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봉(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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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imahong_Chinese_pirate.jpg

林鳳
1499년 3월 7일 ~ ?

1. 개요
2. 활동
4. 이후


1. 개요[편집]


중국 해적이자, 군벌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임아봉(林阿鳳, Limahong), 아봉(阿鳳), 린펭, 리마혼으로도 불린다.

조주 요평현[1] 출신으로 1574년, 북부 필리핀루손 섬을 침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광동성복건성 일대의 항구를 해적질을 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1574년에는 스페인령 필리핀의 루손 섬의 마닐라두번이나 점령하려던 것으로 유명하다.


2. 활동[편집]


16세기경, 명나라가 다스리던 중국 남부는 해적들이 들끓었다. 중국의 남부 항구에서는 해적들과 밀무역 관계를 구축한 상인들이 있었는데, 특히 왕지, 예종만, 리광터우, 쉬동 등에서 해적과 상인들이 광둥에 대규모 무역망을 건설하여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밀무역을 주도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지원을 등입은 해적들도 있었고, 1553년과 1561년 사이에서 벌어진 해적들의 침입은 무려 2만 번이나 있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중국판 고려 말 왜구의 침입.

중국 남부에서 이렇듯 해적들이 들끓자 이에 골치를 겪던 명 정부는 대책을 내놓았는데, 바로 남부 해안의 해적들을 소탕하고 해경 활동을 늘리는 등의 대안이었다. 이러한 조치로 인해 중국에서 활동하던 해적들은 명군에 쫓기어 활동 반경이 남하하게 되었는데, 임봉의 해적단도 그러하였다.

1571년에 임봉은 신천진(神泉镇, 후이라이 현 지에양 시 광둥성)을 공격해 지역을 점령하는 성과를 올렸으나 다음해 1572년에 청하이 구에서 명군과 결투를 벌이다 패배하여 필리핀루손 섬으로 피신했다. 그렇게 루손 섬에 피난을 간 임봉의 해적단은 그곳에서 자신들의 정착지를 차리고, 1574년 명군의 추격을 피해가며 중국의 남부 해안을 약탈했다.

그렇게 루손 섬 북부에서 남부 해안의 중국을 약탈을 일삼던 임봉은 어느해, 한 중국 무역선을 붙잡았는데, 그 배는 남부에 위치한 스페인령 필리핀에 후송하려는 물품인 금은보화를 싣고 있었다. 이를 본 임봉은 굳이 먼 바다를 건너 중국 남부를 터느니 차라리 가까운 루손 섬 남부의 땅을 통해 금은보화를 약탈할 수 있다는 생각에 스페인령 필리핀에 눈길을 돌렸다.


3. 마닐라 전투(1574년)[편집]


군벌이였던 임봉은 62척 이상에 달하는 선박과 본인이 보유한 군대에서 정예병들로 구성한 3천 6백 여명의 해적과 4백의 왜구 용병들을 거느린 함대를 이끌고 마닐라로 출발한다. 마닐라로 향하던 도중 임봉의 해적들은 비건에 정박한 스페인갤리엇을 발견했데, 이 갤리엇은 콩키스타도르후안 데 살세도가 식량을 보급하기 위해 보낸 배로 100명의 스페인 선원들이 타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중국의 함대에 어쩔 줄을 모르던 스페인 선원들은 재빨리 제압되었고, 선원 중 22명이 사망했다. 살아남은 선원들의 소식을 들은 살세도는 이에 놀라 임봉에게 경고문을 날린 다음, 마닐라에 방어군을 보냈다. 하지만 임봉은 살세도가 겁을 먹은 것이라며 경고를 무시한 채로 마닐라로 계속해서 나아갔다.

마닐라 남쪽 항구에 위치한 세인트 앤드류(Saint Andrew)에 도착한 임봉은 다음날 바로 700명의 부하들을 마닐라에 상륙시켰다. 임봉은 마닐라를 재빠르게 점령하려했지만 외곽과 내부에서 샤콘 대위와 벨라스케즈 대위의 지휘 하의 저항군에 부딪혀 크게 밀렸다. 이에 해적들은 해안에 정박된 배에 남아있던 포로들을 사살하고 임봉의 배로 후퇴했다.

해적들이 마닐라에서 철수한 틈을 타 스페인은 마닐라에 방어용 팔레사드를 구축할 시간을 벌었고, 마침 살세도가 50명의 추가 병력을 이끌고 도착했다.

이틀 뒤, 아침이 되자 임봉은 전 함대를 이끌며 해안을 향해 세 발의 대포를 발사한 뒤, 마닐라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오직 80여 명의 해적이 시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들은 즉시 사살되었고 사기가 꺾이자 해적들은 마닐라에서 후퇴했다.

마닐라에서 패배한 임봉은 임시방편으로 루손 섬 중부 해안에 위치한 팡가시난[2]으로 후퇴하여 그곳에서 요새를 건설하여 한동안 머무르기로 판단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살세도는 이를 가만히 두지 않고, 임봉을 토벌하기 위해 원정대를 보낼 계획을 세웠으며 즉시 마닐라에 방비를 강화했다.

살세도는 스페인군 병사 256명과 숫자 불명의 식민지 동맹군을 거느리고 1572년 3월 23일 샤콘, 채브스, 리베라, 라미레즈, 차콘 대위가 지휘하는 59척의 함정으로 출항했다. 하루 뒤 살세도는 팡가시난에 도달했는데, 임봉의 바다 도주로와 연결되는 아그노 강을 봉쇄하고 차브스, 차콘 대위에게 각각 8명의 병사들을 하사하여 9척의 작은 배를 통해 강 상류의 해적 배를 모두 가져오게 했다. 이에 임봉의 해적단은 도망칠 곳 없이 스페인군의 공세를 직접 맞닥뜨릴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살세도는 대장 리베르와 28명의 군사를 보내어 육지 쪽에서 임봉의 요새를 습격했는데, 밤이라서 시야가 보이질 않아 스페인군은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중국 해적들은 다시 뭉칠 수 있었고, 4개월 간의 긴 포위 공방이 이어졌다.

임봉은 포위 기간동안 부하들과 함께 요새 안에서 30척의 배를 만들었고, 8월 4일, 임봉의 일당은 포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했다.


4. 이후[편집]


두 차례에 걸친 마닐라 전투와 팡가시난에서 탈출한 임봉의 해적단은 이후로도 계속 해적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1589년에 중국 해안을 약탈한 뒤의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명나라필리핀 도독령에 공을 치하하였고, 이후 갤리온 무역이 확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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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오저우시.[2] 15세기에 명나라의 영락제정화가 방문하고 난 후 이 지역에는 중국인들이 이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