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슐리외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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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 리슐리외 추기경이 입고 있는 복장은 캅파 마냐[1]이고 들고 있는 빨간 모자는 비레타라는 모자이다.
본명
아르망 장 뒤플레시[2]
(Armand Jean du Plessis)
호칭
리슐리외와 프롱사크의 추기경 공작
(Cardinal-duc de Richelieu et de Fronsac)
출생
1585년 9월 9일, 프랑스 왕국 파리
사망
1642년 12월 4일 (향년 57세), 프랑스 왕국 파리

1. 개요
2. 출신 배경 및 가족
3. 생애
3.1. 프랑스의 실권자가 되다
3.2. 내치: 절대왕정을 확립하다
3.3. 외치: 현실주의 대외정책의 선구자
3.4. 군주(루이 13세)와의 관계
4. 일화
5. 창작물에서의 이미지
6. 모티브
6.1.1. 함대 컬렉션의 캐릭터
6.1.2. 벽람항로의 캐릭터
6.1.3. 전함소녀의 캐릭터
6.2. 창세기전 3의 등장인물
6.3. 라스트오리진의 캐릭터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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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나의 첫째 목적은 왕의 절대적 권위를 확립하는 것이고, 둘째 목적은 왕국을 위대하게 하는 것이다.


일부 위그노들이 프랑스가톨릭교도들보다 영국신교도들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스페인의 가톨릭교도들보다는 위그노들을 더 좋아한다.[3]


국가의 행동은 개인의 이성이 아니라 국가이성(Reason of State)에 따라 이루어진다.[4]


추기경이자 프랑스공작으로 재상을 역임했으며 실질적으로 프랑스의 절대왕정을 완성하고,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이어지는 서유럽에서의 프랑스 패권 시대를 확립한 명재상이다. 본명은 '아르망 장 뒤플레시'이다.

리슐리외(Richelieu)는 그가 다스리던 영지의 이름으로 지금의 프랑스 중부 앵드레루아르에 있는 농촌이다. 옛날에는 대도시었지만 보불전쟁부터 20세기 기후변화로 인한 휴유증으로 인구가 1,700명에 불과한 작은 농촌 시골로 전락했다. 리슐리외 도시 설명

리슐리외 다음에 있는 프롱사크(Fronsac)는 지금의 프랑스 남서부 누벨아키텐 지롱드 주(州)에 있는 인구 1,100명짜리 작은 농촌 시골이지만, 프롱사크 AOC(Fronsac AOC) 레드 와인을 생산하는 곳이기도 하다.

추기경이면서 공작이었기 때문에, 추기경의 빨간 수단[5]에 따와서 붉은 공작, 혹은 비색(緋色)의 공작이라고 불렸다. 이 시대를 다룬 창작물에서 루주 공작 등으로 나오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이다. 루주(rouge)는 프랑스어로 붉은 색을 뜻하며, 크메르 루주 할 때 그 루주다 여기서는 추기경이 입는 빨간 수단을 가리킨다. 추기경의 빨간 수단은 순교자의 피를 상징한다.

그리고 유럽판 조조로서도 이름이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자는) 오래 살면 간웅이 될 것이다."이라는 바오로 5세이 언급이 있기 때문이다.


2. 출신 배경 및 가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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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베르니니가 조각한 흉상
후에 휘두른 막강한 권력을 보면 쉽게 연상되지 않겠지만, 원래 시골의 하급 귀족[6] 가문 태생이었다. 다만 그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면 조상 중에 카페 왕조루이 6세가 있으므로, 카페 왕조의 먼 후손에 해당하는 부르봉 왕가와는 매우 멀기는 하지만 친척뻘이 된다.

그러나 리슐리외가 태어날 무렵의 플레시 가문은 하급 귀족가문이었으며, 아버지 또한 앙리 3세 밑에서 일하다 일찍 죽어 가족은 가난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리슐리외가 성직자가 된 것도 입을 덜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다만 어머니 쉬잔은 현명한 여인으로 살림을 잘 꾸려나갔으며, 가족간의 유대도 괜찮았던 듯하다.

가족으로는 언급한 대로 일찍 전사한 아버지 프랑수아, 저명한 법학자의 딸인 어머니 쉬잔이 있으며 그 사이에 5명의 남매가 있었고 리슐리외는 3남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군재를 보이고 가장 관심있어 했던 것도 군사 훈련이었지만, 뤼송 교구를 물려받기 위해[7] 천직인 군인이 아닌 성직자로써의 커리어를 쌓기로 결심한다. 1605년에 20살의 나이로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소르본 대학에 입학하고, 1607년에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그의 성품성사를 맡은 바오로 5세"(이 자는) 오래 살면 간웅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가톨릭 성직자인 만큼 당연히 결혼은 하지 않았다. 여러 명의 사생아와 애인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기도 하지만, 확인된 것은 없고 대부분 야사나 가십이다. 후에 리슐리외가 재상이 되었을 때 측근으로 활약한 인물 중에 리슐리외가 젊은 시절 하숙했던 주인집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외모가 리슐리외와 매우 닮아 "여주인과 사이에서 난 사생아가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당대에도 돌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외조카인 에기용 공작부인과도 관계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사이에 자식도 있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후에 리슐리외가 사망할 때 자신의 유언 집행인으로 에기용 공작부인을 지명했다.

다만 이것은 리슐리외의 정적들이 지어낸 소문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 에기용 공작부인은 《삼총사》의 앞부분에서도 등장하는 바로 그 여인이며 리슐리외의 누이의 딸로, 리슐리외의 정치적 세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략결혼으로 연인과 헤어지는 등 불행을 겪었다. 견디다 못한 그녀가 수녀가 되려고 했을 때, 리슐리외가 교황에게 직접 탄원해서 서원[8]을 금지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외숙부인 리슐리외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후에 리슐리외의 집에 살면서 안살림을 살피고 궁정 시녀로 리슐리외에게 정보를 알려주기도 했다.

가족애는 상당히 돈독했던 듯하며 자신의 조카, 조카딸들에게 좋은 혼처를 구해주고 재산과 작위를 만들어주었다. 자신처럼 성직자가 된 둘째 형도 동생의 덕을 상당히 보았다. 가문의 격을 올리는데 매우 열심이기도 했는데, 자신이 죽을 때 낮은 신분의 가문과 혼인하지 말 것을 유언하고, 그런 혼인정책을 밀고 나갈 수 있는 막대한 부를 남겨주었다.[9] 그 외에도 루이 13세에게 자신의 일족을 돌봐줄 것을 죽어가는 와중에 부탁하기도 했다.

더불어 당시 유럽인으로선 드물게 고양이를 좋아하고 무척 아꼈다고 한다. 죽을 당시 14마리나 되는 고양이들을 키웠으며, 유언 중 하나로 고양이들을 죽을 때까지 돌보는 조건으로 하녀 1명에게 연금과 고양이와 같이 살 집도 하나 남겼다. 종교재판이나 마녀사냥은 그다지 금지하지 않았지만, 고양이를 죽이거나 학대하는 짓은 금기시했다고 한다.


3. 생애[편집]



3.1. 프랑스의 실권자가 되다[편집]


본래 뤼송 교구[10]주교였으나, 앙리 4세왕비이자 당시 섭정이었던 마리 드 메디시스의 눈에 들어 왕실 고문관으로 발탁되었다. 리슐리외가 발탁된 계기는, 루이 13세안 도트리슈의 결혼 문제를 논하는 삼부회에서 리슐리외가 대단한 웅변을 펼친 것이 마리의 눈에 들었기 때문이다.[11]

그러나 모친 마리와 사이가 매우 나빴던 루이 13세가 친정을 개시하면서 쫓겨나게 되었고, 모자(母子)의 권력다툼 속에 다시 마리의 부름을 받고 돌아왔다. 초기에는 마리도 리슐리외를 대단히 신임하였기에, 루이 13세도 모후와 화해하는 의미에서 리슐리외를 중용했고, 교황청을 통해서 추기경으로 서임되도록 해 주었다.

그런데 1624년 루이 13세가 리슐리외의 복귀를 승인한 뒤에는 오히려 루이 13세의 최측근이 되어 마리와 대립하게 되었고, 리슐리외를 제거하려는 모후 일파의 음모가 리슐리외한테 사전에 발각되어 그들이 모두 처단되면서 루이 13세가 더욱 신뢰하여 마침내 재상에 임명되었다.[12] 이때 음모가 실패한 마리 드 메디시스는 국외로 탈출했고, 이후로도 자신의 차남이자 루이 13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가스통을 추대하며 내전을 일으켜 복귀를 노렸다. 그러나 이미 프랑스 국내에 더 이상의 세력기반이 없었고 어머니를 미워하는 아들 루이 13세가 귀국을 철저하게 막았기에 실패하고 만다. 결국 마리는 귀국하지 못하고 여러 곳을 떠돌아다녔고, 평생동안 리슐리외를 증오하면서 보냈다. 딸인 헨리에타가 찰스 1세의 왕비였기에 영국으로 가서 잠깐 살기도 했고 독일이나 여러 나라를 떠돌다가 자신이 후원하던 루벤스 집에서 살기도 했지만 루벤스가 죽고 난 뒤 독일 쾰른에서 지내다가 루이 13세와 리슐리외가 죽기 몇 달전인 1642년 6월 3일, 69세로 사망했다.


3.2. 내치: 절대왕정을 확립하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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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세 때 꽃을 피운 절대왕정을 사실상 확립한 인물로서, 국왕권 강화를 위해 재가를 얻지 못한 귀족 영주 소유의 모든 요새나 시설을 파괴했고, 사사로이 벌어지는 결투도 금지시켰으며, 여기에 반발한 개신교 신자들이 영국의 지원을 얻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쳐부수고 화평을 맺어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여 사면해주는 대신 정치 참여를 금지시켜 프랑스의 안정을 가져왔다. 위에 나왔듯이 결투를 법적으로 금지해서 많은 불평을 들었다.[13]

사실 <결투 금지법>은 가톨릭 교회에서 결투를 파문에 처할 대죄로 명시한 것도 있고, 사적제재를 금하고 제도권에 의한 재판을 활성화하여 왕의 사법권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특권을 빼앗긴다고 느낀 귀족 세력이 리슐리외에게 반발한 것이다. 소설 속에 나오는 트레빌 총사대장도 실존인물이며 리슐리외의 반대파인 것도 같은데, 트레빌이 리슐리외를 적대한 것은 왕에 대한 충성심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리슐리외의 왕권 강화로 귀족인 자신들의 입지가 약화된다고 느껴서 왕권 강화론자인 추기경을 적대한 것이다.[14] 이러한 왕권 강화 노력은 당시 권력을 누리던 귀족 세력의 큰 반발과 불만을 불러왔고 그 때문에 리슐리외는 온갖 중상모략과 비방에 시달렸다. 소설 《삼총사》에서 악역스럽게 나오는 것도 이때 만들어진 이미지가 후세까지 이어져서라는 설도 존재한다.[15] 그러나 실상은 상술한 대로 프랑스의 발전과 왕권 강화에 헌신을 다한 유능한 명재상이었다.

그 외에도 관료제도를 확립하고, 상업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우정(郵政) 제도에도 공적을 남겼다. 게다가 가톨릭에서 최고위급 성직자이면서도 합리적으로 대처해서 종교만을 따지지 않고 국가적 이득을 더 먼저 생각했다. 그래서 이득을 위해서라면 다른 종파와 기꺼이 손잡았고, 만일을 위하여 당시 유럽에서 이교도로 배척받던 오스만 제국과 우호관계를 맺어서 이슬람 국가들과도 손잡을 준비를 했다. 이러다보니 프랑스 내 가톨릭 골수강경파들에게 배신자 및 이단자 소리도 들었으나, 이런 소리는 그냥 무시했다. 이와 관련한 일화도 있는데, 개신교 신자들의 반란을 진압했을 때 측근들이 "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자, "개종은 칼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보고 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며 거절하고, 항복한 개신교 신자들을 용서해주는 관용을 베풀었다.

프랑스어의 순수성을 보존하고 문화 발전을 위해서 아카데미 프랑세즈(=프랑스 아카데미)를 창설하기도 했다. 이 기관은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으며,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지명되는 것은 문화예술인에게 매우 큰 영광으로 인식되고 있다. 동양에서는 흔히 한림원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한편 반대파가 많고 귀족들의 증오를 많이 받아서 늘 암살과 실각의 위험 속에서 살았다. 그 때문인지 리슐리외는 정보를 얻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프랑스의 각계 각층에 심복과 첩자를 심어두어 반대파의 음모를 찾아내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 덕에 그에 대한 암살을 준비하던 귀족들을 찾아내서 남김없이 소탕하여 암살이나 실각을 피할 수 있었던 적도 여럿 있었기에 귀족들도 나중에가면 리슐리외를 증오하지만 자신들이 그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를 무서워했다. 물론 반대파들은 이걸 비난하면서 경찰국가를 만들었다고 하기도 한다. 이 암살 시도는 정말 많아서 죽기 직전까지 이어졌고, 심지어 생애 마지막으로 겪은 암살음모는 루이 13세가 가담했다는 설까지 존재한다.

이 때문에 리슐리외는 왕과 대면할 때도 경호원들을 대동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를 싫어하던 주요 정적은 루이 13세의 모후인 마리 드 메디시스와 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가스통, 왕비안 도트리슈 등이었다. 이들은 평생동안 끈질기게 이적행위와 내란 및 암살 음모를 꾸미면서 리슐리외를 괴롭혔다.


3.3. 외치: 현실주의 대외정책의 선구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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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슐리외가 개신교(=위그노)의 도시인 라로셸을 점령할 당시의 모습.[16] 라로셸 점령전에 직접 참전한 리슐리외는 해안 둑을 쌓아 잉글랜드의 지원을 차단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이게 신의 한 수라고 볼 수 있는 것이, 먼 훗날 18세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스페인은 잉글랜드의 지원을 대가로 지중해의 핵심 요충지인 지브롤터를 내주게 된다. 반면 리슐리외는 국내 갈등에 외국의 개입을 차단함으로써 프랑스가 이 꼴이 나는 것을 막은 셈이 된 것이다.

군대에 신경을 많이 쓰다보니, 군대에 대한 보급과 규율을 잡는것에 대해서도 각별히 관심을 가졌다. "역사를 통해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군대가 적이 아니라 물자 부족이나 무질서에 의해 파멸했다. 그리고 나는 이 시대의 모든 진취적인 모험들이 그러한 이치를 얼마나 망각했는지를 증언하고자 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

리슐리외가 높게 평가되는 점은 바로 대외 정책으로, 당대 프랑스유럽 최강국의 위치에 올려놓고 대륙의 판도를 뒤바꿨다고 볼 수 있다. 덕분에 각국 궁정에서 강철발톱을 가진 이리라는 소리도 들었다. 그 자신이 가톨릭 고위 사제였음에도 30년 전쟁 당시 종교보다 세력 논리를 앞세워 개신교 진영을 지원, 참전한 것은 국가이성(Raison d'État)의 대표적 사례로 인용되었고, 근대 이후 국제 정치에서 널리 통용되는 국익 개념의 기원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그는 독일이 통일된 정치체제를 이룬다면 엄청난 이 될 것임을 미리 직감하고[17] 합스부르크 세력을 견제하는데 힘썼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스페인신성 로마 제국을 지배하게 되자, 프랑스가 동서로 포위되는 것을 우려해서 합스부르크의 유럽 패권을 무너트리는데 평생을 바쳤으며, 30년 전쟁에서는 가톨릭 추기경 주제에 개신교 국가들과 손을 잡고 물밑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종국에는 직접 참전하여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과 사투를 벌였다. 결국 생전에는 그 성공을 보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합스부르크 왕가를 약화시키는데 성공했다. 여러모로 훗날의 비스마르크와 겹치는 부분이 많은 인물.

리슐리외의 대(對) 독일 인식은 이후 프랑스알자스 전부와 로렌 일부를 집어삼키는 등 프랑스/외교정책에서 항상 중요한 기준점이 되었다. 그 덕에 독일 분열에 기여해서 나치 독일이나 아돌프 히틀러가 매우 증오하던 인물이라, 1940년 프랑스를 점령할 당시 리슐리외의 무덤을 폭파시키려고 했다가 프랑스의 여론 반발이 커질 것이라고 측근들이 만류하여 그만둔 적도 있었다.

1642년 스페인전쟁 도중에 병으로 사망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스페인을 매우 경계했기 때문인지, 죽어가는 데도 들것에 실려가면서 전쟁을 지휘했다. 사망하기 전, 리슐리외는 자신이 신임했던 쥘 마자랭을 자신의 후임자로 루이 13세에게 추천했으며, 많은 유산을 루이 13세에게 남겼다. 리슐리외가 살던 대저택이 오늘날에도 남아있는 팔레 루아얄로, 이때 부르봉 왕가의 재산이 되어 여기서 루이 14세가 성장했다.


3.4. 군주(루이 13세)와의 관계[편집]


오늘날 리슐리외에 대한 평가는 절대 왕권의 기초를 확립하고 근대 국가로서의 프랑스를 세운 인물이며 화폐 개혁 이전에는 프랑 화폐에 등장하기도 했었다. 어쨌든 그 업적과 존재감이 너무 강렬한 나머지, 주군인 루이 13세가 평가절하당하는 일도 많다. 심지어는 루이 13세와 루이 14세 시대의 비교 연구서 제목이 《리슐리외 추기경과 루이 14세 시대》일 지경이다. 근세판 비스마르크 재상과 빌헬름 2세 정도? 그래도 루이 14세는 나라가 망하게 하진 않았다.

루이 13세와는 신하와 주군의 관계지만 여러모로 미묘한 데가 있다. 루이 13세는 리슐리외를 크게 신임하여 중임을 맡겼지만 한편으로는 리슐리외의 권력과 정책에 불만도 가지고 있어서, 면전에서 비꼬거나 주변 신하들에게 험담을 늘어놓기도 했다. 실제로 리슐리외를 내쫓으려는 생각도 몇 번인가 한 듯하다. 일설에는 리슐리외 암살 음모를 묵인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나중에가면 루이 13세도 죽을 때까지 리슐리외를 지지했고, 그와 절친한 친구가 되어 사적인 일까지 털어놓을 정도가 되었는데 생전에도 여러가지 시시콜콜한 문제도 상담하기도 했다. 정말로 사사로운 것 가지고 리슐리외의 애를 많이 먹였는데, 심지어는 애인과 싸우고 징징거리는 단골대상이 리슐리외였다. 그래서 루이 13세가 애인과 불화가 생기면 그 중재도 리슐리외가 다 도맡아 해야 했다. 루이 13세와 남자 총신 사이의 중재도 많이 했는데, 그 빈도가 하도 잦아서 나중에는 리슐리외가 아예 각서를 작성해서 둘이 서명하게 하기까지 했다. 나랏일도 힘든데 왕의 사생활 뒤치다꺼리까지 해야 했던 셈.

리슐리외 본인도 루이 13세에게 절대적으로 충성을 다했고 사망할 때도 자신의 재산 일부를 왕 앞으로 남겼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왕을 완전히 믿지는 않아서 항상 루이 13세가 자신을 암살하지 않을까 의심했다. 왕이 자신을 부를 때면 혹시 암살하려는 게 아닐까 의심해서, 미리 염탐해 상황을 확인한 후에야 호출에 응한 일도 몇 번 있을 정도다. 이쯤 되면 둘 다 능구렁이급이다. 진짜로 애증이 있었던 듯하다. 한편, 둘 다 성격이 음침하고 잔병치레를 많이 해서 서로 통하는 데도 있었던 모양이다. 루이 13세는 리슐리외의 임종까지 지켜보았는데,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는 두 사람 다 몸이 너무 아파서 침대에 누워서 이야기를 해야 할 정도였다.[18]그래도 굳이 침대에 누워서라도 임종을 지켜본 거 보면 애증이긴 했는듯

루이 13세왕비 안 도트리슈와는 사이가 매우 나빠서 적대관계였다. 사실 초기에는 안 도트리슈와 루이 13세의 결혼을 리슐리외가 찬성했으며, 프랑스로 온 안의 고해신부였던 것도 있어서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안이 점점 에스파냐의 첩자 노릇을 하고, 리슐리외도 프랑스의 적인 합스부르크를 무너뜨리려 하면서부터 적대관계가 되었다. 리슐리외는 안의 첩자 노릇을 알고는 안을 철저하게 감시했으며, 실제로 그녀에게 수모도 여러차례 주었다. 사실 안이 했던 여러 행위가 중대한 반역행위였기 때문에, 이렇게 경계하는 것도 당연하다. 다만 이와 별개로 안을 보호해준 것도 리슐리외였다. 특히 루이 13세도 애초부터 안 도트리슈와 정략 결혼한데다가 그녀가 첩자 노릇을 한다는것을 리슐리외를 통해 알게되어 싫어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리슐리외의 중재와 보호가 없었다면, 안 도트리슈는 진즉에 왕비에서 폐위되거나 추방당하거나 감금당했을 것이란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다만 루이 14세를 낳은 뒤에는 안도 프랑스에 대한 적대행위를 그만두었고, 자신과 아들의 안전을 위해 리슐리외에게 고개를 숙이면서부터는 관계가 약간 호전되었다. 후에 안 도트리슈 왕비가 아들의 섭정이 되었을 때 실권을 휘두른 것이, 리슐리외가 안에게 소개해 준 쥘 마자랭이었다. 이쪽도 나름 애증이라 볼 수 있을듯


4. 일화[편집]


일반적인 칼과 구별되는 형태의 끝이 뭉툭하고 날이 두꺼운 식사용 나이프를 고안한 것도 바로 리슐리외인데, 어느날 손님이 예리한 나이프의 끝으로 이를 쑤시는 꼴을 보았기 때문이라 한다. 원래는 리슐리외의 집에서만 사용되었던 이러한 끝이 둥근 나이프가 퍼진 원인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대개 두 가지 설로 좁혀지는데, 첫 번째는 리슐리외 이외에도 나이프로 더러운 짓을 하는 꼴을 견디기 힘들었던 귀족들이 생각보다 많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술에 취한 귀족들이 나이프로 난투극을 벌였을 때 사망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안전상의 이유라는 것이다. 귀족하고 사이가 나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유럽의 식사자리 안전은 지역과 시대별로 차이는 있지만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다. 유럽에는 "7명 이상이 있는 자리에서 식사하는 도중에 발생한 살인에 대해서는 무죄"라는 법률도 존재했는데, 서유럽은 지하수의 수질이 나빠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식사 때 물 대신 술을 마시는게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식사시간만 되면 사람들이 술에 취하기 일쑤였으며, 그 와중에 시비가 붙어 난투를 벌이는 일이 매우 많은 상황에서 증거와 증언을 찾아 정확한 처벌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다수가 식사할 경우, 아예 날붙이 자체를 식사자리에 들여놓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리슐리외가 개발한 이러한 나이프는 생각외로 널리 퍼졌고, 마침내 1669년 루이 14세가 전 프랑스의 식사용 나이프를 그렇게 만들라는 명을 내림으로써 전 유럽으로 퍼지게 되었다.

야사에는 《삼총사》에서 대립하던 루이 13세왕비 안 도트리슈불륜을 저질렀고, 사실은 루이 14세의 친부라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프랑스로 시집온 안 도트리슈의 고해 사제이기도 했다. 혹은 그의 후계자 쥘 마자랭 추기경루이 14세의 친부라는 말도 있다. 실제로 쥘 마자랭은 안 왕비와 거의 비슷한 나이로 친분 관계가 깊었다고 한다. 리슐리외가 루이 13세의 재상으로 일했듯, 안 왕비의 섭정기에는 마자랭이 프랑스의 재상으로 거의 전권을 쥐었다. 이렇듯 루이 14세의 친부 논란이 끊임없이 오갔지만 루이 14세를 가진 기간, 즉 안 도트리슈의 임신기간으로 추정되는 날은 리슐리외와 쥘 마자랭 모두 다른 곳으로 출장을 가 있었고, 이 기간동안 안 도트리슈와 루이 13세가 3번 동침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향수를 즐겼는데 그중에서도 머스크향을 광적으로 즐겼다. 속옷까지 마구 뿌려대 그 냄새가 극장 문 밖에서도 났다고 할 정도였으며 향수 속에서 살아가는 프랑스인들조차 진절머리를 쳤다고. 이에 리슐리외는 "리슐리외가 들어서면 코를 막고 가슴을 조여라."라는 에티켓을 전파했다고 한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자신의 영지이자 낙후된 시골인 리슐리외 지역에 애착을 가져, 이곳을 발전시키려고 여러모로 많이 노력하고 건물도 많이 세웠다고 한다. 당시 귀족들은 추기경이자 재상에게 잘 보이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리슐리외 영지에 건물을 세우거나 매입했다고 하나, 추기경 사후에 결국 흐지부지된 걸 보면 영지의 지리적 조건이 영 안 좋았던 듯. 실제로 1793년에 3,205명이었던 리슐리외 지역의 인구가 2016년에 1,755명으로 감소했다.[19]

본인은 성직자로 아내나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후에 자신의 작위와 재산을 종손자[20]에게 물려주었다. 루이 프랑수아 아르망의 손자인 5대 공작 아르망 에마뉘엘은 루이 18세 왕정복고 때 두 번 재상을 지냈다. 리슐리외 공작위는 8대 공작이 사망한 1952년에 단절됐다.


5. 창작물에서의 이미지[편집]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에서는 초반에는 그리 좋지 않은 이미지로 묘사되며, 그 영향으로 이후 《삼총사》를 각색한 창작물에서는 거의 악역처럼 등장한다. 리슐리외 본인의 이름이 아닌 직책에서 따와 "카르디날"[21]이라 지칭하는 판본도 있으며, 특히 아동용 판본에서 이런 경향이 강한 편.[22]

하지만 뒤마의 《삼총사》가 실제 리슐리외를 크게 왜곡한 것은 직접 등장하지 않았을 때 이야기일 뿐, 후반부에는 카리스마와 비범함을 보여주는 인물로 나타난다. 영국과의 전쟁 중에도 밤에 부하 1명만 데리고 다니다[23] 삼총사를 만나자 "오, 자네들인가? 이런 밤중에 마침 잘 됐네. 경호할 사람이 필요했거든. 밤길 좀 부탁하지. 아, 물론 평소에 자네들이 날 싫어하는 건 잘 알고 있네만, 지금은 전쟁 중이고 나는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이니 폐하와 국가를 위해 같이 힘을 모아 싸우는 게 낫지 않겠나?"라며 태연하게 호위를 명령하며, 모략으로 전쟁에서 영국군을 몰아내는 데 큰 비중을 차지하는 등, 달타냥을 비롯한 주인공들과의 사적인 관계에서는 대립하지만 국가 전반으로 볼 때 사심없는 비범한 인물로 묘사된다.[24] 이 때문에 삼총사들도 그가 나라를 위해 일하는 인물임을 인정하고 그에게 존경심을 느끼기까지 했다고 나온다.[25] 안 왕비의 목걸이 때문에 망신을 당하기는 하지만.[26]

소설에서 안 왕비를 곤란에 밀어넣으려 하는 것도, 결국은 스페인이나 합스부르크 왕가를 견제하기 위한 일이다. 원래 안 왕비는 소설에서나 실제 역사에서도 프랑스의 적국 스페인공주로, 프랑스왕비이면서도 친정인 스페인과 밀통하여 프랑스의 내정에 간섭하거나 프랑스를 협공하라고 부추긴 인물이다.[27] 프랑스 궁정 내 첩자 행위를 하다가 발각된 적도 있다. 작중에서 적국 영국의 재상 버킹엄 공작불륜을 저지른 것 또한 큰 죄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이런 왕비를 공격적으로 대하는 리슐리외의 태도가 정상인데도, 뒤마의 소설에서는 낭만적인 연애인 척 포장하여 많은 이들을 호도한다. 이것은 이 당시 유럽에 만연했던 진실한 사랑은 불륜뿐이다라는 유행에서 비롯된 스타일로 생각된다. 이 당시 결혼은 귀족이든 서민이든 집안간의 결합과 후사를 잇기 위해 남녀모두 정략결혼이라는 미명하에 남녀의 감정과는 별개로 얼굴한번 본적 없는 이에게 팔려가는 처지나 다름없었기에 이러한 관점이 만들어진 것. 작중에서 묘사되는 왕비에 대한 추기경의 태도에 대한 묘사가 좀 골때리는데, 증오로 변한 짝사랑이었다는 것이다. 왕비를 사모했지만, 왕비가 버킹엄 공작과 눈이 맞자 사랑이 빡으로 변한 것. 물론 실제 역사에서는, 오히려 루이 13세가 안 왕비를 내쫓으려는 걸 리슐리외가 보호해주었다. 물론 친스페인 성향인 왕비를 매우 경계하기는 했지만서도.

사실 리슐리외는 의외로 달타냥을 마음에 들어했다. 라 로셸로 출병하기 전에는 달타냥을 자신의 저택으로 소환해서 자신의 경호사대 소위직을 제안하다 거절당하기도 했고, 밀라디와 버킹엄 공 암살과 관련해 밀담을 하면서 밀라디가 임무를 수행하는 보수의 조건으로 달타냥을 죽여달라는 요청을 하자 "내 적도 그렇게 쉽게 죽일 수 있다면 좋겠군. 그러한 적이야말로 용서하는 것도 쉬운 일인데!"라고 하기도 했다. 모든 사건이 끝나고 자신의 부하인 로슈포르 백작을 보내 달타냥을 체포해 자신의 집으로 소환한 후 밀라디가 받았던 백지 위임장[28]달타냥이 내밀었고, 리슐리외는 이 백지 위임장은 깔끔히 불태워버리지만 대신 달타냥이 예상한 사형 명령서가 아닌, 총사대 부사령관의 사령장을 이름 부분만 공백으로 남겨 내주며 서로 인정하게 된다.

초반에 악역스럽게 나오는 것은, 귀족들에게 압박을 많이 가했기 때문에 귀족층에게 인기가 없었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듯하다. 사실 달타냥의 아버지는 초반에 달타냥파리로 보내면서 "네가 고개를 숙여도 되는 분들은 국왕 폐하, 총사대 대장, 그리고 리슐리외 추기경 예하 뿐이다."라고 얘기한다.[29] 그래서 리슐리외가 《삼총사》의 진 주인공이라는 움베르토 에코의 비평도 있다. 덤으로 에코의 평가에 따르면 달타냥은 그냥 떨거지(...).

여담이지만, 뒤마의 외양 묘사로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머릿속에서 전 유럽과 엎치락뒤치락하는 노쇠한 브레인이 아니라, 추기경 복장이 아닐 때는 몰라볼 수 있을 정도로, 육체적으로 약해졌지만 꼿꼿한 기질과 전투 경력을 지닌 기사처럼 그려진다. 역사적 사실을 감안하면 이 편이 적절한 묘사인 셈이다.

그러나 《삼총사》 초반부에서 일단은 대립하는 위치에 있는 영향으로, 《삼총사》의 각색물에서는 원작의 복잡한 위치를 제대로 묘사하지 못하고, 오로지 음모가나 사악한 인물로만 묘사되는 경우가 매우 많다. 특히 1993년도에 나온 할리우드 영화 <삼총사>에서는 팀 커리[30]가 리슐리외 역을 맡았는데, 그냥 왕좌를 노리는 찌질이 악당으로 묘사[31]되어 욕을 많이 먹었다. 그 외에도 영화나 만화에서는 그냥 악당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각색물의 악역 스타일은 《삼국지연의》의 조조처럼 왕을 꼭두각시처럼 다루고 왕좌를 노리는 간신배 스타일이다. 실제 역사에서 리슐리외가 왕권을 강화하고 루이 13세를 귀족세력에게서 지켜내던 걸 생각하면 왜곡도 이런 왜곡이 없다. 이모텝과 같은 취급...? 물론 조조도 헌제를 황제로 살게는 해줬다.

초반부에 달타냥 일행들과의 대립과 이로인한 영향으로 다른 창작물에서 처음엔 주인공과 대립하나 나중에 주인공과 협력하는 유형의 캐릭터들의 원조로 평가받기도 한다.[32]

사실 21세기 들어서 이정도 위인을 권력에 미친 간신 취급하긴 뭐했는지 나름 중립을 찾아 <머스킷티어>나 <삼총사 3D>처럼 주인공들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정적 정도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이러면서 비중이 줄어들어 로슈포르 백작에게 빌런 자리를 뺏긴다(...).[33]

BBC영국 드라마 <삼총사> 시즌 1에서도 등장. 원작이 원작인 만큼 총사대와 대립하는 포지션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프랑스를 염려하는 냉철한 정치적 인물로 묘사된다.[34] 물론 서로 까긴 하지만, 공동의 적이 있을 때는 어쨌든 총사대와 협력을 하는 에피소드도 있는 등 100% 악역이라고 보기에는 약간 애매한 캐릭터.[35] 작중 모습을 보면 선역은 아니어도 루이 13세의 충신이 아니라고는 하기 어려울 정도다. [36] 게다가 은근 귀여운 모습도 많이 보인다 배우는 후일 <닥터후>에서 12대 닥터 역을 맡는 피터 카팔디이며 한국어 더빙판 성우는 설영범. 그러나 카팔디가 <닥터후>에 캐스팅되면서 시즌 2에서는 하차 크리(...) 그리고 더빙판 성우12대 닥터의 성우가 되었다. 작중에서는 시즌 1의 결말에서 약 1년 가량의 시간이 지났다는 설정으로, 그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죽기 전 아라미스와 왕비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는 식의 떡밥이 시즌 2 초반에 던져지는데...

움베르토 에코의 3번째 소설 《전날의 섬》에서 중요한 장면에 등장한다. 몬페라토 전쟁을 겪고 영지인 라 그리바로 돌아온지 몇년 후, 프랑스의 파리로 올라온 주인공 로베르토 델라 그리바가 궁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반국가 음모에 가담한 국사범이 되는 바람에 조용하게 어딘가로 끌려가게 되는데 거기에서 만나게 되는게 침상에서 죽어가는 이 사람, 주위에는 경호원과 함께 추기경이 된 마자랭이 있었다. 로베르토를 본 리슐리외는 로베르토를 잘 구슬리는 중에 콜베르가 들어오고 고정점과 경도, 공명약에 대한 비밀을 찾아올 것을 명한다.

일본 애니 <달타냥의 모험>에서는 초중반까지 악역으로 나오지만 그 뒤로 밀라디 패거리가 저지르는 왕위 찬탈에 반대로 왕에게 충성하며 달타냥 일행을 도우며 같은 편이 된다. 한국어판 성우는 이윤선. 그밖에 삼총사 항목에 나오는 <천하무적 멍멍기사>에서는 그냥 그런 악역으로 나온다.

베니스의 개성상인》에선 안토니오 코레아(유승업)과 함선 판권을 갖고 담판을 지었던 것으로 나온다. 처음엔 스웨덴의 함선인 바사 호(號)을 구매하려고 했으니 스웨덴 함선의 약점을 간파한 유승업이 "대프랑스의 영광"이라는 말로 그의 마음을 돌리고 스웨덴 함선을 시험하고 안토니오(유승업)의 갈레선으로 낙찰시키게 된 계기가 된다. 참고로 역사상의 리슐리외는 성직자로서 가톨릭교도이지만 엄청난 프랑스 애국자로써 유명해서 프랑스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종교를 가진 국가와도 손잡을 정도[37]로 물불을 안 가릴 만큼 프랑스에 대한 사랑이 강한 인물이다.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에서는 직접 등장은 없지만 작중 악역인 드 기슈 백작의 뒷배로 언급된다. 드 기슈가 리슐리외의 조카사위라고. 희곡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뮤지컬 <시라노>에서는 드 기슈를 미혼으로 각색했기에[38] 조카사위가 아니라 그냥 조카로 나온다.



6. 모티브[편집]



6.1. 프랑스 해군전함[편집]


리슐리외급 전함 항목 참조.


6.1.1. 함대 컬렉션의 캐릭터[편집]


위의 리슐리외급 전함의 의인화형이다. 리슐리외(함대 컬렉션) 참조.


6.1.2. 벽람항로의 캐릭터[편집]


위의 리슐리외급 전함의 의인화형이다. 리슐리외(벽람항로) 참조.


6.1.3. 전함소녀의 캐릭터[편집]


위의 리슐리외급 전함의 의인화형이다. 리슐리외(전함소녀) 참조.


6.2. 창세기전 3의 등장인물[편집]


리슐리외(창세기전 3) 항목 참고.


6.3. 라스트오리진의 캐릭터[편집]


삼총사의 리슐리외를 모티브로 삼고 이름은 리슐리외의 본명을 따온 캐릭터가 등장한다. 아르망 추기경 항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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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는 양 어깨 모두 흰쪽을 드러내야 하나, 멋을 위해 한쪽을 뒤집었다.[2]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쓰도록 하고 있다.[3] 리슐리외는 추기경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다시피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프랑스 왕국 또한 가톨릭 국가였지만 같은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해 30년 전쟁에서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 국가들 편에 선다. 사실 이 말에서 알수있듯이 리슐리외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임에도 신교도인 위그노에 대한 호의를 보여주는데, 이는 사실 관용적 태도라기보다는 국가이익을 가장 중요시하는 관점의 시초에 가깝다.[4] 1618년 현재의 독일 지역에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세력 간에 벌어진 30년 전쟁 당시,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는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지원했다. 이러한 결정은 가톨릭 추기경이자 수상이었던 리술리외의 주장에 따른 것으로, 종교적 신념보다는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이 결정에 대해 프랑스 내 가톨릭 세력은 종교적 신념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강력히 반발했다. 이근욱, <왈츠 이후>, 한울아카데미, 2009, 26페이지.[5] 가톨릭 성직자의 옷. 교황은 흰색, 추기경은 빨간색, 주교는 자주색, 신부부제ㆍ신학생들은 검은색이다. (단, 현대에 여름이 혹독한 지역에서는 검은색 대신 흰색 수단을 입는 것이 허용되는 경우가 있다. 한국이 이러한 지역에 포함된다.) 신학교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에서는 4학년 때, 수원가톨릭대학교에서는 3학년 때 착의식을 하고 수단을 입기 시작한다.[6] 변변치 못한 가문의 유능한 인물들을 총신으로 삼는 것은 총신 정치의 관례가 된다. 섭정 왕후 마리 드 메디시스의 총신 콘치니, 후일 루이 14세의 총신 마자랭도 모두 하급 귀족 또는 부르주아 출신이었다. 세력가 출신 인물을 재상으로 등용하는 것은 왕권에 위협이 되어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7] 종조부인 알퐁스 루이 뒤 플레시 드 리슐리외가 전임 뤼송 교구의 주교였다.[8] 수도자로 살겠다는 서약이다. 가톨릭성직자와 수도자는 성품성사/수도서원 때 청빈, 정결, 순명의 3가지 덕목(복음삼덕)을 서약한다. (다만 정결과 순명은 성직자와 수도자뿐 아니라, 모든 가톨릭 신자가 지켜야 할 사항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부부관계를 벗어난 혼외 성행위, 자위행위, 성매매, 포르노 이용 등 성적 음행을 하지 말아야 하며,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순명해야 한다.) 수도회마다 기간은 조금씩 다르지만, 수도회에 입회하면 지원기(6개월~1년)와 청원기(6개월~1년)를 거쳐 수련기(2년)에 들어간다. 수련기에 들어갈 때 수도명을 받고, 수도복을 입고(착복식), 여성 수도자(수녀)의 경우 하얀 베일을 쓰게 된다. 수련기가 끝나면 첫 서원을 하는데, 이때 하얀 베일에서 검은 베일로 바뀌고, 본격적으로 수도회의 여러 사도직을 하고, 여러 교육도 받는다. 서원은 몇 년 단위로 갱신하며, 이렇게 기한이 정해진 유기서원기(4~5년)가 끝나면 죽을 때까지 수도자로 살겠다는 종신서원을 한다.[9] 주군인 루이 13세에게도 상당 부분을 증여했다. 대표적인 것이 후술되는 팔레 루아얄이다.[10] 한국 103위 순교성인 중 하나인 파리외방전교회 성(聖) 도리 김 헨리코 (1839년 ~ 1866년) 신부가 이 교구 출신이다.[11] 이 때의 삼부회가 프랑스 혁명 직전에 열린 삼부회를 제외하면 마지막이었다.[12] 프랑스/역사에서 유명한 기만당한 자들의 날 사건이다.[13] 이 때문에 《삼총사》에서 초반에, 리슐리외의 친위대가 삼총사달타냥을 결투를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하려 드는것이 제대로 된 고증이다.[14] 후에 리슐리외 암살 음모에 왕을 가담시키려고 부추기기도 했다.[15] 참고로 《삼총사》 내에서 웃기게도 리슐리외가 그렇게 금지시켰는데도 리슐리외의 부하들은 몰래 결투를 하곤 했다. 작중 초반부 달타냥이 우연찮게 삼총사 전원과 결투를 벌이게 되고 아토스랑(아토스-포로토스-아라미스 순이었다. 이랬던 이유는, 달타냥이 결투를 건 순서가 이랬기 때문) 붙으려는데 리슐리외의 부하가 나타나서 결투를 하려했다는 걸 리슐리외 추기경님께 알릴 것이라고 하니까 아토스는 너희들도 몰래 결투하던데 좀 봐달라고 말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16] 판금 갑옷에 추기경의 빨간 수단을 두르고 있는 묘사는 강경한 무골이자 가톨릭 추기경이라는 두 정체성을 한번에 보여준다.[17] 사실 예전에도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란 건 누구나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채 100년도 되기 전에 프랑스이탈리아의 패권을 둘러싼 합스부르크 제국과의 전쟁에서 여러 번 무참히 깨졌었다. 그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은 스페인 제국동군연합 + 상속으로 인해 최대 판도를 자랑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프랑스가 반쯤 사주한 오스만의 침공과 종교개혁으로 인한 신성 로마 제국 내부의 분열, 농민 반란, 스페인 귀족층의 반란 등의 악재가 겹치면서 큰 페널티를 받았다. 이런 페널티를 받고도 프랑스가 여러 번 깨지는 정도였는데 만약 독일의 세력들이 하나로 통합된다? 프랑스에겐 그야말로 끔찍한 시나리오였고, 실제로 후대에 이 점이 증명되었다.[18] 실제로도 리슐리외가 죽고 얼마 안 가 루이 13세도 사망했다.[19] 참고로 동양에서도 이런 사례가 있었는데 그 주인공은 태조 홍무제였다. 자신의 고향인 봉양을 좀 잘살게 만들겠다고 아예 봉양으로 천도하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봉양은 작고 가난하기 짝이 없는 동네였기에 오히려 역효과만 났다. 수도도 그냥 난징으로 남았다가 정난의 변 이후에는 아예 북쪽인 베이징으로 옮겨진 건 덤.[20] 아르망 장 드 비뉴르 (Armand Jean de Vignerot). 누나 프랑수아즈 뒤 플레시 (Françoise du Plessis)의 손자이다. 이후 아르망은 리슐리외 추기경의 작위와 재산들을 물려받은 뒤 자신의 성에 '뒤 플레시 드 리슐리외 (du Plessis de Richelieu)'를 추가했다. 여담으로 아르망의 아들이 루이 15세 시대의 유명한 난봉꾼 (3대) 리슐리외 공작, 루이 프랑수아 아르망 드 비뉴르 뒤 플레시스 드 리슐리외 (Louis François Armand de Vignerot du Plessis de Richelieu)이다.[21] 카르지나르, 갈디나알 등의 표기도 보이는데 일본어 중역 판본을 그대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정착된 표기로 추정.[22] 예시 중 하나가 한결 저 능인출판사 《만화 삼총사》[23] 비밀리에 부리는 부하는 작중 유명한 밀라디라는 여성이 있으며, 아들까지 있는 실존인물이라고는 설이 있다.[24] 《삼총사》 막바지에서는 달타냥을 죽여달라는 밀라디와의 약속이 있었지만 "우수한 인재를 겨우 한 여자와의 약속 때문에 죽인다는 것은 국가의 손실이고 나의 잘못이다."라며 총사대 부대장으로 임명한다.[25] 삼총사들도 위에서 나오다시피 공적인 일에서는 리슐리외와 직접 대립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결투하다 걸려서 리슐리외 추기경의 호위대와 싸운다던가, 왕비의 위기를 돕는 정도.[26] 이건 그야말로 사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삼총사와 달타냥 일행들도 아무 무리없이 왕비를 도울 수 있었던 것이다. 애시당초 일국의 재상이 한 책략이라기에는 좀 치졸한 면도 있었고(당연하지만 왕비가 불륜을 저지른다는 것은 프랑스 왕실 입장에서도 망신이다.), 무엇보다 이 음모의 중심인물은 리슐리외라기보다는 밀라디 쪽이다.[27] 당시 스페인의 왕은 펠리페 3세 ~ 펠리페 4세였는데, 펠리페 3세는 안의 아버지이고, 펠리페 4세는 안의 남동생이다. 더욱이, 펠리페 4세의 왕비 이사벨은 루이 13세의 여동생이기도 했으므로 겹사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안과 루이 13세가 사이가 나빴던 반면 그들의 동생들인 펠리페 4세와 이사벨은 사이가 좋았다. 결국 나중에는 자신의 고종조카인 펠리페 4세의 딸 마리아 테레사를 자신의 아들 루이 14세와 결혼하며 며느리로 맞이한다.[28] "이 종이쪽지를 소유한 자가 한 짓은 내 명령에 의해, 국가의 이익을 위해 한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으며, 리슐리외의 이름과 서명이 있었다. 리슐리외가 떠난 후 아토스가 밀라디를 협박해 빼앗았고 호신용으로 잘 보관해 두었다.[29] 그래서 파리에 도착한 달타냥은 사람들이 리슐리외 욕을 그리도 많이 하는걸 보고 놀라는 장면이 있다.[30] 나 홀로 집에 2에서 프라자 호텔 컨시지어 헥터 역을 맡은 그리고 록키 호러 픽쳐 쇼 그 배우.[31] 다만, 팀 커리의 연기 자체는 100점.[32] 이런 케릭터들의 대표인물이 바로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사이토 하지메인데 사이토의 작중행적들을 보면 직급을 재외하면 삼총사 원작의 리슐리외랑 비슷한 행보들을 보인다.[33] 사실 로슈포르 백작도 초반의 엑스트라에 불과하고 삼총사의 진정한 악역은 밀라디다. 무기 하나 다룰 줄 모르는 여성의 몸으로 삼총사들을 농락하는 모략과 독의 전문가로, 사실 알고보면 츤데레 리셜리외나 투명인간 로슈포르에 비하면 훨씬 유능하면서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악역이다. 심지어 BBC 드라마 판에서는 전면전에 필요한 순수 전투력은 낮지만 위장과 은신, 암살에 있어서는 최고인지라 킬카운트 자체는 상위권이다.[34] 시즌 내내 리슐리외가 꾸미는 음모 중에서 자기 이득보려고 하는 짓 보다는 찌질한 왕 걱정돼서 하는 짓이 더 많다.[35] 100% 악역 컨셉은 이후 시즌 2의 악역 로슈포르 백작이 가져간다. 그리고 시즌2와 3의 전개를 보면, 언급만 될 뿐인데도 리슐리외의 빈자리가 굉장하게 느껴진다. 산 백작이 죽은 추기경을 못 이긴다[36] 엄밀하게 말하면 시즌 1의 메인 빌런이자 충신이다. 과장 조금 보태면 조조 마인드를 탑재한 제갈공명이 유선을 보필하는 느낌.[37] 30년 전쟁 내내 정세를 관망하다가 막판에 신교 연합 측으로 가담하여 최후의 승자가 되었고,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독일령이었던 알자스-로렌 지역을 프랑스 영토로 삼았다.[38] 원작 희곡에서는 여주인공 록산을 자기 부하와 결혼시킨 후 정부로 삼고 싶어하지만, 뮤지컬에서는 록산의 집안에서 재산 때문에 정혼시킨 사이라고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