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란트 프라이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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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 제3대 민족재판소장
롤란트 프라이슬러
Roland Freisler


파일:롤란트.png

출생
1893년 10월 30일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독일 제국 니더작센 첼레
사망
1945년 2월 3일 (51세)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베를린
국적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신장
174cm
임기
나치 독일 인민재판소장
1942년 8월 20일 - 1945년 2월 3일
계급
슈투름압타일룽 소장 (여단지도자)
가족
아버지 오스발트 프라이슬러
부인 마리온 루세거
슬하 2남
학력
파일:예나 대학교 Seal.png 예나 대학교 (법학)
소속 정당

(1919 ~ 1932)

(1932 ~ 1945)
직업
정치인, 법조인, 판사
약력
프로이센주 주의원
나치 독일 인민재판소장
수여 훈장
2등급 철십자 훈장
1등급 철십자 훈장
1. 개요
2. 생애
3. 매체에서



1. 개요[편집]


파일:attachment/highres_30016345_copy1.jpg
파일:external/img.welt.de/Roland-Freisler.jpg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기 전 나치식 경례를 하는 모습.[1][2]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관련자 판결문을 읽는 프라이슬러.

독일 국민의 피가 오염되지 않도록 독일 사법이 엄벌을 하여 막아야 한다.

롤란트 프라이슬러

나치 독일의 법조인이자 나치당원.

독일의 민족재판소장을 맡으며 피고인에게 야만적인 재판방식과 무자비한 판결을 자행한 것으로 악명이 높은 인물이다.


2. 생애[편집]


프라이슬러는 독일 북부 니더작센주 첼레(Celle)의 기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2년 예나 대학에 입학했으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육군 간부후보생[3]으로 독일군에 입대하였고, 이후 소위로 진급했다. 무공을 세웠는지, 2급 및 1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러시아 제국군에 잡힌 후에 근면한 자세가 인정받아서 포로 대표로 일하였다. 포로 수용소 생활 중에 공산주의를 접하고는, 종전 후 고향으로 돌아와서 독일 공산당에 입당했다.

1920년 예나 대학에 되돌아와서 법률을 공부하고 1922년 변호사 자격을 얻어서 사무소를 열었다. 1924년 카셀 지역에서 법률가로 활동했는데, 이때 수시로 당국에 잡혀 들어가던 나치 돌격대원(SA)들을 변호해준 것을 시작으로 나치와 인연을 맺게 된다. 한때 공산당원이었지만, 이념에 충실하기보다는 기회주의자에 전형적인 출세지향적 성격이었기 때문에 나치가 득세하는 것을 보고 바로 전향해서 1932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에 입당한다.

나치당 법률고문으로 시작해서 1932년에는 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33년 나치당이 집권한 이후에는 프로이센 주 법무부 행정사무관, 1934년 프로이센 주 법무차관과 제국 법무차관을 겸임하는 등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나치 독일 체제가 굳어진 1942년 1월에는 법무장관 대리로서 소위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에 영향을 미친 '반제 회의'[4]에도 참석한다. 그리고 1942년 인민재판소장 오토 티라크가 법무장관이 되면서 그 후임으로 인민재판소장으로 임명되었다. 3년이라는 프라이슬러의 재임기간 동안 인민재판소가 내린 사형 판결이 총 5천여 건인데, 프라이슬러 혼자서 수많은 반나치 인사들을 포함해서 무려 2,600여 건의 사형 판결을 내렸으며, 그가 담당한 판결에서 사형을 판결받을 확률은 90%에 달했다. 당연히 제3제국 재판관 중 가장 많은 사형 판결을 내린 것으로 피의 재판관이란 악명을 얻었다. 다만 프라이슬러가 정치범만 전담한 것은 아니라, 그 사형 대상자들 중에는 정말 사형 선고가 마땅한 흉악범이나 간첩 같은 자들도 있었다. 물론 그런 자들만 사형에 처했으면 애시당초 전범(戰犯)으로 규정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화에서는 프라이슬러가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이 집권해 있던 소련모스크바에서 있었던 재판을 보면서 매우 집중했다고 한다.

인민재판소는 사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의 인민재판을 모방하여 군중선동으로 판결하려는 의도로 설치된 것이었으나[5], 전쟁 말기가 되어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간략한 재판(단심제)과 신속한 처형(판결 후 수시간 안에 처형)을 위해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판사의 원맨쇼로 운영되었다. 여기서 판사는 검사보다도 더 피고인을 다그쳤으며, 변호사마저도 피고를 변론하기는커녕, 피고인은 동정의 여지가 없으니 극형에 처해야 한다라고 말 정도였다. 예외적으로 전직 라이히스방크(Reichsbank) 총재인 얄마르 샤흐트는 이곳에서도 뛰어난 언변과 엄청난 변론 실력에 변호사건 롤란트를 압도했으며, 심지어 그 롤란트마저 충격받고 말을 더듬어버리고 말았다.[6]

그중에는 영화 '조피 숄의 마지막 나날들'로 유명한 백장미단 사건의 조피 숄과 한스 숄 남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주동자들 중 프리드리히 프롬 장군이 입막음을 위해 당일 처형당하던 와중 이를 피했던 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프라이슬러는 제국 법무장관이 되기를 애타게 희망했고 나름 능력도 있었지만, 결국 출세는 차관에서 멈췄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꼽히는데, 우선 나치당 내에서 프라이슬러의 인기가 형편없었다. 왜냐면 그가 판사로서의 최소한의 공정성조차 가지지 않고 무작정 나치에 충성하는 것만 생각한 작자였기에 재판을 워낙 막장으로 해서 인망이 없었고 그 나치당에서도 프라이슬러를 미치광이라며 경멸하는 인사가 많았고 슈츠슈타펠 장관 하인리히 힘러 등 나치 인사들 중에서도 일부만이 프라이슬러를 좋아했다. 또한 전직 공산당원이여서 아돌프 히틀러는 프라이슬러를 우리의 비신스키(대숙청 당시 소련 검찰총장)라며 추켜세우면서도 한편으론 볼셰비키라고 경멸했다.[7] 이때문에 프라이슬러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자에서 나치로 전향한 요제프 괴벨스 선전장관은 프라이슬러를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여기에 나치당원이면서 반나치주의자를 변호하고 1939년 투신자살한 남동생 문제도 발목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재판 장면.

프라이슬러의 재판방식은 피고인의 인격을 완전히 무시하며 고압적인 자세로 심문하며, 욕설도 서슴지 않는 것이었다. 실제로 상술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재판은 괴벨스가 선전용으로 촬영을 지시한 것인데, 프라이슬러의 과도한 욕설과 미치광이 같은 태도로 '나치에 대한 불신감'을 안겨주는 등 국민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해 주간뉴스에는 공개되지 않았다.[8] 역으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연합군 검사단이 이를 증거자료로 상영하였고, 헤르만 괴링은 이를 보고 "홀로코스트 기록 영화보다도 불쾌하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나치 최고위층들도 이렇게 평했을 정도였으니 재판에 회부된 사람들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이 영상을 녹화할 때 독일 방송기술자들이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프라이슬러가 원체 고함을 내지르면서 재판하는 스타일이라 목소리가 뭉개지지 않도록 녹음하느라 진땀을 뺐기 때문이다. 이 당시 독일 방송기술자들은 오픈릴 테이프 등 세계에서 가장 최첨단 기술에 우선적으로 접근 가능했던 사람들인데도 이 모양이었다. 게다가 프라이슬러는 1943년 4월에 있던 하얀 장미 회원들의 두 번째 재판에서 재판 초두에서부터 국가사회주의가 그러한 '반역자'에 대한 형법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피고인에게 소리쳤고, 배심원이 아무 말 없이 그에게 형법책을 건네자 프라이슬러는 책을 받은 즉시 형법책을 피고석 쪽으로 던졌으며 그 피고인은 머리에 형법책을 맞는 것을 피하기 위해 몸을 숙였다고 한다.

나치 주요 인사 중 하나로 전쟁이 끝나면 다른 나치 주요 인사들과 함께 반드시 처단받아야 될 인물 중 하나였으나, 전쟁이 끝나기 전에 비명횡사하면서 프라이슬러에 대한 심판은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종전을 세 달 가량 앞둔 1945년 2월 3일에 회의 중 공습 경보가 울리자 회의를 중단하고 그의 앞에 있는 수감자들을 공습 대피소로 데려가라고 명령했지만 프라이슬러는 베를린의 법원에 놓고 온 피고인 서류를 가지러 갔다가 오전 11시 8분에 미합중국 육군 항공대B-17 폭격기가 투하한 항공 폭탄이 법원 청사에 명중하면서 건물이 붕괴할 때 그 잔해에 깔렸기 때문이다. 프라이슬러는 죽는 순간에도 가지러 가려던 파일을 계속 움켜쥐고 있었다.[9]

그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인물이었는지 한 외국 특파원은 "아무도 그의 죽음을 후회하지 않는 것 같다"고 증언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프라이슬러의 시체가 뤼초 병원에 실려왔을 때, 거기서 일하던 알프레트 요들 장군의 아내인 루이제 요들의 증언에 따르면 한 직원이 그 시체를 보고 "신의 천벌을 받은 거지, 암"이라고 말하자 주변에 있던 다른 직원들 모두 다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현재도 전쟁범죄자로 규정되어 있으며 아마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복권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비록 법관은 아니고 경찰이긴 했지만, 한국에도 '반체제 인사에 대한 무자비한 형량'을 밥먹듯이 내렸다는 것에서 프라이슬러와 유사한 인물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일제강점기에 평안북도 경찰부 주임과 고등과장을 역임한 김덕기인데, 비록 김덕기는 통상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체포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고문은 자행하지 않았지만, 그가 취급한 독립운동가 관련 사건만 4,000여건에 체포하고 검거한 독립운동가 숫자만 무려 1,000여 명에 달했으며 그 중 10명 중 1명은 사형을, 10명 중 1명은 무기징역을, 10명 중 1명은 10년 이상 징역형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나머지도 모두 1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무죄를 선고받은 사람은 전혀 없었다.[10]


3. 매체에서[편집]


파일:external/www.saxonia-entertainment.de/GMD_Roland-Freisler_018_detail.jpg

파일:external/3.bp.blogspot.com/Sophie+Scholl+2005+Pelicula+Roland+Freisler.jpg
백장미단이나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등 반나치 저항 세력에 대한 재판에 항상 참석했기 때문에 관련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조피 숄의 마지막 나날들'에서는 몰락에서 무장친위대(Waffen-SS) 소장 빌헬름 몬케 역을 맡았던 안드레 헤니케가 역을 맡아 좋은 연기를 펼쳤다. 어찌나 열연했던지 '한 대 치고 싶을 만큼 뛰어난 싱크로율이었다'는 평까지 있을 정도. '작전명 발키리'[11]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전기 영화인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에도 짧게나마 등장한다.

파일:컨스피러시 롤란트 프라이슬러.jpg
반제 회의를 다룬 영국 TV 영화 '컨스피러시'에서 등장한다. 영국 배우 오웬 틸(Teale)이 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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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 명 중 가운데의 인물이 프라이슬러다.컬러 사진 속의 프라이슬러.[2] 왼쪽은 국방군참모본부(OKW) 소속이었던 육군 보병대장 헤르만 라이네케(Hermann Reinecke 1888. 02. 14 ~ 1973. 10. 10) 장군이고, 오른쪽은 동료 판사였던 에른스트 라우츠(Ernst Lautz : 1887. 11. 13 ~ 1979. 01. 21)다. 이 둘은 프라이슬러와 달리 패전 후에도 살아남아 재판에 회부되었고, 각각 종신형과 1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석연찮은 이유로 풀려나 천수를 누렸다. 사실 먼저 죽은 프라이슬러는 말이 없으니 어지간한 건 재판장인 프라이슬러에게 전부 떠넘겼을 가능성이 높다.[3] 독일 제국에도 육/해군 사관학교가 존재하긴 했지만 졸업자 수는 매우 적었으며, 지나치게 엘리트주의적이라서 공급은 수요에 미치지 못했다. 육군은 많은 경우 일단 간부후보생으로 각 부대에 입대하여 실무를 익힌후, 그 부대에서 소위로 임관했다.[4] 베를린 교외의 반제 지역의 별장에서 열렸기 때문에 '반제 회의'라고 부른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주도한 이 회의에서 유대인의 최종절멸을 목적으로 수용소 설치와 대량학살이 결정되었다.[5] Volksgerichtshof, 일반법원이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용의자들을 모조리 무죄로 판결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히틀러의 명령으로 1933년 설치되었다.[6] 실제로 샤흐트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도 영어로 응수할 정도로 똑똑했던 인물이었다.[7] 참고로 비신스키도 프라이슬러와 비슷한 케이스인데. 비신스키는 본래 멘셰비키였다가 볼셰비키로 전향했다.[8] 실제로 이 영상을 틀려고 하면 '다음 콘텐츠는 YouTube 커뮤니티에 의해 일부 시청자에게 부적절하거나 불쾌함을 주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먼저 뜬다.[9] 참고로 그 서류의 주인은 당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관련으로 재판을 받던 파비안 폰 슐라브렌도르프(Fabian von Schlabrendorff, 1907~1980)였는데, 프라이슬러가 타이밍 좋게 죽은 덕분에 살아남아 서독 연방헌법재판소 재판관까지 지냈다.[10] 물론 악행이 악행인지라 해방 후 반민특위에 회부되었고, 반민특위에 회부된 사람 중 유일하게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반민특위가 와해되며 곧 풀려나왔고, 6.25 전쟁 직전에 정릉 근처 산에서 실족사한 것으로 전해지며 프라이슬러와 비슷하게 제 명에 가지는 못했다.[11] 영화 끝부분에 등장한다. 배역은 헬무트 스타우스(Helmut Stauss)가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