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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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언론인, 정치인이다.
2. 생애[편집]
1949년 충청남도 보령군(현 보령시) 주포면 마강리에서 아버지 류연수(柳淵洙, 1914. 4. 18 ~ 1988. 11. 19)와 어머니 전주 이씨(1912. 1. 23 ~ 1978. 4. 25)[4] 사이의 7남 1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성동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독어교육과를 졸업하고, 1974년 한국방송공사에 기자로 입사하여 정치부와 사회부를 거쳐 1989~1992년 워싱턴 특파원, 1998~1999년 보도국장, 1999~2000년 런던 특파원, 2000~2003년까지 보도본부장을 맡았다. 또한 1992~1993년, 1995~1998년에는 KBS 뉴스 9의 앵커를 맡았고 1993~1995년에는 KBS 뉴스광장 진행을 맡기도 했다.
KBS 보도본부장을 그만두고 2003년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총재의 언론담당 특별보좌관을 맡으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충청남도 보령시-서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자유민주연합 대변인, 정책위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2005년 자유민주연합을 탈당하여 국민중심당에 입당하였고 2007년 국민중심당 대변인에 임명되었다.
2008년 초 자유선진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치러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선진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9년 자유선진당 원내대표에 선출되었다. 2010년 자유선진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선진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새누리당 김태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같은 해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유선진당의 후신 선진통일당이 새누리당에 흡수 합당될 때 권선택, 이시우 등과 반발하여 민주통합당에 입당하였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충청권 정치인의 행보라고 할 수 있는데, 이후로는 갑자기 이해하기 힘든 철새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직후 민주통합당을 탈당하여 안철수의 새정치연합에 합류하였다. 2014년에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이 새정치민주연합으로 합당하자, 다시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하였다. 이후 박준영의 신민당에 참여했다가#, 신민당이 원외 민주당에 합당되자 천정배의 국민회의로 이동했다가 탈당했다. 충청권의 대권주자로 반기문이 부상하자 국민행복당에 입당하여 당명을 친반국민대통합으로 변경하고 "정치판을 걸레로 만들었다."라는 말로 안철수를 비난하기도 했다. 이후 그 안철수가 있는 국민의당에 입당하여 바른미래당, 민생당 소속으로 있다가, 2020년 12월에는 뜬금없이 이경희의 통일한국당에 창당 발기인으로 참가했다.[5] 사실 좌우에 관계 없이 철학이 없어보이는 행보를 보이는 것 보면 크게 이상한 부분은 아니다.
3. 소속 정당[편집]
4. 선거 이력[편집]
5. 둘러보기[편집]
[1] 이류계 북부령공파 33세 근(根) 항렬.[2] 진주류씨(이류계)세보 권6 621쪽에는 1947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4] 이희남(李熙南)의 딸이다.[5] 아무래도 당대표 이경희가 충청권 출신이기 때문에 그런듯하다.[6] 국민중심당 창당을 위한 탈당.[7] 자유선진당 창당을 위한 탈당.[8] 국민중심연합과 신설 합당.[9] 새누리당과 합당 반대.[10] 새정치연합에 합류를 위한 탈당.[11]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12] 국민회의 합류를 위한 탈당.[13]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14]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15] 바른정당과 신설 합당.[16] 바른미래당 고문으로 있었다.[17] 대안신당, 민주평화당과 신설 합당.[18] 통일한국당 창당을 위한 탈당.[19] 2005년 탈당.
국민중심당 합류.[20] 3번의 선거 중 첫 낙선.
국민중심당 합류.[20] 3번의 선거 중 첫 낙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