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테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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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테레사의 주요 수훈 및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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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테레사[1]
Mother Tere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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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아녜저 곤제 보야지우
Anjezë Gonxhe Bojaxhiu
성인명
콜카타의 성녀 테레사
Saint Teresa of Calcutta
출생
1910년 8월 26일[2]
오스만 제국 코소바 빌라예트 위스퀴프
(現 북마케도니아 스코페)
사망
1997년 9월 5일 (향년 87세)
인도 서벵골 주 콜카타
국적
[[인도|

인도
display: none; display: 인도"
행정구
]]
[3] | [[알바니아|

알바니아
display: none; display: 알바니아"
행정구
]]
[4]
신체
152cm
가족
아버지 니콜러 보야지우
어머니 드라나필레 보야지우[5]
자매 아게 보야지우
형제 라저르 보야지우
수상
파일:템플턴상 아이콘.png 템플턴상 (1973)[6]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 노벨 평화상 (1979)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Signature_of_Mother_Teresa.svg


1. 개요
2. 생애
3. 사망
4. 시복시성
5. 비판
5.1. 의료기관 운영, 고급병원 입원
5.2. 강간피해 여성들의 출산 권장
5.3. 탄압받는 이들에 인내 요구
5.4. 독재자, 금융 사기자 옹호
6. 국적 논쟁
7. 이모저모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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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청빈[7]

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굶주리고, 헐벗고, 집이 없으며, 신체에 장애가 있고, 눈이 멀고, 질병에 걸려서, 사회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하고 거부당하며 사랑받지 못하며 사회에 짐이 되고 모든 이들이 외면하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이 상을 기쁘게 받습니다.

1979년 12월 10일,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며 남긴 말. 영상[8]


어떻게 텔레비전 같은 매스미디어를 그리스도교적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지 계속해서 논쟁이 일어났다. 양식있는 무신론자 및 인문주의자의 대화에서부터 대중음악 버전 시편과 사이키델릭한 회합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을 다 시도해봤다.

여기에 대답이 있다. 단지 그리스도적 애덕으로 넘치는 환한 얼굴을 보라. 그녀에게는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그리스도가 전부이며, 자유로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려고 자신과 육신의 속박을 벗어버렸다. 잔뜩 긴장하고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게 화면에 비쳤다) 떨리는 목소리로 카메라 앞에 선 알바니아 국적의 낯선 수녀가 어느 일요일 저녁 영국 텔레비전 시청자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이러한 것은 전문적인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도 주교도 대주교도 소위 시대를 앞서가는 성직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둔다."[9]

는 영의 힘을 드러낸 증거였다.[10]

먈컴 머거리지(Malcom Muggeridge)[11]

, 《Something Beautiful for God》


가톨릭수녀원장이자 성녀, 인도의 사회운동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다.


2. 생애[편집]


본명은 알바니아어로 아녜저 곤제 보야지우(Anjezë Gonxhe Bojaxhiu)이다. 오스만 제국 치하의 위스퀴프(اسکوب / Üsküb, 현 북마케도니아 스코페)에서 알바니아인이었던 니콜러 보야지우(Nikollë Bojaxhiu)와 드라나필레 보야지우(Dranafile Bojaxhiu) 부부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가족관계로는 큰언니와 오빠가 있었다.

어릴 적부터 집안은 영국의 영향을 받아 현지에서 소수 종교였던 가톨릭을 믿고 있었다.[12] 특히 어머니 드라나필레가 독실한 신자였다고 한다.[13] 정치인이던 아버지 니콜러는 1919년 시의원으로 정치 행사에 참석한 후 독살되었다. 1차 세계대전 직후 1910년대의 혼란스러웠던 당대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비극적 단면이라고 할수 있다. 이러한 비극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더욱 서로를 아끼게 되었으며 결속력이 강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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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마더 테레사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으나 우등생이었고, 가톨릭 성당에서 성가대원으로 활동한 후 성장한 후에는 가톨릭 청년 단체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1928년 아일랜드 더블린에 가서 성모 수녀회에 입회하고, 인도 제국으로 떠나 인도의 로게토 성모 수녀회에서 수녀가 되기 위해 수련을 받는다.[14] 1937년 로게토 성모수녀회의 수녀로서 종신서원을 한다. 이때부터 '테레사'라는 수녀로서의 이름을 쓰기 시작했는데, 19세기 말 활동했던 프랑스의 수녀이자 성인인 리지외의 테레사를 본받겠다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15]

직후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성 마리아 학교에서 교사로 일한다. 1946년, 대피소를 떠나는 기차 안에서 약자들을 도우며 살라는 소명을 받는다. 직후 수도회 밖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기까지 2년의 세월이 지나간다. 1948년에 수도복을 벗고 흰 사리[16]를 입고 수녀회를 떠나 기초 간호학을 속성과정으로 수료한 후,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집안으로 불러와 먹을 것을 주고 돌보아주는 일을 시작한다.

마더 테레사의 봉사 방향성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혼자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었다. 그 해에 테레사 수녀는 인도 시민권을 요청하는데, 곧 평생 인도 시민권자로서 살 수 있게 된다. 1949년부터 성 마리아 학교의 제자들이 테레사 수녀를 따라 모여들어, '사랑의 선교회'라는 수도회가 자연히 형성되었다. 1952년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임종자의 집'[17]을 연다. 이 집은 가톨릭 신자인 마이클 곰스가 제공한 셋집이었다.

사랑의 선교회는 점점 더 커져갔고, 모인 기부금으로 선교회 지부로 쓸 집을 살 수 있었다. 이 수도원은 사랑의 선교회 본원으로 쓰이게 되고, 같은 거리에 임종의 집에서 죽은 사람들의 아이들을 포함하는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도 설립한다. 이들의 활동은 나환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나, 전염을 우려한 사람들의 반대로 이동병실을 우선적으로 만들었다가 후에 시 외곽에 나환자들의 자립을 위한 재활 센터를 설립한다. 15년간 활동한 이후 인도에서 활동하는 사랑의 선교회의 수도자들은 300명이 넘었다. 주교들이 청원을 올리자, 교황은 사랑의 선교회가 전 가톨릭 교회 내에서 일할 수 있도록 승인한다. 1965년부터 1971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사랑의 선교회'의 새로운 분원들이 문을 열어 활동하게 된다.

인도로 떠난 이후 수녀회의 사도직 활동에 전념하며 평생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18] 어머니 드라나필레가 임종할 때는 알바니아로 돌아가려 했으나 정부에서 입국 허가를 거절했다.[19] 1981년 5월 3일, 1982년 4월 28일, 1985년 1월 26일에는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말년에 심장병을 얻어 2번의 심장마비를 겪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받을 의료적 행위를 자신이 돌보는 가난한 이들은 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으나, 2번째 발작 이후에는 정부의 지속적인 요구와 교황의 요청으로 수술을 받게 된다. 1991년에는 걸프 전쟁 중지를 호소하고, 조지 H. W. 부시사담 후세인은 요청을 받아들여 화해의 제스처를 취한다. 물론 테레사 수녀의 요청만으로 전쟁이 멈춘 것은 아니다.


3. 사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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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
운구 행렬
1991년에서 1993년 사이 2번의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몸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 계속하여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평화와 나눔을 호소했다. 자신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사랑의 선교회의 회원을 실제로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만으로 한정한다. 말년에는 말라리아에 감염되었는데, 이것이 폐까지 침범하였다. 선교회에서 죽고 싶다고 말해 선교회로 되돌아왔고, 1997년 9월 5일에 향년 87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장례식은 9월 13일국장으로 거행되었는데 시신은 마하트마 간디자와할랄 네루의 시신을 운구했던 포가(砲架)로 운구되어 인도 정부가 나타낼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와 애도를 표했다. 유해는 생전에 가난한 이들과 함께 했던 테레사 수녀의 집에 안장되었으며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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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복음서 15장 12절)
마더 테레사
1910년 8월 26일 ~ 1997년 9월 5일
우리의 사랑하는 수녀원장
사랑의 선교회 설립자

평생 허리를 구부리고 고개를 숙인 자세로 일해왔기 때문에 고령이 된 후에는 허리가 펴지지 않았고, 세계를 돌아다닐 때는 한쪽 귀가 멀고 심장이 약해진 상태였다고 한다.

인도의 캘커타에서 헌신적인 빈민 구제 활동을 하여 살아있을 때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1979년에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는데, 수상축하연에 사용될 돈을 빈민구제기금으로 써달라고 요청한 일화가 있었으며 자선가에게 주어지는 각종 상과 선량한 종교인이 받는 각종 상들을 수상했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다음해인 1980년에는 인도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시민 훈장인 바라트 라트나(Bharat Ratna)를 받았다.


4. 시복시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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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0월 19일 시복식
2016년 9월 4일 시성식
성 베드로 대성당 강복의 발코니에 걸린 마더 테레사의 상본(像本)



사망 6년 뒤인 2003년 10월 1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복자로서의 명칭은 "캘커타의 복녀 테레사"이며 라틴어로는 "Beata Teresia Calcuttensis"라고 쓴다.[20] 축일은 9월 5일이다.

2015년 12월 18일, 교황청 시성성이 2008년 뇌종양을 앓던 브라질 남성이 치유된 것을 마더 테레사에게 청한 전구로 인한 기적으로 인정함에 따라 시성에 필요한 기적 사례 2건이 충족되어 2016년 시성식이 거행될 것이라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마더 테레사의 축일인 9월 5일에 시성 미사가 봉헌되는 게 원칙이지만, 주일인 9월 4일로 앞당겨 열린다. 시복식 때 30만 명에 가까운 인파가 운집한 것을 고려하면 마더 테레사의 시성식은 교황 프란치스코가 선포한 '자비의 희년'의 하이라이트가 될 것이라는 게 언론의 분석이다.

2016년 3월 15일 (한국시간) 프란치스코 교황이 시성을 승인했고, 동년 9월 4일 시성식이 거행되었다. 성인으로서의 명칭은 "Sancta Teresia de Calcutta", 즉 "캘커타의 성녀 테레사"이다.

당초 인도 가톨릭 주교회의는 교황이 인도를 방문해 시성식을 거행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교황청의 희년 행사 일정상 로마에서 거행하기로 했다. 4일 시성식과 그 다음 날로 예정된 자비 활동가들과 자원 봉사자들을 위한 희년 행사를 묶으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하느님 자비의 실천 메시지를 더 널리 전파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한편 교황은 시성식에서 가장 좋은 자리(제대 앞)를 가난한 이들에게 마련해 주었다. 이들 1,500명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사랑의 선교 수녀회가 운영하는 환대의 집에 머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시성식 뒤에는 바오로 6세 강당에서 이들에게 나폴리식 피자를 곁들인 점심을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과 함께 직접 나눠 줬다. 또한 교황은 이날 루터교회에서 개종한 후 브리짓다 수도회를 설립한 스웨덴의 마리아 엘리자벳타 헤셀블랏, 아르헨티나에서 '가우초 (남미의 카우보이) 신부'로 공경받는 가브리엘 브로케로 신부도 같이 시성하였다.


5. 비판[편집]


마더 테레사의 결점 문제가 대두된 것은 그녀의 시복 절차가 시작되면서부터다.

시복 절차가 시작되면 교황청은 조사자들을 두 무리로 나눈다. 이들은 현대 재판검사변호사의 역할을 맡는데, 각자 자신들의 주장[21]을 뒷받침하는 방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해야 한다. 쉽게 말하면 한쪽은 비난만 하고 한쪽은 칭찬만 해야 하는 것인데, 이 주장을 뒷받침할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은 현지조사의 기간은 기본적으로 3~4년이며, 서류상의 검토는 대개 11~13년 정도의 기간을 들인다. 양쪽이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교황청이 "해당 인물은 생전의 부정적인 면모보다 긍정적인 면모가 뛰어나기에 성인으로 시성할 가치가 있다."라는 결론을 내려야만 성인으로 시성할 수 있다.

사망 후 시복 절차를 밟으면서 대두된 문제이나, 생전에도 몇 가지 이유로 비난받았다. 이는 그녀의 문제라기보단 수도자 혹은 가톨릭 신자로서 취하게 되는 근본적인 입장, 또는 반종교적인 시선을 가진 이들이 주장하는 것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의혹을 던져주는 몇몇 사건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반그리스도교 성향 진보 언론인인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테레사 수녀가 활동하고 있던 1980년대에 <자비를 팔다>라는 책을 통해 그러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의문을 던졌다. 이 책에서 가차없는 공격을 펼친 히친스 때문에, 교황청에서는 테레사 수녀의 시성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악마의 대변인 중 하나로 히친스를 초청해 테레사 수녀에 대한 히친스의 의문과 비판을 경청했다. 아래에 있는 비판도 봉사시설 운영 논란을 제외하면 단순히 테레사 개인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교 비판에 가까운 입장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히친스의 말에 따르면 이 악마의 대변인으로 활동할 때의 분위기는 의외로 차분하고 기탄없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도록 하는 분위기였다고 하며 그는 이 검증 체계에 대해 호평했다.

밑에 비판에 쓰인 예시 내용의 많은 부분이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쓴 <자비를 팔다>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이 책은 무신론적 회의주의 입장에서 테레사 수녀를 비판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 책이기 때문에, 이 책만을 보고 그녀의 행적 전부를 판단하는 것은 대단히 곤란하다. 가톨릭 신자라면 일반적으로 위인들에게 갖는 존경심 이상으로 성녀인 마더 테레사에 대해 신앙적 경의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톨릭 신자들의 관점과 무신론자가 보는 세속 가치관과 충돌하는 '종교인'의 이미지는 차이가 확연할 수밖에 없다.


5.1. 의료기관 운영, 고급병원 입원[편집]


'자비의 집' 봉사활동을 했던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테레사 수녀는 자비의 집을 현대적인 의료시설로 바꾸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으며, 단지 죽어가는 이들을 방치하는 수준의 원시적인 시설관리만을 했다고 한다.

현대의 노인요양원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시대도 시대이거니와 그 당시 기준으로도 열악한 시설이었다. 즉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수용소 수준. 일부 흠좀무한 증언에 따르면 주사바늘 여러 개를 끓는 물도 아니고 찬물 아래 비벼 씻는 것으로 소독을 마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22] 진통제 같은 기본적인 약들도 구비가 어려워 꼭 필요할 때에만 주곤 했다고 한다. 또한 적절한 처방만 하면 살 수 있을 어린아이 등을 똑같이 빈약한 치료만으로 죽게 만든 점에 대해서도 비판의 여지가 있다. 그녀가 받았을 기부금의 액수를 생각해보면, 빈민 모두를 최상의 시설과 인력으로 치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쳐도, 기자재가 충분히 갖춰진 시설에서 치료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래서 병원에서 사망율은 다른 병원보다 아주 높았다고 한다. 그에 반하여 병원에 근무하는 카톨릭 신자이던 직원들의 업무량과 지급되던 급여는 아주 두둑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세계로부터 흘러오는 막대한 지원금 내역은 공개되지 않는 데 반해, 실제로 현지에 지어지는 의료 기관이 극도로 빈약하다는 사실로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런 열악한 시설을 그냥 이곳저곳 늘리는 데에만 집중한 면모도 선교에만 치중한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그에 비해 본인이 병에 걸렸을 때는 인도에서 알아주는 최고의 요양시설에서 진료를 받았다. 그러나 병에 걸리자마자 입원한 것은 아니며, 첫 번째 심장마비가 왔을 때는 치료를 거부했다가 2번째 심장마비 이후, 저명인사의 죽음으로 인한 비난을 두려워한 인도 정부의 반강제적인 요청과 교황의 요청에 따라 마지못해 승낙했다. 비슷한 일화로는 투옥 중인 간디가 주사제를 처방받은 일이 있다. 입원한 상황에서도 '나보다 어려운 사람이 많다'고 말한 바가 있다.

5.2. 강간피해 여성들의 출산 권장[편집]


강간당한 피해 여성들에게 낙태하지 않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마더 테레사 개인의 판단이 아니라 가톨릭의 엄격한 생명윤리에 따른 것임은 알아야 한다. 가톨릭낙태 항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톨릭은 인간생명존중을 기반으로 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모든 생명 훼손 행위에 반대한다. 사실 생명 존중은 모든 종교에서 인정하는 바인데, 임신중절 문제에서 가톨릭은 가장 엄격한 입장을 취한다.[23] 수정란의 착상을 방해하는 것조차 가톨릭의 입장에 어긋난다. 수정란 때부터 인간 생명으로 보기 때문이다.

가톨릭에서는 생명복제를 비롯한 모든 생명에 관여되는 인간 자의적인 행위를 부정적으로 보며, 부부간의 생리 주기법을 제외한 일체의 인공피임도 죄악으로 금지한다. 다만 산모가 죽게 된다거나 하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서 태아가 유산될 '가능성'이 있지만 산모를 확실히 살릴 수 있다는 전제하에 태아의 사망을 의도하지 않는 치료방식 정도만 용인한다.[24] 애초에 성(性)을 부부사랑&생명의 잉태가 아닌 쾌락적으로 사용하는 모든 행위(수음이라던가)는 크고 작은 차이만 있을 뿐 모두 가톨릭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따라서 이러한 가톨릭 생명윤리에서 낙태살인이기 때문에 금지된다. 평생을 독실한 가톨릭 신앙인으로 살아온 테레사 수녀원장에게는 출산 권장이 올바르지만은 않다는 인식 자체를 거부하는 게 당연하다. 사실 강간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피해자들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크게 상처를 입었는데다 대다수가 경제적 지위도 낮아서 출산을 한다고 해도 제대로 아이를 돌보기가 힘들다.[25] 그런 피해자들을 도와주고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시설이 발달한 곳이면 모를까, 그렇지 못한 후진국에서 아이를 낳게 되면 앞으로 행복하게 살아가기 힘드므로 무책임하다는 비판이 따랐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원장은 무책임하게 출산만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끄는 사랑의 선교회는 말로만 떠드는 게 아니라 전세계에서 의료기관과 고아원 등의 시설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녀는 "키우지 못할 아이가 있으면 낙태하지 말고 나에게 보내 달라. 내가 키우겠다"고 했다. 하지만 육아를 배제하고 출산만 놓고 생각하더라도 피해자의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기에, 반대자들을 완전히 납득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강간당해 임신한 여성이 본인이 원하지 않는데도 임신으로 인한 신체적 부담과 출산의 고통 및 후유증, 경제적 부담 등의 피해를 당해야만 하는 정당한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그 피해를 어떻게 보상해야 할지도 문제라는 것이 반대파의 주장이다.

그렇지만 무엇이 어찌되었든, 그녀는 일차적으로 가톨릭 신자이며 수도자이다. 계속 강조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테레사 수녀원장을 탓하기 이전에 그녀는 가톨릭 교회의 교리에 따라 행동하기로 서약한 수도자라는 것을 유념해야만 한다. 가톨릭에서 낙태는 중죄 중의 중죄이다. 어느 정도냐면 가톨릭 신자는 낙태를 해서도 안 되고, 직접 하지는 않더라도 낙태 행위를 종용하거나 심지어 단순히 얽히기만 해도 자동 파문이 내려질 정도. 또한 낙태 허용 법안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거나 낙태 허용 시위에 참가하거나, 낙태 허용 법안에 찬성표를 던져도 안 된다. 평신도가 속으로 남몰래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개인의 양심 영역이니 어찌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정치인이 공개적으로 낙태 허용 법안을 지지하거나 하는 경우 영성체를 금지당하기도 한다. 미국의 정치인 낸시 펠로시가 이 케이스에 속하는 경우. 신성모독이나 현실에서도 범죄인 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타이르기만 하고 잣대를 잘 들이대지 않는 일반 신자에게도 저 정도로 엄격하게 나가는데 평생 교리에 순종하며 살아가기로 서약한 수도자라면... 일례를 들자면, 브라질의 수녀이자 해방신학자인 이본느 게바라가 낙태의 합법화를 지지했다가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장관으로 있던 신앙교리성[26]에서 2년 침묵(강연/저술 등의 금지, 즉 근신) 처분을 받기도 했다.

가톨릭에서는 낙태를 위와 같은 수준의 심각한 중범죄이자 신생아보다도 어린 태아를 살해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런 만큼, 가톨릭의 가르침에 철저히 순명하고 그를 실천하였기에 빈민들에 대한 그 정도의 사랑을 드러내보일 수 있었던 마더 테레사로서는, 낙태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로 일관되게 가톨릭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였을 뿐이다.

5.3. 탄압받는 이들에 인내 요구[편집]


거대 권력의 힘에 의해 탄압을 받는 사람들에게 "참으세요"라고 말하며 그들에게 인내를 권했다.

이 역시 가톨릭 신앙과 관계 있는데, 가난한 자들을 적극적으로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기보다는 규모를 확대하는 데에 신경 쓴 수도회의 방향성 또한 맥락을 같이 한다. 이 부분이 기부금을 쌓아두고 가난한 이를 돕지 않는다는 비판을 제기하게 만들기도 했는데, 가난한 이들의 재활을 돕기보다는 많은 피난처를 만드는 쪽에 무게를 둔 것뿐이지 테레사가 돈을 횡령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니 오인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테레사 수녀는 때로 지나친 특수 사적 목적성을 띤 정부 보조금을 거부하기도 했다.

이는 가톨릭 신앙에서 권위와 전통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테레사 수녀가 활동한 시기는 1940년대부터이니 지금보다 훨씬 바티칸이 사상적으로 보수적이었던 시기였으며, 각국의 보수 세력과도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던 시기이다. [27] 20세기 중후반이 되면서 가톨릭은 각국의 상황에 따라 정교분리와 정치적 중립성을 과거보다 더 강조하거나, 혹은 민주화운동 등에 참여하는 등 여러가지 입장을 취하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그리스도교계에서 모두가 그런 식으로 순종을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많은 교파나 그리스도인들은 권력에 대한 저항이나 혁명을 주장하거나 참여했고, 이러한 움직임은 가톨릭 내부에서도 있었다.

5.4. 독재자, 금융 사기자 옹호[편집]


아이티를 철권통치하다가 쫓겨난 독재자 장 클로드 뒤발리에의 영부인을 포함해서 아이티독재자들과 함께 웃으며 사진을 찍은 일이나, 탐욕스러운 영부인을 향해 '빈민들과 누구보다도 가까운 분'이라는 찬사를 하는 등, 윤리적으로 매우 경악스러운 행보를 보였다.

그녀의 주요 후원자 중 한 명이었던 범죄자 찰스 키팅(Charles Keating)[28]이 법정에 서자, 그녀는 찰스 키팅이 빈자들에게 사랑을 보여줬다면서 예수처럼 키팅의 잘못을 용서하길 청하는 편지를 보내 탄원했다. 담당 검사는 이에 대해서 “키팅은 가난한 서민들의 돈 또한 가리지 않고 빼앗았으며, 수녀에게 보낸 기부금에는 그런 서민들의 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 돈이 제 주인에게 돌아가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제게 연락드린다면 키팅에게가 아니라 사기당한 이들에게 돈을 돌려드릴 수 있도록 주선을 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냉소적으로 답신했다. 이 편지에 대한 테레사 수녀의 답변은 오지 않았다.

6. 국적 논쟁[편집]


국적 논쟁이 상당히 심한 인물이다. 본인의 잘못이 아니고, 마더 테레사의 출생지인 스코페의 주권국이 그녀의 일생 동안 발칸 전쟁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거치며 많이 바뀐데다가 혈통은 스코페를 영토로 둔 적이 없었던 알바니아계라는 점, 그리고 활동지가 출생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인도라는 점에서 기인한다.[29]

태생을 따져보면 알바니아계로 오스만 제국 국적을 지닌 채 오늘날의 북마케도니아 영토에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같은 혈통인 알바니아와 주로 활동했던 지역인 인도를 포함하여, 이제는 멸망한 국가인 오스만 제국과 유고슬라비아, 그리고 생전에 스코페 지역을 잠시나마 다스린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국적 또한 가지고 있으며, 테레사 수녀의 생애 말년에 건국된 북마케도니아 또한 출생지인 스코페의 주인이라는 이유로 북마케도니아의 국적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마더 테레사가 가지고 있었던 국적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출생지에 따른 국적[33]
    •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제국[멸망] (1910년 ~ 1912년)
    • 파일:세르비아 왕국 국기.svg 세르비아 왕국[멸망] (1912년 ~ 1915년)[30]
    • 파일:불가리아 국기.svg 불가리아 왕국[멸망] (1915년 ~ 1918년)[31]
    • 파일:유고슬라비아 왕국 국기.svg 유고슬라비아 왕국[멸망] (1918년 ~ 1941년)
    •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멸망] (1941년 ~ 1944년)
    • 파일:바르다르 마케도니아 국기.svg 바르다르 마케도니아[멸망] (1944년)
    • 파일: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국기.svg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해체] (1944년 ~ 1992년)[32]
    • 파일:북마케도니아 국기.svg 북마케도니아 공화국 (1992년 ~ 1997년)
  • 활동지에 따른 국적
  • 혈통에 따른 국적
    • 파일:알바니아 국기.svg 알바니아[34] (1991년 ~ 1997년)

결국 이런 국적 논쟁 때문에 테레사 수녀의 임종 이후, 알바니아인도는 테레사 수녀의 시신을 어디에 안치할 것인지, 나아가서 그 국적은 어디에 있는지를 놓고 다투었다. 참고로 노벨상 수상 당시에는 인도 국적으로 수상했다. 현재는 혈통을 근간으로 한 알바니아, 활동지역을 근간으로한 인도, 그리고 출생지인 스코페의 현 주인인 북마케도니아 이 세 국가를 테레사 수녀의 주요 국적으로 보고 있으며, 이 세 나라 모두 테레사 수녀가 자기나라의 인물이라 주장하며 삼파전을 벌이고 있다.


7. 이모저모[편집]


  • 사망한 지 약 2개월 뒤에 인도 힌두교의 파괴신인 시바의 아내의 화신 중 하나로 힌두 신화에 편입되어 칼리신(시바)의 사원에 '테레사 어머니의 집'이라는 가난한 이들의 휴식처가 생겼다. 테레사 수녀 외에도 힌두교에서 종종 유명인들을 대상으로 이런 일을 벌이는 경우가 있는데, 도널드 트럼프 역시 그러했고, 인도 총리나렌드라 모디도 최근 일부 힌두교도들에게 신으로 추앙받으며 신전까지 세워졌다가 총리 자신이 크게 언짢아하며 자신을 숭배하지 말라고 지시해 신전도 사라지고 흐지부지된 사례도 있다.

  • 교황청은 그녀가 사후 전구(천국에서의 기도)를 통한 기적을 일으켰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여기서 말한 "기적"은 마더 테레사가 사망한 지 1년 후인 1998년 9월, 위에 거대한 종양이 있던 34세의 인도 여성 모니카 베스라(Monica Besra)가 테레사 수녀가 세운 "사랑의 선교회"에서 테레사 수녀의 환시를 본 후 완치되었다는 일화를 말한다. 모니카 베스라의 2007년 인터뷰 한편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중병이 '자연스레' 완치된 것이 아니라고 해서 반드시 '초자연적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이로 인해 인도에서 돌팔이들과 종교적 사기꾼들이 신뢰를 잃어버리는 날이 늦춰졌다(<신은 위대하지 않다.> 2007)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또한 그는 '모니카'라는 이름은 인도식[35]이 아니라 세례명이라는 점, 그녀의 남편[36]과 병원장들의 뚱한 반응 등이 심히 의심스럽다고 서술했다.

  • 2003년 일대기를 다룬 전기 영화가 제작된 적이 있다. 제목은 이름과 같은 <마더 데레사>.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유명한 올리비아 허시가 노년의 테레사 수녀 역을 연기했다. 그녀의 인생과 신앙에 대한 태도들을 비교적 잘 묘사한 평작이다.

  • 2014년에는 비슷한 주제의 전기 영화가 제작, 개봉하였다. 제목은 '마더 데레사의 편지'(원제는 'The Letters').감독은 윌리엄 리에드(William Riead), 테레사 수녀 역에는 줄리엣 스티븐슨(Juliet Stevenson)이 출연했다.

  • 남을 돕는 활동을 통하여 정신적, 신체적,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마더 테레사 효과라고 부르기도 한다.

  • 호주를 특별 방문했을 때 테레사 수녀를 존경하던 프란치스코회 소속의 한 수도자가 그녀를 찾아가 "뉴기니로 귀국하실 때 항공비를 대신 내 드릴테니 곁에서 가르침을 받게 해주십시오"라고 부탁하자 수녀는 뉴기니로 갈 만한 돈이 있냐고 물었는데, 수도자가 물론이라고 대답하자 ''그럼 그 돈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주세요. 그들에게서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가르침을 얻게 될 테니까요"'라고 하고는 떠났다고 한다.

  •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 국제공항의 이름은 '마더 테레사 공항(Aeroporti Nënë Tereza)'이다. 2001년 개칭된 이름. 시복일은 알바니아의 국경일이다.

  • 2016년 9월 4일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세계청년대회, 사랑의 선교회의 수호성인이다. 2017년 콜카타의 공동 수호성인이 되었다.

  • 연설 영상을 보면 영어를 잘 한다. 원어민 수준은 아니지만 알아듣게 또박또박 잘 한다. 영어가 공용어인 아일랜드수도원에서 공부했고, 이 후 모국의 정치적 문제 때문에 인도에 정착하면서 매일 영어를 썼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외에도 벵골어힌디어도 할 줄 알았다고 한다. 모국어인 알바니아어세르비아어는 당연히 유창하게 잘 했다. 애초에 가톨릭수도자, 성직자들은 기본적인 수도 생활이나 기타 사목활동을 위해, 신학교를 다니면서 기본으로 배우는 그리스어라틴어 이외에도 여러 외국어에 능통할 것을 필수적으로 요구받기때문에[37], 자연스럽게 다중언어 구사자가 될 수 밖에 없다.



[1] 테레사 수녀라고 부르자는 의견이 있으며 실제 위키백과에는 그리 등록되었다. 구분을 하자면 Mother는 수녀원장이다. 수녀는 Sister로 나뉜다. Mother Teresa를 테레사 수녀원장이라고 번역하거나 그냥 마더 테레사라고 불러야 구분이 확실히 된다. Sister Teresa, 그러니까 테레사 수녀라고 부르는 것도 말이 안되는 건 아니지만, 이미 천주교에는 그녀보다 앞서 활동한 테레사라는 이름의 수녀이자 성녀들(예: 아빌라의 테레사, 소화 데레사)이 존재하므로 이들과 구별이 필요하다. 거기다 마더는 영어로 어머니를 뜻한다. 어머니라는 표현에서 비롯되는 느낌을 보면 알듯이 매우 존엄한 호칭이다. 아쉽게도 마더라는 호칭은 테레사를 존경하는 사람이 붙이지 않았다. 마더 테레사가 설립한 사랑의 선교회 규칙에서 유래했다. 선교회 수장을 마더라고 부르기로 지정했기 때문이다. 사랑의 선교회를 설립할 무렵에 당사자가 직접 제정한 규칙이다. 어찌 보면 스스로가 붙인 칭호다. 2019년 시점에서는 모두 존경하자는 의미를 담아 마더라고 부른다. 비슷한 사례를 꼽자면 성 안토니오 아빠스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아빠스는 아버지(父)를 뜻하는 남성 수도원장을 일컫는다.[2] 태어나고 바로 다음 날 세례를 받았다.[3] 주요 활동지역을 기반으로 한 국적. 고향 동네의 특성상 테레사 수녀의 국적 논란이 심하다. 자세한 사항은 국적 논쟁 문단 참조.[4] 혈통에 따라 부여된 국적.[5] 혼전성은 '베르나이(Bernai)'.[6] 초대 수상자.[7] 정결, 순명과 함께, 가톨릭수도자가 서약하는 덕목. 이 3가지를 '복음삼덕'이라 한다. 다만 정결과 순명은 성직자수도자뿐 아니라 모든 가톨릭 신자가 지켜야 하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는 부부관계를 벗어난 성적 음행을 해서는 안 되고,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순명해야 한다.[8] 그리고 이 직후 세계평화의 적은 바로 낙태라고 선언하는데, 사실 연설 전문은 낙태는 살인으로써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는 낙태에 대해 비판적인 요지였다. 그리고 낙태에 대해 적어도 그리스도교 관점에선 아주 큰 죄악으로 바라본다는 점을 감안하면, 테레사 수녀의 이런 연설은 지극히 당연했다.[9] 발췌자 주석: 코린토 1서 2장 4-5절 암시.[10] 우아한 신학적 담화나 호교론, 대중음악으로 개작한 시편보다 알바니아 출신의 한 가난한 수녀의 환한 얼굴이 오히려 영국의 시청자들을 열광시켰다는 증언이다.[11] BBC에서 마더 테레사에 대한 방송 프로그램을 준비했었다.[12] 당시의 영국이 이미 오래 전에 성공회, 장로회개신교가 주류 종교가 된 후였는데 어떻게 영국의 영향으로 가톨릭을 믿었냐는 식의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영국은 성공회가 생겨난 후에도 가톨릭이 주류인 프랑스와의 교류가 계속 이어졌고 프랑스처럼 가톨릭이 주류인 아일랜드를 지배하기까지 했으며, 그에 따라 예나 지금이나 가톨릭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서 현재까지도 가톨릭이 주요 소수종교이다. 비비안 리, 숀 코너리 등 영국 연예계 역사의 가톨릭 신자들의 존재를 봐도 알 수 있으며 전직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 전 보수당 원내대표인 제이콥 리스모그도 가톨릭 신자이다.[13] 테레사 수녀의 고향인 스코페는 당시나 지금이나 정교회 우세 지역이라 가톨릭은 소수 종교에 속했으며 2002년 통계상으로 스코페의 종교 비율은 정교회 68.5%, 이슬람교 28.6%, 가톨릭 0.5%이다. 2차 대전 이전에는 유대인도 도시 인구의 3%를 차지했으나, 유대인은 나치 점령기에 홀로코스트에 의해 희생되거나 흩어져 거의 사라졌다.[14] 가톨릭에서 정식 수도자가 되기까지는 (수도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 지원기(1년) - 청원기(1년) - 수련기(2년) - 유기서원기(4~5년)의 단계를 거쳐 종신서원을 한다. 수련을 받고 사도직을 수행하며,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고 청빈, 정결, 순명의 3가지 덕목을 지키겠다는 유기서원을 한다. 이를 지속적으로 갱신하며 일정 기간을 보내고서야, 죽을 때까지 수도자로 살겠다는 약속인 종신서원을 하고 정식 수녀가 될 수 있다. 기한은 수도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한 10년 정도다.[15] 흔히 '소화' 테레사라고 불린다.[16]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여인이 입는 복장이다.[17] 일종의 호스피스 개념 현재도 콜카타에서 테레사 수녀의 뒤를 이어 운영되고 있다.[18] 가톨릭에서 사제수도자는 인간으로서 죽고 하느님의 종으로서 임한다는 개념이기 때문에, 가족이라도 사제/수도자가 되고나면 부모자식으로 대하는 일이 드물다. 가령 도미니코라는 세례명을 가진 아들이 신부가 되었을 경우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도미니코 신부+존칭을 쓰는 것이었으며 사제가 부모님을 부르는 것은 금지되지 않는다.[19] 당시 알바니아는 공산국가 중에서도 종교 탄압이 가장 극심한 국가였기 때문에 천주교를 포함한 종교에 대한 탄압이 강했다. 나중엔 입국은 허가하되 출국은 불허한다는 방침이 되어서 결국 포기했다. 소련이나 다른 동유럽 국가, 중국, 쿠바나 베트남, 심지어 북한조차도 헌법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명시함에도 알바니아는 그런 것 없이 무신론 아니면 다 때려잡고 종교인의 입출국조차 이런 식으로 규제했다.[20] Beata Teresia a(혹은 de) Calcutta라고 쓸 수도 있다. 영어로는 Blessed Teresa of Calcutta라고 쓴다.[21] 성인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쪽과 인정해선 안 된다는 쪽. 인정해선 안 된다는 쪽의 별칭은 '악마의 변호사'이다. 그리고 당시 악마의 변호사 일을 맡았던 사람은 이전에도 마더 테레사를 비판했던 크리스토퍼 히친스였다. [22] 주삿바늘은 1회 사용 후 폐기가 원칙으로, 세계대전기 이후 정립되었다. 자세한 이유는 주사기 항목 참조.[23] 생명을 죽이면 안 된다는 것은 보편 윤리이므로, '생명의 범위'에 대한 문제가 임신중절 문제의 핵심적인 논란 중 하나다. 가령 수정란이 생명이 아니라면 착상을 방해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인데, 이런 관점을 종교에 종사하는 마더 테레사에게 적용하려 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테레사 수녀는 가톨릭 신자이기에, 수정체도 인간생명이라는 가톨릭의 원칙을 철저히 따를 수밖에 없다.[24] 한마디로 산모가 죽거나 태아가 죽거나 둘 중 하나인 상황에서나 봐준다는 뜻이다. 하나를 죽일 수 없다는 이유로 둘 다 죽으라고 내버려두는 건 더 큰 죄라는 명분이 있다.[25] 여자든 남자든 강간 피해자들이 가해자로 인해 생긴 아이를 과연 책임져야 하는가는 논쟁거리다. 그러나 마더 테레사와 같이 '아이는 죄가 없다'는 인도적인 결론이라면 제3자가 책임질 수 있다. 기타 자세한 사항은 강간, 낙태, 원하지 않는 임신 등 관련문서 참조.[26] 중근세에 악명높던 이단심문소의 실질적 후신이다. 가톨릭에서 낙태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알수있는 부분.[27] 이러한 역사들은 중근세의 일들과 달리 현재도 크게 다루어지거나 반성이 이루어진 역사들은 아니다.[28] 미국의 금융인. 1989년 링컨 저축·대부은행 파산 사건을 일으킨 경제사범으로, 2014년에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29] 활동지로 인한 국적 문제는 마더 테레사 말고도 해외 선교 성직자라면 흔히 겪는 문제다.[멸망] A B C D E F [30] 발칸 전쟁 도중 스코페가 세르비아 왕국에 병합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1922년 멸망.[31] 제1차 세계대전 도중 스코페는 불가리아 왕국에 점령되었고, 이는 1918년 프랑스군이 오기 전까지 지속되었다.[해체] [32] 유고슬라비아는 테레사 수녀의 국적을 박탈하지 않았다.[33] 테레사 수녀의 일생 동안 스코페를 통치했던 국가들을 표기했다.[34] 가톨릭 성직자라는 이유로 공산정권 내내 시민권이 박탈된 상태였다가 1991년 공산정권이 붕괴하자 국적이 회복되었다.[35] 인도내에서도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고아지방은 포르투갈식 이름이 널리 사용된다.[36] 참고로 남편은 처음에는 기적 여부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나 이후 기적이라는 점을 납득했다고 한다.[37] 일례로, 현 가톨릭 교황프란치스코만 해도 모국어인 스페인어와 성직자가 되기 위해 필수적으로 익혀야하는 그리스어, 라틴어 말고도 영어이탈리아어가 모두 유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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