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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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보시의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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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하키 명예의 전당 로고.svg
하키 명예의 전당 헌액자(1991)







파일:NHL 로고.svg NHL 관련 수상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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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NHL 로고.svg 1980, 1981, 1982, 1983 스탠리 컵 파이널 우승



파일:NHL 로고.svg NHL All-Star Game(1978, 1980, 1981, 1982, 1983, 1985, 1986)



파일:NHL 로고.svg NHL First All-Star Team(1981, 1982, 1983, 1984, 1986)



파일:NHL 로고.svg NHL Second All-Star Team(1978, 1979, 1985)










국제 대회 수상 이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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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Canada Cup 캐나다 국가대표팀 금메달




파일:NHL 로고.svg 보유 중인 NHL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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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 50골 시즌 최장 기록(9시즌 연속)
최다 50골 시즌(9시즌)[1]
최다 60골 시즌(5시즌)[2]
경기당 골 득점 최고 기록(.762골)[3]
단일 스탠리 컵 플레이오프 최다 파워플레이 골(9골)[4]
최다 연속 해트트릭 경기(3경기)[5]
최단 경기 정규시즌 100골 달성(129경기)최단 경기 정규시즌 400골 달성(506경기)
최단 경기 정규시즌 500골 달성(647경기)



파일:뉴욕 아일런더스 로고.svg 뉴욕 아일런더스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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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 시즌 최다 골(69골, 1978-79)
단일 시즌 최다 포인트(147포인트, 1981-82)
단일 시즌 최다 이븐 스트렝스 골(47골, 1981-82)
단일 시즌 최다 파워플레이 골(28골, 1980-81)
단일 시즌 최다 결승골(11골, 1983-84)
단일 시즌 최다 샷(315회, 1980-81)
단일 시즌 최다 해트트릭(9회, 1980-81)
최다 골(573골)
최다 이븐 스트렝스 골(385골)
최다 파워플레이 골(180골)
최다 결승골(80골)
최다 해트트릭(39회)




파일:마이크 보시.webp

뉴욕 아일런더스 No.22
마이클 딘 보시
Michael Dean Bossy

출생
1957년 1월 22일
[[캐나다 자치령|

캐나다 자치령
display: none; display: 캐나다 자치령"
행정구
]]
퀘벡주 몽레알
사망
2022년 4월 15일 (향년 65세)
퀘벡주 로즈메르
국적
[[캐나다|
캐나다
display: none; display: 캐나다"
행정구
]]

신체
183cm, 84kg
포지션
라이트윙

오른쪽
드래프트
1977년 NHL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15번 (NYI)
1977년 WHA 드래프트 5라운드 전체 44번 (IND)[1]
소속
뉴욕 아일런더스 (1977~1987)

1. 개요
2. 선수 경력
2.1. 데뷔 이전
2.2. 뉴욕 아일런더스의 왕좌를 만들다
2.3. 왕조의 건설
2.4. 왕좌를 넘겨주다
2.5. 은퇴
3. 은퇴 이후
4. 사망
5. 기타
6. 연도별 기록
6.1. 정규시즌
6.2. 플레이오프



1. 개요[편집]


캐나다의 前 아이스하키 선수.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커리어동안 573골 553어시스트 1126포인트와 4년 연속 스탠리 컵 파이널 우승을 거두면서, 단기간 임팩트로는 바비 오어와 함께 최고 수준의 선수.


2. 선수 경력[편집]



2.1. 데뷔 이전[편집]


10남매 대가족 중 다섯 째로 태어난 보시는 우크라이나계 아버지와 프랑스-영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2세 때 학교 체육시간 때 멀리뛰기를 하다가 무릎 부상을 당했고, 이 때의 무릎 부상이 훗날 그의 하키 인생 내내 발목 잡으며 경력을 조기에 끝니게 만드는 원흉이 되었다. 15세의 나이로 퀘벡주의 주니어 리그인 QMJHL에서 다섯 시즌 동안 309골과 532포인트로 폭격하였고, 532포인트는 QMJHL 최고 기록, 309골은 캐나다의 모든 주니어 리그를 통틀어 최고기록임에도 앞서 당한 무릎 부상으로 인한 유리몸 논란으로 인해 NHL팀들의 저평가를 받았다.


2.2. 뉴욕 아일런더스의 왕좌를 만들다[편집]


파일:마이크 보시 현역.jpg
주니어 리그를 폭격하고 참가한 1977년 드래프트에서 보시에 대한 구단들의 평가는 냉담했다. 저마다 다른 이유로 보시를 패스했고 전체 5순위였던, 현재는 사라진 클리블랜드 바론스가 관심을 표하긴 했었지만 앞선 계약 회의에서 보시의 대리인이 더 높은 요구를 한 탓에 포기했다. 결국, 두 번이나 거른 뉴욕 레인저스토론토 메이플 리프스를 포함 도합 12팀이 그를 패스하면서, 전체 15번 순위였던 뉴욕 아일런더스가 고민 끝에 그를 지명하면서 입단하게 되었는데, 보시는 대담하게도 50골을 때려박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그를 거른 12팀이 땅을 치고 후회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2]

입단과 동시에 브라이언 트로티에와 클라크 길리스와 일명 '트리오 그랑드(Trio Grande)'라고 불리는 라인을 형성하였고, 데뷔 시즌부터 53골로 루키 정규시즌 최다 골을 갈아치워버리며[3] 여유롭게 칼더 메모리얼 트로피를 가져갔다.

1978년 플레이오프 쿼터파이널에서 립스 상대로 선전하던 중, 립스의 제리 버틀러의 백체킹으로 목을 다쳐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7차전에 뒤늦게 복귀했지만, 결국 립스가 7차전을 가져가면서 데뷔 첫 시즌의 모험은 일찍 마치게 되었다.

트리오 그랑드의 멤버들은 보시의 2년차인 1978-79 시즌에도 여전히 강력했고, 12월 23일에는 옆동네 팀을 9:4로 떡실신시키면서 세 명이서 무려 17포인트를 합작했다. 2월 19일에는 NHL 데뷔 129경기만에 100골을 달성하면서, NHL 최단 경기 정규시즌 100골 달성이라는 미친 득점 페이스를 자랑했다.

플레이오프에서 만난 시카고 블랙호크스에서 한 경기 4포인트로 아일스 프랜차이즈 기록을 또 하나 추가하는가 하면, 2차전 오버타임 결승골 포함 시리즈동안 5골을 기록하면서 팀을 캐리했다. 하지만 그 다음 라운드에서 만난, 정규시즌에서는 두드려팼던 레인저스에게 트리오 그랑드 라인이 집중 견제를 당하며 2승 4패로 좌절되었다.


2.3. 왕조의 건설[편집]


파일:마이크 보시 스탠리 컵.webp
루키계약이 만료됨에 따라 1979-80 시즌을 앞두고 2년 $500,000의 연장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팀은 첫 21경기에서 6승만 거두는 등 최악의 스타트를 끊었고, 트리오 그랑드에서 길리스를 떼어냈지만, 트로티에와 보시 이외에는 삽을 푸면서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의 분전으로 정규시즌 절반이 지난 41경기 때가 되어서야 5할을 달성, 트레이드 마감기한에는 버치 고링을 영입하면서 길리스와 1라인에서 활약, 보시와 트로티에가 2라인에서 활약하면서 고링이 합류한 3월 10일 이후로 무패를 달성하면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다. 플레이오프에서도 필라델피아 플라이어스와의 스탠리 컵 파이널에서 무려 11포인트를 기록하며 활약했고, 플레이오프 전체로도 트로티에에 이은 2위인 23포인트를 기록하며 개인 및 팀의 창단 첫 스탠리 컵 파이널 우승을 거두며 왕조의 막을 열어젖혔다.

1980-81 시즌에는 로스앤젤레스 킹스의 찰리 심머와 함께 1944년 모리스 리샤르의 50경기 50골 대기록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1월 24일 두 선수는 정규시즌 50경기를 치렀다. 먼저 낮경기를 치른 심머는 해트트릭을 기록하고도 49골에 그쳤지만, 보시는 저녁 경기에서 노르디크 드 케벡을 상대로 정규경기 5분 남았을 때와 89초 남았을 때 각각 골을 추가하면서 리샤르의 대기록에 타이를 이뤘다.[4] 정규시즌 최종 68골과 NHL 단일 시즌 최다 해트트릭(9회) 및 단일 시즌 경기당 골(.785골) 최고 기록을 작성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무려 17골을 때려박으며, 당시 기준 정규시즌+플레이오프 최다 기록(85골)을 갈아치워 리핏에 성공하였다.

2년 계약이 만료된 보시는 아일스와 6년 연장 계약을 맺으며 시즌 개막을 치렀고, 1982년 올스타전에서 멀티골로 우승시키며 MVP에 선정되는 한편, 정규시즌에서 64골 83어시스트 147포인트로 라이트윙 정규시즌 최다 어시스트 및 포인트 기록을 또 하나 갈아치웠다. 디비전 결승에서 만난 레인저스와의 시리즈에서 첫 4경기에서 4골을 넣는 등 4승 2패로 3년 전의 플레이오프에서의 굴복을 설욕했다. 파이널을 앞두고 상대팀 밴쿠버 커넉스 측에서는 적극적인 바디체킹으로 보시를 견제할 것을 공언했지만, 파이널 1차전부터 5분이 남지 않은 상황에서의 동점골과 오버타임 역전 결승골을 포함 해트트릭을 기록하면서 하드캐리했고, 2차전에서도 파워플레이 골을 기록하며 팀의 6:4 승리를 이끌었으며, 3차전과 4차전에도 골을 때려박으며 스윕으로 가뿐하게 쓰리핏에 성공했다. 보시는 고질적인 무릎 부상을 안고도 플레이오프에서 17골 10어시스트 27포인트로 커리어 첫 콘 스마이스 트로피를 수상했다.

1982-83 시즌에는 60골 58어시스트 118포인트로 마치면서, NHL 최초로 셋 시즌 연속 60골을 달성한 선수가 되었다.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워싱턴 캐피털스에 이어 보스턴 브루인스까지 꺾고 4년 연속 스탠리 컵 파이널 진출에 성공했다. 브루인스와의 시리즈에서 9골로 플레이오프 시리즈 최다골 기록을 경신했다.[5] 파이널에는 웨인 그레츠키를 필두로 부상하고 있던 에드먼턴 오일러스를 상대하여, 지난 시즌에 이어서, 본인이 직접 우승을 결정짓는 결승골[6]을 넣으며 4년 연속 우승을 거두었다.


2.4. 왕좌를 넘겨주다[편집]


무릎과 엉덩이 부상으로 고생하던 1983-84 시즌, 19경기 연속 포인트 기록이라든가 506경기 출장만에 400골을 기록하는 등 다채로운 기록과 함께 정규시즌 51골로 일곱 시즌 연속 50골을 기록하게 되었다. 1984년 스탠리 컵 파이널에 진출하면서, 레 카나디앵 드 몽레알에 이어 역대 두 번째 기록이었지만, 편도선염으로 1차전에는 결장했고 이전 3년간 파이널에서 각각 17골을 폭격했던 보시는 침묵하면서 웨인 그레츠키에드먼턴 오일러스에게 왕좌를 넘겨주었다.

1984-85 시즌, 트로티에가 없는 와중에도 23경기 25골이라든가, 41경기 37골 39어시스트 76포인트로 커리어하이급 페이스로 질주했지만, 시즌 최종 76경기 58골 59어시스트 117포인트로 마치면서 8년 연속 50골 시즌을 보냈다. 플레이오프에서의 아일스는 더 이상 절대강자가 아니였으며, 1라운드에서 캡스는 겨우 잡아냈지만, 필라델피아 플라이어스와의 시리즈에서는 보시가 무득점으로 묶이면서 피스윕으로 광탈하게 되었다.

1985-86 시즌 동안 647경기만에 500골의 금자탑을 쌓았고, 시즌 동안 커리어 1000포인트 및 9년 연속 50골 시즌, 커리어 다섯 번째 60골 시즌을 보내는 등의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1라운드는 통과한 지난 시즌과는 달리, 1라운드조차 뚫지 못하고 팀이 광탈했지만, 커리어 83호 플레이오프 골을 기록하면서 NHL 신기록을 세웠다.[7]

1986-87 시즌에는 그동안 묵과해왔던 무릎 부상이 심각해지면서 허리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몸상태가 말이 아닌 와중에도 그의 실력은 여전했고, 10 시즌 연속 50골 시즌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하기를 원했지만, 의사들의 거듭된 경고와 몸이 보내는 신호를 이겨내지 못하며 38골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더욱 문제가 되던 것은 보시의 몸상태를 이용하려는 상대팀들의 악랄한 바디체킹의 먹잇감이 되었다는 사실. 결국, 플레이오프에서도 바디체킹으로 왼쪽 무릎이 부러지면서 리타이어당했다.


2.5. 은퇴[편집]


1987-88 시즌을 앞두고 보시는 트레이닝 캠프에 참가할 예정이었지만, 허리 통증은 나날이 심화되었고 스케이트를 신거나 끈을 묶기 위해 상체를 구부리는 것조차 하기 힘든 지경이 이르며 신체 검사를 받았다. 의사들은 보시에게 허리디스크 진단을 내렸지만, 당시 기술로서는 수술로 고칠 수 없었다. 아일스에서는 보시를 햅스로 보내주려 했으나, 보시가 거절하면서 무산되었다. 이듬해, 웨인 그레츠키를 영입한 킹스의 제안을 받았지만, 1988년 10월에 10년이라는 짧은 커리어를 불태우고 30세라는 이른 나이에 은퇴하게 되었다.

은퇴 이후 1992년 3월 3일, 드니 포트뱅에 이어 뉴욕 아일런더스의 두 번째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3. 은퇴 이후[편집]


은퇴 이후, 하키는 고사하고 운동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 보시는 자신의 에이전트와 사업을 시작했다. 다양한 사업 및 노르디크 드 케벡의 아나운서 및 1994년에서 1996년까지 몬트리올의 방송에 페널로 참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은퇴한 지 10년이 넘도록 자신을 불러준 팀이 없는 것에 대해 섭섭한 감정을 내비쳤고[8], 2006년에야 뉴욕 아일런더스의 프런트에 합류하면서 꿈(?)을 이뤘다.

2014년 9월, 뉴욕 아일런더스를 중계하는 MSG 네트웍스에 경기 분석가로, 2015년 9월에는 NHL의 프랑스어 중계를 송출하는 TVA의 해설자로 합류했다.


4. 사망[편집]


2021년 10월 19일, 보시가 폐암 진단을 받았음을 발표되었다. 이듬해인 2022년 4월 15일, 로즈메르에서 폐암으로 향년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공교롭게도, 한 때 라이벌이었던 기 라플뢰르 역시 정확히 일주일 뒤인 22일에 똑같이 폐암으로 사망했다.


5. 기타[편집]



  • 4년 연속 우승을 거뒀음에도 자신과 뉴욕 아일런더스가 저평가당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불만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1983년에 웨인 그레츠키에드먼턴 오일러스를 스윕으로 떡실신시키고 4년 연속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남겼음에도, 사람들이 오일러스와 그레츠키에만 관심을 주는 것에 대해 '적대감'까지 느껴질 정도였다고.


6. 연도별 기록[편집]



6.1. 정규시즌[편집]


정규 시즌 기록
소속
시즌
GP
G
A
P
+/-
PIM
PPG
PPP
SHG
SHP
GWG
OTG
S
S%
FO%
NYI
1977-78
73
53
38
91
31
6
25
40
0
0
4
0
235
22.55
-
1978-79
80
69
57
126
63
25
27
50
0
0
9
0
279
24.73
-
1979-80
75
51
41
92
28
12
15
31
0
0
8
0
244
20.9
-
1980-81
79
68
51
119
38
32
28
44
2
2
10
0
315
21.59
-
1981-82
80
64
83
147
69
22
17
47
0
0
10
0
301
21.26
-
1982-83
79
60
58
118
27
20
19
40
0
0
7
0
274
21.9
-
1983-84
67
51
67
118
65
8
6
28
0
0
11
0
246
20.73
-
1984-85
76
58
59
117
37
38
14
28
4
4
7
1
285
20.35
-
1985-86
80
61
62
123
30
14
21
39
1
2
9
1
302
20.2
-
1986-87
63
38
37
75
-8
33
8
31
1
1
5
2
226
16.81
-
NHL 통산
(10시즌)

752
573
553
1126
380
210
180
378
8
9
80
4
2707
21.2
-

6.2. 플레이오프[편집]


플레이오프 기록
소속
시즌
GP
G
A
P
+/-
PIM
PPG
PPP
SHG
SHP
GWG
OTG
S
S%
FO%
NYI
1977-78
7
2
2
4
3
2
0
0
0
0
1
1
29
6.9
-
1978-79
10
6
2
8
5
2
2
3
0
0
1
1
25
24
-
1979-80
16
10
13
23
-4
8
6
15
0
0
1
0
55
18.18
-
1980-81
18
17
18
35
14
4
9
20
0
0
3
0
69
24.64
-
1981-82
19
17
10
27
7
0
6
12
0
0
3
1
62
27.42
-
1982-83
19
17
9
26
7
10
6
11
0
0
5
0
78
21.79
-
1983-84
21
8
10
18
5
4
2
7
0
0
3
0
62
12.9
-
1984-85
10
5
6
11
1
4
2
4
0
0
0
0
32
15.63
-
1985-86
3
1
2
3
-2
4
0
1
0
0
0
0
14
7.14
-
1986-87
6
2
3
5
-2
0
2
3
0
0
0
0
10
20
-
NHL 통산
(10시즌)

129
85
75
160
34
38
35
76
0
0
17
3
436
19.5
-

[1] 인디애나폴리스 레이서스[2] 햅스윙스를 이끈 대명장 스코티 보우먼도 후회한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었다.[3] 1992-93 시즌에 테무 셀래네76골로 경신했다.[4] 모리스 리샤르는 이에 대한 축하한다는 전보를 부쳤다.[5] 이후, 9골 이상 기록한 선수들이 늘었으며, 현재는 야리 쿠리가 1984-85 시즌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기록한 12골이 최고 기록이다.[6] 2년 연속 파이널 우승을 결정하는 결승골을 넣은 건 역대 두 번째 기록.[7] 물론, 현재는 웨인 그레츠키122골로 경신한 상태이며, 보시의 통산 85골 위로는 2위 마크 메시에(109골), 야리 쿠리(106골), 브렛 헐(103골), 글렌 앤더슨(93골)이 있는 상태. 헐을 제외하면 전부 오일러스 왕조 멤버들이다.[8] 스포츠 일러스트레이드와의 인터뷰에서 고향팀 햅스에 전화를 걸어 자신이 코치가 아니여도 구단에 도움을 주고싶다고 의사를 피력했으나, 그대로 씹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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