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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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비키'에 대하여 인구학적으로 연구한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역사학자의 저서.[1][2][3]
일본의 마비키 민속화(출처)[4]
1. 개요
2. 내용
3. 희생자의 수
4. 메이지 유신 이후의 마비키
5. 기타
6. 일본 외 국가의 사례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まびき / 間引き

에도 시대 일본영아 살해 악습. '사전적 의미'는 『1. 솎아 냄. 2. (江戸 시대에, 생활고로) 산아(産兒)를 죽이던 일.』이다.


에도 시대에는 태어난 아이를 엄마가 목을 졸라 죽이는 일이 성행했는데, 이를 마비키(間引:まびき), 일본어로 솎아내기라고 한다. 또는 코카에시(子返し: こかえし)라고도 불렀다. 전자는 채소밭이나 삼림에서 간벌한다(솎아낸다), 후자는 신께 되돌려준다는 뜻이다. 직설적으로 아이 죽이기란 뜻의 코고로시(子殺し, こごろし)라 표현하는 경우도 없진 않다.

에도 시대 중기 이후에는 평균 자녀 수가 3명이었는데 아이가 3명을 초과해서 태어나면 부모가 전부 죽였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이를 심각하게 여긴 막부와 다이묘들이 마비키를 금지하는 움직임이 시작되기도 하였다. 에도 말기의 농학자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는 "데와(出羽, 현재의 야마가타현아키타현[5])과 오슈(奥州, 현재의 아오모리현, 이와테현, 미야기현, 후쿠시마현)에서 매년 1만 6~7천 명, 가즈사(上総, 현재의 치바현 중부)에서는 갓난아기 3~4만 명이 매년 솎아냄(마비키) 되고 있다." 하고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악습 자체는 센고쿠 시대 때부터 이어져서 당시 일본을 방문했던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 역시 자신의 저서 『일본사』에 "일본의 여성은 기를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면 모두 아기의 목을 다리로 눌러버려 죽여버린다."고 기록했었다.

사실 일본에서 마비키가 성행한 이유는 봉건적 인두세와 더불어 과도한 징세로[6] 가난한 일본 백성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축내는 '새 식구'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즉, 막부와 다이묘들이 가혹하게 부과한 세금이 문제였던 것이다. 막대한 세금 때문에 영아 살해를 시행했던 것. 한마디로 마비키를 발생하게 만든 것은 막부와 다이묘들이며 그들의 책임이 크다. 실제로 에도 시대에는 과도한 징세 때문에 민란(잇키)이 빈번했다.[7]

2. 내용[편집]


에도 시대 초기에는 전란이 종식되고 평화가 찾아오면서 일본은 초기 100년 동안 무려 1000만 명이나 인구가 증가 할 만큼 인구가 매년 큰 폭으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그러나 에도 시대 중기 이후로는 일본 내에서 큰 전란이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8] 일본의 인구 성장률은 계속 비정상적으로 보일 만큼 정체되어왔다. 무사 등 특수 계급을 제외한 전국의 인구는, 막부가 조사를 시작한 1721년에 2600만 명, 가장 적을 때에 2489만 명(1792년), 가장 많을 때에 2720만 명(1828년)으로, 극히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앞의 인구 조사는 당시 에도 막부가 직접 조사한 것으로 현재 일본 학계의 인구 추정치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단, 에도 시대 일본의 인구가 '지극히 안정적으로 유지된 것'은 사실이다. 당시 일본은 온천을 개발하기 쉬운 환경의 영향으로 목욕문화가 발달했고, 에도 시대 즈음이 되면 주요 도시지역에서 대중목욕탕이 보편화 되었을 정도로 목욕을 자주 하여 영·유아의 초기사망률을 극도로 낮출 수 있는 위생 부분에서 다른 나라들에 비해 우위를 차지했기 때문인지[9] 평균수명이 동시기 다른 국가들보다 유의미한 수준으로 높았기에[10] 아무리 조세 압박 등의 영향이 있었다고 해도 일본의 출산율이 평균적으로 대체출산율의 2배에 달하는 4명대[11]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전란기가 아닌 평화기라면 기근 등의 사태가 아닌 이상 인구는 매년 점진적으로 늘어나야만 했고,[12] 그러면 최소한 동시기 청나라조선, 베트남보다는 인구증가율이 더 높았어야만 했다.

무엇보다 전근대 시대는 피임 기술이 변변치 않았던 만큼, 에도 시대 때의 인구증가를 억제하는 방법은 대부분이 마비키(솎아냄)에 의한 영아 살해로 해결하였다. 에도 시대 중기 이후, 막부와 영주의 금지령이나 교사에도 불구하고, 기근시 농촌 등에서, 영·유아를 압살, 교살, 익사, 생매장 등의 방식으로 죽이는 사례가 흔하게 나왔다. 이는 당시 일본에서 7세 이하 아이는 신령의 아이로 여겨 언제라도 신령에게 답례할 수 있다고 즉, 영아 살해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13] 일종의 쿨링 오프인 것이다. 그리하여 마비키를 '아이 반환'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다른 국가들에 비해 일본이 이렇게 마비키가 성행한 이유는 당시 일본이 동북아시아 국가들 가운데서 세율이 가장 높았기 때문에 일본 백성들이 대부분 세금과 새로운 생명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경제력이 부족해서였다.[14][15] 에도 시대 생산량을 보면(참고) 1700년의 농지 면적은 282만 헥타르였다. 60%가 이라고 한다면 논의 면적은 169만 2천 헥타르, 인구는 2828만 7200명, 인구 1인당 경지면적은 0.598反(탄), 에도 시대 단위 면적당 쌀 생산량 190kg/反을 고려하면 1인당 0.758(코쿠), 세금 50%를 공제하면 1인당 0.379石. 1인당 0.38石로 1石 기준 144 kg로 보면 1인당 144×0.38=54.72(kg)이다.

육류 보급이 확대되고 쌀을 제외한 감자, 옥수수 등의 기타 양식으로 인해 쌀을 적게 먹게 된 현대 한국인도 1인당 연간 60 kg 이상을 소비하는데, '육식 금지령'까지 걸린 에도 시대의 일반 백성들은 이렇게 극도로 식량이 제한되는 삶을 영위하기 힘들었다.[16] 물론 이 추정 60%의 논이 아닌 40%의 고구마나 감자 등을 재배했을 밭을 지닌 농부들도 있었겠지만, 세금의 기준이 쌀인 만큼 농민에 대한 조세부담은 공평했다.

그래서 한국에는 십시일반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지만, 에도 시대의 일본 백성들은 십시일반을 하면 모두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정에 새 생명이 태어나면 경사스러운 일이겠지만, 당시 가난한 일본 백성들에게는 오히려 가족의 생사가 걸린 문제였다. 결국 마비키는 일본 지배층의 착취와 그런 암울한 빈곤 속에서 만들어진 악습이자 전 가족이 굶어죽지 않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였던 것이다.

3. 희생자의 수[편집]


관련 자료들마다 차이는 일부 있지만, 에도 시대 당대의 학자,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의 저서 「草木六部耕種法」이나 「경제 요록」에 의하면, 가즈사 국(上総国)[17]에는 약 10만의 농가가 있었지만, 거기서 살해당하는 아이의 수해마다 3~4만 명에 달했으며, 또 무츠 국,[18] 데와 국[19]에서는 솎아냄(마비키) 하는 수해마다 7, 8만에 달했다고 한다.[20] 솎아냄(마비키)은 콘돔을 사용한 피임 같은 인구 조절의 수단이 별로 없었던 당시로서는 필요악이었다[21]는 것이다. 즉, 그 당시에는 '솎아냄(마비키)'을 별로 '잘못된 행동'이나 '영아 살해' 같은 흉악한 범죄가 아니라 그저 아이를 신에게 다시 돌려주는 일에 불과하며, 자기 아이로 하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했다.[22]

그 외 최근 학계의 추정치는 학자들 마다 서로 차이가 있지만 서양의 일본사학자이자 대표적인 마비키 연구가인 Fabian Drixler가 자신의 저서[23]에서 추정한 추정치에 따르면 아동들이 한 해에 최대 수십만 명 남짓 마비키로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마비키로 계속 살해된 결과 에도 시대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인구조사를 한 교호(亨保) 11년(1726)부터 그 이후 막부가 붕괴된, 메이지 유신 때까지도 에도 시대 일본 열도의 인구는 거의 증가하지 않고, 대부분 2700만 명 선에서 항상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물론 에도시대에조차도 모든 빈궁한 일본 하층민들이 전부 마비키를 긍정했던 것은 아니었다. '신령님이 주신 아이를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반발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신종교 오모토의 창시자 데구치 나오(出口なお, 1837-1918)는 덴포 대기근(1833-39) 시절에 태어났기 때문에 부모가 마비키로 죽이려 하였다. 하지만 할머니가 "신령님이 주신 아이를 어찌 너희들이 함부로 죽이네 마네 한단 말이냐?"하고 강력하게 뜯어말려서 겨우 살 수 있었다. 또한 또 다른 일본의 신종교 금광교의 창시자 곤코 다이진(金光大神, 1814-1883) 역시 '아이들은 신령님이 주신 것이니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요지로 가르침을 펴기도 하였다. 메이지 유신 이전 일본의 하층민들 사이에서 마비키 풍습이 흔했으면서, 또한 동시에 모든 사람이 마비키를 당연시하진 않았음을 보여주는 일화들이다. 상단의 민속화 역시 이러한 반발을 반영한 그림이라 할 수 있었다.

4. 메이지 유신 이후의 마비키[편집]


20세기 들어서까지도 마비키가 있었기에 일본 정부도 심각성을 인지하고는 이를 근절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특히 메이지 시대가 되면서 일본 정부는 방침을 바꾸어, 국가 발전을 위해서 더는 아이들을 일부러 죽이지 말고 최대한 낳아서 늘리도록 하였다. 게다가 마비키는 당연히 영아 살해와 같은 흉악한 살인죄로 간주되었고 마비키를 단속하고 처벌하였다. 일본 정부의 노력으로 영아 살해가 크게 줄면서 일본의 인구는 이후로 매년 급속하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법률로 금지되었다고 해도, 에도 시대 근 260년 동안 굳어진 악습이 바로 사라질 수는 없었으므로, 지방에서의 솎아냄(마비키)은 남 몰래 계속되었다. 야나기타 쿠니오(柳田国男)에 의하면,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모든 집의 자녀들이 1남 1녀인 마을도 있었다고 한다. 인위적으로 산아조정을 하지 않는 한 절대 있을 수 없는 마을이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존재했음은, 마비키 풍습이 메이지 시대 당시에도 일부 지역에서는 계속 유지되었다는 증거이다. 사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다이쇼 시대에도 일본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1916년 일본 도쿄에서는 6829명이 폐결핵으로 죽었고, 여자나 어린이는 짐승에 가깝다고 말했던 시대이고, 하물며 사회 일반의 아이의 인권에 대한 인식의 정도는 형편없었으며, 빈곤과 인권에 대한 인식이 낮았기 때문에 인신매매도 적지 않았다. 1917년 카와가미 하지메(河上肇)가 일본 오사카 아사히 신문에 연재한 <가난 이야기(貧乏物語)>는 "놀랄 만한 것은 지금의 문명국에 있어서의 다수인이 가난하다."라고 시작한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비키 풍습도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1930년대까지도 홋카이도 등 일부 지역에서는 마비키 풍습이 일부나마 계속 남아있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는 1945년까지 일본 인구는 7215만 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약 77년 동안 4000-4500만 명가량 인구가 증가한 것이다.

하지만 2차 대전 이후 혼란과 빈곤 탓에 일본 여러 곳에서 다시 마비키가 일어났다. 이 중 유명한 '고토부키 산원(寿産院) 사건'이 있다. 이시카와 미유키(石川ミユキ)와 남편 이시카와 다케시(石川猛)가 1944년부터 1948년까지 버려진 아이들을 키운답시고 100명이나 넘게 굶겨 죽인 사건이었다. 부부는 범죄가 들통나 경찰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의 반응과 범인들에 대한 처벌이 가관이었는데 버려진 아이들이 죽는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며, 특히 100명 이상의 아기들을 죽인 미유키는 4년형, 다케시는 겨우 2년형에 그쳤던 것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죄목도 아이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 죽은 아이들의 이름으로 보조금을 타 먹은 횡령이었다. 거꾸로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일본에서 낙태가 합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낙태 허용 조항이 들어간 법률은 장애인 강제 불임시술 조항로도 악명 높은 우생보호법이다. 결론적으로 이 악습이 일본 열도 전역에서 완벽하게 사라진 것은 1950년대부터라 볼 수 있다.

"도시=개미지옥"이었다... 에도 시대로부터 본 일본의 인구 감퇴기에 일어났던 것들 → 에도 시대의 인구 변동에 대해 시즈오카 현립대학(静岡県立大学) 학장 키토 히로시(鬼頭 宏) 역사인구학(歴史人口学) 교수가 해설한 기사다.

참고할 내용이 많이 있는 기사로 해당 기사에서 키토 히로시 교수는 "인구가 증가하고 있던 17세기에는 여성이 한 사람당 5~6명은 낳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18세기에 이르러 여러 지역에서 4명에 못 미치게 되었다. 수유 기간을 늘려 임신을 막는다거나 낙태나 솎아내기 등의 수단을 통해 출생 억제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출생율을 낮췄다는 것은 '출생억제'뿐만이 아니다. 각지에서 여성의 만혼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혼이 늦어졌다라고해도 고작 3년 정도이지만, 자녀 수를 1명 정도는 적게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중략... 토지에 의존하고 사실상의 쇄국으로 인해 자원을 국외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할 수 없다는 조건하에 인구 3천만 명의 도쿠가와 일본은 8대 장군 요시무네 시대에 성장의 한계를 맞았던 것이다."라고 설명하며 일본의 인구 정체에 대하여 경제적인 요인에 의한 마비키와 낙태 등의 수단이 인구 정체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키토 히로시 교수는 "에도 시대는 시장 경제화가 진행된 농경 사회이다. 당연히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도시 인구도 전국 인구의 정체에 보조를 맞추도록 한계점에 도달했다. 사이토 세이지 씨의 조사에 따르면, 도시 인구는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크게 증가했지만, 이후 19; 세기 중반까지는 감소하고있다. 그동안 농촌 인구는 17세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꾸준히 증가했다. (사이토 세이지 「에도 시대의 도시 인구」). 중략... 도시의 규모별 분포의 변화를 보면 1750년부터 1850년까지 기존의 대도시에서는 인구가 정체했지만 1 만명 미만의 지방 도시에서는 도시 발전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설명하며 인구 정체가 농촌 뿐만 아니라 대도시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설명하였다.

5. 기타[편집]


일본 전역에서 일어난 악습이라 하나, 상기한 마비키의 예시를 자세히 보면 가즈사(치바현)을 제외하고 공통적으로 도호쿠 지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금 이전에 남쪽보다 춥고 기근이 일어나기 쉬운 자연적 요소가 마비키를 더욱 부추겼다고 볼 수 있다.[24] 오죽하면 해당 지방의 전통 목각인형 고케시(こけし)의 어원이 아이 없애기(子消し)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그런데, 이도 좀 웃기는 것이 의도적으로 남쪽에서는 없애거나 북쪽에서는 이게 문제라는 인식을 하지 않았기에 남은 것이란 점을 고려하지 않고, 일부 지역 문제로 서술하는데, 그렇다면 3천만이 채 안 되는 것이 제주도와 같은 위도상의 일본 중심부가 그리 식량 생산량이 형편없는 것이 된다.

일본 자장가[25] 중에는 마비키를 암시하는 구절이 들어간 가사도 있다. "자장, 자장, 잘 자거라, 자지 않으면 강에 버린다. 자장, 자장, 잘 자거라, 자지 않으면 묻어 버린다"고 부르는 이 자장가 중에 강에 버린다, 묻어 버린다는 구절은 마비키를 지칭하는 은어라고 한다.

과거 일본의 민간 전승에 따르면 마비키로 죽은 아이들은 저승에서조차 고통받는 신세라 보았다. 정확히는 '사이노카와라(賽の河原)'라는 설화로, 마비키를 당해 저승에 온 아이들은 삼도천 냇가에서 돌탑을 쌓아야만 강을 건널 수 있는데 쌓는 족족 오니가 다 부숴버려 아이들이 삼도천을 못 건너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러다 지나가던 민머리 부처님이 이들을 모두 구해줘서 강을 건널 수 있게 해준다는 설화이다.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작품 《어둠의 도키》의 주인공 '도키'가 바로 마비키 풍습으로 버려진 사례 중 하나이자 피해자다.[26] 이 외에도, 마비키에서 운 좋게 살아났어도 절대로 주류사회에 편입되지 못하고, 떠돌이로 돌아다니면서 악당이 되는 것은 일본 문화의 불문율이다. 절대로 이런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경우는, 그 어떤 창작물에서도, 없다.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의 배경 마을도 마비키+노인 유기의 형태로 인구수를 유지한다. 이 마을에서는 첫째 아들만 결혼을 할 수 있어서 둘째 아들 이후에는 수간을 하는 처지였다는데, 노동력이 될 수 있는 남자 아이들을 많이 남기기 때문에 수간하는 둘째 아들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 그리고 아이들은 마비키에 인신매매로 일정 숫자만 유지했다. 노인 유기를 하는 이유도 노인들이 노동을 할 수 없다는 것. 그 밖에 도둑질을 하면 마을 내의 법에 따라서 죽였다고 한다. 작중에는 한 집안에서 규칙을 어기고 너무 많은 아이들을 뒀다가 생계 유지가 안 되어서 도둑질을 한 죄로 그 집안 전체를 생매장시켜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마비키 풍습이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마을의 인구가 일정하게 유지되는지 잘 보여주는 영화다.[27]

일본의 인터넷 팬 캐릭터실장석(참피)의 설정들 중 하나인 솎아내기가 바로 이 마비키라는 악습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어려운 생활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질이나 성격이 글러먹은 자식을 죽이는 설정은 과도한 세금이 아닌 험난한 환경때문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마비키의 등장 배경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실장석은 비하 캐릭터로 일본의 악습들과 부정적인 모습들을 총합하여 만든 인터넷 캐릭터이기 때문에 이런 전근대 일본의 악습 또한 설정에 그대로 녹아든 것이다.

일본의 전설적인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를 다룬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만화 배가본드에서도 도적 두목인 츠지카제 텐마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 의해 마비키[28]를 당한 것으로 묘사된다.

관련캐릭터는 드물게 동방귀형수에비스 에이카가 있다. 그리고 이름없는 언덕도 마비키와 관련된 설정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첫 한국 데뷔작 브로커(영화)는 마비키를 안다면, 왜 한국 데뷔작으로 하였는가를 알 수 있는 원인이라 생각할만한 소재로 시작된다.

6. 일본 외 국가의 사례[편집]


정리하자면 간간이 흉년과 기근으로 극한상황에서는 어린이 같은 노약자 살해가 전 세계적으로 간간이 보이기는 했지만[29] 풍흉년을 막론하고 문화적으로 아동살해가 악습으로 정착되어버린 사례는 일본이 유일했다.

과거엔 기술의 발달이 미비한 관계로 관개농업이 제대로 실행되지 못한 데다, 개간해야 하는 땅에 비해 비료가 매우 한정되어 있는 편이었다. 때문에 식량생산량이 인구 수보다 적게 되는 기근이 발생하기 쉬웠던 것은 동서를 막론하는 사실이었다(맬서스 트랩).

따라서 일본뿐 아니라, 당장 자연재해로 한해 이상의 농사를 망쳐 식량 생산량이 인구를 부양하지 못하게 되어버리면 당장 먹을 게 모자라서 조선을 포함해서 독일유럽의 몇몇 지역에서도 기근시 마비키가 연상되는 영아 살해 혹은 유기 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30]

조선의 경우 실록에 기근을 당해서 발생한 영·유아의 유기가 여럿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당장 어른들도 생존을 장담하기 힘든 기근을 당한 상태거나 또는 농사를 짓기 힘든 평안도 이북의 북방에 편중되어 있는 기록이며 무엇보다 이러한 기록은 임란으로 인해 국가가 대처하기 힘든 사례를 제외하곤 기근으로 인한 이런 피해를 신하가 이야기하고 왕이 침통해 하거나 직접 명령하여 국가가 나서서 구휼곡을 보내는 해결방안을 시행하는 기록이 이어진다. 그렇기에 기근으로 인한 영·유아의 유기나 살해는 일시적인 현상이었고, 비정상적인 일이었기에 국가가 나서 원인을 해결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봐야하며, 전쟁이나 기후문제로 기근이 상시로 발생하지 않았음에도 인구증가량에 영향을 줄 정도로 오랫동안 악습으로서 자행된 마비키와는 동일하게 비교하기가 어렵다.

서양에선 이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매체가 다름아닌 그림 동화헨젤과 그레텔, 노간주나무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의 영아 살해는 조선과 마찬가지로, 기근으로 인해 일시적인 식인이 발생하기 직전 수준의 식량부족으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이거나 특정 지역의 특수성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으로 간주된다. 마비키가 오랫동안 풍습으로 정착한 일본 외 다른 나라들의 이러한 사례들은 영·유아 살해로 인해서 등비수열로 증가하는 인구의 증가 추세(멜서스 트랩)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수준의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들이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외세에 의한 전란이 없는 상태에서 어느 정도 안정된 국가에서 소빙하기와 같은 자연재해나 대규모 기근을 제외하면 국가 단위로 최소 백년 이상 동안 인구의 증가추세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건 에도시대 당시의 마비키가 유일하다.

일본의 영향권 안에 있던 사츠마 번의 반(半) 복속국이나 다름없던 류큐에서도 사츠마 번에 내는 조공[31] 감당하지 못한 왕부에서 주민들에게 가혹한 인두세를 매겼고, 이 인두세를 어떻게든 줄여보려고 국민들을 일부러 무인도로 이주시켜 마을 단위로 걷는 조공을 줄이려 하거나 임산부를 절벽에서 뛰어내리게 강요하고 태어난 아이를 돌로 눌러 죽이는 등의 풍습도 존재했다고 한다.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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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의 내용을 보면 해당 서적의 저자가 일부 일본 학자들의 태도에 대해 마비키의 발생 빈도 자체를 의심하거나 마비키가 아닌 다른 요인들을 강조하거나 또는 입증된 다른 데이터나 연구 결과들을 무시하고 증거의 영역 자체를 마비키의 역할을 축소할 수 있는 영역으로만 한정짓고 단정적인 결론만을 내린다고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내용 또한 같이 나온다.[2] Most historical demographers were doubtful oragnostic about the frequency of infanticide, considering it a relatively minor factorin the demographic system of the Edo period. Instead, they have emphasized therole of low fecundity (the ability to bear children), late marriage, spousal separa-tion during labor migration, and the lactational amenorrhea that long breastfeed-ing conferred on Japanese mothers.40 Only about the Northeast of Japan is theregeneral agreement that infanticide was demographically important. In this region,Narimatsu Saeko calculated fertility rates below three for two villages in Nihon-matsu domain. Working with the same data, Tsuya Noriko and Kurosu Satomilater discovered sex-ratio patterns in the same two villages that echo ThomasSmith’s earlier findings in Central Japan that parents tried to balance the gendersof their children. In another important paper about Nihonmatsu—whose lordscould never have imagined what prominence their middling domain wouldachieve among historical demographers—Takahashi Miyuki demonstrated theeffect of domain subsidies in discouraging infanticide.41 Nonetheless, in 2008 theinfluential economist and historical demographer Tomobe Ken’ichi concludedthat at present the only evidence for truly frequent infanticide in the Northeastwas the shape of the age-specific fertility curve, which could equally be interpretedas the result of miscarriages induced by overwork and sexually transmitted dis-eases.42 Even scholars who were persuaded that infanticide was common assumedthat it followed perhaps 2 percent of all births.43 In this book, I place the propor-tion of infanticides and abortions closer to 40 percent during the decades whenthey were at their most frequent. This is a number for the entire Tōgoku dataset; inindividual villages, their incidence must have been higher still.[3] 표지에 쓰인 그림을 보면 한 일본인 부부와 남편의 부모로 추정되는 노인들을 폭행하는 듯한 민속화가 그려져 있는데 출처는 불명이다.[4] 그림을 유심히 보면 여성(아이의 엄마일 가능성이 크다)이 아이를 무릎으로 눌러 죽이면서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거울 속 여성의 얼굴이 한냐(귀신)로 비치고 있어 으스스하게 느껴진다.[5] 가즈노시는 오슈.[6] 당장 에도 막부의 창시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농민은 죽지도 살지도 못할 정도로 세금을 거두라"라고 명시했고 에도 막부의 관리들은 "참깨 기름과 백성의 세금은 짜면 짤수록 나온다."며 해마다 연공을 늘리고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켰으며(출처: 상식 밖의 일본사/안정환 지음/새길/130~133쪽)[7] 에도 시대에 잇키가 무려 3천 번이나 일어났을 정도로 농민들의 삶은 힘들었다. 대략 계산해보면 에도시대가 약 252년간 지속됐으니 1년에 12번 정도, 즉 1달에 1번씩 반란이 일어난 셈이다. 출처: 상식 밖의 일본사/안정환 지음/새길/132쪽[8] 다만 큰 전쟁만 나지 않았지 잇키 같은 건 계속 발생했다.[9] 다만 이는 논란이 있는 주장이다. 전근대 공중목욕탕은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인하여 오히려 수인성 전염병의 천국이자 온상지였다. 화학약품으로 주기적으로 청소하는 현대식 공중목욕탕들도 가끔씩 기준치 이상의 병원균들이 나와서 영업정지를 당하기도 하는데, 이런 기술이 없던 전근대 에도시대 일본의 대중목욕탕이 위생상 완전하게 괜찮을 리가 없었다. 실제로 시즈오카 현립대학(静岡県立大学) 학장 키토 히로시(鬼頭 宏) 역사인구학(歴史人口学) 교수는 '에도시대 대도시의 인구 정체 현상'에 대해 '도시=묘지설' 혹은 '도시=개미지옥설'로 불리는 현상이 존재했다. 한 마디로 일본 도시들은 위생환경이 농촌보다 매우 나빠서 통상적인 해에도 농촌들보다 사망률이 높았다는 것이다. 천연두·홍역·결핵·독감·설사장염·매독 등이 만연하기 쉬웠고 막부 말기에는 콜레라가 여러 차례 덮쳤다. 게다가 과밀한 거주 환경과 함께 '소독되지 않은 수도가 감염증의 온상이 되었다.'고 설명하며 수인성 질환으로 인하여 에도시대 일본 대도시들의 인구가 정체되었다고 설명하였다. 링크 그리고 당시 일본의 여러 풍속화들이나 소설들에서도 보이듯이 당시 사람들이 공중목욕탕을 가는 이유가, 외설적인 목적이 단순히 몸을 씻기 위해 가기 위한 목적 못지 않게 많았다. 고대 로마에 존재했던 공중목욕탕의 실태를 보아도 알 수 있고, 괜히 중세 유럽에서 공중목욕탕 출입을 막은 것이 아니다. 또한 이는 간혹 일부 극우 세력이나 국수주의 성향을 띠는 학자들이 당시 일본의 위생 상태를 미화하고 조선, 중국은 비위생적인 나라라 비하하는 의도에서 나오는 말인 경우가 많아 이러한 주장은 걸러 들을 필요가 있다.[10] 당시 일본의 평균수명은 약 32세~33세를 전후한 수준으로 추정하는데, 이는 당시 청나라 평균수명인 24~25세를 훨씬 웃돈다. 하지만 18세기에는 청나라의 인구증가율은 일본의 인구증가율을 훨씬 웃돌았고, 19세기에는 청나라의 인구침체와 아편전쟁, 태평천국의 난 등이 잇따라 일어나며 혼란에 빠진 영향으로 인구증가세는 정체되었지만 적어도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는 인구증가폭이 일본보다 높았다. 그러나 Kenneth Pomeranz가 추산한 18세기 중국, 일본의 남성 기대수명은 각각 39.6세, 41.4세로 양국간 큰 차이는 없었다는 연구 결과 또한 존재한다. 링크.[11] 출산율이 4명대라는 건 당시 아시아와 동유럽 국가들의 출산율보다 훨씬 낮으며 그때의 서북유럽의 출산율과 비슷한 정도이다.[12] 다만 18세기 일본은 호에이 대분화, 아사마 화산 폭발 등의 자연재해와 기후변화, 이로 인한 기근 발생으로 인해 인명과 농업생산에 큰 피해를 입었다.[13] 도랸세, 시치고산도 이것과 관련 있다.[14] 당시 일본의 세율은 무려 생산량의 50~70%에 달했으며 특히 키슈,미토 번 같은 도쿠가와 일족이 다스리던 지방은 품위유지비 비용으로 인해 무려 80.93%나 거둬갔다.당시 에도라는 거대하고 부유한 대도시가 탄생했던 데는 참근교대 등과 더불어 이러한 비정상적으로 높은 세율, 그리고 위와 같이 농민을 사정없이 쥐어짰던 것이 밑거름으로 작용했을 것이다.[15] 이런 에도 막부의 착취는 근처 다른 나라들과 대조해봐도 상상 이상이었다. 당장 옆나라 조선의 경우에는 덕치를 표방한다는 이유와 유교 사상에 입각하여 공식 세율이 10%를 넘는 경우가 드물었고, 한민족의 식사량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별일없으면 먹을 것 자체가 부족하진 않았다. 명나라·청나라도 조선보다는 세율이 높았을지언정 은본위제도를 바탕으로 경제가 개편되고 숨어있는 인구를 호적에 올리기 위해 일조편법이나 지정은제 등 기존의 세금제도를 폐지하는 방식을 통해 세금을 많이 감면해 주었다. 물론 학자들마다 의견 차이도 있고 정확한 최종 세율은 어느 정도였는지 아직 미지수지만, 그래도 일본과 비교하면 아주 많이 적은 편이었다는 것은 공통된 의견이다.[16] 다만 일본은 가마쿠라 시대부터 교토 인근 지역에서 쌀 - 보리 - 메밀의 1년 3작을 시작하고 에도 시대 말까지 규슈와 토호쿠까지 1년 2작, 또는 1년 3작이 확대되기 때문에 식량까지 극도로 제한받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결국 쌀로 세금을 내야 했기에 쌀만 생산했다고 가정하면 이러한 잡곡도 쌀로 환전하여 세금을 내야했는데 문제는 세금이 너무 높다보니 의료, 종자 마련, 생필품 구비 등, 농민에게는 필수적인 소비까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물론 당시 농민들은 부업으로 공예품이나 직물을 생산해서 판매하기도 했기 때문에 모든 일본의 농민들이 극도의 기아 상태에 있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오류를 범할 수 있지만 '마비키'는 그 존재만으로도 일본의 세율이 다른 국가들보다 지나칠 정도로 높아 일본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던 것은 사실임을 명백히 증명한다.[17] 지금의 일본 치바현 일대.[18] 지금의 일본 후쿠시마현, 미야기현, 이와테현, 아오모리현아키타현 북동부 지역.[19] 지금의 일본 야마가타현아키타현.[20] 미야모토 츠네이치(宮本常一) · 他編: 1995[21] 요네다 쿄코(米田京子): 근대 모성관의 수용과 변형 -「교육하는 모친」 현모양처에게-, 1985[22] 이마노 노부오(今野信雄): 에도의 육아 사정 1988[23] Mabiki: Infanticide and Population Growth in Eastern Japan, 1660-1950[24] 하술하듯 한반도에서도 기근시의 영아 살해는 주로 평안도 등 추운 북부 지방에서 자주 일어났다.[25] 일본은 각 지방마다 자장가가 다르다.[26] 도키(土鬼)라는 이름 자체가 흙 속의 귀신이라는 뜻이다. 주인공은 최후에 이기기는 하지만, 그래 봤자 남는 것은 어둠 속에서 여생을 살아야 하는 운명뿐이다.[27] 동시에 닫힌 사회의 폐단을 제대로 보여주며 당시 일본의 행정력이 얼마나 나쁜지도 보여준다. 앞서 마비키와 도둑질했다고 일가족을 생매장시켜 죽인 것은 당시에도 명백한 불법이었다.[28] 폭포에 떠밀려 빠져 죽을 뻔했다.[29] 대기근이 나타나면 대표적으로 많이 나오는 것이 인육을 먹는다는 것이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데 인육을 먹을 정도로 극한상황에서 자신이 살기 위해 약자인 어린이,노인 등을 살해하는 건 흔히 나타나는 일이다.[30]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다음 단계는 식인이다.[31] 사츠마 번의 지배를 받게 된 류큐는 거의 모든 부와 산물을 사츠마 번한테 조공을 바쳐야 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류큐의 특산품인 흑설탕이었다. 이 흑설탕에 류큐인이 손을 대면, 류큐에 주둔 중이던 사츠마 번의 무사가 칼로 그 류큐인의 손목을 잘라버릴 만큼, 사츠마 번의 류큐 지배는 매우 혹독했다. 출처: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들/도현신 지음/서해문집/1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