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프라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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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프라이스의 수상 이력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No. 25
윌리엄 마크 프라이스
William Mark Price

출생
1964년 2월 15일 (60세)
오클라호마주 바틀즈빌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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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출신학교
조지아 공과대학교
신장
183cm (6' 0")
체중
77kg (170 Ibs)
포지션
포인트 가드
드래프트
1986 NBA 드래프트 2라운드 25순위
댈러스 매버릭스 지명

소속 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1986~1995)
워싱턴 불리츠 (1995~1996)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1996~1997)
올랜도 매직 (1997~1998)
지도자
덜루스 고등학교 코치 (1998~1999)
조지아 공과대학교 코치 (1999~2000)
윗필드 아카데미 (2000~2001)
사우스 드래곤즈 (호주) (2006)
덴버 너기츠 코치 (2007~2008)
애틀랜타 호크스 코치 (2008~2010)
올랜도 매직 코치 (2011~2012)
샬럿 호네츠 코치 (2013~2015)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샬럿 감독 (2015~2017)
덴버 너기츠 코치 (2018~2019)
등번호
25번 - 클리블랜드 / 골든스테이트
15번 - 워싱턴
5번 - 올랜도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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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커리어
2.1. NBA 입성 이전
2.2. NBA 커리어
2.3. 은퇴 이후
3. 수상 내역
4. 플레이 스타일
5. 가족 관계
6.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미국의 농구인으로, 1990년대 NBA를 대표하는 3점 슈터였다. 데뷔 초에는 발 느리고 운동능력 부족한 평범한 백인 가드 취급을 받았지만, 정교한 슈팅을 갈고 닦아 All-NBA 퍼스트팀에도 오르고 드림팀에도 선발되었다.

2. 커리어[편집]



2.1. NBA 입성 이전[편집]


1964년 오클라호마 주 바틀즈빌에서 아마추어 농구선수이던 아버지 데니 프라이스(1938~2000)와 어머니 들로리스 앤 던(1941년생) 사이에서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에 이니드에서 주로 살며 동생 맷, 브렌트와 함께 아버지와 함께 농구 연습을 해서 슈팅 실력을 키웠고, 이니드 고등학교 시절에는 제리 롱 감독의 지도를 받았으나 슛 외에는 실력으로 건질 게 없어서 졸업을 앞둘 땐 여느 대학들로부터 오퍼를 받지 못했다. 다만 바비 크레민스[1] 조지아 공과대학교 감독은 그의 뛰어난 슈팅 실력에서 우러나오는 잠재력을 보고 입학을 제안했고, 그는 이에 응했다.

입학 당시 조지아 공대 농구부는 1960년 NCAA 전국대회에서 8강을 간 이래 1970~1971년 NIT 진출 2회가 고작일 정도로 포스트시즌 진출이 전무한 약체 팀이었고, 소재지가 대학 미식축구의 인기가 높은 애틀랜타인지라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미식축구부와 달리 인지도가 적었다.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뛴 후 20.3점을 찍어 ACC 최초이자 신입생으로서 최초로 득점 1등까지 올랐고, 1983년에 컨퍼런스 신인상을 탔다.

2학년 때는 크레민스 감독의 제안에 따라 포인트가드로 방향을 틀어 1984년에는 동기 존 샐리 등과 함께 뛰며 13년만에 NIT로 진출시켰다. 1984-85 시즌 들어 샐리, 후배인 듀안 페럴 등과 함께 ACC 토너먼트 결승에서 브래드 도허티 등이 포진한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를 꺾고 25년만에 전국대회로 이끌어 8강까지 나가 패트릭 유잉의 조지타운 대학교를 상대했다. 이 경기에서 슛 16개 중 13개를 실패해 54-60으로 지긴 했으나, 재학 4년 동안 올 아메리칸 2회(1984, 86), 올 ACC 퍼스트 팀 3회(1984~1986) 등에 선출됐다.


2.2. NBA 커리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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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공과대학교를 졸업한 뒤, 1986년 NBA 드래프트 2라운드 전체 25순위로 댈러스 매버릭스에 지명되었으나, 당일에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로 트레이드되었다.


2.2.1.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편집]


입단을 전후할 때 유약하고 깡마른 외모 탓에 스카우터들로부터 우려가 많았고, 첫 시즌 당시 존 배글리의 백업이었으나 부상이 많아 전 경기 벤치에서 출장했다. 구단 측은 프라이스에게 눈여겨보지 않은 채 1987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7순위로 UC 버클리 출신 포인트가드 케빈 존슨을 지명해서 그를 간판스타로 키우려 했으나, 오히려 팀은 베테랑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1988년 2월에 케빈 존슨을 타이론 코빈 등과 세트로 묶어 피닉스 선즈의 7년차 선수 래리 낸스, 마이크 샌더스 등과 맞바꾸면서 터닝포인트가 생겼다.

비로소 그는 팀의 중심으로 점차 입지를 다져 팀 역사상 최고의 포인트 가드가 되어 리그를 대표하는 슈터로써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90.4%의 자유투 성공률은 스티브 내시가 경신하기 전까지 NBA 역대통산 1위였고,[2] 3점슛 통산 성공률도 40%를 넘었다. 1988-89시즌에는 40% 이상의 3점슛, 50% 이상의 슛 성공률, 90% 이상의 자유투 성공률이었다. 프라이스는 캐벌리어스에서 어시스트 4206개를 기록하고 있고, NBA 올스타 게임도 4번 출전하여 3점슛 콘테스트에서도 2번 우승하였고, 1992-93시즌에는 올-NBA 퍼스트 팀에도 발탁되었다.

프라이스의 가세는 레니 윌킨스 감독이 이끄는 캡스의 큰 힘이 되었다. 프라이스와 같은해 전체 1번으로 입단한 센터 브래드 도허티와 피닉스 선즈에서 영입한 올스타 포워드 래리 낸스[3]는 3인방이 모두 동시에 올스타에 선발될 정도의 수준급 선수들이었으며, 86시즌에 입단한 론 하퍼는 비록 올스타엔 선발되진 못했지만 신인시절부터 평균 22점을 올리는 좋은 선수였다.[4] 거기에 핫로드 윌리엄스, 크레익 엘호 같은 조연들도 묵묵히 힘을 보탰다.

이들이 이끄는 캐브스는 이때까지 팀 역사상 최고의 시기를 보냈으며, 1988-89, 1991-92 시즌에 57승을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하필이면 옆 동네 시카고에는 그 분이... 그래서 플레이오프 운은 참 없었다.

1987-88 시즌, 캐벌리어스는 동부 6위에 해당하는 42승을 거두며 세 시즌만에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았으나 50승을 거둔 신흥강호 불스에 3전 전패를 당해 스윕당했다.

1989년 당시 기준으로 구단 역사상 최고승률을 거두고 3번시드로 플레이오프를 산뜻하게 시작했지만[5] 하필 47승에 그친 6번 시드였던 불스엔 마이클 조던이 있었다. 최종 5차전(당시 1라운드는 5전3승제), 종료 직전까지 1점차로 앞서고 있었지만 이때 불스는 조던에게 어렵사리 공을 건냈고, 조던은 공을 잡자마자 원드리블 후 점프, 특유의 체공력으로 공중에서 크레익 일로의 블럭을 피한뒤 더블클러치 점프슛을 적중시킨다. 이 엄청난 플레이는 단순히 "The Shot"으로 불리며 조던의 역대 최고 명장면중 하나로 남는다.당시 장면

그 다음 두 시즌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1989-90 시즌엔 캐브스는 론 하퍼가 7경기만에 트래이드, 낸스가 62경기 출장, 도허티가 시즌 절반을 날려먹는 통에 프라이스 본인은 커리어 하이 19.6점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42승에 그치며 필라델피아에 1라운드에서 탈락하고 만다. 1990-91시즌은 프라이스 본인이 드러누우며 아예 플옵에 탈락하고 만다.

그러나 캐브스는 92시즌에 전력을 재정비하며 다시금 57승을 거두고 동부 2위에 오른다. 그리고 1라운드에서 뉴져지 네츠를 스윕하고, 부상과 노화로 힘이 빠진 래리 버드의 보스턴 셀틱스를 7차전만에 제압하고 동부 결승에 76시즌 이후 처음으로 오르게 된다. 그러나 상대는 67승을 기록한 최강 불스(...) 결국 6차전만에 패배한다.

93시즌은 프라이스 개인 커리어 최고의 해였다. 그는 18.2점 8어시스트, 필드골 성공률 48.4%에 자유투 성공률 무려 94.8%를 기록하며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올 NBA 퍼스트팀에 오른다. 팀 성적은 살짝 떨어져 54승이었지만, 동부 컨퍼런스 3위로 플옵에 올라 2라운드에 진출한다.

그런데 상대는 또 불스. 팀은 조던 스토퍼의 특명을 띄우고 체격과 운동능력이 좋은 제럴드 윌킨스[6]를 조던에게 매치업 시켰지만 팀은 4차전만에 스윕당하고 만다.

1993-94 시즌, 도허티와[7] 낸스 둘다 부상으로 뭉터기로 결장하는 가운데 프라이스는 팀의 1옵션 역할까지 하며 고군분투, 다시 한번 올 NBA 써드 팀에 오르며 팀을 47승으로 이끈다. 심지어 2~3월에 거쳐 11연승을 거두며 동부 6위 자리에 안착한다.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이들을 기다리는 건 또 시카고 불스(...). 그나마 조던이 은퇴한 상황이었지만, 그 시즌 MVP 투표 3위까지 오른 스카티 피펜이 건재했던 만큼 조던이 없는 불스도 충분히 강팀이었고 스윕패를 당한다.

종합적으로 프라이스의 플레이오프 커리어에서 무려 5번의 시리즈 패배를 시카고 불스에 당했다.

안그래도 부상이 잦은 편인 프라이스의 커리어는 30대에 접어들고 부상이 더욱 많아지면서 저물기 시작한다. 1994-95시즌 캐브스는 초반에 무려 20승 8패를 거두는 쾌조의 스타트에도 나머지 기간동안 5할 승률에 못 미치며 또 동부 6위로 시즌을 마친다. 프라이스는 뛰는 동안은 여전한 실력을 보였지만 손목 부상으로 48경기에 그친다. 이후 팀은 뉴욕에게 1라운드 패배를 당하고, 이것이 프라이스의 마지막 포스트시즌 무대였다.

프라이스의 말년은 부상으로 얼룩지게 된다. 그는 워싱턴 불리츠에 트레이드됐지만[8] 첫 시즌 32경기 결장, 1995-96 시즌 전 경기 결장 등으로 7경기 출장에 그쳤으며, 발 부상이 더 악화되어 왼쪽 발 족저근막염까지 도졌다.

프라이스의 커리어는 전체적으로 당시 캐벌리어스와 비슷했다. 이들은 NBA에서 알아주던 강팀이자 선수였지만, 우승후보, 혹은 MVP후보로 가기까지 한끗 부족했다.

게다가 그 시기 조던에 밀렸던 선수들인 찰스 바클리, 칼 말론, 패트릭 유잉 등은 기억해도 프라이스와 클리블랜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리스트에서 배제한다. 이것은 이때 캐브스를 이끌던 주축선수들인 프라이스와 도허티가 이른 나이에 부상에 시달려 커리어가 일찍 저물어 잊혀진 선수들인 것이 크다.

결국 프라이스는 건강하거나 운이 더 따랐다면 유잉이나 바클리, 드렉슬러처럼 "조던보다 한 수 아래 라이벌"로 기억될 수 있었지만, 임팩트가 다소 부족한데다 전성기가 너무 빨리 저물어서 대부분의 팬들로부터 잊혀진 상태다. 분명한 건 전성기 때 캐브스는 불스를 능가하는 팀전력을 구축한 적도 있으며 무시못할 동부의 강자였으며 프라이스 역시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리그 최고의 PG 중 하나였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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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에 열린 농구 세계선수권 대회에서는 드림팀에 선출되어 금메달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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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에서 주전 가드로 경쟁력을 상실한 그는 1996년에 FA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를 거친 후, 1997년에는 올랜도 매직의 데이빗 본 및 브라이언 쇼와 맞바꿔지며 한 시즌씩 더 뛰었지만 손목 부상도 모자라 손가락까지 다치기도 했다. 1997-98 시즌 뒤 올랜도에서 웨이버 공시된 후에도 재기를 노리긴 했지만 1998-99 시즌을 앞두고 선수노조의 파업으로 더 큰 타격을 입었고, 거기에 넷째 아이의 출산도 임박하던 터라 생계에 부담을 느껴 1999년 2월 12일, 모교인 조지아 공대의 알렉산더 메모리얼 콜로세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은퇴 선언을 했다.


2.3. 은퇴 이후[편집]


1998년 애틀랜타 교외의 덜루스 시에 있는 덜루스 고등학교의 코치로서 지도자 인생을 시작해 조 말레 감독을 보좌했다. 그러다가 말레 감독이 병원 진단 결과 비호지킨 림프종이 발견되자 그가 농구부를 대신 맡아 GHSA 5A 토너먼트에서 4강 진출을 시켜주기도 했다. 선수 은퇴 선언을 한 뒤인 1999년부터 1시즌간 모교인 조지아 공대의 코치로 돌아와 은사인 크레민스 감독의 마지막 시즌을 함께 했고, 이후 화이트필드 아카데미로 옮겨 1년을 지냈다.

2003년부터 덴버 너기츠의 컨설턴트로 초빙된 후 애틀랜타 호크스와 친정팀 캐브스의 전속 해설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고, 2006년부터 호주 NBL 팀 사우스 드래곤즈 감독으로 지도자 일선에서 복귀해 덴버, 애틀랜타, 올랜도, 샬럿 등지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다가 2015년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샬럿 캠퍼스 감독으로 영입되었으나 변변찮은 성적만 내고 2017-18 시즌 도중에 쫓겨났다. 2018-19 시즌 동안 덴버에서 또 코치를 맡았다. 2020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청소년 농구 캠프열려고 했으나 코로나19로 잘 열리지 않다가 2022년에야 열었다.

1999년 11월 14일에 캐브스 측은 그의 등번호 25번을 영구 결번시켰다.


3. 수상 내역[편집]


수상 내역
파일:NBA-Allstar2021.pngNBA 올스타 4회 (1989, 1992-1994)
파일:NBA 로고.svg 올-NBA 퍼스트 팀 (1993)
파일:NBA 로고.svg 올-NBA 서드 팀 3회 (1989, 1992, 1994)
파일:NBA 로고.svg NBA 3점슛 콘테스트 챔피언 2회 (1993)
파일:FIBA-Logo.png 1994 FIBA 세계 선수권 대회 캐나다 금메달


4. 플레이 스타일[편집]



마크 프라이스 하이라이트, 초창기 팀메이트이자 후배인 스티브 커도 나온다.

마크 프라이스는 NBA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슛 자세를 지닌 선수로, 주로 손목에 의한 스냅을 이용한 외곽 슛을 선보인다. 꾸준한 슛 스트로크와 집중력으로 통산 90%가 넘어가는 자유투 성공률과 180 클럽에 가입한 적이 있을 만큼 기복이 없는 슈팅 능력을 자랑했다.

또한 위 영상에도 나오지만, NBA에서 픽앤롤을 적극적으로 시도한 선구자격 인물 중 하나다. 90년대 픽앤롤 오펜스의 완성을 존 스탁턴 - 칼 말론 듀오로 보기 때문에 저평가되나, 프라이스는 위 영상에도 나오듯 코트 어디서나 팀원의 스크린을 자연스럽게 타면서 상대 수비의 빈틈 사이로 들어가 플로터나 골밑슛을 적중시킬 수 있던 선수였다. 픽앤롤 핸들러로서 부족함이 없는 볼핸들링과 스피드를 보여주었다. 특히나 일명 Split the Defence 라고 불리는 더블팀을 들어온 상대 수비수들 사이로 돌파하는 플레이를 거의 처음으로 사용한 선수이다. 일반적인 백인 슈터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처럼 받아먹기 외곽슛만 있는 유형은 절대 아니었다.

다만 운동능력이 뛰어난 선수는 아니다 보니 수비에는 약점이 있었다.

매너있는 플레이로도 유명했는데, NBA 데뷔 후 첫 4년간 테크니컬 파울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가 테크니컬 파울을 선언받자 신문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5. 가족 관계[편집]


가족 구성원의 상당수가 농구와 관계있는 집안이다. 부친 데니는 오클라호마 대학교 출신으로 젊은 시절 아마추어 팀 필립스 식스티식서스에서 뛰었으며 1968년 쇼니 고등학교 감독으로 지도자에 입문하여 2000년 사망 시까지 오클라호마 대학교, 피닉스 선즈, 샘휴스턴 주립대학교, 필립스 주립대학교 등지에서 코치나 감독을 맡았다. 특히 1969년 오클라호마 대학교 재직 시부터 6년 간 존 맥클로드 감독 밑에서 일하기도 했다. 막내동생 브렌트(1968년생)는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교와 오클라호마대를 전전하다 1992년 NBA 드래프트 2라운드 32번으로 워싱턴 불리츠에 뽑혀 2004년까지 5팀을 거쳤지만, 큰형 마크보다 더 부각이 되지 않았다.

직계 자녀들 중 딸 캐롤라인은 노스캐롤라이나대 재학 시절 테니스 선수로 뛰었고, 아들들 중 허드슨(1994년생)은 2013년부터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2015년부터 노스캐롤라이나대 샬럿 캠퍼스로 편입되어 아버지 밑에서 배웠고, 2017년에 경제학 학사를 따서 졸업했다. 조쉬(1998년생)는 2018년부터 리버티 대학교로 입학했지만 학업 성적이 저조하여 2019-20 시즌부터 뛰었고, 2021년부터 트레베카 나사렛 대학교로 편입한 뒤 2022년까지 뛰었다.


6. 참고 자료[편집]



[1] 아일랜드계 이민자 가문 출신으로, 1947년 7월 4일 뉴욕주 더 브롱스 출생.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시절 명장 프랭크 맥과이어 감독 밑에서 배운 직계 제자로, 동 대학에서 상업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에콰도르 프로농구 리그에서 1년 동안 뛰다가 1971년 포인트파크 칼리지(현 포인트파크 대학교) 농구부에서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고, 1973년 모교 사우스캐롤라이나대로 돌아와 은사 맥과이어 감독을 2년 동안 보좌했다가 1975년 애팔래치안 주립대학교 감독으로 본격 데뷔했다. 1981년부터 조지아 공대 감독으로 이직한 후 19년간 재직하며 1990년 NCAA 전국대회 4강 진출을 이뤄 이름을 날렸고, 주로 포인트 가드를 기르는 데 도가 텄다. 프라이스와 존 샐리 외에 듀안 페럴, 톰 해먼즈, 데니스 스캇, 케니 앤더슨, 존 배리, 스테판 마버리, 맷 하프링, 전태풍 등이 그가 발굴해낸 보물들이다. 2000년 퇴임 이후 동기부여 강사, 대학농구 중계방송 해설위원 등으로 활동하다가 2006년 칼리지 오브 찰스턴 감독으로 현장에 복귀하여 6년을 지내기도 했다.[2] 현재는 아직 커리어 진행중인 스테픈 커리가 다시 경신.[3] 그의 아들이 현재 LA 레이커스의 선수로 뛰고 있다. 아버지와 신체조건,플레이스타일이 비슷한 편[4] 하퍼 정도의 실력과 스탯이면 일반적으로 한번 정도는 올스타에 뽑히기 마련이다. 전성기 때 20점 5리바운드 5어시스트 2스틸 블럭 언저리의 스탯을 꾸준히 올려줬으니... 그러나 NBA에선 웬만해선 한 팀에서 올스타 네명이 배출되지 않기 때문에 밀린 케이스. NBA에선 정말 압도적인 전력이거나 그 선수들이 이견의 여지 없이 올스타인 경우에만 한 팀에서 올스타 네명이 가끔 나온다. 다만 97시즌처럼 올스타 3명+아직 후보지만 인기가 너무 많아서 팬투표로 선발된 선수(코비 브라이언트)인 경우도 있다.[5] 프라이스, 도허티, 낸스 모두 올스타에 선발됐다.[6] NBA레전드 도미니크 윌킨스의 동생으로 실력은 형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덩크 콘테스트에도 나가는 등 운동능력만큼은 형 못지 않았다.[7] 시즌아웃 이후 수술을 받고 재활에 매진했지만, 뜻대로 안 되자 1995-96 시즌 이후 공식 은퇴했다.[8] 그 댓가로 캐브스는 1996년 1라운드 픽을 얻어 러시아인 선수 비탈리 포타펜코(라이트 주립대)를 전체 12번으로 뽑았지만, 그는 2006년 NBA를 떠나기 직전까지 그저 그런 모습을 보였다. 2007년 스페인 팀 클루브 에스투디안테스를 끝으로 은퇴한 뒤 인디애나 페이서스,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멤피스 그리즐리스 등지를 전전하며 코치로 근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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