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 킨

덤프버전 :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이름이 비슷한 토트넘 출신의 공격수 에 대한 내용은 로비 킨 문서
로비 킨번 문단을
로비 킨#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로이 킨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클럽
파일:선덜랜드 AFC 로고.svg

33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주장

에릭 칸토나
(1996~1997)

로이 킨
(1997~2005)


게리 네빌
(2005~2010)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앤디 타운센드
(1994~1997)

로이 킨
(1997~2002)


스티브 스턴튼
(2002)


로이 킨의 수상 이력



로이 킨의 기타 정보





아일랜드의 축구 감독


이름
로이 킨
Roy Keane
본명
로이 모리스 킨
Roy Maurice Keane
출생
1971년 8월 10일 (52세)
아일랜드 먼스터지방 코크
국적
[[아일랜드|

아일랜드
display: none; display: 아일랜드"
행정구
]]

신체
180cm, 78kg
종교
가톨릭 (세례명: 마우리시오)[1]
직업
축구 선수 (미드필더[2]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선수
코브 램블러스 FC (1989~1990)
노팅엄 포레스트 FC (1990~199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93~2005)
셀틱 FC (2005~2006)
감독
선덜랜드 AFC (2006~2008)
입스위치 타운 FC (2009~2011)[3]
아일랜드 대표팀 (2013~2018 / 수석 코치)
아스톤 빌라 FC (2014 / 수석 코치)
노팅엄 포레스트 FC (2019 / 수석 코치)
국가대표
67경기 9골 (아일랜드 / 1991~2005)

1. 개요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플레이 스타일
5. 지도자 경력
6. 기록
6.1. 선수
6.1.1. 대회 기록
6.1.2. 개인 수상
6.2. 감독
6.2.1. 대회 기록
6.2.2. 개인 수상
7. 킨에 대한 말, 말, 말
8. 기타



1. 개요[편집]


아일랜드 출신의 전 축구 선수. 포지션은 미드필더였다. 풀네임은 로이 모리스 킨이고 애칭은 "키노"이다.

현역 시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전성기를 보내며 트레블 1회를 포함해 UCL 1회 우승, PL 7회 우승을 이끌었다. 또한 PFA 올해의 선수FWA 올해의 선수에 1회, PFA 올해의 팀에 5회 선정되었다. 그리고 맨유 시절 주장직을 8년이나 맡았을 정도로 리더십이 뛰어났고, 특유의 불같은 성격과 거친 플레이로도 유명했다.


2. 클럽 경력[편집]



2.1. 코브 램블러스[편집]


축구 선수로서의 출발은 초라해서 아일랜드 정부가 실시한 공공근로사업 중 축구 분야에서 일하기도 했다.


2.2. 노팅엄 포레스트 FC[편집]


어쨌든 코브 램블러스에 재적 중에 한 스카우터의 눈에 띄여서 그의 도움으로 노팅엄 포레스트에서 선수 생활을 하게 되었고, 역시 엄청난 성질머리로 유명한 명장 브라이언 클러프[4]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했다.[5]

점차 실력을 키우며 상위권 클럽들의 관심을 받던 킨은 본래 케니 달글리시가 지휘하던 블랙번 로버스 FC로의 이적에 합의했었지만, 이적 서류에 실수가 발견되어 이적이 지연되는 사이 알렉스 퍼거슨의 전화를 받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로의 이적을 결정했다. 사실 블랙번도 이 실수를 발견했는데, 실수를 발견한 게 금요일 오후인 데다 주말에 사무실이 닫는 관계로 월요일에 이적을 확정짓기로 구두합의를 한 상태였지만 퍼거슨은 킨을 잡기 위해 토요일에 모든 서류를 완비해 킨에게 유나이티드의 유니폼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당시 이적료는 영국 기록인 375만 파운드였다.


2.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편집]


1993년 여름에 킨이 유나이티드에 입성했을 당시 유나이티드의 중원을 구축한 핵심 멤버는 브라이언 롭슨폴 인스의 듀오였는데, 이 듀오는 리그 우승의 주축이 되었던 터라 킨이 주전을 확보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팀의 레전드인 롭슨은 당시 이미 36세의 노장인 데다 부상에 계속 시달리고 있었던 덕분에 킨은 점차 출장 기회를 늘려가며 선발 멤버로의 위치를 확고하게 굳힐 수 있었다. 그렇게 첫 시즌부터 주전으로 자리잡은 킨은 프리미어리그 타이틀과 FA컵 타이틀을 거머쥐며 더블을 달성하게 된다.

1993-94 시즌: 50경기(선발 47경기) 8골 7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7
34
3
5
6
챔피언스 리그
3
3
0
2
1
FA컵
6
6
0
1
0
EFL컵
3
3
0
0
0
커뮤니티 실드
1
1
0
0
0
합계
50
47
3
8
7

94-95 시즌은 맨유와 킨 모두에게 아쉬운 시즌이었다. 일찌감치 챔스는 조별리그 탈락하고 리그 타이틀은 블랙번 로버스에게 승점 1점차로 내준 데 이어, FA컵에서는 준결승 크리스탈 팰리스 전에서 맨유에서의 첫 퇴장을 당하며 결승 출전이 불가했고, 결국 결승에서 에버튼에게 1-0으로 패배하며 무관으로 시즌을 마치고 만 것이다.

1994-95 시즌: 35경기(선발 33경기) 3골 5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5
23
2
2
4
챔피언스 리그
4
4
0
1
1
FA컵
6
6
0
0
0
합계
35
33
2
3
5

95-96 시즌에는 폴 인스브라이언 롭슨 등이 팀을 떠나고, 데이비드 베컴폴 스콜스, 니키 버트 등 퍼거슨의 아이들이라 불리는 선수들이 본격적으로 맨유에서 주전으로 자리잡게 된다. 팀 내 미드필더 중에서 그나마 경험이 많은 킨은 팀의 허리에서 중추 역할을 했고, 맨유 데뷔 시즌에 이어 프리미어리그와 FA컵 타이틀을 거머쥐며 더블을 달성했다.

1995-96 시즌: 37경기(선발 37경기) 6골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9
29
0
6
0
UEFA컵
2
2
0
0
0
FA컵
6
6
0
0
0
합계
37
37
0
6
0

96-97 시즌에도 굳건한 주전이었으나 무릎 부상으로 인해 결장한 경기가 꽤 많았다. 그리고 특유의 성질 머리로 인해 출전 징계도 많았던지라 중요한 경기에서 출전이 불가했던 경우가 많았던지라 킨의 빈 자리가 컸던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경우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챔피언스 리그 4강 2차전. 그래도 리그 타이틀을 거머쥐며 결과적으로 괜찮은 시즌을 보냈다.

1996-97 시즌: 33경기(선발 33경기) 3골 2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1
21
0
2
2
챔피언스 리그
6
6
0
0
0
FA컵
3
3
0
0
0
EFL컵
2
2
0
0
0
커뮤니티 실드
1
1
0
1
0
합계
33
33
0
3
2

97-98 시즌은 맨유 입단 후 가장 불운했던 시즌이었다. 에릭 칸토나의 은퇴로, 주장 완장을 물러받은 시즌이었으나 당시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뛰던 알프잉에 홀란[6]와 후술할 사건으로 인해 심각한 십자인대 부상을 입은 것이다.[7] 결국 이 부상으로 인해 잔여 경기를 모두 날리게 된다. 맨유는 킨의 부재로 인해 후반기에 아스널에게 선두자리를 내줬고, 결국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내줘야했다.

1997-98 시즌: 11경기(선발 11경기) 2골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9
9
0
2
0
챔피언스 리그
1
1
0
0
0
커뮤니티 실드
1
1
0
0
0
합계
11
11
0
2
0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트레블을 이룩한 98-99 시즌에서의 활약상은 엄청났다. 직전 시즌에서 십자인대 부상으로 인해 시즌을 거의 날린 아쉬운 모습을 뒤로 하고, 시즌 총 55경기에 나서는 어마어마한 체력을 보인 것이다. 또한 중요한 상황에서의 활약도 뛰어났다. 특히 유벤투스 FC와의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 2차전에서는 전반전 초반부터 2-0으로 뒤지면서 팀 분위기가 침체될 상황에서 24분에 코너킥 찬스 때 헤더로 만회골을 넣으며 재빨리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결국 맨유는 킨의 골을 시작으로, 34분에 드와이트 요크가 동점골을 기록하며 합산점수에서 원정다득점으로 우세를 잡게 되었고, 84분에는 앤드루 콜이 쐐기골을 박으면서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경고를 받는 로이 킨
그러나 킨은 이 경기에서 전반 33분에 지네딘 지단에게 강한 태클을 날려 넘어뜨리면서 옐로 카드를 받고 경고 누적으로 인해 결승에 출전이 불가했다.[8][9] FA컵 결승에서는 전반 9분만에 부상으로 아웃되었지만 팀은 2-0 승리를 따냈으며,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는 킨과 스콜스의 부재로 팀이 어려운 경기를 펼쳤지만 후반 추가시간에 2골이 나오면서 바이에른 뮌헨에게 극적인 2-1 승리를 거둬 트레블을 이뤄냈다. 대회의 피날레에서는 각각 부상으로 인한 교체와 카드 트러블로 인한 결장으로 아쉽게 마무리했지만, 팀이 모두 우승을 차지하며 트레블을 달성한 최고의 시즌이 되었다.

1998-99 시즌: 55경기(선발 53경기) 5골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5
33
2
2
0
챔피언스 리그
10
10
0
3
0
FA컵
7
7
0
0
0
커뮤니티 실드
1
1
0
0
0
챔피언스 리그 예선
2
2
0
0
0
합계
55
53
2
5
0

99-00 시즌에는 맨유와 재계약을 체결하였으며, 포지션이 중앙 미드필더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즌 45경기에서 12골을 넣는 등 엄청난 활약상을 보이며 2년 연속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동시에 PFA 올해의 선수상과 FW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지난 시즌에 이어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1999-00 시즌: 45경기(선발 44경기) 12골 3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9
28
1
5
1
챔피언스 리그
12
12
0
6
1
클럽 월드컵
2
2
0
0
1
슈퍼컵
1
1
0
0
0
인터컨티넨탈컵
1
1
0
1
0
합계
45
44
1
12
3

00-01 시즌에는 2001년 4월 21일, 맨체스터 더비에서 알프잉에 홀란에게 가한 태클로 인해 논란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항목 참조. 이 사건과는 별개로 활약은 여전했고, 3년 연속으로 프리미어리그 우승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2000-01 시즌: 44경기(선발 44경기) 3골 7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8
28
0
2
7
챔피언스 리그
13
13
0
1
0
FA컵
2
2
0
0
0
커뮤니티 실드
1
1
0
0
0
합계
44
44
0
3
7

2001년 9월 15일, 뉴캐슬과의 경기에서 팀이 3:4로 지고 있던 후반 막판 앨런 시어러의 도발에 넘어가 퇴장을 당하게 된다. 시즌 시작 전부터 퍼거슨의 은퇴 이야기가 떠도는 등 시끌벅적하게 시즌을 맞이했던 맨유에게 찬물을 끼얹고 만 것. 이렇게 시작 초부터 분위기가 어수선했던 맨유는 결국 리그 우승에 실패한 것도 모자라 리그 3위로 시즌을 마무리하게 된다.

2001-02 시즌: 43경기(선발 42경기) 4골 5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8
28
0
3
5
챔피언스 리그
12
11
1
1
0
FA컵
2
2
0
0
0
커뮤니티 실드
1
1
0
0
0
합계
43
42
1
4
5

로이 킨은 변함 없이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해당 시즌 3월 초까지만 해도 선두 아스날과 승점이 8점차로 벌어져 있어서 리그 우승은 이번에도 물건너 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스날의 부진 + 주장 로이 킨을 필두로 한 맨유의 상승세가 합쳐져 결국 리그 1경기를 남겨 놓고 리그 우승을 확정 짓게 된다.

2002-03 시즌: 32경기(선발 30경기) 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1
19
2
0
1
챔피언스 리그
4
4
0
0
0
FA컵
3
3
0
0
0
EFL컵
2
2
0
0
0
챔피언스 리그 예선
2
2
0
0
0
합계
32
30
2
0
1

여담으로 2004년 1월 17일, 울버햄튼과의 경기에서는 경기 시작을 앞두고 터널에서 대기타고 있었는데 상대 선수가 유니폼 관련 문제로 터널에 모이지 않아서 경기가 지연 되자 맨유 선수들을 이끌고 터널을 빠져나가 경기장에 입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로이 킨을 비롯한 맨유 선수들이 빠져나가자 당황해하는 울버햄튼 선수들과 말리는 심판들의 모습이 압권. 허나 이 경기에서 0:1로 패배했다.

2003-04 시즌: 38경기(선발 34경기) 3골 6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8
25
3
3
3
챔피언스 리그
4
4
0
0
1
FA컵
5
4
1
0
1
커뮤니티 실드
1
1
0
0
1
합계
38
34
2
3
6

2005년 2월 5일에는 버밍엄 시티 FC 전에서 맨유 소속으로 50번째 골을 기록했다.

2004-05 시즌: 43경기(선발 40경기) 2골 2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1
28
3
1
2
챔피언스 리그
5
5
0
0
0
FA컵
4
4
0
1
0
EFL컵
1
1
0
0
0
커뮤니티 실드
1
1
0
0
0
챔피언스 리그 예선
1
1
0
0
0
합계
43
40
3
2
2

로이 킨 특유의 성격이 제대로 터져나오게 된 대표적인 사건이 2005/06 시즌 맨유가 미들즈브러 FC 원정에서 1-4로 대패하자[10][11] 킨은 맨유TV와의 인터뷰[12]에서 미들즈브러전 패배의 원인이 된 5명의 선수[13]들을 직접 겨냥하여 능력이 없으면 팀을 떠나라는 식으로 독설을 퍼부었고, 추가로 리오 퍼디난드에게는 12만 파운드의 높은 주급[14]을 받는데 스타도 아닌 놈이 거드름이나 피운다며 맹비난까지 했다. 이 영상을 본 퍼거슨 감독과 데이비드 길 단장은 인터뷰의 내용이 팀 매니지먼트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고 판단하여 맨유TV 편성에서 곧바로 제외하고 킨의 발언이 외부 언론에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에서 맨유가 프랑스의 릴에게 0-1로 패배하여 조별리그 꼴지로 탈락하자 데일리 미러는 이 인터뷰를 공개했고, 일명 “키노게이트”로 불린 이 사건은 영국 전역으로 퍼지면서 논란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퍼거슨 감독은 로이 킨이 주장에 걸맞지 않게 팀 내 기강을 해치고 선수단의 갈등을 일으킨다고 판단[15], 더 이상 그와 함께 할 수 없다고 결정하여 결국 2005년 11월 18일 상호 계약 해지로 맨유에서 방출되었다. 그러나 프리미어 리그에서는 맨유 이외의 팀에서는 뛰지 않겠다며 2006년 1월, 스코틀랜드의 셀틱 FC에 입단하여 시즌을 마무리하고 현역에서 은퇴했다.[16]

2005-06 시즌(총): 16경기(선발 15경기) 1골 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5
4
1
0
0
챔피언스 리그 예선
1
1
0
0
0
스코티시 프리미어 리그
10
10
0
1
1
합계
16
15
1
1
1

로이 킨의 맨유 시절은, 실력 뿐만 아니라 불굴의 정신과 성공에 대한 열망,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유명했으며 알렉스 퍼거슨 경은 그를 함께 했던 선수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였다는 평을 내렸다. 그러나 그 불같은 성격과 자기 자신이나 남에게 지나치게 엄격하고 과격한 언행 때문에 충돌을 여럿 빚기도 했다.[17][18]


파일:RoyKeane_Retire.jpg

로이 킨의 은퇴식
그래도 팀에 큰 공헌을 한 레전드에 대한 예우에서인지 셀틱은 맨유를 킨의 은퇴 경기 상대팀으로 잡았고 2006년 5월 10일,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은퇴 경기에서 팬들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맨유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캡틴의 마지막 모습을 배웅해주었다.[19]

로이 킨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7번의 PL 우승과 4번의 FA컵 우승, 1번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4번의 FA 커뮤니티 실드 우승 등을 경험했다.

참고로 35살이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퇴를 하게 되었는데 젊을때, 지속적인 고관절 부상이 선수 생활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약 이런 부상만 없었더라면 37~38살까지 뛰었을 것이라고.

1993-2005: 통산 482경기(선발 463경기) 52골 39도움


3. 국가대표 경력[편집]


1991년에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렀고, 1994 미국 월드컵에서 활약했다.

2002 한일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는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본선 진출을 이끌게 된다. 그러나 본선을 앞두고 실시한 전지 훈련에서 당시 아일랜드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믹 매카시의 훈련 방법에 불만이 있었고, 훈련 내내 말싸움을 하며 불화가 이어지게 된다. 결국 매카시 감독이 킨을 돌려보내면서, 킨은 대표팀을 떠나 홀로 귀국하면서 2002 월드컵 본선에서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이후 국가대표에 소집하고 있었는데, 2004년 5월에 맥카시가 사임하고 브라이언 커가 새로 부임하였다. 그렇게 브라이언 커가 이끄는 대표팀에 다시 복귀하였으나, 아일랜드 국가대표팀이 2006 독일 월드컵 본선 진출이 좌절되자 2005년 10월 15일,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하였다.


4. 플레이 스타일[편집]



일단 왕성한 활동량을 바탕으로 경기장 전체를 종횡무진 누볐다. 90분 내내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돌아다니며 맨유에 있던 시간 동안 팀의 중심으로 있었다. 전술 이해도가 매우 높아서 항상 적재적소의 위치에 있었으며, 뛰어난 리더십으로 팀을 휘어잡았다.

리더십, 활동량과 함께 킨의 장점으로 들 수 있는 것은 훌륭한 수비 능력이다.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로서 요구되는 모든 수비 능력을 최고 수준으로 갖췄다. 태클 능력 또한 기가 막혔다. 상대 선수의 드리블 상황을 효율적으로 끊어냈고, 공중볼 경합에 언제나 적극적으로 가담해 대부분 우위를 가졌으며, 파트리크 비에라 같은 피지컬이 훌륭한 선수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자신의 플레이를 펼쳤다. 이러한 점은 항상 당당하고 근성 있게, 때로는 거칠게 플레이해서라도 언제나 이기고자 했던 그의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덕분에 그가 주장으로 있을 때, 팀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

로이 킨의 수비력, 터프함 등을 보고 그가 그쪽 롤에 특화된 수비형 미드필더라 착각하기 쉬운데 사실 킨은 다재다능하고 무엇보다 흔히 말하는 공을 잘 차는 선수였기 때문에 전성기 시절에는 공수 양면에서 기여 안하는 곳이 없는 만능형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에 가까웠다. 실제로 킨은 드리블과 패스 연계를 통해 페널티 박스까지 공을 운반해서 넣은 골이 많았을 정도로 후방에 머물면서 공을 지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공격에 가담하는 능력이 좋았다. 물론 이런 플레이가 가능했던 이유는 터치, 패스, 드리블 등 공을 다루는 기술들이 그의 거친 성격처럼 투박할 것이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꽤나 유려했기 때문이다. 맨유 입단 초창기에는 후방에서의 플레이보다 에너제틱하게 필드 전역을 누비고 지속적으로 전진하여 공격에 가담하는 플레이를 선호했다고 본인이 직접 얘기하기도 했다. 다만 전반적으로 수비적인 기여도와 중원 장악력이 돋보이는 선수였던 것은 맞고 4-4-2 포메이션에서 그의 미드필드 파트너였던 폴 스콜스가 조금 더 앞쪽에서 공격에 가담하고 킨은 그보다 살짝 내려와 팀을 받혀주는 역할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로이 킨이 전진해있는 상황에서는 폴 스콜스가 뒤를 봐주고 킨은 파이널 서드에서 공격을 지휘하고 공간 침투하는 역할을 매끄럽게 소화했을 정도로 두 미드필더는 호흡적인 측면에서 매우 유연하게 서로를 커버해줬다. 커리어 후반부에 맨유가 3미들 포메이션을 사용하고 킨도 나이가 듦에 따라 나중에는 확실한 홀딩 미드필더 역할에 집중하기도 했다.

폴 스콜스와 같은 파트너 미드필더가 공격적으로 침투하면 로이 킨 본인은 후방 빌드업을 전담할 정도로 시야도 넓고 패싱력과 개인 기술도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갖췄다. 열심히 뛰면서 전진하기를 좋아하고 후방에서 경기를 조립하는 플레이를 주도하기에는 자신 없었던 맨유 초창기 시절과는 달리 로이 킨의 빌드업 능력도 스콜스가 주전으로 도약하기 시작했을 즈음 이후부터는 오히려 그의 강점이 되어 후방에서 경기를 풀어주는 능력도 탁월했다.[20] 국내 축구 전문가 한준희 해설위원도 4-4-2 포메이션에서 가장 이상적인 중앙 미드필더로 로이 킨을 항상 첫손에 꼽았다. 맨유에서 폴 스콜스와 함께 합을 맞출때에는 스콜스가 공격적으로 올라가면 아래로 내려와 다이아 442를 이루기도 했다. 스콜스도 킨도 체구가 작은 미드필더들이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로빙스루패스를 가진 스콜스와 작은 체구를 커버하고도 남는 엄청난 수비력과 활동력을 가진 킨의 조합은 맨유 역대 최고의 미드필더 조합으로 손꼽힌다.

눈에 띄는 약점이랄 것은 없지만, 체구가 크지 않다는 것이 약점으로 볼 수도 있다. 이는 굳이 꼽자면 본인의 단점으로 로이 킨 스스로가 훗날 인정한 바 있다.[21][22] 엄청난 스태미너를 제외하면 킨은 주력, 점프력, 가속을 붙이는 능력 등 신체적인 능력이 평범한 수준이었으며, EPL의 특성상 이것을 킨의 약점으로 볼 여지는 충분하다.[23] 하지만 비교적 평범한 신체 조건에 비해 굉장히 몸싸움을 잘 했으며, 소위 말하는 단단한 타입의 선수[24]였다. 선술했듯이 승부욕이 매우 강해 항상 적극적으로 플레이했기에 플레이가 거칠기도 했다. 성격은 딱 EPL 최적화. 사실 선수로서 축구 자체만 따졌을 때는 딱히 약점이 없었고 가장 큰 약점은 그놈의 성질머리이다. 이성의 끈을 놓고 달려들다가 퇴장을 당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는데, 이는 팀 입장에서 당연히 엄청난 손해이고 경기 도중에도 상대팀의 타겟이 되기 쉬운 요소이다. 실제로 2001년 9월 15일, 맨유와 뉴캐슬의 경기에서 앨런 시어러는 경기 내내 씩씩거리는 킨을 보고 일부러 슬쩍 한 번 도발해봤는데 킨이 그 어그로에 홀라당 넘어가 공을 시어러의 머리에 던져 맞춰버렸고 퇴장을 당한 적도 있다.[25] 커리어 통산 레드카드를 무려 13번이나 받았다.

동시대에 활약한 비에라와 비교했을 때, 빌드업 상황에서 패스 전개 능력이나 팀 내 플레이메이커로서의 다재다능함 면에서는 비에라보다 킨을 한 수 위로 평가하는 경향이 높고, 중원 장악 능력과 수비력에서는 일반적으로 피지컬이 더 좋은 비에라가 우위로 평가받는다. 전체적으로 보면[26] 압도적인 수비력, 준수한 볼 컨트롤 및 패싱 능력, 악바리 근성과 팀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리더십까지 지닌 당대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이자 주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맨유가 킨과 함께한 시간 동안 얻어낸 수많은 우승 트로피들이 이를 입증한다.[27]


5. 지도자 경력[편집]


선수 은퇴 이후 06/07 시즌에 잉글리시 챔피언십 리그(2부)의 선덜랜드의 감독을 맡아 프리미어 리그로 팀을 승격시켰다. 재미있는게 이 때 선더랜드의 구단주 컨소시엄의 대표가 니얼 퀸[28]이었다. 07/08 시즌은 다소 고전했으나 그럼에도 인상적인 경기력을 몇 번 선보여 팀을 프리미어 리그에 잔류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08/09 시즌 중반, 성적부진으로 사임했다.


파일:external/www.abc.net.au/r173030_653211.jpg


감독이 되면서도 성격은 못 버렸는지 경기가 잘 풀리지 않으면 선수들에게 욕설을 퍼붓거나 주변 집기들을 부쉈다고 한다. 그런데 선수들도 문제가 있었던 게 경기에서 졌는데도 라커룸에서 ABBA의 Dancing Queen을 틀어놓고 춤을 췄다고 한다. 물론 감독에게 들켜서 얻어 터졌다. 심지어 리저브 팀이 경기를 할 때 라커룸으로 찾아가 "1군에 올릴 선수가 있나해서 왔는데 하나도 없다."라고 말하면서 리저브 팀 선수들의 사기마저도 꺾었다. 이 때문에 그가 사임하자 선수단은 환영의 의사를 밝혔고 심지어 축하파티를 벌였다는 루머까지 흘러나온 정도가 아니라 진짜로 열심히 파티를 했다.

2부리그 구단인 입스위치에 부임했을때 선수들이 군기가 빠졌다면서 선수들을 군대캠프에 보내서 굴렸으나한국형 지도자 성적은 더 하락하고 본인은 잘렸다. 선수로서는 일류였지만 감독으로서의 재능은 좀 없는 듯. 동료 선수도 그가 감독직에 대한 이해나 준비가 없는 거 같다고 평했다. 로이 킨 본인도 가장 후회하는 순간이자 인생의 저점으로 입스위치 감독 재직을 꼽았다.

2013년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수석 코치로 영입되었다. 그런데 감독이 마틴 오닐이었다.

2014년 아스톤 빌라의 수석 코치로 임명. 국가대표 수석코치와 겸직인듯. 아일랜드 대표팀에 집중하기 위해 2014년 11월 28일 아스톤 빌라의 코치직에서 사임하였다.

2018년 11월, 아일랜드 대표팀 수석 코치에서 물러났다.

이후 아일랜드 수석코치 시절의 감독인 마틴 오닐 사단에 들어가서 2019년 1월 31일 노팅엄 포레스트 FC의 수석 코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마틴이 성적부진으로 경질되면서 같이 사임하였다.

2022년 2월, 선덜랜드의 감독 후보군에 이름을 올린 상태이다. 만약 선덜랜드로 돌아간다면 13년만에 돌아가는 셈. 그러나 최종적으로 알렉스 닐이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킨의 복귀는 없던 일이 되었다.


6. 기록[편집]



6.1. 선수[편집]



6.1.1. 대회 기록[편집]






6.1.2. 개인 수상[편집]




6.2. 감독[편집]



6.2.1. 대회 기록[편집]




6.2.2. 개인 수상[편집]




7. 킨에 대한 말, 말, 말[편집]


지금까지 함께 한 선수 중 로이 킨이 단연 최고이며, 그는 자신이 열정적으로 경기하는 모든 곳에서 축구 선수와 맨유에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존재다.

알렉스 퍼거슨


모두가 킨을 진정한 리더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또한 믿을 수 없는 기량을 갖춘 선수기도 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는 오늘날 어느 팀에서도 활약할 수 있다.

조니 에반스


나는 로이 킨을 보고 배웠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일단 그가 그냥 좋았다. 지금도 좋아한다. 정말 훌륭한 리더이자, 환상적인 선수였다. 퍼스트 터치는 다른 그 누구보다 훌륭했다. 킨과 함께 피치로 걸아갈 때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게 리더십이다. 그게 내가 이 클럽에 있는 선수들에게 해주고 싶은 일이기도 하고 말이다.

대런 플레처


로이 킨은 이 라인업[29]

에 들 자격이 있다. 나는 그의 광팬이었다. 그의 박스 투 박스 플레이를 공부했고 그라운드에서 많은 싸움을 즐겼다. 그는 최고의 선수이다.

스티븐 제라드


주장 로이 킨은 모든 책임을 다 짊어질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리오 퍼디난드


난 로이 킨을 상대로 뛰는 것을 좋아했다. 우리는 같은 경기에서 열정을 공유했고, 그는 맨유의 좋은 주장이자 리더였다. 그를 상대할 때는 항상 어려운 것을 알았다. 그는 위너다.

파트리크 비에라


내가 어렸을 때 로이 킨은 내가 사랑했던 선수였다.

에릭 다이어



8. 기타[편집]


  • 축구판의 대표적인 꼰대 그 자체로, 일반적인 선수들에 비하면 성격이나 인격에 좀 문제가 많다. 오죽하면 해외에선 맨유팬을 제외하곤 로이 킨을 응원하는 팬들이 없다고 라이벌 팬들이 조롱할 정도였다. 선수, 감독 시절의 일화들과 최근에 방송에서 나오는 발언들을 보면 본인의 엄격한 프로의식에 기반한 꼰대기질이 상당히 다분하다. 그 유명한 키노게이트 사건은 물론이고 감독 시절엔 특유의 성깔로 욕설과 함께 선수들을 몰아붙이는 행동을 많이 할 정도며, 어지간한 상황이 아닌 이상 특정 선수에게 호평을 잘 하지 않는다. 입스위치 시절 성적 부진으로 경질당하자 선수단이 킨의 경질 파티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다만 이는 목적성 없이 트집만 잡고 싶어하는 소위 '나쁜 꼰대'들과는 살짝 궤를 달리 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팀에 대한 과하다 싶을 정도로 보수적인 의리와 축구인으로서 갖춰야 할 높은 수준과 소양을 중시하는 본인의 가치관에서 기반하는 행위로, 프로의식/실력 미달로 간주하는 선수들에게는 매섭게 독설을 날리지만 상기한 비에이라도 그렇고, 본인이 인정하는 프로페셔널들에게는 높은 경의와 존경을 굳게 보여준다. 또한 팀원에 대한 의리도 깊어 패널로 등장하는 방송에서도 여전히 긱스, 어윈 등 맨유시절 동료들을 '참호에서 싸운 전우들'로 지칭할 정도다.[30]

  • 다만 때때로 이 의리가 너무 지나쳐 축구 전문가로서 냉철하게 판단하고 비판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자기와 친분이 있는 축구 선수 내지는 감독을 과도하게 감싸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으로 22-23 시즌 막장 행보의 호날두를 "그는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 "이보다 더 나쁜 짓을 한 맨유 선수들도 그동안 많았다", "호날두는 당연히 선발로 써야 한다"며 옹호하는데, 역시 호날두와 친분이 있고 그에게 우호적인 게리 네빌 조차 22-23 시즌의 호날두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얘기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맨유 팬과 타 팀 팬을 가리지 않고 대부분 로이 킨이 무리수를 두고 있다는 반응이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사실 좋은 쪽으로나, 나쁜쪽으로나 로이 킨의 성격은 전형적인 마초 아일랜드 꼰대 구시대 축구 아재의 자세이다. 좋게 말하면 상남자스러운 면도 있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그냥 우리 주변에 흔한 무례하고 여유 없고 고압적인 꼰대인 것이다.

  • 거친 태클의 대명사이지만, 열정적으로 피치 위를 뛰어다니고 공을 향해 태클을 날리다보면 누군가 많이 아파할 것은 분명하고 자기는 이러한 플레이를 내빼지 않았을 뿐, 본인은 누구에게 정말로 부상 입힐 목적으로 태클을 날린 적은 없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선수에게 선제공격을 날린 적은 없고 본인은 항상 먼저 당하고 나서 보복성으로 한 것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 2002 한일 월드컵 직전 감독과 마찰을 일으키며 귀국해서 논란이 빚어졌다. 그런데 이 부분은 킨 쪽의 얘기가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 것이 사실 월드컵 예선 때부터 아일랜드 축구협회의 선수단에 대한 대우[31]에 불만이 많아 개선을 요구하여 개선에 대한 언질을 받았으나 본선 직전까지도 막장스러운 모습[32]을 보여주자 분노가 폭발했는데 그걸 구실로 감독이 명단에서 빼버린 것이었다. 원래 킨은 끝까지 대표팀에 남아있으려 했으나 선수 시절부터 사이가 안 좋았던 믹 맥카시 감독, 그리고 감독 편을 드는 고참 니얼 퀸의 주도로 일종의 추방을 당한 셈이다. 정작 다른 선수들은 로이 킨 편이었다.[33]

  • 파트리크 비에라와의 앙숙관계는 이미 전설로 불린다. 둘의 앙숙 역사는 이 동영상으로 정리되는데, 로이 킨은 자신의 두 번째 자서전에서 비에라와 대치할 때 속으로는 무척 겁을 먹었다고 고백했다. 만약 비에라가 폭발한다면 자신은 비에라의 상대가 되지 못할거라고 한다.[34] 그리고 앙숙 사이와는 별개로 서로의 실력은 인정하는 편이다. 은퇴 이후에는 같이 방송출연을 할 정도로 관계가 많이 호전되었다. 유로 2020에는 그 유명한 하이버리 터널 사건의 당사자 셋[35]이 같이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다. # 심지어 어느날은 방송 끝나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둘이 같이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고 한다.

  • 2011-12 시즌 맨유바젤에게 패해 UEFA 챔피언스 리그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자 12월 초부터 신랄한 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선수들의 미숙함과 실력을 비난하다가 마침내는 알렉스 퍼거슨 감독을 디스하기 시작했다. 팀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팀을 운영한다는 둥, 이제 팀을 떠난 선수한텐 어떻게 못할 거라는 둥 디스하는 내용으로 봐서 그냥 성적 부진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고 뭔가 개인적인 감정도 느껴진다. 이후 추이를 지켜봐야 할 듯하다.

  • 두 번째 자서전을 발매하면서 맨유를 떠난 것에 대한 후회는 더 일찍 떠나지 않은 것 뿐이라고 서술한 걸 보면 내쳐지는 과정에서 퍼거슨에게 제대로 감정이 상한 것으로 보인다. 퍼거슨이 대단한 감독이라는 사실과 그와 맨유에서 성공적이었던 시절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자기가 경험해본 감독 중 최고는 브라이언 클러프라고 얘기하거나 퍼거슨을 용서할수 없다고 얘기하며, 영국에서는 퍼거슨을 작위를 붙여 '퍼거슨 경(Sir Alex)'이라고 부르는 것이 대부분인데 혼자 '퍼거슨'이라고 꿋꿋이 지칭하는 등 퍼거슨을 공개적으로 디스하기를 꺼리지 않는다. 그리고 자서전에서 이미 2005년 키노게이트 사건이 터지기 이전부터 퍼거슨과 알게 모르게 대립이 있어왔다고 했다. 그게 키노게이트로 인해 완전히 폭발한 것.[36] 사실 킨은 키노게이트 때문에 자기의 맨유 커리어가 끝날거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여태까지 자기가 맨유에서 감독, 코치, 구단에게 참아오고 갈등도 쿨하게 넘어갔던 것에 비해 감독과 구단은 이 사건 하나로 자기를 완전 내쳐버리는 식으로 대우[37]를 하는 것에 화가 났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킨은 "나는 브라이언 롭슨, 스티브 브루스가 맨유를 떠나는 과정도 직접 봤는데 그들이 맨유 커리어 말미에 받은 대우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퍼거슨의 선수 관리가 뛰어나다고 많은 이들이 속고 있다. 퍼거슨이 팀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한다는 말은 헛소리다. 그의 아들은 운좋게 맨유에서 뛰면서 우승 메달을 얻을수 있었다. 그의 형[38]은 오랫동안 맨유의 수석 스카우트였다. 그의 부인이 클럽 스탭으로 있지 않은게 놀라울 뿐이다. 대런 퍼거슨프레스턴 감독직을 잃으니까 거기에 있는 맨유 어린 선수들을 다시 복귀시킨 적이 있다. 이게 맨유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건가?"라며 퍼거슨을 신랄하게 디스했다.[39] 퍼거슨 감독은 그 사건 이후로 비록 킨과 사이가 전보다는 멀어졌지만 그래도 맨유의 주장이자 레전드였기에 은퇴 경기까지 열어주고 신경도 썼지만, 자서전에서 킨이 맨유 구단과 퍼거슨에게 신랄한 디스를 가해버렸기에 둘의 사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현역 은퇴 이후 감독 생활 중에는 퍼거슨의 고충도 어느정도 이해했다고 했는데 그 이후 자서전을 발매하고 여러 인터뷰를 하면서 다시 사이가 벌어진 것이다. 나중에 베컴이 한 번 유니세프 자선 경기에서 둘의 화해를 중재하려고 했으나 킨은 거절했다.[40]

  • 주제 무리뉴의 맨유 감독 재직 시절에 그에게 날이 선 비판을 자주 했다. 모예스는 선수들이 부진해서 경질된거라 선수들을 비난했고, 반 할은 코치 부임설까지 돌았을 정도라 옹호했던 편인데 무리뉴의 경우 부임 소식이 들릴때부터 개인적으로는 싫다고 하더니 틈만 나면 무리뉴에 대한 비판을 일삼고 있다. 맨유의 공격축구가 사라졌다고 비판하는거까지야 정상참작이 가능하다만 맨유가 실제로 살인적인 일정을 걷고 있는데도 무리뉴가 엄살을 부린다고 말한다던가[41], 스페셜 원은 무리뉴가 아니고 과르디올라라고 인터뷰하는 등. 다만, 무리뉴를 강력하게 비난했던 것과는 별개로 그가 맨유 감독직에서 짤렸을때는 시간을 더 줬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무리뉴는 우리(축구 패널)들 모두보다 축구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이라고 옹호하기도 했다. 무리뉴가 토트넘 감독직을 맡기 전에는 스카이스포츠 축구 방송에 패널로 같이 나오기도 했다.

  • 성질머리랑은 별개로 아이들이랑 찍은 사진을 보면 경기장에서 있던 사람과 같은 사람인지 의심갈 정도로 온화해보인다. 피치 내외적으로 보이는 거친 언행과는 달리 사생활은 깨끗한 편이며 1997년도에 결혼한 부인 사이에 아이를 5명이나 두고 있다. 인스타그램도 막내딸이 시켜서 시작했다고 한다.

  • 선수시절 김남일의 별명이었던 남일 킨은 이 선수에게서 나온 것이다.

  • 흔히 맨유하면 떠오르는 미드필더스콜스를 꼽지만, 로이 킨은 스콜스보다도 훨씬 더 맨유의 중심이었던 선수이자 최고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당장에 국내 포털 등 여론에서는 스콜스 등에 비해 지나치게 저평가 받고있다. 모 포털에서 실시한 '프리미어 리그 역대 최고의 주장/미드필더는?' 라는 주제의 설문조사에서도 제라드, 스콜스, 램파드가 상위권을 형성했고, 킨은 1% 대의 지지율을 기록해 조던 헨더슨 보다도 찬밥이었다. 반면 유럽에서 비슷한 설문을 할 경우 상위권에서도 1,2등을 다투는 정반대의 현상을 보인다. 당장 스카이스포츠 등 해외 언론사의 댓글창만 보더라도 로이 킨이 역대 최고의 프리미어 리그 주장이라는 의견이 절대 다수를 이루고 제라드, 토니 아담스, 존 테리, 비에라 등이 근소한 차이로 그 다음이라는 의견이 주류. 이는 킨이 박지성이 맨유를 가고 PL이 한국에서 대중화되기 전에 주로 활약하여 한국인들이 그의 최전성기를 쉽사리 보기 힘들었다는 점에서 기인되는 것으로 보이나, 확실한 것은 킨은 명백한 맨유의 중심이었고 리그에서도 단연 최고였던 선수다. 한 시즌마다 PL 최고의 활약을 펼친 선수에게 수여되는 PFA 올해의 선수FWA 올해의 선수를 받은 것만 보더라도 증명되며, 2021년 PL 명예의 전당 지명식에서 칸토나, 앙리, 시어러 등 자타공인의 프리미어 리그 월드클래스들과 같이 최우선 헌액되며 다시금 이를 확인했다.

  • 박지성의 맨유 입단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국 PL 중계 역사와 킨의 맨유 커리어가 엇갈린 탓에 국내에서는 스램제 세대에 비해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상술했듯이 영국에서는 그 셋 이상의 프리미어 리그 올타임급 전설로 대우받는다. 참고로 파트리크 비에라부터 프랭크 램파드 및 로이 킨 에다가 폴 스콜스 등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들을 모두 상대해 본 스티븐 제라드 역시 상기한 모두는 자신과 비슷한 레벨이라고 보면서도 로이 킨만은 한 차원 다른 레벨의 선수로 평가할 정도였다.[42]

  • 퍼거슨 감독이 은퇴한 후, 2015년 발간한 자서전에서 자신의 지도한 월드클래스 선수로서 긱스, 스콜스, 호날두, 칸토나를 뽑았는데, 킨이 언급되지 않아 말이 오가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2006년에 한 인터뷰에선 자신이 지도한 월드클래스 선수로 킨을 포함시켰고 더 나아가 맨유 역대 최고의 선수로 킨을 찰튼, 베스트에 이어 3위에 올렸던 사실[43]만 보더라도 개인적인 감정으로 킨을 제외시켰다는 게 뻔히 보인다. 이는 베컴에게도 적용되는 말.

  • 반대로 로이 킨이 뽑은 자신의 동료들 중 월드클래스는 긱스, 마크 휴즈, 스콜스, 어윈, 칸토나였다.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일관성. 9년에서 11년간 꾸준히 활약한 선수여야 한다고 얘기했다.

  • 더러운 성격이랑 꼰대기질과는 별개로 자기자신에 대해서는 굉장히 겸손한 인물이다. 당대 최고의 선수 중 한명이었으나 본인은 그저 평범한 기량에 운이 좋은 선수였을 뿐이라고 답하기도 했고 바르셀로나, 바이에른 뮌헨 같은 유럽의 일류 팀들을 상대할 땐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느껴졌다고 한다.

  • 본인이 직접 상대했던 선수들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선수로 지네딘 지단을 뽑았다. 지단의 피지컬적으로 거칠면서도 기술적으로 화려한 플레이가 굉장했다고 한다.

  • 위에 서술한대로 자신의 프로의식에 기반하여 선수들의 정신적인 면을 상당히 강조한다. 재능만으로는 좋은 선수가 될 수 없으며 열망, 헌신, 집중력, 축구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만 한다는 발언을 자주 한다. 능력은 분명히 있어도 팀에 헌신하지 않거나 안좋은 이야깃거리를 만들고 다니는 선수를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포그바가 늘 이런 비판의 주요 타겟이다.[44] "자동차, 문신, 여자친구, 에이전트에 신경쓸 시간에 축구나 해라. 그런건 은퇴하고 나서 해도 된다.", "사람들이 축구선수한테 축구 외적인 관심사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난 동의 못한다. 축구선수라면 당연히 축구가 제일 우선순위에 있어야 한다."와 같은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선수 시절에도 축구 외적인 활동이 매우 많았던 데이비드 베컴에게는 늘 축구가 그의 삶에서 제일 우선순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부업으로 무엇을 하던 별로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45]

  • 당시의 많은 프리미어 리그 선수들이 그랬듯 젊을 적에는 술을 매우 많이 좋아했다. 경기가 끝나면 거의 항상 밖에 나가서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고 하는데 그때는 혈기왕성한 시절이었고 맨유에서 축구도 잘 되고 돈도 잘 벌고 자기는 아일랜드인이기 때문에[46] 한창 때를 술마시면서 즐겼다는 듯. 그리고 새벽 늦게까지 심지어는 아침까지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그 죄책감 때문에 훈련과 경기에서 더 열심해 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경력이 쌓이면서 성숙해지고 십자인대 부상으로 개고생을 하고 나서는 자기관리의 중요성을 깨달아 몸관리를 아주 빡세게 했다. 술을 멀리하기 시작했고[47] 당시 대륙에서 섬으로 넘어오던 스포츠 과학을 받아들여 식단도 바꿔보고 요가를 비롯한 자기에게 생소한 여러 운동법도 실천했다. 다만 자신의 체질을 고려하지 않고 너무 극단적으로 하다보니 수척해지는 등 오히려 역효과도 꽤나 났다고 한다.[48]

  • 축구계에서는 본인 스스로 일종의 밈(meme) 반열에 오른 상태. 축구 패널로 방송에 출연하면 웃길 정도로 냉소적인 발언을 많이 한 것이 그 이유다. 대표적인 밈으로 골키퍼가 멋진 세이브를 해내도 '그저 자기 일을 했을 뿐'이라고 한 것이 있다.[49] 또 아스톤 빌라가 잔류에 성공하고 라커룸에서 선수들이 환호하는 모습을 보고 우승한 것도 아닌데 너무 오버한다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 이렇게 좀처럼 호평을 하지 않는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로 인해 현지에서도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해설자이다. 불호하는 입장은 킨이 타인의 상황에 잘 공감하지 못하고 맨유 주장시절마냥 수직적으로 평가를 날린다는 입장이고, 좋아하는 사람은 본인 스스로가 엄청난 프로페셔널이었던 만큼 그의 입장에서 듣는 것의 의미있고 재밌다는 평이다. 특히 좋아하는 사람들은 마치 꽁트를 보고 있는 것처럼 매우 재밌어 한다.

  • 바로 위의 이유로 패널로 전업한 이후 오히려 이미지가 좋아진 편이다. 원래 사람들이 로이 킨에 대해 가졌던 이미지는 성깔 더러운 꼰대 아저씨였는데 방송에서 물론 여전히 독설을 날리고 사사건건 투덜거리긴 하지만 의외로 유머있고 주변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호감가는 면이 부각되고 있다. 특히 마이카 리차즈와의 콤비는 축구팬들 사이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킨의 정색/냉소와 시장바닥 만담꾼같이 목소리도 크고 리액션도 혜자인 리차즈의 조합이 마치 콩트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주로 패턴은 킨이 정색하고 툭툭 던지는 멘트에 몸을 젖히고 웃어대는 리차즈의 모습이 교차되는 그림이었다. 방송국에서도 이 케미스트리를 알아차렸는지 둘이 차 안에서 토크를 하는 시리즈물을 제작하기도 했다.

  • 어렸을 때는 토트넘의 팬이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보통 맨유리버풀, 혹은 셀틱을 서포트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꽤나 이례적인 일이고 로이 킨 본인 스스로도 일반적인 케이스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이 때문인지 패널로서도 토트넘에 대한 독설을 맨유만큼 많이 한다.

  • 독실한 가톨릭 신자며 신앙을 통해서 분노를 조절하는 법을 배웠다고 간증을 한 적이 있다.

  • 카타르 월드컵 때 영국 언론 ITV에서 중계하던 그는 대한민국과 경기를 치르던 브라질 선수들이 골을 넣을 때마다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나는 그렇게 많은 춤을 본 적이 없다"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첫 골을 넣고 잠깐 춤을 추는 정도는 상관 없지만 점수차가 많이 벌어져있는 상황에 심지어는 감독까지 춤 세레모니에 가세하는 것은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자세라고 지적했다. 정작 한국에서는 오히려 덜 화재였던 이슈가 해외에서는 로이 킨 특유의 투덜이 꼰대 아저씨같은 컬트 이미지와 맞물리면서 많은 찬반 여론이 형성되며 핫한 토픽이 되었는데 한편, 아르헨티나가 우승하고 스칼로니 감독이 자기 아이들과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는 "멋진 장면이다. 마음껏 춤춰라. 10년은 춰도 된다. 춤을 이럴때 추는거다."면서 며칠 전의 일을 다시 환기 시키며 웃음을 자아냈다.

  • 리오 퍼디난드와의 레전드 썰이 있다. 퍼디난드의 자서전에서 말하기를, 2002년 맨유로 이적 후 첫 훈련에서 조심스럽게 플레이하며 안전하게 게리 네빌에게 패스를 하였는데 로이킨이 달려와 "여기가 망할 웨스트햄, 리즈[50]인줄 아냐 XX야? 지랄하지 말고 공 앞으로 보내"라며 소리쳤다고 한다. 다만 이 일화는 로이킨의 불같은 성격을 까려는 목적이 아니라, 이기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교훈을 얻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목적이긴 하다.

8.1. 알프잉에 홀란드 사건[편집]




파일:external/e1.365dm.com/955927_3213624.jpg


대한민국에서는 알프잉에 홀란드[51]와의 일화가 복수극으로 왜곡되기도 했다. 알프잉에 '알피' 홀란드가 로이 킨을 부상입힌 뒤 "별 것도 아닌 게 까불고 있어!"라고 외쳤고, 이를 기억하고 있던 로이 킨이 5년 후 알피 홀란을 부상입히고, 홀란드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는 이야기인데, 전부 사실이 아니다.

첫째, 로이 킨은 홀란드에게 백태클을 시도하다 부상당한 것이다. 둘째, 홀란드가 로이 킨에게 말했다는 "별 것도 아닌게 까불고 있어" 또한 사실이 아니다. 로이 킨이 백태클에 실패하고 필드에서 뒹굴고 있었는데, 홀란드가 "다친 척 하지 말고 일어나."고 말한 것이 왜곡된 것이다. 셋째, 알피 홀란드가 로이 킨의 태클로 당한 부상은 경미한 타박상이었다. 홀란드는 끝까지 경기를 소화했고, 며칠 뒤엔 국가대표 경기에도 출전했다. 넷째, 알피 홀란드는 로이 킨을 고소하려 했으나 실제로 하지는 않았다. 다섯째, 로이 킨은 알피 홀란드를 노린 태클을 두고 개인적인 복수라고 말하지도 않았다.[52] 마지막 로이 킨과 알피 홀란드는 그 이후에도 3~4번이나 만난 적이 있다.

대한민국 내에서 부풀려진 복수극 자체는 사실이 아니지만, 로이 킨이 알피 홀란드와 사이가 안 좋았던 것은 사실이다. 일련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로이 킨은 홀란드를 여러번 비난했다. 킨이 홀란드를 걷어찼을 때 다른 시티 선수들이 자신에게 달려들지 않았는데, 그건 홀란드가 머저리이기 때문이며, 홀란드가 머저리라는 건 시티 선수들도 전부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이 정리된 글이다. 그리고, 알프잉에 홀란드는 시간이 흘러서 로이 킨에 대한 악감정은 이젠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다 잊었다고 한다.


8.2. 크리스 이글스 폭행[편집]


리오 퍼디난드의 회고에 따르면 로이 킨이 복귀 전 2군에서 뛸 때 당시 신인이었던 크리스 이글스가 자신에게 태클하자 돌아서서 주먹으로 턱을 가격했다고 한다. 그저 자기 일을 했을 뿐인데
기사
[1] 싸움닭인 대외적 이미지와 별개로 상당히 독실한 신앙인이다. #[2]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3] 09/10 시즌 중 부임, 10/11 시즌 중 경질.[4] 중소 구단인 포레스트의 역대급 최전성기를 이끈 감독. 기존 선수단의 역량을 한계치로 끌어올리고, 자신의 전술로 융합해 유러피언컵 2회 우승을 이끌었으나 이 후 포레스트는 자금난과 전력 약화로 하부리그로 강등되었다가 2022년에서야 프리미어 리그로 돌아왔다.[5] 여담이지만 킨은 FA컵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해 골을 헌납하고 팀이 탈락하는 빌미가 됐었는데, 라커룸으로 돌아온 킨에게 클러프가 주먹을 날려 그대로 뻗게 만든 적이 있다고 한다.[6] 엘링 브라우트 홀란의 아버지이다.[7] 1997년 9월 27일 리즈와 맨유의 경기였다.[8] 베컴에 의하면 킨은 경기 끝나고 결승전에 뛰지 못한다는 사실에 낙담했다고 한다. 다른 선수였으면 경기 도중에 심리적으로 크게 동요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로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팀을 결승으로 이끌었다는 점 때문에 이 경기를 로이 킨 커리어 최고의 경기로 뽑는 사람이 많다. 물론 킨 본인은 자기 할 일을 했을 뿐이고 팀 전체의 업적이라며 겸손하게 반응한다.[9] 로이 킨의 부재로 당시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는 팀의 가장 연장자이자 오랜 기간동안 몸 담고 있던 골키퍼 피터 슈마이켈이 주장 완장을 대신 차게 되었다.[10] 당시 퇴물대접을 받던 스페인 전 국가대표 가이즈카 멘디에타가 맹활약을 펼친 경기로도 유명하다.[11] 사실 이 경기를 망치게 된 경기 외적인 요인으로는 그 경기가 맨유 통산 1000번째 골을 앞두고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이 때문에 영국의 언론은 1000호골의 주인공은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한 기사가 연일 이어졌으며 심지어는 한 맥주회사에서 1000호골의 주인공에게 거액의 상금을 주겠다고 하기까지 했던 상황이었다. 이런 외부적인 상황으로 맨유 선수들이 전반적으로 골을 넣기 위해 경기 본연에 집중하지 못해 더 큰 참사로 이어졌다는 평가도 많다. 참고로 이날 넣은 1골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1000호골의 주인공이 되었는데, 경기내외적으로 완패를 당했기 때문에 이 1000골에 대한 화제는 곧 사그러들었다. 게다가 이 골도 0:4로 끌려가다가 겨우 넣은 만회골이었다.[12] 사실 원래 이 인터뷰는 게리 네빌이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킨의 부상 때문에 서로 스케쥴을 조정하게 되면서 킨이 맡게 된 것.[13] 일명 로이 킨의 “맨유5적”으로 불렸는데, 리암 밀러, 키어런 리차드슨, 앨런 스미스, 존 오셔, 대런 플레처가 집중 포화 대상이었다.[14] 사실 킨은 퍼디난드의 주급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선수 개개인의 급여에 관심도 없다고 한다. 12만 파운드는 그저 그를 비난하기 위한 랜덤한 액수였을 뿐.[15] 그런데 킨의 주장에 의하면 정작 맨유에서 그와 같이 뛰었던 선수들은 그 문제의 인터뷰를 크게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구단은 킨에게 5000파운드 벌금을 내라고 했는데, 그동안 이것보다 더한 벌금도 문제 없이 내던 킨은 무슨 이런 문제로 벌금을 내야하냐며 벌금 내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킨은 이 벌금 납부 거부가 그가 맨유에서 내쳐진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한다.[16] 원래 로이 킨은 05-06 시즌이 끝나고 맨유를 떠나기로 했었다. 단지 키노게이트로 그 시기가 앞당겨 졌을뿐이다.[17] 맨유 시절 동료로 인간성 좋고 선량하기로 정평이 난 솔샤르도 훗날의 인터뷰에서 로이 킨은 선수와 감독 양쪽 다 깠다. 좀 돌려말하긴 했지만 이름을 지목해서 유독 로이 킨한테만 그런 걸 보면 일화가 많기도 한 모양. 또한 마인드가 군인 마인드인데 과거 감독 시절 선수들을 경기력 향상과는 상관없는 병영캠프에 보내기도 했다.[18] 프로 선수로서 축구를 대하는 마인드가 굉장히 빡세다. 18-19 시즌 맨유와 리버풀의 더비 경기 시작전에 양팀 선수들이 터널에서 서로 포옹하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전쟁에 나가는데 포옹이 웬말이냐. 상대를 쳐다도 보지 말아야 한다"며 대차게 깠다.[19] 경기 끝나고 관중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별로 할 말 없습니다. 경기 보러와주신 맨유, 셀틱 팬들 감사합니다. 한 시즌동안 맨유, 셀틱 선수들 고생하셨습니다. 딱히 더 말할거 없습니다. 오늘 즐거우셨으면 좋겠고요. 제 남은 인생에서 잊지 못할 순간입니다. 행운을 빕니다."라며 정말 쿨하고 짧게 마무리했다.[20] 로이 킨이 맨유에 입단한지 얼마 안 됐을 시절에 당시 맨유의 주장이었던 브라이언 롭슨이 그에게 더 높은 수준의 미드필더가 되기 위해서는 빌드업에 좀 더 관여할 줄 알아야 한다는 조언을 했다고 한다.[21] 외모의 한 부분을 바꿀 수 있다면 무엇을 바꾸겠냐는 게리 네빌의 질문에 키가 좀 더 컸으면 좋을 것 같다고 답하였다.[22] 다만 이 작은 체구라는 약점은 로이 킨이 이것을 극복해내는 과정에서 엄청난 정신력을 얻었기 때문에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그의 성공을 이끌어 냈다고도 볼 수 있다.[23] 피지컬의 어느 부분에서도 킨에게 밀리지 않는 파트리크 비에라, 비에라만큼은 아니지만 최상급의 피지컬을 가진 스티븐 제라드, 그들보다 느리지만 그것을 빼면 그들과 비슷한 수준의 피지컬을 가진 프랭크 램파드가 PL 역사상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로 지금까지 불리우는 것에서 과거 PL의 스타일을 파악할 수 있다. 신체적인 점에서 타 선수들에 비해 불리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곧 영국 팀에서의 실패를 의미했다. 어느 리그라도 피지컬이 우수하면 그렇지 않은 것보다는 유리하다.[24] 현역 선수로 예를 들면 황희찬, 은골로 캉테, 제르단 샤키리 같이 다부진 체형을 가진 선수.[25] 이 일 때문에 아직도 둘의 관계는 껄끄럽다고 한다.[26] 국내에서는 킨의 전성기 시절 영상을 라이브로 본 세대가 극히 적고 해외축구의 본격적인 태동기인 2000년대 초반이 비에이라의 전성기였기에 그 당시 30대 초반에 접어들어 하락세로 넘어가는 킨이 저평가를 많이 받는다. 또 국가대표 활약상에서 비에라는 월드컵 우승 및 준우승과 유로 우승의 커리어를 가졌고, 킨은 1994 미국 월드컵에서의 활약상 이외에는 아일랜드의 전력상 한계가 있기에 대표팀 커리어로 들어가면 킨이 많이 불리해진다. 다만, 해외에서는 국대 활약상을 제외하면 오히려 킨을 더 쳐주는 경향이 있다.[27] 다만 알렉스 퍼거슨은 자서전에 본인이 생각하는 월드클래스 선수에 로이 킨을 포함시키지 않았는데 정말 많은 논란거리가 되었다. 피터 슈마이켈과 함께 퍼거슨이 월드클래스라고 평가하지 않은 것에 대해 가장 논란이 되었던 선수였다.[28] 둘의 악연은 2002 월드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29] 제라드가 선정한 역대 유럽 축구선수 베스트 11.[30] 로이 킨이 스카이스포츠에서 '경기 끝나고 상대 선수와 친근하게 인사를 하거나 대화를 나누는건 안된다. 경쟁자끼리 뭐하는 거냐'라고 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한 인터넷의 반응은 아저씨, 이건 축구예요. 전쟁이 아니라였다.[31] 식단에 패스트푸드가 나왔으니 말 다했다.[32] 훈련시설이 전혀 준비가 안되어있는 사이판에서 훈련을 했다. 훈련용 공, 콘, 골키퍼 장갑조차 없었고 운동장은 떡잔디여서 부상위험이 컸다.[33] 정작 불화가 있었던 니얼 퀸은 훗날 선덜랜드에서 감독과 구단 수뇌부로 다시 재회하게 된다. 게다가 아일랜드는 킨 없이도 16강에 올라갔다. 수원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16강 스페인전에서도 1:1로 비겼으나 승부차기로 패해 아쉽게 탈락. 이겼다면 한국의 8강전 상대가 되었을 것이다.[34] 다만 축구선수로서는 자기가 더 나은 선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35] 로이 킨, 파트리크 비에라, 게리 네빌. 참고로 네빌은 비에라가 자길 위협했다며 비에라를 탓하고 비에라는 화를 참지 못한 로이 킨을 탓하며 킨은 자기 선에서 문제를 해결짓지 못한 네빌을 탓한다.[36] 게리 네빌은 둘 다 자기 주장이 강하고 고집이 세고 절대 지기를 싫어한다는 점에서 둘을 서로의 거울 같았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둘의 사이가 좋게 끝나기 어렵다고 생각했고 둘의 비슷한 성향 때문에 키노게이트 이전부터 미묘한 긴장감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키노게이트 사건이 터지고 그걸로 인한 팀 미팅(참고로 이 미팅은 정말 끔찍했다고 한다)까지 열리는 순간 둘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거라 직감했다고 한다.[37] 이 과정에서 당시 맨유의 단장이었던 데이비드 길은 로이 킨에게 주는 구단 성명서에 11년 반 동안의 헌신에 고맙다고 하는 오류도 범했다. 로이 킨은 맨유에서 12년 반을 뛰었다.[38] 마틴 퍼거슨[39] 퍼거슨이 영국 축구계, 그리고 세계 축구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하면 이 정도로 대차게 까는 인물은 정말 드물다.[40] 퍼거슨과는 달리 베컴과 킨의 사이는 상당히 좋은 편이다.[41] 평소 로이 킨이 하는 발언을 보면 아무리 힘들어도 별말 없이 자기 일을 묵묵히 하는 스타일을 선호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힘든 점을 어필하는 스타일은 싫어하는 것으로 보인다.[42] 출처[43] ##[44] 다만 포그바의 재능에 대해서는 항상 높게 평가한다. 단지 그에게 부족한 축구적인 규율을 늘 아쉬워한다. 또한 램파드도 포그바에게 재능은 휼룡한데 겉멋이 너무 많이 들어 기대치만큼 성장하지 못했다고 평가받았다.[45] 그래서 그런지 축구 외적인 것에 잡음이 없고 헌신적인 선수인 조던 헨더슨을 좋아한다. 선덜랜드 감독 시절에 헨더슨을 지도했던 로이 킨은 헨더슨이 리버풀로 이적한 뒤로 방송에서 캐러거에게 헨더슨을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다. 당시 헨더슨은 리버풀에서 좋은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던 시절이었다.[46] 아일랜드인은 술을 좋아한다는 스테레오타입이 있다. 그리고 실제로 아일랜드는 술 문화가 발달되어있는 나라다.[47] 은퇴한지 한참 지난 지금도 술을 안마신다.[48] 체지방률이 4%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는 필드 위에서 부딪히고 힘을 내면서 뛰어야하는 축구선수에게 과도하게 낮은 체지방률이다. 몸에 지방이 너무 적어서 경기중에 추운 적도 많았다고 한다.[49] 해외 팬들 사이에서는 의료진이 코로나 백신을 만들어도 킨은 걔네들은 그저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할 것이라는 등으로 써먹는다.[50] 퍼디난드가 맨유에 오기 전에 뛰었었던 클럽들을 말한다.[51] 엘링 홀란드의 아버지다.[52] 로이 킨의 자서전에는 "공 가져가는 건 좋은데, 다신 나한테 엄살 피우지 말라고 하지 마라", "알피 홀란드는 정당한 대가를 치른 것"이라는 내용이 있긴 하다. 그러나 언급한 '정당한 대가'라는 게 엄살피우지 말라는 홀란드의 말에 대한 것인지, 홀란드가 입은 부상 자체를 의미하는 지는 명확하지 않다. 로이 킨 또한 인터뷰에서 부상을 입힐 의도로 홀란드에게 백태클을 한 건 아니라고 주장했다. 단 로이 킨 답게 홀란드를 아프게 할 의도는 있었다고 말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5 21:53:04에 나무위키 로이 킨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