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드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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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드사이의 역임 직책


첼시 FC 주장

데니스 와이즈
(1993~2001)

마르셀 드사이
(2001~2004)


존 테리
(2004~2017)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디디에 데샹
(1995~2000)

마르셀 드사이
(2000~2004)


파트리크 비에라
(2004~2005)


마르셀 드사이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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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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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FIFA 월드컵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마르셀 드사이의 기타 정보







프랑스의 前 축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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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마르셀 드사이
Marcel Desailly
출생
1968년 9월 7일 (55세)
가나 아크라
국적
[[프랑스|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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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 [[가나|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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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신체
188cm | 체중 97kg[1]
포지션
센터백, 수비형 미드필더
소속
선수
FC 낭트 (1986~1992)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92~1993)
AC 밀란 (1993~1998)
첼시 FC (1998~2004)

알 가라파 SC (2004~2005)
카타르 SC (2005~2006)
국가대표
116경기 3골 (프랑스 / 1993~2004)

1. 개요
2. 선수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4.3. 수훈
5. 여담



1. 개요[편집]


프랑스의 前 축구 선수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의 최초이자 유일한 UCL 우승을 이끌고, 밀란 제너레이션의 당당한 일원이자 데니스 와이즈, 지안프랑코 졸라, 아이두르 구드욘센 등과 함께 로만 이전 첼시의 아이콘이다. 또한 비셴테 리사라수, 로랑 블랑, 릴리앙 튀랑과 함께 '철의 포백'을 이루어 레 블뢰1998 월드컵, 유로 2000 우승을 견인하였다.


2. 선수 경력[편집]



2.1. 클럽[편집]


가나 아크라에서 가나인 부모 사이에 오덴케 아베이(Odenke Abbey)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가 프랑스 외교관과 결혼해 아이를 입양했을 때 마르셀이란 이름으로 바꾸었다. 그의 가족은 1972년 프랑스 낭트로 이주하였다. 그는 12세부터 낭트의 유소년 팀에서 성장하여 1986년 1군팀으로 승격하였다. 낭트에서 드사이는 6시즌 동안 164경기 5골을 기록했다.

1992년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로 이적했다. 당시 마르세유는 드사이를 비롯해 호화 멤버를 구성해 전성기를 구가하며 프랑스 국내뿐 아니라 전 유럽에 깃발을 날리며 1992-93 시즌에는 염원하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이루며 리그 우승까지 하는 더블을 이루었으나 저 유명한 승부조작 사건으로 리그 우승이 박탈되었다. 다만 챔스는 무관하였기에 다행히 박탈이 없었다.

이에 드사이는 1993년 11월 세리에 AAC 밀란으로 이적하였다. 1993-94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하며 다른 클럽에서 2년 연속 우승을 경험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2] 또한, 1993-94 시즌과 1995-96 시즌 2차례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는 수비수로서 플레이를 선호했지만 밀란에서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되었다. 이는 또 저 유명한 입축구 사건인 이른바 요한 크루이프의 "축구 레슨을 시켜주지" 사건과 이어진다.[3]

밀란에서 큰 성공을 거둔 드사이는 1998년 잉글랜드의 첼시로 이적하였다. 이적료는 460만 파운드로 알려졌다.

프랭크 램파드가 B급 미드필더로 여겨지고, 존 테리가 가까스로 데뷔해 이름을 알리던 시절, 자랑스럽게 내놓을만한 스타플레이어라고는 지안프랑코 졸라 정도 밖에 없던 첼시에서 데니스 와이즈의 뒤를 이어 주장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면서 중상위권 도깨비팀 첼시를 챔스권에 진입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고, 2003-04 시즌까지 중앙 수비수로 활약하였다. 첼시에서 6시즌 동안 222경기 7골(리그 158경기 6골)을 기록하였다.

2004년 카타르의 알 가라파로 이적하였다. 클럽의 주장을 맡아 2004-05 시즌 카타르 리그에서 우승하는데 기여하였다. 2005년 여름 카타르 SC로 이적하여 7경기를 소화하고 2005년 11월 자진 탈퇴하였다. 2006년 5월 7일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2.2. 국가대표[편집]


파일:드사이국대.png
1993년 8월 22일 스웨덴 전에서 A매치에 데뷔하였고, 첫 메이저 대회는 유로 1996이었으며, 프랑스의 5경기 모두 풀타임으로 출전하여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팀은 아쉽게도 승부차기 끝에 4강에서 탈락했다.

드사이의 두번째 메이저 대회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이었다. 이때 그는 철의 포백으로 불리는 수비진의 일원으로 활약했고,[4] 비록 결승전에서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하는 불상사를 겪긴 했지만 프랑스가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올리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이어진 유로 2000에서도 6경기 모두 풀타임으로 출전하여 팀 우승에 공헌하였다. 유로 2000 이후 대표팀 주장이었던 디디에 데샹과 부주장이었던 로랑 블랑이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면서 프랑스의 주장을 인계받았다.[5]

하지만 주장으로서 참가한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프랑스는 조별 리그 1차전부터 세네갈 쇼크로 휘청거렸고, 드사이는 이번에도 3경기 모두 풀타임 출전하였지만 결국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고 만다.

마지막 메이저 대회였던 유로 2004에서는 조별 리그 2차전이었던 크로아티아 전만 출전했을뿐 나머지 경기는 미카엘 실베스트르에게 밀렸고, 프랑스는 8강에서 그리스에게 패해 탈락한다. 이후 프랑스 대표팀에서 은퇴를 표명하였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드사이는 뛰어난 신체적 조건을 활용하며, 파워풀한 수비를 자랑하던 선수였다. 경이적인 점프력을 자랑했기 때문에, 공중전에서 대부분 승리하였고 큰 체구와 안정된 밸런스로 1대1 대인마크에서는 밀리는 법이 거의 없었다. 발재간도 안정되어 있고, 냉정한 판단력도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비라인의 지휘도 훌륭했다. 황선홍이 현역 시절 A매치에서 상대했던 수비수 중 가장 인상 깊던 선수로 위르겐 콜러와 함께 꼽기도 했다.

그의 수비력을 두고 바위 같다고 평하기도 한다.


4. 기록[편집]



4.1. 대회 기록[편집]








4.2. 개인 수상[편집]




4.3. 수훈[편집]




5. 여담[편집]


  • 위에 말했던 것처럼 1993-94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을 시작하기 전 요한 크루이프의 입털기에 등장한 인물이다.[6] 하지만 크루이프의 인터뷰와는 달리 결과는 AC 밀란이 4:0으로 완승을 거두며 바르셀로나에게 역으로 축구 레슨을 시켜줬고 드사이는 거기에다가 골까지 넣어 크루이프를 완벽하게 대파했다.[7][8]

  • 국가대표 커리어는 명성이 자자한 프랑스 철의 4백의 일원으로서 메이저 대회 2연패에 크게 기여하고 클럽 커리어도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AC 밀란에서 주전으로 UEFA 챔피언스 리그 2연속 우승을 차지하는 등 화려한 커리어를 자랑하지만 프랑스 철의 4백 일원 중에서는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면이 있다.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세계무대에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던 98년부터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기 힘든 클럽인 첼시의 소속으로 뛰었다는 점이 핸디캡이 된 듯 하다.

  • 맨체스터 시티의 주장인 뱅상 콩파니가 자신의 롤모델로 꼽았다. "당신의 롤모델은 누구인가요?"라는 팬의 질문에 일말의 주저없이 "마르셀 드사이, 그는 수비수로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대답했다.

  • 가나 출신으로 모국어가 영어라서 그런지, 영어로 진행한 인터뷰를 보면 프랑스 억양이 전혀 베어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가나 악센트가 조금 있는 편이다.

파일:GOAL_Defender.jpg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수비수 5인을 선정했는데, 1990년대 수비수들 중 4위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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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은퇴 후 체중이 좀 늘었다. 선수시절엔 85-90kg.[2] 드사이 이후 파울루 소자, 제라르 피케, 사무엘 에투가 각기 다른 두 팀에서 2시즌 연속 챔스 우승을 했다. 특히 에투는 2년 연속 트레블을 달성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3] 다만 크루이프의 해당 발언은 과장된 발언으로 실제로는 양 팀 간 스타일 차이에 대한 코멘트였을 뿐이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4] 철의 포백은 이미 유로 1996부터 구성이 되어있긴 했으나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진건 이 대회부터였다.[5] 이미 그 전에 데샹과 블랑이 경기에 나오지 않을 때는 드사이가 주장 역할을 수행했었다.[6] 인터뷰 내용: 밀란은 공을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는 드사이 같이 형편없는 놈을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는 끔찍하게 멍청한 팀이다. 내일은 우리들이 축구 레슨을 시켜주겠다. 하지만 크루이프의 실제 인터뷰 내용은 밀란이 특별한 점이 없고 수비를 중시한다고 디스하기는 했지만 드사이를 개인적으로 찍어서 깐 것은 아니었다. 단지 바르셀로나는 공격을 중시하고 밀란을 수비를 중시하며 그 예시로 바르셀로나는 호마리우와 계약했고 밀란은 드사이와 계약했다고 한 정도. 물론 이것만으로도 밀란 선수들의 전의를 불태우기는 충분했다.[7]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직전 평가전 당시 아르헨티나가 승리했고 승장이였던 아르헨티나의 감독인 디에고 마라도나는 독일과의 경기 승리 후 기자회견에 나왔으나 독일 국가대표팀의 감독인 요하임 뢰브가 나오지않고 독일의 3부 리그 출신 볼보이가 나와서 마라도나는 기자회견 하기 싫다고 모욕을 준뒤 바로 떠났다. 그 볼보이는 그저 쓴웃음만 지으며 참았다. 그 후에 다시 독일을 그리고 월드컵 본선 8강전에서 만나 경기 시작 후 그 3부리그 출신 선수 토마스 뮐러에게 3분만에 골을 얻어맞았고 경기내내 전술적으로도 본인이 선출한 선수들도 개인 기량에서 밀리며 4:0으로 완벽히 패배를 당했다.[8] 마라도나의 대처와 별개로 경기에서 졌다고 감독은 커녕 베테랑도 아닌 완전 신인 선수를 내보낸 독일측이 먼저 무례하게 군 것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