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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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SS_John_W_Brown.jpg
현재까지 운용 가능한 상태인 리버티선 SS 존 W. 브라운[1]

1. 개요
2. 설계와 건조
3. 활약과 희생
4. 생존함
5. 대중매체에서
6.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

- 1775년 4월 23일 패트릭 헨리가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에서 한 발언으로 미국 건국의 시발점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유명한 말이다.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1941년 9월 11일 최초의 리버티선을 SS 패트릭 헨리라 명명하고 진수식에서 다시 한번 이 말을 한다.


분류 : 수송함
배수량 : 14747t[2]
길이 : 134.37m (441피트 6인치)
너비 : 17.3m (56피트 10.75인치)
높이 : 8.5m (27피트 9.25인치)
추진체계 : 기름 보일러 2기, 3중 확장 스팀 엔진(2,500마력/1,900㎾). 스크류 1기
속도 : 11~11.5 노트 (=20.4 ~ 21.3 km)
항속거리 : 20,000해리 (=37,000Km, 23,000마일)
승무원 : 선원 38~62명[3], 미국 해안경비대원 21~40명
수송능력(DWT) : 10,856톤 [4]
무장 : 고물(=선미)에 4인치(=102mm)포 1문, 대공화기 다수.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건조한 수송함으로, 정식명칭은 리버티급 수송함이지만 통칭 '리버티선'으로 불린다. 1941년~1945년까지 2,751척이 계획되어 그중 98%에 달하는 2,710척이 건조됐다.

리버티선은 2차대전 당시 만들어진 여러 종류의 전시 표준 수송선 중의 하나로, 거슬러 올라가면 미 해군이 전쟁에 대비하여 1936년에 수송선 50척을 발주하면서 시작됐다. 그리고 1939년에는 100척, 그 이듬해에는 200척으로 그 발주량이 늘어났다. 그리고 그 해, 영국은 유보트등에 의한 호송선단을 보충하기 위해 60척을 주문한다. 이 60척은 '오션급 Ocean-Class'으로 불린다. 하지만 이렇게 주문은 밀려드는데 이미 미국의 조선소란 조선소는 전부 꽉차서 주문을 받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즈벨트 행정부는 새로운 조선소를 건설하는 것과 동시에 건조하는 수송선의 선형을 통일하여 생산성을 높이고자 했고 이런 과정에서 영국의 화물선 중 생산이 쉬워보이는 한 종류를 골라 완전 용접 방식으로 생산성을 더욱 증가시킨 것이 바로 리버티선이다.

또한 리버티선은 여러 종류의 전시표준선 중에서도 가장 생산량이 많아 이런 전시표준선 전부가 리버티선인 것으로 오해받기도 하였는데 때문에 보그급 호위항공모함이나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이 리버티선 기반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하였다. 보그급은 C3형 화물선을 개조한 것이고, 카사블랑카급은 S4형 화물선을 기반으로 재설계한 것으로 둘 다 리버티선과는 관련이 없다.


2. 설계와 건조[편집]


리버티선은 미 해군 해상위원회(United States Maritime Commission)의 설계안을 기초로 했다. 이 설계안은 'EC2-S-C1'라고 불렸다. EC는 비상 수송선(Emergency Cargo), 2는 LWL[5] 400피트~450피트(=120~140m), S는 스팀 엔진, C1은 설계안 C1이라는 뜻으로, '스팀 엔진, LWL 120~140m인 비상시 수송선 설계안 C1'이 된다.
리버티선을 유명하게 만든 건조 과정은 블록 방식. 선박 전체를 몇 개의 블록으로 분류해서 용골을 올리고 그 위에 블록들을 레고 조립하듯 조립해 나가는 방식으로 기존의 건조 방식에 비해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2일에는 자재 절단, 6일째에는 벌크헤드, 10일째는 하부 갑판이 완성되고 14일에는 의장공사가 진행되어 24일째 진수되는 무시무시함을 자랑(?)한다. 그야말로 한 달에 한 척이 찍혀나오는 셈. 최단 기간에 건조된 리버티선은 Roberty E. Peary 호. 공사를 시작해서 선박 진수까지 4일 15시간 30분이 걸렸다. 10,000톤짜리 수송선 1척을 4일 15시간만에 찍어냈으니, 미국의 공업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수 있다.

한편 미국 정부는 전시체제 하에서 여성들까지 조선공으로 고용했는데, 그렇게 대체된 상당수의 남자 조선공들은 군에 징집되었다. [6]

SS 패트릭 헨리(SS Partick Henry)의 진수식에는 당시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참석했는데, 이때 그의 연설문에서 '리버티선'이라는 말이 생겼다.

건조비는 대전 당시 약 2백만 달러 가량으로, 보다 먼저 생산되던 평시 생산형 C2형 화물선의 약 338만 달러의 6할 대이나, C2가 평시 15.5 노트, 최대 19노트를 찍었던 것에 비해 11노트라는 월등히 느린 속도에, 그마저도 만재시 10노트대로 떨어지게 된다는 단점을 가졌다.


3. 활약과 희생[편집]


이 무지막지한 생산량으로 미국은 영국과 소련, 그리고 자국 군대가 필요한 물자수송을 떠받칠 수 있었지만 당시 생산중이던 동급 함선 C2는 15.5 노트, 한 단계 큰 C3는 16.5 노트를 찍던 것에 비하면 리버티선은 11 노트, 그 마저도 만재시 10 노트 가량의 속도밖에 내지 못해 현저하게 느렸다. 그래서 유보트가 수상항해로 따라잡아서 함포로 격침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이유는 역시 영국의 충고를 귓등으로 흘려들은 미군의 오판에 있었다. 결국 리버티선에는 구축함 등의 호위함선이 붙었고 무기도 장착되었는데 저 4인치 포도 부상한 유보트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도 느린 속도만은 어쩔수가 없어서 호송선이 붙는다 해도 유보트의 공격에는 여전히 취약했다. 그래도 느린 것이 도움이 되는 게 있다면 구식 표준형 전함을 호위함으로 붙여서 나포하려고 달려드는 독일배들이 감히 도전하기 어렵게 할 수 있었다는 점이 있었다.[7] 전함 특성상 대잠능력이 적기에 당연히 대잠함도 따라붙었다.

또한 생산성 향상을 위해 용접기술을 대거 적용했는데 용접에 쓰이는 강재가 적합하지 않았고 응력 집중이 발생하는 구조 설계[8], 용접 시행 불량으로 인해 선체에 균열이 가는 문제가 발생해 취성파괴의 손상과 사고가 발생했고 계류나 항해 도중 갑자기 두 동강 나서 침몰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거기에, 기온이 매우 낮은 대서양 북부의 환경에서 운용하다 보니 철의 내충격성 역시 매우 떨어진 환경[9]에서 운용하게 되어 손상이 더 빠르게 진행되었다.

다만 해당 문제는 리버티선에서만 일어난 문제가 아니었고, 저 문제로 인해 침몰한 리버티선 3척을 포함하여 당시 유사한 방식으로 생산된 함선 12척이 같은 문제로 침몰하였고,[10] 리버티선과 T2 유조선 중 해당 문제로 인해 중대한 손상을 입어 수리받게 된 사례는 127척에 달했다.[11][12] 조사 결과 45%의 사례가 낮은 숙련도로 인해 발생하였고, 55%는 숙련공이 시행했어도 취성파괴 문제로 발생했을 구조적 결함이었음이 밝혀졌기에 현연 바를 증설하는 등의 보강 작업이 있었고, 해당 조치 및 용접공 교육 및 용접 검수 작업을 개선한 이후 해당 문제는 재발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으론 이렇게 피해를 본 전례가 있었기에, 어마어마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던 미국 해군은 전후 파괴역학이라는 분야에서는 전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연구기관으로 꼽힌다.

후속 모델로는 속도 및 선체 구조 등이 개선된 빅토리급 수송선이 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서도 이 리버티선을 불하받아 사용한 적이 있다. 1949년 창설한 교통부 산하 공기업인 대한해운공사에서 운용했는데, 대한민국에서 운용된 리버티선 중 첫번째는 "동해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4. 생존함[편집]


  • SS John W. Brown: 메릴랜드의 Baltimore Harbor(볼티모어 항만)에서 박물관함으로 사용 중. 아직도 항해 가능한 상태다.
  • SS Jeremiah O'Brien: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항구의 Pier 45에서 박물관함으로 사용 중.
  • SS Arthur M. Huddell: 2008년 그리스로 이전되어 Hellas Liberty로 개명, 이후 그리스의 Piraeus 항구에서 박물관함으로 사용 중.
  • SS Albert M. Moe: 마지막으로 건조된 리버티선.


5. 대중매체에서[편집]


  • 월드 오브 워쉽에서 보급 화물을 열 때 보급 화물 받침대(...) 역할의 지원함으로 등장한다.

6. 외부 링크[편집]


리버티선 피로 파괴 - 실패사례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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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것만 남은 건 아니고, SSH 제레미아 오브라이언함(SSH Jereimiah O'Brien)도 남아있다. 현재 오브라이언함은 샌프란시스코에 있다.[2] 만재배수량이다. 비적재시의 배수량은 7175톤이다. 이런 물건을 풀빵 찍듯이 찍어낸 미국은 대체[3] 전시에 미 해군에 징집된 민간 선원들로 USMM(United States Merchant Marine, 미합중국 상선대) 이라고 불린다. 오늘날에도 조직은 군사조직과 비슷한 체계로 운영되고 있으며, 연방정부에서 설립한 해양대학교는 아예 미군의 사관학교와 동급으로 운영되고 있다. 미국상선단사관학교 참조.[4] 배수량 7175톤, 만재 14747톤짜리 배에 어떻게 1만 톤이나 실리나 싶겠지만, 이건 배수량과 재화중량톤수삼성중공업 블로그(Deadweight; DWT)를 측정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DWT에는 연료, 인원, 식량 등을 포함하기 때문에 배가 작을수록, 장거리를 항해할수록 실제 화물 수송량은 DWT보다 적다. 배수량 7천 톤도, 기준배수량이면 연료 등 포함되는 게 있는 식이다. [5] Load Waterline Length 짐을 만재할 때 가라앉은 배의 수면상 길이[6] 미국의 우월한 전시생산능력을 유지하기위해서 이런 기술직업군들, 특히 숙련된 기술자들에 한해선 병역을 면제해줬으나 조선공들은 알수없다.. 다만 전시생산으로 마구 불어난 리버티 선같은 민간선박이나 큰 전함부터 일개 경비정에 이르는 해군,해안경비대의 함선의 생명(?)관리와 가동율, 신속한 선박수리에 있어서도 조선공의 수요는 급증했을 것이고 군에 입대했을 전직조선공들도 일본과 달리 상당수는 특례를 인정받아 곳곳에 있는 해군 조선소나 전선에 가도 전선 뒤에 있는 전방해역(예를 들면 진주만)의 응급수리도크, 미 육군과 해병의 해안부대같은 지상부대이면서 선박을 운용하는 반쯤은 해군같은 부대나 공작함에 배치되어 특기를 살렸을것으로 추측한다.[7] 일단 포격전이 붙으면 12인치 이상을 장착한 전함은 전함만 상대할 수 있다. 독일에는 예전부터 전함이 매우 부족했는데, 샤른호르스트급 2척, 비스마르크급 2척, 도이칠란트급 2척으로 상당히 부족했다.[8] 끝 부분에 라운딩 처리(모서리를 둥글게 가공하는 것)가 되지 않은 물체는 전체적으로 둥글게 처리된 모양보다도 힘이 한 곳에 모이기가 쉬워져 작은 힘으로도 쉽게 파손이 된다. 이게 바로 현대에 들어 건조되는 배들이나 잠수함, 우주선, 항공기 등에서 압력을 버텨야 되는 구조를 가진 문이나 창이 둥글게 생긴 이유이다. 이렇게 안 해서 생긴 문제가 영국해외항공 781편 공중분해 사고.[9] FCC 구조를 갖는 스테인레스 강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철 또는 철합금은 BCC 구조를 갖는데, 이 BCC 구조가 고온이나 상온에서는 비교적 여러 방향으로의 원자의 이동이 잘 일어나 충분한 내충격성을 가지나, 극한의 저온 환경에서는 특정 방향의 원자이동이 잘 일어나지 않게 되어 내충격성이 크게 떨어진다. 왜 원자 이동이 쉽게 일어나는 물체가 더 내충격성이 좋냐는 것이 이해가 안되면, 엿을 잘 쪼개려면 차갑게 만들어야야 잘 쪼개진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된다.[10] https://en.wikipedia.org/wiki/Liberty_ship#Hull_cracks[11] https://eng-resources.uncc.edu/failurecasestudies/other-failure-cases/liberty-ship-fatigue-failures/[12] 리버티선의 취성파괴 사례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현대적인 의미의 파괴역학(Fracture Mechanics)이 학문으로서 본격적으로 정착되었고, 파괴인성(Fracture Toughness)이 구조재료의 물성으로 정의되었다. 따라서, 파괴역학이나 그것의 기초가 되는 고체역학 등을 듣게 되는 공학도라면 꼭 한번은 리버티선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