룽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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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태평양 전쟁 중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2. 상세[편집]


35여단의 전멸을 기점으로 일본군은 미 해병대의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게 되었으며, 제17군 사령관 하쿠다케 하루요시 중장에게 제2사단과 제15사단 총 2만 명의 병력과 각종 화포 80문, 치하 14대를 갖춘 병력의 지휘권을 부여하고 과달카날을 탈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35여단의 상륙 당시 큰 효과를 보았던 여러 척의 구축함을 이용한 병력수송을 시작했는데 미군은 이를 두고 "도쿄 익스프레스"라고 불렀다.

한편 미 해군은 해병 1사단 예하 포병연대인 해병 제11연대를 과달카날에 배치, 포병세력을 증강했고 에스페란스곶 해전이 끝난 직후 미 육군 아메리칼(AmeriCal = America + Caledonia) 사단[24]의 제164연대도 과달카날에 배치하여 1만 9천 명의 대병력을 구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유 화포는 100문이 넘었으며, 태평양 전선에서 중전차로 명성을 날리는 경전차 M3 스튜어트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오판으로 전차만 돌입시키는 바람에 수가 팍 줄어버렸지만 히든 카드로는 여전히 유효했다) 무엇보다 헨더슨 비행장에 가용가능한 항공전력이 있었으므로 일본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다. 다만 초반의 공격은 그리 큰 성과를 보지 못해서 해병 1개 소대가 낚시에 걸려서 단 한 명만 살아남고 전멸한 적도 있었다.

다만 일본군도 이런 정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지속적인 함포사격으로 헨더슨 비행장을 무력화시키려고 했다. 이에 따라 고토 아리토모 소장이 지휘하는 함대가 헨더슨 비행장 포격을 위해서 남하했는데, 그 곳에서 노먼 스코트 소장이 지휘하는 64기동부대에게 요격당했다(에스페란스곶 해전). 당시 노먼 스코트 소장은 일본 함대보다 화력면에서도 우세였고 먼저 단종진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초탄 발사에 고토 소장을 전사시키는 등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건에서 전투를 시작하였으나 아군 구축함 2척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포격을 중지하여 일본군이 무사히 퇴각할 수 있는 원인을 제공하고 말았다. 에스페란스곶 해전에 대한 추가적인 내용은 아오바 항목 참조.

12일의 실패와는 달리 13일에는 공고급 순양전함 공고와 하루나가 진입하여 14인치 대구경 함포를 이용하여 헨더슨 비행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14일에는 중순양함 초카이와 키누가사가 8인치 함포를 이용하여 확인사살까지 가했다. 그 결과 활주로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리고 모든 비행기 및 항공유를 상실하는 등 헨더슨 비행장에 막심한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미 해병대는 악착같이 활주로를 보수하고,[25] 멀쩡한 부품들을 골라내서는 즉석에서 비행기를 재조립하고 무사한 연료 탱크에서 항공유를 뽑아내는 등 그야말로 눈물나는 노력끝에 항공력을 어느정도 복구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헨더슨 비행장이 무력화되었다고 믿고 상륙작전을 진행 중이던 일본 함대의 뒷통수를 제대로 후려칠 수 있었다. 그리고 보급선이 간당간당한 상황에서 항공기보다 먼저 온 연료를 (보험삼아서) 드럼통 같은데 넣어서 숨겨놨다가 상황이 좋아지자 잊어버렸다가 다시 찾아낸 에피소드도 있다. 역시 저축해두길 잘했지...

게다가 10월 17일에는 헨더슨 비행장 포격 소식을 듣고 달려온 항공모함 USS 호넷의 함재기와 구축함 2척이 일본의 상륙지점을 기습해서 야포 50문, 탄약과 물자를 거의 다 날려버렸다. 특히 식량이 심각해서 타다남은 것까지 긁어모아도 2주일치밖에 남지 않았다. 야포 피해 역시 화력의 중핵이라 할만한 중포병의 손실이 컸다.

결국 하쿠다케 중장은 일단 상륙한 1만 2천 명의 병력과 30문의 야포로 헨더슨 비행장을 공격하며, 당초 중포를 앞세워 방어선 서측을 공격하려던 계획을 변경하여, 부대를 본대와 보조부대로 나눠서 서로 협격하는 작전을 채택하였다. 문제는 바닷속에 가라앉은 중포 화력을 벌충할 기습효과 달성을 위해 주공방향을 정글이 우거진 남쪽으로 변경한 데서 불거졌다. 험준한 지형 특성상 화력을 지원할 산포와 박격포를 전장까지 이동시킬 방법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결국 포를 분해하여 병사들이 부품 하나랑 포탄 하나씩 가져가는 방법을 선택했지만 병사들은 군장도 무거운데 포탄과 부품까지 지고 가는 것은 무리여서 중도에 버렸기 때문에 최소한의 포병전력마저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이 일은 임팔 작전에서도 재현된다.

설상가상으로 대본영이 제17군단에 파견한 참모가 그 유명한 자칭 작전의 신 츠지 마사노부 중좌였다. 그는 야간에 착검돌격으로 반자이 어택을 하면 미군 따위는 발라버릴 수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미 한 차례 미군의 화력을 경험해 본 가와구치 소장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게다가 항공정찰 사진을 받아든 가와구치 소장은 이대로 돌격하면 전멸이라고 주장하면서 작전에 반대하였지만, 예정지점에 늦게 도착했다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해임당했다. 대체로 츠지에게 반대한 것이 해임의 원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게다가 가와구치 소장의 후임인 쇼치 대좌는 막 도착해서 과달카날의 지형도 잘 모르는 상황이었다.[26] 그 결과 원래 가와구치 소장이 지휘하던 부대는 전투가 벌어졌을 때 엉뚱한 곳으로 돌격해버렸다. 더 가관인 게, 사령부에서는 가와구치가 파면된 줄도 몰랐단다. 이 무렵 츠지 중좌는 대본영에 '미군은 아직까지 눈치도 못채고 있음'[27], '정글은 예상외로 얇기 때문에 진격에 문제없음'[28], '미군은 테니스장에서 테니스를 치고 있음', 그리고 문제의 공격명령이 '오늘밤은 승리가 확실하기에 내일은 무선으로 만세를 보낼 것임' 따위의 '전선보고'를 보내고 있었다. 게다가 총공격 명령이랍시고 내려진 것도 천우신조에 따라 일거에 비행장의 적들을 격멸하여 천황의 성지에 보답하라라는 요상망측한 소리였다. 제2사단의 한 중좌는 저 명령을 듣고서 "뭔소리인겨? 뭘 어쩌라고?"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장교의 작전 이해도가 이 정도인데 과연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을지는... 애시당초 저런 작전지시를 이해하고 어쩌고 할 것도 없는 것이기는 했다. 거기다가 실질적으로 작전을 총괄해야 할 당시 17군 참모장이었던 미야자키 슈이치 소장은 일본군 특유의 좌관급 참모들의 독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FM스타일이었는데, 그러다보니 17군 참모들에게 '육대 전술교관같은 놈' 이라며 실전알못이라고 뒷담화를 듣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뒷담화를 듣던 츠지가 한다는 소리가 "그럼 버리고 가면 되지...."해서 자기 인맥을 이용하여 윗선에 연락, 미야자키 소장을 본국에 버려두고 간 상태였다.[29] 한마디로 작전 수립체계도 개판이 된 상태에서 제정신도 아닌 인간이 입안하여 내려진 작전이 제대로 상대에게 먹힐 리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남태평양 방면의 미군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당초 니미츠 제독은 해병대가 더 버틸 수 있도록 지원만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 과달카날의 사수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곰리 제독은 부임 당시에 부여받은 목표인 호주와 미국 서해안의 연결선 방어에만 집착하면서 전황이 변했음에도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지원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실제로는 후방에서 지속적으로 보급되는 병력과 물자가 있었고 피지 방어 임무가 미 육군에 넘어가서 뉴질랜드 3사단이 자유로운 상태이기에 이들에게 누메아 방어를 맡기면 아메리칼 사단을 과달카날에 바로 투입할수 있는 상황이라 결코 병력이 모자라는 상황이 아니였다. 게다가 니미츠 제독의 시찰에 동행했던 육군 항공대 사령관 헨리 아놀드 대장이 후방에서 놀고 있는 많은 항공기들을 보고는 "안 그래도 유럽에 보낼 비행기도 모자라 죽겠는데 그쪽에서 이런 식으로 하면 앞으로 재미없을 것"이라 화를 내었고 거기에 남태평양 해역군의 사령부인 누메아의 보급 혼란상까지 더해지면서 니미츠 제독의 심기를 제대로 긁고 말았다.

결국 니미츠 제독은 곰리 제독이 패배주의에 사로잡혔다면서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고 진주만으로 돌아오자마자 킹 제독에게 인사교체를 건의했다. 킹 제독도 곰리 제독의 능력부족에 대한 문제를 계속 전해듣고 있었기에 니미츠 제독의 의견을 수용하여 곰리 제독을 해임하고 그 후임을 추천받아 홀시 제독을 새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부임하자마자 바로 과달카날 시찰에 나선 홀시는 앞으로의 전략을 기자들이 묻자 싸움닭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쪽발이 놈들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는 겁니다!(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라고 외쳤고, 과달카날 주둔 미군에게 그야말로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부가 보유한 거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줬다. 이런 홀시의 부임에 과달카날의 해병대는 말라리아에 걸려서 야전병원에 누워있던 병사들까지 뛰쳐나와서 만세를 부를 정도로 기뻐했다.

한편 일본군의 본대는 본대대로 사정이 생겨서 24일 총공격하기로 결정했지만, 보조부대는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23일 헨더슨 비행장 서측에 총공격을 감행... 그나마 있던 47mm포 개조 신포탑 치하는 유럽 전선에서는 "이걸 대체 어디다가 써먹냐?"고 불평을 듣던 M3 37mm 대전차포에게 털렸으며,[30] 해병대는 해병대대로 새로 배치된 M1918 155mm 곡사포로 일본군 전차와 보병들을 박살냈다. (이거 오기 전까지 일본군 150mm포 2문에 고생했다). 다행히(?) 24일에는 미군이 공격방향을 잘못 가늠하는 바람에 일본군이 남쪽에 설치된 해병대 방어진을 돌파할 뻔했으나 곧 추가된 증원부대와 자발적으로 지원에 나선 육군 병력에 의해서 좌절되었으며, 25일에는 보조부대를 박살낸 포병들이 남쪽으로 포격지원에 나서는 바람에 완전히 털렸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8,700명이 전사하였으며, 이 전투를 지휘한 2사단마저 모든 전투력을 상실했다(마타니카우 강의 전투). 존 바실론이 싸운 바로 그 전투다.

일본 해군도 이러한 지상공격에 발맞춰 미국 해군의 항공모함들을 수장시키기 위해 제3함대를 파견했는데, 워낙 항공모함이 부족하여 5주만에 전선으로 복귀한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이 이들과 맞붙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미국의 함재기 부대는 경항공모함 즈이호와 정규 항공모함 쇼카쿠에 타격을 주었지만, 호넷이 대파되어 결국 전투가 끝난 후 일본군이 발사한 어뢰에 처분되었다. 엔터프라이즈 역시 폭탄 두발을 맞았으나 전투력과 항해력은 유지했고,[31] 호넷의 함재기들을 수용한 후에 철수하였다.(산타크루즈 해전).

이 해전에서 입은 미국 함대의 피해는 결코 적지 않았다. 렉싱턴, 요크타운, 와스프에 이어 호넷까지 격침되면서, 미 해군은 엔터프라이즈가 복귀할 때까지 잠시나마 태평양에서 운용 가능한[32] 항공모함이 단 한 척도 없는 상태가 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일본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미국 함대가 선보인 대공원형진과, 아군의 대공포화에 격추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근접 요격까지 시도하며 방어에 나선 미 함재기들의 공격에 일본기들의 형편없는 내구력이 시너지를 발휘하는 바람에 많은 함재기들이 대량으로 격추당하여[33] 노련한 조종사들까지 거의 다 잃고 말았다.

그리하여 일본군의 항모기동부대 전력 역시 그로기 상태가 되었다.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대파된 쇼카쿠와 중파된 즈이호를 일본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고, 멀쩡한 즈이카쿠까지 일본으로 귀국시켰다. 전선에 남은 항모는 함재기 대부분을 잃은 준요 한 척 뿐이었고, 일본군은 충분한 함재기를 준요에 보급할 능력을 상실했기에 빈 껍데기가 되고 말았다. 이후 필리핀 해 해전 때까지 약 1년 반 동안 기동부대는 재건에만 매달려야 했지만 그 와중에도 재건 중이던 전력을 빼내 기지항공대로 투입하고 손실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재건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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