (2011~2013)
ADO 덴하흐 (2015~2017 / 감독 위원회 위원)
알 아흘리 SC (2016)
SVV 세퍼닝언 (2019~2020 / 고문)
ADO 덴하흐 (2020 / 전략 고문)
ADO 덴하흐 (2020~ / 기술 책임자)
국가대표
3경기 1골 (네덜란드 / 1980~1981)

1. 개요
2. 선수 경력
3. 감독 경력
3.1. 네덜란드 활동
3.2. 토트넘 홋스퍼
3.3. 함부르크
3.4. 아약스
3.5. 풀럼
3.6. 알 아흘리
4. 수상
4.1. 선수
4.2. 감독



1. 개요[편집]


네덜란드축구선수 출신 감독.

선수 시절 대단한 활약을 하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고 감독으로서는 네덜란드에서 성공을 거두고 토트넘에 부임한 후 팀을 잘 꾸려나가 세간의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좋은 감독'이란 틀을 넘어서서 명장이 되지는 못했다. 팀이 리그를 제패할 만큼 위력을 발휘하게 할 만한 지도력은 부족했고 상황에 따른 빠른 대처 또한 부족하여 결국 진정한 명장으로 거듭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그는 토트넘, 아약스, 풀럼에서 모두 경질당해 가는 곳마다 경질당하는 감독이라는 오명을 썼다(...).

한편 마틴 욜은 한국과 참 인연이 깊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토트넘 시절 이영표를 영입하여 비교적 중용했고 함부르크 시절 손흥민을 잘 키웠으며 아약스에서는 석현준을 발굴했다. 이쯤되면 대표적인 지한파 감독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 그래서인지 몇 차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2. 선수 경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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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 하흐 시절 마틴 욜

욜은 1956년 1월 16일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유명한 도시인 헤이그에서 태어났다. 그는 10대 시절에 아마추어 팀인 베르흐 IL에서 활동하다가 1973년 프로로 전향하여 ADO 덴하흐로 이적했다. 1975년에는 FC 트렌테를 상대로 승리를 거둬 네덜란드 컵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1978년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여 9경기를 뛰었고, 1979년엔 트벤테로 이적하여 3년간 71경기 9골을 기록했으며 1980년엔 대표팀에 차출되어 1981년까지 3경기에 출전했다.

이후 1982년 잉글랜드의 웨스트 브로미치 알비온으로 이적하여 1984년까지 2년간 63경기 4골을 기록했고 뒤이어 코벤트리 시티로 이적하여 15경기 출장했다. 1985년, 7년만에 덴하흐로 복귀하였고 얼마 후 네덜란드 올해의 축구 선수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욜은 덴하흐에서 1989년까지 135경기 6골을 기록한 후 은퇴했다. 이렇듯 욜은 선수 시절 대단한 활약을 하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다.


3. 감독 경력[편집]



3.1. 네덜란드 활동[편집]


1991년 덴하흐에서 아마추어 계약을 체결하고 팀을 아마추어 리그에서 가장 높은 순위로 끌어올렸다. 이후 1995년 세퍼닝언으로 이적하여 1년간 감독직을 수행하며 논 리그 챔피언쉽 우승을 차지했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1996년 로다 JC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2년간 감독 직을 수행했고 1997년 네덜란드 컵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1998년과 2004년 사이, 욜은 RKC 발베이크 감독직을 수행했다. 발베이크에서의 감독 생활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건 아니었다. 처음 감독을 맡은 후 11월까지 겨우 승점 3점만 확보하며 리그 꼴찌를 기록했다. 하지만 그는 선수들을 독려하여 성적을 끌어올렸고 첫 시즌 강등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이후 욜은 어린 선수들의 잠재력을 폭발시키고 전력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여 팀을 대륙 대회 진출권에 안착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공으로 욜은 2001년 선수들이 뽑은 네덜란드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고, 2002년에도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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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베이크 클럽은 자신들을 훌륭한 팀으로 육성시켜 준 마틴 욜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관중석에 그의 모습을 본딴 동상을 세웠다.


3.2. 토트넘 홋스퍼[편집]


파일:external/resources3.news.com.au/207611-martin-jol.jpg

2004년 11월 8일 토트넘 홋스퍼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하위권에 처져있던 팀의 성적을 끌어올리기 위해 수비진을 강화시키는 데 초점을 두었다. 그의 선택은 적중했고, 2004년 12월 5경기를 모두 이기는 센세이션을 일으켜 잉글랜드 축구협회로부터 이 달의 감독상을 수여받았다. 이런 활약을 본 AFC 아약스에서 욜을 신임 감독으로 데려오려 한다는 루머도 돌았지만, 욜은 토트넘을 일찍 떠날 생각이 없다며 이를 부인했다. 한때는 유로파 대회 진출권까지 올리기도 했지만 마지막 경기에서 블랙번을 상대로 비기는 바람에 9위에 그쳐 유로파 대회 진출을 실패했다. 그래도 성적이 엉망이던 토트넘을 이 정도까지 끌어올린 공적을 인정받아 2005년 8월 3년 재계약을 체결했다.

토트넘은 2005-06 시즌을 대비하기 위한 프리시즌에서 매우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피스 컵에서 PSV 아인트호벤, 올랭피크 리옹, 보카 주니어스를 모두 격파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토트넘은 프리 시즌에서의 경기력을 리그에서도 이어가는 데 성공했고, 마침내 4위를 기록하며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할 좋은 기회를 맞이했다. 이제 웨스트 햄과의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최소한 비기기라도 한다면, 토트넘은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다. 경기가 있는 날인 2006년 5월 7일 이른 아침, 토트넘 선수들이 집단 식중독에 걸리고 만 것이다. 식중독 증상을 보인 선수는 로비 킨, 마이클 도슨, 마이클 캐릭, 에드가 다비즈, 아론 레넌, 티무 타이니오, 라덱 체르니, 칼럼 데이븐포트, 리 버나드, 톰 허들스톤[2] 총 10명이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아픈 몸을 이끌고 경기에 참가했지만 이런 상황이니 토트넘은 당연히 부진을 면치 못했고 결국 웨스트 햄에게 2:1로 패하고 말았다. 그 사이 아스날이 위건을 4:2로 꺾고 4위를 기록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확보했고 토트넘은 5위로 밀려나고 말았다.

토트넘은 경기를 다른 날로 연기해주거나 최소한 4시간은 더 미뤄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웨스트햄이 이날 경기를 치르고 며칠 뒤 FA컵 결승전까지 치르는 상황에서 토트넘의 입장만 우선하여 웨스트햄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며 2시간 연기하는 것만 허용했다. 욜은 경기 후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경기에 대한 강한 집념으로 필드에서 최선을 다해준 선수들에게 감사한다. 다만 웨스트햄과의 경기에서 패함으로써 슬픔과 아픔으로 마지막 경기를 장식했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다."고 말하며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냈다.

토트넘 측은 경기 후 선수들이 묵었던 매리어트 호텔을 고소했고 FA에 재경기를 요청했지만 기각당했다.[3] 일부 언론에서는 토트넘의 라이벌인 아스날이 음모를 꾸민 것이라고 몰아세웠으나 욜은 그저 호사가들의 허풍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2006-07 시즌, 토트넘은 마이클 캐릭의 이적으로 매우 기복이 심한 시즌을 보냈다. 초반에는 베르바토프의 적응 문제와 완전이적한 미도의 극심한 부진으로 공격력이 아쉽더니 공격이 좋아지자 매 경기 실점하는 수비가 말썽을 일으켰다. 첼시를 16년 만에 잡는 쾌거가 있었으나 나머지 빅4 팀에게 한없이 작아지는 모습으로 2월 중순에는 5위와 승점 10점차인 10위까지 쳐졌고 리그 컵에서도 준결승에서 숙적 아스날에게 아깝게 졌다. 하지만 마지막 리그 12경기에서 27득점을 올리며 단 1패만 거두고 승점 27점을 획득하며 최종순위 5위로 마감했다. 결국 UEFA컵 대회에 다시 한번 진출할 수 있었다. FA컵 8강에서 첼시를 탈락 직전까지 몰았으나 재경기 끝에 탈락했고 UEFA컵에서도 8강에서 자신이 방출한 프레데릭 카누테에게 1,2차전 모두 실점하며 해당대회 우승팀 세비야 FC에 아쉽게 탈락했다.[4]

이렇듯 토트넘에서 준수한 모습을 보인 그였지만 4강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데는 실패했는데, 이는 그의 전술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틴 욜 시절, 토트넘은 베르바토프와 로비 킨을 중심으로 한 공격력이 리그 TOP급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매우 강력했지만 수비진이 발목을 잡았다. 이는 욜이 수비 라인을 끌어올리고 지극히 공격적인 축구를 추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토트넘은 득점이 많은 동시에 실점도 많았고, 수비진이 자꾸 정신줄을 놓아버리니 예능 경기도 많아(...) 5위권에서 언제나 머물러야 했다. 그래도 이때 토트넘이 정말 재미있어서 팬이 된 이들이 많다 카더라

2007년 여름, 욜은 4,000만 파운드에 달하는 이적료를 사용하며 수많은 선수들을 영입했다. 또한 맨유에서 베르바토프를 영입하려 한다는 루머가 파다하자, 그는 베르바토프를 파느니 차라리 죽겠다며 결사 반대하여 결국 팀에 잔류시켰다. 이렇듯 핵심 공격수인 베르바토프를 지켜내고 수많은 선수들[5]을 영입했으니 이제 토트넘이 4위 안에 들 확률은 높아 보였다.[6] 그러나 리그가 개막한 후 첫 두 경기에서 패한 뒤, 클럽 보드진은 당시 세비아 FC의 감독이었던 후안데 라모스와 스페인 호텔에서 접촉했고 이 장면이 기자들에게 찍혀 언론에 공개되었다. 토트넘 회장 다니엘 레비는 라모스를 데려올 것이라는 루머를 부인했지만 이러한 소문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 후에도 토트넘은 부진을 면치 못했고 결국 2007년 10월 25일 UEFA 컵 대회에서 헤타페에게 2:1로 패한 직후 경질되고 말았다.[7]

욜이 경질당한 데엔 여러 이유가 있었다. 먼저 성적이 부진했다. 토트넘은 지난 시즌과는 달리 공격력이 강력하지 못했고 수비진은 축구 포털 사이트인 사커넷이 "'카미카제(자살특공대)' 수비진"이라고 혹평했을 정도로 안 좋았다. 10경기에서 21실점을 기록했을 정도니... 결국 토트넘은 10경기 1승 4무 5패를 기록하며 강등권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선수들과 불화를 겪은 것이 컸다. 리그 10라운드 뉴캐슬과의 경기에서 마틴 욜 감독은 벤치에 앉아있던 베르바토프에게 몸을 풀라고 지시했으나, 베르바토프가 이를 듣지 않았다. 베르바토프가 벤치에 앉힌 마틴 욜 감독에게 자신을 맨유로 보내주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결국 토트넘은 이 경기에서 3:1로 패하고 말았다. 또한 저메인 데포는 욜이 경질되어야 재계약을 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고[8] 1600만 파운드를 주고 데려온 대런 벤트는 고작 한 골(...) 기록하는 주제에 자신을 중심으로 한 전술을 짜지 않는다며 불만을 토로했다.[9]

또한 영입 정책도 문제였다. 前 토트넘 선수였던 팀 셔우드톰 허들스톤 같은 유망주들을 기용하지 않고 거금을 들여 검증된 선수들만 샀던 것이 실수라고 지적했다. 그는 "파스칼 심봉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뛸 뿐이지 팀을 위해 뛰지 않는다. 마이클 도슨레들리 킹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고 카불은 수비하기 귀찮아 하는 수비수다."라며 이적 선수들이 팀에 대한 충성도가 높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래도 토트넘 시절 한국 팬들에겐 이영표를 중용한 것 때문에 좋은 인상을 남겼다. 일부 언론과 팬들은 욜이 이영표를 주전으로 기용하지 않고 로테이션용으로 쓴다며 불만을 토로했지만 사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영표는 수비력은 확실히 준수했지만 빠른 크로스가 좋지 않고 오른발잡이인 탓에 항상 공을 멈춘 뒤에 크로스를 올려야 해서 그리 위협적이지 못해 공격적인 축구를 추구하는 마틴 욜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욜은 암울한 수비진 때문인지 이영표를 자주 기용했고 이는 꽤 괜찮은 효과를 남겼다.[10]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토트넘 감독으로 부임한 후안데 라모스는 이영표를 아예 잉여자원으로 여기고[11] 경기에 쓰지 않아 한국 팬들에게 지탄을 받았고 욜은 "그래도 이영표를 자주 기용해 준 사람"이라는 재평가를 받았다.


3.3. 함부르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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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버밍엄 시티로부터 감독직을 제안 받았지만 이를 거부했고, 1년간 휴식을 취한 뒤 2008년 함부르크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2008-09 시즌 함부르크를 이끌고 분데스리가와 UEFA 컵, DFB 포칼에서 모두 호성적을 거두며 트레블을 도전했지만[12], 세 개 대회 모두 북독일 라이벌 베르더 브레멘에 덜미를 잡혀 UEFA컵[13]과 DFB 포칼[14]은 준결승에서 좌절하였고, 우승을 노렸던 분데스리가에선 브레멘에게 진 후 우승이 좌절되고 말았다. 함부르크는 시즌 최종전 프랑크푸르트 원정에서 종료 직전 나온 트로초프스키의 골로 도르트문트를 힘겹게 제치고 리그 5위를 기록하며 유로파 리그에 겨우 진출했다. 그래도 이는 함부르크 구단 역사상 1980년대 이후 최초로 두 대회에서 4강에 오른 것이었다. 이때 손흥민은 함부르크 유스팀에서 활동했는데 욜은 그의 재능을 꿰뚫어보고 엄청난 재능을 소유했다고 극찬하고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3.4. 아약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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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26일, 욜은 AFC 아약스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욜은 2009-10 시즌 개막 후 2경기를 모두 이기며 기분좋게 출발했다. 그러나 아약스는 이후 PSV 원정에서 패했고 스파르타 로테르담과의 홈경기를 비겨 7위로 떨어졌다. 하지만 아약스는 이 시즌 토비 알더베이럴트얀 베르통헨 등 강력한 수비진과 루이스 수아레스가 이끌던 리그 탑급의 공격진을 발판으로 득실점이 +86이라는 엄청난 파괴력을 선보였다. 욜은 1월 이후 14경기에서 무패를 기록하며 우승을 눈앞에 두는 듯 했다. 그러나 초반에 부진한 것이 발목을 잡고 말았고 스티브 맥클라렌이 이끄는 트벤테가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래도 그 시즌에 KNVB 베이커에서는 라이벌인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2010년 여름, 욜은 풀럼의 새 감독으로 부임하려고 했지만 아약스 보드진이 이를 막았다. 이후 욜은 챔피언스 리그에서 아약스를 이끌었지만 성적은 저조했고 리그에서도 17경기를 치러서 4위라는 불만족스러운 성적을 거두었다. 결국 그는 2010년 12월 6일 NEC 네이메겐과의 경기에서 1:1로 비긴 후 경질이나 다름없는 권고사직을 받고 구단에서 물러났다.

한편 마틴 욜은 2010년 1월 석현준을 찾아내 아약스로 입단시켰다. 석현준은 그의 지도하에서 기량을 갈고 닦았다. 비록 그는 아약스에서는 주전이 되지 못해 포르투갈로 가야 했지만 여전히 유럽에서 꾸준히 선수 생활을 하고 있다.


3.5. 풀럼[편집]


2011년 6월 7일, 욜은 풀럼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욜은 팀을 이끌고 2011-12 시즌 승점 52점을 기록하며 9위를 거두었다. 이때 풀럼은 강팀 발목 잡는 복병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예를 들어 아스날, 뉴캐슬, 리버풀[15]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고 맨시티와 2:2 무승부를 기록했으며 첼시와도 홈원정 모두 무승부를 기록했다. 욜은 다음 시즌에는 팀을 12위에 안착시켰고 시즌이 끝난 뒤 2014년 6월 30일까지 계약을 연장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2013-14 시즌, 풀럼은 너무 많은 핵심 선수들이 이적하는 바람에 전력에 구멍이 생겨버렸고 결국 강등권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결국 욜은 2013년 12월 1일 웨스트햄에게 3:0으로 패하며 리그 6연패를 기록한 직후 경질되고 말았다.


3.6. 알 아흘리[편집]


2016년 2월 24일 이집트 프리미어 리그 소속의 알 아흘리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8월달 자신이 신변에 위협을 느낀다며 자진 사임을 하였다.


4. 수상[편집]



4.1. 선수[편집]


KNVB 컵 : 1975년
올해의 선수 : 1985년


4.2. 감독[편집]


1. 로다 JC
KNVB 컵 : 1997년

2. 아약스
KNVB 컵 :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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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덜란드어의 Maarten은 영어의 Martin과 같다.[2] 이 중 당시 주전급은 로비 킨부터 타이니오까지. 나머지 선수들은 로테이션 혹은 백업 요원이었다. 체르니는 07/08 시즌에 주전을 차지했고 허들스톤은 그 다음 시즌부터 준주전급으로 상승한다.[3] FA는 "토트넘은 30명 이상의 선수를 보유하고 있는 데다 경기가 벌어진 장소도 언제든 선수를 수급할 수 있는 런던이었다. 비록 주전 선수들의 식중독으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경기가 성사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만약 재경기를 받아들인다면 비슷한 사례가 계속 나올 수 있으니 기각한다."라고 발표했다.[4] 자신의 후임인 후안데 라모스가 이끌던 팀이다.[5] 가레스 베일, 대런 벤트, 케빈프린스 보아텡, 유네스 카불 등.[6] 사실 벤트의 영입은 검증된 공격수가 3명이나 있는 상황에서 중복투자나 다름 없었고 베일과 보아텡, 카불은 유망주였다. 욜은 유리몸 레들리 킹을 대신할 경험 많은 센터백을 원했으나 정작 데려온 선수는 센터백 유망주 카불이었다. 욜이 원했던 센터백 보강은 라모스 부임 후 조너선 우드게이트 영입으로 이루어졌다.[7] 실제로는 하프타임때 경질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8] 그러나 데포는 새 감독인 라모스 체제에서도 베르바토프 - 로비 킨에게 밀려 후보였고 결국 재계약은 커녕 겨울 이적 시장에서 포츠머스로 이적했다.[9] 벤트의 주장이 먹히려면 벤트가 베르바토프 - 로비 킨보다 활약이 더 좋아야 했다. 데포조차 이 두 사람을 못 이기는데 벤트라고 그를 중심으로 전술을 짤 수가 없었다.[10] 05/06 시즌에는 아예 이영표의 경쟁자라고 볼 레프트백이 부족한 상황이었고 그 다음 시즌부터 이영표의 경쟁자로 베누아 아수에코토가레스 베일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이 두 선수 모두 수비력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마틴 욜 체제에서는 이영표가 주전 경쟁에서 우위를 표했었다. 베일은 욜 체제에서는 측면 미드필더로 뛰었고 에코토는 이영표가 떠난 뒤부터 수비력이 급격히 상승했다.[11] 라모스는 세비야 시절부터 공격력이 강력한 풀백을 사용했는데 세비야 시절 그가 사용한 레프트백은 아드리아누 코헤이아였고 라이트백은 다니 알베스였다. 이런 풀백들을 쓰다가 이영표를 보았으니 이영표의 공격력이 마음에 들리 없었던 것.[12] 반면 자신의 토트넘 후임 감독이었던 후안데 라모스는 초반 프리미어리그 2무6패 꼴찌로 구단 역사상 최악의 역사를 쓴 뒤 경질되었다. 그리고 2달 뒤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으로 부임하는데...[13] 1차전 브레멘 원정에서 1-0으로 이겼으나 2차전 1-3으로 패하며 합계 2-3으로 탈락[14] 홈에서 1-1로 비긴 후 승부차기에서 패배[15]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리버풀에 홈어웨이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안필드에서 구단 역사상 첫 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