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클린턴/평가

덤프버전 :

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빌 클린턴

1. 개요
2. 긍정적 평가
2.1. 미국 역사상 최고 호황기를 이끈 대통령
2.2. 민주당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다
2.3. 소수자 친화적 행보
2.4. 코소보 독립에 기여
3. 부정적 평가
3.1. 미국 역사상 최고 호황기에 기여한 것이 별로없다
3.2. 잡음많고 번잡했던 임기
3.3. 르윈스키 스캔들
3.4. 한국에 대한 가혹한 대우
3.5. 인도 총리에게 문전박대를 당하다
3.6. 중동 정책의 실패
4. 논란이 있는 평가
4.1. 중국의 WTO 가입 찬성
4.2. 한국과 일본에 대한 태도 및 한미관계
4.3. 러시아를 다시 적으로 돌린 장본인
4.5. 글래스-스티걸 법안 폐지


1. 개요[편집]


미국 대통령을 지낸 빌 클린턴의 재임 시절 평가를 기록한 문서.


2. 긍정적 평가[편집]



2.1. 미국 역사상 최고 호황기를 이끈 대통령[편집]



역사상 최고의 호황기를 이끈 대통령으로, 클린턴 집권 당시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40여년간 대립하던 소련의 붕괴로 인해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그 어느 국가도 넘볼 수 없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2.2. 민주당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다[편집]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래 60년만에 최초로 8년 임기를 마친 민주당 대통령이 되었다. 또 퇴임 8년 뒤 후임 민주당 대통령이었던 오바마의 당선, 재선과 함께 보수화되었던 미국 정치판의 축을 돌리는 대통령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뉴딜동맹이 깨진 이후 고전하던 민주당으로서는 반격의 신호탄 같은 인물.

클린턴은 1968년 대선 이후 카터 1회를 제외하고는 5패, 특히 레이건 이후 3연패를 당하고 있던 민주당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인물이다. 물론 그의 시대 역시 미국에서 보수가 강한 시대였지만, 그런 그가 여러 잡음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8년 임기를 무사하게 마치는데 성공했다는 점과 임기 말에도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며 2000년 대선을 박빙으로 만들어놨다는 점은 정치인으로 써 고평가 받을만하다. 물론 고어의 개똥같은 선거전략과 사법부의 트롤링으로 이후 미국은 멸망한다

2.3. 소수자 친화적 행보[편집]


아래에서 보듯 소수민족과 여성에게 친화적인 정책을 폈으며, 환경 정책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미군동성애 정책을 일신한 "묻지도 말하지도 않는다(Don't ask, Don't tell)" 정책, 즉 DADT도 큰 성과 중 하나다.[1] 로버트 라이시(노동부 장관)와 같은 젊은 관료와 로이드 벤슨(재무장관) 같은 경륜의 인물도 잘 등용했다.


2.4. 코소보 독립에 기여[편집]


국외에서는 1차 북핵문제와 관련된 인상 때문에 한국에서는 온건파로 인식되는 경향도 있지만 코소보 공습도 클린턴의 당시 업적(?) 중 하나다. 특히 코소보 공습 때 미군을 파견하여 당시 코소보 분리 독립에 반대했던 유고슬라비아를 찍소리 못하게 할 정도였다. 그리고 2008년 코소보는 결국 독립하게 된다.[2]


3. 부정적 평가[편집]



3.1. 미국 역사상 최고 호황기에 기여한 것이 별로없다[편집]


클린턴 임기 때 미국 경제가 호황이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1990년대 자체가 레이거노믹스의 성과와 닷컴버블을 목전에 두고 민간투자가 급격하게 늘어난 시기였던 만큼, 그저 클린턴이 시대를 잘 타고난 결과에 불과하다는 반박도 있다.


3.2. 잡음많고 번잡했던 임기[편집]


사실 클린턴의 임기 자체는 대단히 번잡했다. 업적도 많았지만 눈에 띄는 실책도 많았으며, 칭송도 많았지만 비판과 잡음도 많았다. 빌 클린턴은 공화당에게는 부패하고 교묘한 사기꾼으로, 민주당 진보파에게는 모호하고 보수친화적인 정치꾼으로 비난받았고,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에서 제3의 대통령 당을 이끌려고 한다는 식의 규탄도 받았다.

1994년 중간선거 참패의 여파는 클린턴 임기 내내 골칫거리였다. 1996년 대선에서의 압승, 하원 의석 증석에서도 상하원은 여전히 공화당이 다수당을 차지했기 때문에 클린턴의 결정적인 탄핵안을 비롯해 의회와 대법원에서도 그야말로 박빙의 표결들이 여러차례 연출되었다.

20년이 지난 지금에야 믿기지 않을지 몰라도, 퇴임 당시 그는 (지지율에 비해) 그렇게 고평가받지 못했다.

3.3. 르윈스키 스캔들[편집]


네셔널 지오그래픽의 응답하라! 1990's 中
파일:external/bcc77fac7c768747046197f649f39a6c593a5f0d1d869ce4304908a4ce3d7dfc.jpg
내연녀 모니카 르윈스키
클린턴은 아칸소 주지사 시절부터 여자 문제로 트러블이 매우 많았다. 1990년 9월 중순, 주지사 연임을 시도하던 클린턴을 아칸소 주 개발재정국에서 해고된 직원 래리 콜린스가 "클린턴이 아칸소 주의 재정을 유용하여 다섯 명의 여자와 간통을 했다."라고 폭로한 것이다. 클린턴은 아무 것도 모르고 출근하다가 AP통신의 기자 빌 시먼스에게 그 소식을 전해듣고 기겁했지만, 매우 침착하게 시먼스 기자에게 콜린스가 지목한 여자들과 인터뷰할 것을 요청했고 시먼스는 다섯 명 전부에게서 그런 적이 없다는 진술을 받았다. 하지만, 공화당에서 이를 놓칠 리 없었고 공화당 주지사 후보 셰필드 넬슨은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거론하면서 클린턴을 부도덕한 인물이라고 비난했지만, 여자들이 자꾸 이러면 고소하겠다고 반발했고 콜린스의 증언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증거도 없는 터라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이외에도 클린턴이 주지자로 재직하던 시절 호텔에서 그에게 섹스를 강요당했다고 주장한 폴라 존스, 12년간 클린턴과 혼외정사를 했다고 주장한 제니퍼 플라워스, 성매매 여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숨겨진 아들이 있다는 등의 스캔들이 있었다.

제일 유명한 스캔들은 당시 백악관 인턴이었던 모니카 르윈스키(1973 ~)와의 불륜 스캔들, 속칭 지퍼게이트이다. 모니카는 펜타곤의 공보직으로 근무하는 동료 린다 트립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클린턴과의 관계를 허물없이 털어놨는데, 린다가 이 내용을 녹음하고 언론에 공개하면서 시작되었다.[3]

미국에서는 주에 따라 간통죄의 존재 여부와 이에 대한 태도가 다른데, 대도시이고 진보적인 성향의 뉴욕을 비롯한 동북부지역이나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서부지역 등에서는 정치인들의 성문제에 있어 좀 관대한 반면,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텍사스를 비롯한 남부지역이나 러스트 벨트 지역 등에서는 정치인의 성문제에 있어서 민감하게 대응한다. 게다가 대선에서 클린턴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매우 보수적인 주라 남부전략에 의해 민주당의 지지기반에서 공화당의 지지기반으로 변해가는 아칸소루이지애나에선 특히 난리가 났었고,[4] 결정적으로 클린턴이 법정에서 위증 및 위증교사를 하면서 케네스 스타 특별 검사에게 털리고, 하원에서 탄핵 의결이 통과되어 벼랑 끝까지 몰리게 되었고 연방대법원에서 '더 이상 우리 법원에서는 변호사로 활동할 수 없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5] 거기다 시가를 좋아하는 클린턴이 르윈스키의 음문시가를 보관했던 일화를 비롯한 성적인 보도가 이미지에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TV 생중계 등을 통해 대통령에게도 사생활이 있을 수 있음을 주장하자 여론이 어느 정도 클린턴에게 동정적으로 돌아서고 중대한 사건이 아님에도 거짓말 한 번 잘못 했다고 탄핵은 좀 지나치다 싶었는지 상원에서 탄핵안이 부결되면서 가까스로 대통령 자리는 지켰다. 물론 이 시기에 아내인 힐러리와의 관계는 당연히 막장으로 치달았다. 이혼을 당하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 힐러리의 회고에 따르면 "그 때 남편을 반갑게 맞이했던 가족은 우리 집 개밖에 없었다."라고 한다. 그리고 한동안 빌은 소파에서 잠을 자야 했다고 한다. 바람을 피운 주제에 변명할 말도 없겠지만 말이다.

사실 클린턴은 첫 대선 당내 경선에서도 이미 섹스 스캔들에 한번 휘말렸으나, 아내 힐러리의 강공으로 간신히 극복한 상황이었다. 훗날 힐러리는 한 인터뷰에서 남편이 밉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의) 목을 비틀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다만 이후에 화해를 제대로 하긴 한 듯하다. 당시 백악관 직원들이 남긴 회고록 등을 보면 직원들이 침실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노크를 해야 민망한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빌과 힐러리가 매우 격렬하게 섹스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힐러리 클린턴이 두번이나 바람을 피운 자신의 남편을 대변해준 덕분에 대중들에게 호감을 쌓아, 상원의원에 진출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후담도 있다. 물론 힐러리도 백악관 내에 들어서면 바로 태도가 돌변해서 한성깔 하는 성질이 어디 가지않고, 물건을 마구 던져대는 바람에 그렇게 던진 물건에 빌이 맞아 다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파일:external/6bc4ebfd9c23af83170edc641e2c2f6ccc1594cc7001ec465a50a08d84dea2da.jpg

1998년 르윈스키 스캔들로 한창 곤경에 빠졌던 클린턴을 바라보는 아내 힐러리의 모습. 이 사진은 1999년 퓰리처상 보도사진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판결문이 인터넷에 퍼져 부모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이 때 미국민들 사이에서는 클린턴의 변명을 비꼬아서 "오럴섹스(구강성교)는 섹스가 아니다."[6]라는 농담이 생겼고 르윈스키와의 관계를 묘사한 클린턴의 '부적절한 관계'[7]라는 표현이 전세계적으로 유행했다. 특히 일본의 정치인들 사이에 대유행이 되어 뭔가 문제가 생기면 갖다붙이는 사과 표현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고위층의 변명으로 절찬리. 우스갯소리로 미국 대통령의 사무실이라 볼 수 있는 오벌 오피스(Oval Office)가 오럴 오피스라고 불렸다.

르윈스키 사건에 대한 빌 클린턴의 대국민 사과문을 살펴보면 한국인들의 시선에서는 온통 변명뿐인데다 결론은 이건 우리 가족의 일이니까 댁들은 신경 좀 꺼 달라는 내로남불 마인드로 읽힐 수 있어서 지탄을 받기 쉬울지 모르나, 다시 말하지만 문제가 되었던 것은 '불륜 자체'가 아니라 '클린턴의 위증' 여부였다.

구강성교가 '성적 접촉'(Sexual relation)이 아니라는 대답을 하고 클린턴이 자기는 위증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검사가 질문을 하면서 성적 접촉의 범위를 한정했기 때문이었다. 검사는 성기나 항문, 유방 등에 접촉하는 것을 성적 접촉으로 규정하고 질문을 했다. 클린턴은 이 질문을 자신이 르윈스키의 그 부위에 접촉을 했는지 묻는 것으로 해석하였고, 그래서 자신의 입장에서 성적 접촉을 하지 않았다고 답한 것이다. 결국,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 정말 오럴섹스를 받기만 했는지는 당사자 둘과 신만이 알겠지만, 그동안 클린턴이 보여주었던 교묘한 화술로 보아 '성접촉을 하지 않았다'는 이 발언이 국민들을 속인 것은 맞지만 탄핵할 만큼 중대한 위증은 아니라는 여론이 일었고, 결국 탄핵안은 부결된다. 하지만 호도하기 위한 증언(misleading testimony)으로 판결나서 이것이 유죄로 인정되어 벌금을 물고 변호자 자격이 정지되었다.

한편 내연녀 모니카 르윈스키는 이런 미국사에 길이 남을 전대미문의 추문의 당사자가 되어, 세계적으로 얼굴과 개인정보가 팔리는 건 물론 매우 적나라한 사생활까지 뉴스를 통해 까발려졌다. 이에 기자, 파파라치, 그리고 변태들에게 온가족이 쫓기며 몇년간 이사를 다니는 수모를 겪었다고 한다. 사건 이후로도 르윈스키는 온갖 코미디언들과 래퍼들이 자주 인용하는 농담 소재가 되었고, 특히나 제이 레노의 르윈스키 괴롭히기는 그 수준이 지독했다.[8] 지금까지도 미국 편의점에서 흔히 팔리는 3류 연예계 잡지에 그녀의 이름이 간간히 보이는 정도. 세월이 흘러 지퍼게이트가 단순한 가십거리가 아닌 역사적 사건으로 학계가 진중히 평가하는 사건이 되고 또한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이 더 개선된 현재는 "아무리 쌍방간 합의해서 벌인 불륜이지만, 대학을 갓 졸업한 22살짜리 인턴을 50대의 미국 대통령이나 되는 양반이 꼬셔서 같이 놀아난 상황이라면 그 대통령의 죄가 훨씬 중하지 않냐"는 의견도 나온다. 또한 전세계적 조롱거리가 되면서 그녀가 감내해야 했던 망신과 수모에 대한 동정론이 이는 분위기. 르윈스키는 2014년에 회고록을 냈으며, TED에서 자신의 경험을 빗대어 온라인 상 조리돌림의 폐해에 대한 강연을 하기도 했다. # 트위터에서 "자기가 받아본 커리어 조언 중에 최악이였던 것이 뭐냐"라는 트윗에 "백악관에서 인턴하면 이력서에 쓰기 좋은 스펙이 될 거야'라는 조언"이라고 답글하며 농담하는 등, 현재는 해당 사건에 대해 꽤나 여유로운 모습을 보인다. #

당시 늘그막이던 전설적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는 클린턴의 성추문을 두고 온갖 비난을 쏟아냈다. 디마지오는 사랑하던 전 아내 마릴린 먼로존 F. 케네디와의 성추문 때문에 죽었다고 여겼기에 높으신 분들의 성추문을 혐오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마지오는 클린턴도 평생을 증오하던 케네디와 맞먹는 인물이라고 여겼다. 잘못한 것이 클린턴 본인이니 할 말도 없긴 하다. 그런데 조 디마지오는 마릴린 먼로에게 매일 야구배트로 폭행을 했던 인간 쓰레기나 다름없는 놈이라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마릴린 먼로가 이혼장을 내밀면서 했던 말이 "그가 나를 때릴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2021년 FX에서 방영한 범죄 시리즈물인 아메리칸 크라임 스토리 시즌3에서 이 사건을 드라마화하여 방영하기도 했다. 드라마는 빌 클린턴과 르윈스키의 스캔들, 그 이후 빌 클린턴의 정치행보와 수난을 매우 세세하게 다룬다. 르윈스키 스캔들을 이해하고 싶다면 필시 시청해야 할 드라마.


2023년 4월 16일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르윈스키 스캔들에 대해 다뤘다.

이 르윈스키 스캔들은 후임자인 조지 W. 부시가 당선되는 데에도 영향을 끼쳤다. 조지 부시는 적어도 사생활 면에선 깔끔하고 흠잡을 곳이 없었고, 이로 인한 부시의 도덕적인 이미지는 빌 클린턴과 대비되어서 지지율 확보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미국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3.4. 한국에 대한 가혹한 대우[편집]


<시사IN>, 1997년 말, 미국은 왜 한국을 집어삼키려 했나?

한국에서는 1993년 집권 초부터 쌀개방 문제로 농민들과 한총련NL 운동권 사이에서 비난을 받아 방한 반대 시위까지 터졌고, 1997년 IMF 사태로 미국식 구조조정을 강요한 원흉이자[9] 한국 금융시장을 미국식 금융자본에 종속시켜 놓은 원흉이라 할 수 있으며, 1997년 미일가이드라인 개정으로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 근거를 마련한 점에서 한국의 진보세력이 반미 강력 주장에 적극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10]

훗날 한국의 IMF 구제금융에 대해, 당시 IMF 총재로서 IMF 협상을 지휘했던 미셸 캉드쉬는 당시 조치가 가혹한 측면이 있었다고 하는가 하면, IMF조직 자체적으로 외환위기 처방이 가혹하다며 자기반성하기도 하였다. IMF 거듭된 자기반성 - 외환위기 처방 가혹했다

그래도 2000 남북정상회담 당시 클린턴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를 김대중김정일에게 제기한 것에 감사를 나타내고 정상회담에서의 합의가 김 대통령 개인뿐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대단한 승리라고 칭송하기도 했다.[11]


3.5. 인도 총리에게 문전박대를 당하다[편집]


클린턴 집권 당시 공산주의의 수장이자 초강대국 반열에 올라있던 소련이 붕괴되면서 유일 초강대국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렇기에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 정책을 아무 무리없이 펴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나 클린턴의 대외정책은 그렇게 순탄치 않았다. 심지어 민주당 진보파에게는 "전쟁광"이라는 비판도 들었을 정도니...

실제로 1998년 핵실험을 강행한 인도파키스탄을 중재하러 간다고 뉴델리에 방문했으나 당시 인도 총리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Atal Bihari Vajpayee, 혹은 Bajpai)에게 문전박대(...)를 당했고[12] 미국 대통령이 인도 총리를 먼저 와서 기다리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13]


3.6. 중동 정책의 실패[편집]


미국이 감싸는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는 중동 지역에서도 좋은 평가를 듣지 못했다. 이 때문에 클린턴은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 목표가 되기도 했다. 클린턴 스스로도 중동 평화에 관심이 많아 당선 이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정을 이끌어내는 등 성과를 보이기도 했으나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가 극단파 유대인에게 암살되고 팔레스타인 자치구 내에서 미국의 아랍 공격에 항의하는 민중폭동이 이어지면서 결국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다. 도리어 실제적 업적은 차라리 북핵 문제와 관련된 제재의 정당성 확보 및 북아일랜드 분리독립 문제 해결 측면에 있다.[14]


4. 논란이 있는 평가[편집]



4.1. 중국의 WTO 가입 찬성[편집]


중국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한데에는 광대한 땅, 풍부하고 값싼 노동력, 시장경제 요소 도입 등 다양한 요인들을 지목할 수 있을테지만, 가장 결정적으로 작용한 요인으로는 WTO 가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WTO에 가입하기 전까지는, 비록 중국이 값싼 노동력으로 저렴하게 제품을 생산한다고 해도, 높은 관세가 부과되면서 수출을 해야했기 때문에, 중국산 제품들이 미국 등 다른 나라들에서 상대적으로 잘 팔리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WTO에 가입할 경우, 중공은 개발도상국 지위를 통해 선진국과의 무역에서 관세 인하 혜택이 대폭 이뤄지기 때문에 수출이 크게 늘어날 수 있고, 따라서 경제도 가파르게 성장할 수 있게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은 1980년대부터 WTO 가입을 추진했지만, 번번히 미국의 반대에 부딪혀서 실패했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조지 H. W. 부시의 공화당 행정부에서는 중국의 공산주의를 경계했고, 중공에게 지적 재산권 보호와 금융시장 개방 등 매우 까다로운 조건들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미국은 이전 공화당 행정부 시절과 달리 중국의 WTO 가입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스탠스로 변하게 되었다. 실제로 클린턴은 자신의 연설에서 중공의 WTO 가입이 미국의 산업에 이익이 될 것이며, 중국을 민주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클린턴의 민주당 정권은 중국의 WTO 가입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과 중국의 통상관계를 영구화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한다.

비록 1979년에 지미 카터의 민주당 정권이 미중통상조약을 체결하기는 했지만, 이 조약은 매년 갱신해야 하는 조약이었다.https://m.hankookilbo.com/News/Read/199505280074465129 이었고 당시 민주당정부는 인권과 최혜국대우를 연계하고자 했다.하지만 클린턴은 미중간의 통상관계를 정상적이고 영구적인 관계(Permanent Normal Trade Relations)로 격상시키고자 했고, 이를 통해 중국이 WTO에 가입할 때 일종의 보증을 서주려고 했다는 것이다. 당시 백악관 고위관료의 공식 입장문에서도 중공과의 PNTR 법안 추진이 중국의 WTO 가입과 연계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We agree merely to support China's candidacy for WTO membership and to make permanent the Normal Trade Relations for China that we have passed each year for the past 20 years.

우리의 목적은 오직 중국이 WTO에 가입하는 것을 지원하는 것, 그리고 중국과의 정상적인 통상관계를 영구화하는 것입니다.

Gene Sperling, 클린턴 행정부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 #


하지만 당시에도 중국의 WTO 가입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없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인물로 그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앨 고어 부통령은 중국의 WTO 가입에 관해 클린턴 대통령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자신이 집권하면 중국과 다시 협상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법안이 부결될까 봐 몸이 달아 있기는 전통적으로 업계의 이익을 대변해온 공화당에서는 의원 약 150명이 찬성 표결에 돌입할 준비를 갖추고 있으며, 공화당 지도부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위기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한 텔레비전 연설을 촉구하며 그 상황에서 구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공교롭게도 클린턴이 속한 민주당은 강력한 노조의 반발을 의식해 ‘주군’에 등을 돌려버린 형국이었다. 또, 통상 전문 변호사이자 후에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맡은 로버트 라이트하이저가 있는데, 당시 그는 뉴욕 타임스 기고에서 "중국이 WTO에 가입하면 지배적인 무역 국가로 떠오를 것이며, 미국 내 모든 제조업 일자리가 안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러한 우려는 현실화됐다. 실제로 중국의 WTO 가입 이후, 미국의 대중 무역적자는 눈덩이처럼 커지고, 일자리는 줄어들었다. 데이비드 오토 MIT 교수의 연구팀에 따르면, 1999년부터 2011년까지 중공과의 경쟁에 밀려 사라진 미국 내 일자리가 240만 개에 달한다고 한다. #

반면 중국의 경우, WTO에 가입한 2001년을 기점으로 경제성장이 급속도로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1992년에서 2007년까지의 중국 경제성장률을 볼 경우, 2001년 이전까지만 해도 1999/2000 단 한번을 제외하고는 줄곧 하락하는 추세를 보였다. 1992년에만 해도 14.2%였던 성장률이, 2001년에는 8.3%까지 추락했다. # 하지만 WTO에 가입한 이후로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이한 2008년 이전까지 줄곧 경제성장률이 상승했으며, 특히 2007년에는 14.2%를 찍으면서 전례없는 성장세를 보이기도 했다. #

이러한 엄청난 경제성장을 견인한 것은 바로 수출이고, 이 수출을 견인한 것이 바로 WTO 가입이라는 것이다. 같은 7년 기간인 1994년에서 2001년, 2001년에서 2008년까지의 중국 수출액 추이를 비교해보면 명확해진다. 1994년의 중국 수출액은 1046.07억달러였고, 2001년에는 2720.6억달러였다. 증가분은 1674.53억달러, 160% 증가한 것으로, 이것 또한 상당히 많이 늘어난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2001년에 2720.6억달러였던 중국의 수출액은 2008년에는 1조 4980억 달러로까지 증가했다. 증가분은 무려 1조 2259.4억 달러에 달하고, 증가율 또한 451%나 된다. # 즉 WTO 가입 이후, 중국 수출액 증가 추이는 이전보다 더욱 가파른 상승세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중국의 WTO 가입은 중국의 수출을 비약적으로 늘렸고, 중국의 경제를 급속하게 성장시켰으며, 중국을 오늘날의 세계2위 강대국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즉 중국을 세계 2위의 강대국으로 만든데에는 중국의 WTO 가입을 추진한 클린턴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4.2. 한국과 일본에 대한 태도 및 한미관계[편집]



일본에 대한 태도로 일본에서 논란을 빚기도 했다. 1998년 일본 방문시 일본 천황 아키히토가 클린턴을 영어를 쓰며 공손히 영접했는데 일본과 국제사회를 지나치게 압박하고 일본 천황에게도 영어를 강요하여 국제적으로 영어를 전세계에 강요하는 미국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줘 논란을 빚기도 했다.[15]

훗날 클린턴은 2000년 오키나와 방문시 오키나와 평화의 비 앞에서 뒷짐을 지고 참배를 했다.

[16]

1998년 청와대 방한 시 김대중 대통령과의 사진촬영에서도 뒷짐을 지는 결례를 범하기도 했다.


파일:Screenshot_20200818-133052_Samsung Internet.jpg

이 시기인 1997년 6월 24일, MBC 뉴스데스크에서 한국 정치외교 사학회가 전국의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천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4대 강국 가운데 한국의 안보에 가장 위협을 줄 수 있는 나라로는 응답자의 10명중 4명이나 미국을 꼽아 이 조사에서 90년대 들어 심해진 혐미, 반미감정을 잘 나타내었다. 이 조사에선 미국다음으로 일본, 중국, 러시아를 꼽아 한국과 통상마찰이 잦은 미국과 일본에 더욱 반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7] 90년대 클린턴행정부 시절 한미관계는 안보적으로는 안기부의 미국인 간첩 구속사건과 IMF사태등으로 역대 최악의 관계를 보였다.

4.3. 러시아를 다시 적으로 돌린 장본인[편집]


1991년에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은 친서방, 탈냉전 정책들을 펼치면서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지원 등을 받기를 원했다. 빌 클린턴은 경제 개혁 시스템들을 제공하였지만 그 경제 개혁 시스템들이 러시아 상황에 맞지 않는 것들인 탓에 러시아 경제가 1998년 모라토리움 위기를 겪는 등 1990년도부터 2000년도 초반까지 러시아 경제는 최악을 달리게 되었다. 또한 소련이 무너지면서 소련 위성국이었던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을 나토에 가입시키고 코소보 전쟁에 러시아 동맹이었던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 공습을 가하는 등 러시아 영향권에서 패권행사를 부리자 이러한 태도에 러시아는 분노하여 결국 옐친이 물러나고 푸틴부터는 다시 반미국가로 돌아서면서 다시 미국과 대립하는 국가가 되고 만다.

4.4.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글로벌 금융위기의 원흉[편집]


글로벌 금융위기시발점이 되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원흉이 클린턴이라는 비판도 있다. 우선 서브프라임(subprime)은 우량 대출자 등급 (prime)보다 아래(sub)인 비우량 대출자들을 의미하고, 모기지(mortgage)는 주택을 구매하기 위해 융자를 빌리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신용등급이 낮은 사람들에게도 주택을 구매하기 위한 돈을 빌려주도록 한 것이 바로 위기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은행들로 하여금 이렇게 신용등급이 부족한 사람들에게까지 주택 구매를 위한 대출을 하도록 했던 대통령이 바로 클린턴이라는 것이다. 우선 클린턴은 Community Reinvestment Act of 1977이 실효적으로 집행될 수 있게끔 했다. 이 법안은 같은 민주당 대통령 지미 카터가 통과시킨 법안으로, 상업은행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보유한 예금의 일정 비율 이상을 빈곤층 지역공동체들에 빌려주도록 강제하는 법안이다.

이러한 클린턴의 행보에 힘을 실어준 것은 바로 시민단체들이다. ACCORN, NACA 등의 시민단체들은 빈곤층들에게는 대출의 기회가 제공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문제삼았고, 이에 클린턴 정권은 대출에 대한 차등적 지위들을 금지할 것을 명령한다. 이는 곧 닌자론(NINJA Loan), 즉 무소득(No Income)+무직(No Job)+무자산(No Assets)자들에 대한 대출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소득도 없고, 직업도 없고, 자산도 없더라도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든 클린턴은, 이를 사회적 정의(Social Justice)를 실현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했다. #

또한 클린턴은 은행들에 대한 닌자론 제공 강제를 공고화하기 무려 100개 이상의 행정명령을 서명하기도 했다. 게다가 주택구입 희망자들에 대한 대출을 위한 공적자금을 지원하는 정부기관들인 연방저당권협회(Fannie Mae)연방주택금융저당회사(Freddie Mac)로 하여금 닌자론을 제공하지 않은 은행들에게 자금지원을 끊도록 명령했다. 또 이들 기관들이 직접 닌자론을 제공하도록 하기도 했다. #

그러나 위의 서술과는 달리 금융가는 저소득층 대출 강제 정책에 대해서 딱히 난색을 표하지 않았다. 클린턴 정권 후에도 이들은 저소득/무소득자에게 대출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사망자에게도 돈을 빌려주는 등 막나가는 행보를 보이며 훗날 경제위기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엄연히 사실이기 때문이다.

클린턴이 이와 같은 정책을 핀 것에도 월가 기득권의 이익을 보장해 주는 동시에 사회적 정의를 이룩한다는 대외명분을 얻을 수 있기에 한 거지 순수한 사회적 정의 목적으로 펼친 포퓰리즘 정책이라 보기는 어렵다.


4.5. 글래스-스티걸 법안 폐지[편집]


글래스-스티걸 법안(Glass-Steagall Act)으로도 불리는 1933년 은행법(Banking Act of 1933)을 폐지한 것도 실책으로 꼽히는데[18], 대공황의 원인이기도 한 은행의 고위험 투자를 막는 법을 폐지함으로서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의 분리가 의미 없어지고 후임자 조지 W. 부시 시절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세계금융위기의 경제난을 초래하는 데 기여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물론 빌 클린턴 혼자만의 작품이라기보다는 80년대 이래로 진행된 시대의 흐름을 따라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그러나 지도자로서 미래의 화근을 알아채지 못하고 남들과 똑같이 훗날 미국에게 큰 상처를 입히는 비극의 기반을 쌓아간 것은 사실이긴 하다. # 자세한 내용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빌 클린턴 문서의 r1414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빌 클린턴 문서의 r1414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0-18 21:10:07에 나무위키 빌 클린턴/평가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다만 이후에 이 정책은 동성애자들로 하여금 입 다물라는 정책이라는 비판을 받고 폐지된다. 물론 동성애자들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던 당시로서는 이것도 진일보한 거였지만...(그리고 동성애자들의 성향을 밝히지 말라는 것도 공화당과의 타협의 결과이기는 하다)[2] 여담이지만 코소보이슬람 신자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로부터 자국을 보호해 준 미국을 매우 각별하게 생각하며, 특히 코소보 공습을 단행한 클린턴에 대해서는 동상을 세우고 그의 이름을 딴 도로를 만들 정도로 영웅시하고 있다. 후임 아들 부시 역시 코소보 독립을 적극 지지했기에 클린턴만은 못하지만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문제는 코소보 공습을 결단한 시점이 자신이 르윈스키 스캔들로 코너에 몰려있고, 의회가 탄핵을 착착 준비 중이던 때라는 것. 이런 상황이 영화 'Wag the Dog'에서 비꼬이기도 했다.[3] 르윈스키의 배신감에도 불구하고 트립은 "애국자로서 해야 할 의무"라고 주장했다. 린다 트립은 클린턴 정부 교체와 동시에 펜타곤에서 해임을 당했고, 2004년 독일 출신의 건축가와 결혼했다. 그녀는 워싱턴 D.C. 교외에서 크리스마스 용품 판매점을 경영하며 여생을 보냈다. 2020년 4월 8일 트립은 췌장암으로 사망했고 트립이 위독하단 것을 안 르윈스키는 자신의 트위터에 "과거와 상관없이 트립이 회복하길 바란다. 그의 가족이 얼마나 힘들지 상상할 수 없다"란 글을 남겼다.[4] 이 사건의 여파로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고어는 미주리, 아칸소, 루이지애나, 플로리다(논란이 있기는 했지만), 오하이오, 뉴햄프셔, 애리조나, 네바다, 테네시, 켄터키, 웨스트버지니아 등 무려 11개 주를 공화당에게 내주며 패배했다.[5] 미국의 사법체계에서 법정에서 작정하고 한 위증죄는 엄청난 죄다. 미국에서 다른 대통령이 관여한 큰 사건인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리차드 닉슨을 사임까지 몰고 간 것도 '워터게이트 자체'보다는, 이에 관련해 닉슨이 거짓말을 한 것이 더 크게 작용했다.[6] 클린턴이 위증혐의를 변호하려고 본인이 법정에서 한 성교(Sexual Relationship)라는 말에 구강성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고 한 변론에서 나온 말이다.[7] 원문은 'Indeed, I did have a relationship with Ms. Lewinsky that was not appropriate.'[8] 존 올리버는 자신 또한 그런 흐름에 편승해 여성혐오적 농담을 한 것을 인정하며 사과하는 뜻으로 모니카 르윈스키를 쇼로 초청하여 인터뷰를 갖기도 했다. #[9] 이에 대해 아시아에서 미국과 일본의 경제적 이권다툼에서 한국이 희생양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아시아에서 미국과 일본의 대결[10] 미국.일본 방위협력지침 개정, 주변국들의 우려 높아져[11] 김대통령 핵,미사일 등에 대해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전화[12] 이때 파키스탄은 핵실험 이후 카슈미르의 인도 지역인 타이거 힐스를 공격하여 빼앗으면서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분쟁이 발생했다. 나중에 인도군의 반격으로 파키스탄은 패하여 타이거 힐스를 빼앗기고 후퇴하였다.[13]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개발 참조. 물론 바지파이 총리는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주었고 회담은 별탈없이 끝났다.[14] 클린턴은 자신이 아일랜드계 조상이 있어서 아일랜드 대선에, 또 "미국이 지난 1803년 프랑스로부터 사들인 땅의 일부인 아칸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프랑스 대선에 출마할 수 있다"라고 농담했다("과거 프랑스 식민제국 영토였던 곳에서 태어난 사람이면 누구든 프랑스로 이사를 가서 6개월간의 거주 요건을 충족하고, 프랑스어를 말할 수 있으면 프랑스 대통령 선거 입후보가 가능하"기 때문#). 물론 어디까지나 농담이었지만, 클린턴이 아일랜드에 쏟은 관심의 근거를 엿볼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15] 한국에서도 이에 맞물려 클린턴 집권기 시절인 1997년부터 초등학교 영어교육이 시작되었다.[16] 1:12초에 나온다.[17] 한반도 전쟁 발발시 청소년 3명중 1명 피난가겠다[18] 1999년 11월 12일 그램-리치-브릴리법으로 개정. 이후 2010년 오바마에 의해 상업은행의 자기 매매는 금지되었는데 이것을 '새로운 글래스-스티걸 법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