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그람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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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그람 왕조
ローエングラム王朝 | Lohengramm-Dynastie


파일:lion02_s.png

Sieg Kaiser!
지크 카이저!
국가 개괄
국명
은하제국 로엔그람 왕조
국가 체제
전제군주제[1]
국가 원수
은하제국 황제(카이저)
수도성
발할라 성계
제3행성 오딘

페잔 회랑 페잔 성계
제2행성 페잔
황궁
행성 오딘
노이에 상수시

행성 페잔
호랑가시나무관[2] → 벨제데 임시 황궁 → 뢰벤브룬(예정)[3]
국성
로엔그람(Lohengramm)
국가 정보
인구
약 400억 명[4]
공용어
제국공용어[5]
통화
은하제국 마르크
자유행성동맹 디나르
군사
은하제국군
기년법
신제국력

역사 정보 [ 펼치기 · 접기 ]
개조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국가
존속기간

서기(A.D.): 3599. 6. 22. ~ ?
우주력(SE): 799. 6. 22 ~ ?
신제국력(NRC): 001. 6. 22. ~ ?
주요 사건[1]
· RC 487 라인하르트 원수부 창설
· RC 488. 10. 로엔그람 독재체제 수립
· NRC 001. 06. 22. 신 은하제국 건국
· NRC 001~002 제2차 라그나뢰크 작전
· NRC 002 노이에란트 전역
· NRC 003 시바 성역 회전
주요 황제
초대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건국 이전
은하제국 골덴바움 왕조
멸망 이후
?[2]

1. 개요
2. 역사
2.1. 로엔그람 가문사
2.2. 건국 배경
2.3. 로엔그람 독재체제
2.4. 전쟁과 테러, 그리고 평화
3. 국가 개괄
3.1. 상징
3.2. 강역
3.3. 정치
3.3.1. 정치체제
3.3.2. 건국 세력
3.3.3. 초대 내각
3.3.4. 주요 군부 인사
3.3.5. 어두운 면
3.4. 노이에란트 통치
3.5. 외교
3.6. 사회
3.7. 경제
3.8. 군사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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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그람 왕조의 수도성 페잔.

은하영웅전설에 등장하는 나라.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이 건국한, 은하제국의 두번째 왕조.


2. 역사[편집]



2.1. 로엔그람 가문사[편집]


로엔그람 가문은 은하제국 건국부터 내려오는 명문 귀족가로, 시조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루돌프 폰 골덴바움이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 데 '공헌'했다고[6] 인정받아 작위와 거기에 따라오는 특권을 얻었다. 이후 로엔그람 가문은 명문가이자 무가(武家)답게 각료와 제독을 각각 10명 배출했다.

특히 제9대 로엔그람 백작 콘라트 하인츠는 폭군을 타도하여 멸망의 위기에 빠진 제국을 구한 공을 세웠다. 제국력 253년 제14대 황제 '유혈제' 아우구스트 2세의 6년에 걸친 학살로 일반 서민부터 황족까지 평등하게 죽어갈 때, 죽음의 위기에 놓인 에리히 폰 린더호프 후작이 처음으로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다. 당시 제국군 제독이었던 콘라트 하인츠는 린더호프 후작의 반란군에 가담, 트라바흐 성역에서 싸울 의지가 없던 황제의 토벌군을 격파하였다.

린더호프 후작이 아우구스트 2세를 몰아내고 제15대 황제 '지혈제' 에리히 2세로 즉위하자 콘라트 하인츠는 제국원수에 서임되었고 군무상서, 내무상서, 국무상서를 역임하였으며 작위도 공작으로 승격되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차남 필립이 일으킨 사고로 황녀 마크달레나가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책임을 진다는 명목으로 공직을 사퇴했을 뿐만 아니라 후작위 또한 반납하여 백작으로 돌아갔다.

이후로도 로엔그람 가문은 계속 이어졌으나, 당주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직계 혈통을 유지하지 못했고 제국력 471년 경에 직계가 단절되고 말았다. 로엔그람 가문은 일족을 양자로 들여 가문의 역사를 이어나갔지만 이마저도 요절하면서 대가 끊겨 폐절되고 말았다.

라인하르트가 로엔그람이란 성을 얻게 된 것도 이것과 관계가 있다. 명백한 로엔그람의 피를 이은 당주와 후계자가 있다면 생판 남인 라인하르트가 가문의 대를 잇는 건 불가능하지만 당주와 후계자부터 직계 혈통은 물론, 그 자리를 대신 이을 방계 혈통까지 싸그리 대가 끊기다 보니 프리드리히 4세도 황명으로 라인하르트에게 로엔그람이라는 성을 하사할 수 있었던 것. 실제로도 이와 관련해서 어쨌거나 전례는 있었다는 식으로 '아주 터무니 없는 일'은 아니라는 식으로 취급한다.

그럼에도 대귀족들이 반발한 이유는 이러한 성을 갖게 된 라인하르트가 프리드리히 4세의 즉위 전부터 황제든 황족이든 갖가지 이유로 남발해서 그 가치가 겨우 '공무원 임용에서 혜택이 있다.' 정도로 추락해버린 하급귀족인 라이히스 리터(제국 기사) 출신이란 점이기 때문이다. 당장에 '가난해서 먹고 살기 위해 군대에 입대했다'는 아달베르트 폰 파렌하이트도 작위는 없지만 명백히 '폰'이 붙은 하급귀족이다. 라인하르트 역시도 집안이 망해버려서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즉 대귀족들은 "아니, 그래 로엔그람 가문이 대가 끊겨서 양자를 넣어줄 순 있어, 근데 우리랑 격도 안 맞는 금발 애송이 따위를 넣는다고? 그딴 놈이랑 우리가 왜 동등해져야 하지?"라는 마인드였을 것이다.

2.2. 건국 배경[편집]


골덴바움 왕조는 개조 루돌프 대제은하연방을 무너뜨린 후 5세기 동안 쇠퇴와 부흥을 반복하며 민중들 위에 군림했으나, 프리드리히 4세의 시대에 접어들자 점점 병들어가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자유행성동맹과의 전쟁이 1세기 넘게 이어졌고 내부적으로는 재정적자와 양극화가 만성화되었으며[7] 궁정암투와 지방반란이 성행하고, 문벌귀족들의 전횡이 날로 심해졌으며 황제는 정사를 돌보지 않고 여색에 빠져 있었다. 썩어빠진 제국은 수많은 불만분자들을 양성했고, 그 중 하나는 아예 제국을 찬탈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개조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의 본래 이름은 라인하르트 폰 뮈젤이다. 뮈젤 가문은 제국기사 작위를 받은 한미한 하급귀족 가문으로서 그마저 있는 재산도 아버지 세바스티안 폰 뮈젤이 탕진하여 평민들보다 못한 삶을 살던 이름만 귀족 가문이었다. 라인하르트는 이 가난한 생활에도 친우 지크프리트 키르히아이스와 누나 안네로제 폰 뮈젤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으나, 황제 프리드리히 4세의 여성취향을 맞춰줄 여자를 찾던 궁내성 직원들의 눈에 누나 안네로제가 들어오면서 행복한 일상은 부서지고 말았다. 사랑하는 누나가 황제에게 끌려가자 격분한 라인하르트는 출세해서 언젠가 황제로부터 누나를 찾아오기 위해 군인이 되었다.

안네로제에 만족한 프리드리히 4세는 그녀를 총희로 삼고 그뤼네발트 백작 부인 칭호를 내렸다. 또한 그녀의 동생 라인하르트도 총애했으며, 이런저런 편의를 봐주고 공을 세울 때마다 꼬박꼬박 승진시켜 주었다.[8] 그 덕분에 라인하르트는 소위로 임관한지 불과 4년만에 제국원수에 서임되었고 우주함대 부사령장관이 되어 제국 우주함대의 절반을 장악하였다. 프리드리히 4세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제국 건국 때부터 내려왔지만 최근 후사가 없어 폐절된 명문 귀족가문 로엔그람 백작가를 라인하르트가 잇도록 하여 제국기사에 불과한 자를 문벌귀족에 편입시켰다.

황제의 의향이 모종의 루트로 새어나가자 문벌귀족들은 명문 가문이 한문(寒門)의 출세 게임에 제공되는 싸구려 경품으로 전락했다고 입에 거품을 물었으며 '금발 애송이'는 물론 결정을 내린 프리드리히 4세도 비난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총신 클라우스 폰 리히텐라데 후작은 새로운 가문이 아니라 폐절된 가문을 되살리는 거라면 귀족들의 수가 지나치게 많아질 일도 없고, 로엔그람 백작가가 재흥하는 것 또한 머지 않아 묻힐 일이라고 생각하여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엔그람 백작은 황제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결코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에 있어 작위와 계급보다 누이와 함께했던 행복한 일상이 더 소중했으며, 누이가 궁정이라는 감옥에 갇혀 황제의 시중을 드는 것, 무능한 늙은이가 신성불가침한 전제군주랍시고 평민들 위에 군림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평민들을 전쟁으로 내몰고 자기들은 '성벽 속의 평화'를 누리며 특권과 선민의식, 부정부패와 무능으로 무장한 문벌귀족들이 평민 위에 군림하는 것도 참을 수 없었다. 로엔그람 백작은 승진을 거듭하면서 능력과 골덴바움 왕조에 대한 반감을 겸비하여 향후 뜻을 같이할 수 있는 동지들을 물색하고, 제국원수에 서임되어 원수부를 개설할 권리가 주어지자 점찍어둔 인재와 동지들을 모두 라인하르트 원수부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우주력 796년, 제국령 침공작전 도중 은하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4세가 붕어하자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후작은 제국재상 대리이자 국무상서인 클라우스 폰 리히텐라데 공작과 연합하여 프리드리히 4세의 손자 에르빈 요제프 2세를 새 황제로 옹립했다. 자신들이 무시당하고 소외당했다는 사실에 문벌귀족들은 격분했고, 국정을 농단한 리히텐라데 공작과 로엔그람 후작을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립슈타트 귀족연합을 결성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본래 군재가 없었던 문벌귀족들은 샨타우 성역 회전을 제외한 모든 전투에서 은하제국군에게 연전연패했고[9], 베스터란트 학살사건으로 민심도 잃었으며 결국 최후의 근거지 가이에스부르크 요새가 함락당하면서 완전히 몰락한다. 강력한 정적이 사라지자 로엔그람 후작의 참모장 파울 폰 오베르슈타인과 로엔그람 원수 휘하 제독들은 수도로 달려가 리히텐라데 공작과 그 일가를 모조리 숙청한다. 이로써 반대파를 모조리 숙청한 로엔그람 후작은 작위를 공작으로 높이고 제국군 최고사령관과 제국재상을 겸직하여 정치와 군사 양면을 모두 장악했으며, 어린 황제를 제치고 제국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2.3. 로엔그람 독재체제[편집]


제국력 488년 10월에 출범한 로엔그람 독재체제는 근본적으로 '군인의 정치지배를 제도화'한 체제였다. 라인하르트는 제국군 최고사령관을 통해 군권을 장악하고, 제국재상으로 정부 권력을 장악했다. 라인하르트의 부하들은 모두 대장에서 상급대장이 되어 군 수뇌부를 구성했고, 문관들은 권력을 잃고 라인하르트가 실행할 개혁을 뒷받침하는 존재로 전락했다.

반대세력을 모조리 제거한 라인하르트는 그전까지 상상도 못했던 개혁을 몰아붙였다. 문벌귀족들은 모든 재산과 특권을 잃고 사회 밑바닥으로 떨어졌으며, 평민들은 자유와 권리를 되찾았으며 복지 제도가 신설되고 폐간된 언론이 복간되거나 사상범이 석방되는 등 사상 통제가 대폭 완화되었다. 자연스럽게 민중들은 라인하르트를 칭송했고, 문벌귀족들은 분노했지만 그들에게는 힘이 없었다. 불공정과 양극화가 해결된 제국은 급격하게 국력이 팽창하여 피폐해진 동맹과 페잔이 연합한다 해도 압도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페잔 자치령은 제국과 동맹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이득을 취하고, 나중에 지친 둘을 잡아먹는 기존의 계획이 더 이상 실현이 불가능하다 보고 제국에 협력하여 동맹을 멸망시킨 뒤, 신 제국으로부터 기득권을 인정받고자 했다. 페잔은 구체제에 향수를 가지고 있던 망명 귀족들을 포섭하여 황제 납치 사건을 일으키고, 문벌귀족들은 동맹으로 망명한 뒤 동맹 정권의 지원을 받아 은하제국 정통정부를 수립했다.

하지만 페잔과 말약을 맺어 황제 납치를 방조한 라인하르트는 즉시 선선제의 손녀 카타린 케트헨 1세를 새 황제로 옹립하고, 페잔 자치령과 동맹을 침공한다. 별다른 군사력이 없고 방심한 페잔은 순식간에 병탄당하고, 자유행성동맹은 남은 군사력을 끌어모아 방어에 나섰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욥 트뤼니히트 의장의 항복을 받아낸 라인하르트는 바라트 화약을 맺어 동맹을 제국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외정에서도 성과를 거둔 라인하르트는 오딘으로 돌아와서 카타린 케트헨 1세로부터 선양이라는 방식으로 제위를 넘겨 받아 로엔그람 왕조를 건국했다.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의 즉위식[10])


2.4. 전쟁과 테러, 그리고 평화[편집]


그런데 로엔그람 왕조가 건국된지 불과 2주 만에 지구교의 테러로 황제가 암살당할 뻔한다.(큄멜 사건) 이 사건은 지구교라는 종교가 단순한 사이비 종교가 아닌 제국을 뒤엎으려는 반역자들임을 만천하에 드러내었고, 카이저 라인하르트는 아우구스트 자무엘 바렌 상급대장을 지구로 급파해 지구교를 소탕했다.(지구교 본거지 토벌 작전)

한편 동맹에 파견된 제국 고등판무관 헬무트 렌넨캄프제1차 라그나뢰크 작전 당시 양 웬리에게 2차례나 패해서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고, 주변에서 양 웬리가 제국을 뒤엎으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투서가 날아들자 동맹정부를 압박해 양을 체포했으나, 로젠리터 연대의 반란으로 오히려 자신이 로젠리터 연대의 포로가 되자 수치심에 자살했다.(양 웬리 원수 모살미수사건) 이 사실이 알려지자 카이저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은 이 책임을 동맹정부에 물어 제2차 라그나뢰크 작전으로 동맹을 침공한다. 자유행성동맹군은 마르 아데타 성역에서 제국군과 최후의 전투를 벌이지만 패배하고,(마르 아데타 성역 회전) 동맹은 이후 겨울장미원의 칙령으로 완전히 멸망한다.

로엔그람 왕조는 구 동맹령을 노이에란트라는 이름으로 제국에 편입하고 초대 총독으로 오스카 폰 로이엔탈을 임명했으며, 마지막 숙적으로 엘 파실 독립정부에 가담한 양 웬리를 쓰러뜨리기 위해 엘 파실 성계로 출정하였다. 회랑 전투에서 제국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엘 파실 독립정부를 굴복시키지 못했고, 결국 라인하르트의 제안으로 양자 간 회담이 이루어지지만 지구교도의 테러로 양 웬리와 프란체스크 롬스키 등 독립정부 수뇌부들이 사망하면서 협상은 무산되었고, 양 웬리 없는 양 함대에 흥미를 잃은 라인하르트는 페잔으로 돌아갔다.

카이저가 페잔으로 돌아간 이후, 노이에란트에는 심상찮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주력 800년 9월 1일 하이네센에서 위령제에 참가한 시민들이 제국 타도를 외치며 노이에란트 치안군과 정면충돌해 대규모 유혈사태가 터진 것이다.(응웬 킴 호아 광장 사건) 거기에다 노이에란트 총독 오스카 폰 로이엔탈 원수의 야심, 카이저 라인하르트와의 갈등, 하이드리히 랑아드리안 루빈스키를 비롯한 모략가들의 모략, 우르바시에서 일어난 제국군의 반란(우르바시 사건), 부귀영화에 눈이 먼 알프레트 그릴파르처의 증거인멸 등의 이유로 로이엔탈 원수는 국정을 농단한 군무상서 파울 폰 오베르슈타인 원수와 내국안전보장국장 하이드리히 랑을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제국 정부는 우주함대 사령장관 볼프강 미터마이어 원수, 아우구스트 자무엘 바렌 상급대장, 프리츠 요제프 비텐펠트 상급대장, 에르네스트 메크링거 상급대장을 노이에란트로 급파해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으며, 양군은 란테마리오 성역에서 격돌했다. 치열한 전투는 이제르론 공화정부의 협조로 이제르론 회랑을 빠져나온 에르네스트 메크링거 함대의 합류와 알프레트 그릴파르처 대장의 배신 때문에 노이에란트 치안군의 패배로 끝났으며, 노이에란트 총독 오스카 폰 로이엔탈 원수는 이 전투의 부상으로 하이네센에 돌아온 뒤 사망하였다.(노이에란트 전역)

로이엔탈 원수가 사망한 이후, 노이에란트 관리는 아우구스트 자무엘 바렌 상급대장이 맡게 되었다. 그런데 우주력 801년 1월부터 누군가의 공작으로 하이네센의 물류 시스템이 파괴되더니 급기야 대규모 폭동이 발발하였다. 이 소동은 노이에란트 전체로 퍼져나갔고 아드리안 루빈스키의 공작으로 페잔 항로국의 데이터까지 삭제되는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공화주의 최후의 보루 이제르론 공화정부를 치자는 주장이 군부 강경파를 중심으로 대두되었지만, 그 전에 이제르론 공화정부가 선수를 쳐 바겐자일 함대와 바렌 함대를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하이네센 동란, 제11차 이제르론 공방전)

노이에란트의 혼란이 잦아들지 않자 카이저 라인하르트는 군무상서 파울 폰 오베르슈타인 원수를 하이네센에 급파하였다. 오베르슈타인 원수는 하이네센에 도착하자 구 자유행성동맹의 명사 5,000명을 체포해 라그풀 교도소에 수감하여 이제르론 공화정부에 항복을 강요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오베르슈타인의 멱살을 잡은 프리츠 요제프 비텐펠트 상급대장이 감금되었고 누군가의 공작으로 라그풀 교도소에 폭동이 터져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으며, 서로 사이가 좋지 않던 슈바르츠 란첸라이터와 제국 헌병대가 충돌할 뻔하기도 했다. 이 사태가 터지자 카이저 라인하르트는 오베르슈타인 원수를 질책했고, 5월 초부터 나이트하르트 뮐러를 대표로 이제르론 공화정부와 외교 교섭을 시작했다.(오베르슈타인의 풀베기, 라그풀 교도소 폭동사건)

우주력 801년 5월 14일, 페잔의 임시 황궁호랑가시나무관에 살던 카이저린 힐데가르트 폰 마린도르프와 뱃 속의 아기를 노리고 지구교도들이 습격했다. 지구교의 양동작전과 내부 구조에 대한 자료 부족으로 테러는 성공할 뻔 했지만, 안네로제 폰 그뤼네발트 대공비와 헌병총감 겸 제도방위사령관 울리히 케슬러 상급대장의 활약으로 지구교도의 폭거는 저지되었으며 도리어 에프라임 거리에 위치한 지구교 페잔지부까지 궤멸되었다. 카이저린 힐데가르트는 무사히 아이를 낳았으며, 이 아이에는 카이저 라인하르트가 직접 지은 알렉산더 지크프리트 폰 로엔그람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호랑가시나무관 습격사건)

그해 5월 말, 노이에란트에서 이제르론 공화정부로 망명하려던 수송함 '신세기호'가 이제르론 회랑에 거의 도착한 시점에서 동력이 고장나 공화정부에 구조를 요청했는데, 이 통신파가 제국군을 끌어들였고, 곧이어 양군이 충돌하였다. 이 조우전,遭遇戰,으로 양군은 시바 성역에서 충돌했으며, 이제르론 혁명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사령관 율리안 민츠가 겨우겨우 브륀힐트의 함교에 진입해서 카이저와 만나 강화할 수 있었다. 이후 로엔그람 왕조와 이제르론 공화정부는 바라트 성계의 내정자치권을 부여하는 문제에 대해 합의하였다.

그런데 카이저 라인하르트가 하이네센폴리스로 돌아왔을 때, 전 페잔 란데스헤르 아드리안 루빈스키가 투병 끝에 숨을 거두었다. 그가 죽은 후 하이네센폴리스에는 대규모 폭발 및 화재가 일어나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카이저 라인하르트가 기거하던 하이네센 국립박물관도 불타 그 안에 있던 수많은 미술품들이 소실되었다.(루빈스키의 불 축제)

그 후, 이제르론 공화정부 대표 율리안 민츠와 카이저 라인하르트가 바라트 성계의 내정자치권 문제와 제국의 입헌체제 전환을 두고 토의하면서 페잔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카이저 라인하르트는 '변이성 극증 교원병,變異性劇症膠原病,' 가칭 '황제병'이 악화되어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한편 신분증을 위조했다가 적발된 레오폴트 슈마허지구교 최후의 행동부대가 페잔에 잠입했다는 사실을 자백하면서, 군무상서 파울 폰 오베르슈타인 원수는 카이저의 병환이 회복세이며, 건강이 회복되면 지구를 파괴하겠다는 헛소문을 퍼트려 지구교도를 유인하였다. 이는 공화정부가 제국과 강화한 시점에서 제국 최후의 위협세력인 지구교를 완전히 소탕하기 위한 조치였다. 계획대로 지구교는 황제를 암살하기 위해 벨제데 임시 황궁을 습격하였고, 파울 폰 오베르슈타인 원수가 지구교도의 테러로 폭사했으나 그 대가로 가짜 총대주교드 빌리에를 비롯한 지구교도는 모두 소탕되었다.(벨제데 임시 황궁 습격사건)

지구교가 소탕되고 2시간 뒤, 카이저 라인하르트는 "우주를 손에 넣으면...... 모두 함께......."라는 유언을 남긴 채 병사했다. 아들 알렉 대공은 생후 2개월 밖에 되지 않아 카이저린 힐데가르트가 섭정을 맡았다.

이후에는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번영에 힘쓴 듯하다. 8권에서 로엔그람 왕조의 특질은 '전제정권의 사회공정'이라고 언급되는 대목이 있는데 그것이 후세의 평가인 듯하다. 은영전은 라인하르트가 죽는 에피소드를 끝으로 완결했으므로 이 '후세'가 로엔그람 왕조 존속 중의 시대인지 로엔그람 왕조가 끝난 후의 시대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작가 다나카 요시키는 라인하르트 사후 이야기를 다루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므로 라인하르트가 죽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로엔그람 왕조가 어떻게 끝났는지는 독자들이 알아서 상상하는 수밖에 없다.[11]

3. 국가 개괄[편집]



3.1. 상징[편집]


공식 국명은 골덴바움 왕조와 마찬가지로 은하제국이다. 라인하르트가 직접 선포한 겨울장미원의 칙령에서 자국을 '은하제국'이라고 밝힌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부르면 골덴바움 왕조와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작중에서는 로엔그람 왕조 또는 신 은하제국(노이에 라이히)라고도 칭한다.

골덴바움 왕조의 상징은 쌍두독수리였지만 로엔그람 왕조의 상징은 황금사자기(골덴뢰베, Goldenlöwe)이다. 군기도 빨간 바탕에 날개 달린 황금사자가 그려져 있고, 건설 중이도 신 제국의 궁전 이름도 뢰벤브룬(사자의 샘)이었다.

라인하르트의 즉위를 원년으로 한 신제국력이 공식 기년법이 되었고, 기존의 제국력은 '구제국력'으로 불리면서 폐기되었다.


3.2. 강역[편집]


개국 직전에 자유행성동맹을 속국화하고 일부 항성계를 할양받았기 때문에 직접 지배 영역만 해도 페잔 회랑이제르론 회랑을 완전 지배하고, 그 영향권은 동맹령 전역을 아우르고 있었다. 이후 제2차 라그나뢰크 작전으로 껍데기만 남은 동맹을 완전히 정복하였기에 엘 파실 성계와 이제르론 회랑을 제외한 전 우주를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구 동맹 시민들의 반발로 노이에란트 통치는 삐걱거렸고 대친정 도중 양 함대가 이제르론 요새를 탈취하는 바람에 전 우주를 손에 넣었는데도 통과할 수 있는 회랑은 하나밖에 없게 된다.

이후 양 웬리 암살사건을 계기로 엘 파실 독립정부가 포기한 엘 파실 성계까지 얻게 되어 이제르론 요새를 제외한 전 우주를 통일하게 된다. 시바 성역 회전을 통해 이제르론 요새는 다시 제국에게 돌아가게 되었지만 작품이 라인하르트의 사망을 끝으로 끝나기에 작품이 끝나는 시점에서는 이제르론 요새를 반환받지 못했다.

3.3. 정치[편집]



3.3.1. 정치체제[편집]


정치체제는 전제군주제[12], 속령인 바라트 성계 자치령민주공화제를 시행 중이다.

로엔그람 왕조는 골덴바움 왕조에 비해서 황권이 크게 강화되었다. 황권을 견제한 문벌귀족립슈타트 전역을 거치면서 대거 몰락하여 황제를 견제할 힘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골덴바움 왕조에 있었던 제국재상도 없어졌고, 초대 황제 라인하르트 자신도 근면하고 부지런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정사는 자신이 직접 처리했다. 본래 황제를 제외한 정부 1인자인 국무상서 마린도르프 백작도 황제가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다 보니 의례 등 몇몇 업무만 보았다.

비단 황권 뿐만 아니라 제국정부의 권한도 매우 커졌는데, 이 역시 문벌귀족의 몰락과 연관이 있다. 내전이 승리한 이후 제국정부는 문벌귀족들의 재산과 영지를 몰수하여 막대한 재력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토대로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라인하르트가 유언으로 입헌체제로 개편하고 싶다면 그래도 좋다고 말했지만 끝내 멸망하는 그 날까지 입헌체제로 개편하진 않은듯하다.

3.3.2. 건국 세력[편집]


로엔그람 왕조의 성립을 주도한 세력은 크게 네 부류로 나뉘는데, 평민~하급귀족 출신 군인, 진보 세력, 관료, 문벌귀족이다.

초대 황제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이 본래 군인인 데서 알 수 있듯 로엔그람 왕조의 설립에는 군인의 지분이 가장 크다. 주로 평민에서 하급귀족 출신으로 이루어진 군인계열 공신들은 골덴바움 왕조의 불합리한 신분제 때문에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했고, 문벌귀족에게 자신의 공훈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러나 카이저 라인하르트가 원수부를 개설하여 자신들을 불러모으자 그들은 라인하르트에게 강한 충성심을 가지게 되었고, 자연히 그의 수족이 되어 로엔그람 왕조 창립에 크게 공헌했다. 그 때문에 로엔그람 왕조 초기에는 군부의 발언권이 강했다.

진보 세력은 칼 브라케와 오이겐 리히터로 대표되는데, 이들은 귀족 출신이면서도 제국의 문제점을 깨닫고 개혁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들의 개혁론은 문벌귀족에 의해 좌절되었으나 라인하르트가 그들을 불러모은 후 사회경제에 대한 개혁론을 입안할 것을 요구하자 이들은 개혁에 적극 협조했다. 이후 이들은 로엔그람 왕조에 초대 내각에 입각한다.

관료는 브루노 폰 질버베르히 등 과거 골덴바움 왕조 시절 빛을 보지 못한 관료들로, 신 제국 창립 이후 카이저 라인하르트에 의해 등용되어 출세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건국 과정에서 딱히 한 건 없지만 신 제국 창립 이후 제국의 기틀을 닦는데 적극적으로 일했다.

문벌귀족은 라인하르트파와 충돌해서 대거 몰락했으나, 마린도르프 백작가 등 소수 귀족들은 라인하르트에게 적극 협조하여 신 제국에도 출세했다.


3.3.3. 초대 내각[편집]


이하는 로엔그람 왕조 건국 당시의 내각 멤버. 과거 골덴바움 왕조의 내각에 있었던 전례성(귀족에 관한 업무 담당)이 사라지고 공부성(물류, 통신, 건설, 생산, 사회자본 정비 총괄)과 민정성이 새로 생겼다.

  • 국무상서: 프란츠 폰 마린도르프[13]
  • 군무상서: 파울 폰 오베르슈타인[14] → ???
  • 공부상서: 브루노 폰 질버베르히[15]글룩
  • 사법상서: 브룩도르프
  • 재무상서: 오이겐 리히터
  • 내무상서: 오스마이어
    • 내무차관 겸 내국안전보장국장: 하이드리히 랑[16] → ???
  • 민정상서: 칼 브라케
  • 학예상서: 제페르트
  • 궁내상서: 베른하임
  • 내각서기관장: 마인호프

내각을 보면 문벌귀족(극소수)+친위 세력+관료+진보파 구성된 것을 볼 수 있는데 국무상서였던 프란츠 폰 마린도르프의 경우 립슈타트 전역이 터지기도 전에 라인하르트 쪽에 줄을 섰던 문벌귀족 출신으로서 가장 로엔그람 왕조에 충성할 만한 인물이었고[17] 군무상서 오베르슈타인은 라인하르트의 친위 세력이다. 공부/사법/내무/학예/궁내상서와 내각서기관 모두 구 관료 출신이고, 재무상서 오이겐 리히터와 민정상서 칼 브라케는 진보파 출신으로 골덴바움 왕조에서 제국의 개혁을 요구했던 인사들이었다.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본인이 군 출신이다 보니 자신의 세력은 대부분 군인들이었고 그래서 정부 일은 구 관료층 중에서 눈여겨보던 유능한 인물들과 골덴바움 왕조 치하에서 개혁을 주장하던 인물들을 데려다 맡겼던 듯하다.

로엔그람 왕조가 초기에는 군사정권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실제로 작중에서도 로이엔탈 모함 당시 브룩도르프에 대한 설명에서 로엔그람 왕조는 초창기엔 군사정권적인 성격이 강했다는 서술이 나온다. 게다가 라인하르트의 임종 당시 그의 유언을 들은 사람 중에 내각 인사는 없고 군 상층부 인사만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로엔그람 왕조를 창립을 주도한 자들이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외부로는 자유행성동맹의 침공을 막고 페잔과 동맹을 정복했으며, 내부로는 문벌귀족들을 무력으로 일소하고 개혁을 주도했다. 반면 문관들은 라인하르트의 개혁정책을 뒷받침했을 뿐, 신제국 창립에 별다른 공헌을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신 제국에서 군인들의 발언권이 커진 것이다. 그래서 브룩도르프 처럼 일부 문관들은 군부가 문벌귀족의 뒤를 이은 새로운 특권계급이 될까 우려했다. 게다가 마린도르프 백작의 후임이 될 것으로 예정되는 내정자도 군부의 중진이며 노이에란트 총독직인데 노이에란트 총독은 정치권력과 행정권력, 군사권력을 모두 갖고 있으며 임명된 이도 역시 군부의 중진이며 마찬가지로 개국공신이었다.

단 로엔그람 왕조는 군사정권임에도 나름 문무관의 구별을 철저히 하였다. 한 예로 힐데가르트 폰 마린도르프는 황제 비서관으로 정치적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총본영 참모총감이 되자 정치적 발언권이 없어졌다. 또한 로엔그람 왕조에도 군인들의 발언권이 강하기는 했지만 군무상서를 제외한 나머지 정부 관료들은 문관으로 구성되었으며, 브룩도르프는 군부의 힘을 깎아내기 위해 로이엔탈 제독을 탄핵하기도 했다.

3.3.4. 주요 군부 인사[편집]


  • 군무상서: 파울 폰 오베르슈타인 원수[18] → ???
  • 통수본부총장: 오스카 폰 로이엔탈 원수[19] → 폐지. 총본영 참모총감으로 개편.
  • 우주함대 사령장관: 볼프강 미터마이어 원수 → ???
  • 노이에란트 총독: 오스카 폰 로이엔탈 원수[20] → 폐지
  • 제도방위사령관 · 헌병총감[21]: 울리히 케슬러 원수(진)
  • 후방총사령관: 에르네스트 메크링거 원수(진)
  • 페잔 방면 사령관: 코르넬리우스 루츠 상급대장[22]
  • 뢰벤브룬 칠원수


3.3.5. 어두운 면[편집]


하지만 건국세력에는 어두운 면도 없잖아 있었다. 인사들을 보면 대부분의 인사들에는 문제가 없는데 파울 폰 오베르슈타인, 오스카 폰 로이엔탈. 하이드리히 랑 세 사람이 문제였다.

파울 폰 오베르슈타인은 주군이자 황제인 라인하르트에 대한 충성심이나 그의 모든 행위가 공적인 이익을 위한다는 점에는 틀림없었고 특히 후자는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도 인정받는 사실이지만 너무 공리주의, 마키아벨리즘적인 행보 때문에 건국 전부터 제국군에서 찍혀 있었고 때문에 인망이 제로 수준이었다. 특히나 2인자 유해론자인 탓에 본의 아니게 지크프리트 키르히아이스를 죽게 한 전적이 있던데다 그러고도 오스카 폰 로이엔탈을 비롯해 2인자가 될 수 있을만한 존재들을 죄다 견제하고 다녔고 이 때문에 본인이 2인자처럼 행동한다는 말을 듣기도 했고 특히나 오스카 폰 로이엔탈을 궁지로 몰아 결국 노이에란트 전역이라는 대사건을 일으켜버렸다.

오스카 폰 로이엔탈은 전술과 전략, 충성심 등은 문제가 없었으나 성격 탓에 대인관계가 별로였고 무엇보다 야심이 너무 컸다. 그래도 초기에는 라인하르트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지도자였기에 그의 말을 고분고분 들으며 야심가스러운 면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1차 암살미수사건이라는 대형사건을 시작으로 어딘가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에서 어긋나는 모습들을 보이며 비뚤어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우르바시 사건을 통해 궁지에 몰린 심정과 야심이 폭발해 노이에란트 전역을 일으켜 버린다.

하이드리히 랑은 비밀경찰으로서의 능력이 우수했고 사욕을 안 부린다는 점에서 합격이었지만 그 비밀경찰로서의 능력은 구 왕조 시절에서는 많은 반대파들, 그러니까 왕조의 초대 내각을 구성한 인물들 중 칼 브라케오이겐 리히터 같은 진보파들을 탄압하는데 써먹은 능력이라 사실 그의 존재는 구시대의 잔재에 이제는 쓸려나가야 할 청산 대상이었다. 그래도 어찌저찌 생존해서 새 정권과 신 왕조에서도 중용되긴 했다만... 로이엔탈에게 받은 모욕[23]에 따른 개인적인 복수심과 되먹지도 않은 권력욕까지 꿈틀대며 로이엔탈을 압박했고 결국 노이에란트 전역이 일어나게 만들었으며 랑은 이 대가로 처형당한다.

이렇게 보면 로엔그람 왕조의 초대 내각과 주요 군부 인사들에도 문제점이 없잖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등용에는 사실 이유가 있었다.

오베르슈타인은 개인적인 인망은 바닥이었지만 모략, 뒷공작 등등 온갖 더러운 일 하는데는 도사인 인물로 라인하르트가 그를 중용한 것부터가 그런 일을 하는데 써먹기 위함이었다. 라인하르트도 자신이 패업을 이루는데 결코 깨끗한 방식만 쓸 수는 없음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 자신의 성품은 그것을 직접 할만한 사람이 못 되었으므로 자기 대신 손을 더럽힐 사람이 필요했고 그 사람이 오베르슈타인이었던 것이다.

로이엔탈의 경우에는 라인하르트의 과실이다. 립슈타트 전역 시기까지만 해도 로이엔탈은 군소리 없이 라인하르트의 말을 잘 따랐기 때문. 문제는 거의 막바지에 일어난 키르히아이스 암살과 그로 인한 라인하르트의 변화 등은 로이엔탈로 하여금 자신이 생각하던 완벽한 주군상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고 이 때문에 립슈타트 전역 이후에는 수상한 언동을 보인다. 심지어 그것을 혼자서 꿍얼거리는 것이 아니라 대놓고 했다는 것으로 예시를 들어 로이엔탈 원수 탄핵사건 도중 로이엔탈은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내가 무력과 권력으로 약탈과 폭행을 저지르고 민중에게 해를 끼쳤다면 이는 큰 치욕이겠지만, 반역하여 지존의 자리를 노린다는 소문이 돌면 난세의 무인으로 긍지로 여기겠다" 라는 말까지 하는 사람이라 모를 수도 없었고 특히 그의 직속부하인 베르겐그륀에게는 몇번씩 그런 언동을 보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런 인사는 적절한 이유를 씌워 쫓아내거나 아니면 한직으로 보내거나 하는 식으로 했어야 했는데 라인하르트는 그에게 덜컥 2인자의 자리를 줘버렸고 결국 노이에란트 전역이 일어났다.

하이드리히 랑은 별 서술이 없지만 오베르슈타인과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하이드리히 랑이 맡은 비밀경찰은 국내의 반대파 탄압을 위한 용도로서 존재하는데 골덴바움 왕조 시절보다야 덜하다지만 로엔그람 왕조도 권위주의 정권이고 국가 초창기인데다 제국에는 자유행성동맹, 문벌귀족 잔당, 페잔, 지구교, 양 웬리 함대, 엘 파실 독립정부 등 내외적으로 적이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밀경찰의 존재 자체는 어쩔 수 없이 용납되었을 것이다. 다만 그 수장인 하이드리히 랑이 라인하르트가 생각한 것보다 더 심한 소인배였을 뿐.

그 외에는 초대 내각과 군 수뇌부가 원리원칙적인 면이 강하다 보니 반대로 이런 면을 이용해먹는 사람에게는 취약해서 하이드리히 랑은 로이엔탈 탄핵을 위해 사법상서인 브룩도르프를 이용했는데 브룩도르프는 랑의 고발을 진지하게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행실이 나쁜 로이엔탈을 고깝지 않게 보아서 이 기회에 군부를 법으로 길들이고자 조사를 시작했는데 하필 성문법을 어긴 것이 아니었던터라 일은 자기가 하고 성과는 하이드리히 랑이 뺏어가버렸다.

또한 공부성 한정 얘기지만 상서인 질버베르히가 너무 유능한 나머지 차관인 글룩은 스스로 위축되어서 반려되었지만 사직서를 냈던 적도 있고 그가 죽자 내정에 있어 그만한 능력자가 없어서 라인하르트가 모든 정무를 다 볼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3.4. 노이에란트 통치[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노이에란트 총독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로엔그람 왕조 신 은하제국은 구 자유행성동맹령을 흡수하여 영토가 2배로 불어났다. 로엔그람 왕조는 이 새 영토를 어떻게 통치하느냐 하는 새로운 과제를 얻었다.

이에 제국정부는 하이네센노이에란트 총독부를 설치하여 전 동맹령을 관할하게 했다. 노이에란트 총독은 상서(장관)와 동등한 지위를 가지며 오직 황제에게 책임을 지고, 함선 35,800척에 장병 5,226,400명에 달하는 노이에란트 치안군을 관할하며 노이에란트의 정치 군사 양면을 총괄하는 사실상 제국의 2인자였다. 초대 총독으로 통수본부총장 오스카 폰 로이엔탈 원수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제국정부는 총독부를 영원히 유지할 생각이 없었다. 당장은 총독부가 정치군사 양면을 모두 관할하지만 언젠가는 내무성 주도 하에 지방제도를 정비하여 정치 군사를 분리하여 통치할 생각이었다.

어쨌든 초대 총독 로이엔탈은 구 동맹령의 부패정치가와 군수기업가를 모조리 청소했다. 구 동맹의 사법절차따윈 무시하고 총독이 서명한 영장 하나로 강제수사와 구속을 행했으며 600명의 '범죄자'들이 소탕되었다. 여기에 동맹정부의 민주공화정치질서가 처벌하지 못한 범죄자들을 총독부의 전제정치질서가 심판을 한다는 아이러니를 연출하여 제국에 적개심을 지닌 동맹 시민들이 제국의 통치를 실효적으로 인정하도록 할 계산도 있었다.

그러나 동맹 시민들의 민주공화정치에 대한 신념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9.1 사건을 통해 폭발한다. 이 사건 이후 노이에란트에는 시민들의 폭동이 빈발하게 된다.

그리고 아드리안 루빈스키지구교, 하이드리히 랑등 모략가들의 모략으로 우르바시 사건이 터지면서 로이엔탈 총독은 반란을 일으킨다. 로이엔탈은 민간인이 내전에 말려들게 하는 걸 원치 않아 동맹시민들은 털끝만큼도 다치지 않았고, 예상보다 빨리 내전이 끝나면서 제국정부는 동맹시민들이 반제국 활동에 나설 시간을 없애는데 성공했다. 이후 노이에란트 총독부는 해체되었으며 구 동맹령의 통치는 아우구스트 자무엘 바렌 상급대장과 민사장관 율리우스 엘스하이머가 대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하이네센 동란을 계기로 구 동맹령의 혼란이 증폭되었고, 여기에 제11차 이제르론 공방전, 오베르슈타인의 풀베기, 라그풀 교도소 폭동사건 등으로 동맹의 혼란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제국 정부는 노이에란트 중 바라트 성계를 민주공화주의 세력에게 넘겨줘 바라트 성계 자치령을 창건한다.


3.5. 외교[편집]


전 시대인 골덴바움 왕조에 이어 우주유일의 정치체제를 지향했다. 따라서 공식적으로는 자유행성동맹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암묵적으로는 이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었다. 이는 골덴바움 왕조 말, 로엔그람 독재체제가 성립된 뒤였는데 라인하르트는 처음부터 골덴바움 왕조가 자유행성동맹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반란군'이라고 폄하하는 데 어느 정도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라인하르트가 집권한 뒤부터 변화가 생겼는데 예를 들어 제8차 이제르론 공방전 당시 칼 구스타프 켐프 제독은 양 함대에게 전투에 앞서 보낸 통신에서 반란군이라 말하다가 동맹군이라 정정한다. 하지만 라인하르트가 황제 납치 사건 직후 열린 대책회의에서 '자유행성동맹을 참칭하는 반도'라고 지칭하고, 페잔 점령 작전 직전 볼프강 미터마이어가 연설에서 똑같이 동맹을 반도 취급한 것처럼 제국이 동맹을 대하는 태도는 이중적이었다. 이는 라인하르트 개인의 호오와 국가적인 관점이 분리된 탓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로엔그람 왕조는 골덴바움 왕조 시절에 맺은 바라트 화약을 계승하여, 일단 동맹의 주권을 인정하고 은하제국 고등판무관부를 설치하는 등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동맹의 항복선언이나 다름없었던 바라트 화약으로 인해 제국과 동맹의 관계는 종주국과 속국의 관계에 비슷했다. 제국은 동맹의 성계 일부를 할양받았고 동맹 수도에 제국군 부대를 주둔시켰으며, 고등판무관부는 화약 이행을 감사한다는 명목으로 동맹 정부를 감시하고, 판무관은 동맹 정부가 주최하는 모든 회의에 방청할 권리가 있었다. 동맹은 제국에 막대한 안전보장세를 바치고 우주함대 중 전함과 우주항모를 모두 파기하며 군사시설을 개축할 때도 제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양 웬리 원수 모살미수사건과 뒤이은 제2차 라그나뢰크 작전으로 바라트 화약은 휴지조각으로 전락하고, 제국은 무력으로 동맹을 무너뜨렸다. 제국은 겨울장미원의 칙령을 통해 스스로를 인류 유일 정치체제라고 선언했으며 '반란군'의 이름 아래 말살되었던 자유행성동맹의 존재를 공인했다. 어디까지나 과거의 존재로서 동맹을 공인한 것이다.[24]

엘 파실 독립정부와의 관계는 그냥 일방적인 무시, 그 양 웬리가 합류하였음에도 별 신경도 안 썼다. 제국군은 오로지 양 웬리만 신경썼으며 엘 파실 독립정부 따위는 듣보잡 취급했고 공식 문서에도 "양 웬리 군"이라고 기록하였다. 때문에 독립정부에서는 어떻게든 병풍 신세를 모면하려고 노력했고 양 함대 측에서도 양 웬리가 민간인으로 구성된 정부를 더 우위로 여겨지도록 노력하였음에도 독립정부는 마지막까지 양 함대에게 밀렸다.[25]

이제르론 공화정부와의 관계는 양 함대가 그대로 계승했다보니 양 함대와의 관계와 어느정도 비슷하다. 다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엘 파실 독립정부가 완전히 무시당하는 처지라면 이제르론 공화정부는 제국에서도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줬다. 그리고 이제르론 공화정부 측에서는 되도록 제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입장을 취해왔고 때문에 노이에란트 전역에서도 로이엔탈의 제안을 물리치기도 했다.

그러나 구 동맹령 전역에서 폭동이 일어나서 구 동맹령 시민들은 시민대로[26] 제국에서는 제국대로[27] 이제르론 공화정부를 향한 무언의 압박이 이어지자 결국 공화정부 측에서 제11차 이제르론 공방전을 벌여 스스로 우호관계를 깼다.

이에 오베르슈타인의 풀베기-라그풀 교도소 폭동사건이 이어지며 두 관계는 점점 더 어려워져 갔고 끝내 시바 성역 회전이 벌어진다. 그러나 시바 성역 회전을 계기로 제국과 공화정부는 강화를 맺게 되고 바라트 성계를 기반으로 한 자치령 설립이 약속된다.

지구교와의 관계는 큄멜 사건 이전만 해도 관심도 없었지만 지구교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라인하르트가 죽어야 했기에 큄멜 사건을 일으키지만 실패한다. 이를 계기로 제국은 지구교를 반체제적인 집단으로 낙인찍고 지구교 본거지 토벌 작전을 벌여 조직을 붕괴시킨다. 그러나 여기서 살아남은 드 빌리에가 조직을 재건시켰고 양 웬리 암살사건을 시작으로 우르바시 사건, 호랑가시나무관 습격사건 등을 일으키지만 오히려 페잔 지부가 궤멸되는 등 큰 피해만 입는다. 결국 벨제데 임시 황궁 습격사건으로 제국은 지구교를 완전히 소탕한다.[28]

3.6. 사회[편집]


로엔그람 왕조는 골덴바움 왕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구체제 시절 발매금지 처분을 받았던 신문과 잡지가 재간되었고 급진 공화주의자나 테러 실행자를 제외한 정치범, 사상범이 석방되었다. 5세기 동안 민중을 탄압했던 사회질서유지국은 사라졌고 국장 하이드리히 랑은 관사에 연금되어 오베르슈타인의 감시를 받았다. 똑같이 민중을 핍박하던 제국 헌병대도 울리히 케슬러의 개혁으로 과거처럼 민중을 탄압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골덴바움 왕조에 비해 자유로웠을 뿐, 사회 분위기는 여전히 권위주의적이었다. 로엔그람 왕조에도 불경죄가 있었으며 사라졌던 사회질서유지국은 내국안전보장국으로 부활했고 랑도 직무에 복귀했다. 다만 내국안전보장국은 국장 랑의 처신에 따라 공화주의자, 구 귀족 잔당 등 제국의 적만 탄압하고 일반 민중은 손대지 않았다.

다만 이전 시대에 비하면 굉장히 자유로운 편으로 아무리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지만 미터마이어는 라인하르트 앞에서 민주공화제와 전제군주제를 동등하게 바라보는듯한 발언을 하였고 노이에란트 전역 때에는 정도에 어긋날 정도로 라인하르트를 설득했다. 로이엔탈은 더 심해서 골덴바움 왕조 시기라면 진작에 반역죄로 잡혀가고도 남을 발언을 여럿 했음에도 노이에란트 전역이라는 진짜 반란을 일으키고서야 몰락했다.

골덴바움 왕조의 신분제는 로엔그람 왕조 들어 개편되었다. 우선 제국의 지배층을 이루던 문벌귀족들은 립슈타트 전역에서 반역자로 찍혀 몰락했으며, 살아남은 자도 면세 같은 특권을 누리지 못해 영지가 없는 귀족들의 귀족 작위의 위상은 급전락했다. 단 라인하르트에 일찌감치 충성을 맹세한 귀족들은 작위와 재산, 영지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카이저 라인하르트는 개인적으로 귀족에 대해 혐오심을 가졌기에 개국공신들에게도 작위를 수여하지 않았으며, 오직 자신의 누이 안네로제와 친우 키르히아이스, 아들이자 황자 알렉산더 지크프리트에게만 작위를 수여했다. 귀족계급이 유명무실해지면서 전례성과 귀족을 대상으로 한 금융기관이 폐지되었고 대신 해방 농노에게 영농자금을 저금리로 대출해주는 농민금고가 신설되었다.

골덴바움 왕조에 있었던 농노 계급은 이미 라인하르트가 해방한 뒤라, 로엔그람 왕조에는 없었다. 그래서 골덴바움 왕조의 농노-평민-귀족-황제의 신분제는 평민과 귀족, 황제로 재편되었다.

법률은, 개정한 것 이외에는 골덴바움 왕조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대표적으로 황제 암살범은 미수여도 사형을 내린다는 법이 있다.

이 외에 왕조가 처음 창립되었을 때엔 전대와 마찬가지로 지구교에게도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외교 문단에서 서술했듯이 큄멜 사건 이후 금지하였다. 결국 지구교는 제국의 토벌로 라인하르트가 죽을 무렵 모두 소탕되어 사라진다.

3.7. 경제[편집]


신 은하제국의 화폐는 구 제국과 똑같이 제국마르크를 쓴다. 그러나 270년 넘게 쓴 동맹 디나르를 한번에 폐지할 수 없으므로 5년의 기한 동안 천천히 폐지하려 했으나, 구 동맹령의 혼란 때문에 재무성의 디나르 폐지 계획은 미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로엔그람 왕조는 골덴바움 왕조와 달리 문벌귀족의 자산을 압류했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부유했으며, 적어도 라인하르트 재위 기간 동안에는 재정적으로 압박을 받은 적은 없다. 물론 재정이 항상 풍족했던 것은 아니다. 문벌대귀족들이 몰락하기 전만 해도 은하제국은 군웅할거가 예상되는 상황까지 몰려져 있었을 정도로 중앙의 지방통제력이 급격하게 떨어져 있었다. 황제의 황군보다도 문벌대귀족들의 사병 병력이 더 많았으며 장비도 정규군에게 결코 밀리지 않았다. 사실상 연맹연방국가나 다름없는 수준까지 떨어진 마당이니 세수가 제대로 걷히는 건 언감생심이다. 라인하르트가 정권을 잡은 후부터 죽을 때까지도 계속 전쟁이 이어졌다. 그런데도 재정이 그런대로 괜찮았다는건 이 문벌대귀족들에게서 압수한 재산이 어마어마했다는 뜻이다. 귀족들에게 압수한 금액이 10조 제국 마르크에 달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군수물자의 생산에 차질이 빚어진 적은 없으며 오히려 신기술들과 신형 제식장비들을 개발하는데 전혀 주저함이 없는 모습을 보여준건 동맹과는 다른 차원의 경제력이 이들에게 있었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3.8. 군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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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인하르트 사후 입헌군주제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본편에서는 라인하르트 사후는 다루지 않았다.[2] 호랑가시나무관 이전에는 따로 황궁을 정하지 않고, 제국군 총본영 개인실이나 브륀힐트를 황궁 대용으로 썼다.[3] 라인하르트 사후 건설 완료. 즉 본편에서는 벨제데 임시 황궁이 정궁이었다.[4] 골덴바움 왕조(250억)+페잔 자치령(20억)+자유행성동맹(130억)을 더한 수치다. 이는 개국 시점의 인구로, 사실상 은영전 세계관의 인류 전체의 인구 수이기도 하다. 여튼 한동안 큰 전쟁이 일어날 일은 없을테니 인구는 비약적으로 증가했을 듯하다. 단, 골덴바움 왕조와 페잔 자치령을 별도 세력으로 치는 것처럼 바라트 성계 자치령을 따로 계산하면 최소 10억 명 이상 빠질 것이다.[5] 사실상 미래 독일어[6] 훗날 라인하르트는 공헌이라 함은 민중봉기를 탄압하고 저항하지 않는 약자들을 박해하고, 사상범을 죽인 것이라고 추측하며 역사상의 전과자라고 비꼬았다.[7] 선제 오토프리트 5세가 수전노급으로 지출을 아껴 국고를 풍족하게 만들었지만 프리드리히 4세가 30년 동안 토목공사와 전쟁 등으로 모두 까먹었다.[8] 작중에서 라인하르트는 자신의 빠른 승진이 철저히 자신의 실력이라 믿었지만 실제로는 이런 드러나지 않은 이면의 권력자의 안배가 있었던 것으로 실제로도 라인하르트의 승진속도는 너무 지나치게 기형적이다.[9] 그나마도 그 샨타우 성역 회전조차, 많은 희생을 내며 지켜낼 만큼 전략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로이엔탈이 작전상 후퇴한 것에 가깝다.[10] OVA의 오리지널 내용이다.[11] 일단 라인하르트 사후와 관련된 확실한 이야기는 앞서 나온 로엔그람 왕조의 특질과 힐데가르트가 로엔그람 왕조를 키웠다는 평가, 그리고 '양 웬리와 율리안이 지킨 민주공화주의의 씨앗이 우주력 800년대 후반에 화려하게 꽃피웠다.'는 대목인데, 최소한 힐데가르트 섭정 시기까지는 확실하게 로엔그람 왕조가 유지되었고 실권이 황제에게 넘어온 뒤에도 어느 정도 유지되다가 우주력 800년대 말에 어떤 계기나 사건을 통해 민주공화주의가 부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로엔그람 왕조가 완전히 멸망했는지, 아니면 입헌군주제 같은 방식으로 이후에도 존속했는지는 알 수 없다.[12] 같은 전제군주제이지만 골덴바움 왕조랑 다르게 귀족 없는 제정으로, 양 웬리는 로엔그람 왕조의 정치체제를 평민의 지지를 받은 ‘자유 제정’이라고 하였다.[13]힐다와 라인하르트가 결혼해 황후가 되자 사임하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14] 벨제데 임시 황궁 습격사건으로 사망.[15] 페잔 폭탄테러사건으로 사망.[16] 후에 페잔 폭탄테러사건의 진상과 노이에란트 전역 등이 맞물리며 사형당함.[17] 덧붙이자면 그만큼 구 귀족을 대표하는 인물이 된다. 물론 그렇다고 구 귀족을 정치세력화하거나 한 건 아니고 그저 몰락한 귀족들이 굶어죽지 않도록 손을 써준 정도에 불과했다. 애초에 로엔그람 왕조는 황권이 강했고 국무상서의 권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18] 벨제데 임시 황궁 습격사건으로 사망.[19] 노이에란트(구 자유행성동맹) 총독으로 취임하면서 사임한다.[20] 노이에란트 전역에서 사망.[21] 제국 내 치안도 담당[22] 페잔 천도로 인해 루츠의 직책이 붕 뜨게 되었는데(업무 자체가 케슬러와 겹치게 되었다.) 그 직후 루츠는 우르바시 사건에서 사망, 사후 원수로 추서되었다.[23] 정확히 말하면 랑이 잘못한 것이다. 상급대장 정도에서나 참석할 수 있는 회의에 참석한 것도 모자라서 무려 우주함대 사령장관의 견해에 황제의 이름을 빌려서 입막음을 하려고 했기 때문. 때문에 사실은 랑이 대단한 무례를 저지른 것인데 이에 대해 로이엔탈이 날린 돌직구에 자기가 모욕을 느꼈다고 혼자 식식댄거다. 랑을 뒤에서 밀어주던 오베르슈타인도 나나 폐하도 그런 논법은 싫어한다고 딱 잘라말했을 정도.[24] 그리고 이것은 이후에 엘 파실 독립정부와 이제르론 공화정부를 공식적인 정치체제로는 인정하지 않은 이유다. 겨울장미원의 칙령은 결국 과거에는 인류사회는 분열되어 있었을지는 몰라도 이제는 로엔그람 왕조만이 유일한 체제라는 의미니까.[25] 얼마나 밀리냐면 양 웬리 암살사건 이후 양의 죽음에는 상급대장인 뮐러를 보내서 조문까지 해줬는데 롬스키는 아무 언급도 없었다.[26] 민주공화주의를 수호한다 하면서 실상은 제국과 싸우지도 않는 모습에 빈정거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27] 제국은 비텐펠트 같은 강경파가 아드리안 루빈스키 같은 음모가들이 날뛰지 못하도록 이제르론을 쳐야 한다고 주장했다.[28] 이 때 지구교는 그 악행에 걸맞게 이제르론 공화정부측 인물에게 수뇌부가 사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