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에고 마라도나

덤프버전 :


디에고 마라도나
관련 둘러보기 틀
}}}
[ 펼치기 · 접기 ]


디에고 마라도나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파일: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2성)엠블럼.svg

38대



클럽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다니엘 파사레야
(1978~1986)

디에고 마라도나
(1986~1994)


오스카 루게리
(1994)

SSC 나폴리 역대 주장
주세페 브루스콜로티
(1983~1986)

디에고 마라도나
(1986~1991)


치로 페라라
(1991~1994)


디에고 마라도나의 수상 이력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파일:남미올해의선수.png

1979 · 1980
파일:옹즈도르.png

1986 · 1987
파일:Guerinsportivologo.png

1979 · 1986
파일:logo_lpf_1.png

1978 M · 1979 M · 1979 N · 1980 M · 1980 N
파일:골든볼.png

1986 FIFA 월드컵 골든볼

파일:실버슈.png

1986 FIFA 월드컵 실버슈
[1]
파일:World Soccer.png

파일:Serie_A_logo.png

파일:브론즈볼.png

1990 FIFA 월드컵 브론즈볼

파일:마라명발.png

파일:FIFA Player of the Century.png


베스트팀
파일:World Soccer.png

1984 · 1987
파일:Guerinsportivologo.png

1980 · 1981 · 1982 · 1983 · 1986
파일:FIFA 로고.svg

파일:World Soccer.png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2px; background: #ED1C35; font-size: 0.9em"
월드 사커 역대 베스트 XI
파일:Ballon d'Or.png



파일:World Soccer.png
Player of the Year 1985
수상
미셸 플라티니
2위
프레벤 엘케어
3위
디에고 마라도나
Player of the Year 1987
수상
루드 굴리트
2위
디에고 마라도나
3위
마르코 반 바스텐
Player of the Year 1990
수상
로타어 마테우스
2위
살바토레 스킬라치
3위
디에고 마라도나
파일:옹즈도르.png
1985 Onze d'Or
Onze d'Or
Onze d'Argent
Onze de Bronze
미셸 플라티니
프레벤 엘케어
디에고 마라도나
1988 Onze d'Or
Onze d'Or
Onze d'Argent
Onze de Bronze
마르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디에고 마라도나
파일:Guerinsportivologo.png
Player of the Year 1980
수상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2위
만프레트 칼츠

3위
디에고 마라도나
Player of the Year 1981
수상
지쿠

2위
디에고 마라도나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3위
-
Player of the Year 1984
수상
미셸 플라티니

2위
이안 러쉬

3위
디에고 마라도나
Player of the Year 1985
수상
미셸 플라티니

2위
디에고 마라도나

3위
엔조 프란체스콜리


1979 아르헨티나 올해의 축구 선수

마리오 켐페스
(발렌시아 CF)

디에고 마라도나
(AA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디에고 마라도나
(AA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1980 아르헨티나 올해의 축구 선수

디에고 마라도나
(AA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디에고 마라도나
(AA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디에고 마라도나
(CA 보카 주니어스)

1981 아르헨티나 올해의 축구 선수

디에고 마라도나
(AA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디에고 마라도나
(CA 보카 주니어스)


우고 가티
(CA 보카 주니어스)

1986 아르헨티나 올해의 축구 선수

엔조 프란체스콜리
(CA 리버 플레이트)

디에고 마라도나
(SSC 나폴리)


네스토르 파브리
(라싱 클루브)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디에고 마라도나의 기네스 등재 세계 기록








디에고 마라도나의 기타 정보





EL Grafico 선정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축구 선수 5인]
[* 1980년 후반 선정
안토니오 사스트레
호세 마누엘 모레노
아돌포 페데르네라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디에고 마라도나

SSC 나폴리 영구결번
No.10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인


파일:디에고 마라도나2.jpg

이름
디에고 마라도나
Diego Maradona
본명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 프랑코
Diego Armando Maradona Franco
출생
1960년 10월 30일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 라누스
사망
2020년 11월 25일[1] (향년 60세)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 티그레
국적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display: none; display: 아르헨티나"
행정구
]]

신체
165cm[2]
직업
축구 선수 (공격형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축구 행정가 은퇴
소속
선수
에스트레야 로하 (1968~1969 / 유스)
로스 세볼리타스 (1970~1974 / 유스)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1975~1976 / 유스)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1976~1981)
CA 보카 주니어스 (1981~1982)
FC 바르셀로나 (1982~1984)
SSC 나폴리 (1984~1991)
세비야 FC (1992~1993)
CA 뉴웰스 올드 보이스 (1993~1994)
CA 보카 주니어스 (1995~1997)
감독
만디유 데 코리엔테스 (1994)
라싱 클루브 (1995)
아르헨티나 대표팀 (2008~2010)
알 와슬 FC (2011~2012)
푸자이라 FC (2017~2018)
도라도스 데 시날로아 (2018~2019)
힘나시아 라플라타 (2019~2020)
행정
디나모 브레스트 (2018 / 회장)
국가대표
91경기 34골[3] (아르헨티나 / 1977~1994)
정보 더 보기 [ 펼치기 · 접기 ]
부모
아버지 돈 디에고 마라도나(1927년~2015년)
어머니 달마 살바도라 프랑코(1930년~2011년)
형제
동생 우고 마라도나(1969년~2021년)
배우자
클라우디아 비야파녜(1962년생) (1989년 결혼~2003년 이혼)
자녀[1]
아들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 시나그라(1986년생)
디에고 페르난도 마라도나 오제다(2013년생)


달마 네리아 마라도나(1987년생)
지안니나 디노라 마라도나(1989년생)[2]
자나 마라도나 사발레인(1996년생)
서명
파일:디에고 마라도나 서명.svg
주발
왼발
등번호
10번
후원사
푸마(킹 시리즈)
종교
가톨릭
묘소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베야 비스타
베야 비스타 공원묘지[3]
SNS
파일:maradona.pn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
2. 생애
4. 평가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5.3. 클럽 기록
5.4. 국가대표 기록
6. 라이벌
8. 개인사 및 사생활
8.1. 가족
8.2. 대인 관계
9. 여담
11. 어록
12.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인. 선수 시절 SSC 나폴리에서 세리에 A 2회 우승과 UEFA컵 1회 우승을 이끌며 영구결번을 부여받았고,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는 1986 월드컵 우승을 주도했다.[4]

이러한 활약을 인정받아 펠레와 함께 FIFA 세기의 선수에 선정되었고, 아르헨티나에는 그를 숭배하는 '마라도나교'라는 종교가 존재하며 국가적 영웅으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또한 나폴리에서도 아르헨티나 못지 않은 도시적 영웅으로 숭배되고 있다.[5]


2. 생애[편집]



2.1. 유년기[편집]


마라도나는 1960년 10월 30일,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 라누스에서 과라니족 +스페인 바스크계 혈통의 아버지 디에고 마라도나 치토로와 이탈리아계+크로아티아계 혈통의 어머니 달마 살바도라 프랑코 사이에서 3남 5녀 중 다섯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6]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는 3살때 사촌으로부터 축구공을 선물받았는데 어찌나 축구공을 좋아했는지 누가 자신의 축구공을 훔쳐갈까봐 선물 받은 후 6개월간 꼭 끌어안고 다녔을 정도였다.

그의 부친 돈 디에고는 아르헨티나의 극북동 지역의 코리엔테스 파라냐 델타의 선원이었으며, 가사일을 도우며 돈을 벌던 부인 달마 프랑코와 합치기 위해 코리엔테스 주에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남부 외곽의 판자촌인 비야 피오리토(Villa fiorito)로 이주하였다. 돈 디에고는 빌라 피오리토 지역에 헐거운 벽돌과 금속 벽지로 자신의 집을 지었다.

그 슬럼가는 너무나 폭력적이고 위험해서 경찰들 조차도 상주하지 못하고 매일 버스를 타고 드나드는 지역이었다. 하루는 걸음마를 막 뗀 마라도나가 열려있던 오물통으로 떨어졌다. 그의 삼촌 시릴로는 그를 돕기 위해 "디에기토! 그 똥통에서 머리를 들어라"라고 소리쳤다. 그 표현은 마라도나가 그의 인생에서 힘든 순간일 때 주문과 같이 반복해서 쓰는 표현이 되었다. 이렇게 가난한 가정이었고 위험한 지역에서 돈 디에고는 가족을 위해 새벽 4시에 막노동을 하러 나간 뒤 밤늦게 돌아와 곯아 떨어지기 일쑤였다.

파일:maradona child.png}}}
유년 시절의 마라도나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 어머니, 누나들을 제외하면 집안의 장남인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이 무엇이라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택시 문을 열고, 폐기물을 팔고, 궐련 포장을 벗길 때 나오는 호일을 모으면서 돈을 벌었다. 동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하는 전쟁놀이엔 도통 관심이 없었던 그는 다행히 한 분야에서 재능을 발견한다. 바로 축구였다. 그는 친구들과 축구를 하면 언제나 최고의 기량을 보여줬는데 특히 드리블을 통해 골 넣는 것을 좋아했다. 태생부터 공격수로 태어난 것이다.

축구공을 튕기며 재주를 부리는 트래핑을 좋아했던 마라도나는 8살 때 지역 클럽 에스트레야 로하에 입단하였고 온종일 공만 갖고 논다는 빈민가 소년의 소문은 금세 주변으로 퍼져나가며 부에노스 아이레스 전역으로 퍼졌다. 아르헨티나 대표 일간지 중 하나인 <클라인>은 축구 천재의 탄생이라는 기사를 통해 마라도나를 보도했는데, 당시 기자가 실수로 이름을 카라도나로 보도하기도 했다. 이러던 중 그의 재능을 알아본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의 스카우트 프란시스코 코르네효에게 목격되었고,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는 11살에 불과했던 마라도나에게 과감한 투자를 하기로 결심하며 계약하게 된다.

입단 테스트에는 유독 뛰어난 선수들이 많았지만 그 중 마라도나는 유독 튀는 선수였다.

프란시스코 코르네효 (마라도나를 발굴한 아르헨티노스 유스 코치)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의 유소년팀인 로스 세볼리타스에서 뛰게 된 마라도나는 그곳에서 에이스가 되어 팀의 140경기 무패라는 난공불락의 기록을 세우며 주축이 되었고 1부 리그 경기에서 볼보이로 나와 하프타임 중간 휴식시간에 공으로 묘기를 부리는 마법의 모습을 보여주며 관중들을 즐겁게 했는데, 이런 워밍업은 마라도나의 전매특허가 된다. 훗날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는 호세 페케르만은 이 시절 1군 선수들 모두가 일찌감치 훈련을 종료하고 유소년 팀에 놀러가 마라도나를 구경하던 일을 회상했다. 그야말로 사상 초유의 선수가 나타난 것이다.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는 이런 마라도나에게 경기장 근처인 비야 델 파르크의 작은 아파트를 선물하였고 판잣집에서 연명하던 소년과 소년의 가족들은 꿈처럼 믿기지 않는 현실에 눈물을 흘렸다. 그 광경을 본 마라도나는 축구로 꼭 성공해 가족들과 평생 부유하게 살겠노라고 다짐하게 된다. 그리고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는 마라도나라는 이름을 아르헨티나 전역에 알리는 발판이 되었고, 마라도나는 이후 역대 최고의 축구 선수 중 한 명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2.2. 선수 경력[편집]



2.2.1. 클럽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디에고 마라도나/클럽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2.2. 국가대표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디에고 마라도나/국가대표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3. 감독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디에고 마라도나/감독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4. 사망[편집]


파일:ad10s maradona.png}}}
마라도나의 죽음을 대서특필하는 세계 각국의 언론들

"정말 슬픈 소식이다. 나는 위대한 친구를 잃었고 세상은 전설을 잃었다. 분명히 언젠가 하늘에서 우리가 함께 공을 차게 될 것이다."[7]

마라도나의 별세 소식을 들은 펠레의 말

2020년 10월 말 마라도나의 경호원이 코로나 19 증세를 보여서 본인 또한 자가격리 중이었는데, 현지 시간으로 11월 3일 두부 외상을 입은 후에 출혈이 생겨 뇌 경막 아래 피가 고이는 경막하혈종으로 수술을 받았다. 이후 11월 11일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교 올리보스의 병원에서 퇴원하였지만, 2020년 11월 25일 심장마비로 인해 자택에서 사망한 것이 확인되었다. 심장마비로 쓰러져 응급 처치를 받았지만 회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8] 향년 60세. 아르헨티나 언론 보도에 따르면, 마라도나의 사망하기 직전까지 살아 있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마라도나의 조카인 조니 에스포시토라고 밝혔다. 마라도나는 아침식사를 먹으면서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으며 식사 직후에 잠이 들었고 다시 깨어나지 못하였다고 한다.[9]

2004년, 마라도나는 이와 동일한 심장마비가 한 번 발생한 적이 있었고[10] 이때 쿠바와 우루과이를 오가면서 대대적인 치료를 받은 끝에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다른 지병이 없었기에 대대적인 치료를 받고 살아날 수 있었지만, 두서없는 사생활과 나태한 건강관리 등으로 이후 그의 몸은 점점 망가지고 있었고 재발한 심장마비에 뇌출혈도 같이 발생하는 바람에 의사들도 손을 쓰지 못한채 세상을 떠난 것이다. 2004년에 스스로가 가장 어려운 라이벌이라고 언급한 코카인을 끊었지만 그 이후 스트레스성 폭식으로[11]위 절제 수술을 받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몸 관리 문제를 겪었다.

마라도나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질 것이며 아르헨티나 정부는 26일부터 28일까지 3일간을 국가애도기간으로 지정하였고, 아르헨티나의 대통령도 금요일까지 모든 공식일정을 취소하였고 공공기관은 조기를 게양하고 건물에는 아르헨티나의 국기 색깔인 하늘색 조명을 비출 예정이다. 선수 시절 전성기를 누렸던 나폴리에서도 관내 모든 학교들은 레전드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휴교에 들어간다. 시신은 대통령궁인 카사 로사다에 안치하고 국민들의 조문을 받겠다고 했다. 마라도나의 시신을 실은 영구차가 움직이자 국민들이 쏟아져나와 그의 마지막을 배웅해주었고, 일부는 대성통곡하며 영구차를 가로막기도 할 정도였다.[12][13]

세계 각국의 언론들은 마라도나의 죽음을 일제히 대서특필하였고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는 56면으로 구성된 잡지에 무려 23면까지 마라도나 관련 내용을 실었으며 CA 보카 주니어스는 홈구장 에스타디오 알베르토 J. 아르만도의 마라도나가 생전 사용했던 VIP룸의 불을 켜놓으면서 그를 추모했다.[14] 마라도나를 품었던 SSC 나폴리는 팀의 전설적인 대스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나폴리 시장과 홈구장 이름 변경에 대한 논의를 펼쳤고 기존 산 파올로에서 마라도나의 풀네임인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로 바꾸는 것으로 최종 결정하였으며 그의 죽음을 기리며 산 파올로의 불이 켜졌다.[15] 또한 SSC 나폴리는 AS 로마와의 다음 세리에 A 경기에서 마라도나를 위한 특별한 킷을 입고 경기에 나선다. 축구계가 역대 가장 위대한 축구 아이콘 중 하나인 디에고 마라도나의 사망을 애도하는 가운데 FIFA는 211개 회원 협회에 모든 대회 주최측이 이번 주말 또는 다음 가능한 경우에 모든 축구 경기에서 1분의 묵념을 유지하도록 요청하였다. 아르헨티나 현지 생방송 뉴스에서는 자국의 국민적 영웅인 마라도나의 사망이라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긴급속보에 아나운서와 출연진들이 충격에 말을 잇지 못하거나 더듬기 시작했고, 사태를 인지하고 나서는 눈물을 참지못하고 대성통곡하기 시작하며 마라도나의 사망을 진심으로 슬퍼하였다.

파일:maradona_coffin.jpg}}}
대통령궁인 카사 로사다에서 마라도나를 추모하는 조문객들
마라도나의 죽음이 보도된 이후 수많은 유명인사들과 축구 클럽들이 일제히 마라도나를 추모하였다.[16] 라이벌 관계인 보카 주니어스와 리버 플레이트의 팬들도 국민 영웅의 죽음에 함께 슬퍼하였고 마라도나의 시신이 안치된 대통령궁에는 현지 시각으로 오전 6시에 조문이 시작 되기도 전에 수많은 축구팬들이 대통령궁 인근에서 장사진을 이루며 3㎞가 넘는 줄이 만들어졌으며, 조문객들은 아르헨티나 국기와 유니폼으로 덮힌 고인의 관을 향해 작별 인사를 건네며 추모했다.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현직 대통령도 관저에서 헬기를 타고 카사 로사다에 도착해 그의 관 곁에서 직접 성호를 그으며 마라도나를 애도했다. 국민 영웅의 마지막길을 함께 하려는 팬들의 열기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공포도 넘어섰고 아르헨티나 정부는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강도 높은 전 국민 격리를 장기간 시행해 왔지만, 마라도나 추모 인파를 막지 않았다.

파일:maradona did it.jpg}}}
마라도나만이 할 수 있는 일[17]
유족들의 뜻에 따라 정확한 사망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부검이 진행되었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 검찰은 "법의학 경찰이 이날 오후 4시부터 부검을 시작했다"며 범죄나 폭력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어 "부검은 의심할 여지 없이 사망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수행되고 있다"면서도 "현 단계에선 자연적인 원인(심장마비)에 의해 사망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전했다.[18]

마라도나의 시신은 당초 사흘간 대통령궁에 안치될 예정이었지만, 유족의 뜻에 따라 하루 만에 장례 절차가 마무리됐다. 조문 마감 시간이 공지되자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지 못한 축구팬들이 무질서하게 한꺼번에 몰리며 경찰이 조문 인파의 진입을 통제하려하자 성난 팬들이 돌 등을 던졌고, 경찰은 최루탄과 고무탄 등을 동원해 해산을 시도하며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다. 대통령궁은 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조문시간을 저녁 7시까지로 연장하겠다고 밝혔지만 혼란은 계속됐고, 마라도나의 관이 안전상의 이유로 카사 로사다 내부의 다른 장소로 옮겨지기도 했다. 결국 고인의 시신은 7시가 되기 전 운구됐고, 장지는 마라도나의 부모님이 안장된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교의 베야 비스타 공원묘지이다.

2022년 11월 14일, 디에고 마라도나의 사망 2주기를 위해 추모 친선전이 펼쳐진다. 위치는 로마의 스타디오 올림피코이다.

파일:Messi_Maradona.jpg
이후 그의 사후 개최된 첫 월드컵에서 후배들이 36년 만에 월드컵 우승을 해내며 영전에 우승컵을 바쳤다. 후배 리오넬 메시는 우승 세리머니에서 36년 전 마라도나의 우승 세리머니를 다시 재현했다.

또한 마라도나가 전성기를 보냈던 클럽인 SSC 나폴리도 리그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33년 만에 세리에 A 우승을 달성하였다. 마라도나가 조금만 더 생존해 있었으면 조국 아르헨티나의 36년 만의 월드컵 우승과 이전 소속팀 나폴리의 33년 만의 세리에 A 우승을 모두 볼 수 있었기에 많은 축구팬들이 아쉬워하고 있다.[19]

그리고 2022년 12월 30일, 브라질 현지 시간 29일에 펠레 역시 투병 중에 세상을 떠나면서 축구는 두 거인을 잃었다. 이로써 메시와 호날두의 라이벌리 이전, 전 세계인의 논쟁거리였던 펠레와의 라이벌리도 막을 내리며 축구 역사의 한 페이지가 끝나게 됐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디에고 마라도나/플레이 스타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평가[편집]


파일:maradona.jpg}}}

마라도나가 불과 18세였던 1978년, 바르셀로나의 스카우트가 18살의 마라도나를 보기 위해 직접 아르헨티나로 찾아와 관찰을 하고 작성한 보고서가 있었는데 마치 축구의 신을 본 느낌이라는 그야말로 극찬의 일색으로 가득했을 뿐만 아니라 1979년 남미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고 그해 발롱도르 수상자였던 케빈 키건을 누르고 구에린 스포르티보 당해 최고의 선수에 뽑혔을만큼 아직 유럽으로 넘어오지 않았던 10대 후반부터[20] 신성불가침한 영역이었던 펠레,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소환할만큼 압도적인 퍼포먼스와 실력을 내뿜었다.

마라도나가 활약하던 1980년대 초중반은 10번 공격형 미드필더, 플레이메이커들이 많았던 공격형 미드필더들의 전성기였다. 당시에 미카엘 라우드루프, 카를로스 발데라마, 게오르게 하지, 한지 뮐러, 얀 쾰레만스, 훌리오 세사르 로메로[21], 엔조 시포, 알랭 지레스, 리엄 브래디, 카를하인츠 루메니게[22], 소크라치스, 베른트 슈스터 뿐만 아니라 지쿠, 미셸 플라티니, 엔조 프란체스콜리, 루드 굴리트[23] 등 내로라 하는 선수들이 80년대 초중반을 풍미했다.[24] 마라도나가 위대한 이유는 그 수많은 기라성 같은 플레이메이커들, 10번 유형의 선수들과 비교해서 의심의 여지 없는 1인자였던 것에 있다. 특히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의 활약으로 "축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 11명이 하는 팀 스포츠지만 우리는 지금 축구의 개념을 벗어난 최초의 선수를 보고 있다"라는 평가를 들으며 그 정점을 찍었다. 아르헨티나를 월드컵 우승으로 이끈 1986년의 마라도나는 '축구 국가대항전 단일 대회 퍼포먼스 면'에서 역대 최고로 늘 거론된다. 이에 펠레, 리오넬 메시와 더불어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다.[25][26][27][28]


파일:펠마크.jpg


파일:펠마디.jpg

10대 시절부터 펠레, 디 스테파노, 크루이프와 비견된 마라도나
파일:마라도나 키건.jpg}}}
구에린 스포르티보 삽화

또한 지금은 당연시 여기는 지역방어와 압박은 마라도나가 뛰었던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너무나도 생소한 개념이었다. 하지만 그가 당대의 수비 시스템을 붕괴시킴으로 당시 그를 막아야 했던 AC 밀란의 감독 아리고 사키가 개인이 아닌 구조의 정형화를 통한 강력한 압박 수비 전술인 사키이즘을 고안하며 현대 축구의 근간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사키는 "압박축구는 마라도나를 견제하기 위해서 만든 전술이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마라도나가 압박 축구에 고전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1988/89 시즌 압박 축구가 탑재된 사키의 AC 밀란[29]을 상대로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팀에 대승을 선물하고 다음시즌에도 우승 경쟁 상대인 밀란을 상대로 골을 넣으면서 나폴리의 2번째 우승을 선사하는 등 자신을 막기 위해 고안한 사키이즘을 보란듯이 무너뜨리며 그가 왜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는지 증명해보였다.

마라도나는 물론 일개 플레이어로서도 축구가 만들어진 역사 이래 역대 최고의 반열에 놓이는 선수였지만, 동료들을 잘 이용하면서도 이들의 역량을 끌어올리는데 있어 뛰어난 리더라는 점도 언급할 수 있다. 일례로 마라도나는 고작 18살 소년일 때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에서부터 이미 주장을 맡을 정도로 강인한 리더십을 가진 선수였고 단지 강등을 면할 생각만을 가지고 있던 나폴리 동료들을 바꿔내며 우승을 이뤄냈다. 국가대표로서도 당시 영원한 캡틴 파사레야가 있었던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주장이 아니었지만, 선수 1인의 영향력이 가장 강했던 것으로 평가받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주장으로서 팀 곳곳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우승을 이끌었고,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1994년 미국 월드컵[30]에도 계속해서 주장으로서 역할을 맡았다.

팀을 이끄는 주장으로서 플레이가 좋든 나쁘든 마라도나는 항상 경기에 관여하였고 동료들에게 에너지를 공급하였으며 볼을 컨트롤하고 게임을 컨트롤했다. 또한 상대의 반칙과 집중 마크에 시달리며 자신의 뜻대로 플레이가 되지 않을 때에도 승리를 위해 그는 항상 경기장을 열심히 움직이며 투쟁심을 불어 넣었다.

그의 전성기 시절, 우승컵을 들었던 팀인 SSC 나폴리아르헨티나의 동료들을 감안해 볼 때, "축구에서 한 선수가 팀을 어느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가?" 의 한계치를 평가하는 사례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직전 시즌 승점 1점 차이로 강등을 모면한 나폴리를 단지 강팀으로만 끝나지 않고 세리에 AUEFA컵 우승까지 이끌고 나간 것은 다름아닌 마라도나 단 한 명의 능력이었다.[31] 마라도나의 나폴리와, 앞에 서술된 밀란 제너레이션은 그야말로 완벽한 대척점에 있었는데 단지 스쿠데토를 두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사키가 리누스 미헬스의 토탈 풋볼을 더욱 더 발전시켜 최전방에서의 압박을 통한 전원 공격과 전원 수비를 철학으로 11명이 하나의 유기체가 되는 것을 보여주며 "축구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명제를 다시 한번 증명하였다면 마라도나는 11명이 하는 축구를 혼자서 좌지우지하는 것을 보여주며 "축구란 혼자도 가능하다"라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사키가 가져온 혁명은 훗날 많은 클럽과 선수들이 따라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기에 현대 축구의 패러다임이 되어버렸지만 마라도나가 홀로 펼친 마법은 감히 누구도 흉내낼 수 없었다. 유독 마라도나의 월드컵 우승이 고평가되는 이유도 당시 결코 우승후보라 불릴 수 없던 스쿼드를 이끌고[32] 한 명의 선수가 그 대회를, 그것도 세계 최고의 대회인 월드컵 전체를 홀로 완벽하게 지배하고 통제한 까닭이라 볼 수 있다.

마라도나보다 더 나은 성적을 거두었던 선수들은 얼마든지 있고 시대를 지배한 선수가 아니더라도 그보다 많은 트로피를 차지한 선수도 많이 존재한다. 축구라는 종목에 커리어만이 남는다라고 생각한다면 마라도나는 자신과 비교되는 다른 전설적인 선수들에 비해 초라해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그가 사람들의 기억에 남고 역사상 최고라 꼽히는 것은, 축구라는 스포츠를 통해 개인 자신과 한 도시, 나아가 한 국가의 위상을 바꿔놓으며 축구 본연의 위대함을 실현했기 때문이다. 당시 마라도나의 조국인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전쟁의 패배와 경제위기로 슬픔의 수렁에 빠져있었고 그가 속한 클럽팀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현재까지도 해소되지 않는 이탈리아 남부와 북부의 빈부격차는 당시에는 더욱 극심해서, 리그 우승은 늘 부유한 북부 클럽들의 차지였다. 이에 남부에 위치한 클럽은 늘 멸시와 천대를 받았으며 나폴리는 아예 '시궁쥐'라는 멸칭까지 붙어 무시 받던 팀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라도나는 국가대표팀에서는 월드컵을, 그것도 자국을 전쟁에서 패배시킨 잉글랜드를 만나 압도적인 개인 능력으로 무너뜨리고[33] 조국에 월드컵을 선사했으며, 클럽팀에서도 그 개인의 존재만으로 그 숱한 북부의 명문 클럽들을 꺾고 끝내 스쿠데토[34]를 쟁취해냈다.

마라도나는 단순한 축구 선수도, 일반적인 기준에서 다뤄지는 스포츠 영웅도 아니었다. 그는 스포츠라는 영역을 넘어 아르헨티나의 역사적 위인이자 투쟁의 화신으로서 보통 사람들을 훨씬 뛰어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어졌으며, 상징적인 중요성이라는 휘장을 두른 인물이었다.


5. 기록[편집]



5.1. 대회 기록[편집]


  • CA 보카 주니어스 (1981~1982, 1995~1998)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1981 M[35]

  • FC 바르셀로나 (1982~1984)
    • 코파 델 레이: 1982-83
    • 코파 데 라리가[36]: 1982-83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983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1986
    • 아르테미오 프란키 트로피[37]: 1993



5.2. 개인 수상[편집]


  • 발롱도르 명예상: 1996
  • 발롱도르 드림팀: 2020[38]
  • FIFA 세기의 선수: 2000[39]
  • FIFA 세기의 골: 2002[40]
  • FIFA 100: 2004
  • FIFA 월드컵 골든볼: 1986
  • FIFA 월드컵 브론즈볼: 1990
  • FIFA 월드컵 실버슈: 1986
  • FIFA 월드컵 도움왕: 1986
  • FIFA 월드컵 올타임 XI: 1994
  • FIFA 월드컵 올타임 드림팀: 2002
  • FIFA 월드 유스 챔피언십 골든볼: 1979
  • FIFA 월드 유스 챔피언십 실버슈: 1979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 1978 M[41], 1979 M, 1979 N[42], 1980 M, 1980 N
  • 세리에 A 득점왕: 1987-88
  •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 1987-88
  •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 1979, 1980
  • 남아메리카 올해의 팀: 1993, 1995
  • 아르헨티나 올해의 축구 선수: 1979, 1980, 1981, 1986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1986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84, 1987
  • 월드 사커 역대 베스트 XI: 2013
  • 옹즈도르: 1986, 1987
  • 옹즈 드 옹즈: 1985, 1986, 1987, 1988, 1989
  • 구에린도로: 1984-85
  • 구에린 스포르티보 올해의 선수: 1979, 1986
  • 구에린 스포르티보 베스트 XI: 1980, 1981, 1982, 1983, 1986
  •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 올해의 운동 선수: 1986
  •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 올해의 축구 선수: 1987, 1988
  • AFP 올해의 운동 선수: 1986
  • AP통신 올해의 운동 선수:1986
  • 코리에레 델로 스포르트 올해의 운동 선수: 1986
  • 레키프 챔피언 중의 챔피언: 1986
  • 아르헨티나 세기의 스포츠인: 1999
  • 올림피아 데 오로: 1979, 1986
  • 유니세프 올해의 유럽 축구 선수: 1989-90
  • 20세기 월드팀: 1998
  • 20세기 남아메리카팀: 1998
  • 골든풋: 2003
  • 마르카 레전드: 1999
  • IFFHS 레전드: 2016
  • IFFHS 올타임 월드 드림팀: 2021
  • IFFHS 올타임 남아메리카 드림팀: 2021
  • IFFHS 올타임 아르헨티나 드림팀: 2021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4
  • AFA 아르헨티나 올타임 XI: 2015
  • 아스 올타임 XI: 2021[43]


5.3. 클럽 기록[편집]


시즌
클럽
리그
국내 컵
대륙 대회
기타 대회
총계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76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11
2
-
-
-
-
-
-
11
2
1977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49
19
-
-
-
-
-
-
49
19
1978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35
26
-
-
-
-
-
-
35
26
1979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26
26
-
-
-
-
-
-
26
26
1980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45
43
-
-
-
-
-
-
45
43
5시즌
합계
166
116
-
-
-
-
-
-
166
116
시즌
클럽
리그
국내 컵
대륙 대회
기타 대회
총계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81
보카 주니어스
40
28
-
-
-
-
-
-
40
28
1시즌
합계
40
28
-
-
-
-
-
-
40
28
시즌
클럽
리그
국내 컵
대륙 대회
기타 대회
총계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82/83
바르셀로나
20
11
5
3
4
5
6
4
35
23
1983/84
바르셀로나
16
11
4
1
3
3
-
-
23
15
2시즌
합계
36
22
9
4
7
8
6
4
58
38
시즌
클럽
리그
국내 컵
대륙 대회
기타 대회
총계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84/85
나폴리
30
14
6
3
-
-
-
-
36
17
1985/86
나폴리
29
11
2
2
-
-
-
-
31
13
1986/87
나폴리
29
10
10
7
2
-
-
-
41
17
1987/88
나폴리
28
15
9
6
2
-
-
-
39
21
1988/89
나폴리
26
9
12
7
12
3
-
-
50
19
1989/90
나폴리
28
16
3
2
5
-
-
-
36
18
1990/91
나폴리
18
6
3
2
4
2
1
-
26
10
7시즌
합계
188
81
45
29
25
5
1
-
259
115
시즌
클럽
리그
국내 컵
대륙 대회
기타 대회
총계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92/93
세비야
26
5
3
1
-
-
-
-
29
6
1시즌
합계
26
5
3
1
-
-
-
-
29
6
시즌
클럽
리그
국내 컵
대륙 대회
기타 대회
총계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93/94
뉴웰스 올드 보이스
5
-
-
-
-
-
-
-
5
-
1시즌
합계
5
-
-
-
-
-
-
-
5
-
시즌
클럽
리그
국내 컵
대륙 대회
기타 대회
총계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95/96
보카 주니어스
24
5
-
-
-
-
-
-
24
5
1996/97
보카 주니어스
1
-
-
-
-
-
1
-
2
-
1997/98
보카 주니어스
5
2
-
-
-
-
-
-
5
2
3시즌
합계
30
7
-
-
-
-
1
-
31
7
20시즌
총 합계
491
259
57
34
32
13
8
4
588
310


5.4. 국가대표 기록[편집]


소속
연도
경기
득점
아르헨티나
1977
3
0
1978
1
0
1979
8
3
1980
10
7
1981
2
1
1982
10
2
1983
-
-
1984
-
-
1985
10
6
1986
10
7
1987
6
4
1988
3
1
1989
7
0
1990
10
1
1991
-
-
1992
-
-
1993
4
0
1994
7
2
통산
91
34


6. 라이벌[편집]


크루이프에게는 베켄바워, 호나우두에게는 지단, 메시에게는 호날두가 있었으나 마라도나에겐 그와 기량을 겨룰만한 선수가 부족했다. 동시대의 인물로 비교조차 어렵기에 호사가들이나 대다수 축구팬들이 꼽는 마라도나의 라이벌펠레다. 현역시절 마라도나의 라이벌로 꼽힌 선수는 잉글랜드의 케빈 키건, 서독의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프랑스의 미셸 플라티니, 브라질의 지쿠[44]파우캉, 네덜란드의 루드 굴리트마르코 반 바스텐[45]이 이끄는 밀란 제너레이션, 그리고 월드컵과 세리에 A[46]에서 경쟁했던 로타어 마테우스가 있다.[47] 이 중 본인이 최대 라이벌로 꼽았던 선수는 로타어 마테우스였다.

사실 엄밀히 보면 루메니게, 플라티니, 지쿠는 마라도나보다 약간 전세대로서 전성기가 겹치지 않아서 완전히 라이벌이라고 보긴 좀 어려운 면이 있다. 루메니게, 플라티니, 지쿠가 이미 세계 최고로 꼽히던 1980년대 초반에 마라도나는 아직 20대 초반이었다.[48] 반 바스텐, 굴리트, 마테우스는 동시대이지만 전형적인 센터포워드인 반 바스텐은 포지션이 달라서 직접적인 라이벌로는 비교되는 빈도가 낮았다.[49]

이래저래 동시대에서는 굴리트와 마테우스가 라이벌로 많이 논해졌으나, 굴리트는 라이벌 포지션은 전성기 2년 정도에 그쳤고, 마테우스는 마라도나보다 몇년 늦은 1980년대 후반에 전성기가 찾아왔지만 엇비슷한 나이인 마라도나와 전성기가 어느 정도 겹치고 2의 월드컵 결승과 세리에의 우승길목에서 계속 마주쳤기에 라이벌 포지션으로 가장 적합하다는 강한 인상을 줬다. 물론 마라도나의 전성기인 1979년부터 1988년까지는 마테우스는 마라도나의 퍼포먼스에는 감히 비교되지는 못했지만. 그 뒤로 마테우스는 마라도나와 붙으면서 종종 맞대결에서 승리하고 1990 이탈리아 월드컵 결승전에서는 판정승하기도 하면서 29살에 세계 최고 선수에 등극한다. 반면 마라도나는 그때부터 마약 스캔들로 급속한 몰락이 시작된다.


6.1. 펠레와의 비교[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펠레 vs 디에고 마라도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2. 메시와의 비교[편집]


파일:messi vs maradona.jpg}}}



FIFA에서 비교한 마라도나와 메시
현재는 자국 후배인 리오넬 메시가 세대를 넘어서는 라이벌이 되어있다. 마침 자국의 후배이기도 하고. 사실 메시는 차세대 마라도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마라도나도 이 사실을 좋아하였고, 라이벌이라기 보다는 비교의 대상 정도라고 하는 것이 옳다.

재밌는 점이 있는데, 마라도나와 메시, 마라도나와 펠레의 비교우위 논점이 비슷하다는 점이다. 마라도나의 강점은 클럽이건 국가대표팀이건 비교적 약팀의 소속으로 세리에 A, UEFA컵, 월드컵을 우승시켰다는 점이다. 대조적으로 펠레가 역대 최고의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며 월드컵을 3회 우승한 점, 그리고 리오넬 메시가 역대 최고 클럽팀 중 하나[50]로 꼽히는 바르셀로나 소속으로 2회 트레블을 달성한 점과 달리, 마라도나의 강점은 우승후보로 꼽히지도 못하던 팀을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최고의 위치까지 거의 혼자만의 힘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 있다.

아리엘 오르테가, 후안 로만 리켈메, 하비에르 사비올라, 파블로 아이마르, 카를로스 테베스, 세르히오 아구에로 등등 아르헨티나의 수많은 축구신동들은 이후 '포스트 마라도나'라는 기대를 받았으나, 대부분은 마라도나와 축구 포지션 및 스타일도 달랐으며[51],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이후 현재까지 이르러서는 리오넬 메시가 '마라도나의 재림'이라는 칭호를 받는 등, 지금까지의 아르헨티나 축구 선수 중에서 포스트 마라도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선수로 기대받았으며[52] 현재는 이미 마라도나의 후계자 이상의 위상을 얻었다. 마라도나 역시도 "그동안 새로운 마라도나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수십 번 반복되었다. 그러나 메시만이 내 수준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믿을 수 없는 재능을 갖고 있는 선수다"라고 하며 메시를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었고 나의 마라도나는 메시라고 할 정도로, 실제로도 메시를 무척 아낀다. 2010 남아공 월드컵때 감독을 맡은 당시에도 팀의 에이스인 메시를 무척 싸고 돌았고 그후로도 계속 조언과 격려를 해주고 있다. 아르헨티나 현지에서 메시를 여러 이유로 혹독하게 까는 경향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곤 하고, 월드컵 우승이 없었던 메시에게 우승으로 증명할 필요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53]

메시는 이런 비교에 대해 "펠레, 마라도나와 비교되는 것은 정말 영광이지만 그들을 뛰어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다. 그저 팀과 나의 발전을 위해 축구를 하고 있다"라고 말했으며 아르헨티나 출신답게 가장 존경하는 선수 역시 마라도나. 물론 역대 최고 역시도 당연히 마라도나라며 존경심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마라도나는 "누군가 나를 능가하게 된다면, 그것은 아르헨티나인이기를 바란다. 그 인물이 메시라면 기꺼이 환영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으며 "나의 커리어는 이미 끝났지만 메시는 현재 진행형이다, 결국에는 펠레와 나의 반열에 오르게될 것이고 우리는 훗날 역대 최고의 자리를 놓고 서로 비교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도 말한 적 있다.

장지현 위원은 두 선수를 사실상 비교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이는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준 것이 아니라 1980년대의 축구와 현대 축구가 사실상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파고들자면, 1980년대 축구는 그 어느 시기보다 공격형 미드필더의 역할이 두드러지던 시대였다.

마라도나는 개인적인 플레이메이킹 뿐 아니라 드리블링과 연계 능력, 경기 내의 템포 조절, 직접적인 득점력까지 모든 부분에서 단 한 명의 클래식 공격형 미드필더가 책임을 지는 시대에 나타난 선수였다. 압박이 등장하고 1인 공격형 미드필더가 더 이상 모든 부분을 책임질 수 있는 시대가 지나면서, 플레이메이킹은 후방 플레이메이커와 전방 플레이메이커로 이원화된다. 이러한 후방 플레이메이커의 대표적인 선수는 페르난도 레돈도, 펩 과르디올라,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 등이었다. 한편, 후위에 전문적인 수비형 미드필더를 보좌한 플레이메이커도 태동되었는데 이러한 선수의 유형의 대표선수는 지네딘 지단이라 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직적인 압박전술의 발전은 공격형 미드필더의 시대의 종말을 고하였다. 1인이 공격을 모두 책임지며 컨트롤타워를 수행하는 전술은 성적을 내기 매우 어려졌으며 분업화된 시스템축구가 일정한 경기력과 좋은 성적을 내게 되었다. 이런 2010년대에 전통적인 10번롤을 완벽히 수행해낸 선수는 리오넬 메시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기술적인면으로 비교하자면 마라도나가 메시에 비해 우위를 가져가는 분야는 원터치 플레이와 패스 스펙트럼의 다양성, 팀원의 움직임을 최대한 살리고 맞춰주는 플레이메이킹, 다채롭고 역동적인 무브먼트, 근력과 지구력을 바탕으로 한 활동량과 활동범위이다. 마라도나는 양발잡이는 아니였으나 왼발만으로도 역대 손꼽히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고, 중요한 순간에 오른발로 실수를 범하는 일도 없었다. 메시 역시 바르셀로나라는 현세대 최고의 팀 중 하나에서 축구사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지만, 마라도나처럼 세계 최고 수준의 리그에서 중하위권 팀을 이끌고 리그 우승를 차지하고, UEFA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시키는 수준의 업적은 못남겼다.[54]

반면 메시는 비교적 균등한 양발능력을 활용한 능력치와 보다 짧은 볼터치 간격으로 좁은 공간에서의 골키핑과 드리블링, 연계나 침투 이후의 문전 파괴력에서 우위를 점한다. 또한 메시만큼 말도 안 되는 타이밍에 슛을 하지는 못하며, 왼발 편향으로 킥의 반경이 비교적 좁은 마라도나는 라스트 킥의 각도 활용 등에서 메시보다 부족하다.[55]

단 메시는 마라도나처럼 온 몸을 이용한 패스를 쏘아대지는 않는다. 마라도나의 플레이를 보면, 마라도나는 한 번 공을 잡는 순간에 드리블보다 패스를 먼저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메시는 대개 본인의 압도적인 드리블 및 퍼스트 터치를 바탕으로 탈압박을 끌어낸 후 패스 공간을 만든다. 반면 마라도나는 볼이 오자마자 아웃사이드, 힐, 발바닥, 어깨나 가슴 등등을 가리지 않고 그야말로 온 몸을 이용해 원 터치로 다른 선수에게 넘겨버린 후 다른 곳으로 파고 들어가는 형식의 '곡예', 혹은 프리스타일 트래핑 같은 느낌의 플레이메이킹을 했다. 물론, 그 볼 순환에 있어 중심 플레이어는 마라도나였고 마라도나 개인 기량에 팀 전체가 큰 의존을 했다. 이는 마라도나 시대의 볼만 잡으면 백태클이 들어오는 너무나 폭력적이었던 축구 배경과, 일인 플레이메이커 비중이 절대적이었던 시대에서 자연스레 나타났던 플레이 성향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물론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마라도나가 드리블을 통한 탈압박에 약하다거나 메시가 원터치 플레이를 못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기본적으로 기술에 있어서는 둘 다 정점을 찍었다고 봐야 할 것이며, 축구사에서 메시나 마라도나보다 더 섬세하게 볼을 다룬다고 할만한 사람은 아예 없다고 보아도 좋다.

드리블 비교에서 서술했듯 마라도나의 신체 구조는 보면 메시가 아니라 되려 카를로스 테베스와 유사하다. 그래서 피지컬에 의존한 플레이도 가능하고 거기에 왕성한 활동량까지 지녔으니, 메시가 마라도나급의 하드웨어를 지녔다면 2014 브라질 월드컵은 아르헨티나가 우승했을 확률이 높다. 이 월드컵 당시 메시는 4강 네덜란드전부터 체력부족을 노골적으로 호소하는 모습이 역력해서 그 이전의 경기들과는 달리 활약이 신통치 않았다. 2010 남아공 월드컵 8강전에서 역시 메시는 체력부족을 호소했다.[56] 심지어 코파 아메리카 센테나리오에서 역시 메시는 칠레전에서 노골적으로 체력 부족을 호소했으며 승부차기에서 체력 부족이 원인이 된 집중력 저하로 인해 약점이었던 페널티킥에서 또다시 실축을 하고 만다.[57]

결국 시대에 따른 축구의 흐름 변화를 전혀 살피지 않고 메시와 마라도나를 1대1로 득점력이나 패싱력 등으로 비교하며 누가 더 낫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 답이 나올 수 없다. 마라도나와 메시를 비교할 수 있는 부분은 그 위상에 있어서만 가능한데, 그렇다 하더라도 누구 한 쪽의 손을 들어주기는 어렵다. 요한 크루이프 는 선수를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우위를 말하는 관계자, 전문가들이 있기는 하나, 두 사람이 갖고 있는 스타일, 장점, 커리어 등에서 어느 쪽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서 갈리는 정도고, 어느 쪽이 선수 가치면에서 총체적으로 우월하다는 식의 얘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마라도나 vs 메시에 대한 비교분석을 한 칼럼.

이 칼럼에서 한 번 더 풀어 설명해 줄 만한 점은 젊은 층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정작 1990년대를 전후해서 공수간격이 가장 좁았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알겠지만 공수간격이 좁을수록 모든 선수들이 더 밀착하고 더 가까운 상태이므로 압박의 강도가 강하다. 더군다나 룰이 거친 플레이를 2010년대보다 훨씬 더 많이 용인했으므로 반칙이 엄청나게 더 거칠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이 시대 미래 축구에 대한 예측은 기술보다는 피지컬에 집중했으며, 아프리카 출신 선수가 대두될 것이며 아프리카 대륙이 축구적으로 더 강해질 것이라는 의견이 대세였다. 즉, 훨씬 더 가까운 곳에서 몸으로 비비고 부딪치고 충돌하는 행위는 1990년대가 훨씬 강도가 높았으며, 조직적인 압박은 2010년대가 더 강하다. 1990년대에는 저런 식의 거친 몸싸움과 더불어 마라도나는 현대 첨단 의학과 관리기법의 수혜를 입지 못한 것도 감안해야 할 시대적 환경이였다.

반면 현대 운동선수들의 전반적인 신체능력의 상향으로 기본적인 스피드, 근지구력, 근력 등이 향상되었고 이것은 어떤 선수의 플레이가 나머지 선수들과의 차별화를 보여주기가 이전시대보다 어렵게 만든다.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플레이의 난이도가 하드로 상향되어 출현하는 적들의 파워와 에너지, 스피드가 올라가서 플레이어는 이전의 쉬은 난이도에서 만큼의 좋은 퍼포먼스를 내기 어렵게 만든다.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스타선수 1, 2명의 기술에 경기운영을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현대축구에 그런 팀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고 상위리그 상위클럽으로 갈수록 더더욱 그렇다. 전반적으로 신체능력과 기술이 낮았던 시대에 보여준 타플레이어들과의 퍼포먼스격차 50이라면 그것이 신체능력과 기술이 높은시대의 퍼포면스격차 50과 난이도 측면에서 동일하지 않다.

한편 양자의 성격적인 측면 역시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메시가 코파아메리카와 월드컵을 우승하면서 주장으로서의 품격을 보여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나, 이는 바르셀로나와 아르헨티나에서 연이은 참사를 겪으면서 성장한 것이지 메시의 본성은 내성적이고 조용하다. 기량적으로 아르헨티나를 이끌고 원맨 우승을 시키기에는 이미 충분했었던 전성기의 리오넬 메시가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했던 이와 무관하지 않다. 펠레와 마라도나가 마이크가 켜진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누던 때 언급된 "정말 착하지만, 우리 같지는 않다"고 이야기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며[58], 화가 나서 욱하는 일이 있더라도 틀에서 벗어나는 돌출 행위가 거의 없다.

반면 디에고 마라도나는 기질적으로 불같고 전투적이며, 단순히 자유분방함을 넘어서서 통제 불능에 가까운 방종함을 보였다. 포인트는 이러한 성향 차이가 경기 내적으로도 잘 나타났다는 것이다. 마라도나는 승부욕이 초월적으로 강한 편이었으며 이는 신의 손이나 다이빙과 같은 규칙에 대한 악용으로도 나타났다.[59] 또 마라도나가 폭력적인 파울을 수없이 당한 것도 사실이지만, 마라도나 역시 자신에게 볼을 뺏어낸 선수가 있으면 주저없이 압박하면서 백태클을 가할만큼 파울을 범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마라도나가 이렇게 전투적이었던 것은 악질적 파울로부터 전혀 보호받지 못하던 시대상 때문이기도 하지만, 메시와의 비교에서 전술이나 시대상, 신체 조건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개인의 기질적 측면이 크게 작용한다는 것은 간과하기 어렵다. 요컨대 마라도나는 타고난 성품이 대단히 뜨거운 편이었으며, 그것이 승리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거나 타고난 주장감으로 만들었으나, 개인에게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여 방종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수없이 많았다. 반면 메시는 내성적이고 심적 압박을 많이 받아 때때로 그것이 경기에 부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3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평정심을 갖추어 국가대표 메이저 대회 2연패를 달성하게 되었다는 것이 차이일 것이다.

메시의 2022 카타르 월드컵 우승 이후 마라도나보다 월등한 누적과 득점력을 가진 메시 쪽으로 평가가 기울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르헨티나 현지인들에게 메시와 마라도나 중 누가 더 뛰어난 선수냐고 물어보면 이런 질문 자체를 바보처럼 여기며 비교하려 들지 않는다. 아르헨티나에 또 다른 축구의 신이 강림했다며 둘 다 위대한 선수라고 추켜세우는 게 보통이다.[60] 앞서 서술한 장지현 위원의 말처럼 시대가 다른 두 선수의 비교에 큰 의미는 두지 않는 것이 좋다.


7. 논란 및 사건 사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디에고 마라도나/논란 및 사건 사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개인사 및 사생활[편집]



8.1. 가족[편집]


마라도나의 혈통은 이주민의 나라 아르헨티나답게 복잡하다. 그는 아르헨티나인이지만 조상은 크로아티아계 갈리시아인으로 알려져 있다.

파일:maradona family.jpg}}}
마라도나 집안 가계도
어머니 달마 살바도라 프랑코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존재로 마라도나는 악동이라는 수식어 답게 수많은 기행을 일으켰지만 어머니 달마 프랑코의 말을 어기는 법은 없었고 코카인에 중독되었던 그가 끊을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의 훈계가 컸다. 형제자매로 4명의 누나와 2명의 남동생, 1명의 여동생이 있다. 남동생들은 둘 다 축구 선수였지만 성공적이지 못했고, 그중에 휴고 마라도나는 선수 시절 이탈리아 세리에 A 아스콜리 칼초에 입단하여 마라도나와 경기에서 맞붙은 적이 있다.

파일:maradona claudia.jpg}}}
1989년 결혼식을 올리는 마라도나와 비야파녜
16살에 전처인 클라우디아 비야파녜와 처음 사귀기 시작하였고 당시 비야파녜는 15살이었다. 어머니 달마 살바도라 프랑코가 약간의 질투가 있어서 마라도나는 비야파녜를 살짝 숨겨야 했지만 그녀와 미래를 약속했고 1989년 11월 7일 애인 관계이던 비야파녜와 부에노스 아이레스 루나 파크 스타디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생활은 2003년까지 지속되었고 그 후 이혼하면서 부부 관계는 끝이 났다.

파일:external/www.kustu.com/images:films:maradona:cannes:81186586.jpg}}}
자신의 딸 달마와 함께 칸 영화제에서
비야파녜와의 사이에서 2녀를 얻었고, 이들 중 차녀 지안니나가 2008년에 아르헨티나의 신성 세르히오 아구에로와 결혼하여 아기를 출산하면서 할아버지가 되었다. 외손주 이름은 벵하민 아구에로이며 2009년생. 그러나 딸과 아구에로는 2012년 별거 상태로 이혼 절차에 들어갔고 결국 이혼했다. 언론에 의해 알려진 바로는 결혼 후에도 이어진 아구에로의 파티 스타일을 지안니나가 견디지 못해서 였다. 마라도나는 아구에로를 비난하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지만 2014 브라질 월드컵에까지 딸과 함께 가서 재결합을 위해 아구에로를 설득하는 부정을 보이기도 했다.

나폴리에서 뛰던 1986년, 누이 마리아의 친구이던 이탈리아 가수 크리스티아나 시나그라와 깊은 관계를 맺고 아들 디에고 시나그라를 얻었다. 혼외자였고 이에 마라도나는 30년간이나 친자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2016년 8월자로 친자임을 인정했다. 훗날 마라도나는 당시 애인 클라우디아를 사랑했지만 자기는 성자가 아니었고 미녀들이 많았다고 밝혔다.

그리고 2013년 2월 13일 36살의 애인 베로니카 오헤다가 득남하여 늦둥이 아들이 하나 더 늘었다. 한마디로 아구에로의 아들이자 마라도나 외손주인 벵하민은 자기보다 4살이나 어린 외삼촌을 갖게 되었다. 이름은 디에고 페르난도 마라도나로 늦둥이 아들이 외손주 벵하민과 메시의 아들 티아고와 함께 대표팀에서 뛰기를 바라고 있다고 전했다. 메시의 아들인 티아고가 축구를 가장 잘 할 것 같고 벵하민이 스트라이커, 그 뒤를 티아고와 페르난도가 받쳐주면 좋을거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거기다가 1996년생 사생아 딸이 하나 더 있는데 이름은 자나 마라도나 사발레인. 그녀의 생모는 자나를 마라도나의 친딸로 인정받게 하기 위해 오래 법정 싸움을 했다고 한다.

더 선에 따르면 직계자녀 5명 외에도 쿠바에 있는 혼외자녀 3명(요아나, 루, 하비엘리토)과 최근까지 소송 중인 2명(라라, 길) 외에도 2명의 혼외자식이 더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마라도나의 자식'을 자청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자 마라도나의 딸 지안니나는 "아버지가 축구팀 하나를 만들 만큼 충분한 자손을 낳았다"며 "앞으로 3명만 더 있으면 11명이 된다"는 농담을 한 적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2021년 12월 28일, 마라도나의 남동생이자 전직 축구 선수였던 우고 마라도나가 형과 같은 사인인 심장마비이탈리아 나폴리에서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마르카 보도


8.2. 대인 관계[편집]


마라도나는 정치적으로도 상당부분 엮인 인물이다. 1990년대 초중반에는 카를로스 메넴[61]과 상당한 연줄이 있었기 때문에 메넴의 지지자였다. 그러다가 2002년 이후로는 성향이 변했는데, 아르헨티나 정계가 경제위기로 인해 격변기를 맞았고 급진시민연합이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페론당이 여러개의 정당으로 분당되었는데 마라도나는 이중에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창당한 승리를 위한 전선[62]을 지지하였고 그 이후로 부부 대통령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를 지지하였다. 다만 2007년 수출세 인상문제로 시끄러울때 마라도나가 수출세 인상에 대해 네스토르와 크리스티나를 비판한 걸 보면 무조건적인 지지자라기 보다는 깔때는 까는 타입에 가깝기는 하다.

파일:maradona_fidel_web.png}}}
피델 카스트로에게 선물받은 군모
쿠바의 자국 혁명지도자인 피델 카스트로와 각별한 사이였는데 1987년에 쿠바를 방문했을 때 카스트로를 처음 만난 후 친분을 쌓았다. 이들의 우정은 마라도나가 2000년대 초 약물 중독을 치료하려고 쿠바 수도 아바나에 4년간 머무르면서 깊어졌고 마라도나는 카스트로의 사무실에서 축구도 하고 카스트로를 '제2의 아버지'라고 부르며 왼쪽 다리에 카스트로의 얼굴 문신도 새겼으며 카스트로도 녹갈색의 군모로 큼직한 빨간 별이 그려져 있는 '체게바라 모자'를 선물하고 생전 마라도나에 관해 "디에고는 좋은 친구이며 매우 고결한 사람"이라면서 "쿠바와 우정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물질적 이익은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카스트로 사망 후 소식을 전해들은 마라도나는 쿠바로 날아와 장례식에 참석하며 애도를 표했다. 또한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이었던 우고 차베스와도 생전에 매우 친하게 지냈다. 그러나 조지 부시 부자에 대해서는 BU卐H라고 대놓고 부르며 아돌프 히틀러와 동급으로 취급해 버렸고 2005년 FTA 협상 당시에 반미 시위에 참여했었다.

우고 차베스와의 인연은 마두로 대에도 이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간 마두로 대통령이 유가폭락으로 인한 경제위기속에서 삽질을 많이 벌였고 마라도나도 이를 모르고 있을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기 때문에 대놓고식으로 지지하는 스탠스를 보이지는 않았는데[63] 마두로가 정치적인 승부수로 내놓은 제헌의회 선거가 야권의 보이콧과 함께 여러 남미국가들과 유럽, 미국 등으로부터 사실상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제헌의회 구성후에 군사기지가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내전 얘기까지 나오자 마두로를 강력하게 지지한다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64] 이를 두고 마라도나가 CIA남미 정권교체를 유도하고 있다는 음모론에 과도하게 빠져서 맛이 간 것이 아닌가하는 뒷말이 나오고 있는 중이다.[65]

그러던 와중에 버락 오바마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자 대놓고 쌍수를 들며 환영하면서 "나는 부시집안이 망쳐놓은 미국에 대해 오바마가 원상복구 시켜줄 것을 강력하게 확신한다."라고 말하며 오바마를 지지했다. 그렇지만 이후로 가족과 함께 디즈니랜드로 갈려다가 반미 시위 참여 및 우고 차베스피델 카스트로와의 관계로 인해 미국 이민관리국으로부터 출입금지를 먹은 경력이 있어서인지 지금은 어떻게 볼지 다소 미지수. 그리고 우파성향의 마크리와도 상당한 인연이 있는데 이건 마크리가 CA 보카 주니어스의 소유주인데다가 마라도나가 CA 보카 주니어스에서 좋은 성적을 내다보니 사이가 나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마크리가 대통령이 되고나서 정리해고와 공공요금 인상 등의 정책을 펴자 이에 적극적으로 반발하며 까기도 했다.

리오넬 메시와는 요즘에는 그다지 좋은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사이가 점점 멀어지는 모양새. 메시의 말로는 2010년 월드컵 이후로 서로간의 연락이나 대화가 완전히 끊겼다는 모양이고, 2017년 메시의 결혼식에도 마라도나는 초대받지 못했다. 그리고 나댄다는 이유로 하비에르 사네티를 저격한 이후 얼마 안 돼 메시를 '경기 전에 화장실 20번이나 가는 놈'이라고 저격해 메시의 사촌이 분노하기도 했다.

후안 로만 리켈메와도 사이가 좋지 않다. 처음에는 리켈메를 중용하지 않았던 바르사를 세계 최악의 클럽이라 불러 리켈메를 두둔할정도로 사이가 좋았었는데 마라도나가 국가대표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에는 트러블이 생겨 리켈메는 2008년에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었다. 이후 빡친 마라도나가 너따위 없이도 잘할 수 있다며 메시에게 등번호 10번을 주고 남아공 월드컵에 나섰으나 8강에서 독일에게 0:4 대패를 당하고 쓸쓸하게 탈락했다. 결국 마라도나가 심정지로 사망하면서 끝내 화해하지 못했으나 리켈메는 악감정은 잊고 고인이 된 전설에게 가슴 뭉클한 추모 편지를 남기는 것으로 늦게나마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다.


9. 여담[편집]


  • 아르헨티나이탈리아[66]에는 마라도나를 신으로 섬기는 종교도 있다고 한다.[67] 마라도나교(Iglesia Maradoniana)라고 하는데, 간단히 이야기 하면 하느님을 영(靈)의 아버지로, 마라도나를 육(肉)의 아버지로 섬기는 종교이다.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영화 '축구의 신: 마라도나(Maradona By Kusturica)'에서 그 전모를 감상할 수 있다. 진짜로. 이들은 자신들의 종교는 가톨릭이지만 마라도나를 성인으로 숭배한다고 한다.[68] 종교보단 가톨릭에서 파생된 이단 비슷한 개념으로 마라도나를 성인으로 숭배한다(!) 종교의 우두머리격인 인물들부터 전통적으로 믿는 신(神)은 하느님이지만, 마음의 신(神)은 마라도나라는 신앙고백을 할 정도이다. 참고로 이 종교는 마라도나의 생일을 성탄절로 기념하고 오순절(성령강림대축일)이라 여기는 날은 위에 나온 멕시코 월드컵 당시의 '신의 손' 사건이 있었던 날이다. 십계명도 있으며 현재 전세계에 약 20만명의 신도가 있다고 한다. 앞면에 DT(diego ten), 뒷면에 등번호 10이 새겨진 예복도 있다고 한다. 2022년 리오넬 메시가 아르헨티나를 월드컵 우승으로 이끌면서 메시가 성자, 즉 메시아의 위치에 올라섰다. 아르헨티나 축구협회에서도 이에 대한 헌정 영상을 올려버렸다.(!) AFA 인스타그램 영상[69] 정작 메시는 자신을 신과 비교하지 말아달라고 하였으나...


  • 1979년 청소년 월드컵에서의 마라도나를 본 대한축구협회 송기룡 과장은 당시 마라도나의 모든 플레이에 눈을 뗄수 없었다고 한다.

  • 2002 한일 월드컵 유치 과정에서 주앙 아벨란제펠레브라질의 우방국인 일본의 단독 개최를 지지하자 그에 반대로 대한민국을 지지했다. 마라도나는 2002년 월드컵 유치 활동의 일환으로 축구협회에서 추진한, 보카 주니어스와 한국 대표팀간의 경기(1995년, 잠실주경기장 개최)에 출전했다. 이 경기는 마라도나가 약물 복용으로 출전 정지 처분을 받은 것이 해제된 후 첫 공식 경기였기 때문에 '마라도나 공식 재기전'으로 셀링(selling) 포인트를 잡아서 홍보했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6px"
}}} ||
치로 페라라의 은퇴 경기에 방문한 마라도나

  • 명성이 워낙 대단하다보니 '레몬이나 오렌지로 트래핑 연습'을 한다든가 '일부러 공을 차서 골대만 맞추면서 논다'는 등의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는데 실제로 그렇게 연습을 했다. 농담이 아니라, 선수 시절의 마라도나는 식사시간을 빼면 늘상 미친 듯이 공만 차면서 노력하는 연습벌레로도 유명했다. 심지어는 지네딘 지단도 마라도나의 축구실력에 경의를 표했는데, 일설에는 지네딘 지단"나는 축구공으로 할 수 있는 볼 트래핑을 그는 레몬으로도 할 수 있다" 라고 극찬을 했다는 말이 있다. 이 설이 마라도나가 레몬을 가지고 자주 보여주기용 과시 차원의 경이로운 볼 트래핑을 했었던 실제 사실에 좀 더 가깝고 신빙성이 있다. 그래서, 마라도나는 골프공으로 리프팅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의 주포지션은 공격수가 아니라 미드필더다. 공격력이 매우 뛰어나서 스트라이커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그는 공격형 미드필더에 가까운 선수였다. 그의 골기록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파일:명예마라도나.jpg}}}
Ballon d'Or(발롱도르)를 수여받은 마라도나
  • 1995년까지 지속된 국적 제한 때문에 축구계 최고 권위의 개인상인 발롱도르를 받지 못한 선수들을 위해, 발롱도르 수여 주체인 프랑스 풋볼과 FIFA에서 자체적으로 발롱도르 명예상을 수여했는데 역대 수상자는 디에고 마라도나, 펠레가 전부이다. 디에고 마라도나는 1996년에 프랑스 풋볼로부터 발롱도르 명예상을 지급받았다.[70] 또한 2016년 발롱도르를 선정하는 프랑스 풋볼에서 발롱도르 60주년 기념으로 유럽인 이외 선수들이 발롱도르를 받을 수 없었던 1995년 이전 선수들의 수상에 대해 재평가를 했는데 1986, 1990년의 수상자로 이름을 올렸다.[71] 명성에 비해 다소 저조한데 당대에 플라티니, 굴리트, 반 바스텐, 마테우스 등 쟁쟁한 라이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 호마리우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세계 제일의 "악동" 선수로 명성이 자자했던지라 호마리우처럼 실력만 좋고 멘탈은 썩었다고 생각하는 젊은 세대들이 많은데, 실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기자들에게 새총을 쏘는 등의 기행이 있었긴 했어도[72] 선은 지켰고 나름대로 선행도 많이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그리고 축구협회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마라도나는 언제나 선수들의 편이었고 절대 축구협회 회장에게 빌붙지 않았다. 나폴리에서 나폴리의 마피아인 카모라들과 사이가 나빴으며, 그들에게 대놓고 비난했던 유일한 인물이다. 당시 카모라들에게 대든다는 것은 정말 죽을 각오를 했어야 했다. 단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나폴리의 영웅이자 신적인 존재 마라도나였기에 해치지 못했을 뿐.[73]

  • 서방 언론, 특히 미국계 언론과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다. 일단 그 인생사, 물고 뜯을 게 많기 때문에 좋은 먹잇감이기도 하지만 남미인으로서 아르헨티나인으로서 주관이 뚜렷한 인물이다. 즉 미국을 몹시 싫어하고 신나게 깐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은 참지 않고 바로바로 내뱉는 성격이다.[74] 체 게바라피델 카스트로를 좋아하는 것이 그 방증이다. 언론 역시 "네 그러세요?"하며 신나게 물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있다.

  • 선수 시절에 마약과 관련 있다보니 카모라들이랑 한통속이라는 음모론도 있지만 완전 헛소리다. 당시 카모라의 아이들이랑 찍었다는 사진이 있는데 사실은 카모라들에게 부모를 잃은 아이들과 찍은 것을 카모라들이 그렇게 퍼뜨린 것이다. 그런 아이들을 위하여 재단을 만들어 기부한 것도 유명한 일이다. 괜히 나폴리에서 저렇게 떠받드는 게 아니다라고 기존에 알려져 있었으나, 2019년 국내에도 개봉한 영화 '디에고'가 마라도나의 사생활을 꼼꼼하게 취재해 영화에 반영하면서 카모라와 친분이 있었다는 건 확실한 사실임이 널리 알려졌다. 카모라와 함께한 사진, 영상이 수없이 많다. 이 영화는 마라도나를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면서도 옹호하지는 않는 태도를 잘 유지하고 있는데, 영화에 따르면 마라도나는 처음 카모라의 호의를 대충 받아넘겼고 깊은 친분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코카인에 빠져든 뒤 마약을 구하기 위해 카모라의 영향권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흔한 중독자처럼 카모라의 말에 따르는 신세가 됐다. 오히려 마라도나의 마약 관련 수사에 카모라가 연루되면서 언론 노출을 철저히 막던 그들의 방침에 차질을 빚었을 정도다.

파일:maradona spurs.jpg}}}
토트넘 유니폼을 입은 마라도나
  • 1986년 대표팀 동료인 오스발도 아르딜레스의 초정을 받아 토트넘 유니폼을 입고 인테르와의 이벤트성 경기에 출전했다. 당시 마라도나를 볼려고 사람들이 몰려들어 경기가 15분 이상 지연되는 해프닝이 있었다.

  • 1984년, 바르셀로나에서 나폴리로 이적한 후, 새 클럽과 FIFA에게 아픈 어린이를 위해 기금을 모으기 위한 친선 경기를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양쪽 모두 그 요청을 거절당하자 마라도나는 그 문제를 자신의 손에 맡기고 모든 것을 스스로 마련하였는데 거대한 경기장에서 경기를 하는 대신, 디에고는 아이의 집으로 왔고 바로 뒷마당에서 축구를 했다. 4,000명의 사람들이 나폴리의 가장 가난한 교외 중 한곳에서 열린 경기를 보기 위해 왔다. 당시 세계 최고의 스타였지만 진흙탕에서 뒹굴며 축구를 하는 것을 보면 순수하게 축구를 사랑했던 사람은 맞는 듯 하다.

  • 한 번은 친구의 딸이 병에 걸려서 비싼 수술비를 내기가 난감했는데, 그 막대한 수술비를 내준 적도 있다. 그리고 그 친구의 아들이 바로 디에고 포를란으로, 병에 걸렸던 여성은 포를란의 친누나인 알레한드라 포를란이다. 원래 테니스 선수였던 디에고 포를란은 마라도나의 극진한 애정에 감명받아 자신의 진로를 축구선수로 전향했다.

  • 10대 때부터 펠레, 디 스테파노를 소환할 만큼 엄청난 재능을 지녔지만, 재능만 믿고 혼자서 다 하려드는 우를 범하지 않았고 항상 동료들과의 연계를 잘 활용하며 팀을 위한 플레이를 펼쳤다. 1994 미국 월드컵에서도 주장으로 뛰면서 그리스전과 나이지리아전에 맹활약했다. 마라도나의 주장 완장은 결코 실력만으로 얻어진 게 아니다. 참고로 마라도나는 월드컵 역사상 주장 완장을 가장 오래 착용한 선수로도 유명했지만, 지금은 리오넬 메시가 갱신했다.[75]

  • 마라도나는 역으로 감독으로서는 동정심 때문에 문제가 있었다는 말도 있다. 빈민촌 출신인 카를로스 테베스를 자르지 못했는데 후임인 알레한드로 사베야는 테베스를 잘라내고 승승장구했다는 것이 그 근거. 그러나 사베야 재임기의 테베스는 맨체스터 시티 FC에서 트러블을 일으켜 경기도 못 뛰고 있었으니 잘라내는게 당연한 얘기이고, 마라도나 재임기의 테베스는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이며 공격전개, 돌파, 연계까지 완벽하게 수행해 당시 미드필더진[76]의 창의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맨시티를 이끌고 있었다.

  • 파파라치에게는 아주 쿨하게 대응했다. 아무 소리 안 하고 그냥 공기총으로 위협사격을 했다. 이로서 가장 터프하게 파파라치를 상대한 유명인사가 되었다.[77] 이 때문에 파파라치들은 마라도나가 지병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얼씬거리지 않았다.

  • 자신과 같은 테크니션에게 들어오는 거친 견제와 파울을 매우 싫어했다. 친선전에서 상대 선수가 계속해서 거친 파울로 자신의 플레이를 끊어대자 경기 후 인터뷰에서 '이럴 거면 왜 나를 부른 것이냐'라고 불만을 토하기도 했었고, 허정무에게 걷어차인 것을 두고두고 기억하고 있는 것도 아마도 이 때문이다. 반면 전설의 드리블 5명 돌파 같은 경우는 "그건 상대 선수들의 페어플레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라며 잉글랜드 선수들을 추켜세우기도 했다.



  • 은퇴한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 연간 유니폼 판매량에서 꼬박꼬박 10위권 안에 개근 중이다.

  • 2010년 12월, 고작 22개월 된 외손주 벵하민 아구에로가 범상치 않은 포스를 발휘하며 킥을 하는 영상이 올라오면서 20년 후를 책임질 유망주로 떠오르고 있다. 외할아버지는 마라도나에 아버지는 아구에로여서 과연 마라도나와 아구에로를 있는 축구 천재가 탄생할지 설레발이 오가는 중이다. 풀 네임은 벵하민 레오넬 아구에로 마라도나.[78]

  • 만 50살이 되던 2010년에 득남했다. 결국 벵하민 아구에로는 자기보다 어린 외삼촌을 두게 된 셈이다. 그리고 리오넬 메시의 아들 티아고 메시까지 해서 나중에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같은 괴물 3명이 동시에 뛰는 어마무지한 팀이 될 거라는 예측이 있으며 일각에서는 이 세 명의 아이들이 축구선수가 되는 2030 FIFA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가 우승할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있다.

  • 앞의 일화들을 보면 마라도나는 나름의 의리는 있는 사람이다. 월드컵이 끝나고 아르헨티나 축구협회에서 마라도나는 그냥 연임시키고 코칭스텝만 경질한다고 하자 그 코칭스텝들의 편에 서서 그래도 안되니까 그들과 운명을 함께 했다. 마라도나는 체 게바라를 존경하며 그의 의지를 본받으려고 애쓰는 모습도 보인다. 정치적으로 반미 성향이 강하고 사생활이 좀 허술해서 그렇지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의리가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다. 당장 앞에 서술되어 있는 디에고 포를란의 누나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 2010 남아공 월드컵 때 아르헨티나 경기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경기 시작 전에 선수들 한 명 한 명한테 볼에다 찐하게 뽀뽀를 해준다. 특히 국대의 에이스이자 본인 후계자인 메시에게 경기 후 격한 애정표현을 퍼붓는 사진들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문화권이 다른 우리가 보기엔 뜨악스럽지만 선수들은 굉장히 영광스럽게 여긴다나. 2010 년에도 현역 시절 발재간은 아직 살아있어서 공이 날아오자 발재간으로 가볍게 툭 받아서 경기장에 돌려주는 센스를 보여줘서 관중들의 박수를 받았다. 이외에 훈련 동영상이 공개된 적이 있는데, 스핀이 잘 안 들어가고 반발력이 심해서 유럽 일류선수들도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던 남아공 월드컵 공인구 자블라니를 너무나 쉽게 가지고 놀면서 골대에 집어넣었다. 역시 명필은 붓을 탓하지 않는 법이다.

덕택에 2ch에서는 이런 유머까지 나돌았다.

연습장에서 훈련중인 아르헨티나 선수들.

마라도나: 자, 다음 경기를 준비해보자. 이렇게 공을 잡고 3명을 제치면 되는거야. 어때 참 쉽지? (묘기를 부리며 3명을 제친다.)

메시: 아, 정말이네. 쉽다-! (다른 선수들도 묘기를 부리며 3명을 제친다.)

마라도나: 그래, 그럼 준비 끝. 남은 시간은 수영장에서 놀자구-!



  • 2014년 2월 21일, 데일리 미러를 비롯한 영국 매체들은 마라도나가 54세에 아르헨티나 5부 리그 소속인 데포르티보 리에스트에서 현역 선수로 복귀한다고 전했다. 마라도나 또한 데포르티보 리에스트의 영입 제의에 동의했고,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에 선수 등록 신청서를 제출할 계획이고 신청서가 통과될 경우, 마라도나는 오는 3월 23일 산 로렌조와의 경기에 데뷔한다고 알려졌지만 측근에 의해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고 마라도나는 이 팀에 명예코치로 임명되면서 1주일간 선수들에게 투쟁심을 불어넣는 역할을 맡게 되면서 프리킥 차는 법 등을 선수들에게 알려주었다.


  • 일본의 축구 만화 캡틴 츠바사의 아르헨티나 청소년 대표팀의 후안 디아스가 마라도나를 모티브로 했다.[79]

  • 세이부 컵 축구에서 아르헨티나의 주장 모델로 나오기도 했다.[8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seibug.png}}} ||
세이부 컵 축구 모델로 나온 마라도나

  • 실황 월드 사커 퍼펙트 일레븐에서는 선수로서의 황혼기였던 94년 국대 소속으로 나온다(이름은 가명). 만능에 가까운 무시무시한 능력치를 보유했지만 스태미너가 살짝 떨어진다. 시나리오 모드에서는 마라도나가 퇴장당한 상태에서 루마니아를 상대해야 하는데 이는 월드컵 기간 도중 도핑 적발로 퇴출된 것을 고증한 것.

  • 현역시절 가장 뚫기 힘들었던 수비수로 파올로 말디니를 꼽았다.[81]

  • 프랑스 풋볼 일간지인 So Foot 에서 선정한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선수 TOP30 에서 펠레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또한 영국 매체 '기브미스포츠'는 '역대 최고 대표 선수 톱 10'을 선정하면서 이 부분 최고 선수 1위로 꼽았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6px"
}}} ||
펠레와 함께 뒷담화 하다가 걸린 마라도나
펠레: 메시 성격은 어때요? 착한가요?
마라도나: 정말 사람 좋죠. 하지만 리더가 될 만한 성격은 아니에요.
펠레: 아, 알겠어요. 예전의 우리 같지는 않군요.
마라도나: 딱 그래요.

  • 밴드 오아시스와 한 번 마주친 적이 있다. 리암 갤러거의 말로는 오아시스가 콘서트 일정으로 아르헨티나에 방문해서는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갑자기 가게에 30명 정도가 왁자지껄 밀려 들어오길래 “뭐 하는 새X야?” 하면서 봤더니 마라도나였다고. 마라도나가 가게 2층으로 일행과 여자를 데리고 올라가길래 통역사를 통해 마라도나에게 한 번 만나볼 수 있는지 부탁했더니 돌아온 대답이 ‘갤러거 형제만 올라와라’. 남은 멤버들의 부러움을 뒤로 한 채 2층으로 올라갔더니 마라도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페트병 뚜껑으로 리프팅을 하고 있었고, 기이하면서도 어색한 분위기에 얼른 사진만 찍고 튀려고 했는데 마라도나가 통역에게 무언가를 말했다고 한다. 갤러거 형제가 통역에게 무슨 말을 한 건지 물어봤더니 “여기 있는 여자들 꼬시면 죽여버리겠어”였다.

  • 2015년 성형 수술로 인해 얼굴이 바뀌었다. 주름 제거와 입술 보톡스, 턱 성형 등. 남자다운 강인한 이전의 얼굴에서 갑자기 중년 아줌마같은 얼굴이 된 탓에 이후 ‘마마도나’라는 별명이 붙었다. 갑작스러운 성형의 계기는 30살 어린 새 여자친구의 권유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 2018년 여름 무려 29세 연하로 자신의 딸 지안니나와 동갑인 아르헨티나의 여자 축구선수 로시오 올리바와 약혼했다. 마라도나가 로시오에게 결혼 반지를 내밀자 로시오의 어머니는 특이하게도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하지만 같은 해 12월에 결별 소식이 떴다. 동거하던 집에서 쫓겨나는 모양새로 헤어지게 됐는데, 심지어 그 집은 마라도나가 올리바에게 선물로 사준 집이었다.

  • 2018 프랑스 오픈 남자단식 8강전에서 라파엘 나달과 맞붙은 단신 테니스 선수 디에고 슈와르츠만이 마라도나를 존경하여 자신의 세례명도 그의 이름을 따 '디에고'라고 지었다.

  • 대두다. 당장 위에 사진만 봐도 키에 비해 엄청난 머리통을 자랑하며 심지어 메시와 같이 선 사진에선 메시가 장신으로 느껴질 정도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골닷컴 시대별 최고의 선수.png}}}||
파일:시대별 최고의 미드필더.jpg
[1] 공교롭게도 각별한 사이였던 피델 카스트로와 세상을 뜬 날짜도 같다.[2] FIFA.com News[3] 대표팀 역대 득점 5위.[4] 이외에 1990 월드컵 준우승을 차지했다.[5] 나폴리는 마라도나가 떠난 뒤 2022-23 시즌 전까지 리그 우승 트로피를 단 한번도 들어올리지 못하였고,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의 후계자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월드컵에서 36년간 우승하지 못하였다. 특히 1986년의 마라도나는 거의 혼자만의 힘으로 아르헨티나에게 월드컵 우승컵을 안겨준 덕택에 자국 국민들에게 더욱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나폴리 팬들에게도 클럽 사상 최초의 스쿠데토UEFA컵 우승을 안겨주는데 큰 공헌을 한 마라도나는 단순한 클럽 레전드 그 이상의 존재로 평가받고 있고, 그의 등번호인 10번은 SSC 나폴리의 유일한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6] 4명의 누나와 2명의 남동생, 1명의 여동생이 있다. 남동생 2명은 둘 다 축구선수였다.[7] 2년 뒤 2022년 펠레는 마라도나를 따라 타계했다.[8] 관련 기사[9] 마라도나는 정신 건강이 별로 좋지 못했으며 어머니를 매우 보고 싶어하였다. 살아있었을 당시에 이미 2020년 크리스마스 계획으로 쿠바에 가려는 계획을 세웠으며, 쿠바에서 연휴를 즐기며 정신 건강을 회복하는데 집중할 예정이었다.[10] 2021년 그의 동생인 우고도 같은 이유로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 또한 2015년에 별세하였는데 동맥과 호흡기가 좋지 않아 사망하였다 한다. 즉 선천적으로 심혈관쪽이 좋지 않은 듯. 단, 당시 그의 아버지는 여든을 넘긴 고령이었고 평균수명이 비교적 길지 않은 남미 태생인걸 감안하면 비교적 천수를 누렸다.[11] 마약중독자들이 마약을 끊고 스트레스성 폭식을 겪는 일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다못해 마약 중에서는 약한 편인 담배조차도 끊으면 식사량이 증가하거나 감소하는데 중독성이 장난아닌 코카인은 말할 것도 없다.[12] 여기서 박수를 치거나 환호한다고 해서 잘 죽었다모욕하는 것은 아니다. 아르헨티나는 독특한 장례문화가 있는데 사람이 죽으면 신의 곁으로 가서 행복하게 지낼 것이라는 믿음 하에 장례식에서 박수를 치고 환호하는 것이 예의이다. 비유하자면 공연을 끝내고 무대에서 내려오는 배우, 연주자에게 청중들이 박수를 보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13] MBC 뉴스1 MBC 뉴스2 SBS 뉴스1 SBS 뉴스2 KBS 뉴스 엠빅뉴스 스포츠머그[14] 관련 링크[15] 관련 링크[16] 펠레,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데이비드 베컴, 파올로 말디니, 호나우두, 매직 존슨, 우사인 볼트,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프란체스코 토티,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가레스 베일, 카카, 네이마르, 메수트 외질, 루이스 수아레스, 디에고 포를란, 주제 무리뉴, 지아니 인판티노 FIFA 회장, 프란치스코 교황, 브루노 로드리게스 쿠바 외교장관, 킬리안 음바페, 파울로 디발라, 미랄렘 퍄니치, 스티븐 제라드, 필리페 쿠티뉴, 윌리안, 모하메드 살라, 해리 케인, 에릭 라멜라수많은 유명인사들이 마라도나를 추모하고 있다. 한국 선수 중에서는 그를 우상으로 삼았던 이강인이 그를 추모하였고 86년 월드컵에서 신의 손을 당한 피터 쉴튼도 해당 사건에 대해 마라도나가 사과가 없었다면서 섭섭함을 표하면서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개인적 감정이지, 객관적으로 가장 위대한 축구선수였음이 분명하고 그런 사람이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며 애도를 표했다. 또한 마라도나의 소속팀이었던 SSC 나폴리, FC 바르셀로나와 몸담은 적이 없었던 레알 마드리드 CF, 파리 생제르맹 FC, 토트넘 홋스퍼 등 수많은 클럽들이 세계적인 축구 스타의 죽음에 그를 추모하였다. 그의 후원사였던 푸마도 그를 추모하였고 부르즈 할리파는 벽면에 마라도나를 비추며 그를 추모하였다.[17] 경쟁이 치열한 아르헨티나 프로축구에서 사진과 같이 서로 다른 팀의 서포터들끼리 사이좋게 다독이는 일은 드물다. 심지어 유니폼을 보면 CA 보카 주니어스CA 리버 플레이트 팬이다! 이 두 팀 간의 라이벌전은 아무리 격렬한 유럽 축구 더비매치라도 감히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격렬하다, 어느정도냐면 최루탄 같은 무기를 사용한 현피가 기본이요 살인 사건까지 일어날 정도다. 더 자세한 건 엘 수페르클라시코 문서 참고.[18] 관련 기사[19] 한국 축구 팬들 중에서는 그가 김민재를 향해 어떤 평가를 내렸을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있다.[20] 물론 당시 남미리그가 지금처럼 유럽리그에 비해 밀리지 않았다.[21] 1985년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상을 수상한 파라과이 미드필더. 1986년 월드컵에서 파라과이의 사상 첫 16강 진출을 이끌었다.[22] 포지션은 공격수이지만 그보다는 조금 내려간 세컨드 톱 위치에서 2선과 좌우 측면 침투 등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면서 운동장을 폭넓게 사용하는, 단순한 득점 이외에 찬스메이킹에도 상당히 일가견이 있었던 전천후 만능형 선수였다.[23]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다 소화해내는 올라운더지만 주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이다.[24] 1980년대 초중반이라 칭한 이유는 사키이즘이 대두된 198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공격형 미드필더들의 입지가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마라도나 만큼은 80년대 후반까지 정점의 위치를 지켰다.[25] 보통 시간 순서대로 펠레, 마라도나, 메시를 '펠마메'로 묶어서 부른다. 이 셋은 그 밑의 크루이프, 호날두, 지단, 디 스테파노, 베켄바워 등보다도 한 계단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그야말로 축구의 신화로 여겨진다.[26] 관련링크 1, 2, 3, 4, 5, 6, 7, 8, 9[27] 메이저 언론사들이 발표한 역대 축구선수 순위를 보면 마라도나는 부트발 2위(#), 마르카 2위(#), 포포투 2위(#), 스포르트1 4위(#) 등이다. 이외 마라도나는 가제타가 무순위로 뽑은 역대 TOP 5에 메시, 펠레,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 디 스테파노와 함께 이름을 올렸다.(#) 2020년 야후스포츠는 대중들의 투표로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를 뽑으려고 하였고, 투표에 앞서 편집진들이 전문가팀을 꾸려 각 종목별 고트 후보 2명을 자체적으로 뽑았는데 축구에서는 펠레와 마라도나가 빠지고 메시와 호날두가 선정되기도 했다. 링크 참고.[28] 2022 월드컵 직후(2022년 12월~2023년 2월)의 평가[29] 오렌지 삼총사프랑코 바레시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역대 최고의 팀 중 하나다.[30] 단, 위에서 언급하다시피 1994년 월드컵에서는 약물 복용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팀의 추락을 막지 못했다.[31] 나폴리 역사상 첫번째 우승한 시즌에는 브라질의 에이스 공격수 카레카가 없었고 직후 시즌부터 카레카 그리고 그 다음 시즌에는 알레망이 합류했다.[32] 당시 아르헨티나는 엘로 랭킹 12위에 위치하며 8강권 전력으로 평가받았다.[33] 단 잉글랜드전은 엄연히 오심으로 이룬 승리이기도 하다. 다음 추가골이 워낙 아름다워서 묻혀버렸을뿐 판정이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마라도나는 승리는커녕 퇴장으로 8강 탈락의 원흉이 됐을 것이다.[34] 이는 사르데냐 섬이 연고지인 칼리아리 칼초의 우승을 제외하면 남부 이탈리아를 연고로 한 팀이 스쿠데토를 차지한 전무후무한 사례이며 클럽 최초의 리그 우승이었다. 마라도나가 떠난 후 나폴리가 다시 스쿠데토를 따내는 데는 무려 33년이란 세월이 걸렸다.[35] Metropolitano(메트로폴리타노)[36]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존재했던 스페인의 리그컵.[37] 1985년과 1993년에 열렸던 유로 우승팀과 코파 아메리카 우승팀의 경기.[38] AM 2위[39] 펠레와 공동 수상.[40] 1986 멕시코 월드컵 8강 잉글랜드 전.[41] Metropolitano(메트로폴리타노)[42] Nacional(나시오날)[43] 링크[44] 공교롭게도 마라도나, 플라티니, 지쿠는 FIFA 회장선거에 출마했다.[45] 반 바스텐은 세계 최고 선수를 다툰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분명 마라도나의 라이벌이었겠지만, 현역 시절 마라도나의 라이벌로 더 자주 조명받았던 것은 굴리트였다. 아무래도 반 바스텐보다는 굴리트 쪽이 국가대표팀 주장이라서 상징적 이미지도 강하고, 포지션이나 역할 면에서 마라도나와 더 유사했기 때문이다.[46] 마라도나는 나폴리, 마테우스는 인터 밀란[47] 키건을 제외한 7명 모두 전성기 시절 세리에 A에서 뛰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지쿠, 플라티니, 루메니게, 파우캉은 1980년대 초중반의 세리에 A를 대표하는 선수들이었고, 굴리트, 마테우스, 반 바스텐은 1980년대 중후반의 세리에 A를 대표하는 선수들이었다. 마라도나의 최전성기였던 1980년대 중후반에는 굴리트와 마테우스가 단연 최고의 라이벌로 손꼽혔다.[48] 그러나 마라도나가 만 19세, 20세의 나이로 지쿠를 제치고 2년 연속 남미 올해의 축구 선수상을 수상하는 등, 축구인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그 당시의 마라도나가 이미 더 뛰어난 선수라고 보는 시각도 많았다.[49] 대단한건 당시 비교되던 선수 중 마테우스는 역대 최고의 중미, 굴리트는 역대 최고의 올라운더, 반 바스텐은 역대 스트라이커 세 손가락에 드는 초특급 선수로 아직까지도 최상위 반열에 있는 선수들이며, 이들 사이에서도 마라도나는 돋보이게 빛나는 선수였던 것이다.[50] 요한 크루이프아약스, 밀란 제너레이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레알 마드리드도 있고 메시와 시기를 같이 한 지네딘 지단크리스티아누 호날두레알 마드리드와는 21세기를 양분하였지만, 2010년대 초반의 '최강 바르사'로 불리던 시절도 단연 최강 후보로 꼽힌다.[51] 저 중 오르테가가 포지션이나 플레이 스타일 면에서 그나마 비슷했다고 평가받는다.[52] 후술하겠지만, 메시와 마라도나 역시 포지션과 스타일이 다른 건 마찬가지다.[53] 그러나 결국 메시는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의 우승을 통해 증명해냈다.[54] 그나마 말년에 하위권 팀 마이애미에서 리그스컵 우승시켰기는 하지만 나폴리 마라도나의 스쿠데토 획득 및 UEFA컵 우승에 비견될 정도는 아니다.[55] 메시도 왼발 편향적이지만, 슈팅만큼은 오른발로도 제법 찬다.[56] 게다가 독감증상까지 있었다.[57] 이 체력 문제는 2021년이 되어서야 해결되어 결승전까지 견인을 하고 결승전에서도 햄스트링 부상 상태에서 풀타임을 뛰어 우승을 할 수 있었다.[58] 펠레도 마라도나만큼의 잡음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경기장 내에서 전투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결코 마라도나에 뒤지지 않았으며 악의적 파울을 당하면 펠레 역시 주저없이 파울로 되갚아주는 경우가 많았다.[59] 물론 이에 대해서도 단순히 메시가 압도적으로 낫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장 메시도 신의 손 골이 있는데다, VAR 시대였으면 신의 손 골이 취소당할 수 있지만, 잉글랜드 선수 두엇은 무리없이 퇴장을 당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 물론 그 전에 손으로 골을 넣은 마라도나는 즉시 퇴장당했을 것이다.[60] 우리나라로 비유하면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중 누가 더 위대하냐고 묻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61] 시리아 출신 아랍계 이주민으로 최고위직에 오른 인물이다. 아르헨티나에서 당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대처리즘적인 정책을 시행했었다.[62] 페론당의 분파로 2000년대 초반 페론당이 여러개의 정당으로 분리되는 과정에서 창당된 정당이다.[63] 다만 2013년 취임식에는 참석하기는 했다.[64] 사실 제헌의회 구성 자체는 일단 베네수엘라 헌법으로 규정되어있기는 하기는 하기때문에 불법은 아니고 대통령도 제헌의회에서 통과된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지못하는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권한이 막강하지만, 1년 반 넘게 여소야대인 의회와 거칠게 대립하고있는데다가 무엇보다도 1990년대 말에 처음 제헌의회를 구성했을때 1998년 대선을 한달 앞둔 시기에 선거를 치른 기존 국회를 무력화시킨 채로 개헌안을 통과시킨 전적이 있다보니, 임기보장이나 정권연장을 위한 면피책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사고있고 실제로도 제헌의회 구상발표 이후로 오히려 시위 사망자수가 불어나는 등 오히려 혼란상은 극심해졌다.[65] 다만 아주 음모론까지는 아닌게 미국 행정부나 주요 정당들 내에서 남미 좌파정권들을 손을 봐야한다는 의원들이나 공직자들이 꽤 있기도 한데다가, 20세기뿐만 아니라, 21세기에도 중남미에서 우파정당을 지원한다거나 하는 식의 행보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66] 주로 나폴리 주변의 남부 지방이다.[67] 정작 마라도나 본인은 가톨릭 신자이다.[68] 당연하지만 일반 가톨릭교에서는 성인이라는 개념은 있지만 공경을 하지 숭배를 하진 않는다.[69] 영상에서 읊는 것은 스페인어 사도신경으로, 예수의 고난-부활을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 메시의 고난-부활과 일치시켰다.[70] 라이벌 펠레는 2013년에 수상했다.[71] 기존 수상자들의 수상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다.[72] 그러나 이것 역시 파파라치나 기자들에게 자신을 보호하는 행동 중의 하나이다. 당장 영국의 다이애나 스펜서가 어떻게 죽었나를 보면 답은 뻔하다.[73] 특히나 그를 해치거나 했으면 아르헨티나인들이 절대로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74] 펠레는 저주로 유명해서 그렇지 인터뷰는 립서비스를 많이 곁들여서 신중하게 하는 편이다. 그리고 애당초 펠레의 저주 자체도 펠레의 엄청난 유명세와 립서비스가 결합되어 나온 만들어낸 속설이다.[75] 2010년 월드컵 당시에는 이미 2승을 거둬서 여유있게 조별 리그 3차전을 맞게 되자 감독이었던 마라도나는 메시를 주장으로 임명했다. 그건 마라도나가 메시에게 주는 생일 선물이기도 했다.[76] 나이젤 더용, 가레스 배리, 야야 투레[77] 유럽의 파파라치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하다. 대표적인 피해자 다이애나 스펜서 전 영국 왕세자비가 파파라치를 피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치명상을 입었던 사건이 있었다. 당시 파파라치들은 다이애나를 구조하지 않고 그녀의 죽어가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대기만 했으며 20분간 방치됐던 다이애나는 뒤늦게 현장을 발견한 시민의 신고로 응급실로 실려갔으나 결국 골든타임을 놓치고 사망하고 말았다. 만약 그들 중 단 한 명이라도 그녀를 위한 신고를 해줬다면 그녀의 목숨이 그렇게 허무하게 날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그들은 모두 사진과 돈에 자신의 양심과 인간성을 팔았고 그들의 치부는 다이애나의 죽음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러한 파파라치의 인식을 생각하면 마라도나만 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78] 스페인어 사용지역의 정식 이름은 1st name - 2nd name - 아버지쪽 성 - 어머니쪽 성 방식을 따른다.[79] 그 외에는 독일 청소년 대표팀의 칼 하인츠 슈나이더는 카를하인츠 루메니게를, 프랑스 청소년 대표팀의 엘 시드 피에르미셸 플라티니를 모티브로 했다.[80] 그런데 아르헨티나 철자가 하나 틀렸다. 즉, R이 아닌 L로 잘못 표기돼 있다.[81] 말디니는 현역 시절에 지능수비로 유명했었다. 마라도나가 고전하는 게 이상한 게 아니다. 말디니 또한 마라도나를 현역 시절 가장 막기 힘들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파일:maradona 1980 best player.jpg
1980년대 최고의 선수, 최고의 미드필더, 아르헨티나 최고의 선수에 선정된 마라도나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선수를 선정했는데 1980년대 아르헨티나 최고의 선수에 선정되었을 뿐 만 아니라 최고의 선수와 미드필더에 선정되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약, 부패 금지 축구.png}}} ||
마약, 부패 근절 유니폼을 입은 두 선수
  • 1986년 플라티니와 함께 마약, 부패를 하지 말자는 유니폼을 입고 사진을 찍은 적이 있었다. 지금 둘의 상황과 가운데 펠레를 보면 아이러니한 사진.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aradona9.png}}}||
파일:maradona number9.png

토리노 경매에 낙찰된 마라도나의 9번 유니폼
  • 워낙 전설적인 선수였던 만큼 그가 선수시절 입었던 유니폼은 경매에서 비싼 값에 팔린다. 나폴리 마지막 시즌인 1990/91 시즌 AC 피사전에 입었던 원정 유니폼은 토리노 경매에서 1만 2000유로(약 1537만원)에 팔렸다. 이게 고가로 낙찰된 이유는 마라도나의 상징적인 번호인 10번이 아니라 9번이 새겨져 있는데 이유는 이 당시 마라도나는 등번호 10번을 팀 동료였던 지안프랑코 졸라를 클럽의 미래라 생각하고 물려줬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10번 새겨진 파란색 유니폼은 6500만유로(약 832만원)에 낙찰되었다. 또한 1987년 6월 이탈리아전에 입은 유니폼은 코로나19 피해지역 지원을 위해 열린 경매에서 7천300만원이 넘는 비싼 가격에 팔렸다. 마라도나가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잉글랜드와의 8강전에서‘신의 손'골을 넣었을 때 입었던 유니폼은 당시 시합 직후 마라도나와 옷을 교환한 잉글랜드 대표팀 출신 스티브 호지가 보관해왔고 현재는 영국 맨체스터 국립 축구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데 미국 경매회사 골딘옥션은 이 유니폼의 가치를 금전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소장 가치를 200만 달러로 추정하였고 호지는 "내가 100만∼200만 달러(약 11억∼22억 원)를 받고 이 유니폼을 판매한다는 얘기까지 나도는데 터무니없고 무례한 말" 이라고 강조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6px"
}}} ||
파일:영화_디에고(DIEGO_MARADONA,_2019)_디에고_마라도나_다큐멘터리_영화.jpg

파일:넷플릭스 로고.svg 시날로아의 마라도나: 끝나지 않은 전설 오프닝 곡
영화 <디에고> 포스터
  • 워낙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왔다 보니 그에 대한 영상화도 많이 이루어졌다. 2008년에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축구의 신: 마라도나가 개봉하였고 2019년에는 넷플릭스에서 마라도나가 도라도스 데 시날로아[82]의 감독직을 맡으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은 다큐멘터리 시날로아의 마라도나: 끝나지 않은 전설이 공개되었다. 또한 다큐멘터리 거장 아시프 카파디아의 <세나: F1의 신화>, <에이미>를 이은 천재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디에고>가 개봉했다. 인물의 성공이나 비극에 초점을 맞춰 마라도나를 우상화하거나 연민을 자아내려 하지 않고 대상을 최대한 다면적으로 조명하면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마라도나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영화다.

  • 쿰비아를 좋아한다. 도라도스 데 시날로아 감독 시절에 경기가 끝난 후 쿰비아 춤을 추는 영상이 공개된 적이 있다. #

  • 2020년 5월 19일(한국 시각) 영국 언론 더 선에서 '마라도나가 코로나19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줄 것을 호소했다. 그의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말했다'고 보도했다.[83] 또한 마라도나는 자신이 감독을 맡고 있는 힘나시아에 급여 삭감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힘나시아의 가브리엘 페예그리노 회장은 라디오 현지 라디오 방송에서 "마라도나 감독이 급여를 삭감해야 한다면 기꺼이 하겠다는 뜻을 전했다"고 밝혔다.

  • 김병지가 유튜브에서 밝히길 마라도나를 실제로 보고 가장 놀란 것은 가슴(흉부) 두께였다고 한다. 과장 없이 한국 선수들의 두 배였다고 한다.

  • 2020년 11월에 심정지로 사망했는데, 그 조짐은 이미 2004년에 있었다. 이 때 마라도나는 심장마비로 한 번 쓰러졌다. 그 이후 응급치료를 받은 후 쿠바로 가서 심장수술을 받았다. 게다가 관절염이 너무 심해서 인공관절로 이식수술을 고려할 정도로 그의 몸은 2004년에 이미 엉망이었다. 2004년에 마라도나는 쿠바에서 재활 치료를 계속 받았고 2006 FIFA 월드컵에 독일로 가서 열렬히 응원을 할 정도로 건강이 회복되었다. 하지만 마라도나는 방심했고 그렇게 악화된 상태에도 불구하고 몸관리를 거의 하지 않고 방탕하게 살아온 결과 2020년에 뇌출혈 증세를 보였는데, 하필이면 이럴때 심장마비가 재발하는 바람에 두 개가 겹쳐서 사망했다.

  • 영국 매체 메일 온라인판은 28일(한국시각) 마라도나의 측근이 주장한 바에 따르면 마라도나는 자신의 은행 계좌에 거의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떠났다고 보도했다. 이탈리아에서 세금 체납 소송을 대리했던 변호사도 이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며 "마라도나는 물질을 초월해 살았고 매우 관대했다. 그의 돈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싶으면 그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물어봐라. 그의 주머니에는 100유로가 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라도나가 현금이 부족한 상태로 사망했지만 다른 부동산 등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또다른 분쟁이 임박하고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아르헨티나 언론들에 따르면 마라도나의 부동산과 보석, 고급자동차, 초상권 등을 모두 합치면 최대 1억 5000만 파운드(약 2200억원)의 가치가 있다며 유산 상속을 두고 분쟁을 벌일 게 확실시된다고 외신들은 전하고 있다. 영국 대중지 더 선은 자녀들뿐만 아니라 마라도나의 누이 5명 중에 4명도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상속 분쟁에 뛰어들 것으로 내다봤으며 마라도나의 유산을 얻기 위한 경쟁은 전쟁 수준이며 월드컵이 될 것이라 덧붙였다

  • 마라도나가 사망한 후 장례를 담당한 상조업체의 외주 직원들이 아르헨티나 소셜 미디어에 관에 누워있는 마라도나의 시신과 찍은 사진을 공개하며 고인에 대한 직업의식과 예우를 지키지 않아 파문이 일고 있다. 이에 아르헨티나의 시민들이 사건의 당사자 페르난데스를 죽이겠다며 살해협박까지 하고 나섰고[84] 특히 유족과 변호사의 분노가 극심하다고 한다. 이 사실이 알려진 후 해당 업체는 해당 직원을 즉시 해고하였고 그는 공개사과를 하며 제발 용서해달라고 호소했다.

  • 아르헨티나 수사당국이 마라도나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데에 의료적 과실이 있었는지를 보기 위해 마라도나 주치의 레오폴도 루케의 집과 진료실을 압수 수색했다. 그리고 그를 치료했던 의료진이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됐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aradona sky.png}}} ||
마라도나가 연상된다며 한 팬이 올린 달밤 사진
  • 한 아르헨티나 팬이 마라도나가 연상된다며 SNS에 올린 달밤 사진이 화제가 되고 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프랑스 풋볼 발롱도르 드림팀.jpg}}} ||
발롱도르 드림팀에 선정된 마라도나

{{{#!wiki style="margin: -5px -10px -6px"
}}} ||
디에고 마라도나를 위한 헌정 영상
  • 2021 코파 아메리카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킥오프 직전 아르헨티나의 전설 마라도나를 위한 특별한 영상이 공개됐다. 마라도나가 홀로그램으로 제작되어 경기장 안을 채웠으며 그가 생전에 뛰었던 모든 팀들의 유니폼을 입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끝으로 지난 2001년 마라도나가 공식 은퇴 경기를 치르면서 했던 “이 파티가 끝나지 않기를. 당신이 나에게 주는 사랑이 끝나지 않기를”이라는 말이 담겼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6px"
}}} ||
디에고 마라도나를 위해 마오리 하카를 추는 뉴질랜드 럭비 유니온 국가대표팀
  • 마라도나 사망 소식에 뉴질랜드 럭비 유니온 국가대표팀은 아르헨티나 럭비 유니온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 앞서 디에고 마라도나의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을 앞에 두고 마오리 하카를 추었다. 당연하지만 마오리 하카는 조롱의 의미가 아니라 존중의 의미, 자신감의 표출, 슬픔의 애도 등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춤인데다 뉴질랜드 럭비 유니온 국가대표팀, 일명 올 블랙스는 경기 전 항상 마오리 하카를 추는 것이 전통이다.

  • 마라도나 생가는 국가기념물로 지정되었다.#

  • 마라도나 시계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훔쳐 귀국한 인도인이 현지 경찰에 체포됐다. #


10. 디에고 마라도나에 대한 헌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디에고 마라도나/관련 언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1. 어록[편집]


파일:diego-maradona_jpg-ns.jpg}}}

경기장에서 뛸 땐 삶도 사라져요. 문제들도 사라지고, 모든 게 잊히죠.

영화 <디에고>의 서두와 말미에 반복되는 대사.


그날 나는 손으로 하늘을 만지는 느낌을 받았다.

15세의 나이로 첫 성인팀에 데뷔했을 때.


축구는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스포츠다. 당신이 축구에 관련한 실수를 했다고 하더라도 축구에 대해 미안해 할 필요는 없다. 축구는 모든 것을 정화하는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간 실수를 정말 많이 했다. 하지만 축구만큼은 더럽히지 않았다.

자신의 축구 선수 경력을 마무리하는 은퇴사에서.


평화를 기대해요. 바르셀로나에는 없던 평화요. 그리고 존중을 바랍니다.

바르셀로나를 떠나 나폴리로 이적하며 남긴 말.


파란색이죠. 나폴리 시민을 위한 파란색. 나폴리에 살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취급을 당했는지 상상도 못할 거예요. 그랬기 때문에 시민들은 이번 승리를 누릴 자격이 있어요.

유벤투스전 승리 후 이번 골은 무슨 색이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러면 감독님은 그것을 잘라야겠군요. 자위를 안 해봤을 리는 없었을 테니까요.

카를로스 빌라르도 대표팀 감독이 자꾸 머리를 만져서 연습을 못할거면 머리를 잘라라라고 이야기했을 때 되받아친 말.


그 때 공을 강타한 것은 나의 손이 아니라 신의 손이었다.

1986 멕시코 월드컵 8강 잉글랜드전에서 손으로 슛을 넣은 직후.


나폴리에서 6년을 보냈어요. 이젠 사람들이 저를 잘 아니까 아르헨티나를 응원해주리라 믿어요. 갑자기 너무 많이 바라면 안 되겠지만 분명 제가 기뻐하길 바랄 거예요. 아르헨티나를 응원해주면 좋겠어요. 그 응원이 필요하기도 하고 저도 그분들이 절 필요로 할 때 늘 열심히 했으니까요.

1990 이탈리아 월드컵 4강 경기 전 인터뷰에서.


나폴리의 국민들이여, 북녘의 주적[85]

을 응원하지 말고 나폴리의 진정한 우방인 아르헨티나를 응원해다오.[86][87]

1990 이탈리아 월드컵 4강 이탈리아전에서 관중석에다 대고 외친 말.


힘들었어요. 나폴리에 처음 갔을 땐 85,000명이 절 환영해줬는데 떠날 땐 완전히 혼자였죠. 조용히 떠났어요. 소란 떨지 않았죠.

영광을 함께한 나폴리를 떠나면서.


2010년의 메시는 1986년의 마라도나보다 더 뛰어납니다. 그는 지금 예수와 공을 차고 있어요. 메시는 나와 펠레 간의 논쟁을 끝낼 수 있는 선수죠. 현재 그 누구도 메시와 비견될 수 없을 뿐더러, 그가 하는 것의 40%를 하는 선수조차 없습니다.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 리오넬 메시를 극찬하며.[88]


유럽 선수들은 대개 공을 제압하여 통제하는데 많은 공을 들인다. 하지만 나는 공을 친구로 대한다. 경기 중에 내 친구가 어디로 가든지 하고 싶은대로 하게 놔둔다.


펠레가 나이를 너무 먹어서 노망이 들었나보다.

펠레네이마르리오넬 메시보다 더 뛰어나다고 주장하자.[89]


우리 엄마는 내가 제일 뛰어나다고 하신다. 근데 펠레의 어머니는 펠레가 더 뛰어나다고 하시겠지?


2002 한일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가 조별 리그 탈락하자 한 말.[90]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XX놈들을 제외한 모든 분들께 이 영광을 돌립니다. 나와 대표팀을 믿지 못하는 기자와 언론 사람들은 X이나 XXX!

2010 남아공 월드컵 남미 예선을 힘겹게 통과한 후 기자회견 자리에서 했던 발언. 실제로 마라도나는 이 발언으로 인해 징계를 먹고 조추첨에 참가하지 못했다.


마치 무하마드 알리의 펀치에 얻어맞은 기분이다.

2010 남아공 월드컵 8강 독일전에서 패한 직후.


이 낙지놈, 나는 네가 죽어서 기쁘다. 월드컵에서 진 것도 다 너 때문이야.

2010 남아공 월드컵 독일전의 참패를 점친 문어 파울이 죽자 트위터에 올린 글.


브라질은 별로다. 그렇다고 독일이 잘한 것도 아니다. 독일과 브라질의 경기에서 중반이란 없었으며, 다비드 루이스의 호흡도 전혀 안 맞았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브라질이 한 거라고는 롱슛밖에 못한 것이 전부라는 점이다.

미네이랑의 비극 직후 인터뷰에서.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에르난 크레스포? 그 두놈 자식들은 골방에 가둔 뒤 한쪽이 사망할 때까지 서로에게 펀치를 날리게 해야 한다.

아르헨티나 국대에서 두 사람의 갈등에 대해 한마디.[91]


차기 회장선거는 블라터 회장을 내쫓을 좋은 기회라고 확신한다. 블라터는 축구에 큰 해악을 끼쳐왔다.

5선에 도전하는 제프 블라터 회장을 비난하면서.


저는 25년간 FIFA의 블라터, 그라노다 회장과 싸워왔습니다. 말하라고 돈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선수들을 방어해왔으며 마침내 오늘 괴물들에 대한 인식이 생겼습니다.

'Tyc Sports'와의 인터뷰에서.


지난번에 디 마리아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 봤는데 챔피언스리그 우승이라고 대답했다. 국가를 대표하는 월드컵 우승이 아니라 말이다. 이딴게 얘들의 마인드다.

러시아 월드컵 전 인터뷰에서.


나는 아르헨티나 경기를 보지 않았다. 나는 호러 영화를 즐겨 보지 않는 사람이다. 지금 대표팀을 이끄는 무능력한 사람들은 경기 전 베네수엘라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나? 이 팀은 늘 국민들을 배신하고 거짓말을 한다. 미안하지만 앞으로도 승리를 거두긴 힘든 팀. 대표팀 유니폼을 입을 자격도 없다. (상황이 나아질) 답이 보이지 않으며 이런 사기꾼들을 계속 믿어주는 팬들에게 내가 다 미안하다.

2019년 3월 23일 아르헨티나 대표팀이 베네수엘라와의 친선경기에서 1:3으로 패배한 직후 인터뷰에서.


미국은 25분마다 TV 광고를 하길 원할 것이고, 4번씩 나눠 100분을 뛰기를 바랄 것.

미국·캐나다·멕시코 북중미 3개국에서 2026 월드컵을 공동 개최하는 것에 대해 한마디.


캐나다 사람 중에서는 틀림없이 좋은 스키어들이 많다.

미국·캐나다·멕시코 북중미 3개국에서 2026 월드컵을 공동 개최하는 것에 대해 한마디.


역대 최고 선수에 대한 논쟁에서 나를 고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분명 펠레의 플레이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위대한 선수는 펠레이며, 마라도나는 마라도나일 뿐이다. 앞으로 메시가 은퇴한다면 어떻게 될까? 메시가 은퇴한 지 10년이 지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금 젊은 사람들은 마라도나를 모른다. 젊은 사람들은 당연히 메시를 더 자주 보며, 그래서 메시를 위로 평가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확히 나와 펠레에게 일어났던 일과 같다. 나와 펠레는 함께 카타르에 방문했던 적이 있는데, 젊은 사람들이 대다수였으며,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고 "디에고! 디에고!"하며 악수를 청하고 사진을 찍자고 했다. 펠레를 알아보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고, 펠레에 대한 호응은 나에 비해서 미적지근했다. 왜냐하면 내가 당시 현역 선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의 플레이만 봤다. 젊은 사람들은 항상 오늘날의 선수를 고평가한다. 그렇기에 시대가 다른 선수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에 뛰는 선수와 과거의 선수를 비교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펠레이다. 나도, 메시도 역사상 최고는 아니다.

펠레를 깎아내리는 사람들에 대한 일침.


과거의 축구와 현대의 축구는 많이 다르지만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등번호 10번은 나의 것이다. 나는 아직도 국가대표 유니폼을 벗지 않았다.

2020년 5월 28일(한국시간) 자신의 SNS에 남긴 글.


만약 내가 하얀 옷을 입고 결혼식장에 서있는데, 흙 묻은 이 날아온다면 단 1초의 고민없이 가슴으로 받을 것이다.

마라도나의 사후 파브리지오 로마노[92]

SNS에 올린 그의 어록.


반월판이 산산조각이 나더라도 경기하고 싶다. 심장이 터질 때까지 뛰고 싶어. 항상 신중한 사람이 먼저 되는 건 아니야. 나는 경기하고 이기고 싶다. 광기? 문제없어. 내 인생의 마지막 날까지 미쳐 버릴거야.



12. 둘러보기[편집]





[82] 펩 과르디올라가 선수 생활 말년에 뛰었던 팀이다.[83] 판자촌 출신으로 어린 시절 빈곤을 경험했던 마라도나는 15살 때부터 여덟 식구의 가장 노릇을 했다.[84] 장례식들 중에서도 관을 열고 하는 장례식인 오픈 캐스킷 장례식이라는 게 있고, 실제로도 리버 피닉스, 주스 월드, 제임스 브라운 등이 이런 식으로 장례식을 하여 이 중 리버 피닉스와 제임스 브라운의 경우 시신의 사진까지 남아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마라도나는 이런 방식의 장례식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신 사진을 무단으로 찍어서 단순 기념으로 인증샷을 남겨 심각한 고인모독을 진행하였다는 점이다. 당장 오픈 캐스킷 장례식으로 진행한 리버 피닉스의 시신사진이 타블로이드지 기레기들에 의해 유출되었을 때, 그의 동생인 호아킨 피닉스는 그것에 염증을 느껴 한동안 연예계를 떠나 있었다.[85] 이탈리아는 남북간 갈등이 심하다. 참고로 이탈리아 북부는 남부에 비해 훨씬 부유하다.[86] 남부 이탈리아 사람들은 19~20세기 걸쳐 엄청나게 많은 수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민갔고, 아르헨티나도 이런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주 이민국 중 하나였다.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워낙 이탈리아계 성씨가 많은 이유.[87] 이 말에 격분한 이탈리아 월드컵 조직위원회는 결승에 진출한 아르헨티나의 상대가 된 서독을 대놓고 응원하기로 결심하였고, 결국 편파판정 끝에 서독의 안드레아스 브레메가 페널티킥 결승골을 넣어 서독을 우승으로 이끌었다.[88] 메시가 데뷔할 무렵 제2의 마라도나라는 별명으로 주목 받기 시작했었고, 이때 마라도나 본인도 자신의 진정한 후계자는 메시라며 애지중지 했었다. 이런 그가 아르헨티나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해 이렇게 대놓고 메시를 치켜세우는 인터뷰도 남겼었다. 하지만 이후 메시가 계속 국제대회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역시 자신에겐 못 미친다고 실망감을 자주 내비치기도 했다.[89] 노망 이야기는 좀 심하지만 펠레의 발언이 개드립 수준의 망언임은 악성 호날두 팬들도 인정할 정도였다. 2019년 기준 현재의 네이마르라도 메시와 비견될 실력은 아닌데 저 당시 네이마르는 유럽 리그에서 딱히 보여준 것도 없는 유망주에 불과했는데다 유럽에서 미친 활약을 보이던 리오넬 메시와 비교하는 것도 모자라 더 낫다고 할 정도이니 라이벌 국가 브라질 국민들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였고, 마라도나 발언의 의도 역시 이러한 입장을 대변한 것으로 볼 수 있다.[90] 그러나 정작 마라도나는 오히려 역사상 최악의 축구 감독으로 낙인찍혔다. 자세한 내용은 디에고 마라도나/감독 경력 문서를참r고.[91] 다만 실제 두 사람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92] 이탈리아 축구 전문 기자.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4 20:17:42에 나무위키 디에고 마라도나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