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콜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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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콜먼의 챔피언 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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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마크 대니얼 콜먼
(Mark Daniel Coleman)

생년월일
1964년 12월 20일 (59세)
오하이오 주 프리몬트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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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거주지
오하이오콜럼버스
종합격투기 전적
26전 16승 10패

7KO, 5SUB, 4판정

3KO, 5SUB, 2판정
체격
185cm / 117kg / 191cm
링네임
The Hammer
주요 타이틀
UFC 10 토너먼트 우승
UFC 11 토너먼트 우승
UFC 초대 헤비급 챔피언
2000 Pride 무차별급 그랑프리 우승
기타
2008 UFC 명예의 전당 헌액
SNS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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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적
3. 커리어
3.1. UFC
3.2. PRIDE
3.3. 슈트박세 난투극
3.4. 이후
4. 파이팅 스타일
6. 기타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전 아마추어 레슬링, UFC 헤비급 종합격투기선수. 미국의 국가대표로 활동하며 1991년 세계선수권 자유형 준우승,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7위 등 뛰어난 성적을 냈다. 1세대 종합격투기 선수로 MMA 레슬러들의 기본이 되는 그라운드&파운드이라는 전술을 확립했다. 팀 해머하우스의 수장.


2. 전적[편집]





3. 커리어[편집]



3.1. UFC[편집]


32세 무렵인 1996년 7월 UFC 토너먼트 10을 통해 MMA 커리어를 시작, 모티 혼슈타인과 '빅 대디' 개리 굿리지를 연파한 후 '프레데터' 돈 프라이와 결승에서 맞붙는다. 11분이 넘는 사투 끝에 콜먼은 상위에서 앨보우와 헤드벗를 작렬시켜 돈 프라이의 얼굴을 피투성이로 만들며 TKO승을 거두었다.

1996년 9월 열린 11회 대회에서도 줄리안 산체스를 45초만에 초크로 잡아내고 브라이언 산체스를 2분 20초만에 타격으로 제압했다. 결승에서 만날 예정이었던 스캇 페로조가 탈진을 이유로 기권해버렸기 때문에 11회 대회도 콜먼의 우승으로 끝났다. 당시 힉슨 그레이시는 '수족관에 상어를 풀어놓았다'는 표현을 쓰며 콜먼의 강력함을 이야기 했다.

1997년 2월에는 UFC 슈퍼파이트 챔피언인 댄 세번과 UFC 초대 헤비급 챔피언 왕좌를 두고 경합, 세번의 태클을 모두 봉쇄하며 백마운트를 빼앗고 파운딩을 퍼부었다. 풀마운트를 잡은 후 사이드로 옮겨가면서 초크를 걸었고, 세번은 써밍까지 해가며 저항했으나[1] 결국 견뎌내지 못하고 탭을 치고 말았다.

그러나 1998년 UFC 14에서 모리스 스미스에게 패배하며 타이틀을 내주었고, 이후 피트 윌리엄스와 페드로 히조에게 연패하며 부진에 빠졌다.


3.2. PRIDE[편집]


이때 일본의 신설 단체인 Pride로부터 오퍼가 들어왔고 콜먼은 이에 응했다. 1999년 4월 PRIDE 5의 타카다 노부히코와 일전에서 콜먼은 내내 상위포지션을 점거한 채 파운딩을 날렸고 타카다는 무기력하게 깔려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2라운드에 콜먼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줄어들더니 타카다가 힐훅을 성공시키며 콜먼에게 패배를 안겨줬다.

이 경기는 당시 일본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의 국대급 레슬링 선수이자 UFC의 챔피언이었던 콜먼의 파워를 일본의 프로레슬링 영웅 타카다가 서브미션으로 제압한 것이다. 하지만 이 시합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2라운드 콜먼의 움직임에서 있었던 변화는 시합 당시에도 의아함을 낳았고 콜먼도 "나는 분유값이 필요했다. 거부할 수 없는 오퍼였다."고 말해 의혹을 증폭시켰다.

논란이 남는 타카다전이었으나, 그 후 콜먼이 PRIDE에서 보여준 위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1999년 11월 히카르도 모라이스를 시작으로 PRIDE 2000 그랑프리에서 사타케 마사아키, 쇼지 아키라, 후지타 카즈유키[2]를 줄줄이 잡아내며 결승에 진출, '아이스 콜드' 이고르 보브찬친과 격돌한다. 콜먼은 2라운드 시작과 함께 테이크다운을 성공시켰고 69포지션에서 그라운드 니킥을 퍼부어 보브찬친을 격파[3], PRIDE GP를 석권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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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연승을 달리던 콜먼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은 PRIDE 초대 헤비급 챔피언 '미노타우로'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 2001년 9월 PRIDE 16, 콜먼은 노게이라에게 스탠딩 타격에서 크게 밀리며 힘을 쓰지 못했고, 노게이라가 하이킥을 날리다 넘어지면서 상위 포지션을 차지하고 그의 전매특허인 G&P를 구사했으나 외통장기처럼 진행되는 주짓수 지옥에 말려들어 트라이앵글 암바로 패배하고 만다. 90년대 MMA를 호령했던 G&P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2003년 6월 PRIDE 26에서는 숙적이었던 돈 프라이와 재대결을 벌여 3라운드 내내 그라운드에서 우세를 보인 끝에 만장일치 판정승을 거두었다. 돈 프라이는 불리한 가운데에서도 투혼을 발휘하여 승부를 끝까지 몰고갔고 승리를 거둔 콜먼은 프라이의 팔을 들어주며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2004년 4월에는 '라스트 엠페러' 에밀리아넨코 효도르와의 경기를 가졌다. 여전히 강력한 파워를 앞세워 태클로 태이크다운을 빼았고 G&P를 펼쳤다. 효도르는 파워에서 밀려 하위에 깔렸으나 콜먼의 레프트 파운딩을 순간적으로 캐치하여 전광석화같은 암바를 성공시켰다. 2005년 2월에 만난 미르코 크로캅을 상대로는 단 한번도 태클을 성공시키지 못하고 타격에도 밀리면서 결국 레프트 스트레이트에 무너져 KO로 패배했다.

노게이라에 이어 효도르와 크로캅에게 연달아 무너진 콜먼은 2006년 2월 마우리시오 쇼군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였다. '여기서도 지면 끝'이라는 결사의 각오를 가지고 임한 콜먼은 태클만으로 쇼군의 팔을 부러뜨리며 1라운드 TKO승을 거두었다. 정확히 말하면 태클을 당하면서 팔을 잘못 짚어 어깨가 탈구된 것인데 이를 모르고 콜먼이 계속 공격을 가한 탓에 쇼군측의 세컨이 난입하게 된다.


3.3. 슈트박세 난투극[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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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DE 31의 쇼군전에서 있었던 난투극과 백스테이지에서의 후일담.

링에서의 난타전은 무릴로 닌자, 반더레이 실바, 필 바로니 등 유명선수들도 대거 참가했는데, 콜먼도 닌자와 슈트박세의 무에타이 코치인 하파엘 코데이로와 몸싸움을 벌였고. 필 바로니는 갑자기 달려온 반더레이 실바를 바닥에 내동댕이 쳤다.[4] 마크 콜먼은 이 난장판에서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이 아수라장은 프라이드 스탭이 끼어든 후에야 진정되었다.난투극 영상[5]

콜먼은 백스테이지에서 슈트박세 팀원들과 만나서 사과하려 했으나[6] 실바는 되려 "그럼 아까 니가 나 밟은건 뭐냐?"며 따졌고, 뒤이어 "콜먼. 너 경기에서 만나면 뒤졌어."라고 응수하였다. 자신을 눕혔던 바로니에게도 "You too!"라고 소리쳤으나, 말리려고 끼어든 퀸튼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Hey, me?"라고 응수하자 실바는 "너네 전부 다!"라고 말하면서 도망갔다(. 당시 백스테이지 영상.

규정대로라면 전원 중징계를 받을 사건이었지만 이들에게는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닌자와 실바에게도.[7] 오히려 이 모든 장면을 백스테이지 카메라로 촬영하고 있었으며, 콜먼과 실바가 인터뷰에서 서로에게 공공연히 적의를 드러내는 등 흡사 프로레슬링의 대립 각본을 보는 듯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를 두고 백스테이지에서부터는 모종의 의도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 아니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해체 후 속속들이 밝혀지는 워크 의혹, 총괄본부장 타카다 노부히코의 프로레슬링 연출경험 등을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다. 실바와 퀸튼은 이미 PRIDE 25에서 난투극을 연출했던 경험이 있고 콜먼도 카메라 앞에서는 스위치가 바뀌는 사람이다.

참고로 쇼군은 난투극이 벌어지는 내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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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실바와는 꽤나 절친하다고 한다.


3.4. 이후[편집]


여튼 구사일생으로 부활한 콜먼은 2006년 10월 효도르를 상대로 2차전을 가졌다. 하지만 타격에서 거세게 몰아치는 효도르에 밀렸고 다시 상위를 잡은 상태에서 암바에 걸려 패배하고 만다.

효도르전 이후로는 사실상 은퇴한 상태였으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2009년 1월 UFC에 복귀한다. 돌아온 UFC 무대에서의 첫 상대는 PRIDE 31에서 승리를 거둔 상대인 쇼군. 하지만 45세에 라이트헤비급으로 감량을 단행한 콜먼의 육체는 안타까울 정도로 무력했다.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져 있었고 체력은 2라운드에 이미 바닥난 듯 했으며 그라운드와 스탠딩 양쪽에서 쇼군에게 밀렸다. 결국 3라운드 4분 36초에 쇼군의 펀치를 맞고 TKO패배를 당했다. 그래도 젊은 쇼군을 상대로 근성과 투혼을 보여주었다는 평을 받았다. 반대로 쇼군은 기대 이하의 경기력을 보여주며 이겨놓고도 욕을 엄청 먹었다.

2009년 7월 UFC 100에서는 스테판 보너에게 만장일치 판정승을 거두었다.

2010년 2월 UFC 109 '캡틴 아메리카' 랜디 커투어와의 대결. 이 대결은 1세대 전설들의 대결로 많은 격투팬들의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콜먼과 달리 커투어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온 파이터였다. 거의 모든 면에서 커투어의 우세가 이어졌고 테이크다운에 성공한 커투어가 백마운트에서 리어네이키드 초크를 성공시켰다. 콜먼은 탭을 치지 않고 버텼으나 결국 정신을 잃으며 패배한다.

갈수록 기량이 예전같지 않다. UFC 109 이후로는 데이나 화이트로부터 퇴출을 통보받은 상태.

이후 경기를 갖지 않다가 결국 2013년 3월 페이스북을 통해 은퇴를 선언했다.


4. 파이팅 스타일[편집]


강력한 파워의 태클과 해머처럼 둔탁하게 내려치는 파운딩 펀치의 조합인 그라운드 앤 파운드(Ground and Pound) 전략으로 UFC를 제패했다. 링네임인 '해머'는 그의 파운딩에서 비롯된 것이다.

약점은 스탠딩 타격과 한정된 패턴. 그의 스타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허점을 드러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스타일을 끝까지 고수했다. 실제로 많은 상대는 그의 태클을 알면서도 당했다. 하지만 파워와 테크닉을 겸비한 선수들이 늘어나면서 그의 전략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갔고 결국 현대 MMA의 흐름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스탠딩 타격의 경우 실질적으로 테크닉이랄게 없는 수준이었다. 경기 스타일 자체가 묻지마 태클로 상대를 눕혀놓고 때리는 방식이었는데, 너무 뻔해서 상대에게 읽히기 일쑤였으며, 태클을 막아낸 상대에게는 그야말로 샌드백으로 전락하는 수준의 스탠딩 타격 능력을 보여주었다. 동료인 캐빈 랜들맨이 말도 안 되는 신체능력으로 근본없는 마구잡이 펀치였을지라도 나름 파괴력 있는 타격능력도 갖췄던 것에 비해[8], 콜먼은 마크 커와 함께 스탠딩 타격 고자 수준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또 다른 한가지는 룰의 변경. NHB 성격이 강했던 초기 룰에서는 박치기, 눈찌르기, 니킥 등을 마음껏 쓸 수 있었으나 안전성을 이유로 이러한 기술들이 금지되면서 콜먼의 무기가 하나 둘씩 사라져갔던 것도 심각했다. 특히 박치기는 별다른 수련을 하지 않은 초심자도 그라운드에서 위력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기술이었는데, 주짓수 테크닉조차 장착하지 않은 순수 아마추어 레슬러였던 콜먼이 그라운드에서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다. 그러나 UFC에서 박치기가 금지되자 콜먼은 치명타를 맞았는데, 눕혀놓고도 딱히 할 수 있는게 없어지고 오히려 상대의 하위 발악에 자신의 체력만 빠지게 됐던 것이다. 여기에 스탠딩 전환이 되면 샌드백이 된 것은 덤. 실제로 박치기 금지 이후부터 UFC에서 주짓수를 장착한 타격가들에게 잡히면서 급격히 몰락했던 것이 콜먼이다. 이후 4점 니킥이 허용됐던 프라이드로 이적하면서 다시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했는데, 4점 니킥은 순수 아마추어 레슬러가 어설픈 주짓수를 장착한 타격가를 그라운드에서 확실히 제압 할 수 있는 무기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문제점인 노쇠화를 들 수 있다. 사실 콜먼은 MMA 판에 뛰어들었을때도 이미 운동선수로는 제법 나이가 있던 상태였다. UFC 데뷔 즈음에 이미 서른초반이었으며, 마지막 전성기였던 프라이드 초창기에도 서른 후반에 접어들었던 선수이다. UFC 복귀 당시에는 이미 40대 중반을 넘은 노장으로 다른 선수들이라면 진작 은퇴했어도 이상하지 않았었던 것. 게다가 콜먼의 유일한 무기였던 묻지마 저공테클은 이미 아마레슬러 시절에 기술적으로 완성되어 있었으며 특유의 육체빨 + 속도로 알면서도 아무도 못막던 기술[9]이었지, MMA적으로 다듬어진 기술도 아니었다. 그 태클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됐던 것은 전반적인 선수들의 기술이 발전했음에도 예전같이 아마 레슬링 스킬로만 싸운 문제도 크지만,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미 늙어버린 콜먼이 너무 느려지고 약해진 면도 있는 것이다. 흐르는 세월앞에 장사는 없다.가 답이다.


5. 딸내미바보[편집]


슬하에 둘이 있는데 효도르와의 2차전 경기를 보러 왔었다. 콜먼이 패하자 아버지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는데 효도르는 이걸 보고 매우 불편해 했다. 아이들을 링사이드에 대동한 것은 가혹한 일이라며 관중들에게도 욕을 바가지로 먹었고 '아이들을 흥행에 이용했다'는 이유로 PRIDE도 함께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이에 대해 필 바로니는 기자회견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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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먼이 아이들에게 자신의 시합을 보여준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의미있는 일이다. 그는 계속 일본에 있었고 아이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 이번에 드디어 그 기회를 얻어 자신의 싸우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불행히도 경기에서는 졌지만 아버지가 많은 팬들의 성원을 받으며 링에 오르는 모습을 보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자기 아버지가 맞는 모습을 보는 것은 분명 아이들에게 괴로운 일이지만 언젠가는 아버지가 느낀 아픔을 이해하고 자신들도 강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할 것이다. 나는 그런 콜먼의 결단을 마음속으로 존경한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MMA 단체들은 흥행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한다는 것과 콜먼이 딸들을 대단히 아낀다는 것이다. 2019년 기준, UFC를 보면 위와 비슷한 이유로 자녀들을 대동하고 오는 파이터들이 꽤 늘었고, 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 어떻게 보면 시대를 앞서간 남자.


6. 기타[편집]


아마추어 자유형 레슬링 선수로 세계선수권 준우승, 바르셀로나 올림픽 7위에 입상한 기록이 있다. 커트 앵글과 시합해서 이긴 적도 있다고 한다. 물론 대체적으로 커트 앵글이 압도적이긴했다.

명문 MMA 체육관인 팀 해머하우스의 수장으로 케빈 랜들맨, 필 바로니 등 우수한 선수들을 배출했다. 하지만 그의 몰락과 함께 해머하우스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콜먼의 UFC 복귀는 생계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같은 1세대 파이터인 커투어가 영악하리만큼 사업에서도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씁쓸해지는 대목. 2011년에는 PRIDE GP 우승 당시 착용했던 글러브를 경매에 부쳤다.

파일:attachment/마크 콜먼/ff.jpg
일본에서 활동하던 시절 바나나 광고에 출연한 적이 있다.

마크 커의 대학교 레슬링부 선배로 커를 MMA로 끌어들인 장본인이다. 양 선수의 PRIDE 진출도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고 콜먼이 커의 세컨을 봐준 적도 있다. 커를 주인공으로 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스매싱 머신'에서도 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콜먼은 이 영화에서 자신이 현역 시절 약물을 복용했음을 자백했다.

술집기도, 경호원등의 일을 하다 그의 레슬링 경력을 눈여겨본 ufc의 에이전트에 스카웃되어 mma에 발을 들이게 된다.

PRIDE 2000 GP에서 우승했을 때 기뻐 날뛰다가 링사이드에서 넘어지기도 했다.



효도르와의 2차전에서 완패한 후 효도르에게 딸 앞에서 체면 차리게 해달라는 농담과 함께(옆에 서 있는 소녀가 바로 그의 딸이다) 얼굴을 1대만 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효도르가 웃으며 허락하자 턱을 가볍게 2대 때렸다.



어쨌든 2번이나 완패한 후에는 효빠가 되어 버렸다. 당시 에밀리아넨코 형제는 러시안 탑 팀에서 대전료를 갈취당하며 고생하고 있었는데 콜먼이 "효도르는 실력에 비해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라는 발언을 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후 효도르는 RTT를 떠나 레드 데빌로 이적하여 M-1의 핵심인물 중 한명으로 부상한다. 반대로 당시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던 콜먼은 생계를 걱정해야 하니 이 또한 아이러니.

UFC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영화배우 마동석이 그의 개인 웨이트 트레이너로 일한 적이 있었다. 마동석과 사석에서 "년간 5딸라라는 거금을 줄테니 트레이너 말고 선수나 해라" 하고 농담하던 사이였다.

선수 은퇴이후 양쪽 고관절이 모두 엉망이 되어 인공관절 수술을 받았으나 몆년뒤 감염과 부작용으로 관절이 빠지는 상황을 겪어 재수술을 해야했는데 이때 너무나 많은 수술비를 감당할수가 없어서 자신의 트로피와 글러브까지 경매로 내놓고 크라우드 펀딩까지 해야 했다고 한다. 양쪽 고관절이 이렇게 된건 오랜 선수생활과 오버 트레이닝도 있지만 도핑 약물 부작용의 영향도 있었을것으로 보인다.

2021년 근황으로 팀 해머하우스는 힘든 시기도 많았지만 꾸준히 운영하고 있다. 현재 원년 멤버로는 웨스 심스, 브랜든 리 힝클만 남아서 수석 코치로 일하고 있다.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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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안구공격이 공식적인 반칙으로 규정되었으나 실제 시합에서의 제제는 명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슷한 사례로 호흡기관에 대한 공격이 있는데, 이는 2010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유효하다.[2] 후지타는 부상으로 2초만에 기권했는데 이때문에 체력을 온전할 수 있었다.[3] 다만 콜먼과 달리 이고르는 개리 굿리지, 사쿠라바 카즈시와 싸우면서 체력이 고갈된 상태였기 때문에 콜먼과 이고르의 재대결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4] 이때 일부 팬들은 케빈 랜들맨이 저 자리에 있었다면 실바나 닌자 둘 중 하나는 얼굴이 없어졌을 거라는 농담을 하곤 했다.[5] 관중석에서 찍은 화면이며 흔들림이 많아 실바가 달려드는 부분을 제외하면 제대로 보기는 힘들다. 닌자와 코데이로가 때리는 부분은 영상 마지막에 나온다.[6] 실제 영상을 보면 콜먼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쩔 줄 몰라하면서 "apologize"라는 단어만 수십번 말한다.[7] 사실 사건 관계자들을 출장정지라도 시키면 PRIDE가 망한다.[8] K-1 입식타격 출신 미르코 크로캅을 펀치로 다운시킨 후 파운딩으로 초살승을 거둔 적이 있을 정도다.[9] 파운딩 시의 관절기 카운터등에 당하는 것은 이 이후의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