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퀴리

덤프버전 :


마리 퀴리의 주요 수상 이력 및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노벨화학상 수상자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
1911년
마리 퀴리



마리 퀴리
Marie Curie


본명
폴란드어
마리아 살로메아 스크워도프스카키리
Maria Salomea Skłodowska-Curie[1]
프랑스어
마리 스크워도프스카 퀴리
Marie Skłodowska Curie
국적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display: none; display: 러시아 제국"
행정구
]]
| [[폴란드|

폴란드
display: none; display: 폴란드"
행정구
]]
[2] (결혼 전)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제3공화국(결혼 후)
출생
1867년 11월 7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Military_ensign_of_Vistula_Flotilla_of_Congress_Poland.svg.png 폴란드 입헌왕국 바르샤바
(現 폴란드 마조비에츠키에 주 바르샤바)
사망
1934년 7월 4일 (향년 66세)
프랑스 제3공화국 파리
직업
물리학자, 화학자
신장
152cm[3]
묘역
프랑스 파리 팡테옹
학력
소르본 대학교
수상
노벨물리학상 (1903)
데이비 메달 (1903)
마테우치 메달 (1904)
액토니안 상 (1907)
엘리엇 크레슨 메달 (1909)
알버트 메달 (1910)
노벨화학상 (1911)
윌라드 깁스 상 (1921)
에든버러 대학교의 카메론 상, 치료학 부분 (1931)
배우자
피에르 퀴리 (1895년 결혼 ~ 1906년 사별)
자녀
장녀 이렌 졸리오퀴리
차녀 에브 퀴리
종교
가톨릭무종교(불가지론)
서명
파일:마리 퀴리 서명.svg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2. 대학과 결혼
2.4. 남편의 죽음
2.5. 교수 취임
2.6. 불륜 의혹
2.8. 성차별
2.10.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2.11. 말년
2.12. 사망
3. 마리의 가족들
4. 창작물에서
4.1. 미국의 영화 퀴리 부인(1946)
4.2. 한국의 뮤지컬 마리 퀴리(2018)
4.3. 영국의 영화 마리 퀴리(2019)
5. 기타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ierre_and_Marie_Curie.jpg

남편인 피에르 퀴리와 함께 찍힌 마리 퀴리의 사진

폴란드계 프랑스인 물리학자이자 화학자. 앙투안 앙리 베크렐과 함께 방사능 연구의 선구자이며 라듐폴로늄을 발견하여 노벨물리학상을 타고, 금속 라듐을 분리하여 노벨화학상을 탔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과학 분야에 진출하지 못했던 시대였는데도 각기 다른 분야에서 노벨상을 수상하는 커다란 업적을 남긴 대과학자다. 노벨상을 받은 최초의 여성이며, 또 성별을 불문하고 노벨상을 두 번 받은 최초의 인물이고, 서로 다른 과학 분야에서 수상한 것으로는 아예 역사상 유일하다.

퀴리 부인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으며[4] 폴란드 바르샤바 출생으로, 프랑스인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와 결혼해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으며 연구도 프랑스에서 했지만 폴란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저버리지 않고 조국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했다. 무엇보다 최초로 발견한 원소에 폴로늄이라는 이름을 붙여줄 정도의 애국자였다. 예전에는 조국인 폴란드의 2만 즈워티 지폐[5]와 업적을 이룬 곳인 프랑스의 500 프랑 지폐 모두에 마리 퀴리의 얼굴이 찍혀 있었다.[6] 그의 조국 폴란드는 2011년, 마리 퀴리 노벨화학상 수상 100주년을 기념하여 발행한 20즈워티 지폐에 그의 초상을 다시 넣었다.[7] 그래서 마리 퀴리는 프레데리크 쇼팽과 함께 현재도 폴란드와 프랑스 양국에서 대표적인 위인 중 한 명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2. 생애[편집]



2.1. 유년기[편집]


러시아 제국 치하 폴란드 입헌왕국 바르샤바 태생으로 본명은 '마리아 살로메아 스크워도프스카(Maria Salomea Skłodowska)'이다. 마리 퀴리로 훗날 알려지게 되는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는 1867년 11월 7일[8], 가난한 교육자 부부의 다섯 형제자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교사였다.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스크워도프스키(Władysław Skłodowski, 1832~1902)는 물리학을 가르치는 교감이었고, 어머니 브로니스와바 보구스카(Bronisława Boguska)는 바르샤바에서 손꼽히는 명문학교의 교장이었는데 폐결핵을 앓게 되면서부터 집에서 요양하게 된다. 부모님은 금슬이 좋았고 특히 아버지가 가정적이라서 마리 퀴리의 가정은 화목했다.[9] 마리 퀴리가 훗날 학자로서의 길을 가게 된 데에는 이런 가정환경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 치하의 폴란드[10]에서 마리 퀴리의 아버지가 폴란드어로 쓴 학생의 답을 정답으로 처리했다는 것 때문에 교감 자리에서 쫓겨나 평교사로 강등되다가 결국엔 교사직을 박탈당하면서 가족들의 불행이 시작된다. 아버지는 애국심이 깊어 러시아어를 쓴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평소 신중했던 아버지가 큰돈을 사기당하면서 생활이 급격하게 어려워진다.

결국 아버지는 집을 하숙 형식으로 바꾸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부업으로 생계를 꾸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하숙생 중 한 명이 장티푸스에 걸렸는데, 그 병이 마리 퀴리의 언니들에게 전염되었고, 둘째 언니인 브로니스와바는 다행히 회복했으나 첫째 언니 조피아가 병을 이기지 못하고 12살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또한 마리아가 10살이 되던 해에는 결핵으로 오랜 투병생활을 하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런 환경 탓인지 마리도 기관지염을 자주 앓았다.

마리 퀴리는 공부는 대단히 잘 했지만 가난한 데다가 바르샤바 대학교는 남녀공학이 아니라 남대[11]여서 여학생의 입학을 허가하는 프랑스유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집안이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유학자금을 모으기 위해 부유한 집안의 가정교사로 일하며 돈을 모으다가 23세가 되어서야 프랑스로 떠날 수 있었다.

가정교사로 일하던 시절에 하마터면 학업을 포기할 뻔한 일이 있었다. 가정교사로 일하던 부잣집의 아들과 사랑에 빠졌으나, 가난한 집안 여성을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남자 집안의 반대로 헤어졌던 것이다. 만약 이때 결혼에 성공했더라면 오늘날 우리는 위인전에서 '퀴리 부인', '마리 퀴리'란 책을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때 타이밍 좋게도 소르본 대학교에서 합격통지서가 와서, 어차피 집안 반대로 결혼하기 힘들었던 애인과 눈물로 이별하게 된다.

마리 퀴리의 10대 시절에 있었던 일로 1990년대 한국 중학교 국어교과서에도 실렸던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12] 당시 폴란드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러시아는 폴란드 입헌왕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는 이유로 폴란드를 직할령으로 삼고 폴란드의 학생들에게 러시아어와 러시아 역사를 배우게 했다. 어느날 러시아 장학사가 마리의 학교를 불시에 방문해서 평소 성적이 좋다는 마리에게 러시아어로 러시아의 위인들과 통치자, 주기도문 등에 대해 질문하자, 마리는 러시아어로 유창하게 대답하며[13] 장학사를 만족시켰다. 하지만, 마리 퀴리는 마음 속으로 폴란드인으로서 커다란 모멸감을 느끼고 장학사가 자리를 뜨자 담임을 부둥켜 안고 엉엉 울었다고 한다. 이는 마리 퀴리의 위인전에도 자주 등장하는 에피소드로 딸 에브 퀴리가 쓴 전기 《마담 퀴리》에도 언급된 내용이다. 마리의 폴란드에 대한 애국심을 강조하기 위해 사실을 바탕으로 각색한 이야기일 가능성도 있지만, 폴로늄의 이름을 러시아에서 독립도 안 된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 지었을 정도면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후 마리 퀴리는 폴란드 동부영토를 프리비슬린스키라는 직할령으로 만든 장본인인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내심 기뻐하기도 했다.


2.2. 대학과 결혼[편집]


마리 퀴리는 프랑스의 소르본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먼저 프랑스로 가있던 둘째 언니 브로니스와바 스크워도프스카(1865–1939, 결혼 이후 이름은 브로니스와바 드우스카)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브로니스와바는 내과의사로 어느 정도 성공한 내과의사이자 사업가인 카지미에시 드우스키(Kazimierz Dłuski)[14]와 결혼하여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다. 언니와 형부는 마리 퀴리를 극진히 대접했으나, 마리 퀴리는 이런 과한 대접을 부담스럽게 여겨 하숙집을 구한 후 독립했는데, 가진 돈이 넉넉하지 못해서 저렴한 하숙집에서 생활비를 아끼며 지냈다.

그러나 이 하숙 생활 때문에 마리 퀴리는 난방이 잘 안 되는 방에서 추위에 시달리고 돈이 없다보니 음식조차 제대로 못 먹어 고생했다. 전기의 표현을 빌리자면, 물리를 공부하다 너무 힘들면 대수학을 공부하여 머리를 식혔다고 한다. 결국 제대로 먹지 못하여 영양실조로 쓰러지기도 했다. 어린이 위인전에서도 하루에 한 조각과 당근 하나만 먹으며 공부했다고 묘사할 정도이니, 실제로는 이보다 더했을 것이다. 다행히 이를 발견한 하숙집 주인이 빨리 의사를 불러 응급조치를 받아 목숨을 구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언니와 형부는 경악했고, 곧바로 마리 퀴리는 언니 집으로 끌려가게 된다. 그리고 강제로 스테이크를 실컷 먹어야 했다...[15] 언니는 울면서 그러다가 죽으면 어쩌냐고 슬퍼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언니는 어머니와 언니 조피아가 병으로 요절하는 것을 보았으니 마리 퀴리도 죽을까봐 걱정했던 것이다.[16] 마리 퀴리도 언니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진심으로 사과했다. 다만 폐를 끼치기 싫다며 언니 집에 지내지 않고 다시 하숙집에서 지냈는데, 대신 이전과는 달리 언니와 형부가 지원해준 돈으로 좋은 하숙집을 구하고 전보다 여유롭게 지내면서 공부에 전념했다고 한다.

마리 퀴리는 소르본 대학교에서 물리학수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당시 35세의 노총각이었던 피에르 퀴리를 만나 이듬해인 1895년에 소박한 결혼식을 올린 뒤 방사능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자녀는 딸 두 명(이렌, 에브)이 있었는데 이렌이 태어난 후 마리 퀴리가 에브를 가지기 전에 한 번 임신한 적이 있었으나 유산했고 그 후 에브를 낳았다.

참고로 언니 브로니스와바는 내과의사로 병원을 운영하며 평범하게 살았지만, 사업가인 형부를 설득하여 마리의 연구에 많은 돈을 연구비로 보태줬기에 마리와 피에르의 연구에 큰 기여를 하게 됐다. 이 때문에 폴란드 독립 이후에 브로니스와바 드우스카와 카지미에시 드우스키도 폴란드 정부에게 라듐 발견 공로자로 인정받아 치하장도 받고 폴란드 각종 국영사업권도 이어받아 큰 사업번영을 누렸다. 프랑스에서 마리 퀴리 라듐 연구소가 열린 뒤로 언니와 형부는 1925년에 바르샤바에 마리 퀴리 바르샤바 라듐 연구소를 설립했다. 여러 사정으로 연구소는 1932년에 개장했는데 남편이 병으로 죽고 나서 언니가 이 연구소장을 맡았다. 그녀도 마리의 딸과 친하게 지냈는데 위에 각주에서 서술되었듯이 브로니스와바는 딸 헬레나(Helena)를 1922년 30살로 잃었고 아들 야쿠프(Jakub)는 1903년 겨우 7살로 죽었기에 자손이 없었다. 때문에 경제적으로 넉넉했으나 가족이 없던 그녀는 남편이 죽고 나서 조카인 이렌과 에브를 친딸 같이 여기며 지냈으며, 마리 퀴리가 죽고 나서 이렌과 에브도 이모 브로니스와바를 엄마처럼 모셨다.


2.3. 노벨물리학상 수상[편집]


라듐은 방사선이 나오기 때문에 범죄자들이 사용하면 위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자연의 비밀을 알게 되어서 어떤 이익이 있을까요? 자연의 비밀을 안다고 해도 그것을 제대로 이용할 수 있을만큼 인간은 성숙한가요?

ㅡ 피에르 퀴리, 노벨상 수상식 연설

마리의 연구를 지켜보던 피에르는 부인의 연구를 도와주었고, 결국 두 사람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1898년 방사능 물질인 라듐폴로늄을 발견하게 된다. 이 업적으로 두 사람은 1903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이게 왜 물리학상인가 하겠지만 당시 방사능 현상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위배되는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E=MC2 으로 유명한 질량-에너지 등가 법칙은 한참 뒤에야 증명되었다.

그러나 폴로늄은 정치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킨 첫 번째 원소인데, 이때는 폴란드가 독립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로서는 이런 이름을 좋게 볼 수가 없었다.

원래 마리는 자기가 시작한 연구임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을 받지 못할 예정이었고, 피에르와 베크렐만 노벨상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당시 마리는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아니었기에[17] 논란이 일었던 것이다. 게다가 형광 유리 제작에 필요한 우라늄을 빼낸 피치블렌드 10톤에서 라듐폴로늄을 분리해내는 과정은 그야말로 단순 작업 노가다였다. 피치블렌드 원석 10톤을 아궁이에서 계속 가열해서 폴로늄 10g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남편 잘 만난 덕에 노벨상을 받았다'고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그래도 마리의 업적을 인정하는 사람도 많았고, 남편인 피에르가 마리와 더불어 공동 수상하게 해달라고 죽어라 탄원서를 올린 까닭에 부부 공동수상이 겨우 가능했다. 그리고 마리와 피에르는 단숨에 세계적인 천재로서 유명해졌다.


2.4. 남편의 죽음[편집]


비가 내리던 1906년 4월 19일, 피에르가 마차 바퀴에 깔리는 교통사고로 즉사, 만 46세[18]로 사망하는 참변이 일어났다. 딸 에브 퀴리[19] 가 쓴 전기에는 바퀴에 머리가 깔려 사망했다고 적혀 있다. 어린이 위인전에조차 '부서진 머리뼈에 붕대를 감았다'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

피에르는 아침에 대학으로 출근하던 길이었으나 당시 비가 와서 앞이 잘 안 보였고,[20] 화물마차를 운전하던 마부는 술이 덜 깬 상태였다. 마부는 횡설수설하여 어느 미친 놈이 자살했다는 둥 헛소리를 했지만, 사고현장에서 어느 사람이 신문에서 본 노벨상 수상자와 닮았다고 증언하자 경찰이 와서 소지품을 보고 피에르 퀴리임을 확인했고, 이에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 마부를 거의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팼다고 한다. 경찰들이 막지 않았으면 정말 죽었을 것이라고. 이 마부는 프랑스의 위대한 과학자를 죽인 살인죄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현대의 기준에서 보면 명백한 음주운전에 해당[21]되기 때문에 자업자득이지만. 피에르의 죽음을 경찰에게 연락받은 대학 측 관계자들은 이 소식을 부인에게 어찌 전해야하느냐며 난감해했다. 결국 피에르와 친하게 지내던 대학교수 동료들이 직접 집으로 가서 마리에게 참사를 이야기했고, 당연히 마리는 미치도록 슬퍼했다.

지금은 단종된 프랑스 프랑 500프랑에 마리 퀴리와 함께 피에르 퀴리도 그려져 있었는데, 그 왼쪽에 있는 마차는 마리가 고안한 방사능 물질 운반차다.


2.5. 교수 취임[편집]


피에르가 죽은 이후 소르본 대학교에서는 마리에게 어떤 대우를 해야 할지를 놓고 고민했다. 마침 피에르가 죽으면서 교수 자리도 하나가 비었기에, 피에르의 후임으로서 방사능을 연구할 사람도 결정해야 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소르본 대학교는 마리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기로 결정했고, 이렇게 해서 마리는 프랑스 고등교육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학 교수가 되었다.

교수직 인수 후 들어간 첫 수업에서 인사만 간단히 한 후 정확히 남편의 마지막 강의 이후의 진도를 나갔다고 한다. 보통 교사가 바뀌면 새로 온 교사는 자기 나름의 커리큘럼대로 다시 수업을 진행하는데[22], 마리의 남편에 대한 존중이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수업에는 첫 여교수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학생이 아닌 사람들이 많이 참석했는데, 이들은 마리가 죽은 남편에 대한 감상적인 이야기를 할 거라고 기대했다가 강의만 하는 걸 보고서 당황하고 실망했다고 한다. 당연히 위대한 업적을 쌓은 교수로서 강의만을 해야 하는 것이 맞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이 여성에 대해 가진 편견 또한 나타난 일화라고도 할 수 있다.


2.6. 불륜 의혹[편집]


그러나 이러한 위대한 인물도 생전에 사생활 문제로 구설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바로, 동료 과학자 폴 랑주뱅과의 불륜 의혹이다. 다만 영어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기레기의 의한 오보라는 주장도 있다.

마리야 이미 남편이 사망한 뒤라 새 사랑을 시작해도 문제될 게 없었지만 문제는 폴 랑주뱅으로 당시 폴은 유부남이었고 아이까지 있었다.

폴 랑주뱅[23]은 가정생활이 좋지 못했다고 한다. 처가와 아내 잔은 끊임없이 랑주뱅을 구박하였고, 심지어 폭력까지 행사했다. 그런데 사실 랑주뱅의 잘못도 없지는 않다. 아내한테 잘해주지도 않으면서 특이한 성격의 자신을 이해하기만을 바라니 이런 남편을 아내가 좋아할 리 없다. 장모와 처제도 아내한테 잘하지 않는 사위이자 형부인 랑주뱅을 정말 싫어하여 걸핏하면 말다툼을 벌였다. 하루는 랑주뱅과 심하게 말다툼하던 장모가 폭발해 사위에게 철제 의자를 집어던지고 말았는데 이게 랑주뱅의 얼굴에 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채로 출근한 사건도 있을 지경이었다. 이후 그는 퀴리 부부로부터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고 한다. 그러다 남편이 죽고 남편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서로 위로해주다 보니 연인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친애하는 폴, 어제 저녁과 밤은 당신과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들을 생각하며 보냈어요. 지금도 당신의 선량하고 부드러운 눈과 매력적인 미소를 떠올립니다. 당신 존재의 모든 감미로움을 다시 발견할 순간만을 생각하고 있어요.” -마리 퀴리가 랑주뱅에게 보낸 편지 일부 발췌-

하지만 결국 아내 잔에게 들켜 싸움이 일어날 뻔했지만 이들과 친한 물리학자 장 페랭과 신문사 편집자였던 잔의 형부 앙리 부르주아의 중재로 헤어진다는 조건 하에 사건은 잘 마무리되는 듯싶었다. 하지만 잔이 고용인을 통해 조사해보니 그 둘은 지속적인 만남을 계속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아내와의 관계에서 아들 둘을 낳았으나 이 사건 때문에 부부 사이는 파탄이 나버려 랑주뱅이 가출하다가 결국엔 부부가 별거하고 만다. 나중엔 잔도 지쳐서 자식들에게만 신경쓰고 남편이 비서를 정부로 삼는 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가냘픈 손으로 내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마그리트, 랑주뱅을 그 자신으로부터 구해줘야 해요. 당신이나 나는 강한 사람들이지만 그는 연약해요. 그는 이해와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제노바로 가는 도중 마리 퀴리를 회상하는 마그리트-

스웨덴에선 이 일로 소란이 있었지만 무사히 노벨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프랑스에선 이 일을 여러 신문사에서 떠드는 상황인지라 여론은 결코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편지와 함께 독설로 인해 결투까지 벌어졌지만 다행히 죽은 사람은 생기지 않았다. 결국 스웨덴은 노벨상을 거절하라는 편지를 주기에 이른다.

허나 마리 퀴리는,

“상은 과학자의 사생활이 아니라 업적에 주어지는 것”

이라는 말과 함께 시상식에 참석하고 노벨상을 다시 한 번 받게 된다. 이러한 사건은 랑주뱅과 잔, 그리고 마리 퀴리까지 모두 헤어지게 만들었다.

“마리 퀴리는 여전히 나에 대한 애정과 내 슬픔에 대한 동정을 보여준다”, “그의 애정없이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겠다” -1915년 랑주뱅이-

사실 동료들은 마리 퀴리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진 못한 대신 숨겨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1911년 마리 퀴리를 벨기에 브뤼셀 솔베이 회의에서 처음 만난 후 이런 소란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그녀(마리 퀴리)는 똑똑하고 열정적이지만, 누구에게나 치명적일만큼 매력적이지는 않다.'[24][25]라는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언론의 입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마리는 자살까지도 생각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마리는 기자들을 기피하게 되며, 이 태도는 1920년대에 멜로니라는 미국 기자와 만날 때까지 유지된다. 마리를 위해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라듐 1g을 선물한 인물이 이 사람.

이때 마리는 하도 시달린 나머지 알프스로 딸들과 도망쳤고 거기서 아인슈타인을 만나 교류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이 마리와 산책을 하다가 문득 던진 한마디가 "엘리베이터가 허공에서 떨어지면 거기 탄 사람들은 어찌될까??"였는데 이는 일반 상대성 이론의 단초가 되었다고 한다. 마리가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마리의 손녀 엘렌의 남편, 즉 손녀 사위의 이름은 바로 미셸 랑주뱅, 즉 폴 랑주뱅의 손자다. 폴 랑주뱅은 이후에도 장녀 이렌 퀴리의 지도교수를 맡았고, 마리를 비롯한 퀴리 가문과의 친분도 계속 이어갔기 때문에 새삼 놀라운 일은 아니다는 평이 많다.

마리 퀴리와 불륜을 맺은 물리학자,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934) 노벨상을 두 번 탄 여성 과학자


2.7. 노벨화학상 수상[편집]


여러 시련을 이겨내며 1910년 금속 라듐을 분리해낸 공로로 1911년 노벨화학상을 타면서 최초의 노벨상 2회 수상자가 되었다. 이후 2회 수상자는 4명으로 늘어났지만 다른 세 명은 분야가 같거나 2회 중 하나가 과학 부문이 아닌 경우고, 과학과 관련된 서로 다른 분야(물리학, 화학)에서 수상을 받은 사람으로서는 유일하다. 다른 분야로 2개를 탄 다른 인물은 라이너스 폴링인데 하나가 평화상이다.[26] 이로써 과학계에서 이름이 높아졌지만 마리에 대한 프랑스의 차별은 여전했고, 그것이 1911년에 드러나게 된다.


2.8. 성차별[편집]


프랑스 측의 방해공작도 모자라 보수적인 과학계의 성차별로도 고생을 많이 했다. 1911년 1월에 마리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후보가 되지만 2표 차이로 떨어진다. 이민자이고 여자인 마리를 과학 아카데미 같은 곳에 들어오게 할 수 없다는 높으신 분들의 주장과, 위에서 소개한 스캔들이 시너지 효과를 냈기 때문이다.[27]

그리고 이들은 여성은 영원히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될 수 없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1962년까지 유지되었고, 결국 퀴리 부부의 제자이자 퀴리 연구소 소속으로 1939년 프랑슘을 발견한 마르게리테 프레이가 처음으로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여성 회원이 되었다.

또한 여성은 교수가 될 수 없다는 관행에 따라 연구실 주임밖에 못했다.


2.9. 제1차 세계 대전[편집]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마리는 스스로 개발한 '리틀 퀴리'라는 자동차로 전선을 누비게 된다. 이 차에는 X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치가 붙어 있었으며, 20대 정도가 만들어져서 부상병들을 진단하는 데 큰 활약을 했다. 이때 마리에게 도움을 받은 부상병은 100만 명이 넘는다. 그러나 훗날에 밝혀진 바로는 이때 마리가 X선에 과다하게 노출된 것이 건강에 큰 무리를 주었다고 한다.[28]

전쟁 당시 마리는 자신이 받은 노벨상 메달까지 팔아서 프랑스의 전쟁 수행에 기부하려 했지만, 프랑스 중앙은행에서 사양하는 덕분(?)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받은 노벨상 상금으로 전쟁 채권을 사는 방식으로 동참했다.

마리의 딸인 이렌도 어머니와 함께 이동식 X-선 장치 운영에 참가함으로써 무공훈장을 받지만, 막상 마리에게는 어떠한 포상도 주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마리는 이때 국가에 전 재산을 바쳤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동전 한푼 없는 신세가 되고 만다.


2.10. 제1차 세계 대전 이후[편집]


전쟁이 끝난 후 마리는 연구소로 돌아가지만, 연구소에는 라듐이 1g밖에 없었던 데다가 여기저기서 의학용으로 라듐을 빌려달라는 요청이 쇄도했기에 연구에 어려움을 겪는다. 다행히 미국에서 마리를 인터뷰하러 온 저널리스트 멜로니가 그 사연을 듣고 모금 운동을 해서 라듐 1g을 구입할 돈을 마련하게 된다. 이때 멜로니는 마리에게서 자기 소유의 라듐은 1g도 없고 라듐이 너무 비싸서 구입할 수가 없다는 말을 듣고 놀라서 "부인께선 라듐에 대해 특허권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는데, 마리는 없다고 하고서는 "라듐은 하나의 원소이며, 모든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한다. 마음만 먹으면 백만장자가 될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인류를 위해 포기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프랑스 정부는 그제서야 자신들이 그동안 마리를 너무 박대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마리가 미국으로 라듐을 받으러 가면 "어째서 프랑스 정부는 저렇게 훌륭하신 분을 박대하는가?"라는 소리가 나올 게 분명했다. 그래서 프랑스 정부는 재빨리 마리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사양했다.

미국에 간 마리는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비로소 업적에 걸맞은 대우를 받게 된다. 이전까지는 두 딸들과 주변 사람들도 '마리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니다'라고 착각하고 있었으나 이날 이후로는 차마 그럴 수 없게 되었다. 훗날 마리의 차녀 에브는 어머니의 전기를 쓰면서 이 사실을 기록했다.

이후 마리는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라듐을 받았는데, 실제로는 수여식 때는 상자만 받았을 뿐이고 진짜 라듐은 귀국할 때 안전요원과 함께 배에 실렸다. 이는 라듐이 위험한 물질이므로 그만큼 주의깊게 관리되어야 했기 때문이라고 하며, 그냥 주면 공개살인에 가까운 위험한 행위를 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2.11. 말년[편집]


마리가 귀국한 후 프랑스 정부는 마리에게 국가상을 수여하면서, 또 거부 소리가 나올까봐 수여식장에서 수여 거부권을 박탈하는 기행을 저질렀다. 어쨌든 이 상에 딸려온 종신연금 덕분에 마리도 가난으로부터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고, 세계 각국을 방문하며 수많은 상을 받게 된다.

1923년에 프랑스 의학 아카데미는 마리를 회원으로 받아들인다. 마리 본인은 입후보한 적이 없었지만 의학 아카데미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그를 추천했으며, 다른 후보들도 마리의 입후보 소식을 듣고 모두 자발적으로 사퇴했기에 경쟁자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세계 각국에서 개최된 다수의 강연, 회의에 참석하였다. 특히 1925년에는 1차대전 후 독립한 모국 폴란드를 방문하는 기쁨을 갖기도 했다.


2.12. 사망[편집]


그러나 말년에 마리는 계속된 방사능 연구 탓에 건강이 악화되어 방사선 피폭에 의한 악성 빈혈[29][30]으로 몹시 고생하며 요양원을 전전하다가, 1934년 7월 4일 향년 66세로 사망. 죽기 직전에는 여러 생리 기능이 완전히 망가져서, 인체의 발열 기능마저 정지할 정도였다.[31] 하지만 방사능 노출도에 비하면 오래 살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마리는 라듐을 주머니에 대강 넣고 다녔던 사람이었다.[32] 오히려 당시의 평균수명을 감안하면 방사선 피폭자 치고는 더더욱 오래 산 셈이다.[33]

훗날 마리가 팡테옹에 안장될 때 시신에 대한 방사능 측정이 이뤄진 결과, 잔류 방사능이 거의 남지 않았기에 라듐에 의한 피폭보다는 1차대전 당시 부상병들을 진단하는 과정에서 X선에 과다하게 노출되었기에 병을 얻었다는 설에 무게가 실리게 되었다.


3. 마리의 가족들[편집]


마리 퀴리 하면 그 가족의 능력자 기질도 유명하다. 특히 마리의 딸과 사위들 역시 범상치 않은 삶을 살았다.

장녀 이렌 졸리오퀴리는 부모의 뒤를 이어 과학자가 되었고, 남편 (=마리의 첫째 사위)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와 함께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였다.

차녀 에브 퀴리는 당대 찬사받던 미인이었으며 피아니스트 겸 저널리스트 겸 작가로 활동하였다. 에브의 남편 헨리 라부아스 주니어는 유니세프 활동으로 인한 노벨 평화상을 받으면서[34] 또 다른 노벨상 수상자가 된다. 퀴리 부부까지 합치면 한 집안에 노벨상 수상자만 5명으로 진정한 노벨상 가문인 셈이다.

유일하게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한 차녀 에브가 "일부러 과학 안 하는 남편이랑 결혼했더니 평화상을 받아 와서 본인만 가문의 수치가 됐다"며 드립을 칠 정도. 물론 차녀인 에브도 노벨상만 못 탔을 뿐 이들 못지 않게 대단한 사람으로 피아니스트이자 작가, 게다가 유니세프 활동가로서 여러 업적을 쌓고 수많은 상과 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피폭당해 장수하지 못한 어머니와 언니와는 달리 100세 이상 장수했다. 하지만 마리 퀴리도 방사능에 계속 노출된 것에 비하면 나름 장수한 셈이다. 방사능 피폭이 있었던 이렌 졸리오퀴리는 60을 못 넘기고 죽었지만 1927년생인 이렌의 딸과 1932년생인 아들은 2023년 현재에도 생존해 있으니 장수 유전자가 있다고 할 수 있다.


4. 창작물에서[편집]


  • 한국에서 위인전에 단골로 소개되었는데 1938년 딸 에브 퀴리가 쓴 전기 "마담 퀴리"를 직역한 퀴리 부인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가끔 퀴리 부부로 나올 때도 있지만 그래봤자 마리의 유년시절부터 시작하고 피에르는 결혼 이후에나 등장한다. 위인전의 마리의 유년시절에 언급되는 일화중에 러시아 장학사가 역대 러시아 황제를 외울 것을 강요하자 억지로 외운 뒤 눈물을 흘리는 장면도 등장한다. 한국에서는 번역이 잘못되어 표트르 대제파벨 1세가 영어식 발음인 피터와 폴로 나온다.

  • 폴아웃 4의 동료 중 하나인 퀴리는 여러모로 마리에게서 따온 게 많은 캐릭터다. 이름부터 퀴리인 데다[35] 과학적인 걸 매우 좋아한다. 그리고 호감도 올리는 방법에 방사능 피폭되기나 핵탄두 발사기인 팻 맨을 발사하는 것도 있다.

  • 미국 MTV에서 방영된 성인용 애니메이션 클론 하이에서도 등장한다. 클론 하이는 역사상에 있던 위인들의 복제체들이 다니는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하는데, 문제는 마리 퀴리가 방사선에 피폭당해 죽었다는 걸 고증해서 그녀의 복제체는 무슨 슈퍼 뮤턴트마냥 기괴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다만 외모만 그렇지 머리는 똑똑하고 인성도 좋은 편. 마지막 화에서는 마하트마 간디의 복제체와 이어진다.


4.1. 미국의 영화 퀴리 부인(1946)[편집]



1943년 미국에서 《Madam Curie》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제작되었다. 한국에서는 《퀴리부인》이라는 제목으로 1946년 12월에 개봉하였다. 감독은 작은 아씨들(1949), 쿠오 바디스(1951) 등을 연출한 머빈 러로이. 그리어 가슨이 마리 퀴리 역을 맡았으며, 월터 피전이 남편 피에르 퀴리 역을 맡았다. 밴 존슨이 기자 역으로 나온다. 크레딧에는 오르지 않았지만 올더스 헉슬리가 대본에 참여했다.

이브 퀴리가 쓴 "퀴리 부인"을 토대로 만들었는데 이브 퀴리는 나름 괜찮다며 호평했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남우주연상을 비롯하여 7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으나 1개도 받진 못했다.

배급은 MGM. 194만 달러로 만들어져 46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였던 1890년대 소르본 대학생 시절부터 피에르 퀴리의 사망 이후까지 다룬다. 라듐의 발견 등 성취 과정 묘사에 비약이 있다.

원래는 유니버설에서 아이린 던에게 마리 퀴리 역을 맡길 생각으로 이브 퀴리에게서 영화화 판권을 샀으나 흐지부지되면서 MGM에 되팔았다. 이에 MGM 간판이었던 조운 크로퍼드가 역을 원했으나 MGM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거부했고, 그레타 가르보도 나섰지만 전작같은 로맨스 코미디를 찍으라고 강권하면서 퀴리 역은 주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가르보는 MGM과 관계가 어그러진 끝에 그대로 영화계에서 은퇴했다. 감독도 조지 큐코어가 맡으려다가 앨버트 루인에게 넘어갔는데 촬영 직전에 머빈 러로이로 교체 당했다.

4.2. 한국의 뮤지컬 마리 퀴리(2018)[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마리 퀴리(뮤지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18년 그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뮤지컬이 제작되었다.


4.3. 영국의 영화 마리 퀴리(2019)[편집]



2019년에 영국에서는 그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전기 영화가 제작되었다. 원제는 《Radioactive》이다. 한국에서 이 작품은 2020년 11월에 개봉되었다. 한국에서의 제목은 《마리 퀴리》이다. 감독은 페르세폴리스를 제작하기도 했던 이란계 프랑스인 만화가 출신인 마르잔 사트라피이고, 배우 로저먼드 파이크가 마리 퀴리 역을 맡아 연기했다. 여담으로 안야 테일러조이가 딸인 이렌 졸리오퀴리 역을 맡았다.


5. 기타[편집]


  • 남편 피에르 퀴리도 충분히 역사에 남을 훌륭한 과학자다. 결정학, 전자기학, 방사선 연구의 선구자이며 특히 형 자크 퀴리와 함께 압전효과를 발견한 공로가 있다. 쿼츠 시계 및 고주파수가 필요한 전자회로, 기타의 픽업,[36] 라이터가스 버너의 점화부, 초기형 점화 플러그 등 응용 분야가 무궁무진하다. 무엇보다 공부를 독학으로 했음에도 노벨상을 받을 정도의 업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분명 탁월한 과학자다. 아내가 워낙 유명해서라기보다는 그저 불의의 사고로 너무 일찍 죽은 것이 아쉬운 점으로, 오래 살았다면 부부가 함께 이름을 날렸을지 모른다. 만에 하나 피에르 퀴리가 마리의 능력 및 성과를 조금이라도 덜 인정해줬다면, 오히려 마리가 '과학자 피에르 퀴리의 아내' 만으로 묻혔을 수도 있다.[37]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명성을 얻은 후에도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라는 찬사를 바쳤다.

  • 마리는 의사들을 싫어했는데, 이는 의사들이 죄다 진료를 하고도 진료비도 안 받아가는 사람들이어서였다. 그런 의사들이 마리에게 진료비를 받지 않은 이유는, 마리가 라듐 관련 기술을 무료로 공개했기 때문이다. 라듐의 방사선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환자의 체내에 박힌 파편을 찾을 수 있게 하여 수많은 생명을 살렸는데, 이 기술로 특허만 냈다면 엄청난 돈을 긁어모을 수 있었겠지만 마리는 대의를 위해 이를 포기했다. 그렇기에 의사들은 마리에게 진료비를 챙기지 않았다. 덤으로 시아버지가 유명한 의사이기도 했는데, 마리가 의학 아카데미에 비교 후보 없이 가입된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 노벨상을 탄 후, 마리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훈자로 결정되지만 그것을 사양했다. 그래서인지 제1차 세계대전 때 수많은 부상병을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정부는 훈장을 주지 않았다. 에브가 쓴 어머니의 전기에서는 "(부상병을 구한 공로로) 훈장을 주었다면 어머니는 그것을 받았을 것"이라는 언급이 있다. 나중에 마리 퀴리가 미국에 라듐을 받으러 간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프랑스 정부는 다급하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려고 했지만 사양했다. 다행히 이렌과 에브(UNICEF 활동 덕분에) 는 둘 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손자인 피에르도 광합성 연구에 대한 공로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 랑주뱅과의 스캔들을 보도하면서 마리를 비난했던 신문들이 나중에 마리에게 붙여준 수식어는 "우리 민족의 가장 순수한 대표자"였다.

  • 사후 61년이 지난 1995년 4월 20일,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프랑스 팡테옹에 남편과 같이 이장되었다. 이 이장식에는 마리의 딸인 에브와 손자 손녀들, 그리고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과 폴란드 대통령 레흐 바웬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참석했다. 방사능 원소를 연구하느라 백혈병으로 만 58세에 죽은 이렌과 달리, 에브는 당시 아직 생존했기에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다. 마리는 유명인의 아내로서가 아닌, 자신의 업적으로 팡테옹에 묻힌 최초의 여성이다.

파일:external/6bisruedemessine.files.wordpress.com/pantheonmc1838.jpg
파일:external/querencia.smugmug.com/637938598_ymKGe-L.jpg

  • 이장식 이후의 여론조사에서는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4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여성 중에서는 단독 1위.

  • 마리의 유품은 90년대에 박물관에 기증되었는데, 이때 이렌의 딸인 엘렌은 "이거, 방사능을 띠고 있어요."라고 말했고, 곧바로 대소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엘렌의 증언에 따르면, 그 말을 듣는 순간 박물관 직원들의 표정이 싹 변했다고. 직원들은 곧바로 비닐로 유품을 덮는, 실로 적절하지 못한 대응을 했지만 곧 전문가를 불러 제대로 된 처리 작업을 했다고 한다.

파일:external/ae80e0cc91f4cfec28567052ebd2d9a555ed28b45f0a69c33d8607133cf9e822.jpg

  • 파리 대학교 중 파리 제6대학교는 마리 퀴리와 남편 피에르 퀴리의 이름을 따서 "피에르·마리 퀴리 대학교(Université Pierre-et-Marie-Curie)"로 불린다. 이름처럼 과학의학에 특화된 대학교이다.

  • 마리 퀴리가 연구했던 연구소는 라듐을 비롯한 방사능 물질 연구 탓에 오랫동안 방사능에 노출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닫혀있고 프랑스 정부의 엄격한 관리가 이뤄지고 있다.#

  • 원소 중 하나인 퀴륨은 퀴리 부부를 기려 지은 원소명이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6 18:11:43에 나무위키 마리 퀴리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결혼 전에는 마리아 살로메아 스크워도프스카 (Maria Salomea Skłodowska).[2] 당시에는 분할되어 프리비슬린스키라는 러시아의 영토였기 때문에 주권이 없었다.[3] 키가 5피트(152cm)라고 기록되어 있다.출처[4] 이는 그냥 딸인 이브 퀴리가 지은 어머니의 전기 제목이 <퀴리 부인전>, 마담 퀴리였기 때문이다. 이 제목을 직역해온 한국의 전기 위인전도 대부분 이를 따라 퀴리 부인이라고 지었기 때문에 마리 퀴리라는 인명보다 퀴리 부인이라는 호칭이 더 익숙한 것.[5] 신 즈워티가 아닌 구 즈워티.[6] 500프랑에서는 단독이 아니고 피에르와 부부동반으로 올라왔다.[7] 6만 매 한정 발매.[8] 바르샤바에 위치한 그녀의 생가는 현재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9] 여담으로 마리 퀴리와 그녀의 두 딸 이렌 졸리오퀴리(Irène Joliot-Curie)와 에브 퀴리(Ève Curie) 또한 부부 금슬이 좋은 편이었다. 다만 이렌은 방사능 피폭으로 58세로 세상을 떴으며 남편 역시 같은 나이로 죽었다. 에브는 화학 쪽에 참여하지 않아 만 102살 장수를 누렸으며 50세에 혼인했다.[10] 위인전에는 마리의 친한 반친구 오빠가 폴란드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서 총살당했지만 구할 방법이 없어 슬프게 다 울었고 장례식에서 다들 통곡해야 했다는 일화도 나와있다.[11] 이 때는 남대였지만 나중에 남녀공학으로 바뀐다.[12] 참고로 해당 에피소드는 러시아 제국의 황제인 표트르 대제를 피터, 파벨 1세를 폴이라고 영어식 인명으로 표기했다. 중역으로 인한 오류로 보인다.[13] 실제로 마리는 폴란드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 3개 언어를 할줄 알았다.[14] 1855–1930. 정확히는 이 형부도 폴란드계 이민자 후예였다. 사업가다 보니 마당발이었는데 폴란드인들과 매우 친했고 폴란드어도 잘 했기에 아내나 처제 마리 퀴리에게도 매우 잘 대해주었다. 폴란드 독립에도 경제적인 후원을 해서 폴란드가 독립하고 나서 폴란드로 가서 사업을 크게 차리기도 했는데 심지어 폴란드 초대 대통령인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와도 매우 친했다고 한다. 그는 아내와 함께 동족인 폴란드인, 망명자들을 위한 폴란드어 살롱을 운영하면서 폴란드 독립운동가들을 주선하기도 하고 독립 관련 운동에 돈도 후원했다. 아내와 프랑스 파리에서 1남 1녀를 얻었으나 둘 다 일찍 요절했다.[15] 우스개가 아니라 딸 에브가 쓴 '마담 퀴리'에서도 실제로 형부가 처제에게 필요한 약이라고 하더니만 고급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는데 이때 마리 퀴리가 고기를 잔뜩 주문한 걸 정신없이 먹었다고 한다. 1981년 삼성당에서 낸 퀴리 부인 위인전 만화책에서는 우습게 나오는데 글귀로 실제로 '마리는 이렇게 고기를 약 대신 먹었다고 한다'라고 서술되었다.[16] 이 둘째 언니도 사실 그때 큰 언니와 같은 병에 걸렸었으나 언니와는 달리 회복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막내 동생이 쓰러졌으니 크게 걱정이 되는 건 당연지사.[17] 물론 여성은 가입이 제한되어 있었고 마리도 가입하지 못했다. 심지어 20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과학계의 지배적인 의견을 가장한 편견은 여성의 정신 구조로는 과학을 할 수가 없다라는 지금 보면 성차별 그 자체인 이유였고, 실제로 여권 개방 운동에서 제일 치열하게 싸운 분야 중 하나가 과학 분야이다(바바라 매클린톡의 일화와, 리처드 파인만의 자서전에서 파인만이 자신의 여동생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부분을 참조할 것).[18] 47세 생일을 한 달여 앞둔 시점이었다.[19] 아빠의 마차 사고 당시 불과 생후 16개월이었다.[20] 파리는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연중 강수량이 일정한 대신 일년내내 비가 주룩주룩 오고 날씨가 우중충하곤 한다.[21] 그것도 국가적 영웅이자 세계구급의 뛰어난 학자를 죽음으로 이끈 대형사고. 당시 법원 밖에서는 그 마부의 목을 자르라는 항의까지 있었다. 당시만 해도 프랑스는 사형단두대참수했기 때문에 결국 사형시키라는 뜻이다. 그나마 마부가 일부러 한 짓이 아니어서 사형만은 면했던 것. 무기징역으로 살던 마부는 1928년에 교도소에서 죽었다. [22] 회사의 사장이 바뀌면 인사나 조직이 어느 정도는 개편되기 마련이고 군주제 국가에서 왕이 새로 즉위하면 국가 정책이 크든 작든 달라지기 마련인 것과 똑같다.[23] 참고로 이 분은 유한 온도에서의 동역학을 나타내는 랑주뱅 방정식을 제안하였다. 열렬한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기도 했다. 그 덕에 프랑스 침공 당시 고초를 겪기도 했다.[24] 그러니깐 이런뜻이다. "마리 퀴리는 그렇게까지 매력적이지 않으니깐(...), 불륜설은 말이 안된다."[25] She has a sparkling intelligence, but despite her passionate nature she is not attractive enough to represent a danger to anyone.[26] 그래도 달리 말하면 세계에서 유일하게 노벨 과학상과 평화상을 모두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폴링은 2차대전 당시 나치에 반대하는 운동을 했고 승전 후에도 미국 정부에게 공산주의자라고 몰리면서까지(그 예로, 과학 관련해 체코슬로바키아에 한 번 갔다는 이유로 미국 정부가 여권을 압수한 일이 있었다) 핵무기 사용 금지와 세계정부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다닌 과학계의 양심이다. 여담으로 다른 노벨상 2회 이상 수상자들은 타인과 공동 수상을 한 반면 폴링은 유일하게 2회 모두 단독 수상을 했다. 게다가 이 당시 매카시즘으로 출국금지를 받아 유럽과의 교류가 차단되지 않았더라면 DNA 구조의 비밀에 더 다가가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27] 이러한 성차별 때문에 노벨상도 못받을 뻔했는데, 마리에겐 노벨상이 수여되지 않을 예정이라는 사실을 사전에 알게된 남편 피에르 퀴리가 끈질기게 청원을 올리고 힘 써준 덕에 노벨상만큼은 받을 수 있게 되었다.[28] 이는 남편 피에르 퀴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검시를 해보니 방사능 노출에 의해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고 한다. 사고가 없었어도 몇 년 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정도로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였다.[29] 과도한 피폭으로 골수조혈모세포가 모두 파괴되어 피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조혈모세포는 방사능에 가장 취약한 세포 중 하나다. 현대에 조혈모세포 이식을 할 일이 있으면 먼저 기존의 조혈모세포를 모두 죽여야 하는데, 이때 이를 위해 환자에게 방사선을 일부러 쬐게 하는 방법을 쓴다.[30] 말년에는 몸이 허약해져 백짓장 같은 얼굴로 겨우 숨만 쉴 정도였고, 두 눈은 거의 실명 상태였다. 이외에도 방사성 물질과 가장 자주 접촉했던 손가락은 마비되었으며, 상처 자리에서는 고름이 흐르고, 고열이 지속되어 몹시 괴로워하였다.[31] 마리는 이에 대해 “열이 내려서 편안해졌다.”고 말했다. 당시 마리는 계속되는 고열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32] 출처: 과학동아. 마리 퀴리의 유품인 논문이나 요리책 등은 방사능을 띄고 있으므로, 보고 싶으면 보호의를 착용해야 한다. 퀴리 부부가 라듐을 분리할 때 1주일에 1렘씩 방사선을 뒤집어썼고 그 이후에도 방사선에 자주 노출되었는데, 이는 방사능 개발의 선구자의 숙명이었다. 휘하의 연구원들은 모두 안전수칙을 철저히 지켰다. 이는 스펀지 45회에서도 소개되었다.[33] 장녀인 이렌은 58세에 방사능 사고로 인한 피폭으로 목숨을 잃었지만 차녀인 에브 퀴리는 무려 102세 까지 천수를 누린걸 보면 방사능 피폭만 아니었더라면 마리도 꽤 장수했을지도 모른다.[34] 정확하게는 개인이 받은 게 아니라, 유니세프라는 단체가 수상한 것이다. 다만 단체 대표로서 헨리 라부아스 주니어가 시상식에 참가했다.[35] 본래는 미스 내니인 C.V.R.I.E(Contagions Vulnerability Robotic Infirmary Engineer, 전염성 취약성 로봇 의료 엔지니어)이지만, 스스로 이렇게 바꿨다.[36] 일렉트릭 기타의 픽업이 아니라 일렉트릭 어쿠스틱 기타에 사용되는 피에조 픽업이다. 일렉트릭 기타의 픽업은 마이클 패러데이가 발견한 전자기유도현상을 이용한 것이다.[37] 두 사람의 노벨상 공동 수상도 당초 피에르의 단독 수상으로 예정되었지만, 피에르의 간곡한 요청으로 마리도 공동 수상을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