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타어 마테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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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타어 마테우스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클라우스 알로프스
(1986~1988)

로타어 마테우스
(1988~1994)


위르겐 클린스만
(1994~1998)


FC 바이에른 뮌헨 주장

라이몬트 아우만
(1991~1994)

로타어 마테우스
(1994~1997)


토마스 헬머
(1997~1999)


로타어 마테우스의 수상 이력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파일:실버볼.png

1990 FIFA 월드컵 실버볼

파일:발롱도르 트로피.png

파일:World Soccer.png

파일:옹즈도르.png

파일:FIFA 로고.svg




베스트팀
파일:Kicker 로고.svg

1982-83 · 1983-84 · 1987-88 · 1992-93 · 1993-94
파일:UEFA 유로 1988 로고.svg

파일:Ballon d'Or.png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2px; background: #ffffdd; font-size: 0.9em"
발롱도르 드림팀



1991 Ballond'or
수상
장피에르 파팽
2위(공동)
로타어 마테우스
다르코 판체프
데얀 사비체비치
3위
수상자 없음
1991 Onze d'Or
Onze d'Or
Onze d'Argent
Onze de Bronze
장피에르 파팽
크리스 워들
로타어 마테우스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로타어 마테우스의 기타 정보











Fußball-Club Bayern München e.V. Ambassador

이름
로타어 마테우스
Lothar Matthäus
본명
로타어 헤르베르트 마테우스
Lothar Herbert Matthäus[1][2]
출생
1961년 3월 21일 (62세)
서독 바이에른주 미텔프랑켄[3]
국적
[[독일|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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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신체
174cm
직업
축구 선수 (미드필더[4], 수비수[5] / 은퇴)
축구 감독
방송인
소속
선수
1. FC 헤르초게나우라흐 (1971~1978 / 유스)
1. FC 헤르초게나우라흐 (1978~1979)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79~1984)
FC 바이에른 뮌헨 (1984~1988)
인테르나치오날레 (1988~1992)
FC 바이에른 뮌헨 (1992~2000)
메트로스타즈 (2000)
감독
SK 라피트 빈 (2001~2002)
FK 파르티잔 (2002~2003)
헝가리 대표팀 (2003~2005)
아틀레치쿠 파라나엔시 (2006)
FC 레드불 잘츠부르크 (2006~2007)
마카비 네타냐 FC (2008~2009)
불가리아 대표팀 (2010~2011)
국가대표
150경기[6] 23골 (서독·독일 / 1980~2000)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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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 - 6번
FC 바이에른 뮌헨 - 8번, 10번[1]
인테르나치오날레 - 10번
독일 대표팀 - 8번, 10번


1. 개요
2. 유년기
3. 클럽 경력
4. 국가대표 경력
5. 플레이 스타일
6. 평가
7. 지도자 경력
8. 기록
8.1. 통산 기록
8.2. 대회 기록
8.3. 개인 수상
8.4. 수훈
9. 마테우스에 대한 말말말
10. 여담



1. 개요[편집]


독일축구 선수 출신 감독이자 해설가, 평론가. 선수 시절 포지션은 미드필더, 수비수.[7] 별명은 철인[8], 늑대사령관[9].

선수 생활을 22년이나 했던 선수로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서 활약하다가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여 분데스리가 3연패를 이끌었고, 인테르에서는 클린스만, 브레메와 함께 게르만 삼총사를 이루어 세리에 AUEFA컵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바이에른으로 돌아와 8년간 분데스리가 4회, UEFA컵 1회 우승을 이끌고 2000년에 은퇴했다. 또한 국가대표팀에서는 월드컵 3연속 결승 진출과 1회 우승ㆍ2회 준우승, 유로 1회 우승에 기여했고, 특히 1990 월드컵에서는 실버볼을 수상하였다. 이 업적으로 1990년 발롱도르를 수상했으며, 1991년엔 FIFA 올해의 선수 초대 수상자로 등극하였다.[10]

은퇴 후 2001년부터 2011년까지 헝가리 대표팀 감독을 비롯해 여타 팀을 지휘했으나 화려했던 선수 시절과는 달리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2011년 이후 더 이상 지도자를 맡지 않고 축구 평론가로서 분데스리가나 독일의 A매치 해설위원(ZDF)을 맡거나 언론에 기고를 하고 있다.

2. 유년기[편집]


바이에른주 북서부 에를랑겐에서 태어났다. 에를랑겐은 바이에른에 속해 있지만 에를랑겐을 포함한 북서부 바이에른은 원래 역사적으로 바이에른이 아닌 프랑켄 지역으로 분류되는데, 19세기나폴레옹 전쟁 때 바이에른이 전리품으로 프랑켄 지역 땅을 대거 획득하면서 바이에른에 편입되었다. 하지만 이 지역은 아직도 바이에른보다는 역사적 배경과 사투리를 공유하고 있는 튀링겐, 헤센, 뷔르템베르크, 라인란트-팔츠쪽과 동질성이 강한 편이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프랑크 왕국 시절을 거쳐 신성 로마 제국 시절까지의 고대, 중세 독일사를 잘 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 마테우스가 바이에른 뮌헨이 아닌 라인란트의 묀헨글라트바흐에 영입되어 선수 경력을 시작한 것도 이러한 배경을 알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3. 클럽 경력[편집]


1971년부터 지역의 1. FC 헤르초게나우라흐라는 아마추어 팀 유소년 팀에서 성장했다.

이후 묀헨글라트바흐에 영입되어 1978-79 시즌 성인 팀에 데뷔했는데, 이 시즌 22경기 20골이라는 무시무시한 성적을 보여줬다.


3.1.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편집]


1979년 분데스리가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에서 프로 선수로 데뷔했다. 데뷔 시즌부터 주전을 차지했으며 해당 시즌 결승 1차전에서 결승골을 득점하는 등 팀의 UEFA컵 준우승을 견인한다.[11] 82-83 시즌엔 키커 평점 미드필더 부문 1위를 차지하며 분데스리가 대표 선수로 자리매김한 마테우스는 84-85 시즌, 분데스리가의 거대 클럽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한다.

사실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현지 올드 팬들에게는 마테우스는 영웅이라기보단 배신자 이미지가 더 크게 남아 있다고 한다. 뛰어난 활약을 펼쳤지만 결국에는 라이벌 클럽으로 이적했고, 이적 직전인 83/84 시즌 DFB-포칼 결승전 상대가 바이에른 뮌헨이었는데 이 경기 승부차기에서 마테우스의 실축으로 졌다. 그러고 나서는 바이에른으로 떠나버렸으니 배신자로 찍힌 것이다. 그래서 마테우스가 글라트바흐 원정 와서 공을 잡으면 "Judas!(유다!)"라는 야유 소리가 온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3.2. FC 바이에른 뮌헨 1기[편집]


이 시기의 바이에른은 근 3시즌간 리그 타이틀 획득에 실패하고 4위권을 맴돌고 있었는데 여기에 주축이었던 브라이트니게의 해산[12] 이후 전체적인 팀의 재정비를 꾀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멤버 구성에서도 확연히 드러나는데, 전성기였던 1970년대의 화려했던 면면들과 달리, 리베로형 수비수인 클라우스 아우겐탈러벨기에의 전설적인 골키퍼 장 마리 파프, 아약스에서 활약하다가 이적해온 덴마크 출신 쇠렌 레르비 정도를 제외하면 국가 대항전에 소집되지도 못하거나, 소집되어 봐야 시니어 B 팀에서 뛸 뿐, A매치 경력은 기껏해야 2, 3경기면 많이 뛴 이들이 대다수였다.[13] 마테우스는 이들을 이끌고 4시즌간 분데스리가 3연패를 차지하는데, 그 마지막이었던 1986-87 시즌엔 유러피언컵 결승까지 진출하나 파울로 푸트레가 이끌던 포르투에게 밀려 아쉽게 준우승에 그친다.


3.3.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편집]


이후 바이에른에서 동료였던 안드레아스 브레메와 함께 인테르로 이적하는데, 여기서 끝판왕급 하드캐리를 보여준다. 이는 팀 성적에서 바로 알 수 있다. 마테우스가 이적하기 전 87-88 시즌 인테르인 11승 10무 9패로 5위, 현재 기준인 38라운드, 승리 승점 3점에 맞춰 환산 시 54.4점에 불과한 승점밖에 얻지 못했으며, 팀 내 최다 득점원이던 알레산드로 알토벨리는 9골, 그 다음인 알도 세레나는 고작 6골에 그쳤다.[14] 물론 당시 인테르에는 1980년대 세계 최고의 명장인 조반니 트라파토니 감독이 있었지만 최고라 하기엔 다소 처지는 선수들을 이끌고 우승까지 이끌어 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마테우스를 영입한 1988-89 시즌, 인테르는 26승 6무 2패로 우승, 당시 기준 58점이고[15] 현재 기준으로 환산할 시 93.8점이라는 어마무시한 승점을 얻었다.[16] 이전 시즌 9골로 팀 내 득점 1위였던 알토벨리가 유벤투스로 이적한 가운데, 6골을 넣었던 세레나는 무려 22골을 몰아 넣으며 득점왕을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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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FA컵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마테우스

이 시기부터, 절정의 폼에 선 디에고 마라도나, 1987-88 시즌을 불태운 후 부상으로 고생하던 루드 굴리트의 뒤를 이어 3시즌간 세리에 A의 에이스로서 활약한다. 비슷한 시기 세리에 A의 지배자로는 마르코 반 바스텐이 있었다.[17] 1990년 발롱도르 수상도 이 시기의 일.

1991년에는 중앙 미드필더임에도 세리에 A에서 16골을 득점하는 한편, UEFA컵에서도 12경기 6골 2어시스트라는 절정의 활약으로 우승을 이끌어 1991년 FIFA 올해의 선수의 초대 수상자가 된다.


3.4. FC 바이에른 뮌헨 2기[편집]


1991-92 시즌은 부상으로 UEFA 유로 1992에도 불참, 다음해에는 4시즌간 활약했던 인터 밀란을 떠나 FC 바이에른 뮌헨으로 복귀한다. 1992-93 시즌부터 슬슬 수비형 미드필더스위퍼(센터백)를 오가던 마테우스는, 그 다음 시즌인 1993-94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스위퍼(리베로)로 플레이하기 시작한다. 나이가 30대 중반줄로 접어들었지만 스위퍼 포지션에서도 변함없이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는데 1993-94 시즌의 경우 올리버 칸의 뒤를 이어 분데스리가 전체 평점 2위, 1994-95 시즌은 부상으로 16경기밖에 플레이를 못했으나 평점은 전체 1위에 해당하는 등 좋은 활약을 이어갔다.

마테우스의 만년인 1998년 대표팀 승선과 관련하여 큰 논란이 발생하면서 말년에 기량이 크게 하락한 것이라는 이미지를 가진 경우도 많은데, 마테우스는 30대 후반이던 99년까지 최고 수준의 모습을 보였다. 이미 월드컵 대표팀에 발탁된 것 자체가 그의 기량이 그때도 정상급이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1998-99 시즌에도 마테우스는 30대 후반의 고령에도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에 선정되는 등 수비수로도 최고 수준임을 입증하였다. 이해 소속 팀인 바이에른 뮌헨은 챔피언스 리그 결승까지 진출했고, 마테우스는 여전히 교체나 로테가 아닌 선발 주전으로 활약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1998-99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실패인데, 당시 바이에른은 결승전까지 진출해서 맨유를 상대로 전반 6분 만에 선취 득점을 하여 정규 시간 내내 1:0 리드를 유지했으나, 결국 후반 인저리 타임에 연달아 2골을 내주며 기적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마테우스의 입장에선 후반 80분에 교체된 이후, 자신의 교체 멤버인 토르스텐 핑크의 실책으로 인해 역전패를 당한 것이라 더욱 안타까울 것이다. 끝내 염원하던 빅 이어는 들어보지 못하고 메트로스타즈에서 은퇴했다. 바이에른이 다다음 시즌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하고 빅 이어를 들어 올림으로써 더 아쉽게 되었다.


4. 국가대표 경력[편집]


마테우스는 프로 데뷔 이듬해인 1980년, 처음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네덜란드전에서 데뷔했다. 나중에 독일 대표팀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로 성장했지만, 그랬던 마테우스도 초반부터 대표팀에서 주전을 꿰찼던 건 아니었다. 파울 브라이트너, 베른트 슈스터 같은 명선배들이 활약하고 있었기에 1983년 이전까지 제법 오랜 기간 동안 교체 멤버에 머물렀다. 그러나 당시 마테우스는 무척 젊었고, 당시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서독 국가대표팀에 만 19세의 나이에 발탁되었다는 것 자체가 마테우스가 지닌 잠재력이 당시에도 얼마나 높게 평가받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1980년 당시 서독은 특히 주전 경쟁이 치열하던 시기였는데, 동시대에 분데스리가에서 날렸던 디터 뮐러, 베른트 슈스터, 클라우스 알로프스 같은 네임드들도 국가대표에 승선하기가 쉽지 않았던 시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만 19세의 나이에 마테우스가 발탁되었다는 사실은 독일 국가대표팀 역사에서도 분명 특기할 만한 일이다.

대표팀에 데뷔한 직후 유로 1980 명단에 발탁되었다. 주로 교체 멤버로 활약하면서 서독이 우승을 차지하는데 일조했다.

1982 스페인 월드컵 그룹 스테이지 칠레전에 교체로 투입되어 처음 월드컵 무대를 밟았다. 이 대회에서도 로테이션 멤버나 교체 멤버로 활약했다. 이 대회에서는 서독 대표팀에서 부상 선수가 속출하였기에 대회 초중반에 로테이션 or 교체 멤버로 투입되었지만 대회 토너먼트 후반에는 루메니게가 회복하면서 별로 출전하지는 못했다. 어쨌거나 대표팀의 준우승에 기여했다.

1982 월드컵 이후 유프 데어발 감독이 대표팀의 세대교체를 단행하면서 드디어 주전으로 도약하게 된다. 일각에서는 데어발 감독 시절에 천대받다가 프란츠 베켄바워 감독이 등장하면서 핵심 멤버가 되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데어발 감독은 다가오는 1986 월드컵을 위해 대표팀의 조기 세대교체를 감행했고, 이 과정에서 그 동안 대표팀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 왔던 파울 브라이트너가 아직 31세의 나이로 한창 때였지만 세대교체를 위해 대표팀에서 하차시키고 마테우스를 주전으로 도약시켰다. 하지만 이렇게 마테우스가 처음으로 풀 주전으로서 참여한 유로 1984에서 세대교체 와중에 있던 서독 대표팀은 그다지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이며 조기 탈락했고, 그 책임을 지고 데어발 감독이 사퇴하면서 후임으로 프란츠 베켄바워가 선임되었다. 일각에서 베켄바워가 부임하면서 세대교체를 이루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이미 데어발 말기에 세대교체가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였고, 베켄바워의 스쿼드는 데어발 말기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1984년 프란츠 베켄바워 감독이 선임 후에야 드디어 대표팀의 핵심 멤버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베켄바워호 서독 대표팀의 핵심 중 핵심이 되었다. 훗날 베켄바워의 회고 인터뷰에서도 당연하지만 마테우스가 항상 가장 많이 등장하는데, 베켄바워호 초기의 팀 에이스였던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와 비교해 봐도 마테우스에 대한 베켄바워의 특별한 관심과 애정이 드러나는 인터뷰가 많다.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맹활약했다. 결승전에선 펠릭스 마가트와 함께 디에고 마라도나의 마크맨으로 기용되었는데, 하프타임 감독의 지시로 인해 대인방어를 그만두고 올라가기 전까지 철저하게 묶었다. 이러한 지우개 역할은 소속 팀에서의 역할과는 다른 것이었는데, 아쉬운 점은 정작 팀의 코어였던 마가트가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베켄바워 감독은 0:2로 패색이 짙어가던 결승전 후반에 가서야 마테우스를 올려 공격의 활로를 찾는 선택을 하고, 실제로 해당 시점 이후부터 서독의 공격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지만 정작 마라도나가 살아나며 너무 늦은 선택이었음을 드러냈다. 과감히 마가트를 대신하여 마테우스를 공격의 중심으로 팀을 개편했으며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 부분. 마테우스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베켄바워 감독은 처음에 마라도나와 아르헨티나의 전력을 과대평가하여 경기 중반까지 지나치게 수비적인 전술로 임했다가 두 골을 먹은 후에야 루디 푈러를 투입하며 공격적인 전술로 전환했다. 경기가 끝나고 베켄바워 감독은 자신의 전술적 선택을 후회했다고 한다.

1986 월드컵이 끝나고 서독 대표팀은 대표팀의 한 세대를 이끌어 왔던 루메니게, 알로프스, 마가트 등이 은퇴하고 1990 월드컵을 위한 체제로 전환되었으며, 베켄바워 감독의 강력한 신임을 받은 마테우스가 팀의 중심이 되었다. 유로 1988부터 주장으로서 팀을 이끌며 팀의 핵심 에이스로 본격적으로 활약했다. 이 대회에서 마테우스는 중앙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로 기용되어 자신의 탁월한 개인 전술을 마음껏 뽐낸다. 4강에서 리누스 미헬스가 이끄는 네덜란드를 만났는데 당시 네덜란드는 전성기의 오렌지 삼총사를 비롯한 강력한 스쿼드를 가진 팀이었다. 마테우스의 페널티킥 선제골에도 불구, 로날드 쿠만페널티 킥 동점골에 이어 마르코 반 바스텐에게 경기 막판 역전골을 허용함으로써 결승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오렌지 군단으로 도배된 대회 베스트 11에 선정된 것으로 그 활약을 가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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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

그리고 이 다음 1990 이탈리아 월드컵을 마테우스는 자신의 대회로 삼는다. 대회 직전 시즌 큰 부상을 당해 시즌을 접고 반년 가량 쉬었으나 천운으로 월드컵 개막 타이밍에 맞추어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었다. 서독 국가대표팀의 주장으로서 월드컵에 참여한 그는 늑대사령관이라는 별명답게 특유의 킥 테크닉으로 팀의 빌드업을 주도함은 물론 종종 올라가서 상대 수비를 직접 타격하는 드리블 능력과 장기인 대포알 같은 중거리 슛을 과시하였다. 특히 유고슬라비아와 조별 리그 경기에서의 득점에서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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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을 들어올리는 마테우스

마테우스를 중심으로 한 서독 대표팀은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고, 이 대회에서 마테우스는 전문 공격수가 아님에도 네 골을 기록하여 득점 공동 3위를 차지하는 등 전천후 맹활약을 바탕으로 1990년 발롱도르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를 동시에 수상했다.

그러나 부상으로 서독이 아닌 독일이라는 이름으로 처음으로 참가하게 된 메이저 대회인 유로 1992에는 참가하지 못했고, 이 대회에서 팀을 이끌었던 대표팀 후배 위르겐 클린스만이 서서히 대표팀의 리더로 자리매김해 가기 시작한다. 30대 중반에 이르러 소속 팀 바이에른에서 수비형 미드필더에서 리베로(스위퍼)로 포지션을 옮겼는데, 이후 대표팀에서도 리베로 역할을 맡게 된다. 다만 30대 초중반 이후 바이에른에서는 기본적으로 스위퍼에 바탕을 둔 리베로의 움직임을 보였다. 본래의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에서 유로 1992 직전에 당한 아킬레스건의 심각한 부상은 그에게 저돌성과 기동력을 뺏어가 버렸고, 그는 대표팀과 소속 구단을 막론하고 오랜 경험의 노련함을 살려 수비수로 내려가 스위퍼로 전직하게 된다.

만 33세가 넘은 시점에서 참여했던 1994 미국 월드컵은 40도에 육박하는 유례 없는 폭염이 경기력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평균 연령이 31세가 넘어 대회 최고령 팀이었던 독일 대표팀은 무더위 속에서 급격한 체력 저하를 겪으며 똥줄 경기력으로 일관했다. 다만 전성기에 이른 클린스만이 팀을 캐리하는 양상을 띄기도 했다. 전 대회에 이어 주장으로 참가한 마테우스는 이 대회부터 리베로(스위퍼)로 포지션을 옮겨서 출전했고, 소속 팀에서 리베로로 활약했던 마티아스 자머는 대표팀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했다. 자머는 소속 팀에서 전성기 시절 마테우스처럼 포어 리베로에 가까운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얼핏 둘의 공존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마테우스는 무더위 속에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을 보였고 자머와 호흡에 문제를 노출했다. 마테우스뿐만 아니라 슈테판 에펜베르크와 자머를 제외하면 다들 90년 우승 멤버들라 무더위 속에서 걸어다니며 빌빌 거렸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표팀의 막내이자 그나마 체력적으로 활발히 움직여 주던 슈테판 에펜베르크가 한국전에서 물의를 일으키고 대회 도중 강제 귀국 조치를 당하는 등 독일 대표팀은 내우외환을 겪으며 결국 8강에서 불가리아에게 발목을 잡힌다.

유로 1996을 앞둔 시점에서 아킬레스건 부상과 30대 후반으로 들어선 나이 문제로 국가대표에 발탁되지 못하며 사실상 국가대표 은퇴 수순에 접어든 것으로 보였다. 사실 마테우스는 1994년 월드컵 이후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렸고 때문에 대표팀에 승선하지 못한지도 제법 오래되었다. 당시 동일 포지션에 있던 마티아스 자머가 전성기에 이르렀고, 그보다 결정적인 문제는 대표팀의 핵심이었던 위르겐 클린스만과 사이가 심하게 안 좋았다는 점이었다. 마테우스와 클린스만은 무척 오랜 기간 인테르, 바이에른, 그리고 대표팀에서 활동했지만, 사이가 엄청나게 나빴다. 당시 클린스만은 포크츠 감독한테 대놓고 마테우스와 본인 둘 중에 한 명을 택하라고 엄포를 놓았다. 클린스만은 아직 전성기에 있었고, 루디 푈러카를하인츠 리들레가 은퇴한 이후 공격수 난에 시달리던 서독 대표팀에서 클린스만 이외에는 아무런 대안이 없었다. 반면 마테우스는 이미 은퇴할 나이를 넘긴 노장 중에서도 상노장이었으며, 마티아스 자머라는 걸출한 대체자가 존재했다. 게다가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데다 늙은 마테우스를 굳이 쓸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마테우스는 부상을 이유로 유로 1996 엔트리에서 배제되었고, 클린스만이 주장 완장을 차고 팀을 이끌었다. 그리고 마테우스를 대신한 새로운 리베로 마티아스 자머가 팀을 캐리해 유로 우승컵을 거머쥐면서 이제 대표팀에서 마테우스가 모습을 보일 일은 없을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대표팀에서는 사실상 은퇴한 것으로 보였지만, 1998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마티아스 자머십자인대 부상을 당하자 대체자로 들어왔다. 이미 37세를 넘긴 노장 중 완전 노장이었다. 당시 비단 독일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여러 화제를 뿌렸던 발탁이었다. 당시 마테우스의 발탁을 상징적 의미로 보는 시각이 많은데, 사실은 마테우스가 클럽에서 대표팀에 뽑힐 만큼 충분히 훌륭한 기량을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마테우스를 대체할 만한 대안도 없었다. 당시 마테우스는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분데스리가에서 정상급 수비수로 여전히 정상급의 기량을 유지하고 있었고, 소속팀인 바이에른도 마테우스가 있고 없고에 따라 경기력 차이가 제법 컸다. 독일 대표팀이 리베로를 둔 포메이션으로 오랫동안 운용되어 왔기 때문에 대회를 목전에 두고 갑자기 포백 등 새로운 포메이션으로 변경하는 것은 어려웠다. 사실 1998년 당시 독일 국내에서는 마테우스의 기량에 대한 의구심보다는 클린스만과 마테우스의 불화 때문에 팀 조직력이 와해될 것에 대한 걱정이 더 앞선 상황이었다. 더구나 1996년 이후 클린스만이 대표팀 주장으로 이미 유로 1996 우승까지 일구며 대표팀 간판으로 자리잡은 터라 이전에 장기간 대표팀 주장을 맡아온 앙숙 마테우스가 이 상황을 견딜 수 있을지도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문제가 된 것은 둘의 불화가 아니라 거의 노장들로만 구성된 독일대표팀을 지탱하던 마티아스 자머의 부재였고 투톱 비어호프와 클린스만의 활약으로 16강 멕시코전을 넘어 8강 크로아티아전에서도 전반전까지 골대를 강타하며 경기를 지배하다 경험이 부족했던 수비수 크리스티안 뵈른스의 다이렉트 퇴장으로 안 그래도 체력이 문제이던 독일은 후반전 내내 10명으로 싸워야 하는 참담한 상황에 이른다. 여기에 크로아티아의 기가 막힌 중거리포가 작렬하면서 0-3으로 대회 최대 이변의 주인공이 되며 광탈. 이 경기를 끝으로 클린스만은 대표팀에서 물러났고, 마테우스도 대표팀 은퇴가 기정사실화 되는 듯 했다.

결국 자머가 십자인대 무릎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선수 생활 자체를 그만 두게 되면서 수비수 공백을 메우지 못한 독일은 바이에른의 1998-99 챔스 준우승을 이끌 정도로 노익장을 불사르던 40이 다 된 마테우스를 유로 2000에 재호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독일은 1승도 못 거뒀고, 심지어는 라이벌 잉글랜드에게도 32년 만에 패하며 1무 2패로 쓸쓸히 탈락했다. 유로 2000이 끝나고 150경기 출장을 끝으로 기나긴 대표팀 생활을 마무리하게 된다.

마테우스가 불혹이 다 된 나이에까지 대표팀에 중용된 것은 정치적인 이유라고 보기는 어렵다. 마테우스는 40줄이 다 된 1999년에도 클럽인 바이에른에서 정상급의 활약을 이어가고 있었다. 고령의 나이에도 거진 풀 주전에 가까운 출장을 하며 팀의 리그 우승과 1999년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에 이바지하고 있었다. 특히 1999년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 후반 80분 마테우스가 교체된 후 팀이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마테우스가 대표팀에 차출된 것은 그의 기량 때문이었다.

혹자는 마테우스가 국가대표 리베로 자리를 지키고 싶어했기에 독일 대표팀은 당시 대세인 포백으로의 전환이 상당히 늦어졌으며, 이것이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독일 암흑기의 원인 중의 하나라고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포백으로의 전환이 시대에 맞지 않게 늦은 것도 사실이지만, 마테우스가 포지션 고집을 한 것이 그 원인이라는 것도 낭설에 가깝다. 당시 마테우스는 대표팀 발탁을 좌지우지할 입장이 아니었다. 리베로 자리는 독일 대표팀의 상징과 같은 포지션이기 때문에 역대 감독들은 세계적인 축구 전술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리베로 포지션만을 고수해 왔다. 독일 대표팀에선 베켄바워, 마테우스, 자머와 같은 뛰어난 실력과 팀원들을 통솔할 만한 카리스마를 지닌 리베로들이 연이어 등장했다. 이런 뛰어난 리베로가 존재할 때 독일 대표팀은 최고의 모습을 보였으며, 카리스마 있는 리베로가 부재하던 시기 독일은 결승, 4강 등에서 번번히 물을 먹은 경우가 상당했다. 조직력과 팀정신(Team Geist)를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독일 대표팀에서 선수들을 하나로 묶고 경기를 조율하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담당하는 리베로의 존재는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마테우스를 대표팀에서 일시 퇴출시킨 포크츠 감독 역시 리베로 포지션을 고수했는데, 이 역시 마티아스 자머라는 걸출한 리베로의 존재 때문이었다. 후임 에리히 리베크 감독 역시 리베로 포지션을 고수했다. 그런데 자머는 마테우스보다도 오히려 더 빨리 기량이 쇠퇴했고, 때문에 마테우스를 중용했던 것. 하지만 이에 대해 그 전부터 감독 자리 문제와 선수단 지휘 방식을 놓고 갈등이 있었던 수석코치 울리 슈틸리케는 마테우스의 스위퍼 기용과 쓰리백에 반대하며 격한 갈등을 빚다가 물러나는 일까지 빚어졌다. 아이러니한 것은 울리 슈틸리케는 베켄바워와 마테우스 사이에 활약했던 스위퍼였다는 것이다. 다만 슈틸리케는 바켄바워나 마테우스, 자머만큼의 창의성과 카리스마를 가진 리베로는 아니었기에 당시 서독 대표팀의 플레이메이커는 파울 브라이트너가 맡았고, 때문에 슈틸리케는 리베로가 아닌 그냥 스위퍼로 불리고 있다. 마테우스 은퇴 후 옌스 노보트니가 등장하며 스위퍼 위치를 다른 중앙 수비수들 쪽으로 올려가며 루디 푈러 감독 부임 후에야 포백이 정착되었다.

정리하자면 당시 서독 대표팀의 에이스로서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 주축으로서 1986 멕시코 월드컵 준우승, 로테이션 or 교체 멤버로 유로 1980 우승 및 1982 스페인 월드컵 준우승에 기여했다. 축구 역사상 이처럼 화려한 국제 대회 성적을 기록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5. 플레이 스타일[편집]





마테우스의 장기를 이야기하며 수비력이나 멀티 포지셔닝을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부분도 대단하긴 했지만 막상 마테우스의 경기를 구해볼 경우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엄청난 스피드를 앞세워 미들 라인부터 시작하는 저돌적인 드리블과 어디서든 포워드 라인으로 빵빵 때려주는 킥 테크닉이다. 경기 내 볼 전진 능력은 당대 다른 포워드나 사이드 선수들과 비교해봐도 이례적일 정도. 온 더 볼도 상당하고 팀 템포를 이끄는 능력까지 타고났기에 하프라인에서 자연스러운 빌드업 리딩을 이끌기도 했다. 이걸 밑에서 받치는 건 역시 탁월한 운동량이고, 이 운동량을 바탕으로 한 수비 능력도 역시 마테우스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었다.

이 모든 게 맞물린 마테우스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이처럼 두루두루 미드필더에게 갖추어야 할 능력들을 상당한 레벨로 갖추고 있었기에 굉장히 자유로운 플레이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볼의 흐름을 읽어내는 포지셔닝을 갖춘 미들 플레이어는 일정 이상의 패스 능력과 온 더 볼 능력이 된다면 팀의 호흡을 조절하는 빌드업 리더가 될 수 있다. 이 킥 테크닉이 상대 문전을 위협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이라면 후방의 찬스메이커가 될 수 있고. 다시 해당 선수가 상대 수비 라인을 직접적으로 부수고 들어갈 수 있는 신체 능력과 드리블링까지 갖추었다면 말 그대로 전후방을 포괄하는 만능 플레이메이커가 되는 것이다. 어느 위치에서 볼을 잡건 상대를 다양한 방식으로 괴롭힐 수 있는 전술적 유틸리티가 되고, 어느 위치에서 볼을 잡건 우군의 공격을 이끌어나갈 키 플레이어가 된다. 그리고 바로 마테우스가 그런 선수였고. 그야말로 전천후 박스 투 박스. 최후방에서 수비하나 싶더니 어느새 세컨드 스트라이커처럼 오르내렸다는 건 결코 과장이 아니다.

마테우스의 여러 가지 장점 가운데 수치로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뛰어난 득점력이다. 전성기 시절 그는 기본적으로 수비적인 롤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스트라이커 못지않게 많은 득점을 올렸다. 그는 세리에 A에서 다른 공격수들과 함께 득점왕 순위에 올라 있었고 팀 내 스트라이커인 위르겐 클린스만보다 더 많은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대표팀에서도 주장으로 활약했던 1990 월드컵에서 스트라이커인 클린스만이나 루디 푈러보다 많은 4골을 기록하며 대회 득점 3위에 올랐다. 이렇게 많은 골을 기록하면서도 그는 중앙 미드필더로서 수비에서도 빈틈없는 모습을 보였다. 그만큼 넓은 시야와 빠른 판단력,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뛰어난 체력과 민첩한 기술로 경기를 운영해갔던 것. 물론 1990년대에 들어서는 스위퍼로 전향하면서 최후방 수비를 맡게 되면서 득점력이 크게 줄었다.

1990 이탈리아 월드컵은 이러한 그의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의 모든 것을 보여준 화룡점정의 대회라고 할 수 있다. 물론 1990 월드컵이 골 가뭄으로 인해, 다이나믹한 공격 축구 기조라기보다는 미드필드에서 압박을 모토로 하는 '압박 축구'라는 트렌드가 유수의 언론에서 대두될 정도로 다소 지루하기도 한 대회였지만, 서독의 경기력만은 예외였다. 상대를 틀어쥐면서도 공격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당 대회에서 가장 많은 골을 뽑아냈을뿐 아니라, 4강전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치고받는 난타전을 펼친 걸 제외하면 거의 모든 경기에서 상대를 압도하여 우승팀이라는 결과에 걸맞는 경기력을 뽐낸 대회였다. 따라서 마테우스 커리어의 정점인 1990 월드컵이 이른바 '망한 대회'이며, 그를 검색할 때 제일 처음 보게 되는 대회가 이 대회라서 안타깝다는 말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 된다. 왜냐하면 서독의 1990 월드컵은 대회 자체의 기조와는 별개로 경기력과 결과가 뒷받침되는 보는 재미가 충분한 팀이었으며 경기력, 골로도 답답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이에 마테우스의 플레이가 기여한 바가 매우 크므로, 오히려 마테우스가 돋보이면 돋보였지 안타까울 일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 대회에서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로 최고의 활약을 하여 피파 올해의 선수 초대 수상자가 되었고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일부 사람들이 "포백 앞에서 빌드업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그 이외의 다른 선수가 포백앞에 위치 하지 않으므로" 딥라잉 플레이메이커라 지칭을 주장하나,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라는 것은 반드시 포백앞 다른 홀딩 미들을 한 명 박아놓은 상태에서 유유히 전방으로 마실나가는 선수를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다. 본인 이외에 포백 바로 앞 다른 미드필더가 없더라도, 그리고 포백 앞의 그 혼자인 선수가 빌드업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더라도, 후방에서 볼 리딩 및 빌드업도 하고 전투적으로 태클 및 볼 탈취도 하며 필요시 전방으로 튀어나가 저돌적 드리블로 상대를 타격하는 모습을 한 대회에서 다 보여줬다면 그것이 바로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의 교과서와도 같은 모습이다. 기억해야 한다. 1990 월드컵 우승 당시 서독 대표팀의 최다 득점자는 위르겐 클린스만이나 루디 푈러가 아닌 4골의 마테우스였다. 유고슬라비아전 원더골, 잉글랜드전에서의 터치라인부터 40미터 이상 드리블한 장면은 이를 입증하는 상징과도 같다. 단순히 경기를 시작할 때 포백 앞에서는 미드플더가 그 하나라는 이유로 이러한 퍼포먼스를 보인 선수를 딥라잉이라 한정하는 것은 용어 속에, 포지션 속에 그를 가둬버리는 일과 다를 바가 없다. 그가 미드필더 후방에 있다가 공격 지원으로 튀어나가면 그 자리는 후방의 클라우스 아우겐탈러가 메꿨으며 유고슬라비아전에서는 이러한 성향이 더 강했다. 앞서 서술한 유고전의 원더골 이전 전반전에도 그는 아예 전방에서 위치해 있다가 볼을 받아 왼발로 대포알 슛을 박아 넣는 장면을 연출한다.

1990년의 마테우스를 홀딩미들로 볼 수는 없다. 물론 스리백 바로 위 중앙 미들 포지션에서 플레이 한 것은 맞으나 홀딩 미들로 뛰었다기엔 지나치게 전방으로 가서 공격 포인트도 많이 쌓았고, 대다수 팬이나 전문가는 당시 마테우스를 박스 투 박스라 칭하지, "전직이 아닌 홀딩 미들로 뛰어서 다소 활약이 아쉽다"라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1990 월드컵에서 그는 후방 플메-볼 위닝-전방 드리블 침투를 한 대회 내내 모두 보여준 괴물 같은 장악력을 선보였으며, 1990 월드컵 전후 소속 팀에서도 이런 기조는 그대로였다.

박스 투 박스가 드리블로 수비수를 직접적으로 타격하는 공격 본능만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다. 말 그대로 이쪽 페널티 박스서 저쪽 페널티 박스로 후방 플메질도 했다 볼 탈취도 했다 드리블 돌파도 하다 골도 넣기도 하는 그야말로 신출귀몰 활동량을 바탕으로 이곳저곳 필드를 모두 누비는 선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한 경기를 보다보면 메시 같은 선수마저도 포백 라인 바로 앞에서 피케와 원투패스하거나 그 위치에서 전방으로 롱패스를 때려 넣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그 장면으로 메시를 후방 플레이메이커라고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특정한 한두 장면이 아니라 어느 기조로 플레이를 유지하느냐이다.

1990 월드컵에서 마테우스는 홀딩 미들이라는 용어로 한정할 만큼 특정한 후방 위치에서 홀딩 임무에 주력하던 선수가 절대로 아니었으며 따라서 해당 대회의 마테우스를 본직 박스 투 박스가 아닌 홀딩 미들 내지는 후방 플메로 뛰어 아쉽다거나, 그의 커리어 하이인 1990년 대회가 망한 대회라 그를 이 대회로 판단하기가 아쉽다는 말은 그야말로 본말이 전도된 궤변이다. 1990 월드컵은 마테우스의 커리어 하이임에도 분명하지만, 대회 자체의 지루한 압박, 수비 축구의 트렌드와는 별개로 그가 주장으로 팀을 이끌던 서독만큼은 화끈한 경기력으로 결과와 인기 모두를 잡은 대회였으며, 볼 리딩-볼 탈취-저돌적 드리블 타격-골[18] 등 이 모든 것을 다 보여준 대회로, 커리어 전체로 놓고 보면 꽤나 다양한 포지션에서 활약한 그를 명실상부 역대 최고의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로 자리매김하게 한 지표 같은 대회이기도 하다. 이 대회와 아킬레스건 부상을 기점으로 그는 점점 후방으로 내려가 1994 미국 월드컵에선 리베로, 그 이후 바이에른에서는 대놓고 최후방 스위퍼로 활약하기도 하나[19], 마테우스는 1990년에 커리어의 정점을 찍은 박스 투 박스의 교과서라 칭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6. 평가[편집]



파일:matthaus.jpg

축구 역사상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로 평가받는다.[20]

미친 듯한 활동량과 저돌성으로 인해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의 대명사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경기를 보는 시야가 대단히 뛰어나 경기를 조율하는 역할이 뛰어났으며, 특유의 활동량을 바탕으로 쉴 새 없이 경기장 이곳 저곳에서 종횡무진하며 수비면 수비, 공격이면 공격 모든 부분에서도 최고 수준의 클래스를 보였다. 30대 이전에는 정확도가 높은 중거리 슛으로 상당한 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1990 월드컵에서도 득점 3위에 올랐을 정도. 오랜 시간 국가대표와 클럽에서 기복 없이 초장기간 활약하여 여러 대회 출장 횟수, 출장 시간 합계의 기록을 갖고 있는 인물이라 철인으로 언론 등에서 자주 묘사되기도 한다. 선수 생활만 20년에 월드컵 본선에 5회 연속 출전(82, 86, 90, 94, 98)할 정도이다.

독일과 바이에른에서는 부동의 1, 2위인 프란츠 베켄바워, 게르트 뮐러 다음으로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와 비슷한 위상으로 평가되며 선수 생활 거의 내내 대표팀과 소속 팀에서 오랜 기간 주장을 맡아와 팀을 이끄는 사령관의 이미지가 매우 강하다. 클럽으로 따지면 전성기 시절 바이에른 말고도 인테르에서도 오래 활약했기에 바이에른에서의 위상은 위에 언급된 레전드보다 더 낫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국가대표팀에서는 월드컵 우승 주장에 통산 국가대표 최다 출장에 빛나는 업적으로 인해 루메니게보다 더 부각되는 편이다. 물론 루메니게도 독일 대표팀에서 시대를 대표하는 활약을 보였고, 마테우스가 통산 150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것은 90년대 암흑기 독일 대표팀이 워낙 선수층이 얇았던 탓도 있었다는 점을 감안은 해야 하기 때문에 굳이 이들의 서열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80~90년대 루드 굴리트, 프랑크 레이카르트 등의 레전드들과 함께 시대를 대표하는 미드필더로 손꼽혔지만 월드컵 우승과 실버볼 수상, 발롱도르 · FIFA 올해의 선수 수상 등 이 중 가장 시대의 대표성이 짙으며 같이 세리에 A를 지배하던 디에고 마라도나가 같이 나폴리에서 뛰자고 강력하게 손을 내밀기까지 했고 후에 자신이 "상대해본 모든 선수들 중 자신의 유일한 라이벌이라 할 사람은 마테우스였다"라고 술회할 정도였다.

참고로 2018년 골닷컴이 발표한 역대 중앙 미드필더 랭킹 1위로 선정되었으며,[21] 2020년에 프랑스 풋볼이 선정한 발롱도르 드림팀에도 사비 에르난데스와 함께 퍼스트팀에 이름을 올렸다.## 또한 2020년 10월, 영국의 '기브미스포츠'는 역대 최고의 국가 대표 선수로 마테우스를 5위로 꼽았다. 마테우스 위로는 디에고 마라도나(1위), 펠레(2위), 페렌츠 푸스카스(3위), 프란츠 베켄바워(4위)가 꼽혔고, 아래로는 호나우두(6위), 안드레스 이니에스타(7위), 게르트 뮐러(8위), 레프 야신(9위), 사비 에르난데스(10위)를 꼽았다.#


7. 지도자 경력[편집]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속설이 적용되는 것인지, 선수 시절에 비해 감독으로서는 그다지 신통치 못하다. 지도자로서 뚜렷하게 좋은 성적을 낸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도자로 평균 이하였던 것도 아니다. 사실 마테우스는 알려진 것보다는 준수한 감독이었다. 대부분 감독직을 맡은 지 1~2년 만에 팀을 떠났기 때문에 성적이 신통치 않았던 것으로 오인되기 쉬운데 그렇지는 않았다. 비록 첫 팀인 라피트 빈에서는 실패라는 평을 받지만, 이를 제외하면 대체로 맡았던 팀의 원래 성적보다 더 나은 성적을 올린 경우가 많았다. 우승을 차지한 적도 몇 번 있다. 하지만 빅 리그에서 빅 클럽을 맡은 적이 없고 중하위권 팀을 극적으로 우승시키거나 하는 드라마가 없었고, 그저 중소리그에서 중상위권 팀을 전년도보다 좀 더 높은 순위로 올리는 정도의 모습만 보였기 때문에 지도자로 두드러지지 않았던 것이다. 마테우스가 1~2년 만에 자꾸 팀을 옮긴 것은 마테우스의 꿈이 궁극적으로 독일 국가대표나 바이에른을 맡는 것이었기 때문이었고 이 때문에 본인이 너무 성급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에 작은 팀에서 시작해 큰 팀으로 옮기려는 계획은 생각보다 원할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테우스의 실적은 사실 나쁘지 않았지만, 베켄바워를 제외하면 선배 축구인들이나 구단 경영진에게도 전혀 꿀릴 것 없이 직설적이었던 마테우스의 성격 때문에 독일 축구의 높으신 분들은 그를 데리고 일하기를 꺼렸다. 사실 마테우스는 파르티잔과 잘츠부르크에서 우승을 거두었고 브라질에서도 무패 행진을 이어갔으며 다른 팀에서도 이전보다 팀 순위를 상승시키는 등 라피트 빈을 제외하면 평균 이상의 결과를 가져온 적도 많았지만 더 높은 곳으로 가려는 본인의 성급한 욕심 때문에 조기 사퇴하거나 본인의 지도 방식에 대한 확고한 주관으로 이사회와 의견 충돌로 사퇴/경질되었던 것들이 크게 부각되었다.

2001년 9월 오스트리아 클럽인 라피트 빈의 감독이 되어 지도자로 데뷔하여 시즌이 종료되던 2002년 5월까지 1시즌간 감독을 역임했다. 라피트 빈에서 마테우스는 상반된 성과를 거두었다. 유파컵에서 2라운드에 진출하는 등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문제는 국내 리그였다. 라피트 빈은 당시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에서 우승권에 있던 강호였지만 2001-02 시즌에 팀은 8위라는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두었다. 결국 1시즌 만에 해임되었다.

2002년 유고슬라비아 클럽 FK 파르티잔 감독이 되었다. 파르티잔 감독 시절인 2003년 2월에는 터키 안탈리아에서 벌어진 아카디아 호텔컵 결승에서 부천 SK트나즈 트르판 감독과 난투극이 붙었다고 국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국내 언론이 일방적으로 부천 SK 트르판 감독 편을 들면서 마테우스를 비난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부천의 지나치게 거친 태클이 두어번 반복되자 마테우스 감독이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욕설을 내뱉었고, 이에 트르판 감독이 마테우스의 멱살을 잡은 것이었다. 즉 부천 측의 계속된 거친 태클이 원인이었고, 이에 격분한 마테우스 감독이 항의하다가 욕설을 내뱉었으며, 이에 트르판 감독이 멱살을 잡은 것이었다. 파르티잔에서의 경력은 성공적이었다. 마테우스는 파르티잔에서 2002-03 시즌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EPL 뉴캐슬 유나이티드와의 플레이오프를 거쳐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획득했다.

2004년 1월 1일부터 2005년 12월 31일까지 2년간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 2004년 6월 7일에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친선전에서 2 대 0으로 승리하여 헝가리 국민들을 환호하게 만들었다. 당시 헝가리는 주전의 상당수가 부상으로 빠진 터라 헝가리 국민들을 더욱 고무시켰다. 반면 독일 대표팀은 커다란 후폭풍에 시달렸는데, 이 경기 후 불과 한달도 지나지 않은 7월 5일 루디 푈러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사임했다. 마테우스는 공석이 된 독일 대표팀 차기 감독을 맡고 싶다는 의중을 독일 언론에 표했다. 하지만 독일 축구 협회는 푈러의 후임으로 위르겐 클린스만을 임명했다. 마테우스는 앙숙인 클린스만이 아무런 지도자 경력도 없이 독일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자, 독일 축협이 인맥질로 감독을 선임한다며 불편한 심기를 표출하기도 했으나, 마테우스의 직설적인 발언이 대게 그렇듯 득보다 실이 많은 발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테우스의 직설적인 언변을 좋아하지 않는 독일 축구 수뇌부의 심기만 더 거스를 뿐이었다.

마테우스는 헝가리 대표팀 감독으로 있던 2년 동안 전반적으로 별 다른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한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월드컵 본선 진출이 좌절된지 얼마 안되어 결국 헝가리 대표팀 감독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헝가리 대표팀은 1986년 이후 35년간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한 팀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이 실패는 아니었다. 헝가리 대표팀에서 물러날 때도 나쁘지 않은 모양새로 헤어진 모양인데, 이후에도 가족들이 한동안 부다페스트에서 거주했고, 2014년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최신식 구장을 개장할 때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가 마테우스를 초청하기도 하는 등 헝가리에서는 명사로서 대접받고 있다. 오히려 마테우스가 독일 언론에 쓴소리를 하도 뱉어 적이 많이 생기니까 한 독일 언론에서는 "마테우스는 헝가리에 있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그곳에서는 마테우스를 비난하는 이도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헝가리 대표팀 임기가 끝나가던 무렵에 독일에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가고 싶다는 바램을 언론에 여러 차례 피력하기도 했다. 2005년 5월에는 주말에 11부 리그 팀인 로크 라이프치크에 1경기 선수로 계약, 등록하여 출장하기도 했다. 월드컵 조 추첨식에서도 독일에서 지도자를 하고 싶다고 말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2006년 2월 브라질 1부 리그 클럽인 아틀레치쿠 파라나엔시에서 한 시즌 단기 계약으로 감독을 맡았다. 사실 브라질에서 마테우스의 인기는 생각보다 좋았는데, 특히 90년 월드컵에서 마테우스의 서독이 브라질의 숙적인 마나도나의 아르헨티나를 이기고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이후 브라질에서 마테우스의 인기가 상당했었다고 한다. 1994 월드컵에서 요람 세레머니로 화제가 된 베베토는 세러머니의 주인공인 자신의 장남 이름을 마테우스라고 지었을 정도였다. 브라질에서 감독을 맡게 되자 팬들이 선수가 아닌 마테우스 감독의 사인을 받으려고 몰려드는 등 브라질에서 인기가 여전함을 보여주었다. 마테우스가 브라질에서 맡은 아틀레치쿠는 전해에 리그에서 준우승을 거둔 괜찮은 팀이기도 했지만, 마테우스가 부임한 후 9경기 연속 무패(7승 2무)라는 쾌조의 모습을 보이며 브라질에서도 상당히 좋은 여론을 얻었다. 그러나 마테우스는 취임 후 9경기 만에 돌연 감독직을 사임했다. 마테우스가 심판과 말다툼을 벌였는데 브라질축구연맹이 그에게 한달 출장 정지 징계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이에 분노한 마테우스는 사표를 던지고 구단이 만류할 틈도 없이 비행기를 타고 브라질을 떠나버렸다. 결론적으로 브라질에서 좋았던 성적에도 불구하고 조기사퇴하게 되면서 당시 브라질 팬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고, 국제적으로도 그의 경력에 좋지 않게 작용되었다.

2006년에는 레드불 그룹이 막 인수한 오스트리아 클럽인 레드불 잘츠부르크에 영입되었다. 그런데 레드불은 마테우스가 현역 시절 지도자였던 조반니 트라파토니도 함께 영입했다. 일각에서는 트라파토니를 먼저 영입했고 트라파토니의 제안으로 마테우스를 영입했다고 하고, 다른 소스에는 마테우스와 트라파토니를 개별적으로 영입했다 하고, 심지어 다른 소스에서는 마테우스를 먼저 영입한 후 트라파토니를 영입했다고 나오는 등 명확치 않다. 어쨌든 잘츠부르크는 트라파토니와 마테우스의 이원 지휘 체제로 돌아갔다. 기본적으로 트라파토니가 더 높은 직책에 있지만 마테우스 또한 일정 부분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트라파토니와 마테우스의 공동 지휘 체계는 해외 언론에서도 꽤나 이례적인 경우로 다루었다. 둘 간의 지휘 체계와 권한이 명확치 않았기에 갈등이 생겼다. 잘츠부르크는 그해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트라파토니는 구단 이사회에서 마테우스를 해임할 것을 주장했고, 결국 마테우스는 한 시즌 만에 경질되었다.

2008년에는 이스라엘 리그 클럽인 마카비 네타냐의 감독을 맡았다. 하지만 1년 후 네타냐 구단은 마테우스와 이번 시즌까지만 하고 결별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사유는 구단 재정 악화 때문이었다. 마테우스와 결별이 발표되던 시점 네타냐의 성적은 리그 4위였다.

2009년 11월에는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을 경시하는 독일 축구계에 대해 개탄하기도 했다. 마테우스는 "독일에서 나는 우상(idol)이다. 나는 프란츠 베켄바워 이후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유명한 독일 축구인이다. 우상을 이런 식으로 대우하는 독일은 부끄러워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마테우스는 분데스리가 클럽들이 자신이 너무 바이에른 뮌헨 팬덤과 강하게 연관되어 있는 인물이며, 또 언론에 일거수일투족을 주목받는 너무나 유명한 인물이기에 영입을 꺼린다고 말하기도 했다.

2010년 5월에는 국내 구단과의 접촉설이 돌았고 수원 삼성을 비롯한 네 개 팀이 마테우스 감독 영입전에 뛰어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실제로 마테우스가 감독 협상과 대한축구협회 방문을 겸해 방한하기도 했다.

2010년, 1년 임기 보장에 2년 플러스 옵션 계약으로 불가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 부임했다. 그러나 불가리아가 유로 2012 예선에서 본선 진출권을 따내는데 실패하자 불가리아 축구협회는 계약 연장 옵션을 발동하지 않고, 1년 후 마테우스와의 계약을 종료했다.

불가리아 대표팀 감독을 내려놓은 이후에는 지도자를 맡지 않고 TV 해설과 신문 칼럼을 작성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으며 2017년 독일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프란츠 베켄바워가 축사를 했다.


8. 기록[편집]



8.1. 통산 기록[편집]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대륙대회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79/80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분데스리가
28
4
2
0
11
2
1980/81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분데스리가
33
10
5
2
-
-
1981/82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분데스리가
33
3
5
4
4
1
1982/83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분데스리가
34
8
5
2
-
-
1983/84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분데스리가
34
11
6
4
-
-
1984/85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3
16
6
0
5
1
1985/86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23
10
5
2
3
0
1986/87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1
14
3
1
7
4
1987/88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26
17
4
3
4
1
1988/89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세리에 A
32
9
7
3
5
0
1989/90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세리에 A
25
11
2
2
2
0
1990/91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세리에 A
31
16
3
1
12
6
1991/92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세리에 A
27
4
5
1
2
0
1992/93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28
8
0
0
-
-
1993/94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3
8
3
1
4
1
1994/95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16
5
2
0
6
0
1995/96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19
1
0
0
7
0
1996/97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28
1
3
0
2
0
1997/98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25
3
3
0
5
0
1998/99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25
1
5
0
12
1
1999/00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15
1
2
0
9
0
2000
메트로스타즈
메이저리그 사커
16
0
5
0
-
-


8.2. 대회 기록[편집]







8.3. 개인 수상[편집]


  • 발롱도르: 1990
  • FIFA 올해의 선수: 1991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1990
  • FIFA 월드컵 실버볼: 1990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1988
  •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1990, 1999
  • VDV 올해의 선수: 1999
  • 키커 올해의 남자: 1999
  • 키커 올해의 리베로: 1993-94, 1997-98, 1998-99
  • 키커 올해의 미드필더: 1982-83
  • 키커 올해의 아이돌: 1989-90, 1990-91, 1992-93, 1993-94
  • 키커 올해의 팀: 1982-83, 1984-85, 1987-88, 1992-93, 1993-94
  • FIFA XI: 1996, 1997, 2001
  • 옹즈 드 옹즈: 1988, 1989, 1990, 1991
  • 독일 올해의 골: 1990, 1991
  • 독일 이달의 골: 1990년 6월ㆍ12월, 1992년 11월, 1998년 8월
  • FIFA 100: 2004
  • 인터 밀란 올해의 선수: 1991
  • 인터 밀란 명예의 전당: 2018
  • 바이에른 뮌헨 올타임 XI[22]: 2005
  • 바이에른 뮌헨 명예의 전당
  • 독일 스포츠 명예의 전당: 2017
  • 독일 축구 명예의 전당: 2018
  • 골든풋: 2012
  • DFL 명예상: 2019
  • 발롱도르 드림팀: 2020[23]
  • IFFHS 세계 최우수 선수: 1990
  • IFFHS 레전드: 2016
  • IFFHS 올타임 월드 드림팀[24]: 2021
  • IFFHS 올타임 유럽 드림팀[25]: 2021
  • IFFHS 올타임 독일 드림팀: 2021


8.4. 수훈[편집]


  • 은월계수잎 훈장: 1990
  • 바이에른 공로장: 2001


9. 마테우스에 대한 말말말[편집]


그가 최고의 폼을 유지할 때면, 뭐 그는 늘 그랬지만, 그보다 나은 선수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그는 완벽한 선수다.

프란츠 베켄바워


미셸 플라티니를 동경한다. 디에고 마라도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승리하려면 내겐 로타어 마테우스가 필요하다.

조반니 트라파토니


그동안 같이 뛰어본 선수 중 제일 두렵고 강한 라이벌이었다. 이것으로 그에 대한 설명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디에고 마라도나가 본인의 자서전에서


(경기에 출전한 로타어 마테우스를 가리키면서) 로타어 마테우스가 디에고 마라도나의 오랜 라이벌이자 어쩌면 디에고 마라도나 이후의 인물이 될 수 있는 후보일 것이다. 둘은 인연이 깊다. 한 명은 이탈리아 남부에서 활약했고 다른 한 명은 북부에서 활약했다. 한 명은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1986 월드컵을 가져갔고, 다른 한 명은 서독 출신으로 1990 월드컵을 가져갔다.

디에고 마라도나의 은퇴 경기를 해설하던 중계진


나의 완벽한 우상은 로타어 마테우스다. 그는 스스로 골을 넣는 동시에 나머지 모두에게 영감을 주는 No. 10이다. 나에게 있어 그보다 나은 선수란 없었다. 비아레조(Viareggio)에서 처음 만나 그의 사인을 받았던 날은 아주 오랫동안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최고의 날이었다.

안드레아 피를로


동생은 단점이 딱 하나 있어요. 지는 걸 끔찍이 싫어하죠. 만에 하나 진다면 또다시 지는 일은 없을 거예요.

볼프강 마테우스(로타어 마테우스의 형)



10. 여담[편집]


파일:시대별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jpg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5인을 선정했는데, 1990년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2위에 이름을 올렸다.

  • > 전 나폴리에 가지 않았어요. 마라도나는 저와 함께 나폴리에서 뛰고 싶어서 뮌헨까지 사람을 보냈죠. 현금이 가득 담긴 가방도 함께요. 너무 놀랐어요.
FC 바이에른 뮌헨 시절 당시 SSC 나폴리에서 뛰던 디에고 마라도나가 마테우스에게 자기랑 같이 뛰자고 제안했으나 거절했다.

  • 명성과는 별개로 사생활 면에서는 그리 올바르지 못한데, 5번씩이나 결혼을 했다. 그중 하나는 무려 26살이나 연하인 우크라이나 출신 모델도 있었다. 그러나 네 번째 결혼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이혼했으며, 2014년 11월, 다섯 번째 결혼을 했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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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구 선배들한테도 거리낌 없이 직설적으로 까대는 성격 탓에 선수 시절 지도자들과 마찰이 많았을 법하겠지만, 의외로 지도자들과의 관계는 좋았다. 국가대표팀 시절 감독이었던 프란츠 베켄바워나 인테르와 바이에른 시절 감독이었던 조반니 트라파토니 모두 마테우스를 극찬하는 지도자다. 베켄바워는 요즘도 독일 대표팀이나 바이에른이 부진하면, 마테우스 같은 리더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트라파토니는 잘츠부르크 시절 마테우스를 불러 자신의 지휘권을 나누어 팀을 공동 지휘했다. 하지만 이 초유의 공동 지휘 체계는 당연히 혼선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한 시즌이 지나고 마테우스가 떠나고 트라파토니 단독 지휘 체제로 바뀌었다.

  • 천상천하 유아독존식으로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하며 회네스 같은 축구 선배들에게조차 쓴소리나 비판을 서슴치 않는 마테우스지만, 베켄바워에게만큼은 항상 깍뜻하고, 언제나 자신을 독일에서 베켄바워 다음으로 훌륭한 선수라며 자신을 낮춘다. 마테우스가 성격이 강하기로 유명하지만 베켄바워 역시 마테우스를 아끼는 발언을 많이 한다. 마테우스 덕분에 월드컵 우승을 할 수 있었다며 고마워하는 발언도 수없이 했다. 베켄바워의 감독 시절 일화를 보면 겉으로 보이던 이미지와 달리 실제로 베켄바워는 생초짜 감독이었기 때문에 걱정도 많았고 안절부절못할 때도 많았으며, 사제 지간이라 하기에는 사실 나이 차이도 15년에 불과한 마테우스에게 적지 않게 의존했던 단면을 엿 볼 수 있다. 사실 베켄바워는 감독 시절, 특히 초기에 경험 미숙으로 전술적으로 약간 미스를 저지르기도 했고 전반적으로 선수들의 능력으로 풀어온 것도 사실이다. 마테우스도 워낙 많은 발언을 하는 사람이다보니 때때로 이를 지적한 적도 있다. 하지만 마테우스는 베켄바워에 대해 선수로서뿐만 아니라 지도자로서도 완벽했던 인물이라고 최고의 찬사를 했다.


  • 오랫동안 대표팀에서 활약하며 월드컵 역사에 기록을 세웠는데, 5회 연속(1982, 1986, 1990, 1994, 1998)으로 월드컵에 출전해서 무려 25경기나 뛰었다. 월드컵 5회 출전을 기록한 선수는 2022년 대회까지 마테우스를 포함해 전 세계에서 8명뿐이며, 25경기 출전은 2022년 리오넬 메시가 26경기로 경신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최다 경기 출장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26] 그것도 1982, 1986 월드컵은 수비형 미드필더와 수비수로, 1990년 월드컵은 공격형 미드필더로, 1994, 1998 월드컵은 스위퍼로 뛰었다.


  • 자국이 당한 카잔 대참사 때 화도 나지 않는다고 혹평했지만, 이런 경기가 있기에 훌륭한 월드컵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결과와는 별개로 메수트 외질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비판했다.

  •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전 세계적인 히트를 친 베베투의 요람 세리머니의 주인공이 된 베베토 장남 이름이 마테우스 올리베이라다. 당연히 로타어 마테우스의 이름을 따서 지어준 이름이다. 그만큼 90년대 초 마테우스는 전 세계적인 축구 우상이었다. 하지만 정작 로타어 마테우스는 그 대회에서 노쇠화와 폭염으로 인한 체력 저하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 김성모 화백의 만화 마계대전에 나오는 마테우스는 이 마테우스에게서 이름을 따온 걸로 추정되고 있다. 이름을 지을 적에 마계의 제왕답게 마자를 들어가면서도 간지나고 강해 보이는 서양 이름을 찾다가 이 마테우스의 이미지에서 차용해 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코로나19로 취소한 2020 발롱도르 대신 프랑스 풋볼에서 선정한 올타임 발롱도르 드림팀사비 에르난데스와 함께 퍼스트팀 중앙 미드필더로 선정되었다. 선정 전에 발표한 후보군을 보면 마테우스를 위협할만한 후보는 사실상 사비 1명이었고 예상대로 경합 끝에 근소한 차이로 사비가 1위, 마테우스 2위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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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즘 선수들이 혹사당하고 있다는 주장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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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타르 월드컵 조 추첨의 2포트 추첨을 맡았다. 자기 나라를 뽑을 때 약간 뜸을 들이더니 씩 웃으면서 "Germany"를 외치는 장면이 백미. 같은 조에 스페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카타르가 1시드로 있는 A조에 이미 네덜란드가 들어갔기 때문에 독일은 어느 조를 가도 1시드의 강팀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독일이 나온 직후 비춰진 대표팀 감독 한지 플릭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이 하이라이트. 둘은 같이 바이에른에서 선수 생활을 한 적이 있다.

  • 2023년 7월 SSC 나폴리에서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한 김민재를 크게 칭찬 해준 인물이다. 마테우스는 김민재 친선 경기에서 보여준 수비를 보고 "김민재는 정말로 훌륭하다. 그는 마치 전성기 시절 베켄바워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라며 크게 칭찬해줬고 덧붙여 "그는 배신자(뤼카 에르난데스)를 잊게 해줄 것이다." 라며 칭찬하고 있다.

10.1. 위르겐 클린스만과의 관계[편집]


3살 후배이자 인테르, 바이에른은 물론 대표팀에서 동료였던 위르겐 클린스만은 앙숙이었다.

둘이 같이 뛰던 인테르 시기만해도 큰 문제는 없었지만 유로 1996 전후로 본격적으로 관계가 악화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나 클린스만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클린스만이 시즌 15골도 득점하지 못할 것이라며 마테우스가 베팅까지 하며 조롱했다는 걸 클린스만이 뒤늦게 알아차렸다는 주장이다.[27]

둘 사이의 불화는 팀 자체에 큰 악영향을 끼쳐 1997년에 클린스만은 삼프도리아로 떠났고 마테우스는 회장인 울리 회네스와의 충돌도 겹치면서 토마스 헬머에게 주장완장을 넘겨줘야 했다. 1998년엔 마테우스가 클린스만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를 비롯해 바이에른 뮌헨의 수뇌부, 동료 등에 대한 비난이 담겨있는 '비밀 일기장'이 입수됐다는 소식이 나왔으나 마테우스는 비밀 일기장에 대해 부정했다.

국내에서는 마테우스의 성격이 좋지 않고, 클린스만은 성격이 매우 반듯한 사람인 것처럼 잘못 알려져 있어서 그동안 클린스만의 주장을 근거로 마테우스가 불화의 일방적인 원인으로 서술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클린스만도 마테우스 못지않게 불화의 책임이 클 것이라 보는 경우가 많다. 마테우스가 워낙 성격이 불같고 슈테판 에펜베르크와의 불화를 일으킨 전적이 있다보니 마테우스의 일방적인 문제로 비춰졌지만 사실 클린스만도 마테우스 말고도 여러 사람들과 불화를 일으킨 전력이 많다.

사실 마테우스의 권위적인 성격에 반발한 에펜베르크라던가 일부 타지 출신 젊은 선수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마테우스를 존경하며 그의 권위를 따른 경우가 많았다. 90년대 독일 국가 대표팀 선수들이 포크츠 감독을 대신해서 마테우스에게 감독을 해달라고 요청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클린스만은 마테우스 말고도 감독들과도 끊임없이 트러블을 일으켰다. 클린스만은 바이에른 뮌헨 시절 만원 관중들이 보는 앞에서 감독의 지시를 대놓고 화를 내며 광고판을 걷어 차는 추태를 부리기도 했고, 언론 인터뷰에서 조반니 트라파토니 감독을 노골적으로 비난하였다.당시 분데스리가에서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반면 마테우스는 그가 함께 했던 지도자들과 사이가 원만했다. 베켄바워도 마테우스에게 은근히 의지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있고 불같은 성격의 트라파토니 감독과도 선수시절에 관계가 좋았었다.

마테우스는 위에 언급된 클린스만의 득점에 관한 배팅 이외에는 별달리 클린스만을 방해하거나 한 적은 없다. 하지만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클린스만은 1996년 유로를 앞두고 포크츠 대표팀 감독에게 마테우스를 출전시키지 말 것을 강요했다. 클린스만은 포크츠 감독에게 마테우스가 출전하면 자신은 대표팀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당시 독일 대표팀에서 마테우스는 노장이었고, 마테우스와 같은 포지션에 마티아스 자머라는 또다른 최고의 리베로를 보유하고 있던 반면, 극도의 공격수난에 시달리던 당시 독일 대표팀에서 클린스만 이외에는 다른 대체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유로 1996에 마티아스 자머라는 최고의 리베로를 보유하고 있던 독일은 베르티 포크츠 감독은 마테우스가 아직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엔트리에서 제외하고 클린스만을 주장으로 임명하여 참가해 대회 우승을 했다.

이렇게 마테우스의 시대가 가고 클린스만의 시대가 오는 듯 했으나, 상황은 클린스만의 바램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마테우스의 대표팀 커리어는 마무리되는가 싶었으나 바로 마테우스의 포지션을 지키던 자머가 무릎 부상으로 급작스러운 은퇴를 하게 된다. 게다가 마테우스는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분데스리가를 평정하고 있었지만 96년 이후 클린스만이 갑자기 부진과 노쇠화에 빠져든 것이었다. 당시 독일 대표팀에는 올리버 비어호프라는 깜짝 스타가 클린스만을 대체했다. 1998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이제 노쇠화에 빠져든 클린스만이 대표팀에 발탁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높았다. 반면 마테우스는 자머를 대체하기 위해 대표팀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당시 대표팀에서 선수단 장악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신임 에리히 리베크 감독은 두 노장 마테우스, 클린스만을 동시에 대표팀에 불렀다. 대회는 8강에서 마무리. 클린스만은 이 대회를 끝으로 대표팀 커리어를 접었다. 하지만 마테우스는 자머의 후계자를 찾지 못한 독일 대표팀에 다시 한번 유로 2000에 무려 39세의 나이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래도 둘의 불화는 둘이 같이뛰던 바이에른 뮌헨 시절에 한정되었다. 이후 1998년 클린스만과 마테우스가 국가대표팀에서 재회했을 때, 많은 이들이 둘의 불화를 걱정했지만 오히려 마테우스는 별거아니란 듯이 반응했으며 클린스만도 마테우스를 특별히 디스하지는 않았다. 본인 자서전에서 마테우스에 대한 독설을 날린 에펜베르크와 비교해보면 딱히 뒤끝은 없었던 듯 하다.

이후 2004년 마테우스가 이끌던 헝가리 대표팀이 독일 대표팀을 격파하자 루디 푈러 감독이 경질되었는데, 후임으로 클린스만이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러자 마테우스는 이례적으로 크게 불편한 심기를 노출했다. 사실 그럴만도 한 것이 나이도 그렇고 대표팀 짬밥도 그렇고, 감독 경력도 그렇고 마테우스가 클린스만보다 먼저 감독이 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당시 클린스만은 지도자 경험이 전무했다. 선임된 이후 클린스만은 독일 대표팀을 맡고도 미국에서 줄곧 지내는 모습을 보여서 마테우스에게 여러차례 비판을 받았다.

독일 대표팀을 거쳐 클린스만이 바이에른 뮌헨 감독에 선임되었을 때도 바이에른 감독을 맡고싶었던 마테우스는 내심 불편해하긴 했지만 이때부턴 마테우스와 클린스만의 감독으로서 평가차이가 많이나기 시작했으니 별일없이 넘어갔다. 이후에도 마테우스가 클린스만의 감독 커리어 중 디스하는 인터뷰를 여러번 하긴 했지만 사실 마테우스 성격상 굳이 클린스만이라서 디스를 한 것은 아닐듯하다.

현재는 서로를 친구라고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클린스만이 한국 국가대표팀에 감독으로 부임할 때, 카타르 월드컵 때 클린스만을 여러번 만났다고 밝혔으며 나름 클린스만을 긍정해주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10.2. 바이에른 뮌헨과의 관계[편집]


선수 생활의 상당 부분을 바이에른에서 보냈으며, 12년 동안 리그 우승도 7번이나 한 전설적인 선수지만, 직설적인 성격과 언변 때문에 바이에른의 선배이자 현 구단 수뇌부와의 관계는 다소 껄끄러운 편이다. 정확히 말해서 바이에른 이사회에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하고 초장기 집권하고 있는 울리 회네스와 매우 사이가 나빴다. 현역에서 은퇴한 후 특유의 직설적인 언변 탓에 모두까기로 깠지만 친정인 바이에른 역시 직설적으로 비판했고, 특히 바이에른 뮌헨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울리 회네스 회장이 직접적이 타깃이 되기도 했다.[28] 일단 마테우스는 자신이 프란츠 베켄바워와 게르트 뮐러 다음인 독일 올타임 레전드 서열 3위라는 프라이드가 강하기 때문에 루메니게까지는 어느 정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더라도 울리 회네스 회장은 독일의 여러 레전드들 중에서 그저 그런 선수였고[29] 때문에 베켄바워도 아니고 루메니게도 아닌 회네스가 바이에른에서 전권을 장악하고 장기 집권을 하고 있는 현실을 못마땅해하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마테우스는 선배인 회네스에 대해서 직설적으로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고, 이에 회네스는 후배인 마테우스에게 단단히 감정히 상한 상황. 울리 회네스 회장은 "마테우스 같은 놈은 바이에른 임원으로 와 봤자 관리직도 제대로 못 가질 것"이라고 맞디스를 외쳤으며, 마테우스도 이에 질세라, 위에 나온 레전드 명함이 박탈되었다는 이유로[30] 소송을 먹이려 하였다. 다행히 바이에른 사장인 카를하인츠 루메니게가 끼어들어서 말리는 덕에 서로 화해하고 끝나나 싶었지만 마테우스는 다시 회네스는 프란츠 베켄바워의 그림자 속에 사는 인물이라고 비판하면서 동시에 이 분쟁을 중재한 루메니게는 가식 떤 것일 뿐이라고 디스했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 울리 회네스가 여러 차례 구설에 오르고 실형까지 살면서 바이에른의 흑막으로까지 불리게 되면서 마테우스 역시 재평가되고 있는 각이다.

최근 바이에른 수뇌부와 마테우스의 관계는 많이 개선되고 있다. 일단 2010년대 이후 회네스가 감옥을 들락거리며 실권이 많이 약해진 상태고 마테우스와 관계가 덜 나쁜 루메니게가 구단을 이끌게 되면서 관계가 개선되어가고 있다. 마테우스는 바이에른과 독일 대표팀 역사에서 프란츠 베켄바워 다음 가는 레전드이기 때문에 구단으로서도 전혀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다. 바이에른 구단에서 마테우스를 앰버서더로 임명하기도 했고, 최근 바이에른 각종 구단 행사에서 구단을 대표하는 레전드로서 얼굴을 자주 내밀고 있으며 요즘은 마테우스가 구단 수뇌부를 변호하거나 심지어 대변인, 관계자와 같은 발언을 앞장서서 할 때가 많다. 물론 회네스는 여전히 싫어하지만 회네스와의 관계도 과거에 비하면 많이 개선되었고, 바이에른을 거쳐간 레전드 입장에서 건네는 조언과 일침들이 구단 관계자들이 말하고 싶지만 못 하고 있는 말을 대변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계약과 관련해 바이에른 구단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선수들에게 마테우스는 바이에른 선수답게 굴라는 비판을 많이 하면서 구단 수뇌부의 입장을 매우 편하게 만들어 줄 때가 많다. 부진한 선수가 있을 때마다 따끔한 일침을 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베켄바워를 위시한 바이에른 뮌헨의 1세대 레전드들이 나이가 80줄에 가까워지고 있고 심지어 게르트 뮐러처럼 작고하기도 하는 등 더이상 활발한 활동을 하기 어려워지자, 그 다음 세대를 대표하는 마테우스가 구단을 대표하는 레전드로서 팀의 주요 행사나 홍보의 전면에 등장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이렇게 한동안 국내에는 마테우스가 마치 이단아, 아웃사이더, 바람둥이, 성격에 문제 있는 사람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지만, 마테우스는 언변이 직설적일 뿐 사실 큰 물의를 일으킨 적은 없다. 오히려 그와 각을 세웠던 위르겐 클린스만울리 회네스가 잇다른 구설수로 추락하고 있는 상황. 사실 마테우스가 독설가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직설적이어서 그렇지 틀린 말을 한 적도 그다지 없다. 그래서 여전히 독일 언론들은 주요 이슈에 대해 가장 먼저 마테우스와 인터뷰를 따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마테우스의 발언은 그 누구보다 비중 있게 보도되고 있다.

마테우스가 한지 플릭 감독의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부임설과 율리안 나겔스만의 바이언 부임설을 이야기했을 때도 찌라시로 취급하는 의견이 많았다. 특히 나겔스만의 경우, 본인이 통화로 의사를 확인했다고 인터뷰했으나 얼마 뒤 나겔스만이 직접 인터뷰를 통해 그렇게 말한 적 없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결국 한지 플리크의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행과 율리안 나겔스만의 바이에른행 모두 이루어졌다.

[1] [ˈloːtaːɐ̯ maˈtɛːʊs\][2] 독일어의 eu나 äu는 [ɔʏ\](한글 표기는 '오이')로 발음하는 것이 원칙이다. Deutschland가 "도이칠란트"로 발음되는 것이 그 예. 하지만 일부 예외가 있는데 주로 라틴어 등 외부에서 유입된 고대어 계열의 단어들이 그렇다. 박물관을 뜻하는 das Museum도 "무조임"이 아닌 "무제움"으로 발음하고 Wolfgang Amadeus Mozart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로 발음하는 것도 그 예인데, Amadeus 역시 라틴어식 표기다. 마테우스(Matthäus) 또한 성경의 인물의 라틴어식 표기이며, "마토이스"가 아닌 "마테우스"로 발음한다.[3] 현 에를랑겐시[4]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측면 미드필더.[5] 스위퍼(리베로).[6]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출장자.[7] 데뷔초 공격형 미드필더및 윙어, 활동 전성기엔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 황혼기까진 리베로로 뛰었다.[8] 월드컵 5회 연속 출전(공동 1위), 월드컵 통산 25경기 출전(2위), 국제 메이저 대회 통산 9회 출전(월드컵 5회, 유로 4회) 등 39세까지 활약하는 모습에 붙은 별명.[9] Der 'Leitwolf'. 바이에른 뮌헨 명예의 전당에 이 별칭으로 헌액되어 있다.[10] 마테우스의 FIFA 올해의 선수 수상은 2023년 현재까지도 독일 국적 선수로서는 유일한 수상기록이다. 마테우스 이후로 1992년 토마스 헤슬러, 1995년 위르겐 클린스만이 FIFA 올해의 선수에 도전했지만 모두 3위에 그치고, 2002년 올리버 칸도 FIFA 올해의 선수에 도전했지만 2위에 그치고 만다. 이후 발롱도르와 통합된 FIFA 발롱도르 시기에는 2015년 마누엘 노이어가 도전했지만 3위에 그치고 만다.[11] 차범근과 맞대결을 펼쳤다. 해당 경기에 마테우스가 라이트 윙으로 출장했고 역시 공격수인 차범근과는 경합 보직이 아니었는데, 선수 생활 말년 마테우스가 수비수로 활약했던 사실을 취합해 공격-수비로 맞대결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의미의 맞대결이라기보단 '상대 팀으로 대결했다' 정도의 의미가 적절하다. 해당 경기는 물론이고 몇 번 더 맞붙기도 했고 리그에서도 몇 번 봐서 그런지 차범근과는 사이가 매우 돈독하다.[12]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까지 바이에른의 두 축이었던 파울 브라이트너카를하인츠 루메니게 콤비를 일컫는 표현이다. 브라이트너는 1983년에 은퇴, 이후 루메니게는 1983-84 시즌 이후 인테르로 이적하며 자연스레 해체된 것.[13] 물론 이후 안드레아스 브레메도 영입되어 마지막 두 시즌간 함께 활약하긴 한다.[14] 물론 알레산드로 알토벨리의 경우 선수 말년이던 해당 시기 활약이 돋보이지 않았을 뿐, 해당 시기 아주리인테르를 이야기할 때 유의미하게 언급해야할 선수 중 하나였다. 문제는 이 알토벨리도 1987-88 시즌을 마지막으로 이적했다.[15] 당시 기준으로 승리하면 2점, 무승부 시에는 1점을 부여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부터 승리 팀에게 승점 3점을 부여하기 시작했다.[16] 18개팀 체제 아래서 세리에 역대 최다 승점 기록이며, 2006-07 시즌 로베르토 만치니의 인테르가 갈아치우기 전까지 역대 최다 승률 기록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안토니오 콘테유벤투스가 다시 한번 갈아치운 상태이다.[17] 마테우스와 반 바스텐 이후 이 자리는 로베르토 바조에게 이어진다. 도식화할 경우, 플라티니-마라도나-굴리트-마테우스&반 바스텐-바조로 이어지는 식. 물론 로베르토 만치니처럼 플라티니 시대부터 바조 시대까지 꾸준히 지배자의 컨텐더로서 좋은 활약을 이어간 선수도 있다.[18] 대회 4골로 팀 최다이자 모든 팀을 통틀어 그보다 많은 스코어러는 스킬라치(6골)-스쿠라비(5골) 단 둘뿐이다.[19] 아킬레스건 부상은 선수 능력에 큰 악영향을 끼치는 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테우스는 바이에른에서 스위퍼로서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20] 마테우스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분류할 경우에도 레이카르트호세 안드라데를 넘는 평가를 받을 만큼 기량에 대한 의심의 여지는 없다. 보통 사비 에르난데스가 마테우스의 라이벌로 꼽히지만 실제 평가는 마테우스가 조금 앞서는 편. 발롱도르 드림팀 투표에서는 사비에게 밀렸지만 이건 드림팀 투표가 최근 선수들이 고평가된 영향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보통 마테우스와 함께 지지와 사비가 거론되고, 그 뒤로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루카 모드리치, 호베르투 파우캉이 언급된다.[21] 2위는 안드레아 피를로, 3위는 사비 에르난데스, 4위는 프랑크 레이카르트, 5위는 루이스 수아레스.[22] 팬투표[23] DM 2위[24] B팀[25] B팀[26] 다만 최장 출장시간 기록은 2002년까지 23경기 출전한 파올로 말디니가 보유하고 있었다. 현재는 이쪽도 리오넬 메시가 경신했다.[27] 클린스만 본인이 확인했다는 이야기로 당시 클린스만은 딱 15골을 득점했다.[28] FC 바이에른 뮌헨의 반대파들은 물론 라이벌인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함부르크 SV, FC 샬케 04 같이 라이벌 팀의 레전드들도 있지만, 마테우스, 토르스텐 프링스, 오토 레하겔과 같이 바이에른에 몸담은 인물들도 꽤 있다. 사실 바이에른은 라이벌 팀 인물이라도 어떻게든 빼내 오지만, 대부분은 정리할 때 냉정하게 정리해버린다. 헤어질 때 굉장히 섭섭하게 대접했기에 더욱 더 반대파가 되는 것이다.[29] 회네스 선수 경력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대표팀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역적질을 해서 팀을 구렁텅이에 빠뜨렸다.[30] 그래서 풋볼 매니저 등 축구 게임에서 보면 바이에른의 레전드 목록에는 마테우스가 없다. 그래도 베스트 11 등에는 마테우스가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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