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MS 루시타니아

덤프버전 :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일:RMS Lusitania in New York 1907.jpg

RMS LUSITANIA

1. 개요
2. 루시타니아 호 침몰사건
2.1. 국제법 위반 관련 논란
3. 잔해
4. 창작물
5. 여담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RMS 루시타니아는 RMS 타이타닉을 운영했던 회사로 유명한 영국 화이트 스타의 경쟁사인 큐나드 라인이 운영한 여객선이다. 1904년에 건조가 시작되었고, 1906년 진수식을 거쳐 1907년 정식으로 취역하게 된다. 자매선으로는 RMS 모리타니아가 있다. 이름은 로마 제국 당시 유럽 대륙 서부에 존재하던 루시타니아 속주[1]에서 따왔다.

루시타니아는 당대 기술적으로 가장 진보적이였던 대서양 횡단 여객선으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도록 쾌속 여객선을 원했던 큐나드와 유사시 군선으로 징발해 활용할 수 있는 상선의 개념을 실증하고 싶었던[2] 영국 해군의 필요가 맞아떨어져 루시타니아의 건조는 해군 당국의 지원을 받아 건조되었다.

대명제로 "쾌속"을 상정한 여객선답게,이전까지 선박 추진기관의 주류였던 3단 팽창식(Triple-expansion)의 왕복 기관 대신, 증기 터빈을 도입했다. 증기 터빈은 1897년 관함식에 난입했던 찰스 파슨스 경[3]의 터비니아(Turbinia)가 보여줬듯 왕복 엔진보다 고속, 고효율임과 동시에 진동이 적고 신뢰성이 높아 루시타니아의 고속성에 큰 지분을 차지했다. 총 48개의 석탄 보일러에서 증기를 공급받아 4개의 터빈을 가동하는 루시타니아는 4개의 3엽식 프로펠러[4]에 76,000 SHP(Shaft HorsePower)의 당대로서는 엄청난 고출력을 전달하며 최대 26노트의 고속을 냈다. 추진 기관의 혁신에 더불어 선체에 고강도 탄소강을 전면 도입해 외부 강판의 두께를 얇게 만들면서 강도는 더 높게 유지할 수 있었으며, 무선 통신 장비를 도입하고 밀수 격벽을 설치해 다소간의 침수에도 부력을 유지하도록 설계되었다.

내장재도 큐나드 라인의 최신 대서양 횡단 여객선답게 많은 신경을 썼다. 환기와 냉난방, 습도 조절 설비가 완비되었으며, 스코틀랜드 출신의 기술자 제임스 밀러가 디자인한 석고 위주의 인테리어는 정밀한 조각이 되어 있어 밝은 분위기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으며, 선내의 공간에 유럽 여러 국가의 시대별 건축 양식을 모방했다. 외에도 당시로서는 굉장히 안락하던 3등석도 유럽의 이민자들에게 루시타니아가 인기있던 요소였다.

1906년 시험 운행을 하던 루시타니아에는 꽤 심각한 문제가 발견되었는데, 바로 고속 운행을 시도하면 선체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진동한다는 것이였다. 얼마나 심했는지 함교에서도 그 진동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으며 기관 근처의 객실에서는 아예 사람이 있을 수 없을 정도였다. 루시타니아의 건조 목적이 쾌속 여객선이였던 만큼 이 문제는 중대한 결함이였는데, 이후 밝혀진 원인은 고속을 낼 때 프로펠러 간에 간섭이 생기고, 그 진동이 선체와 공명했기 때문이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체 후방에 위치하던 2등석 구획을 전부 뜯어내고 강도를 강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루시타니아가 격침되는 그 날까지도 진동은 끝까지 루시타니아와 그 승객들을 괴롭혔다.


2. 루시타니아 호 침몰사건[편집]


루시타니아 침몰 사고
Sinking of the RMS Lusitania


파일:Lusitania 191551.jpg

발생 날짜
1915년 5월 7일 (39794일)
발생 위치
북대서양
선종
여객선
유형
운항 중 어뢰 피격
좌표
51°25′N 8°33′W
탑승인원
1,959명
사망자
1,198명
구조자
761명



루시타니아 호 침몰사건 재현영상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영국보다 해상전력이 압도적으로 열세인 독일 제국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세우고 영국으로 접근하는 수송선을 죄다 격침시켜 영국을 말려죽이려고 들었다. 독일은 잠수함 작전을 실행하면서 각국의 일간지에 "독일 제국은 영국과 전쟁중이니 영국에 접근하는 선박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공격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광고를 냈지만, 루시타니아 호는 이를 무시하고 영국으로 항로를 잡았다. 그리고 1915년 5월 7일, 루시타니아 호는 아일랜드 앞바다에서 후고 폰 폴 제독이 지휘하는 독일 제국 해군 대양함대 소속의 유보트 SM U-20어뢰에 맞아서 그대로 침몰했고, 탑승자 1,959명 중 승무원을 비롯한 761명만이 살아남았다.

불과 3년 전에 일어난 타이타닉 침몰 사건의 영향으로 구명정 등은 충분히 구비되어 있었지만 단순난파도 아니고 어뢰 폭발로 사상자가 제법 생긴 데다가 삽시간에 일어난 재난으로 우왕좌왕하는 승객들을 승무원들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배가 18분 만에 침몰해버리면서 많은 이들이 구조되질 못했다. 그래서 타이타닉과 달리 남녀노소 사망비율이 비슷비슷했다. 엘리베이터로 탈출하려다가 전원이 끊겨 그대로 갇혀서 수장당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5] 선장 윌리엄 토마스 터너는 생존하였는데, 루시타이나의 조타실 근처 갑판에 있다가 배가 침몰하면서 바다에 빠진 후 부유물을 붙잡고 3시간을 버틴 끝에 구조되었다. 당시 침몰 해역의 수온은 11°C로 타이타닉이 침몰한 북서 대서양 해역보다는 높았지만 워낙 침몰이 빠르게 진행되었고 구조대가 도착하기까지 수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바다에 빠진 승객들 중 많은 수가 저체온증으로 사망하였다.

미국은 격분했는데, 루시타니아 호에 128명의 미국인들이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건이 미국의 세계대전 참전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였다.[6] 미국이 독일제국에 선전포고 하기 2일전인 1917년 4월 4일에도 미국 상선이나 화물선이 격침되며 미국인이 죽고있었기 때문. 이 사건 이후에 미국본토에서 독일제국에 의한 사보타지가 터지면서 여론이 급격하게 악화되었고, 급기야 1917년 1월 16일 치머만 전보 사건이 터지면서 분노가 폭발한 미국은 1917년 4월 6일 선전포고와 함께 늦게나마 협상국에 가담하고 약 1년 반만에 독일 제국을 완전히 때려 잡았다. 참고로 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인해 비단 미국뿐만 아니라 각국의 선박들이 무차별 격침당하면서 여러 나라들이 독일제국에 이를 갈았고, 결국 이는 독일 제국의 패전에도 한몫하게 된다.

2.1. 국제법 위반 관련 논란[편집]


루시타니아는 군이 아니라 민간이 운영하는 배였지만, 독일은 "루시타니아에는 약 173톤 만큼의 무기를 싣고 있었기 때문에 공격은 정당하다."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훗날 사실로 밝혀졌다. 영국으로 가는 물자 보급 사정이 좋질 않아서 민간이 운영하는 배라도 각종 군수 물자들을 실어야 했기 때문. 국제법상 민간 선박이라도 군수물자를 적재했다면 공격이 가능하다.

또한 루시타니아는 영국 해군의 보조함으로 정식으로 등록돼 있었고, 이후 약 4,200,000발의 소총탄과 1,250발의 탄피, 18개의 뇌관 등의 각종 군수 물자들을 싣고 있었다는 것이 추가로 밝혀졌다. 그래서 흔히 알려진 것처럼 독일이 무고한 민간 선박을 공격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실 민간 선박으로 위장해서 군수 물자를 수송하는 것은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었고, 태평양 전쟁에서도 일본은 민간 바지선을 이용해 식량과 무기를 수송했다. 당연히 지금도 이런 일이 흔하다.


3. 잔해[편집]


루시타니아의 잔해는 아일랜드 킨세일 남쪽 18 km 해역의 수심 93 m 해저에 우현으로 30°가량 기울어진 상태로 가라앉아 있다. 선미는 착저 충격으로 파손되었고, 조류 및 선체 부식의 영향으로 전체적으로 붕괴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이다. 대서양 심해 3800M에 침몰하여 인간 활동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타이타닉과 달리, 어로 활동과 1930년대부터 이루어진 몇 차례의 인양 시도[7]로 인해 현재는 난파선의 상태가 타이타닉보다도 더 불안정한 상태라고 한다.


4. 창작물[편집]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 중 토미와 터펜스 부부 시리즈의 첫 작품인 <비밀결사>가 이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루시타니아가 침몰하기 직전 미국 스파이가 구명정에 탑승하려는 여성에게 비밀문서를 넘겼고, 이를 둘러싼 음모가 중심 스토리다.

하츠 오브 아이언 4의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서는 이 루시타니아 사건을 계기로 역사가 뒤바뀌게 된다. 독일제국이 미국에게 루시타니아 호 침몰사건을 사과하고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철폐시킨 후, 미국에게 자국의 아동들이 굶주리고 있으니까, 각종 구호물자들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하게 된다. 미국은 사과를 받고, 작전이 철폐된 것이 확인되자 흔쾌히 각종 구호물자들을 실어보내던 도중 독일해안을 봉쇄하고 있던 영국잠수함에게 격침당해서 미국은 영국을 외교적으로 크게 압박함은 물론, 전쟁에도 참전하지 않게 되었고 이는 결국 동맹국의 승리로 끝나버린다.


5. 여담[편집]


루시타니아 호의 프로펠러 4개중 2개는 인양되어 각각 리버풀의 한 박물관 앞과 이름 모를 차고지 앞에 있다.


6.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02 13:27:44에 나무위키 RMS 루시타니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현 포르투갈[2] 여객선이 통상 생각하는 군함처럼 화력을 투사하는 용도로는 영 아니라는 결론이 난 뒤로, 대신 병력 수송선과 병원선 등으로 변환하여 사용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RMS 브리타닉과 RMS 아키타니아.[3] 이후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를 설립해 증기 터빈을 주로 생산했다. 루시타니아의 터빈도 이 회사에서 공급받았다.[4] 1909년부터 4엽식[5] 위 영상자료에서 볼 수 있듯 침몰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어 대부분의 구명정들이 승객들을 태우기도 전에 루시타니아호와 함께 가라앉았고 그나마 먼저 내려진 구명정들도 수면에 내려지기 전에 고정고리가 풀려 태우고 있던 승객들과 함께 수면으로 추락하거나 루시타니아 호의 선체에 밀려서 전복되면서 결국 제대로 내려진 구명정은 48척 중 6척으로 전체 수의 6분의 1도 되지 않았다.[6] 독일 제국은 미국에게 루시타니아호 사건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했고 잠시나마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멈추는 모습까지 보여주었기에 미국도 한발 물러나주었다.[7] 침몰한 해역이 연안인데다 수심이 얕아서 여러 차례에 걸쳐 일부 잔해와 유류품에 대한 인양이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