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샤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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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평화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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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2> 1901 ||<-2> 19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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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리 뒤낭]] || 프레데리크 파시 || [[엘리 뒤코묑]] || [[샤를 알베르 고바]]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03 || 1904 || 1905 || 1906 ||
||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 ||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1896-1908).svg|width=40]] ||
|| 윌리엄 크리머 || 국제법학회 || [[베르타 폰 주트너]] || [[시어도어 루스벨트]]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2> 1907 ||<-2> 1908 ||
||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width=40]]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40]] || [[파일:스웨덴 국기.svg|width=40]] || [[파일:덴마크 국기.svg|width=40]] ||
|| 에르네스토 모네타 || 루이 르노 || 클라스 아르놀드손 || 프레데리크 바예르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2> 1909 || 1910 || 1911 ||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40]] || [[파일:벨기에 국기.svg|width=40]] || - ||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width=40]] ||
|| 데스투르넬 드 콩스탕 || 오귀스트 베르나르트 || 국제평화국 || 알프레트 프리트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11 || 1912 || 1913 || 1917 ||
|| [[파일:네덜란드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40]] || [[파일:벨기에 국기.svg|width=40]] || [[파일:적십자 기.svg|width=40]] ||
|| 토비야스 아서르 || 일라이휴 루트 || 앙리 라퐁텐 || [[국제적십자위원회]]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19 || 1920 ||<-2> 1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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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드로 윌슨]] || 레옹 부르주아 || [[얄마르 브란팅]] || 크리스티안 랑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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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노르웨이 국기.svg|width=40]] ||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40]]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40]] ||
|| [[프리드쇼프 난센]] || [[오스틴 체임벌린]] || [[찰스 G. 도스]] || [[아리스티드 브리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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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 페르뒤낭 뷔숑 || 루트비히 크비데 || [[프랭크 켈로그]]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30 ||<-2> 1931 || 1933 ||
|| [[파일:스웨덴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40]] ||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 나탄 쇠데르블룸 || [[제인 애덤스]] || 니콜라스 버틀러 || 노먼 엔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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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width=40]] ||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width=40]] ||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 아서 헨더슨 || [[카를 폰 오시에츠키]] || 카를로스 라마스 || 로버트 세실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38 || 1944 || 1945 || 1946 ||
|| [[파일:국제연맹 기.png|width=40]] || [[파일:적십자 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 난센 국제난민 사무국 || [[국제적십자위원회]] || [[코델 헐]] || 에밀리 발치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46 || 1947 || 1949 || 1950 ||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40]] || [[파일:Quaker_star-T.svg|width=40]] ||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40]] ||
|| [[존 모트]] || [[퀘이커(종교)|퀘이커 봉사협회]] || 보이드 오어 || 랠프 번치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51 || 1952 || 1953 || 1954 ||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40]]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40]] || [[파일:UN기.svg|width=40]] ||
|| 레옹 주오 || [[알베르트 슈바이처]] || [[조지 C. 마셜|조지 마셜]] || 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57 || 1958 || 1959 || 1960 ||
||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svg|width=40]] || [[파일:벨기에 국기.svg|width=40]] ||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width=40]] ||
|| [[레스터 피어슨]] || 도미니크 피르 || 필립 베이커 || 앨버트 루툴리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61 || 1962 || 1963 || 1964 ||
|| [[파일:스웨덴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파일:적십자 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 [[다그 함마르셸드]] || [[라이너스 폴링]] || [[국제적십자위원회]] || [[마틴 루터 킹]]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65 || 1968 || 1969 || 1970 ||
|| [[파일:유니세프 로고.svg|width=40]]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40]] || [[파일:국제노동기구 로고.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 [[유니세프]] || 르네 카생 || [[국제 노동 기구]] || [[노먼 볼로그]]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71 ||<-2> 1973 || 1974 ||
|| [[파일:독일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파일:베트남 국기.svg|width=40]] ||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width=40]] ||
|| [[빌리 브란트]] || [[헨리 키신저]] || 레득토 || [[사토 에이사쿠]]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74 || 1975 ||<-2> 1976 ||
|| [[파일:아일랜드 국기.svg|width=40]] || [[파일:소련 국기(1955-1980).svg|width=40]] ||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 숀 맥브라이드 || [[안드레이 사하로프]] || [[베티 윌리엄스]] || [[메어리드 코리건]]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77 ||<-2> 1978 || 1979 ||
|| [[파일:국제앰네스티 로고.svg|width=40]] || [[파일:이집트 국기(1972-1984).svg|width=40]] || [[파일:이스라엘 국기.svg|width=40]] || [[파일:인도 국기.svg|width=40]] ||
|| [[국제사면위원회]] || [[안와르 사다트]] || [[메나헴 베긴]] || [[테레사 수녀]]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80 || 1981 ||<-2> 1982 ||
||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width=40]] || [[파일:UN기.svg|width=40]] || [[파일:스웨덴 국기.svg|width=40]] || [[파일:멕시코 국기.svg|width=40]] ||
|| 아돌포 에스키벨 || 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 || [[알바 뮈르달]] || 알폰소 가르시아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83 || 1984 || 1985 || 1986 ||
||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width=40]] ||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width=40]] || -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 [[레흐 바웬사]] || [[데즈먼드 투투]] || 핵전쟁방지국제의사회 || [[엘리 비젤]]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87 || 1988 || 1989 || 1990 ||
|| [[파일:코스타리카 국기.svg|width=40]] || [[파일:UN기.svg|width=40]] || [[파일:티베트 국기.svg|width=40]] || [[파일:소련 국기.svg|width=40]] ||
|| [[오스카르 아리아스]] || [[유엔 평화유지군]] || [[달라이 라마 14세]] || [[미하일 고르바초프]]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91 || 1992 ||<-2> 1993 ||
|| [[파일:미얀마 국기(1974-2010).svg|width=40]] || [[파일:과테말라 국기.svg|width=40]] ||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width=40]] ||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width=40]] ||
|| [[아웅산 수치]] || [[리고베르타 멘추]] || [[넬슨 만델라]] || [[프레데리크 빌럼 데 클레르크]]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3> 1994 || 1995 ||
|| [[파일:이스라엘 국기.svg|width=40]] || [[파일:이스라엘 국기.svg|width=40]] || [[파일:팔레스타인 국기.svg|width=40]] || [[파일:폴란드 국기.svg|width=40]] ||
|| [[이츠하크 라빈]] || [[시몬 페레스]] || [[야세르 아라파트]] || 조지프 로트블랫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95 ||<-2> 1996 || 1997 ||
|| [[파일:캐나다 국기.svg|width=40]] || [[파일:인도네시아 국기.svg|width=40]] || [[파일:인도네시아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 퍼그워시 회의 || 카를로스 벨로 || [[조제 하무스오르타]] || [[조디 윌리엄스]]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97 ||<-2> 1998 || 1999 ||
|| - || [[파일:아일랜드 국기.svg|width=40]] ||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파일:국경없는의사회의 로고.svg|width=40]] ||
|| 지뢰금지국제운동 || [[존 흄]] || [[데이비드 트림블]] || [[국경없는의사회]]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2000 ||<-2> 2001 || 2002 ||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width=40]] || [[파일:UN기.svg|width=40]] || [[파일:가나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 [[김대중]] || [[유엔]] || [[코피 아난]] || [[지미 카터]]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2003 || 2004 ||<-2> 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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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린 에바디]] || [[왕가리 마타이]] || [[국제원자력기구]] ||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2> 2006 ||<-2> 2007 ||
|| [[파일:방글라데시 국기.svg|width=40]] || [[파일:방글라데시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 ||
|| [[무함마드 유누스]] || [[그라민 은행]] || [[앨 고어]] ||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패널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2008 || 2009 || 2010 || 2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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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티 아티사리]] || [[버락 오바마]] || [[류샤오보]] || [[엘런 존슨 설리프]]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2> 2011 || 2012 || 2013 ||
|| [[파일:라이베리아 국기.svg|width=40]] || [[파일:예멘 국기.svg|width=40]] || [[파일:유럽 연합 깃발.svg|width=40]] || [[파일:화학무기금지기구 로고.svg|width=35]] ||
|| [[리마 보위]] || [[타우왁쿨 카르만]] || [[유럽연합]] || [[화학무기금지기구]]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2> 2014 || 2015 ||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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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랄라 유사프자이]] || [[카일라시 사티아르티]] || [[튀니지 국민4자대화기구]] || [[후안 마누엘 산토스]]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2017 ||<-2> 2018 || 2019 ||
|| - || [[파일:콩고민주공화국 국기.svg|width=40]] || [[파일:이라크 국기.svg|width=40]] || [[파일:에티오피아 국기.svg|width=40]] ||
|| [[핵무기 폐기 국제 운동]] || [[드니 무퀘게]] || [[나디아 무라드]] || [[아비 아머드]]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2020 ||<-2> 2021 || 2022 ||
|| [[파일:UN기.svg|width=40]] || [[파일:필리핀 국기.svg|width=40]] || [[파일:러시아 국기.svg|width=40]] || [[파일:러시아 국기.svg|width=40]] ||
|| [[세계식량계획]] || [[마리아 레사]] || [[드미트리 무라토프]] || [[안드레이 사하로프|메모리알]]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2> 2022 || 2023 || ||
|| [[파일:우크라이나 국기.svg|width=40]] || [[파일:벨라루스 국기.svg|width=40]] || [[파일:이란 국기.svg|width=40]] || ||
|| [[시민자유센터]] || [[알레스 발랴츠키]] || [[나르게스 모하마디]] || ||



류샤오보[1]
간체: 刘晓波 | 정체: 劉曉波
Liu Xiao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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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55년 12월 28일
지린성 창춘시
사망
2017년 7월 13일 (향년 61세)
랴오닝성 선양시
국적
[[중국|

중국
display: none; display: 중국"
행정구
]]

직업
작가, 학자, 반체제/인권 운동가
학력
지린대학 (중어중문학 / 학사)
베이징사범대학 대학원 (중어중문학 / 석사·박사)
수상
노벨평화상 (2010)

1. 개요
2. 생애
2.1.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다
2.3. 암 투병과 사망
2.3.1. 경과
2.3.2. 파장
2.3.3. 국내외의 반응
3. 평가
3.1. 긍정
3.2. 부정
3.2.1. 다른 의견
4. 여담



1. 개요[편집]


파일:/image/001/2013/05/29/PYH2012020903210034000_P2_59_20130529120244.jpg

중국의 작가, 학자, 반체제/인권 운동가. 2010년 중국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던 중국 민주화 운동의 아버지.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20세기 대표 인권 운동가 중 한 명이다.


2. 생애[편집]



2.1.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다[편집]


1955년 12월, 지린성 창춘시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가 청소년기이던 시절인 1966년에 문화대혁명이 일어났고, 류샤오보는 다른 중학생들처럼 상산하향 운동 시기에 강제로 하방되어 내몽골 시골로 내려가 삽질을 했다. 이후 문화대혁명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자 1974년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대학이 문을 닫았기 때문에 진학하지 못하고 다시 3년간 건설 노동자(즉 노가다)로 삽질을 했다.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문을 닫았던 대학은 다시 문을 열었고 지린대학[2] 중문과에 입학, 졸업했다. 이후 베이징 사범대학 대학원에서 중문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고, 문예창작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9년 천안문 6.4 항쟁(천안문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야말로 촉망받는 젊은 작가이자 학자였다. 천안문 6.4 항쟁 이전까지 스위스미국에서 중국철학과 중국 문화를 교수 자격으로 강의할 정도였다.

그러나 류샤오보가 하와이 대학교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체류하던 1989년 봄부터 정부에 항의하는 학생 운동이 벌어져 정세가 심상치 않자 이에 동참하기 위해 객원 연구원 계약을 해지하고 귀국한다. 이 당시 민주화운동가들과 학생들은 1987년 한국의 6월 항쟁승리소련의 서기장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자극받아 정부에 전면적 민주화 및 개혁을 요구했고, 천안문 광장에는 점점 농성자들이 불어나고 있었다. 이렇게 조국에 민주화 운동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자 류샤오보는 용감히 선봉에 서기로 결심한 것.[3] 류샤오보는 저우둬, 허우더젠, 가오신 등과 더불어 천안문 광장에서 지식인들을 대표해 단식 투쟁을 벌이며, 이들은 '천안문 사군자'라고 불리게 된다. 그리고 시위 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폭력적인 시위진압을 반대하고 평화 시위를 계속하겠다는 의미에서 진압군으로부터 노획한 총을 박살내는 퍼포먼스를 취하기도 했다.[4]

류샤오보는 시위대 대표로 중국 정부와 민주화에 대한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중국 지도부는 대부분 20년 전 학생이 주동이 된 홍위병에게 두들겨 맞거나 조리돌림당한 경험이 있었다. 사실 문화대혁명마오쩌둥에 의해 선동된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홍위병"을 자처하며 시작된 일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을 겪은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기본적으로 학생운동에 매우 부정적[5]이었다. 덩샤오핑이 유혈진압 며칠 후 나타나 "홍위병 난동의 재연을 어떠한 희생을 써서라도 막아야 했다"고 제2의 홍위병과 문화대혁명 방지를 핑계로 삼아 유혈진압을 정당화했을 정도. 유혈진압을 말리려다 실각한 자오쯔양의 회고록에 의하면 이 당시 강경파 지도부 대부분이 천안문에 모인 학생들에게서 20년 전의 홍위병의 망령을 떠올렸다고 한다.

덩샤오핑 및 일부 고관들의 결정[6]에 따라 천안문 사태는 곧 유혈진압되었다.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탱크와 총칼로 깡그리 깔아뭉갠 중국 공산당의 만행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공산당의 기득권을 내주기 싫었던 게 더 본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천안문 사태 당시 중국 공산당의 지도부가 학생 시위대를 '홍위병'과 동일시 하면서 자신들의 진압을 정당화했다고 주장하지만, 대등한 비교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홍위병은 마오쩌둥이라는 당대 최고 권력자의 선동을 받고서, 기득권층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권력을 휘두른 집단이었지만, 천안문 사태의 시위대는 어느 누구의 선동(물론 중국 공산당은 그렇다고 주장하겠지만)이 아닌, 자발적 의지에 의해, 당국의 강경 진압 위험까지 무릅쓰면서 나선 이들이었다. 차라리 비교를 하려면 1976년 저우언라이의 서거 직후, 마오쩌둥의 퇴진을 요구한 1차 천안문 사건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류샤오보는 사태 진압 후 체포되어 소요 사태 주동 혐의로 2년형을 받는다. 사실 류샤오보는 천안문 항쟁 당시에도 온건파였다. 즉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서 일단 집회를 해산하고 정부의 행동을 지켜보자는 주장을 취했다. 하지만 항쟁 지휘부는 대부분 해산 불가를 주장한 강경파였고, 결과적으로 정부와의 강대강 대립 끝에 정부의 유혈진압이 펼쳐진다.

대부분의 천안문 항쟁 주동자들이 미국의 주선 및 중국 정부와의 사법거래형집행정지 후 해외추방형식으로 망명을 떠났다. 류샤오보도 복역당시 해외망명을 떠날 수 있었지만, 복역을 마친 후에도 국내에 남아 민주화 운동을 그치지 않았다. 당시 중국은 "엄타(严打)"라는 시책을 펴서 개혁개방 후 급속도로 늘어나는 중범자들에게 마구잡이 사형을 선고하고 있었기 때문에[7] 서양에서는 천안문에서 유혈진압을 펼친 중국 당국이 체포자들에게 피의 보복을 할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덩샤오핑중국 공산당은 "민주화는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개혁개방 정책은 계속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사회 분위기를 너무 경직되지 않게 하고, 서양 눈치도 봐서 체포자들에게 크게 무거운 벌을 내리지는 않았다. 주동자급도 10년 이하를 선고했고, 그나마 해외망명 희망자는 추방하는 형식으로 보내버렸다. 이로 인해 아이러니하게도 해산불가를 외친 강경파들 대부분이 해외망명을 떠났음에도, 온건파인 류샤오보는 조국에 남아 투쟁을 계속했다.

류샤오보는 단식투쟁을 하면서 천안문 사태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한편, 각종 집필 활동으로 중국의 민주화와 인권활동을 활발하게 진행했다. 그리하여 다시 사회불안조장 혐의로 1995년 다시 체포되어 6개월 형을 받았다.

사실 이 당시 서양각국이 천안문 학살을 이유로 중국에 여러 제재를 가하면서 교류를 중단시키는 바람에 중국은 1990년대 초반 상당히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현재 중국이 자국의 민주화나 인권을 거론하는 다른 서양국가들에게 보란듯이 여러 보복을 하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 이 때 끊어진 여러 교류는 시간이 가면서 거의 회복되었지만, 군사교류 만큼은 아직까지도 회복이 안 되고 있다. 중국 공산당 내 일부 보수파들은 천안문 항쟁의 폭발력과 소련이 망하는 것을 목격한 후, 개혁개방을 거두고 사회주의적 경제체제로 회귀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급진개혁도 거부했지만, 이런 수구적인 생각도 거부했고, 후계자로 능력이 검증된 장쩌민을 앉혀 지속적으로 경제개혁을 추진했다. 1992년 한중수교와 아키히토 일본 천황의 중국 방문이 이루어진 것도, 북방정책을 펴던 한국과, 서양과의 교류가 소원해져서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경제적 돌파구를 뚫으려던 중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2번째 복역 이후에도 민주화 운동을 그치지 않았고, 당연히 중국 당국이 이런 류샤오보를 그냥 놔 둘리가 없었다. 1996년 사진작가였던 류샤와의 결혼 직후 다시 체포되어 노동개조형 3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라오가이(勞改)라고 불리는 노동개조형은 한 마디로 말해서 중국판 삼청교육대로 단순히 가둬 두는 게 아니라, 만주 북부나 중국 서부지역의 사막이나 황무지에서 혹독한 노동을 수반하는 것으로서, 문혁 이후에는 지식층이나 사상범에는 거의 선고되지 않았지만[8] 류샤오보의 운동은 당국의 심기를 긁어 이렇게 주로 파렴치범에게 내려지는 무거운 형벌을 선고받은 것이다.

류샤오보는 3번의 복역에도 그치지 않고 2008년에는 중국의 민주화 개혁을 요구하는 08헌장[9]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다가 국가 전복 선동 혐의로 징역 11년형을 선고받았다.

사실 이전의 감옥살이는 그다지 길지 않았는데, 이번에 길어진 것은 08헌장에 상당히 많은 지식인들이 동참했기 때문이었다. 이전에는 류샤오보를 그저 서구 지향의 반항아 정도로 생각했던 중국 당국이 이제는 류샤오보가 반정부세력의 구심점이 될 수 있다는 위협을 느낄만 했고, 이후 류샤오보는 랴오닝성 진저우 시[10]의 감옥[11]에 수감된다.


2.2. 노벨평화상 수상[편집]


옥중이던 2010년, 노벨평화상의 수상자는 류샤오보로 선정되었다. 당연히 중국 정부는 길길이 날뛰면서 노벨상 선정 위원회에 항의했고, 이어 중국의 우방국들과 비서방 국가들이 이런 항의에 동참했다. 러시아, 베네수엘라, 파키스탄, 베트남, 이집트, 쿠바, 수단 공화국, 모로코 등이 중국의 입장에 동참하여 항의성명을 냈다.#

2010년 12월 10일 시상식이 진행되었지만, 중국 정부가 류샤오보 본인은 물론 대리수상을 막기 위해 류샤오보의 모든 가족, 친척들과 인권운동가 등 수백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몽땅 출국 금지시키는 치졸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결국 공석으로 진행되었다. 노벨위원회 측에서는 타국에서 활동하는 중국 인권 운동가에게 대리 수상을 시킬 수도 있었지만, 특별히 상징적으로 빈 의자에 노벨 평화상 메달을 수여하였다. 받은 이유는 비폭력 투쟁을 해서이다. 빈 자리에 노벨평화상을 수여한 건 나치 독일 히틀러 시대 이후 처음이며,[12] 현장에 참여했던 인원들 전원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3분 동안 기립박수를 쳤다.

류샤오보가 참석하지 못한 노벨평화상 시상식장에서는 토르비에른 야글란(Thorbjørn Jagland) 노르웨이 노벨상 위원회장이 연설을 하였다. 20분 경에 기립박수가 한 번 터진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국가도, 국가 내부의 주류 집단도 무제한적인 권력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인권이야말로 그들이 가진 권력의 범위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국제연합의 모든 회원국이 따라야 할 것이고, 더 나아가 전 세계적인 선언으로 확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중략) 중국의 헌법조차도 기본적인 인권을 인정합니다. 중국 헌법 35조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시민들은 연설, 언론, 집회, 결사, 시위의 자유를 보장받는다'라고 규정합니다. 41조는 시민들에게 국가기관을 비판하거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류는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했을 뿐이고,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류는 석방되어야 할 것입니다.

연설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는다.

아이작 뉴턴은 생전에 '내가 더 멀리 볼 수 있다면, 그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것은, 긴 세월동안 때로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도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일어서서 우리에게 자유를 이끌어낸 수많은 이들의 어깨 위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른 많은 이들이 돈을 세면서 눈앞의 국익만을 쫓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할 때,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다시금 우리 모두를 위해 싸워준 이를 지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류샤오보의 2010년 노벨평화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류의 시각이야말로 결국에는 중국을 굳건하게 다질 것입니다.

연설 전문은 여기서 읽을 수 있다.

이후 세계 곳곳에서 류샤오보에 대한 석방 요구가 빗발쳤지만 중국 정부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리고 2012년에 모옌노벨문학상을 받게 되자, 중국 언론들은 모옌을 대대적으로 칭송하는 한편[13] 류샤오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으면서 노벨상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2017년 6월에 안타깝게도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아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결국 병마와 싸우다 그 해 7월 13일 사망했다.


2.3. 암 투병과 사망[편집]



2.3.1. 경과[편집]


2017년 6월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간암 말기로 투병 중이라고. 이후 보도로 암 세포가 전신에 퍼져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이 알려졌다. 중국 당국은 "교도소에서 정기검진과 적절한 치료를 해주었으며, 가석방 후 치료도 도와주고 있다"보도했다. 말기 암에 시달릴 때까지 아무 말도 없었고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중국 공산당의 제제로 접촉에 제한이 많기에[14] 정말 적절한 치료와 검진을 받았는지는 의문이다.

류샤오보의 가족 측에서는 "독일로 출국하여 치료를 받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지만, 중국 당국은 거부하고 있는 상태다. 건강 악화로 장거리 비행을 견디기 힘들다는 것이 명목상의 이유. 하지만 중국 당국은 그가 이국 땅에서 사망하면, 중국 내에서 사망할 때보다 훨씬 더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부각될 것을 두려워하는 듯하다. 이미 그 전에 출국금지 조치까지 내린 터라...

류샤오보는 자신은 아니더라도 아내가 외국에서 더 자유롭게 살기를 바랬기에, 외국에서 치료를 받으며 아내를 데려가 연금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어했다. 류사오보의 걱정대로 그의 사망에도 아내인 류샤의 출국금지와 가택연금 상태는 풀리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은 그녀가 새로운 민주화 상징으로 거듭날까 우려하는 것. 류사는 지난해 아버지 사망, 올해 어머니 사망으로 우울증세가 심했고 남편의 죽음에도 가택연금상태여서 많이 쇠약해졌다고 한다.#

정작 노벨평화상을 준 노르웨이는 형식적인 논평을 내어, 중국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비난이 거세게 쏟아진 상황이다.# 결국은 2010년 중국의 연어 수입 금지로 노르웨이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AIIB 가입을 계기로 중국이 조금씩 풀어주었지만, 노르웨이 정부는 류샤오보를 옹호하다가 다시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기 때문에, 발을 뺐다.

2017년 7월 초, 미국에 망명 중인 반중 민주화 운동가 양젠리(楊建利. 천안문 사태 당시 생존자)가 "류샤오보의 병세가 위중하다"고 트위터를 통해 밝혔다. 배에 복수가 차고, 투약 등의 치료조차 중단할 정도로 악화되었다고. 류샤오보는 현재 랴오닝 성 선양의 대학병원에 입원 중이며, 병원 측은 "외국 치료를 불허하는 대신 미국과 독일의 의사를 초빙하는 것은 허가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간 기능 저하로 더 이상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상태이며, 가족들은 의료진의 진단 결과를 전해 듣고 밤을 새우며 병상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그 뒤로 당국이 가족 면회도 허용했다. 그리고 병세가 급격히 악화해 호흡 곤란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결국 2017년 7월 13일 오후 9시(한국시간 10시) 선양에서 다발성 장기 기능 상실로 인해 별세했다. 향년 61세.# 별세 직전 부인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은 "당신은 잘 살아야 하오(好好活下去)"였다고.#

그가 죽은 지 3일 후인 7월 15일, 유해가 화장되어 보하이 만에 뿌려졌다. 링크 당초 부인 등 친족들은 자택과 가까운 베이징 근교에 묻히길 바랬지만, 그의 묘지가 반체제 인사들의 성지가 될 것을 경계한 중국 당국의 불허로 무산되었다.[15] 대신 생전에 그와 정치적으로 견해를 달리했던 형의 수용으로 화장이 실행됐다.

7월 19일 기사로 부인인 류샤를 강제 여행 조치를 해서 윈난성[16]에 보냈다고 한다. 심지어 중국 전통 풍습인 두칠(頭七)[17]마저 못하게 하는 상황이다.

1개월 후인 8월에는 역시 반체제 인사인 작가 양톈수이(楊天水)가 뇌종양 판정을 받고,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이번에도 반체제 인사들을 치료를 제대로 못받게 방치하다가, 의학적으로 가망이 없어지니 선심 쓰듯 병 보석으로 석방시키는 방식으로 제거하는 행태가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2018년 7월에 류샤오보의 부인 류사가 자유의 몸이 되어 사실상 독일로 망명하였다.# 이러한 중국 정부의 행동이 2018년 미중 무역 전쟁에서 미국을 맞서기 위해 유럽연합의 힘을 얻고자 하는 제스처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2023년 6월에 공식석상에 오랜만에 등장했다.#


2.3.2. 파장[편집]


사실 간암으로 진단받았다면 더 빨리 석방될 수도 있었겠지만, 누가봐도 치유가망이 없는 말기암 상태로 석방된 것은 중국 지도부가 그가 빨리 세상을 떠나기를 희망했기 때문일 것이다.

류샤오보가 복역한 만주 지역은 중국에서도 상당히 낙후된 지역이며[18], 그나마 외국의 눈치를 봐서 개선하는 척 하는 해안지역과는 달리 수형시설이나 재소자 인권도 1970년대 수준에 머물고 있다. 원래 B형 간염 환자였던 류샤오보가 이런 곳에서 복역한다는 것은 당연히 무리였고, 결과적으로 중국 지도부는 간염이 간암으로 악화되기를 바랐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듯.

이는 베니토 무솔리니안토니오 그람시를 처형하지는 않았지만 감옥에서 가혹하게 다루다가 사망 직전 석방한 것, 아돌프 히틀러가 1935년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카를 폰 오시에츠키를 옥사하게 만든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듯 류샤오보의 죽음은 천안문 학살과 더불어 중국 공산당의 인권 유린의 흑역사로 길이 남을 것이다.

역대 노벨평화상 수상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수상 이후 생전에 자신들의 투쟁이 거둔 성과를 볼 수 있었거나 성과를 보고 수상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넬슨 만델라, 레흐 바웬사, 빌리 브란트, 아웅산수지, 안드레이 사하로프, 김대중 등. 그러나 이들 가운데 중국과 맞선 류샤오보는 끝내 자신의 투쟁이 결실을 맺는 것을 못 본 채 옥중에서 영면했고, 역시 중국에 맞서 망명 중인 티베트달라이 라마 14세(1989년 수상자)도 이미 80살이 넘은 고령이 되어 전망이 어두운 실정이다. 그만큼 중국의 압도적 국력, 인권 운동에 대한 집요한 탄압의 방증이기도 하다.


2.3.3. 국내외의 반응[편집]


대만차이잉원 총통은 곧바로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중국의 꿈(中國夢)이 민주주의라면, 대만은 중국 대륙에서 이를 실현하는 과정에 필요한 협조를 제공하겠다(如果中國夢是民主,台灣會在中國大陸實現中國夢的過程中,提供必要的協助)."는 말도 함께 덧붙였다.

당연히 중국 정부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있다. 특히 대만 정부의 애도 성명에 대해서는 "양안관계를 악화시키는 위험한 짓"이라고 비난했다. 덧붙여 "중국 정치·경제·사회의 발전에 대해서는 오로지 '중국 국민'만이 발언권이 있다"면서, 류샤오보의 죽음에 따른 국제적인 비판을 내정간섭으로 규정, 거부할 것임을 천명했다.

시나 웨이보 등지에서는 사망 직후 그의 이름이 금지어로 지정되었는데, 이에 네티즌들이 주어 없이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식으로만 메시지를 올리자 RIP라는 멘트 자체를 금지어로 지정해 버렸다. 이때 javascript[19]가 같이 금지어가 돼 버려서 중국 프로그래머들이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중국의 영향권이지만, 표현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된 홍콩에서는[20] 거리에 마련된 빈소에 조문객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3. 평가[편집]



3.1. 긍정[편집]


중국 공산당의 독재를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이들은 여럿이지만, 그 중에서도 류샤오보가 주목받는 이유는 크게 2가지로 나뉜다.
  • 첫째, 개인의 안위를 포기한 채, 스스로 어려운 길을 선택한 점이다.
위의 이력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여러 번 학자로서 중국 공산당 당국과 야합하거나 해외로 나가 외국 대학에서 고액 연봉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과거와 완전히 달라진 위상의 현대 중국에 맞서 싸우는 투쟁은 육체적/정신적으로 매우 가혹하기 때문에, 이런 유혹에 넘어가서 유연한 비판만 하는 쪽으로 돌아선 생각 있는 지식인들도 매우 많았다.[21] 그러나 그는 조국에 돌아와 독재와 불의에 항거했다. 그 가운데는 1989년 천안문 사태 당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싸운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천안문 4군자라고 불렸던 류샤오보, 허우더젠(侯德健), 저우둬(周舵), 가오신(高新) 중에서 저우둬와 가오신은 전향하여 현재 공산당의 관변학자로 활동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다.#[A] 이를 보도한 둬웨이뉴스는 반중화교들이 운영하는 다른 인터넷 언론들(보쉰, 대기원시보, 칸와 디펜스)과 마찬가지로 신뢰도가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둘 다 천안문 항쟁 이후 정부의 회유에 넘어갔거나 적어도 타협한 것은 확실하다. 천안문 항쟁 이후 공개적인 민주화 관련 활동이 별로 없기 때문. 물론 저우둬는 아주 양심을 저버리지는 않았는지, 민주화 운동의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연구자로서 당에 개혁을 촉구하는 논문을 여러 편 썼다고 한다. 가오신은 철저히 침묵하고 있으며, 근황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BBC에 의하면 미국 망명중이라고 하며, 다른 소스로는 중국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가수이자 작곡가였던 허우더젠(후덕건)은 고향인 대만으로 돌아간 후 정치에 일체 침묵하고 음악에만 몰두했다. 후에 2011년에서 놀랍게 베이징에서 중국 당국의 허가를 받고 콘서트를 열었는데, 그때 기자들에게 "난 중국 민주화나 중국 인권에 관심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허우더젠은 대만 출신이었으나 1980년대 후반 중화권 전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하여튼 당시 중화권 가요계에서 떠오르는 작곡가이었고, 절대로 듣보잡 음악인이 아니었다. 약관 20살(1976년) 나이에 중화민국의 유명한 애국가요인 <용의 전인>을 작곡한 것으로 잘 알려지기도 했다. 원래 이 양반의 음악은 민요에 기반을 둔 것인데, 자기 음악의 원류를 찾으러 1983년 중국 대륙을 방문했다가, 아예 눌러 앉았다. 사실상 망명한 것. 당시는 냉전기라서 귀순자가 그렇듯이 중공 정권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22] 1989년 민주화 운동이 벌어지자 여기에 편승해 시위대 편에 섰지만, 학살이 벌어지자 호주 대사관으로 망명신청을 한 뒤에 고향인 타이완으로 다시 도망쳤다. 이 양반은 타이완에서 결혼한 후, 이혼도 제대로 하지 않고 대륙에서 다른 유명 가수 청린(程琳)와 동거하다가, 다시 애인을 남겨두고 타이완으로 망명한 후, 3번째 애인과 동거했다. 게다가 2018년에는 <중국몽(中国梦)>이라는 딱 봐도 시진핑의 정책에 아부하는 노래를 작곡한 바 있다. 요약하면 류샤오보 이외에 3명은 모두 변절한 상태로 봐야 한다. 중국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인 천안문 4군자의 마지막 등불이었던 셈.

  • 둘째, 상대적으로 안전한 해외망명 활동 대신, 뻔히 고난이 예상되는 모국에 머물러 투쟁을 계속했다는 점이다.
천안문 항쟁 지도부는 대부분 베이징대, 칭화대, 베이징사범대 등의 명문대생이 많았던데다가 서양에서 찬양하는 민주화 운동의 경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미국 망명 후 하버드 대학과 같은 명문대에 쉽게 입학할 수 있었다.[23] 이들은 서양에서 교수나 컨설턴트라는 안락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가 중국인권 문제가 불거지면 가끔씩 성명이나 발표하고 집회를 열거나, 미국 의회에서 증언하는 정도로만 활동한다. 하지만 중국에 남아 저항하는 사람들은 생계의 위협 뿐만 아니라 혹독한 감옥살이를 10여년 이상씩 해야 하니 류샤오보처럼 자국에 남아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것은 정말로 살신성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천안문 민주화 운동의 주요 인물들인 왕단, 우얼카이시, 차이링은 망명 후에 미국으로 도피, 하버드 대학교라는 미국 최고 수준의 대학에서 수학한 뒤 대학 교수, 작가, 회사 CEO 등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다. 물론 중국의 민주화와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강경한 비판을 고수하고 있으나, 말 그대로 생명을 불사르며 싸운 류샤오보에 미친다고는 할 수 없다. 류샤오보 자신도 계속 복역과 석방을 되풀이했다. 이는 천안문 항쟁 관련자들 일부가 해외 망명을 선택한 후 민주화 운동에서 손을 떼고 침묵하거나, 돈벌이에 급급하거나 혹은 심지어 흑화하여 서양 혐중 세력이나 일본 극우에 이용되는[24] 것에 비하면, 이분의 행보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변태고초(变态辣椒)[25]라는 필명을 쓰는 반체제 시사만화가 왕리밍(王立铭)은 중국 당국을 비판하다가 일본 망명을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후 일본 극우와 연합했다.

즉 류샤오보는 단순히 옳은 소리를 하는 논객을 넘어, 자신을 버려가며 진정한 의미에서 중국 인민들의 공화국을 구현하려고 하였으며, 그리고 고국을 정말로 자유롭고 좋은 나라로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류샤오보는 당에 예종(隸從)하는 것이 결코 중국을 사랑하는 길이 아니라는걸 삶을 통해 보여줬다. 따라서 공산당 당원들이 아니라 류샤오보야말로 중국의 위대한 애국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류샤오보는 중국 민주화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기 때문에, 서양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게다가 류샤오보의 민주화 운동은 테러나 무장봉기가 아니라 시위나 항의와 같은 평화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일당 독재국가인 중국의 법률로도 사형같은 극형을 언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국 정부가 류사오보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이를 받아들일 시 공산당은 해체하거나 혹은 다당제를 인정하고 같이 선거를 해야 하는데 이는 중국 공산당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체 게바라피델 카스트로를 생각하면 된다. 이들은 쿠바 혁명에 결정적 역할을 한 영웅들이지만 혁명 성공 이후의 행보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체 게바라의 경우 1967년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해 총살당한 후 말 그대로 혁명의 아이콘이 되었으나, 피델 카스트로는 장기집권을 하면서 현실 정치인으로서의 장단점이 드러난데다가 일단 장기 집권을 한 독재자라는 오명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26] 류샤오보가 계속 살아있으면 언젠가는 실수를 할 수도 있으며[27], 거기에 따른 비판도 나오고 지지를 철회하는 자들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류샤오보를 없애버리면 그는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가 중국 공산당에 목숨을 잃은 순교자, 중국 민주주의의 영원한 상징이 된다. 일례로 현재 이란 정부가 시린 에바디 변호사를 죽이지 않고, 1970, 80년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펼치던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가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과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를 죽이지 않고, 1990년대, 2000년대 당시 미얀마 군사정권이 아웅 산 수지 여사를 죽이지 않고 투옥이나 감시, 가택연금 조치를 내린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1960년대 이후 유럽 공산 정권들은 반대파를 감시하고 탄압하기는 했지만, 루마니아알바니아[28]를 제외하면 그 탄압의 정도는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소련의 반체제 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가택연금, 반체제 작가 솔제니친은 국외추방. 그 외의 반체제 운동가들도 혐의가 중대했을 경우에도 체포해서 몇년 가두는 정도였다. 자유노조 운동을 벌였던 폴란드 레흐 바웬사 전 대통령도 계엄령후에 군부정권이 들어선 이후, 1년 남짓 가택연금을 당했을 뿐이다. 냉전시절 한국에서는 북한 때문에 사회주의 국가는 대부분 북한식인 것처럼 선전해서 그렇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29]

물론 아돌프 히틀러 집권기의 독일[30], 이오시프 스탈린 집권기의 소련이나 마오쩌둥 집권기의 중국, 이디 아민 집권기의 우간다, 폴 포트 집권기의 캄보디아, 현재 김씨 왕조 치하의 북한 같은 국가들 같으면 류샤오보를 대놓고 암살 내지는 사형시키거나 정치범 수용소로 끌고 간 다음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현재 중국은 인권이나 아시아 주변국들에 대한 패권주의 행사등 국제적으로 비판을 받을지언정 그보다는 훨씬 열려 있고, 어느 정도 대외적 이미지도 고려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민주화 운동가들을 감옥에 투옥하거나 가택연금을 내릴지는 언정 함부로 사형시키지는 않는다.


3.2. 부정[편집]


It took Hong Kong 100 years to become what it is. Given the size of China, certainly it would need 300 years of colonization for it to become like what Hong Kong is today. I even doubt whether 300 years would be enough. To choose westernization is to choose to be human.

지금의 홍콩이 생기기까지 100년이 걸렸다. 그 크기를 감안하면, 중국이 오늘날의 홍콩처럼 되려면 300년간 (서구의) 식민지배를 받아야할 것이다. 솔직히 300년도 부족하지 않은가 싶다. 서구화를 택하는 것은 인간이 되기를 택하는 것이다.

― 류샤오보, 1988년의 인터뷰에서


ICL-제국주의의 개, 류샤오보 [31]

그는 1988년 11월 27일 홍콩 월간지 인터뷰에서 "어떤 환경에서 중국이 변화를 이룰 수 있느냐"는 물음에 위와 같이 답변했으며, 같은 인터뷰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중국은 중국인들이 자초한 것이며, 이것은 인종과 관련되었다."인종주의적인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2006년 같은 잡지의 기고문에서 18년 전 자신의 발언이 즉흥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발언 자체를 철회하지는 않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인으로서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생각날 수 있는 위험한 부분.

중국 공산당에 정면으로 맞서 싸운 그의 용기와는 별개로, '류샤오보는 반서방 진영에 맞서고자 서방세계의 문제점들에 침묵했던 인물이니까, 서방 세계의 힘으로 탄압받을 사람들에게는 설득력이 없을 거다.'라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도 그는 생전에 미국이라크 전쟁,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을 두둔했던 바 있다. 대기원시보(중문판) 이런 사실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류샤오보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을 때, 중국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건 다 좋은데, 문제는 그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라기엔 너무 많은 전쟁을 지지하지 않았느냐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3.2.1. 다른 의견[편집]


위의 부정적 평가들 또한 그가 천안문 사태의 좌절을 겪었다는 맥락을 무시하고 비판할 수는 없다. 자유와 개혁을 외쳤던 중국시민들의 의사는 중국군의 탱크 앞에 무너져버렸다. 힘 앞에서 시민의 의사가 깡그리 엎어지고 만 것이다. 억압적 독재정권은 결코 스스로 붕괴하려 하지 않으며 무슨 수든 쓰려고 한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선량한 민주주의 강대국'이 천안문의 시민과 같은 선량한 민주주의 요구자들을 대신 보호하고 억압자를 분쇄할 필요성이 요구된다. 이런 상황에서 류샤오보는 억압자를 무너뜨리기 위해 강력한 해방자의 존재가 불가피하다고 봤을 것이다. 미국의 여러 전쟁들을 지지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32][33] 게다가 류샤오보의 유력한 지지기반은 중국 민주화를 지지하는 영미권 인사들의 전반적인 호의였기에, 서방세계에 존재하는 어두운 면들까지 그가 깊이 살펴보고 그 비판 행동에까지 나서기는 어려웠을 수밖에 없다.

네이버 지식백과에는 '세계 정세에 대한 류샤오보의 일련의 발언은 그가 세계를 여전히 냉전적인 이분법 속에서 보고 있다는 한계가 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사실 중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는 일부 세력(특히 일본 극우나 미국의 네오콘)중에는 다른나라의 독재나 인권탄압에는 눈을 감으면서도 특히 중국의 독재만을 문제삼으며 민주화 운동으로 중국의 국력이 약해지거나 중국 체제가 붕괴되기를 희망하는 세력이 있는 것이 사실인데다, 아랍의 봄처럼 민주화가 혼란을 불러온 예시도 있어서[34] 이런 국뽕으로 민주화 운동을 매도하는 선전은 의외로 중국에서 잘 먹히고 있다. 참고로 이 수법은 한국의 독재자들이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친북", "좌경", "용공"으로 몰았던 방법과 상당히 유사하다. 6.25 전쟁 때의 경험으로 레드 컴플렉스가 있는 한국국민들처럼, 아편전쟁 이후 100여년간 서방과 일본의 제국주의에 시달렸던 중국인민들은 서방-일본 세력에 상당힌 두려움과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당은 민주화운동이나 인권운동을 서방세력에 연결된 매국행위로 매도하고 있으며, 중국인들 상당수가 이에 동조하는 지경. 외부의 위협을 내세워 반대파를 억누르고 독재를 정당화하는 것은 동서고금의 독재자나 폭군들이 즐겨했던 수법이다.


4. 여담[편집]


공자는 정치가들을 찾아다니다가 실패하자 결국 도덕의 교주가 되었다. 그가 스승 되길 좋아하고 스승을 자처했던 것은 거만하고 천박한 인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자는 태평할 때 세상에 나오고 난세에 숨는 처세의 대가였고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였다. 가장 교활하며 가장 실리적이며, 가장 세속적이며 무책임한 정신의 소유자 공자가, 수천 년을 이어 온 중화민족의 성인이자 모범이라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 위 발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상당한 유교 비판론자다. 다만 류샤오보의 이 주장은, 폄훼적인 주장 자체만 나열되어 있을 뿐, 적어도 이 인용문 내에서는 어떠한 논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공자는 태평할 때 세상에 나오고 난세에 숨는 처세의 대가였고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였다."는 대목은 그냥 틀린 것인데, 이 주장대로라면 공자는 "정치가들을 찾아다니다가 실패"할 일도 없이 그냥 은둔형 외톨이로 살았어야 하며, '공자'로 이름이 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공자는 당시로서는 이미 묫자리 알아 봐도 자연스러운 나이인 50대 중후반부터 중국 천하에 (仁)을 실현하겠다는 일념으로 춘추전국시대의 혼란 하의 중국을 13년 동안 방랑하면서 전란에는 예사로 휘말리고, 광(匡) 땅에서는 포위되어 굶어죽을 위기도 겪었던 사람이다. 이때 공자의 말이 《논어(論語)》〈자한(子罕)〉에 있다: "문왕(文王)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으나, 문(文)은 여기 있지 않느냐. 하늘이 장차 이 문을 멸하려 한다면, 뒷날 죽는 사람도 더불어 이 문을 얻지 못하리라. 하늘이 아직 이 문을 멸하려 하지 않는다면, 광(匡) 땅 사람들인들 나를 어찌하겠느냐." 이것이 사실이라면 공자는 굶어죽어가는 와중에도 인문(人文)에의 신념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류사오보가 보여준 삶에 대한 태도와 굉장히 닮아 있는 것이다.
  • 자식이 없는데, 자신의 민주화 운동으로 아이까지 연좌제에 휘말릴까봐 아예 갖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많은 독재 국가에서는 가족들을 인질로 삼아서 협박, 회유를 하거나 가족에게도 위해를 끼치는 경우가 많다.
  • 중국 바이두에 류샤오보를 검색하면 의외로 항목 자체는 있다. 물론 노벨평화상 수상자라는 설명은 전혀 없고, 류샤오보가 CIA의 간첩이라는 거짓 내용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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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한자음은 유효파.[2] 학생 정원이 10만명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 대학이며, 만주 지역의 최고 명문이다.[3] 물론 그 전에도 1988년 11월에 마오쩌둥의 정치적 실책을 비판하고 마오쩌둥을 지옥에서 굴러 들어온 악마에 빗대 비판하는 논설을 쓸 정도로 강단 있는 지식인이었다. 사실 현대 중국에서 마오쩌둥이 저지른 여러 실책들에 대한 비판은 중국 공산당의 정통성을 건드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 어느 정도 가능하다. 덩샤오핑 시대부터 문화대혁명 자체는 마오쩌둥의 잘못으로 넣고, 업적으로 넣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주요 부하 출신이긴 하나 마오쩌둥의 총애를 받는 후계자는 아니었다. 후계자를 더 뛰어난 정치력의 덩샤오핑이 강제로 밀어내고 패권자가 된 것이다.[4] 2017년 7월 한국을 방문한 천안문 항쟁의 지도부 출신 망명객인 우얼카이시는 류샤오보가 당시 항쟁 지도부의 스승으로서 시위가 평화적으로 흐르는 것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증언했다.# 우얼카이시는 현재 대만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정치평론가 생활을 하고 있다.[5] 현대 중국 공산당도 문화대혁명에 대해 매우 이중적인 태도를 지닌 집단이다. 중국에서는 문혁을 너무 찬양해도 죽고, 너무 비판해도 죽는다. 비판하다 털린 대표적인 인물은 태자당의 1순위였던 보시라이다. 정치적 비리가 다 잡혀서 무기징역까지 받았는데, 비리야 조작된게 아니라 실제로도 많았지만 다른 공산당 고위 간부들도 그런 사람들이 얼마든지 넘치게 있고, 문혁에 대해 자꾸 떠들지만 않았어도 총리에게 공식적인 수사 표적으로의 저격을 당하면서 표적수사를 당했을 리는 없다. 결국 2순위였던 시진핑이 태자당계열 권력 1순위로 꼽히며 부주석의 자리를 차지했고, 공청단계열인 당시 주석 후진타오가 임기대로 물러나자 주석이 되었다.[6] 하지만 공산당 지도부가 모두 유혈진압을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자오쯔양 말고도 여러 고관들 및 인민해방군 고위 지휘관들이 "어떻게 인민해방군이 비무장한 인민에게 총부리를 돌리냐"고 항의하다가 몇몇은 파면되고 일부는 체포되기도 했다.[7] 이 당시 사형에 처해지는 사람은 매년 2만 명이 넘었다.[8] 중국유교적 전통이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선비의 후예로 간주되는 지식층에게는 가벼운 형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 천안문 사태 때만 봐도 체포된 대학생들은 주동자급이라도 일반인들보다 훨씬 가벼운 형량이 내려졌고, 해외망명도 용이했다. 선비나 지식인을 콕집어 탄압한 왕은 업적이 있더라도 후세에 길이길이 폭군으로 비난을 받는데, 이 중 대표적인 인물들이 진시황, 조조, 마오쩌둥.[9] 체코의 77헌장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헌법을 개정하여 다당제, 사상, 인권, 집회의 자유, 사유재산을 보장하라는 것이다. 만여 명의 중국 지식인이 서명했고, 이중에는 저명한 학자와 지식인들 다수가 포함되어 있다.[10] 산해관에서 수십 km 정도 동북쪽에 있다.[11] 한국은 교도소, 일본은 형무소란 표현을 공식으로 쓰지만 중국은 지금도 정식명칭이 감옥이다.[12] 이 때의 수상자는 카를 폰 오시에츠키였으며, 시상 당시 수감상태여서 1936년이 되어서야 상을 받을 수 있었다.[13] 사실은 2000년에 가오싱젠노벨문학상을 받은 전적이 있다. 다만 가오싱젠은 1980년대 말 이미 프랑스로 망명했으며, 이후 1998년에 프랑스로 귀화해 수상 당시에는 프랑스 국적이었다. 가오싱젠의 작품은 1989년 천안문 사태를 다룬 <도망> 발표 후 중국에서 모두 금서로 지정되어 있다.[14] 외국 의료진의 외국에서의 치료 제안도 나중에야 전해졌다고 한다.[15] 천안문 사태 당시 시위대에 동정적인 입장을 취했던 자오쯔양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도, 비슷한 이유로 2005년 타계 후 현재까지 묘지 장소가 비공개로 되어 있다.[16] 류샤오보가 사망한 선양시과 정반대인 베트남-미얀마 접경이다.[17] 중국어로는 "터우치"라고 한다. 망자가 죽은 후 7일째 되는 날 집으로 온다고 믿는 중국 풍습.[18] 사실 동북지방은 나름대로 중공업 시설이 많이 있기 때문에 1980년대까지는 그리 낙후된 지역은 아니었다. 하지만 동부 해안가 일대의 발전이 괄목하게 이루어진데 반해 동북지방의 발전이 상대적으로 뒤쳐지면서 상황이 역전됐다.[19] 중국에서는 자바스크립트라는 이름을 음역하지 않고 원문 그대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20] 홍콩과 마카오에서는 일국양제를 보장한 홍콩 기본법&마카오 기본법에 따라서, 중국 본토로부터 분리독립을 주장하지 않는 이상 표현의 자유가 허용된다. 중국 당국에 항의하여 본토나 홍콩&마카오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도 당연히 허용. 홍콩에서는 그리하여 매년 6월 4일 천안문 학살 희생자 추모식도 아무 문제없이 열렸다. 다만 2020년 홍콩보안법 통과로 인하여 홍콩에서는 류샤오보 애도가 불가능할 전망이다.[21] 사실 중국 공산당도 어느 정도 유연해져서, 일정 수위를 넘지 않는 비판은 별 문제삼지 않는다. 이름난 작가인 위화 같은 경우도 2017년 6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 자국 정치의 문제점에 대한 여러가지 비판을 했는데, 진행자인 김어준이 "작가님의 안전을 위해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라며 수위를 조절한 바가 있다.[A] 현재 기사 삭제됨[22]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중국 본토와 타이완 섬은 귀순자에 대한 지원책을 모조리 없애 버렸고, 최근에는 본토인이나 타이완인이 서로의 지역에 정착하는 일이 흔하다. 2016년 쯔위 사태를 일으킨 중화민국 출신 가수 황안도 1990년대 이후 대륙에서 거주하면서 가끔씩 타이완을 오락가락했다.[23] 위에서 나온 양젠리도 UC버클리와 하버드에서 각각 수학과 경제학 박사를 땄다.[24] 이를테면 중국김완섭이나 고젠카 역할을 하는[25] 먹는 고추다.[26] 다만 피델도 말년에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국가평의회 의장 자리를 물려주고 정치에서 은퇴하긴 했다.[27] 실제로 왕단이나 우얼카이시와 같은 천안문 망명객들은 해외에서 민주화운동을 계속하고 있지만 여러가지 실언이나 발언의 와전으로 인해 구설에 오르는 일이 많았고, 그리하여 중국에서 이들의 인식은 거의 김완섭, 고젠카급이다.[28] 이쪽은 정치 체제, 폐쇄성에서는 그 북한보다도 극심했다.[29] 사실 북한은 민주 캄푸치아 정도를 제외하면 공산권 국가 중에서도 극단적인 정책을 펼친 국가다.[30] 참고로 히틀러는 1935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류샤오보의 선배 카를 폰 오시에츠키를 실제로 옥사시켰다.[31] ICL은 트로츠키주의 성향으로 당연히 중국 통치자들에 대해 비판적이며, 천안문 시위나 헝가리 혁명에도 긍정적이다.[32]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인데,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에는 미국이 어떠한 이유에서 전두환을 제지하지 않았기에 학살로 끝나고 말았지만, 1987년 6월 항쟁 당시에는 미국이 강한 압력을 가해 전두환의 유혈진압 시도를 압박, 차단했고 전두환의 권력을 무너뜨렸다. 대한민국의 광복 이래 여러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한국 시민의 노력을 폄하해서도 안 되겠지만, 미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한국이 오늘날의 민주주의 수준을 이룩하기가 거의 불가능했을 것임은 냉정히 현실이다. 단, 현실이라기엔 애매한 면도 있다. 미국 외에 군부 역시 반대하였고, 역쿠데타 가능성까지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유혈 진압을 반대한 이들이 하나회의 몇몇 이들이었다는 것도 중요하다.[33] 미국의 '도움'이 아니다. 미국이 (고립되어 있어서 묵인해도 되었던 광주항쟁 때와 달리) 4.19 혁명과 6월 항쟁 당시 진압에 찬성하지 않은 이유는 만약 미국이 군부 편을 들었다가는 안 그래도 전국적인 시위가 격화, 급진화하면서 미국 입장에서 최악의 시나리오인 반미로 흐를 가능성도 매우 컸기 때문이다. 즉 최악을 방지하기 위한 선제 조치로서 친미 군부 독재가 더 이상 지속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민주화 내 친미(주로 제도권과 보수 야당) 세력의 손을 들어주고 반미로의 흐름을 차단하면서 자신이 통제 가능한 구도를 만들려고 했던 것. 그 결과 한국은 민주화는 이룩했지만, 시장 자유화라는 명목으로 무분별한 시장 개방과 외자 침투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결과는 IMF 외환 위기라는 경제 주권 침해였으며 이 후과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34] 튀니지는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