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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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흑인 민권 운동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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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 개념
블랙 파워 · Black Lives Matter · 짐 크로우 법 · 흑인 우월주의 · 어퍼머티브 액션 · 미국의 진보주의 · 미국의 사회주의
주요 사건
드레드 스콧 대 샌드퍼드 · 18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 붉은 여름(시카고 인종 폭동 · 털사 인종 학살) · 미시시피 대홍수 · 조지 스티니 사형 사건 · 리틀록 사건 ·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 1957년 미국 연방 민권법 · 앨라배마 대학교 흑인 등록 거부 사건 ·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 ·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 · 1965년 선거권법 · 러빙 대 버지니아 · 1968년 공정주택법 · 68혁명(LA 와츠 폭동) · 마약과의 전쟁 · LA 폭동 · 칼리프 브라우더 자살사건 ·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2020년 항의 시위) · 제이콥 블레이크 총격 사건
주요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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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냇 터너 · 존 브라운 · 에이브러햄 링컨 · 찰스 섬너 · 해리엇 터브먼 · 존 R. 린치 · 브루커 T. 워싱턴 · 프레더릭 더글러스 · W. E. B. 두보이스 · 로자 파크스 · 패니 루 해머 · 마틴 루터 킹 · 말콤 X · 존 루이스 · 앤드루 영 · 제시 잭슨 · 바비 실 · 비올라 리우조 · 베이어드 러스틴 · 셜리 치좀 · 로버트 F. 케네디 · 휴버트 험프리 · 서굿 마셜 · 조지 월리스 · 시스터 술자 · 스테이시 에이브럼스




마틴 루터 킹의 주요 수훈 및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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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 주니어
Martin Luther King Jr.


파일:EB5wahEXUAM-40m.jfif.jpg

출생명
마이클 킹 주니어[1]
Michael King Jr.
출생
1929년 1월 15일
조지아 주 애틀랜타
사망
1968년 4월 4일 (향년 39세)
테네시 주 멤피스 로레인모텔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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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학력
부커 T. 워싱턴 고등학교 (졸업, ~1944)
모어하우스 대학교 (사회학 / B.A., 1944~48)
크로저 신학대학교 (신학 / B.Div., 1948~51)
보스턴 대학교 (신학 / Ph.D., 1954~55)
직업
목사, 신학자, 시민사회운동가, 인권운동가
신체
169cm, 70kg
부모
아버지 마틴 루터 킹 시니어 (1898~1984)[2]
어머니 앨버타 윌리엄스 킹 (1904~1974)
형제자매
누나 크리스틴 킹 패리스 (1927~2023)
남동생 알프레드 다니엘 윌리엄스 킹 (1930~1969)
배우자
코레타 스콧 킹 (1927~2006 / 1953년 결혼)
자녀
장녀 욜란다 킹 (1955~2007)
장남 마틴 루터 킹 3세 (1957~)
차남 덱스터 킹 (1961~)
차녀 버니스 킹 (1963~)
종교
개신교 (침례회)
축일
4월 4일(미국 성공회) 4월 5일(대한성공회)
서명
파일:마틴 루터 킹 서명.svg

1. 개요
2. 전반적인 생애
2.1. 암살 미수
2.2. 암살
2.4. 나는 산 꼭대기에서 약속의 땅을 보았습니다
2.5. 무덤과 추모 조형물
3. 평가
4. 여담
5. 창작물에서
6.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네 명의 자녀들이 이 나라에 살면서 피부색으로 평가되지 않고 인격으로 평가받게 되는 날이 오는 꿈입니다.
(I have a dream that my four little children will one day live in a nation where they will not be judged by the color of their skin, but by the content of their character.)[3]


어둠으로 어둠을 몰아낼 수는 없습니다. 오직 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증오로 증오를 몰아낼 수는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Darkness cannot drive out darkness; only light can do that. Hate cannot drive out hate; only love can do that.)

미국의 비폭력주의 흑인 민권 운동가이자 개신교 침례회 목사로 통칭 킹 목사로 불린다. 미국에서는 이니셜인 MLK라고 쓰기도 한다.

196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미국에서는 마틴 루터 킹을 기리기 위하여 매년 1월 셋째 주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 데이(Martin Luther King Jr. Day)라는 연방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또한 미국 성공회에서는 성인으로 추대하고 있다. 축일은 4월 4일.


2. 전반적인 생애[편집]


미국에서 흑인으로 태어났지만, 나름대로 유복하고 교육받은 집안에서 자란 인물이다.[4] 아버지 마틴 루터 킹 시니어(Martin Luther King Sr.)가 목사였고 가족들 역시 신자였기 때문에 킹 역시 개신교를 믿게 되었다. 이후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하여 아버지와 의견 충돌을 빚었지만, 결국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여 모어하우스 칼리지와 크로저 신학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마치고, 보스턴 대학교(BU)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목사안수를 받은 교파는 침례회 교단인 미국 침례회(ABCUSA)이다.[5] 이때 대학에서 평생의 동반자이자 인권운동을 함께 한 코레타 스콧(Coretta Scott)과 결혼하게 된다.

대학을 다니면서 받은 차별[6][7] 등으로 인해 목사가 된 이후 흑인들을 위한 인권운동을 시작했으며, 앨라배마에서 버스 안에서 로자 파크스라는 흑인 여성이 백인 남성을 위해 자리를 비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자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5만 명이 넘는 앨라배마의 흑인들이 호응해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다니거나 차가 있는 흑인들은 카풀을 했다. 1년간에 걸친 운동 끝에 로자 파크스는 풀려나고, 흑인이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비키지 않으면 체포되는 것은 위헌이라는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얻었다.

그 이후로도 계속되는 인권운동을 전개했으며 흑인이 백인과 동등한 시민권을 얻기 위한 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쳐왔다. 그 결과 196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며, 과격파 흑인들을 대화와 설득을 통해 어르고 달래서 비폭력 운동을 펼쳐왔다. 1965년 이후엔 과격 운동가인 말콤 X를 만나며 과격파 운동가들과의 연대를 꾀하기도 했다.


2.1. 암살 미수[편집]


1958년 9월 20일 할렘에 있는 블룸스타인 백화점에서 킹은 자신의 책인 자유를 향한 대행진(Stride Toward Freedom)을 홍보하기 위한 책 사인회를 하고 있었다. 1916년생인 이졸라 커리(Izola Ware Curry)라는 흑인 여성이 서명 중인 마틴 루터 킹에게 다가가 "당신이 마틴 루터킹 주니어입니까?"라고 물었으나 킹은 흔쾌히 "그렇습니다."라고 답변했었고 흑인 여성이 자신을 암살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킹은 그녀가 다가오는 동안 그 어떤 방어적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고 자리를 피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졸라 커리는 킹에게 "5년 동안 널 찾고 있었다."라고 말한 후 종이칼[8]로 그의 가슴을 찔렀으나, 간신히 칼날이 대동맥을 비껴갔고 몇 시간에 걸친 수술 끝에 킹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9] 이졸라 커리는 범행 동기에 대해 마틴 루터 킹을 공산주의자로 간주해서 그를 찔렀다고 진술했으나 이졸라 커리는 편집증정신분열증을 앓고 IQ가 70밖에 안 되는 등 정상적인 사회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였고 경찰은 킹이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단서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근거없는 망상임이 밝혀졌다. 킹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공격한 이 여성을 용서했고 "그녀가 자유롭고 건설적인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위해 사려깊은 사람들은 그녀가 필요로 하는 도움을 주려고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희망적인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미국 사회의 모든 흑인들이 그러하듯. 암살 미수범이였던 이졸라 커리 역시 상당히 불우한 인생을 살고 있었는데, 조지아주의 아드리안에서 태어나 학교를 7학년때 중퇴하고 21살의 나이에 제임스 커리라는 남성과 결혼했으나 6개월만에 이혼을 했고, 가정부로 취업을 하기위해 위해 뉴욕으로 이주해왔으나 당시 NAACP라는 흑인인권 단체의 활동 때문에 흑인이라는 이유로 취업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킹이 도망을 치거나 칼이 명치를 찌르지 못 하고 빗맞췄을 경우를 대비했는지 착용하고 있던 브래지어안에 장전 된 Galesi-Brescia Brevetto 5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킹의 용서에도 이졸라 커리는 뻔뻔하게도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고 범행 이후 정신병력이 있는 범죄자를 형을 복역하는 동안 수감하고 치료하는 Matteawan 주립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가 뉴욕 퀸스 자메이카에 있는 요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자신이 죽이려던 킹 목사가 죽은지 약 반세기가 지난 2015년 3월 7일, 9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2. 암살[편집]


1968년 4월 4일에 과격파 백인단체 소속의 제임스 얼 레이[10]가 쏜 총에 맞아 암살당했다. 제임스 얼 레이는 인종차별주의자였으며, 당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조지 월리스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조지 윌리스가 역설한 분리주의 이론에 푹 빠진 사람이었다. 이전에도 교도소를 3번이나 복역한 범죄자였고, 세 번째 범죄를 저지르고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었는데 1967년에 탈옥한 상태였다. 이후 미국과 멕시코를 오가며 도망생활을 하다가 앨라배마 주 버밍엄에서 가명으로 레밍턴 모델 760 소총.30-06 스프링필드 총알 20발, 망원조준경을 구입했다. 그리고 4월 2일 테네시 주 멤피스로 와서 마틴 루터 킹이 투숙하는 로레인 모텔 맞은편의 셋방을 빌렸다.

사건 당일 저녁에 마틴 루터 킹은 306호실 앞 발코니에서 제시 잭슨 목사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오후 6시 1분에 제임스 얼 레이는 레밍턴 모델 760을 킹 목사에게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킹 목사의 오른쪽 뺨 아래쪽으로 뚫고 들어갔고, 척추와 경정맥 및 동맥을 관통한 뒤 어깨에 박혔다. 총을 맞은 뒤에도 맥박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킹 목사는 급히 인근의 성 요셉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오후 7시 5분에 사망했다.

제임스 얼 레이는 킹 목사를 살해 후 총을 버리고 도주했고, 애틀랜타를 들러서 캐나다 토론토로 도망쳤다. 그리고 거기서 가명으로 가짜 캐나다 여권을 구해서 영국으로 도망쳤고, 영국에서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런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벨기에 브뤼셀로 도망치려다가 가짜 여권이 발각되어 영국 경찰에게 체포되어 미국으로 추방당했다. 추방된 얼 레이는 FBI에 체포되어 99년형을 언도받아 복역하다 1977년에 탈옥을 또 감행했지만 3일 만에 붙잡혔다. 형은 100년으로 늘어났고, 1998년 교도소에서 지병이 악화되어 70세로 사망했다.

킹 목사의 죽음에 수많은 사람들이 슬퍼했고 음모론이 발생했으며[11] 미국 전역에서 킹 목사의 죽음에 분노한 흑인들의 폭동이 일어나 도시 중심부에서 방화와 건물, 차량 파괴, 약탈 등 폭력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는 흑인 지도자들의 자제 요청과, 수천 명의 군인 및 경찰이 출동하자 저절로 해산되었다.


2.3.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편집]


그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흑인들의 목사로 남아있으며, 그가 한 수많은 연설 가운데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행진 때 링컨 기념관 앞에서 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로 시작되는 연설은 지금까지도 인류에 회자되는 역사적인 명연설로 남았다. 그리고 그 명대사는 지금도 간간이 교과서에 실린다.

본래 이날을 위해 따로 준비한 원고가 있었지만, 수많은 인파를 보자 마음이 바뀌어 평소 그가 즐겨 하던 연설을 했다고 한다. 내용은 문서 참조.

그가 암살당한 후 미국 정부는 1월 셋째 주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의 날로 지정, 국경일로 만들었다. 월요일 수업이 많은 대학생들에게는 마른 하늘의 단비 같은 휴일.[12]

여담인데, 이 연설에서는 니그로(negro)가 흑인종을 나타내는 언어로써 쓰인다. 최소 1960년대에는 니그로가 아직 멸시적 의미보다는 오히려 학술적이고 공식적인 표현이었다는 근거가 된다.[13]


2.4. 나는 산 꼭대기에서 약속의 땅을 보았습니다[편집]


그가 암살 당한 장소인 테네시주 멤피스의 로레인 모텔(Lorraine Motel)은 현재 민권 박물관(Civil Rights Museum)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곳에서 암살 당하기 전날 저녁인 1968년 4월 3일에 그는 이곳 발코니에서 지지자들을 향해 짤막한 연설을 한 게 마지막 연설이 되었다. 자신의 최후를 예감했는지 그는 이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어려운 문제를 반드시 풀어야 할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생존을 위해서는 그 문제를 반드시 풀어야만 합니다.
오늘 저녁 우리는 좀 더 단단한 각오로 굳세게 일어서도록 합시다.
좀더 확고한 신념을 갖고 힘차게 전진하도록 합시다.
우리의 조국이 본연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힘찬 행진을 시작하도록 합시다.
우리에게는 조국을 좀 더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저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앞에는 무섭고 어려운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저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저는 높은 산 꼭대기에 올라 '약속의 땅'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사는 것이 모든 사람의 염원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그런 염원이 없습니다.
저는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저를 높은 산 꼭대기로 데려가셨습니다.
거기서 저는 굽어보았습니다.
'약속의 땅'이 제 눈 앞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제가 여러분과 함께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할지도 모릅니다.[14]
하지만 여러분은 오늘 저녁 분명히 알아두셔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저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될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리라는 것을.
오늘 저녁 저는 대단히 행복합니다.
저에게는 아무런 걱정도 없습니다.
저는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의 눈은 오로지 다시 이 땅을 찾아오시는 주님의 영광을 바라볼 따름입니다.[15]




2.5. 무덤과 추모 조형물[편집]


파일:external/farm3.staticflickr.com/2105517105_313f6f3646_z.jpg
킹 목사의 무덤은 2006년 1월 30일에 타계한 부인 코레타 스콧 킹 여사와 함께 안장된 합장 석관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16] 왼쪽 부분에 있는 그의 석관에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의 마지막 문장 "드디어 자유가, 드디어 자유가! 전능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마침내 자유로워졌나이다!"의 끝을 조금 바꾼 "마침내 제가 자유로워졌나이다!" 가,[17] 오른쪽에 있는 부인의 석관에는 고린도전서 13장 13절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가 묘비명으로 새겨졌다.

파일:external/media.cleveland.com/martin-luther-king-memorial-barack-obama-washington-mall-101611jpg-30890990aeb3f677.jpg
2011년 8월 22일 킹 목사 추모 조형물이 워싱턴 D.C.의 내셔널 몰에서 일반에 공개되었고, 개장식에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제시 잭슨 목사를 비롯한 미국의 주요 흑인 명사들이 참석했다. 그런데 조형물의 시안이 공개되었을 때는 조각상의 자세가 너무 위압적이라는 지적이 나왔으며, 조각에 착수했을 때는 흑인을 하얀 돌로 조각하는 게 타당한지를 놓고 일부가 갑론을박을 벌인 적이 있다.


3. 평가[편집]


20세기 후반부에 일어난 미국의 흑인 인종차별 철폐 운동의 아이콘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인지도와 평가도 높고 인권운동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미국 내 흑인들의 인권 향상의 역사는 이 사람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도 없다.

백인들의 차별과 멸시를 받는 세대에서 태어났음에도 그 백인들과 흑인들의 공존과 통합, 모든 인종의 평등을 주장하는 인종을 초월한 인류애적 가치의 실현을 부르짖은 점과 그 수단으로 폭력을 동원하지 않고 비폭력 인권 운동으로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한 점이 킹의 가장 큰 특징이다. 물론 이상론만 설파하고 다니지는 않았고, 여러 가지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인권 운동을 이끎으로서 연방 대법원의 흑인/백인 버스 좌석 차별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아낸 사건에도 으뜸가는 활약을 펼치고 흑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는 등 현실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일조하였다. 또한 인종차별 폐지 관련 운동 외에도 미국의 젊은이들을 희생시키지 말라면서 베트남 반전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인종차별 외 다른 인권문제에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진 행적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킹은 개신교 침례회 목사였으므로 자연히 그의 행적은 개신교 사상에 뿌리를 둔다. 특히 킹이 비폭력 운동과 흑백 통합 공존의 가치를 설파하고 다닌 것에는 성경에 등장한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킹의 인권운동에서 가장 큰 특징은 비폭력인데 사실 처음부터 비폭력을 밀고 나간 것은 아니다. 물론 폭력을 용인한 것은 아니지만 워낙에 킹을 노리는 세력과 협박도 많고 해서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총을 구비해 두었고, 폭력에 대단히 부정적이긴 했지만 자기 방어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폭력적 수단의 동원까지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같은 개신교 커뮤니티 내에서 백인 반전 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 비폭력 운동에 대한 확신이 생겨나게 되었고 자기방어와 개인 무기 소지를 등진 채 비폭력 인권운동의 틀을 다지게 되었고, 그의 삶이 끝나는 그날까지 비폭력 운동에 대한 신념을 고수했다.

말콤 엑스와 가장 큰 대비를 이루는 부분이기도 한데, 이 비폭력 운동이라는 수단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권 운동가라는 이름으로 킹을 가장 빛나게 만들어주는 반면 엑스는 이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또한 킹의 핵심 주장이자 그의 사상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부분은 '흑인과 백인, 둘은 어느 하나 우월한 인종이 아니라 평등하며 따라서 평등하게 대우받고 함께 공존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옳다'였지만 급진적 성향의 엑스는 킹이 백인들에게 휘둘리고 있다며 그의 인권운동을 지나치게 타협적이라고 생각했다. 엑스 외의 과격파 흑인들 역시 킹의 온건적 인권운동을 못마땅하게 보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여론과 별개로 당시 흑인들 사이에서 킹의 사상이 더 큰 지지를 받았고 많은 흑인들이 킹을 자신들의 지도자로 여기며 그에게 동조했던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마틴 루터 킹 또한 말년에는 말콤 엑스의 영향을 받아서 적극적인 투표권 운동과 구조적 빈곤의 문제를 지적하는 등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아이러니한 대비로, 비폭력 운동의 마틴 루터 킹과 폭력적인 말콤 엑스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정작 흑인 민권 운동에 뛰어든 이후 마틴 루터 킹은 수감 생활을 여러번 하는 고초를 겪은데 반해 말콤 엑스는 단 한 번도 투옥 혹은 체포된 적이 없었다.

비폭력 운동과 인종 평등의 가치 주장 및 흑인들의 인권 신장을 위해 힘쓴 공로로 1964년 10월 14일,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이 수상 소식을 듣고 당시 FBI 국장이었던 존 에드거 후버가 분노했다는 뒷이야기가 전해진다.

킹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FBI에서는 그의 약점을 캐내다가[18] 난잡한 성생활에 관한 증거를 발견했다. 이에 관해 킹 목사의 친구였던 랠프 애버내시(Ralph Abernathy)는 그의 자서전에서 킹 목사가 여자에 약하다고 했지만 후에 이것이 외설적인 것보다는 감정적인 것에서 표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킹 목사의 인생을 저술했던 데이비드 개로(David Garrow)는 킹이 매일 만나는 여자들에 관해 기술하면서 이들과의 섹스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기도 했다.

FBI는 이것을 이용해 킹에게 민권운동을 멈추라는 익명의 협박 편지까지 보냈다. 그 때문에 킹은 자살까지 생각했지만 결국 굴복하지 않았다. FBI는 신문기자들에게 킹의 복잡한 여자 관계에 대해 폭로하는 기사를 내라고 했지만 모든 신문기자들이 이를 거부했고, 오히려 후버야말로 치졸하게 남의 약점이나 캔다는 비난도 받았다고 한다. 킹의 위상이 워낙에 어마어마했던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FBI가 캐낸 이 정보는 명백히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협박과 도청 등의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한 것은 둘째치고, 목적부터가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은 킹을 정치적으로 몰락시키려는 불순한 의도였으므로 이를 좋게 본 기자는 없었다. 킹의 여자 관계가 개인적인 흠결은 될 수 있을지언정 법적으로는 어떠한 문제도 없다. 때문에 현재까지도 킹 목사의 사생활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그것과는 별개로 FBI의 불법 행위는 마찬가지로 크게 비판한다. 결국 이 정보는 극비에 부치고 National Archives에 2027년까지 보관해 두기로 했다.[19]

그 외 1990년 시어도어 파파스라는 연구자가 킹이 자신이 가르친 학생의 논문을 표절하여 박사논문 3분의 1 이상을 베꼈다는 사실[20]을 발견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라는 연설의 감동적인 결말 부분 역시 아치볼드 케어리라는 흑인 목사가 1950년대에 한 연설과 상당부분 비슷하다. 다만, 케어리 목사의 연설 역시 기존에 있었던 노래 가사에서 따온 것. 즉 그의 유명한 인권 연설[21]과 논문 다수는 상당 부분을 표절한 셈인데, 다만 표절이라는 명백한 결론이 난 상태는 아니고 논란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독창적인 논문이나 저술도 아니고 사람들을 움직이기 위한 연설이라면 최대한 감명깊은 표현을 어디서라도 끌어와서 쓰는 것이 당연하다. 연설인 만큼 주석을 달아서 출처를 밝힐 수도 없고 이것을 표절과 동일시 하는 것은 곤란하다. 물론 이는 킹 목사가 위대한 연설가는 아니었다는 증거가 되지만, 위대한 운동가였다는 평가에 흠이 있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문서나 관련 증빙자료들을 통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주로 FBI 관련 인사들의 폭로에 의해 드러났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마틴 루터 킹의 여성 편력과 관련해서는 당시부터 지금까지 완벽하게 폭로가 되면 그 파장이 엄청날 것이라는 예상과 더불어 FBI의 불법사찰에 대한 당시 관계자들의 책임을 물을 것을 우려, 그의 사생활을 기록한 방대한 도청기록은 현재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되고 있으며, 이 1급 비밀문서들은 2027년까지 공개가 금지가 되어 그 이후에 공개될 예정이다.

물론 킹 목사의 잘못된 행동이 그것이 그의 공적을 깎아내릴 근거는 되지 못한다. 마하트마 간디 등도 현재 여러 행적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이기에 당연히 잘못된 행동들이 지적될 수 있는 것이고 그렇다고 간디와 테레사의 인류애적 헌신과 자기희생적 봉사의 업적 및 공적이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킹 목사는 흑인들의 인권과 인종차별 철폐라는 인류애적 가치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으며 모든 흑인들의 영웅이었다. 인도인에게 간디가 지금의 인도를 있게 한 인물인 것처럼 킹 목사 역시 흑인들에게 차별없는 사회를 위해 헌신하다 간 흑인 인권 운동의 아이콘이다. 그의 잘못된 행동은 비판받아야 하겠지만 그가 남긴 업적과 인종차별 철페 및 인종간 평등에 대한 교훈은 결코 폄하될 수 없는 숭고한 것이며 그는 미개한 취급을 받던 흑인들의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위해 노력하다 삶을 마감한 위인이었다. 그의 잘못된 행적 몇 가지로 그의 모든 철학과 공로를 깎아내리는 것은 결코 옳지 않은 일이며 모든 인종의 평등에 관한 그의 교훈은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소중히 간직하고 배워야할 중요한 가치다.

현재 킹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탄생일(Martin Luther King, Jr. Day)"을 통해 모든 미국인들에게 기려지고 있다. 마틴 루터 킹 데이는 미국의 연방 공휴일로, 킹의 생일 즈음으로 설정해서 1월 셋째 월요일이다. 이름 그대로 마틴 루터 킹을 기리기 위한 날로 처음 공휴일 지정된 1986년에는 기념일 며칠전 레이건 대통령이 킹 목사의 미망인과 기자회견을 하는 등 전국 각지에서 기념행사가 있었다. 개인의 탄생일이 국가 공휴일이 된 것은 조지 워싱턴에 이어 두 번째이며 일반인의 생일이 공휴일이 된 것으로는 최초라고 한다.

미국 성공회에서는 성인으로 추대되고 있다. 축일은 4월 4일.


4. 여담[편집]


  • 마르틴 루터와는 다르다. 마틴 루터 킹이 마르틴 루터의 이름을 딴 것이다. ‘루터’는 독일어 발음이므로, 킹 목사의 모국인 미국 영어 발음 [ˌmɑːrtn ˌluː'''θ'''ər ˈkɪŋ]대로라면 ‘마틴 루서 킹 주니어’라고 읽어야 하고 외래어표기법에 의하더라도 그와 같이 적어야 한다.[22] 하지만 마르틴 루터의 영향인지 이미 ‘마틴 루터 킹’이라는 발음과 표기가 한국 내에서 널리 통용되어 이 항목 표제는 ‘마틴 루터 킹’으로 하였다. 물론 ‘마틴 루서 킹’으로도 본 항목에 들어올 수 있다.[23]
  • 미국에는 이 사람 이름을 딴 거리가 많다. 주로 흑인들이 많은 마을들에 이 거리 이름이 붙어 있다.
  • 마이클 조던이 토크쇼 진행자 제이 레노와의 인터뷰 도중 '한번 만나보고 싶은 과거의 인물'로 꼽았다.
  • 공화당원이었다.[24]킹이 사회운동을 하면서 좌파 운동가와 친하게 지내거나 스스로 좌파 운동가를 표방했다는 점을 보면 좀 의아하겠지만 대공황 이전까지만 해도 링컨 대통령이 공화당원이었다는 점때문에 미국 내 흑인들은 공화당 지지성향이 강했고, 대공황 이후로 그래도 흑인들의 대다수가 일자리 제공 및 복지 정책 시행 등의 이유로 민주당을 지지하게 되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인종차별을 주도했던 미국 남부 백인들도 이때까지는 민주당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은 공화당을 지지하는 흑인들도 아직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1960년대 민권 운동 당시에 공화당이 미온적으로 대처하면서 한 편으로는 이를 내세우면서 미국 남부 지역을 집중적으로 공략했고, 반면 존 F. 케네디린든 B. 존슨 같은 민주당 진보 정치인들은 민권법을 밀어붙이고[25] 스트롬 서먼드같은 일부 민주당 딕시크랫 정치가들은 이런 움직임에 반발해 남부 공략에 힘을 쏟던 공화당으로 당적을 옮기는 등의 정치적 변동이 있음에 따라 공화당 성향의 흑인들도 대다수가 민주당 지지로 돌아서고 반대로 남부 백인들이 공화당 지지로 돌아서면서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이러한 공화당과 민주당의 상황 변화를 대변하는 사례가 바로 마틴 루터 킹이 재직했던 에벤에셀 침례교회의 담임목사 출신인 라파엘 워녹이 조지아 주에서 민주당 당적으로 미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된 것.
    • 정치적으로는 미국 정부와 충돌이 심했는데, 일단 FBI에서 킹과 미국 공산당 내의 연계활동에 대해 특히 경계했다. 이유는 저명한 뉴욕 변호사이자 킹 목사의 조언자였던 스탠리 리바이슨(Stanley Levison)이 미국 공산당과 연계 되어있다는 것과 킹 목사의 다른 동지였던 헌터 피츠 오델(Hunter Pitts O'Dell) 이 미국 공산당의 반미활동협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s)에 충성을 맹세한 것에 대해 연관이 되어 있다는 혐의가 있었다. 하지만 1979년 FBI는 증거불충분으로 킹 목사와 반미활동협회 간의 연계가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킹 목사도 공산당과의 협의를 부인했지만 당시 FBI 의장이었던 후버는 루터 킹 목사의 부인을 믿지 않았고 킹 목사도 이에 반발해 후버를 비난했다고 한다. 킹 목사의 사생활까지 테이프와 녹음으로 감시하기까지 했다고.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도 반대해서 당시 대통령 린든 B. 존슨에게도 위선적인 설교사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은 결국 미국의 재정난 크리와 자존심 시망 효과를 가져왔으니...
  • 위에 묘사된 FBI와 초대 국장 후버와의 악연 덕에 킹 목사의 암살에 FBI가 개입했는지에 대한 의혹도 있고 미드에서 이전부터 정부의 일에 개입한 비밀요원을 소개할 때 대부분 킹 목사 암살의 진범임을 강조한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X 파일의 담배 피우는 남자.
  • 트레키들과도 연이 있다. 한창 인종차별성차별 논란이 극에 달한 60년대와 70년대에 흑인 여성 캐릭터인 니오타 우후라의 등장이 잦은 걸 두고 NBC의 높으신 분들이 진 로덴베리에게 우후라 캐릭터를 없애라고 압력을 넣고 실제로 우후라의 비중은 거의 없어지기까지 했었다. 이에 우후라 역의 배우 니셸 니컬스는 낙담하고 사표까지 썼었는데[26], 어디서 소문이 흘렀는지 한 팬이 만나자고 요청을 했었다. 그 팬이 마틴 루터 킹이었다. 스타 트렉이 사람들에게 인종 차별을 극복할 힘을 주고 당신이 분한 캐릭터야 말로 자신이 주장하는 바이니 절대로 역할을 그만두면 안 된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우후라 비중이 늘어나는 건 물론, 스타 트렉은 여러 사회 문제를 은유를 통해 비평하는 단순한 SF쇼 이상의 매체로 자라났다.[27]
  • 2015년에 그의 흑인 민권 운동을 다룬 영화 '셀마'가 개봉했으며 호평을 받았고 데이빗 오예로워가 '마틴 루터 킹'을 맡았다. 셀마는 그가 1965년에 활동했던 앨라배마 주의 도시 이름이다.[28]
  • 국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킹 목사는 기독교 시오니스트였으며 시오니즘 운동의 강력한 지지자였다고 한다.[29] 민권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킹 목사가 시오니즘을 지지한다니까 의아해할수도 있는데 시오니즘도 여러 갈래의 분파가 존재한다. 서양의 세속적 진보 정치인들도 시오니즘을 유럽 제국주의와 봉건적 이슬람 왕국들에 맞서는 좌익 내셔널리즘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았다.[30]
  • 가족계획 정책의 지지자이기도 했다. "만약 외계인들이 지구에 방문한다면 우리가 인구 과잉이라는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가족계획 정책에 예산을 적게 쓰는 것을 보고는, 자기 행성으로 돌아가서 이 행성은 미래가 어둡고 불확실한 정신나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 보고할 것이다."[31]라고 할 정도였다. 또한 인구 과잉 문제는 현대의 페스트에 비견될 만큼 심각한 문제라 평하기도 했다.
    • 이건 시대상도 감안해야하는 면이 있기는 했다. 마틴 루터 킹이 활동하던 시기의 미국은 출산율이 아직 높았던 시절로, 미국의 출산율이 1명대 후반~2명대 초반수준으로 떨어지는것은 1970년대의 일이었다. 미국의 출산율이 2차 세계대전 종전 시기부터 급속히 증가해서 1947년부터 1964년까지는 합게출산율이 3명을 초과하여서 인구증가 목적으로 이민을 받을 필요가 없는 시대였고,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소련을 비롯한 유럽 각 국가들도 다자녀 가정이 많았던지라 인구증가율이 어느정도 나왔던 시대였다. 현재 저출산으로 골머리를 앓는 동아시아 국가들도 일찌감찌 애를 2~3명 낳는 수준이었던 일본을 빼면 다들 자녀 다섯은 기본으로 낳던 시절이라 연 인구증가율이 2~3%대를 기록할 정도로 인구가 급속하게 증가하였다. 21세기 기준으로 생각하면 예측이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지만 당대에는 그런 얘기를 하는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 드디어 그의 꿈이 이루어졌다 카더라 어디까지나 농담이다. 그의 열망은 역할 바꾸기가 아니라 동등한 인간이 되는 것이었으므로 훌륭한 왜곡형 고인드립 되시겠다. 다만 약간 진지하게 따져 보면, 흑인과 백인이 함께 웃으며 노예제를 풍자하는 역할극을 찍고 노는 것 또한 그가 진정으로 원하던, 흑인이 백인과 동등해지는 꿈에 매우 근접한 현실이기도 하다. 따라서 마냥 농담이나 마틴 루터 킹의 이상을 왜곡하는 드립이 아니라 그의 꿈의 실현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은 더 적절한 사람을 쓴다.
  • 해리 벨라폰테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고 프랭크 시나트라의 콘서트를 관람한 적이 있다고 한다.
  • 아버지와 이름이 같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본 문서의 인물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라, 그 아버지는 마틴 루터 킹 시니어(Martin Luther King Sr.)라 구분해 부른다. 그러나 주니어 문화가 없는 한국에서는 그냥 마틴 루터 킹이라 통용되는 듯하다. 당장 본 문서부터만 해도 제목이 그냥 마틴 루터 킹으로 되어 있다. 영미권 자료를 찾을 때 참고하자. 물론 아들이 아버지에 비해 워낙 유명해 그냥 Martin Luther King이라고만 쳐도 거의 대부분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자료만 나오긴 한다.
  • 마이클 잭슨이 본인의 자서전에서 말하길 마틴 루터 킹이 사망했을 때 리허설을 하지 않고 가족과 함께 거리로 나가서 마틴 루터 킹을 추모하였다고 하며 당시엔 너무 어려서 슬프지는 않았으나 자서전에서 마틴 루터 킹과 그의 유족들을 언급하며 추모하였다.
  • FBI의 에드거 후버는 마틴 루터 킹이 소련의 사주를 받고 인권운동을 한다고 믿었으나 소련 붕괴 후 밝혀진 진실에서는 소련 정부는 미국만의 인종갈등을 악화시켜 미국체재를 흔들고자 했으나 평화운동으로 인종간의 화해를 주장하는 루터 킹 목사를 싫어하였으며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하자 삼페인을 터트리는 등 기뻐하였다.

5. 창작물에서[편집]


  • 조지 워싱턴의 항복으로 미국 독립전쟁이 잘 끝나고 탄생한 영국령 북미연방을 그린 해리 터틀도브의 '두 명의 조지'에서 1987년 현재 북미연방의 총리 '마틴 루터 킹 경'으로 나온다. 자동차 판매업자 리처드 닉슨을 암살하고 조지 워싱턴의 항복을 그린 '두 명의 조지'라는 그림을 훔친 아일랜드계 미국인[32] 백인우월 분리주의자 모임 '자유의 아들들'은 최종적으로 그를 암살하려는 듯하다.
  • 만화 X-Men의 캐릭터 프로페서 엑스는 마틴 루터 킹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한다. 온건파적인 느낌 때문으로 보이며, 라이벌 매그니토말콤 엑스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과격한 급진주의자였다는 점에서 모티브를 따온 모양이다.
  • 2차대전에서 추축이 승리한 이후의 세계를 다루는 대체역사게임 TNO에서는 전면 핵전쟁으로 지구의 모든 국가가 멸망하는 쏘 롱 엔딩을 본다면 핵전쟁 이후 새로 생기는 문명에서도 마틴 루터 킹을 기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전란 끝에 많은 자료가 소실되었는지 진짜 왕(King)으로 추정되어서 마틴 루터 1세로 표기되며 이름이 잊혀진 위대한 통치자가 사람들을 사슬에서 해방시킬때 도움을 주었다고 언급된다.
  • 분독스 시즌1 9화 Return of the king 편에서 살인미수를 당한 후 코마 상태에 빠졌다가 32년 후에 깨어났다는 설정으로 등장, 2000년 대통령 선거에 나가려 했으나 불발되었고 이듬해 9.11 테러 관련 인터뷰에서의 발언이 논란거리가 되어 명성이 크게 떨어지며 집도 빼앗기고 매국노 신세가 되어 휴이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다. 에피소드 후반부에서 한 강당에 모인 향락에 도취한 흑인들의 모습에 크게 실망하여 독기어린 연설을 한 이후 휴이한테 마지막을 인사를 나누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는데, 연설의 내용이 미 전역에 TV로 방영 & 보도되면서 미국 흑인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켜 백악관 앞까지 진격할 정도의 폭동이 발발하게 되었다.[스포일러] 첫 방영 이후, 급진주의 민권 운동가 알 샤프턴(Al Sharpton)이 에피소드를 비난하며 작가 아론 맥그루더와 카툰 네트워크에 (작중의) 마틴 루터 킹이 n-word를 사용한 것에 대해 역사적 인물을 모독했다며 사과를 요구하는 발언을 한 일도 있었다.

6.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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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는 1934년에 개명한 것이다. 관련 자료.[2] 본명은 마이클 킹 (Michael King).[3] 이 연설은 후에 표절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으나 자세히는 모른다. 같은 노래의 몇몇 소절을 인용한 것이 1951년 아치볼드 캐리 주니어의 공화당 전당 대회에서 쓰인 스피치와 같다는 점에서 표절 의혹이 생겼으나, 이러한 노래의 몇몇 소절을 인용하는 것은 아프리칸-아메리칸 교회에서는 흔한 일이기에 의혹은 의혹일 뿐 표절이라고 하기엔 증거가 없다.[4] 어렸을 적의 일화로, 킹이 옆집의 백인 쌍둥이 형제와 놀려고 했는데 그 형제의 어머니가 "넌 흑인이니까 흑인들하고 놀아!"라고 했다. 킹이 울며 집으로 돌아오자 어머니 앨버타 윌리엄스 킹(Alberta Williams King)이 어린 킹을 달래면서 왜 흑인이 차별받는지, 인종차별이 정당한 것인지를 되물으며 부당한 현실을 알려줬다고 한다. 또한 어린시절 아이스크림을 사러 들어간 슈퍼마켓에서 '검둥이에겐 아이스크림을 팔지 않는다. 정 사고 싶다면 뒷문으로 들어와'라는 차별을 받았다. 정작 백인친구들은 정정당당히 정문으로 가게에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사는 것을 보고 마틴은 큰 충격을 받았다.[5] 사실상 북침례회의 후신 교단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와 그의 아버지가 목회자로 활동했던 에벤에셀 침례교회는 흑인 침례회 교단인 진보전국침례교총회미국 침례회 교단에 동시에 속해 있다. 두 교단은 파트너십을 맺은 관계이다.[6] 당시 미국 어디에나 그랬겠지만, 킹 목사의 고향은 조지아 주다.[7] 킹이 대학생 시절에 친구들과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 백인 식당 주인이 "흑인들한텐 음식 안 파니 당장 꺼져!"라며 난동을 피워대서 도망가야 했다는 일화가 있다. 나중에 신고를 받은 경찰이 도착했지만 백인 손님들은 전부 침묵했다. 이에 백인 대학생들이 증언하기로 했지만, KKK 등 백인 우익/과격단체들이 압력을 넣는 바람에 증언을 취소했다. 그래서 식당 주인은 무죄로 풀려났다.[8] Letter opener. 종이로 만든 칼이 아니라 편지 등 종이로 된 우편물이나 포장지를 개봉하는데 쓰이는 칼이다.[9] 킹의 사후 출간된 자서전에서 킹의 치료를 담당했던 메이너드 박사의 증언이 서술되어 있었는데, "칼날 끝이 대동맥에 닿았고 대동맥을 빼내기 위해 가슴 전체를 열어야 했습니다. 당신(마틴 루터 킹)이 수술을 하는 동안 재채기를 했다면 당신의 대동맥에 구멍이 뚫렸을 것이고 당신은 과다 출혈로 사망했을 것이다"라고 증언했다.[10] 이전에 주유소나 가게 등에서 도둑질을 한 전과가 있는 범죄자였다.[11] 제임스 얼 레이의 진술도 음모론을 키우는 데 한몫 했다. 본인이 총을 쏘지 않았고 라울이라는 정체불명의 남자가 음모를 꾸며 자신에게 누명을 씌웠다고 주장했고, 변호사가 이걸 플레이보이지에 실어서 널리 알렸다.[12] 많은 수업이 주로 월요일 수업을 기준으로 한 주의 커리큘럼이 돌아가기 때문에 월요일을 쉬면 그 주의 모든 수업이 영향을 받는다.[13] 영화 셀마(2014)에서도 이 점을 고증에 반영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연설에서 항상 흑인을 negro로 지칭하며, 영화상에 잠시 단역으로 등장하는 말콤 X는 당시 오히려 비하적이라고 여겨졌던 black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인권 운동에 있어 온건파가 정치적 올바름을 반영한 용어를 쓰고 과격파가 비하적 용어를 취하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다. 인도에서도 불가촉천민 문제를 두고 마하트마 간디는 하리잔(신의 아이들)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진짜 불가촉천민 출신 정치인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는 이 용어에 반대하며 달리트(불가촉천민이라는 뜻을 넘어 '억압받는 자'라는 뜻을 가진 아주 부정적 단어)를 쓰는 것을 고집했다. 이는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단어가 오히려 문제의 심각성을 은폐/축소한다고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14] 출애굽기모세도 '약속의 땅' 가나안 에 들어가지 못했다. 매우 상징적인 발언. 그리고 마치 유대 신화의 40년의 방황을 재현이라도 한 것처럼, 정확히 루터 킹 사후 40년 뒤인 2008년, 버락 후세인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게 된다. # 당시 루터와 함께 했던 상당수 인사들도 살아서 이 사건을 보게 된 경우가 적지 않다.[15] Mine eyes have seen the glory of the coming of the Lord. 미국의 군가이자 찬송가Battle Hymn of the Republic의 첫 구절이기도 하다.[16] 장례 직후에는 현재의 위치가 아닌 애틀랜타의 사우스뷰 묘지에서 묻혀있었으나, 1980년에 생가 부근에 마틴 루터 킹 기념관이 건립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고, 2006년에 아내와 함께 합장되면서 비석이 다시 한 번 교체된 것이라고 한다.합장 이전에 현재의 위치에 갓 이장된 당시의 무덤[17] 이 묘비명은 사우스뷰 묘지에 안장된 당시부터 현재의 위치에 이장된 1980년 이후에도 현재까지도 바뀌지 않고 그대로 새겨져 있다.[18] FBI의 흑역사를 다루는 작품에는 항상 나오는 이야기다. SBS에서 더빙 방연한 후버 관련 전기 영화에서는 후버와 부하들의 대사로 킹 목사의 신음소리 언급이 나온다. KBS에서 방영한 '대통령을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외화에서 느글느글한 원로 FBI 요원이 자기가 회의를 느꼈을 때가 킹 목사 침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했을 때라고 할 정도였다.[19] 마틴 루터 킹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케네디를 비롯한 높으신 분들에 대한 치부들은 대부분 2027년을 한도로 해서 아카이브에 넣었다.[20] 심지어 그 학생이 실수한 부분까지도 그대로 베꼈다.[21] 다만 논문과 달리 연설은 일부 문구를 설령 다른 곳에서 따왔다고 한들 비난받을 일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법적으로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22] 언론 기사나 교과서 등에서는 ‘마틴 루서 킹’이라고 적는 경우가 많다.[23] 비슷한 예로 슈퍼맨 시리즈에 등장하는 빌런 렉스 루터도 원래는 렉스 루서라고 읽어야 한다.[24] 다만 아니라는 설도 있다. #[25] 킹도 대선 과정에서케네디를 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존슨을 지지했다.[26] 그냥 차별 문제로 나가려던게 아니라 브로드웨이쇼를 의뢰받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실제 배우의 전공도 그쪽.[27] 엄밀히 말하자면 처음부터 사회 비판을 둘러 말하려고 SF장르로 간 것이었다. 등장인물을 문제삼자면 우후라 말고도 그 사람들이 거품 물만한 게 수두룩하다. 주조종사인 히카루 술루는 동양인임에도 선장-부선장-기관장 다음의 지휘서열이 4위라서 선장과 부선장이 행성으로 내려가고 기관장이 동력문제로 자리를 비우면 자주 지휘권을 넘겨받는다. 이소룡이 그린호넷에서 조연인 카이토로 출연한 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였다는 걸 생각하자.[28] 정확히는 흑인 투표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기도 했다.[29] Sundquist, Eric J. (2005). Strangers in the land: Blacks, Jews, post-Holocaust America.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30] 하지만 현실은 건국의 주체가 된 노동시오니즘 지지자 측도 기존 토착민이나 유럽계가 아닌 유대인들에 대해선 인종차별적이였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탄압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차이점이라면 자기네들을 지지하는 무슬림들에게 떡고물을 좀 주는 편이었다는것과 당시 팔레스타인 무장투쟁의 주체가 된 세력이 아랍 사회주의 계열인 파타가 주류였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보면 좌파 VS 좌파 구도가 나왔다는것 정도였다는것이다.[31] 외계인 이야기가 뜬금없어 보이지만, 이 말이 나온 1960년대는 UFO 목격담이 시도 때도 없이 보고될 만큼 사람들이 외계인에 관심이 많던 시절이었다. [32] 전쟁 없는 노예해방으로 북미 흑인들의 대다수가 중산층이 된 반면, 북미가 계속 영국 치하에 있기 때문에 아일랜드인들은 빈곤층 육체노동자 신세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존 F. 케네디는 정치인이 되지도 못하고 자유의 아들들에 가입했다.[스포일러] 2020년 밴쿠버에서 91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언급했지만, 사실 이 에피소드는 휴이의 꿈이자 상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