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무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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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무시나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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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92 MLB 올스타전 로고.png파일:1993 MLB 올스타전 로고.png파일:1994 MLB 올스타전 로고.png파일:1997 MLB 올스타전 로고.png파일:1999 MLB 올스타전 로고.png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1992
1993
1994
1997
1999



파일:MLB 로고.svg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Mussina_HOF.jpg
마이크 무시나
헌액 연도
2019년
헌액 방식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76.70% (6회)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96년 ~ 1999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투수 부문 골드 글러브
마크 랭스턴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마이크 무시나
(볼티모어 오리올스)


케니 로저스
(텍사스 레인저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2001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투수 부문 골드 글러브
케니 로저스
(텍사스 레인저스)

마이크 무시나
(뉴욕 양키스)


케니 로저스
(텍사스 레인저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2003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투수 부문 골드 글러브
케니 로저스
(텍사스 레인저스)

마이크 무시나
(뉴욕 양키스)


케니 로저스
(텍사스 레인저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2008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투수 부문 골드 글러브
요한 산타나
(미네소타 트윈스)

마이크 무시나
(뉴욕 양키스)


마크 벌리
(시카고 화이트삭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95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다승왕
지미 키
(뉴욕 양키스)

마이크 무시나
(볼티모어 오리올스)


앤디 페티트
(뉴욕 양키스)

볼티모어 오리올스 등번호 42번
론 키틀
(1990)

마이크 무시나
(1991)


셔먼 오반도
(1993~1995)
볼티모어 오리올스 등번호 35번
데이브 갤러거
(1990)

마이크 무시나
(1992~2000)


조시 타워스
(2001~2002)
뉴욕 양키스 등번호 35번
클레이 벨린저
(1999~2000)

마이크 무시나
(2001~2008)


데이브 아즈마
(2012)




파일:Mike_Mussina_Baltimore_Orioles.webp

마이크 무시나
Mike Mussina

본명
마이클 콜 무시나
Michael Cole Mussina
출생
1968년 12월 8일 (55세)
펜실베이니아 주 윌리엄스포트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학력
몬투어스빌 고등학교 - 스탠퍼드 대학교
신체
188cm / 83kg
포지션
선발 투수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1987년 드래프트 11라운드 (전체 273번, BAL)
1990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20번, BAL)
소속팀
볼티모어 오리올스 (1991~2000)
뉴욕 양키스 (2001~2008)


1. 개요
2. 선수 시절
2.1. 아마추어 시절
2.2. 메이저리그
2.2.2.1. 2001년
2.2.2.2. 2002년
2.2.2.3. 2003년
2.2.2.4. 2004년
2.2.2.5. 2005년
2.2.2.6. 2006년
2.2.2.7. 2007년
2.2.2.8. 2008년
3. 피칭 스타일
4.1.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5. 연도별 성적
6. 기타
7. Mr. Almost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미국 국적의 볼티모어 오리올스, 뉴욕 양키스의 전 투수. 별명은 성에서 딴 대로 Moose이다.[1]

1990년대 스테로이드 시대에 활약했던 투수들 중 한 명으로 당대 최고의 투수들 중 한 명이었다.

또한, 스탠퍼드 대학교 경제학 학사라는 학력까지 가진 MLB 역사상 보기드문 엄친아 투수이다. 그리고 그 학력에 어울리는 스마트한 유형의 잘생긴 외모는 덤.

또한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불운의 아이콘이자 콩라인의 상징이기도 하다.[2]

통산 성적은 270승 153패, 3562.2이닝, 3.68 ERA, 2813삼진, 785볼넷, K/9 7.1, BB/9 1.98, K/BB 3.58, HR/9 0.94, 57완투, 23완봉을 기록했다.


2. 선수 시절[편집]



2.1. 아마추어 시절[편집]


일찍이 고등학교 때부터 야구에 두각을 나타냈으며 고등학교 때 기록은 24승 4패에 평균 자책점은 0.87이였다. 또한 축구와 농구도 수준급이었다고 한다.[3] 이후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지명되었으나 입단을 대학 졸업 후로 보류하고 당시 고등학교 전교 2등의 성적으로 스탠퍼드 대학교에 진학한다.[4] 무서운 점은 재학 당시 전액 장학금으로 대학을 다녔다는 점과 3년반 만에 조기 졸업,[5] 대학교 진학 후에도 그 실력은 상승세를 보였으며 졸업 후 바로 오리올스에 입단하였다. 오리올스에서도 애지중지하던 투수로, 마이너에서조차 불펜 투수로 등판한 적이 없고 전부 선발 투수로 출전했다.[6]


2.2. 메이저리그[편집]



2.2.1. 볼티모어 오리올스[편집]


1991년 8월 4일 시카고 화이트삭스 전에 선발 등판하며 빅 리그에 데뷔했다. 7.2이닝 1실점으로 호투했으나 패전 투수가 되었다. 이후 8월 14일 텍사스 레인저스 전에서 8이닝 10k 2실점 호투를 통해 통산 첫 승을 기록한다.

1992년 본격적으로 풀 타임을 뛰며 18승 5패에 2.54의 자책점을 기록하며(당시 경기영상) 돌풍을 일으켰으나 사이 영 상에선 4등을 하며 고배를 마셨다.[7]

파일:external/60ft6in.com/Mike-Mussina.jpg

하지만 이후에도 15승을 넘나드는 활약을 보이며 오리올스의 에이스 역할[8]을 맡았다.


2.2.2. 뉴욕 양키스[편집]


파일:external/sportsunbiased.com/mike-mussina.jpg
2000년 시즌 후 FA자격을 얻은 무시나는 뉴욕 양키스와 6년 8850만 달러 계약을 채결한다. 이후 꾸준히 뉴욕 양키스의 에이스 역할을 맡았다.


2.2.2.1. 2001년[편집]

시즌 17승 11패와 평균자책점 3.15, 탈삼진 214개, 완봉 3번, 탈삼진/볼넷 비율(5.10개) 등 4개 분야에서 리그 2위, 9이닝당 탈삼진(8.42개)과 완투(4번)에서 리그 5위를 하였다. 추가로 그는 2아웃 득점권 상황에서 피안타율이 .216로 매우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을 보였다. 이해 사이영상 투표 5위에 올랐으며 이는 양키스에서 거둔 가장 높은 순위이다. 삼진, 이닝, ERA, WAR 등 여러 분야에서 실제 수상자인 로저 클레멘스를 앞질렀으며, 2010년대 이후로 바뀐 투표 성향이었다면 수상이 유력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2001년 월드 시리즈에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를 상대로 1차전과와 5차전 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11이닝에서 4.09의 방어율과 1 패만을 기록했다.

2.2.2.2. 2002년[편집]

18승을 거두며 아메리칸 리그 2위, 182개의 탈삼진과 9이닝당 탈삼진(7.60개)에서 리그 3위을 거둔다.


2.2.2.3. 2003년[편집]

9이닝당 탈삼진 8.18개와 탈삼진/볼넷 비율 4.88로 리그 3위를 기록한다. 17승은 리그 5위, 평균자책점 3.40은 리그 8위에 해당하는 성적이었다.

2003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7차전에서 양키스 선발 투수 로저 클레멘스가 3이닝 4실점 후 강판되자 커리어 첫 불펜 등판에 나섰다.[9]


2.2.2.4. 2004년[편집]

12승 9패 평균자책점 4.59로 시즌을 마감했다. 탈삼진 195개는 리그 4위, 9이닝당 볼넷은 2.19개로 8위였다.


2.2.2.5. 2005년[편집]

13승 8패 4.41 ERA를 기록했고 9이닝당 탈삼진은 7.11개로 리그 7위를 기록했다.


2.2.2.6. 2006년[편집]

32경기에 등판하여 197⅓이닝을 소화하며 15승 7패 탈삼진 172개를 기록했다. 9이닝당 볼넷 1.60개로 커리어 하이 기록을 세우며 리그 1위, 피출루율 0.279로 리그 2위, 0.241의 피안타율과 탈삼진/볼넷 비율은 4.91로 리그 3위, 평균자책점은 3.51로 리그 4위를 기록하는 등 우수한 시즌을 보냈다.

6월 25일 플로리다 말린스 전에서 코디 로스를 상대로 통산 2500번째 탈삼진을 기록했다. 또한 아메리칸 리그 투수로는 최초로 15년 연속 10승 이상을 기록한 투수가 되었다.


2.2.2.7. 2007년[편집]

양키스 소속으로 100번째 승리를 거두며 역대 9번째로 서로 다른 2개 팀에서 100승을 거둔 투수가 되었다.[10] 하지만 전체적으로 부진한 시즌이었으며 이안 케네디에게 밀려 선발진에서 밀려나는 등 이적 후 처음으로 규정 이닝을 넘기지 못했다.

특히 노쇠화로 인한 패스트볼 구속 하락이 부진의 원인이 되었다. 무시나는 마이너를 포함해서 전 경기를 선발 투수로 등판했는데 2007년 시즌 중반에 성적 부진으로 인해 불펜 계투로 잠깐 돌린 적이 있고, 딱 한 경기 불펜 투수로 등판했는데[11], 그게 무시나가 프로가 되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불펜 투수로 등판한 경기가 되었다.[12] 부진의 이유는 패스트볼 구속이 너무 떨어져서 변화구랑 구속 차이가 크게 안 난다는 게 핵심적 문제였는데 그는 이 극복하기 힘든 문제를 변화구 구속을 낮춘다는 획기적방법으로 타개하는 데 성공했다.

9월 23일 토론토 블루제이스 전에서 7이닝 3실점 호투로 시즌 11승이자 통산 250승을 달성했다.


2.2.2.8. 2008년[편집]

2008년 시즌 초반에도 부진이 이어지자 공동 구단주 자격으로 있던 행크 스타인브레너가 '무시나는 제이미 모이어처럼 던질 필요가 있다' 라며 듣기에 따라서 빅 리그 짬밥이 20년 가까이 되는 베테랑 투수에게 상당히 치욕적인 말을 한 바가 있는데 이에 '나에겐 왼손잡이용 글러브가 없다'고 간단히 응수했다. 왕젠민을 더불어 그와 앤디 페티트를 제외한 모든 선발 로테이션 멤버가 부상으로 들락날락하는 최악의 팀 상황에서도 꾸준히 로테이션을 지키며 분투, 선수 생활 최초이자 최후로 20승을 달성하고 몇 시즌만 더 던지면 통산 300승이 유력한 상황에서 팀의 재계약 제안을 뿌리치며[13][14] 깔끔하게 은퇴해버리면서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무시나는 통산 270승/2,813 탈삼진을 기록했는데, 실제로 3년 정도 더 뛰었다면 300승 클럽과 3,000K 클럽에 동시에 가입한 메이저리그 역대 11번째, 실질적으로는 10번째[15] 투수가 될 가능성이 충분했기 때문. 아무리 야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무시나가 3년 정도 더 뛰면서 300승과 3,000K를 모두 달성하고 은퇴했더라면 명전 입성은 당연한 것이고 첫 턴 입성도 노릴 수 있었을 것이다.[16]

2008년 11월 20일, 무시나는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무시나는 1966년 샌디 쿠팩스 이후 20승을 거둔 직후 은퇴한 첫번째 투수이자 20승 직후 은퇴한 유일한 우완 투수이다.


3. 피칭 스타일[편집]


파일:attachment/마이크 무시나/B9AB1.gif
결정구였던 너클 커브



전성기 시절 무시나는 90마일 중반대에 육박하는 패스트볼너클 커브, 자신만의 고유한 그립을 잡고 던지는 체인지업으로 타자를 상대하는 파워 피쳐였으며,[17] 그이외에 투심, 커터, 슬라이더도 간간히 던졌다. 나이를 먹고 빠른공의 평균 구속이 88~89마일 정도로 떨어지면서 상황에 따라 완급조절이나 팔각도 조절 같은 지능적인 투구로 상대 타자를 현혹하는 타입으로 변신에 성공하며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커리어 말년을 보냈다. 릴리즈 후 살짝 앞으로 뛰는 특유의 투구폼이 인상적.

4. 명예의 전당 입성[편집]


연도
득표율(%)
2014
20.3
2015
24.6
2016
43.0
2017
51.8
2018
63.5
2019
76.7
  • 첫 해인 2014년 20.3%로 무난한 출발을 했다. 몇 년간은 쟁쟁한 선수들이 올라오기 때문에 이 정도 득표율에서 장기 투숙할 것으로 예상됐다.

  • 2년차인 2015년에도 24.6%의 득표율을 보였다. 승산은 있어 보이지만 자격유지 한도가 10년으로 단축되었기 때문에 쉽진 않을 것으로 보였다.

  • 2016년에는 43%로 두 배 가까이 수직상승 하면서 충분히 입성을 노릴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사실 투표인원 숫자가 줄어든 수혜를 크게 본 케이스이긴 한데, 배리 본즈, 로저 클레멘스, 커트 실링 등이 투표자 수는 크게 변화가 없거나 약물 선수들의 경우는 오히려 줄어들었음에도 득표비율이 상승한 케이스라면 마이크 무시나는 확실히 투표자수가 늘어난 케이스라는 것이 긍정적이다. 다만, 앞에 열거한 선수들보다는 득표비율이 낮다는 것이 문제.

  • 4년차인 2017년 득표율은 51.8%이다. 전년도만 해도 오히려 50%를 넘었던 커트 실링이 화려한 아가리질의 결과로 잔뜩 어그로를 끌어 45%로 떨어진 것과 비교하면 확실히 긍정적인 신호였다.

  • 2018년에는 63.5%를 득표. 득표율이 크게 올랐다. 비교대상이었던 커트 실링은 50% 초반, 본즈와 클레멘스는 50% 중반이라는 것과도 비교되는 상승폭이었다.

  • 2019년, 76.7%의 득표율로 결국 6수만에 명예의 전당 입성에 성공하였다. 자신은 볼티모어와 양키스 두 모자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없다고 밝혔고, 결국 자신의 의견대로 빈 모자를 썼다.


4.1.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편집]



블랙잉크
그레이잉크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
마이크 무시나
15
250
121
54
HOF 입성자 평균
40
185
100
50

  • JAWS - Starting Pitcher (9th)

career WAR
7yr-peak WAR
JAWS
마이크 무시나
82.8
44.5
63.6
선발투수 HOF 입성자 평균
73.3
50.0
61.6


5. 연도별 성적[편집]


파일:MLB 로고.svg 마이크 무시나의 역대 MLB 기록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91
BAL
12
4
5
0
0
87⅔
2.87
77
7
21
1
52
1.118
139
1.7
2.2
1992
32
18
5
0
0
241
2.54
212
16
48
2
130
1.079
157
5.3
8.2
1993
25
14
6
0
0
167⅔
4.46
163
20
44
3
117
1.235
100
2.8
1.6
1994
24
16
5
0
0
176⅓
3.06
163
19
42
1
99
1.163
164
3.4
5.4
1995
32
19
9
0
0
221⅔
3.29
187
24
50
1
158
1.069
145
5.1
6.1
1996
36
19
11
0
0
243⅓
4.81
264
31
69
3
204
1.368
103
5.3
3.7
1997
33
15
8
0
0
224⅔
3.20
197
27
54
3
218
1.117
137
5.4
5.5
1998
29
13
10
0
0
206⅓
3.49
189
22
41
4
175
1.115
130
5.1
5.0
1999
31
18
7
0
0
203⅓
3.50
207
16
52
1
178
1.274
133
6.1
4.4
2000
34
11
15
0
0
237⅔
3.79
236
28
46
3
210
1.187
125
6.3
5.6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2001
NYY
34
17
11
0
0
228⅔
3.15
202
20
42
4
214
1.067
143
6.9
7.1
2002
33
18
10
0
0
215⅔
4.05
208
27
48
5
182
1.187
109
4.7
4.6
2003
31
17
8
0
0
214⅔
3.40
192
21
40
3
195
1.081
130
6.1
6.6
2004
27
12
9
0
0
164⅔
4.59
178
22
40
2
132
1.324
98
2.9
2.4
2005
30
13
8
0
0
179⅔
4.41
199
23
47
7
142
1.369
96
2.5
3.4
2006
32
15
7
0
0
197⅓
3.51
184
22
35
5
172
1.110
129
5.1
5.0
2007
28
11
10
0
0
152
5.15
188
14
35
4
91
1.467
88
2.6
1.0
2008
34
20
9
0
0
200⅓
3.37
214
17
31
8
150
1.223
131
3.6
5.1
MLB 통산
(18시즌)
537
270
153
0
0
3562⅔
3.68
3460
376
785
60
2813
1.192
123
81.3
82.8


6. 기타[편집]



  • 오프시즌에 고향 고교 팀에서 풋볼, 농구 코치를 할 정도로 다재다능하며, 성품이 온화하고 성실한 선수이지만 한편으로 승부근성이 강한 선수로도 유명하다. 2006년 디트로이트 전에서 6-1로 완투승을 앞두고 있던 9회 2사에[18] 주자를 출루시키고 나서 조 토레 감독이 교체를 위해 마운드로 올라오려 하자 'No, You stay there'라 얘기하며 말린 일화가 있다. 다만 이 사건으로 은근히 성질 있는 선수쯤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로는 조 토레 감독이 같은 이닝에 올라온 적이 있어서 2번째로 라인을 밟는 즉시 무조건 투수를 교체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이에하무시나가 자신의 강판을 말리려고 급하게 제스처를 한 것이었다. 이밖에도 1993년 시애틀 매리너스의 빌 헤슬먼과 벤치 클리어링을 벌인 적이 있다.

  • 슬하에 아들이 둘 있으며[19] 트랙터[20] 클래식 카 매니아이다.


  • 은퇴 후에 YES 네트워크의 양키스 경기 중계에 출연하거나 고향 고교 팀 선수들에게 농구를 가르치는 모습이 알려진 바 있다.


  • 박경림과 사진을 찍은 적이 있었다. 박경림 항목 참조.


7. Mr. Almost[편집]


무시나의 별명 중에는 성에서 따온 Moose 뿐만 아니라 Mr. Almost 도 있다. 이는 각종 대기록에 아쉽게 미치지 못한 무시나의 커리어를 빗대어 생겨났다. 우선 퍼펙트 게임에 도전하다 무산된 등판이 몇몇 있었다.

1997년 5월 30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전 9회 1아웃까지 퍼펙트 행진을 이어오다가 샌디 알로마 주니어에게 1루타를 내주며 무산되었다. 하지만 무시나는 남은 두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3 대 0 완봉승을 따냈다.
1998년 8월 4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전 8회 2아웃까지 퍼펙트 행진을 이어오다가 프랭크 카탈라노토[21]에게 2루타를 내주며 무산되었다. 팀은 4-0으로 승리했으며 무시나는 2피안타 완봉승을 따냈다.
2001년 9월 2일 보스턴 레드삭스 전 9회 2아웃까지 퍼펙트 행진을 이어오다 대타로 들어온 칼 에버렛에게 단타를 허용하며 무산되었다. 이 경기 역시 1피안타 완봉승을 거뒀으며 13탈삼진을 기록했다.
그 외에도 1992년 7월 15일 텍사스 레인저스 전과 2000년 8월 1일 미네소타 트윈스 전에서도 1피안타 완봉승을 기록했다.

또한 커리어 내내 월드시리즈 우승이 없었는데[22] 은퇴 직후 시즌인 2009년 뉴욕 양키스가 우승[23]을 해버린다. 게다가 통산 270승에 2813탈삼진으로 300승 3000탈삼진을 달성하지 못했다. 개인 수상 부문에서도 상복이 없는 편이었는데 골드글러브 7회 수상을 제외하면 1995년 다승왕(19승)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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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식으로 말하면 말코손바닥사슴이지만 학자들이 아닌 이상은 다들 무스라고 부른다.[2] 그 명성과 실력에 비해, 유독 상복이 없었던 투수. 거기다가 모든 투수들의 목표이자 꿈인 퍼펙트게임을 달성 직전에 세 번이나 놓친, 불운한 투수.(1997년 9회 1사후 안타, 1998년 8회 2사 후 안타, 2001년 9회 2사 후 안타(심지어 펜웨이 파크에서였다!) 2004년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7회 1사 후 안타를 포함하면 4번) 그리고 이상하게 그 화려하던 1998년부터 2000년까지의 양키스 우승 신화가 공교롭게도 무시나가 영입된 2001년부터 끊겨버린지라 양키스 팬들이 간혹 '무시나가 오고 나서부터 우승 못했다. 재수없다.' 하는 식으로 대차게 까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은퇴한 직후인 2009 시즌. 양키스는 27번째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Mr. Almost. 그나마 위안이라면 골드 글러브는 7번이나 수상했을 정도로 수비 능력이 민첩하고 빈틈이 없다.[3] 무시나는 마이너리그 시절 부족한 월급 때문에 중고등학교 농구 코치로도 활동한 바가 있다. [4] 이때 전교 2등으로 졸업한 이유에 대해 팬들 사이에서 루머로 떠도는 말이 "고등학교 졸업 연설을 하기 싫어서 일부러 2등을 했다"는 것이다. [5] 이와 비슷한 인물로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졸업학점(GPA) 3.8을 받고 졸업한 로스 올렌도프, 예일 대학교 분자생물학을 전공해 의대까지 합격했지만 밀워키 브루어스의 지명으로 모든걸 포기하고 MLB에서 활약한 크레이그 브레슬로우, 바르셀로나 의과대학에 입학한 파우 가솔, 의학박사이자 소아과전문의였던 소크라치스, 약학대학을 졸업한 디켐베 무톰보, 예일 대학교를 포기한 맷 보너, 스탠포드 대학교 출신의 랜드리 필즈, 수학장학생으로 조지아 공과대학교을 입학한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테디어스 영, 해군사관학교 출신의 데이비드 로빈슨, 에메카 오카포,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한 제레미 린, 그 외 엘튼 브랜드, 그랜트 힐, 드웨인 웨이드, 크리스 영, 라이언 가코 등 생각보다 공부 잘 하는 운동선수가 많다. [6] 마이너 통산 31경기에 등판했으며 모두 선발등판이었다.[7] 이 해 1위는 데니스 에커슬리 [8] 이 시기 볼티모어는 지독하게 문제가 많은 팀이었다. 그 극강의 타고투저 시즌에도 불구하고 타선은 약했으며 불펜도 부실했다. 단적인 예가 2000년. 팀타율 리그 11위, 팀장타율 11위, 팀홈런 10위였고, 더 심각한 것은 구원 투수진으로 팀 전체 세이브 33개로 15위. 결국 마이크 무시나의 팀동료였던 시드니 폰손이 평균자책점 4.82로 222이닝을 던져서 리그 이닝 5위에 오르는 처참한 상황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크 무시나는 외계인 페드로 마르티네즈를 제외하고 지구인 중에서는 아메리칸 리그 투수 중 최고의 활약을 했다. 이닝 237 2/3(1위). 평균자책점 3.79(3위) Whip 1.19, 탈삼진 210개(3위). 하지만 그의 성적은 11승 15패.[9] 무시나는 당시까지 메이저리그는 물론 마이너에서도 불펜으로 등판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10] 볼티모어 소속 통산 147승, 양키스 소속 통산 123승[11] 9월 3일 시애틀전이며 3.2이닝 2실점 기록[12] 리그 한정이다. 포스트시즌에선 2번의 불펜 등판이 있다.[13] 물론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 양키스가 FA 사냥에 나서기 위해 다년 계약을 제의하지 않았고 300승 도전을 위해 3년 연장 계약이 아니면 은퇴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14] 통산 270승으로 은퇴했기 때문에 2~3년 정도 더 뛰었다면, 양키스 전력에 비춰볼 때, 본인만 삽질하지 않으면 300승은 무난했다. [15] 2016년 기준으로 300승과 3,000K를 모두 달성한 투수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월터 존슨, 스티브 칼튼, 톰 시버, 돈 서튼, 게일로드 페리, 필 니크로, 놀란 라이언, 그렉 매덕스, 랜디 존슨, 로저 클레멘스[16] 2016년 기준으로 300승과 3,000K를 모두 달성한 투수 10명 중 약쟁이를 제외한 9명은 전부 명전에 입성했다. 다만 전부 첫 턴에 간 것은 아니고 게일로드 페리가 3수, 돈 서튼필 니크로가 5수 하긴 했는데, 기록이 부족해서가 아니고 부정투구 논란과 너클볼러라는 트집 같은 기록 외적인 마이너스 요인에 발목잡혔던 것. 별다른 기록 외적 마이너스 요인이 없었던 스티브 칼튼, 톰 시버, 놀란 라이언, 그렉 매덕스, 랜디 존슨은 전부 95% 이상의 득표율로 첫 턴에 입성했다. (월터 존슨은 83.63%의 다소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그는 다른 멤버들과 달리 최초의 5인이므로 예외적인 사례이다.) 무시나에게 야구 외적인 마이너스 요인은 없었으므로 그가 만약 300승과 3,000K를 전부 채우고 은퇴했다면 지금처럼 명전을 가냐 마냐 아웅다웅하는게 아니라 첫 턴도 충분히 노려볼만하고, 설령 첫턴에 미끄러져도 최소 3수 안에는 무조건 갔을 것이다. 부질없는 가정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들어가긴 했으니. [17] 이 체인지업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양키스 포수 호르헤 포사다가 무시나가 체인지업을 던질 때마다 홈런을 때렸다. 무시나가 어이없어하며 포사다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물어보자, 포사다는 던질 때 잡는 방법이 보인다고 귀띔해줬다. 이 말을 듣고 개량한 것이 무시나의 체인지업. 결국 포사다는 무시나의 너클 커브를 대신할(포사다의 수비 능력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다.) 체인지업을 만들어준 셈이다. [18] 저 1점도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실책으로 내줬던 거라 자책점은 없었다.[19] 그의 아내는 무시나와 결혼하기 전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가 이혼했다.[20] 우리가 아는 농기계 트랙터가 아닌, 뒤에 무동력 차량(트레일러)을 달고 다니는 큰 트럭을 의미한다.[21] 1997-2010까지 디트로이트, 텍사스, 토론토 등에서 활약했던 선수. 통산 .291 84홈런 457타점 기록[22] 2001년과 2003년에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지만 준우승에 그쳤다[23] 게다가 무시나가 양키스로 이적하기 직전해인 2000년은 양키스가 우승한 시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