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스 포돌스키

덤프버전 :


루카스 포돌스키의 역임 직책

비셀 고베 역대 주장
와타나베 카즈마
(2016~2017)

루카스 포돌스키
(2018~2019)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2019~ )


루카스 포돌스키의 수상 이력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파일:신인상.png

2006 FIFA 월드컵 신인상




베스트팀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루카스 포돌스키의 기타 정보





파일:default-mini-3.png

구르니크 자브제 No. 10
루카스 포돌스키
Lukas Podolski

본명
우카시 유제프 포돌스키
Łukasz Józef Podolski
출생
1985년 6월 4일 (38세)
폴란드 인민 공화국 실롱스키에주 글리비체
국적
[[독일|

독일
display: none; display: 독일"
행정구
]]
[1]
신체
183cm / 체중 80kg[2]
포지션
공격수[3][4]
소속
유스
FC 07 베르크하임 (1991~1995)
1. FC 쾰른 (1995~2003)
선수
1. FC 쾰른 II (2003)
1. FC 쾰른 (2003~2006)
FC 바이에른 뮌헨 (2006~2009)
FC 바이에른 뮌헨 II (2007~2008)
1. FC 쾰른 (2009~2012)
아스날 FC (2012~2015)
인테르나치오날레 (2015 / 임대)
갈라타사라이 SK (2015~2017)
비셀 고베 (2017~2019)
안탈리아스포르 (2020~2021)
구르니크 자브제 (2021~ )
국가대표
130경기 49골[5] (독일 / 2004~2017)
SNS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1. 개요
2. 유년기
3. 클럽 경력
4. 국가대표 경력
5. 플레이 스타일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6.3. 수훈
6.4. 출전 기록
7. 여담




1. 개요[편집]


폴란드 출신, 독일 국적의 축구 선수. 현재 구르니크 자브제에서 뛰고 있으며, 포지션은 공격수이다. 애칭은 폴디(Poldi).[6]

클럽에서는 쾰른 시절을 제외하면 별다른 족적이 없었음에도, A매치 49골이 증명하듯 국가대표팀만 가면 시종 날아다녀서 '애국자'로 불린다. 특히 2006 독일 월드컵에서 독일을 3위로 올려놓으며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했고, 유로 2008에서도 준우승을 이끌면서 토너먼트의 팀에 선정되었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한국 한정으로 '국대스키'라는 별명이 있다. 해외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국가대표팀에서만 대활약하는 유형으로 칠레의 에두아르도 바르가스와 함께 거의 무조건 언급되는 선수.


2. 유년기[편집]


출신 배경이 클로제와 매우 비슷하다. 폴란드 실롱스크의 글리비체(구 독일 오버슐레지엔주 글라이비츠) 에서 태어났다. 실롱스크/슐레지엔은 원래 프로이센 이래 독일의 영토였으나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망하면서 연합국에 의해 강제로 폴란드 영토가 되었다. 슐레지엔에 살던 독일인들은 독일 본토로 추방되었고, 독일인들이 떠난 빈 땅에는 소련이 동폴란드를 강제 병합하면서 발생한 폴란드 실향민들이 실롱스크로 이주해오게 된다. 실롱스크/슐레지엔에 원래 살던 원주민 독일인들은 추방령에 따라 대부분 서독으로 떠났으나 생계 등의 이유 때문에 추방령에도 불구하고 슐레지엔에 남은 독일인들도 일부 있었는데, 포돌스키, 클로제의 아버지가 모두 그러한 케이스다. 포돌스키의 조부모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슐레지엔에 거주해오던 독일계였으며, 독일 시민권도 가지고 있었다. 독일은 이처럼 전쟁으로 빼앗긴 영토에 계속 거주하는 독일인들은 물론 그들의 후손들에게도 독일 국적을 부여하고 있다.

이처럼 포돌스키와 클로제 모두 아버지가 독일 국적을 보유하고 있었고, 포돌스키, 클로제 본인 역시 독일 국적법의 국외 출생자 규정(German Citizenship Through Descent)에 따라 출생과 동시에 자동으로 독일 국적이 취득되었다. 따라서 포돌스키, 클로제는 폴란드에서 독일로 귀화한 것이 아니고 출생하면서부터 독일폴란드 국적을 동시에 보유한 이중국적자다. 게다가 클로제와 포돌스키는 각각 생후 1개월, 2살 때 폴란드를 떠났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실질적으로 폴란드에서 유년시절의 기억이 없다. 두 사람은 모두 10대 때 폴란드 국적을 포기했다. (클로제는 18세 때 폴란드 국적을 포기했다고 밝혔으며, 포돌스키 역시 폴란드 축구협회 측에 따르면 20세 때 이미 폴란드 국적이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포돌스키가 2살 때 그의 가족은 폴란드를 떠나 독일 쾰른 교외 지역으로 이주했다. 포돌스키는 자신의 고향을 쾰른이라 말하며 쾰른에 상당한 애향심을 보이고 있다. 포돌스키는 7살 때 FC 07 Bergheim에 입단해 축구 경력을 시작했고 11살 때 1. FC 쾰른에 입단하였고, 청소년 대표팀에 줄곧 차출되었다.


3. 클럽 경력[편집]



3.1. FC 쾰른 1기[편집]


2003년 11월 22일 18세의 나이로 쾰른에서 프로 데뷔를 하였다. 데뷔 시즌인 2003-04 시즌에 19경기 10골, 2004-05 시즌에는 30경기 24골을 터뜨리는 폭발력을 보여줬으며 2005-06 시즌에는 32경기 12골로 꾸준하게 쾰른의 주 득점원이 되었다. 그러나 2006년 FIFA 월드컵 직전에 쾰른이 부진으로 강등 위기에 놓이자 이적을 결심하여 이적료 약 1,000만 유로의 이적료로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였다.


3.2. FC 바이에른 뮌헨[편집]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 대활약을 보여줬으나 당시 소속 클럽인 바이에른 뮌헨에서는 비교적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며 팬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첫 시즌에는 로이 마카이클라우디오 피사로에게 밀리고, 둘이 이적한 07-08 시즌에는 루카 토니미로슬라프 클로제가 영입되면서 또 후보가 되었다. 국가대표팀에서 자신을 지도했던 위르겐 클린스만이 감독으로 온 08-09 시즌에도 입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나마 08-09 시즌부터 점점 이 두 선수의 폼이 안 좋아졌지만, 포돌스키의 폼도 시망이 된 것은 마찬가지였다.

사실 포돌스키가 '국대스키'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 계기는 역시 바이에른 시절인데 이 시절 포돌스키는 좀 힘들 수 밖에 없었다. 포돌스키가 공격 전반을 다 소화할 수 있다지만 아무래도 처진 공격수 자리와 윙어 자리가 잘 맞는데 당시 바이에른의 공격진의 주축은 루카 토니와 클로제였다. 완벽한 골게터 타겟인 세리에 30골 득점왕과 완벽한 이타적 타겟맨인 2000년대 분데스 최고의 공격수 투톱에게 대항하기에는 아무래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4-4-2의 측면 미들을 노리기에도 그 자리에는 프랑크 리베리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있었다. 아무래도 왼쪽의 리베리에겐 대항할 수가 없고, 슈바인슈타이거에게 대항하기에 오른쪽 미드필더 자리에 선다는건 무리가 있었기 때문.

게다가 당시 바이에른의 공격 알고리즘은 대강 이랬다. 대놓고 루카 토니나 클로제에게 뻥 or 리베리가 다 알아서 하겠지 or 너무 리베리쪽에 수비가 몰리면 오른쪽에서 얼리 크로스. 이와 같이 쌈빡한 매커니즘이었기에 포돌스키가 뛰기 힘들기도 했다.

포돌스키는 클럽이나 국대에서 봐도 처진 스트라이커 자리나 측면 자리에서 빠른 스피드와 튼실한 피지컬을 이용해 직선 돌파 혹은 강력한 킥력을 이용한 무식한 중거리가 최고의 장점인데 바이에른에서는 포돌스키에게 이런 공간을 허용해 주지 않았다. 그 공간은 공격수의 것이거나 그냥 리베리를 위해 비워뒀다. 게다가 그 때 당시 교체 출장도 잦았다.

이렇다 보니 포돌스키는 '국대스키'란 별명과 함께 '국대에서의 활약에 비해 클럽에선 그보단 못한다'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는 계기가 된다.


3.3. FC 쾰른 2기[편집]



3.3.1. 2009-10 시즌[편집]


2009-10 시즌에는 결국 친정팀 쾰른으로 이적하게 되었으나 27경기 2골이라는 최악의 부진을 기록하게 된다. 이 때 세운 무득점 기록은 무려 1,425분. 이와중에 한 골은 전 소속팀 바이에른 뮌헨 상대로 득점한거다.

3.3.2. 2010-11 시즌[편집]


2010-11 시즌에는 포지션을 자신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공격형 미드필더, 윙어를 오가는 프리롤 형태의 섀도우 스트라이커로 바꾸고 드디어 본 실력을 클럽에서도 발휘하는지 굉장한 활약을 펼쳤다.

소속팀인 쾰른은 전력이 불안정한 하위권 팀인데 거기서 단연 군계일학, 가장 빛나는 선수가 당시 주장직을 맡고 있던 포돌스키. 32경기 13골 6어시스트의 상당히 준수한 스탯을 쌓았다. 이제는 분데스리가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는 포워드 중 하나라고 해도 무방한 상황.

그런데 클럽에서 잘하자 그 반대로 대표팀에서 고전하고 있다. A매치 몇 경기째 골 못넣는 건 고사하고 경기력도 부진한 상황. 유로 2012가 코 앞인데 최근 무섭게 치고 나오는 안드레 쉬를레에게도 밀릴 지경이다.


3.3.3. 2011-12 시즌[편집]


설상가상으로 2011-12 시즌이 시작하기 전, 소속팀 쾰른에서 한 시즌만에 주장직을 박탈 당했다. 원래 성격이 어른스럽고 리더십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좋지 않은 언행과 사고[7]를 자주 쳐서 주장직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자주 보였는데 이로 인해 쾰른의 폴커 핑케 단장과 스톨레 솔바켄[8] 감독이 리더쉽 부족이라고 하며 포돌스키와 마찰이 일어났고 결국 주장직을 브라질 수비수인 페드로 게로멜에게 넘겨주었다. 심지어 부주장 자리까지 사샤 리터에게 주며 제대로 눈밖에 난 상황. 이 같은 상황으로 언론에는 이적설까지 떴으나 일단은 쾰른에 잔류했다.

이렇게 어수선한 상황속에서 2011-12 시즌 29경기에 출전해 18골 8도움으로 팀 내 최다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여 아주 좋은 활약을 펼쳤다. 여담으로 득점 2위인 클레멘스가 26경기에서 5골, 노바코비치가 17경기에서 4골을 기록할 정도로 그가 쾰른의 공격 혼자서 책임지고 있다고 할만큼 과언이 아니다.

시즌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소속팀이었던 쾰른이 전력 보강을 약속 해놓고 이행하지 않는다며 툴툴대며 구단과 계속 마찰을 빚어오더니 결국 아스날 FC로 이적이 확정되었다. 언론에 알려진 계약 세부 내용으로는 4년 계약에 이적료 1,300만 유로, 주급은 10만~11만 파운드를 받는다고 한다. 이적 시장 기간이 아닌 3월에 이적 협상이 이루어지며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양측 구단이 이적 완료를 시켰는데, 아스날 측에서는 로빈 반 페르시에게 팀의 야망을 보여주고 유로 2012를 통해 폴디의 몸값이 오를것을 우려한 점이고 쾰른에서는 강등당하면 헐값에 포돌스키를 풀어줘야 하기 때문에 일찌감치 협상이 이뤄진 셈이다.

그리고 결국 쾰른은 분데스리가 2011-2012 시즌 17위로 시즌을 마무리하면서 강등을 당하게 되었다. 이적하기 전 소속팀을 강등의 위기에서 탈출시키며 유종의 미를 거두려 했던 포돌스키는 안타까움을 토로했고 쾰른 팬들은 강등당한 설움도 모자라 그들이 끔찍히도 아끼던 포돌스키를 눈물을 흘리며 보내야만 했다.[9][10]


3.4. 아스날 FC[편집]


등번호는 9번으로 확정. 9번의 전 주인이었던 박주영은 30번으로 밀렸고 이적시장 막판에 프리메라 리가의 셀타 비고로 1년 임대를 떠났다.


3.4.1. 2012-13 시즌[편집]


프리미어리그 3R 리버풀전에서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EPL 데뷔 공격포인트를 기록했다. 그리고 4R와 이어진 챔스에서도 1골씩 기록, 세 경기 연속 골을 기록하며 순조로운 시즌 초반을 보냈다.

그런데 찰떡호흡을 보이던 키어런 깁스가 부상을 당하면서 산토스와 호흡맞추기 시작하자마자 득점이 없다. 그전까지만 해도 리그든 챔스든 매경기 꼬박꼬박 골을 쑤셔넣고 어시스트도 곧잘 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산토스가 한마디로 패죽이고 싶은 플레이로 공수를 완벽히 말아먹자, 포돌스키는 눈물을 머금고 윙백자리까지 내려왔다.

11월 3일 프리미어리그 10라운드 맨유 원정에서는 시오 월콧이 체력방전으로 제대로 못 나오고 다른 공격자원들도 부상과 부진으로 각각 없는 상태에서 홀로 공격진을 이끌어야했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저런 사정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며 결국 팀도 패배를 기록하였다.

11월 17일 프리미어리그 12라운드 북런던 더비에서는 선제골을 허용했지만, 그 선제골을 넣은 아데바요르가 퇴장당하면서 분위기는 아스날쪽으로 넘어온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메르테사커가 동점골을 박아넣는데 성공했으며 그 이후 분위기를 전환한 아스날이 공세를 펼치고 전반 40분이 조금 넘어서 우리의 포돌스키가 역전골을 넣었다! 이후 팀은 3골을 더 성공시키면서 5:2 완승을 거뒀다.

11월 21일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5라운드 몽페리에와의 홈경기에서 1대0으로 앞서던 상황에서 몽펠리에의 패스미스를 챔벌레인이 가로채서 포돌스키에게 밀어주고 (그리고 챔벌레인은 태클을 당해 한동안 경기장에 쓰러져 있었지만 묻혔다) 포돌스키가 다시 지루에게 패스, 지루가 다시 한번 기가막히게 연결한걸 포돌스키가 그대로 발리슛으로 연결하여 2:0 을 만들었다.




그리고 추가 득점이나 실점없이 경기가 종료되어, 13년 연속 16강 진출을 확정지었고, 근 1달여만에 클린시트를 만들며 좋은 분위기를 이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아스날이라는 클럽 자체가 큰 기복을 보이는 만큼 포돌스키의 기복도 꽤나 있는 편. 하지만 절대로 실패한 영입은 아니다. 오히려 몸값에 비해 좋은 활약을 펼쳐주고 있다. 주급이 약간 아쉽긴 하지만서도 키어런 깁스와의 콤비네이션도 좋으며 수비 가담률이 좋아서 왼쪽이 뚫리는 일도 적고 강력한 왼발을 자주 보여준다. 거기에 이타적인 플레이는 덤. 함께 영입된 산티 카솔라가 대박이라면 포돌스키는 최소 중박 이상은 쳐주고 있다.

12월 30일 프리미어리그 20라운드 뉴캐슬전에서 선발출전하여 팀의 3번째 골을 멋지게 성공시키며 팀이 3:2로 달아나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20라운드 현재까지만 봤을 때 포돌스키는 기복이 심한 선수 중 하나지만 (깁스가 돌아왔음에도 잠수타는 모습이 간간히 나왔다.) 잘 되는 날엔 어떻게든 한방을 터뜨리는 팀내 최고주급자의 위엄을 보여줬다.

1월 21일 리그 23라운드 첼시전에서는 부상으로 이탈하였다.

2월 3일 25라운드 스토크시티전에서 지루와 포돌스키, 월콧 공격 3각편대가 손발이 척척 맞으며 있는데로 공격을 퍼부었지만 떡대 10백을 쓰는 스토크의 골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을 뿐더러 골키퍼의 슈퍼세이브 또한 이어졌다. 그런데 포돌스키가 후반전에 다시 한번 전매특허 왼발을 이용해서 1골을 박아넣는데 성공했다. 갑자기 노골선언이 되었고 한동안 논란이 되다가 결국에는 골 선언. 사실 골 선언이 됐는데 오심논란이 일었고 스토크 선수들(특히 쇼크로스)은 뻔뻔하게 우겨댔다.

2월 20일에 펼쳐진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 뮌헨과의 홈경기에서 선발출전하여 2:0으로 뒤지고 있던 후반 10분에 포돌스키가 헤딩으로 만회골을 터뜨리며 반격했지만 끝내 3대 1로 패배하면서 8강 진출에는 또 다시 실패할 것으로 보여진다.

이후 4월 13일 리그 33라운드 노리치 시티전에서 후반 92분경에 크로스를 받은 시오 월콧이 밀어준공을 포돌스키가 턴하면서 왼발 슈팅으로 득점에 성공하며 스코어 3-1을 만들었다. 이대로 경기가 끝나면서 거의 7분만에 0-1에서 3-1로 대역전을하며 승점 3점을 챙겨가며 3위에 입성했다!

리그 37라운드 현재 리그 스탯만 11골 9어시, 거기에 챔스에서만 5골을 박아넣는 준수한 스텟을 자랑한다. FA컵에서도 1골 1도움을 올렸다. 기복이 심해서 그렇지 스텟만 보면 정상급 윙어다. 거기에 같이 영입된 지루에 비해서 몰아넣은 적 없이 영양가도 만점인 골들이다.[11]

그리고 5월 20일 프리미어리그 38라운드 뉴캐슬전에서 로랑 코시엘니의 골을 도우며 어시스트 1개 추가, 이로서 첫시즌 리그 10-10(11골 10어시)을 달성하는 활약을 펼쳤다. 또한 이 경기에서의 승리로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확정지었다.

왼쪽 윙어로서는 카솔라에게 밀린 기분이지만, 그래도 출전시간이 꾸준히 보장되어 나름 괜찮은 활약을 보인 시즌이었다.

3.4.2. 2013-14 시즌[편집]


2번째 시즌인 13-14 시즌, 페네르바흐체와의 챔스 플레이오프에서 햄스트링에 큰 부상을 입었다. 아스날의 팀 닥터가 "내가 본 햄스트링 부상 중 가장 끔찍하다"라고 평할 정도로 재활부터 복귀까지 대략 3개월이 걸렸고, 복귀 후에도 폼이 올라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포돌스키는 끝없이 이적설에 휘둘렸다.

리그 후반부에 들어서 아스날이 주전급 줄부상[12]이 당하며 박싱데이 이후 2월까지 유지했던 순위가 4위권으로 폭망하자, 다시 한번 폼을 끌어올리며 아스날을 구원했다.

3월 26일 프리미어리그 31라운드 스완지 시티 전에서 1:0으로 뒤지는 상황에서 교체되자마자 골을 박아넣고 지루의 골을 어시스트하였고[13], 바로 다음 경기인 32라운드 맨시티전에서는 좌측을 뚫고 올린 크로스가 플라미니의 발끝에 걸려 동점골 어시스트에 성공! 그 뒤 에버튼 전에선 부진하였으나 웨스트햄, 헐시티와의 경기에서 연속 멀티골을 쏘아올리며 복귀 이후 팀의 공격을 이끌고 있다. 시즌 초반 3개월이 넘는 장기 부상을 끊었음에도 불구하고 올 시즌 스텟은 벌써 12골 4어시스트.

멘탈도 좋아졌고 경험도 풍부한 선수인만큼, 이적설은 쏙 들어가고 스쿼드 플레이어로 안고가자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는 중.

다만 2013-14 시즌 팀의 마지막 경기인 FA컵 결승전에서 다소 좋지 못한 모습으로 60분만에 교체되어 나갔다. 그래도 팀은 연장 후반 터진 아론 램지의 결승골로 3대2 승리를 거두어 우승을 거두었다!! 일찍 교체되어 앙금을 품은(?) 포돌이는 경기가 끝나고 샴페인으로 벵거를 목욕시켰다.


3.4.3. 2014-15 시즌[편집]


2014-15 시즌에는 나올 때마다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지만, 부상도 아닌데 못 나오고 있다. 갈라타사라이와의 조별리그 원정 경기에서 선발로 출전하여 2골을 기록했다. 물론 이 경기 이후에도 벤치 신세.[14]


3.5.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편집]


인테르로의 이적설이 있었지만 로타어 마테우스의 비판과 포돌스키 본인의 이적설 부인, 그리고 벵거의 임대 거부로 인하여 무산될 것으로 보였다. 사우스햄튼과의 원정에서 부상으로 동행하지 않음으로써 이적설이 확산되고 벵거의 인정하는 듯한 발언으로 팀을 떠날 것으로 보였으나 본인은 미러의 기사를 부인했다.하지만 결국 1월 3일 세리에A 인테르로 임대되었다. 이적 후엔 자신에게는 출전을 보장해 줄 수 있는 팀이 필요했다는 요지의 인터뷰를 했다.

유벤투스와의 이탈리안 더비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후반전에 교체 출전하여 나쁘지 않은 활약을 보여줬다.

이후 골을 기록하긴 하지만, 임대생으로서의 활약은 더이상 보여주지 못하고 또다시 잊혀진 존재가 된다.

인테르의 만치니 감독이 원했던 모습은 함께 영입된 제르단 샤치리와 함께 마우로 이카르디, 마테오 코바치치 등 젊은 선수들과 융화되어 시너지를 일으키는 것이었는데 리그 경기 절반 정도인 18경기를 출전하며 1골 1도움만을 기록, 버로우를 탄 채로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한 채로 아스날로 복귀한다.복귀하며 자신의 인터 밀란 행은 실수였다고 말했다. 자신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내용인데, 18경기 910분 가량을 뛰고 1골 1도움의 공격 포인트를 기록한 걸 보면 단순히 만치니 감독 탓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3.6. 갈라타사라이 SK[편집]


2015년 7월 4일 갈라타사라이에 입단했다. 이적료 최대[15] 300만 유로에 연봉도 300만 유로이며, 계약기간은 3+1년이다. 2016년 5월 26일 튀르키에 쿠파스 결승전에서 라이벌 페네르바흐체 SK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어 1-0으로 우승에 일조한다.[16]


3.7. 비셀 고베[편집]


2017년 초 J1리그비셀 고베와 연결 링크가 떴고 # 갈라타사라이 측에서는 이를 부인했다.# 반대로 비셀 고베 측에서는 조만간 정식으로 오퍼를 넣을 뜻을 내비쳤다. #

결국 3월 2일 비셀 고베로 이적이 확정되었다. # 2017년 여름에 팀에 합류했다.

7월 29일 오미야를 상대로 데뷔전부터 멀티골을 기록하면서 팀의 3-1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이후 부진했고 시즌 전체로 봐도 17경기 5골로 높은 연봉에 걸맞는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팀은 9위로 추락하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시미즈 S펄스와 리그 마지막 라운드 경기에서 다리 통증을 호소해 교체로 물러난 뒤 부상 치료를 이유로 독일로 돌아갔으나 팀에 연락도 없이 복귀하지 않고 천황배 준결승전에서도 불참하여 잠적했다는 얘기도 있었으나 본인의 SNS로 잠적 논란을 해명했다. 하지만 부상이 1월 중순에 회복되어 내년 1월 1일에 열리는 천황배 결승전에도 불참하여 일본에서의 첫 시즌을 끝냈다.

2018시즌에는 팀의 공식 주장으로 임명되었으나 팀도 부진하고 포돌스키도 부진과 부상으로 최악의 폼을 보여줬다. 전반기가 끝날 때까지 공격포인트가 3골 2도움에 불과했다.

4월 21일 나고야 그램퍼스와의 리그경기에서 멀티골을 넣으며 나고야의 대형영입이었던 에게 클래스의 차이를 보여줬다. 그러나 갈수록 둘의 득점 횟수 차이가 심해졌고 시즌이 끝났을 때는 조는 24골로 득점왕에 오른 반면 포돌스키는 겨우 5골에 그쳤다.

2018년 5월 18일 비셀 고베 구단에서 안드레스 이니에스타를 영입하며 한솥밥을 먹었다.

그러나 월드컵 전에 8주 부상으로 독일로 복귀해 팀을 이탈하였고 월드컵이 끝나고 훈련을 하다가 시즌 재개전에 또 6주의 부상을 입고 독일로 복귀했다. 2017시즌에 천황배 4강 직전 부상을 입었던 것도 그렇고 나이가 있는 선수는 맞지만 중요한 순간에 부상 관리가 전혀 안 됐다.

같은팀 동료 이니에스타와 여러모로 비교되는데 포돌스키는 툭하면 부상을 핑계로 독일로 돌아갔었고 몸값을 증명하는 이니에스타에 비해서 경기력도 좋지 않다. 동료들에게 툭하면 짜증내는 모습도 많이 보여서 현지팬들 평가도 많이 안좋아졌다. 김승규는 1년을 먼저뛴 포돌스키보다 반년도 안뛴 이니에스타가 일본어를 더 잘한다고 인터뷰하기도 했었다.

2019시즌 개막전에서 세레소 오사카를 만나 비야, 이니에스타와 함께 출전했지만 처참한 경기력을 보여주며 0-1로 패하고 만다.

이후 경기 도중에 볼보이한테 독일어로 폭언을 퍼붓고, 인스타그램에 온천욕 사진을 올리고[17], 또한 팀 훈련에 여러차례 무단으로 불참하기까지 했다.

5월 18일 요코하마 원정에서 1:4로 완패당한 날에는 명단 제외되었는데, 이건 본인이 감기가 걸려서 결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날 본인의 SNS에 고베의 전통축제에 놀러간 것을 인증했다.

이후에도 부상으로 시즌의 절반을 날리고 부상 복귀 후에도 명단에도 들지 못하다가 29라운드 도쿄전에서 교체출전하면서 모습을 비췄다. 마지막 경기 주빌로 이와타전에서 해트트릭을 했다.

SNS 논란들과 부상과 향수병 등으로 부진을 면치 못했으나 그러나 같은 국적의 토르스텐 핑크감독이 부임하면서 향수병에서 어느정도 해방되었고 폼 역시 살아나면서 팬들의 반응은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특히 덴노배에서 맹활약을 하면서 경험이 부족한 고베에게 첫 우승컵을 안겨주는데 많은 공을 세웠고 포돌스키 또한 그동안 의욕이 없어보였던 모습들과 다르게 우승 후 고베 관련 사진들을 계속해서 올리면서 기쁨을 드러냈다.

2020년 겨울 이적시장에서 시카고 파이어 등의 팀으로의 이적설이 떴고, 결국 2020년 1월 19일 비셀 고베를 떠나는것이 확정되었다.

말레이시아 클럽 조호르 FC 이적설이 떴고 1월 15일 포돌스키가 조호르에 방문한 사진이 올라왔다.[18] 그러나 조호르로의 이적은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고 터키 팀들과의 이적설이 났다.


3.8. 안탈리아스포르[편집]


2020년 1월 24일, 안탈리아스포르로 이적하며 3년만에 튀르키예로 컴백했다.


3.9. 구르니크 자브제[편집]


폴란드의 구르니크 자브제로의 이적이 확정됐다. 7월 9일 입단식을 진행했으며, 포돌스키는 이 팀이 자신의 마지막 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구르니크 자브제는 포돌스키가 태어난 동네에서 불과 10km 떨어진 곳을 연고지로 삼고 있는 구단이다. 또 포돌스키 본인이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팀이라 커리어를 마무리할 곳으로 이 팀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4. 국가대표 경력[편집]




위 클럽 경력을 읽어보자면 빅클럽도 그럭저럭 누비고 다녔으니 아주 못난 커리어는 아니지만, 유망주 시절 큰 기대에는 부응하지 못하는 정도였고 유수한 스타 플레이어들의 기록에는 한끗 미치질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국가대표 무대에서만큼은 요아힘 뢰브의 전폭적 신뢰 아래 앵간한 월드클라스 선수 뺨치는 화려한 기록들에다 특히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UEFA 유로 2012는 커리어의 하이라이트로 거론되곤 한다. 오죽했으면 포돌스키의 국가대표 커리어의 전성기 시절인 2006 독일 월드컵에서 유로 2012 때까지 팬들에게 우스갯소리로 국대에서의 포돌스키는 메날두급의 무서운 선수로 180도 돌변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고[19] 게다가 월드컵 우승컵도 장식하는 등 국대 상복까지 화려하니 축구팬들 사이에선 국대에서만 잘하는 선수의 표본으로 회자되는 선수다. 별명은 '국대스키', '애국자'.

독일의 각급 청소년 대표팀을 거쳐 2004년 6월 6일, 헝가리와의 친선 경기에서 국가대표에 첫 데뷔했으며, 유로 2004에도 발탁되었다. 이후 미로슬라프 클로제와 투톱을 맞추면서 자국에서 열린 2006년 월드컵에서 클로제와 함께 맹활약을 펼치며 전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으며 대회 3골을 기록해 득점 공동 2위를 기록했다. 월드컵에서의 활약상을 바탕으로 메시, 호날두, 루니 등을 제치고 영플레이어상을 받았다.

유로 2008에서도 소속팀 부진과 대조적으로 3골을 득점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본인이 태어난 조국 폴란드를 상대로 홀로 2골을 넣으며 비수를 꽂았다.이때 포돌스키는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눈물을 참으며 슬퍼하였다.



발락과의 설전

2009년 4월 1일 웨일스와의 월드컵 예선전에서 당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이었던 미하엘 발락의 뺨을 때린 일로 그는 구설수에 올랐다. 본인은 부인했으나, 그가 좀 더 열심히 뛸 것을 요구하는 발락에게 "Lauf selber du arschloch!"("너나 뛰어라 이 씹새야!")라고 외쳤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20] 이후 5,000 유로의 벌금을 부과받았으며 국대에서 제명해야한다는 의견까지 나왔다.[21]

발락과의 말다툼과 09-10 시즌 18경기 2골로 그야말로 본인 최악의 시즌을 보냈음에도 요아힘 뢰브 감독이 2010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대표팀으로 또 다시 차출하자 자국 언론의 집중 포화를 맞게 된다.

그러나 포돌스키는 그 비난이 무색하게 월드컵에서 호주전, 잉글랜드전에서 강력한 왼발 슛으로 득점포를 올리는 등 빼어난 활약을 펼치며 뢰브 감독의 기대에 부응해 주었고 세대교체를 진행하는 독일을 3위에 올리는데 한 몫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게 된다.[22]

유로 2012에도 출전하여 좋은 활약을 보여 클럽에서의 모습에 비해 국가대표에서는 훌륭한 모습으로 애국자로써 가치를 보여나갔다. 유로 2012 대회 도중인 덴마크전에서 만 27세 13일로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는데 이는 당시 유럽 최연소 센추리 클럽 가입 기록이었다.[23]

2013년 5월 30일 에콰도르와의 A매치전에서 9초만에 골을 넣었다. A매치 역대기록 2위.[24] 에콰도르 수비수의 실책덕이긴 하지만 1위가 8.3초만에 골이라는걸 생각하면 대단한 기록이다. 더욱이 이날 경기에서 2골을 넣으면서 국대에서는 여전히 강한 모습을 보여줬다.

2014 브라질 월드컵은 포돌스키에게 아쉬움이 남는 대회였다. 겨우 조별리그 2경기[25]에 출전해서 득점 없이 54분간 그라운드를 누빈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조별리그 3차전 이후 다리 부상으로 인해 토너먼트에 뛰지 못했고, 독일의 우승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2014 월드컵 이후 국대에서도 점점 예전같은 모습이 줄어들면서 점차 서브 자원으로 밀려났고, 유로 2016을 마지막으로 포돌스키는 독일 국가대표에서 은퇴할 것을 발표했다.

2017년 3월 23일 새벽 4시 45분(한국시간) 도르트문트에서 열린 잉글랜드와의 친선 경기를 포돌스키의 국가대표 은퇴경기로 잡게 되었고, 이 경기에 선발로 출전, 안드레 쉬얼레의 패스를 받아 멋진 왼발 중거리슛을 성공시키며 본인의 국가대표 13년의 경력에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그 덕분에 10분을 남겨두고 제바스티안 루디와 교체될 때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리고 이 골은 결승골이 되어 독일은 1:0 승리를 거두었다. 은퇴와 함께 포돌스키가 달았던 국가대표 등번호 10번은 메수트 외질에게 넘겨주었다.

네이버 스포츠는 이날 포돌스키의 골 장면 영상 제목을 기어이 자신의 은퇴경기에 골을 넣고 마는 포돌스키로 업로드했다.

포돌스키의 국가대표 통산 기록은 A매치 130경기 49골 31도움을 기록했다.


5. 플레이 스타일[편집]





가히 흉기라고 불릴만한 수준의 왼발 능력을 보유했다. 그냥 왼발 각도에 걸리면 무조건 유효 슈팅은 만들어낼 정도로 엄청난 파괴력을 보유하고 있다. 로빈 반 페르시처럼 왼발 슈팅에 있어서는 유럽에서도 한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26] 특히 최고시속 160km/h[27]까지 기록하며 인간의 반응속도를 초월하는 레이저슛은 압권.

강슛 뿐만 아니라 감아차기, 크로스 등 왼발을 활용한 플레이가 전반적으로 뛰어났으며, 골 결정력 또한 굉장히 뛰어났다.실제로 아스날 시절 적은 플레잉 타임과 경기 수를 상쇄하는 결정력으로 리그 내 최고의 피니셔로 꼽히기도 하였으며, 아르센 벵거가 골문 앞에서 믿고 맏길 수 있는 공격수 1명을 꼽으라면 포돌스키를 뽑을 정도였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현역 최고 수준의 페널티킥 성공률을 갖고 있는데, 여태껏 커리어 내내 실축이 2번밖에 없다. 이렇게 '왼발' 그 자체였던 선수로, 오죽하면 포돌스키는 자신의 국가대표 은퇴 경기마저 자신의 왼발로 마무리했을 정도로 포돌스키의 왼발은 그의 커리어 아이덴티티나 다름없다.

문제는 왼발 킥력에 비해 그 외의 능력들이 상당히 아쉬운 편인 것. 어렸을 적에는 폭발적인 스피드까지 갖고 있었으나 커리어가 진행되는 동안 장기 무릎 부상을 몇번 끊으며 이 장점은 사라졌다. 일단 주 포지션은 투톱 형성시 2선 중앙 공격수 및 우측 윙포워드로, 윙포워드로 출전시 안쪽으로 치고 들어온 후 왼발을 활용한 슛 또는 괜찮은 피지컬로 한번 버텨준 후 패스각을 창출하는 스타일이었다. 문제는 드리블, 개인기 등 공격수에게 필요한 덕목들이 그냥저냥 괜찮은 수준이었다는 것.

오프 더 볼은 공수 양면으로 부족하고, 상기했듯이 기술적으로도 수비수를 제칠 수 있는 타입도 아니었고 능력도 부족했으며 피지컬로 버텨줄 수는 있으나 원톱을 소화를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종합적으로 보면 톱으로 쓰자니 결격사유가 있고, 윙어로 쓰자니 월드클래스가 되기에는 드리블 능력 등등이 부족한데, 버리자니 훌륭한 결정력 등 확실히 뛰어난 면모들이 있고 한번씩 왼발로 마술같은 모습을 또 보여주니 참으로 계륵이 아닐수가 없었다. 위와 같은 사유로 인해 포돌스키는 클럽에서의 활약은 국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지 못한편이다. 그나마 자신을 에이스로 해서 모든걸 맞춰줄 수 있는 중위권 팀에서는 그럭저럭 봐줄만 했으나, 그것을 맞춰줄 수 없는 큰 클럽에서는 부진하거나 경기력이 들쭉날쭉했다. 특히 사정상 본 포지션이 아닌 왼쪽 윙으로 뛰어야 했던 아스날 중반부부터는 아예 재능낭비로 평가받기도 했다. 성격적으로도 수비참여가 적은, 딱히 부지런한 선수도 아니었고 각종 상황에서의 판단능력도 아쉬운 편이었으니 대성할 수 있었던 아쉬운 선수라기보다는 극명한 장단점의 선수로서 단점들을 개선할 수 있는 여지는 애초에 없었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다만 국대에서는 달랐다. 그것은 바로 연계에 아주 능한 클로제가 있었기 때문. 포돌스키의 경우처럼 클로제 또한 타겟터로서 골문 앞 마무리/ 연계라는 하나의 특출난 강점만 가진 선수였기 때문에 클럽에서는 비교적 밋밋한 편이었는데, 국제대회에서는 무엇이든 하나의 뚜렷한 강점을 지닌 선수들이 강세를 보이는 특이한 현상이 있고 [28] 클로제와 포돌스키를 보유한 독일 국가대표팀은 둘의 강력한 장기를 유감없이 보여줄 수 있었다. 강력한 골게터 포돌스키 & 제공권을 포함한 온 몸을 사용한 연계가 뛰어난 클로제 조합은 독일 국대가 한동안 자랑하던 최고의 콤비였었고, 이 환경에서 포돌스키는 각종 개인수상 및 월드컵 메달까지 획득하며 평소 자신을 괴롭히던 극명한 단점들을 잊은 채 자신의 장점을 미련없이 보여줄 수 있었고, 그렇게 '국대스키'의 모습을 세상에 남기게 된다.


6. 기록[편집]



6.1. 대회 기록[편집]









6.2. 개인 수상[편집]


  • FIFA 월드컵 베스트 영플레이어: 2006
  • UEFA 유로 실버슈: 2008 #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2008
  • 키커 올해의 팀: 2009-10
  • 2. 분데스리가 득점왕: 2004-05
  • 독일 이달의 축구 선수: 2003년 12월, 2004년 4월, 2005년 1월, 2006년 4월
  • 독일 올해의 골: 2017, 2022
  • 독일 이달의 골: 2004년 1월 · 5월 · 10월, 2005년 1월 · 3월 · 6월 · 9월, 2006년 4월, 2008년 7월, 2011년 2월, 2016년 7월, 2017년 3월, 2022년 11월


6.3. 수훈[편집]


  • 은월계수잎 훈장[29]: 2006, 2010, 2014


6.4. 출전 기록[편집]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대륙대회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2002–03
1. FC 쾰른 2
레기오날리가 Nord
1
0
-
-
-
-
2003–04
1. FC 쾰른 2
레기오날리가 Nord
1
0
-
-
-
-
2003–04
1. FC 쾰른
분데스리가
19
10
1
0
-
-
2004–05
1. FC 쾰른
2. 분데스리가
30
24
2
5
-
-
2005–06
1. FC 쾰른
분데스리가
32
12
1
0
-
-
2006–07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22
4
3
2
7
1
2007–08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25
5
4
0
12
5
2007–08
FC 바이에른 뮌헨 2
레기오날리가 Süd
2
0
-
-
-
-
2008–09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24
6
3
1
4
2
2009–10
1. FC 쾰른
분데스리가
27
2
4
1
-
-
2010–11
1. FC 쾰른
분데스리가
32
13
2
1
-
-
2011–12
1. FC 쾰른
분데스리가
29
18
2
0
-
-
2012–13
아스날 FC
프리미어 리그
33
11
2
1
6
4
2013–14
아스날 FC
프리미어 리그
20
8
4
3
3
1
2014–15
아스날 FC
프리미어 리그
7
0
0
0
5
3
인터 밀란
세리에 A
17
1
1
0
-
-
2015–16
갈라타사라이 SK
쉬페르리그
29
12
3
1
8
2
2016–17
갈라타사라이 SK
쉬페르리그
21
7
5
10
1
0
2017
비셀 고베
J리그
15
5
1
0
-
-
2018
비셀 고베
J리그
21
5
1
0
-
-


7. 여담[편집]


  • 본인은 독일 국적이고 독일 국가대표임을 항상 인식하고 있으며, 이름도 폴란드어가 아닌 독일어식 이름을 쓰고 있으나[30] 본인 정체성의 뿌리는 폴란드인으로 규정하는 듯 하는 면모를 여러 인터뷰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실제로도 모국어는 폴란드어이다. 독일과 폴란드와의 국가대표 경기에서 독일 국가를 부르지 않는다.[31] UEFA 유로 2008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포돌스키 혼자 2골을 넣어 독일의 2:0 승리를 이끌었을 때 그는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았으며 골 세레머니도 하지 않았다. 사실 독일 대표로 뽑히기 전, 만약 폴란드 국대에서 그를 먼저 불러 데뷔시킬 의향이 있다면 동의할 생각이었다고 하나, 당시 폴란드 국대의 감독이 포돌스키에 대해 별 관심을 주지 않아서 결국 독일 대표 제의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독일 국대의 득점을 책임지는 애국자라는 별명과는 다소 아이러니한 관계에 있는 위치.

  • 선수 생활 초기에는 폴란드계여서 독일어가 서툴러 조롱을 많이 당했고, 이 때문에 당시 몇몇 언론이 자신을 놀림거리로 삼아서 언론에 호의적이지 않다. 이 중 일부 언론과는 지금까지도 일절 인터뷰를 하지 않을 정도다.

  • 쾰른 시민들의 애정이 상당하다. 폴디를 '쾰른의 아들'로 불러대며 그를 매우 좋아하여 어떠한 부진을 겪어도 쉽게 욕하지 않고, 심지어 가난한 시민구단인 FC 쾰른이 이적료가 없어 포돌스키를 되사오지 못하자 자발적으로 그의 사진을 구매하는 등 나름대로 돈을 모아 이적료를 마련한 일은 유명하다. 쾰른 복귀 후 부진에 허덕일 때도 포돌스키를 욕하지 않고 대신 '우리 폴디한테서 신경꺼라 언론 XXX들아'라는 투의 플랜카드를 경기장에 걸었다.

  • 폴디 본인도 쾰른을 제2의 고향으로 인식할 정도로 애정이 엄청나다. 1.FC 쾰른으로 돌아와 활동하던 당시에는 무려 자비로 의상을 준비해 해마다 열리는 로젠몬탁 페스티발에 참가해 거리 곳곳에 과자를 뿌렸었고, 아스날에서 뛸 당시에도 부상 중이거나 라인업에서 제외될 때면, 독일로 날아가 쾰른의 홈 경기를 관전하기도 하였다. 폴디의 아내와 자식들도 여전히 쾰른에서 생활 중이다. 쾰른이 빅매치를 이기거나 하면 광속으로 인스타그램에 포스팅을 한다.

  • 한때 바이에른 뮌헨에서 FC 쾰른으로 돌아올 때 F1 레이서 미하엘 슈마허가 포돌스키를 위해 성금을 일부 지원한 바가 있어서 2014 브라질 월드컵 포르투갈과의 경기 전날에 6개월 전 스키장의 사고로 아직도 슈마허가 혼수상태에 빠지자 "포르투갈전을 슈마허를 위해 뛰겠다"고 말한 바 있지만, 당일날 기적적으로 슈마허가 혼수상태에서 회복하면서 훈훈한 광경이 목격되었다.


  • 바이에른 뮌헨에서 다른 팀으로 이적한 이후 인터뷰에서 "뮌헨에 별 감정은 없다"고 얘기했지만, 아스날 시절 바이에른 뮌헨을 만났을때 왕성한 경기력을 보여줬고 골까지 넣었다.

  • 준수한 얼굴에 개구쟁이, 악동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대내외적으로 사생활, 특히 이성 문제 쪽은 매우 깨끗한 편이다. 2006 독일 월드컵 당시 패리스 힐튼이 그에게 '만나지 않겠느냐'라는 투로 이야기하며 큰 관심을 표한 바 있으나 본인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후 17세부터 교제하며 몇 년 전부터 동거해오던 폴란드 출신 여성 Monika Puchalski와 2011년에 결혼식을 올렸다.[32] 둘 사이에는 결혼 전인 2008년에 태어난 아들(Louis Gabriel Podolski, 16세)과 갈라타사라이 이적 후인 2016년에 태어난 딸(Maya Podolski, 8세)이 하나씩 있다.

  • 국내 한정으로 포돌이를 포돌스키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포돌스키의 별명으로 부르고 있다.

  • 그와 함께 애국자라 불린 클로제와 비슷한 면이 많이 있는데, 두 사람 모두 폴란드 출신이며, 아버지 발데마르 포돌스키[33]축구선수이고 어머니 크리스티나 포돌스카[34]핸드볼 선수로 활동했던 경력이 있다.


  • 은근히 요식업을 이것저것 했는데, 성공한 편이다. '아이스크림 유나이티드'라는 이름의 아이스크림집을 이미 쾰른에 하나 갖고 있는데, 2018년 초, 케밥 레스토랑을 하나 더 열었다. 가게 이름은 'Mangal Döner'이며 개업 첫날 1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 경찰이 교통정리까지 했다고 한다. 구글 평점이 본점 기준으로 5점 만점에 팬심 거품이 다 빠졌을 2022년 현재에도 4.1점, 분점들도 모두 4점 이상으로, 맛으로도 호평받고 있다. 아이스크림 유나이티드는 소매점에도 납품 중이며, 망갈 되네르는 쾰른 내에 몇 개의 지점을 더 내는 등 둘 다 사업적으로 안착에 성공한 상태이다.

  • 사진을 찍을 때 따봉 포즈를 많이 취한다. 위의 사진 2장에 나와있는 쌍따봉이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몇몇 팬들은 장난스레 따봉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다만 경기 중 찬스 날려 먹고 따봉을 날리는 쪽은 아니다. 주로 유니폼 들고 사진 찍을 때 많이 날린다.

  • 애국자답게 풋볼 매니저에서도 히든 능력치인 적응력을 5, 일관성을 9로 만들어놓았다. 대신 중요 경기 활약은 20.[35]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6 03:28:27에 나무위키 루카스 포돌스키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폴란드에서 독일귀화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귀화가 아니라 독일 국적자인 아버지에 의해 자동으로 독일 국적이 부여되었다. 따라서 원래 이중국적자였다. 게다가 포돌스키는 유년기 시절 폴란드 국적을 포기했다. 나중에 폴란드 축구협회가 포돌스키를 U-21 대표팀에 발탁하려고 봤더니 폴란드 시민권이 없어서 소집을 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무엇보다도 포돌스키 본인 자체가 2살 때부터 성장한 독일 쾰른을 자신의 고향으로 여기며 상당한 애향심을 보이고 있다.[2] 공식 홈페이지[3] 윙어, 세컨드 스트라이커[4] 최전방 스트라이커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기는 하나 원톱에서는 부진한 경우가 많아서(다만 팀에서 투톱 전술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최전방을 뛰게 되어도 그나마 원톱 때 보다는 괜찮은 편이었다.) 최전방 자리는 뛴다고 하면 팀에서 투톱 전술을 사용할 때나 혹은 원톱 전술을 쓰는 팀일 경우에는 팀내에서 쓸 수 있는 공격수가 도저히 아예 없는 상황에서만 기용된다.[5]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출장 3위, 역대 득점 3위.[6] 전 소속팀 FC 쾰른에서의 독보적인 활약으로 폴디 왕자님(Prinz Poldi)이라는 별명도 있다.[7] 그 무렵 친 사고 중 가장 큰 것이 누리 사힌 3:0 드립 사건이었다. 도르트문트의 선수였던 누리 사힌과 태클 문제로 인해 시비가 붙자 면전에 대고 손가락으로 3과 0을 표시하며 독일 대표팀에게 3:0으로 패한 터키 대표팀을 조롱했다. (누리 사힌은 외질과는 달리 독일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터키 대표팀을 선택한 터키 국가대표 선수이다. 둘이 비교되는 바람에 당시 이로 인해 본의 아니게 외질이 터키 국민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받게 만든 장본인.) 당시 경기 영상을 살펴보면 비웃는듯한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해당 숫자를 만들면서 drei, null(3, 0)이라고 말하는 입모양이 잡힌다. 그리고 포돌스키가 이렇게 조롱을 한 지 5분도 채 안 되어 쾰른은 사힌에게 한 골을 내 주었다. 골을 넣은 직후 사힌이 포돌스키 바로 앞에서 골 세레머니를 하고 그 모습을 보며 뒷머리를 긁는 포돌스키의 모습까지 고스란히 중계 카메라에 실렸다.[8] Ståle Solbakken. 스웨덴 출신 감독이다.(스탈레 솔바켄으로 읽는 사람들이 많으나 å는 아 보다는 오 발음에 가깝다.) 이전 소속팀 코펜하겐을 챔피언스리그 무대에까지 올려놓아 분데스리가로 스카우트 되었으며 지도 스타일은 엄격한 스칸디나비아식 스타일. 원리원칙을 중시하고 모든 선수를 공평하게 대하며 감독의 권한을 키우려 노력했다. 무슨 짓을 해도 예쁨받는 '쾰른의 아들' 포돌스키를 위시한 스타 플레이어 몇 명에게 무게추가 기울어있고 그날 그날 경기 때마다 해당 유명 선수들의 컨디션에 따른 분위기를 많이 타는 쾰른의 무게중심을 자기 쪽으로 끌어오려는 시도를 많이 했으며 포돌스키의 주장직 박탈은 이와도 무관하지 않다.[9] 수정 전에 험한 욕을 날린 쾰른 팬들도 다수였다고 적혀있었으나 사실과 다르다. 프리시즌에 치뤄진 아스날과 쾰른의 친선경기에서도 쾰른 팬들은 페널티킥 상황을 제외하고는 포돌스키에게 전혀 야유를 하지 않았다. 이적 후에도 폴디의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는 쾰른 팬들의 호의적인 리플들이 가득하다.[10] 거기다 2012년 1월에 아스날로부터 거액의 오퍼가 왔으나 포돌스키는 팀을 잔류시키기 위해 시즌 중인 겨울에 이적하는 걸 거절했다.[11] 스토크 시티와의 경기에서 결승골,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시즌 첫 골, 챔스 몽펠리에와의 경기에서 추격, 쐐기골, 바이에른과의 경기에서 골 등이 있다.[12] 메수트 외질, 아론 램지, 잭 윌셔, 시오 월콧등이 싹다 최소 2달 이상의 장기부상을 끊었다. 거기에 월콧은 아예 시즌아웃.[13] 다만 플라미니의 운없는 자책골로 비긴 아쉬운 경기였다.[14] 사실 여름 이적시장 막판에 떠날 가능성이 높았고 본인도 인스타그램에 이적을 암시하는 사진과 글을 올렸지만 올리비에 지루가 부상당하며 갑작스럽게 남게 된 감이 있었다.[15] 250만 유로를 일단 지불하고 50만 유로는 옵션조항이 붙어있다.[16] 참고로 아스날 팬들은 이 경기를 매우 통쾌하게 생각했는데 당시 페네르바흐체의 선발 공격수가 바로 구너들의 공공의 적 1호인 반통수 로빈 반 페르시였기 때문. 경기 후 전 세계의 구너들은 폴디를 칭찬함과 동시에 반통수를 조롱하였다고 한다.[17] 온천욕 사진 자체로는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하필 포스팅 날짜가 경기 전날이라 자기가 경기에 안 나온다는걸 인증한 거라, 2018년에 이니에스타의 수족관 사건때문에 한바탕 난리난 걸 기억하는 고베로써는 이 일이 또 터져 골치아픈 상황이 됐다. 이니에스타는 이 사건으로 1달 근신처분을 받았다.[18] 덴노배에서 우승함으로써 고베가 2020 AFC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함에 따라 같은 조에 편성된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의 경기를 위해 방한할수도 있었지만 그 전에 먼저 떠나버려서 이젠 안드레스 이니에스타만 남았다.[19] 포돌스키가 있던 전차군단은 내내 아르헨티나와 포르투갈을 꺾을 만큼 메날두에게 상성까지 우위였던 팀이었다.[20] 독일어에서 Arschloch라는 욕은 영어의 Asshole과 사전적인 의미는 같지만 어감은 영어 쪽보다도 훨씬 강하고 모욕적인 단어이다. 우리나라의 오히려 '씨X놈' 정도 되는 욕이다.[21] 우리나라에서 이 사건으로 팬을 꽤 잃었다. 특히 발락의 팬들이나 당시 발락이 몸 담고 있던 첼시의 팬들은 거의 다 등을 돌렸다. 그러나 엄격한 위계질서가 강한 우리나라에선 유독 '주장에게 대든 괘씸한' 포돌스키로서의 이미지만 부각된 데 비해, 당시 독일에서는 통독세대의 비중이 큰 현 독일 대표팀에서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고압적으로 선수들을 다루는 발락의 태도 또한 같이 비판받았다. 이는 동독 출신으로 공산주의 사회의 경직된 문화를 보고 배운 발락의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22] 그러자 월드컵이 끝나고 비난의 화살은 쾰른으로 향했다. '이렇게 멀쩡한 선수를 어떻게 쓰길래 클럽에서의 성적이 안 좋냐' 등이다.[23] 이 기록은 1986년 3월 30일 생인 세르히오 라모스가 2013년 3월 26세 357일의 나이로 2014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예선 4차전 핀란드와의 경기에서 100번째 경기를 달성함으로써 얼마 뒤에 깨어졌다. 전 세계를 기준으로 최연소 센추리 클럽은 차범근의 24세 139일.[24] A매치 역사상 가장 빠른 골은 1993년 산 마리노의 다비드 괄티에리가 잉글랜드전에서 기록한 8.3초다.[25] 조별리그 1차전, 3차전 출장[26] 파워만 따지면, 반 페르시보다 우위다.[27] 체감이 잘 안간다면 야구에서 투수 구속 최고점을 대개 160km/h 대까지 기록하는 편이며, 투수가 160km로 던진 공이 포수의 글러브까지 가는 시간은 0.35초이다.[28] 장신 타겟맨이지만 소속팀에선 별볼일없었던 피터 크라우치나 강력한 피지컬과 반대되는 부족한 기본기의 조지 알티도어, 기술적으로는 대단하나 역시 나머지가 부족했던 파올로 게레로가 그 예시이다.[29] 독일 내 스포츠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 선수들에게 수여하는 훈장.[30] 일각에서는 Lukas라는 이름이 폴란드어 이름이고 이게 포돌스키의 폴란드 혈통을 드러낸다고 이해하기도 하는데, Lukas는 독일어식 이름이고 폴란드어식 이름으로는 Łukasz(우카시)로 쓰인다. 아마 미로슬라프 클로제라는 유사사례와 혼동된다.[31] 사실 독일국가주의에 대해 대단히 경계하는 분위기가 만연해서, 독일 혈통 출신인 선수들도 이런 때에 국가를 부르지 않는 경우는 꽤 많다. 따라서 특별히 민족 정체성 때문이라고 볼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32] 결혼식은 폴란드 Kamionna에서 가톨릭 혼인성사로 진행하였다.[33] Waldemar Podolski[34] Krystyna Podolska[35] 근작에서는 그래도 적응력을 10 초중반까지는 올려줬다. 다만 일관성은 여전히 형편없고, 중요 경기 활약은 최고급. 반면 프로 의식이 비례해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