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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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0세기에 활동한 미국의 물리학자."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6]
세계 최초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유명하다.[7]
제2차 세계 대전이 극으로 치닫으면서 일본 제국은 진주만 공습으로 미 함대를 기습하며 선제공격을 하게 되고, 꽤나 선전한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의 승기는 미국 쪽으로 기울게 된다. 몇 번에 걸친 회담이 있었으나 일본 제국은 항복 요구를 거부해, 결국 핵무기가 실전 투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세계 최초의 교원 노조인 F.A.E.C.T 창설에 앞장선 사회운동가이기도 했는데, 이것이 훗날 메카시즘 시대에 이르러서 공산주의자로 몰리기에 딱 좋은 트집이 되어 숱한 고생을 치르게 된다.[8]
이로 인해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원자폭탄으로 인해 사망하고 부상당한 것에 대해 오펜하이머는 공포,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었고 전후 평화주의 신념에 따라 반전운동을 전개하며 수소폭탄 제조에 반대했다. 이러한 모습으로 인하여 경쟁자에게 소련의 스파이로 몰려서[9] 그가 무죄라는 것은 당시에도 밝혀졌으나 수소폭탄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보안권한에서 쫓겨났다. 그래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선 죽기 직전까지 고등연구소장을 맡았다. 이후 후두암에 걸려 생을 마감했다. 2022년에야 오펜하이머는 비로소 보안 접근 취소라는 혐의를 모두 벗고 완전히 명예회복되었다.[10]
한편 그의 애칭은 오피였다.
2. 생애[편집]
2.1. 미 북동부에서의 어린 시절[편집]
오펜하이머는 1904년 4월 22일 뉴욕주 뉴욕시에서 태어났다. 독일 출신의 유대계 미국인 아버지는 젊은 시절 양복 사업에 뛰어들었고, 이 시기는 기성복이 태동하는 시기로 사업이 승승장구해 오펜하이머 가족은 상당히 부유한 집안이었다.[11]
부모의 엄청난 교육열 아래서 자라났는데, 어린 시절 그가 다니던 뉴욕 에티컬 컬처 스쿨의 자유롭고 탐구적인 분위기가 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유대교를 중심으로 한 친족주의 문화 등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이미 어릴 때부터 현지인과 마찬가지로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어린 시절 오펜하이머의 취미는 광물들을 수집하는 것이었다. 그는 광물의 생성원리보다는 그 특유의 성질에 많은 흥미를 가졌다고 회고하였다. 이 때의 경험은 굉장히 중요했던 경험이라 그가 나중에 핵개발의 영감을 얻는데 도움이 된다.
빠르고 탁월한 학습능력과 그에 따른 교육환경도 훌륭하였기 때문에 그는 아무런 무리 없이 학문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22년 하버드 대학교 화학과를 들어갔다. 대학교 시절 매년 남들보다 1.5배 더 많은 학점을 땄는데, 이렇게 해서 4년제 학사과정을 3년 만에 최우수 성적으로 조기졸업한다.
학교 공부뿐만 아니라 언어 공부도 열심이어서 고교 시절 그리스어를 습득하여 플라톤의 저서를 원서로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어와 독일어 등 다양한 외국어에 매우 유창하게 되었고 유창한 외국어 능력은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네덜란드어의 경우엔 1주일 만에 공부해서 강의할 정도였다.[12] 또한 산스크리트어도 취미로 공부하였는데,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힌두교 원전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나중에 오펜하이머가 말해 유명해진 "I am become death..."라는 것도 바가바드 기타에 나오는 말이다.
2.2.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편집]
1924년 학부 과정을 마친 오펜하이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물리학과인 캐번디시 연구소(Cavendish Laboratory)에서 대학원 과정 공부를 했다. 그러나 톰슨,[13] 러더퍼드,[14] 보어, 채드윅, 왓슨, 크릭 등으로 대표되는 캐번디시 연구소의 실험물리학 학풍은 그와 잘 안 맞았다.[15] 원래는 러더퍼드와 오펜하이머 사이에 크고 작은 갈등이 있기도 했으나, 톰슨의 주장에 의해 기초 물리학실험 과목을 수강하겠다는 조건 하에 합격한다. 재학 도중 그는 신경쇠약 및 우울증에 걸렸으며 지도교수였던 패트릭 블래킷을 독살하려 하는 등[16]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2.3. 괴팅겐 대학교 시절[편집]
1926년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떠나 괴팅겐 대학교로 옮겼는데 여기서 닐스 보어의 조언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이곳은 당시 페르미, 파울리, 하이젠베르크 등에 의해 이론적인 양자역학이 태동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의 유창한 외국어 능력이 크게 도움이 된다. 오펜하이머는 상대적으로 우울한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는 적응이 불가능했지만, 이론적인 면만을 다루는 괴팅겐에서는 물만난 물고기처럼 공부하여 9개월 만에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괴팅겐 대학교 시절의 오펜하이머는 굉장히 거만하면서도 자신감이 넘쳤는데, 강의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교수를 교단에서 끌어내리고 자기가 수업을 하는 기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래서 괴팅겐 대학교의 대다수 사람들은 오펜하이머의 능력은 어느 정도 인정했지만 그를 굉장히 싫어했다.
오펜하이머의 초기 생애라 볼 수 있는 케임브리지 시절과 괴팅겐 시절은 그의 정신이 상당히 불안정했던 시기라 볼 수 있었다.[17]
하지만 미국에서의 교수직과 맨해튼 계획을 끝내면서 그의 성격은 과거에 비해 대단히 냉철하고 차분해지며[18] 수많은 인원을 이끄는 리더십과 통솔력, 카리스마를 갖게 된다.
2.4. 미국 캘리포니아에서의 교수직과 정치적 성향[편집]
One Russian woman attempted to come a fourth time, and defeated Oppie's efforts to dissuade her by going on a hunger strike. (laugh)
한 러시아 여학생은 4번이나 수업을 들으려고 했어요. 오펜하이머가 수업을 못 듣게 하니 단식투쟁까지 해서 듣더군요. (웃으며)[19]
그는 귀국하여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Caltech)에서 잠시 연구원으로 있다가 UC 버클리 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었는데,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기에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서도 매년 6주간 강의를 했다. 이후 오펜하이머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UC 버클리의 교수이자 연구자로서 양자역학과 천체물리학 등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었다.
1930년대 말에는 찬드라세카르 한계를 중성자별에 적용해, 동료 학자들과 함께 이론적으로 회전하지 않고 차가운 중성자별의 질량이 태양의 3배를 넘으면 중력붕괴를 일으켜 블랙홀이 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를 톨만-오펜하이머-볼코프 한계(Tolmann-Oppenheimer-Volkoff Limit, TOV Limit)라 부른다.
이 시기에는 UC 버클리 교수로 있던 실험물리학의 대가, 어니스트 로런스와 협업을 많이 하였는데, 로런스가 이후 맨해튼 계획의 최고 책임자 중에 한 명이 되면서 둘 사이의 인연은 맨해튼 계획에서도 이어졌다. 교수 시절 오펜하이머에 대한 평가는 대인 관계에 서투른 천재와 잘난체하는 허식가로 극명하게 나뉘는데, 그래도 그의 학생들은 대체로 그를 존경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당시 대공황 시절 유행하던 좌파사상에 경도되기도 했다. 여러 좌파운동에 참여하고 스페인 내전의 공화국군에 대한 모금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오펜하이머 본인은 공산당에 가입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의 주위에 공산주의나 좌익 사상에 경도된 인물들이 많았다. 당장 그의 친동생인 프랭크 오펜하이머는 잠시 미국 공산당에 익명으로 가입했던 적이 있었다. 오펜하이머의 아내였던 키티 역시 한때 좌익 사상에 깊이 경도되었던 과거가 있었으며, 전 남편이 스페인 내전에 공화파로 직접 참전해서 목숨을 잃었을 정도였다. 키티는 당시 남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본인도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려고 했지만 주위의 만류로 그만뒀다.
오펜하이머가 키티를 만나기 전에 만났던 애인 진 태트록(1914~1944) 역시 미국 공산당 소속이었으며, 급진적인 정치적인 행동을 하는데도 거리낌이 없었기에 오펜하이머에게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진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1944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21] 오펜하이머는 당연히 진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어쨌든 오펜하이머의 이러한 행적은 먼 훗날이 아니라 맨해튼 계획을 시작하기 직전에도 문제가 됐는데, 레슬리 그로브스를 포함한 미국 장성들은 오펜하이머의 충성심, 사상을 의심했을 정도였다. 다만 당시에는 오펜하이머의 능력이 당장 필요하기도 했고, 그와 많은 대화를 했던 미국의 장성, 정치인들은 오펜하이머가 한때 좌익 사상에 몸담았던 적은 있었지만 국가 기밀을 취급하기에는 적합한 인물로 결론을 내렸다. 실제로 과거의 행적으로 인해서 오펜하이머가 곤욕을 치르기 시작했을 때, 그로브스는 그에 대해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의심하지 않는다는 호의적인 증언을 해 주었다.
2.5. 맨해튼 계획[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1942년 맨해튼 계획이 시작되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과학자들은 우라늄을 이용한 폭탄의 실현 가능성을 탐색하고, 농축 우라늄을 생산하는 시설을 연구하고 있었다. 이에 독일이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속에 마침내 루스벨트는 맨해튼 계획을 승인하고 미 육군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도록 하였다.He was extremely intelligent, extremely quick. He understood everything when I had just a glimpse of what was being talked about.
오펜하이머는 극도로 머리가 좋았습니다. 이해하는 속도도 굉장히 빨랐습니다. 제가 논의 되고 있는 내용들을 어렴풋이 이해하기 시작할 때 그는 이미 모든 걸 다 이해하고 있더군요.
한스 베테
이 때 애국심에 불타던[23]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계획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중성자에 관련된 계산을 수행하였다.
프로젝트를 총괄하게 된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은 이미 원자폭탄 연구를 하고 있는 3개의 연구소와는 별도로, 실제로 원자폭탄을 설계하고 제작할 또 하나의 연구소를 계획하게 되었다. 그로브스는 먼저 기존의 3개 연구소의 소장들(콤프턴, 로런스, 우레이)에게 새로운 연구소까지 담당해 달라고 부탁하였지만, 그들은 이미 맡은 일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한 상황이었고, 그 중에 콤프턴은[24] 자기 대신에 오펜하이머를 강력히 추천하였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 제작에 필요한 지식은 누구보다 충분한 상황이었지만, 노벨상 수상자들까지 포함된 거대 연구진을 이끌기에는 경력이 부족하고[25] 공산주의자라는 의심까지 받고 있었다.[26] 미군 상부는 오펜하이머를 채용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로브스는 강행하였으며 이때 맨해튼 엔지니어 지구에 그가 쓴 편지는 다음과 같다.
"상기 보내었던 오펜하이머에 대한 정보와는 관계 없이 7월 15일에 있었던 내 지시를 따라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에 대한 허가를 지체 없이 내리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는 프로젝트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입니다."
오펜하이머는 처음 새로운 연구소의 위치로 자신의 농장이 있던 뉴멕시코주의 앨버커키를 추천하였고, 최종적으로는 근처의 로스 앨러모스가 선정되었다. 맨해튼 계획이 군계획이었기 때문에 오펜하이머는 당시 형식적으로 중령 계급을 받았고 심지어는 체력 검사도 받아야만 했다.[27] 결국 오펜하이머는 군대식 환경이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의 연구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고, 상부와 타협해서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를 군의 위탁을 받아 UC 버클리가 운영하는 연구 기관으로 바꾸었다. 그는 기존에 한번도 관리업무를 맡은 바가 없었으나 이를 훌륭히 완성하고 최대 6천 명의 연구원을 잘 설득하며 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로브스가 프로젝트 전체에 필요한 인력과 예산, 자원의 관리를 맡았다면 오펜하이머는 직접 핵무기를 개발하는 이론-기술 분야의 최고 책임자 역할을 하였다. 결국 미국은 이들이 개발한 원폭으로 일본 제국을 항복시키고 태평양 전쟁을 끝낸다.[28]
맨해튼 계획으로 만들어진 핵무기가 살상력이 어마무시할 것이라고 예상되었기 때문에 그냥 도쿄만에 떨어뜨려서 위력을 과시해서 전쟁을 끝내는 방법도 고려되었으나, 오펜하이머는 일본 본토에 직접 떨어뜨려야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고 미의회에도 자신의 그런 의견을 밝혔다. 그는 폭탄 투하 임무를 책임진 장군들을 만나서 어느 정도의 고도에서 어떤 식으로 떨어뜨려야 가장 강력한 파괴력을 발휘할지를 설명하고 투하 방식을 지시하기까지 했다. 핵폭탄을 특히 히로시마에 떨어뜨리려는 이유도 두 도시가 평평하기 때문에 원자폭탄이 폭발해서 어디까지 영향을 미치는지 구석구석 관찰하기 좋았기 때문에 선정된 것이었다. 물론, 오펜하이머는 핵폭탄의 살상력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슬퍼하기도 했지만, 전쟁을 확실히 끝내는 것이 인명피해를 더 줄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까닭에 최선을 다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오펜하이머는 핵공격을 받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상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공식적으로는 어떤 방식으로도 사과하지 않았다.
종전 후 맨해튼 계획이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오펜하이머 역시 언론에 노출되기 시작하였고, 이 새로운 과학무기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는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장을 그만두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로 돌아갔지만 이후에도 여전히 대통령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무차별 살상을 하게 되는 대형 핵무기보다는 전술적인 소형 핵무기를 개발하도록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건의하고, 전술용 핵무기를 개발하는 계획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반대로 미국은 1950년부터 '셰이크 다운' 또는 '오프 태클'이라는 소련 공격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이것은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발진한 미국의 핵폭격기들이 소련의 곳곳에 400에서 600개의 핵폭탄을 투여하는 제3차 대전 시나리오이다. 결국 이 계획 때문에 오펜하이머는 다시 한번 미국의 핵 정책에 경악하게 되었다.
오펜하이머는 특히 엄청난 살상력을 지닌 수소폭탄을 극렬히 반대하였다. 초기의 수소폭탄 컨셉은 폰 노이만과 울람의 컴퓨터를 이용한 계산결과[29] 실제 핵융합을 일으킬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고, 이 기회를 틈타 오펜하이머는 일반 자문 위원회 의장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수소폭탄 연구를 최대한 방해하였다. 하지만 1951년 텔러와 울람은 성공 가능성이 높은 새로운 디자인을 제시하였고, 오펜하이머는 더이상 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
소련이 1949년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고 곧 수소폭탄도 성공하자, 반핵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고 있던 오펜하이머는 사회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오펜하이머는 1953년 12월 비밀정보접근 권한을 빼앗겼다. 이후 '오펜하이머 청문회'[30] 로 보안 접근 권한을 빼앗기게 된다.[31]
이후로는 미국이 실시한 최대의 수소폭탄 실험인 1954년 비키니섬 핵실험(캐슬 브라보)의 정보도 얻지 못했다. 친구 핵물리학자에게 '그냥 숫자 하나만' 말해달라고 부탁하자 그가 '15'라고 대답해줬다고. 하지만 그로서는 충분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3월 1일 폭발시험이 성공한 수소폭탄 규모가 15메가 톤이었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리틀보이가 15킬로 톤, 나가사키에 투하된 팻맨이 21킬로 톤이었으므로 비키니섬 핵실험의 15라는 숫자는 당연히 메가톤급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2.6. 말년[편집]
2.6.1. 고등연구원[편집]
자신이 만든 핵폭발의 위력을 여과없이 목격한 오펜하이머는 이후 엄청난 고뇌에 빠졌다고 한다.[32] 이후 혼자서 백악관까지 가서 1인으로 핵무기 탄원서에 관련된 시위를 펼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핵 계획에서 멀어진 뒤 고등연구원(The Institute for Advanced Studies, IAS)의 소장으로 취임하였으며 연구과목에 관계없이 누구나 서로 거리낌없게 토론하는 자유로운 풍토의 연구소를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맨해튼 계획 총책임자를 맡던 당시 그는 "혼자서는 불가능한 것을 함께 연구하고 토론하면 해낼 수 있다. 여럿이 함께라면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크게 절감하였으며 이러한 생각을 연구소에 적용하려 하였다.
2.6.2. 은퇴[편집]
1957년 휴양지로 유명한 미국령 버진아일랜드의 해안가에 2,500평 정도 크기의 땅을 산 후 그곳에서 아내, 딸과 함께 긴 시간을 보냈다. 정치권력에서 축출된 이후에도 물리학에 관한 논문 작성을 계속하였으며 유럽과 일본을 여행하며 그곳의 사람들과 과학사, 사회과학의 역할, 우주의 본질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1962년 영국 왕립학회의 외국인 회원으로 추대되었다. 1963년 12월에는 많은 과학자들의 촉구에 따라 엔리코 페르미 상을 수여받았다.[33]
1965년에 후두암을 진단받았으며[34] 투병하다가 1967년 고등연구소가 위치한 뉴저지 프린스턴에서 향년 62세로 사망하였다.
오펜하이머의 유해는 화장 후 버진아일랜드의 세인트 존 섬의 바닷가에 뿌려졌다.
2.7. 사후[편집]
2022년 12월 15일, 보안 접근 권한 취소를 68년만에 철회했다. 제니퍼 그랜홈 미국 에너지부 장관은 성명을 통해 "오펜하이머의 보안 승인에 대해 1954년 원자력위원회(United States Atomic Energy Commission, AEC)의 결정은 위원회 자체 규정을 위반한 결함 프로세스"라며 "오펜하이머 박사가 겪은 과정의 편견과 불공정에 대한 더 많은 증거가 밝혀졌고 그의 충성심과 애국심은 확인됐다"고 말했다.
3. 업적[편집]
20세기 중반 미국의 핵물리학과 이론물리학을 크게 발전시킨 물리학자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유명한 맨해튼 계획 말고도 여러 가지 업적들을 세웠다. 크게 보자면 양자역학, 핵물리학, 이론물리학 등 대부분의 현대물리학에 그의 업적이 담겨져 있다.
하지만 핵무기라는 힘으로 유지하는 평화 자체가 길게 유지되기 매우 힘들 뿐더러, 오히려 핵개발 상용화 같은 사회 이슈로 인해 그의 업적이 무조건 긍정적인 부분만 갖추었다고 볼 수는 없다. 과학적으로는 핵물리학을 크게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을진 몰라도, 도덕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그의 주요 업적인 맨해튼 계획에 대해선 여전히 그에 대한 여러 의논과 논쟁이 있다. 이는 오펜하이머 본인도 깊게 통감했던 부분으로 평생 원자폭탄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다.
3.1. 핵물리학 및 양자역학[편집]
뿐만 아니라 그는 양자역학에도 관심이 컸는데, 이 분야에서 여러 중요한 연구들을 수행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연구는 원자 및 분자의 구조와 동작에 대해서 다루었다.
3.1.1. 본-오펜하이머 근사[편집]
자세한 내용은 파동함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1.2. 맨해튼 계획 및 트리니티 실험[편집]
자세한 내용은 맨해튼 계획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 과정에서 오펜하이머는 매우 중요한 역할이었으며, 다른 과학자들을 리드하고, 문제나 의문점들을 빠르게 해결하고, 이론과 설계에 큰 기여를 하는 등 맨해튼 계획의 성공에는 오펜하이머의 영향이 매우 컸다고 봐도 무방하다.
요약하자면, 오펜하이머를 포함한 여러 연구진들은 뉴 멕시코주의 로스 앨러모스에서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실험하고, 상용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는 나중에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사건의 큰 영향을 주었으며, 동시에 제2차 세계 대전을 완전히 종결시킴으로서 당시에 가장 급했던 불을 끄는 데 성공하였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또다른 세계 대전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고려해보면 원자폭탄의 영향력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원자폭탄 개발 이후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해결했다고 볼 수 있을 지 몰라도 핵 개발 확산과 미국과 소련의 핵 개발 경쟁이 지속됨에 따라 썩 긍정적인 부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3.2. 천체물리학[편집]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오펜하이머는 핵물리학자, 맨해튼 계획 리더이기 전에 천체물리학자였다.
3.2.1. 블랙홀 예측[편집]
이전에는 dark star(어두운 별)이라 불리던 블랙홀의 존재, 정확히는 블랙홀의 불가피성을 이론적으로 증명하였다. 블랙홀을 상상의 영역에서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낸 것이다.
그러나 당시 많은 과학자들이 블랙홀에 회의적이기도 했고, 증명된 시기도 오펜하이머가 사망한 한참 뒤였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노벨상 수상은 하지 못했다.
3.2.2. 톨만-오펜하이머-볼코프 방정식[편집]
자세한 내용은 톨만-오펜하이머-볼코프 방정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톨만-오펜하이머(Tolman-Oppenheimer-Volkoff, TOV) 방정식은 일반 상대성 이론에 기반한, 중력이 매우 강한 조건에서의 핵구조와 특히 뉴턴성 핵성립체(neutron star)의 구조를 설명하는 방정식이다.
4. 기타[편집]
- 물리학 이외에도 예술 쪽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어릴 적에 출판사에 보낸 편지를 너무 잘 써서 어른으로 오해 받은 일화가 있다. 일생 동안 시를 쓰는 걸 좋아했으며 미술품을 수집하는 것을 즐겼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들 중에 "나의 탁월함이 두렵다네."라고 한 걸 보면 유머 감각도 상당히 있던 것으로 보인다. 물리학자 친구였던 폴 디랙은 오펜하이머가 시를 쓴다는 소리를 듣더니 "시는 모두가 아는 사실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게 표현하는 것이고 물리학은 그 전에는 아무도 몰랐던 사실을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둘은 병행할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 맨해튼 프로젝트를 완수한 후 몇 번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거론되었으나 결국 수상하지는 못했다. 맨해튼 프로젝트 전에는 물리학에 신기원을 놓았다 할 만한, 즉 노벨상 수상 급의 획기적인 업적이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원자력의 방대한 힘을 인류에게 선사했음은 분명 획기적인 업적이긴 하나 핵무기의 윤리적 딜레마를 생각할 때 이것으로 노벨상을 주기에는 곤란했던 것이다. 한편 획기적 업적을 내지 못한 데는 본인의 기질도 한몫했는데, 오펜하이머는 뭔가 새로운 장을 열고 그 분야에 끝까지 매진하지를 않았다. 블랙홀이나 중성자별이 그 예시인데 이 둘은 나중에 수많은 노벨상을 배출하는 연구분야가 된다.
- 굉장히 부드럽고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세심하다 못해 오히려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이었고, (본인이 매우 뛰어남에도) 친구들의 성취를 보며 초조해하고 심지어 열등감에 다른 친구의 목을 조르기까지 했다. 맨해튼 계획에서 세운 업적을 비롯해서 본인의 물리학적 능력 역시 상당했다는 걸 생각하면 저런 열등감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노벨상을 못 받았다는 정도일 텐데, 그것 때문이었는지는 불명.[35] 이에 대해서는《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 나오는데, 오펜하이머가 친구의 목을 조른 건 과학적 열등감이 아니라 젊은 시절 사랑 문제로 초조했기 때문이다. 자신은 아직 솔로인데 주변인들이 하나둘 결혼에 성공하던 와중 절친마저 사랑에 성공하는 기미가 보이자 그만 목을 조르고 만 것이다. 자신도 잘못한 건 인지해서 나중에 진심으로 사과했다.
- 하지만 이런 열등감은 나중에 극복했고, 반항적인 젊은 천재 리처드 파인먼은 원래 맨해튼 계획에 참가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의 아내[36] 와의 관계를 읽은 오펜하이머가 친절하게 매주 휴가를 주고, 병원 치료까지 제시해 줘서 그에 감동한[37] 파인만은 미국에 충성하는 게 아니라 오펜하이머를 위해 맨해튼 계획 참가를 결정했다고 하였다. 파인먼의 저서 등을 보면, 다른 고위직 인사들에 대해서는 대부분 조롱하는 내용만 잔뜩이지만 오펜하이머에게만은 그런 내용이 없다.
- 엄청난 애연가로 그냥 애연가 수준이 아니라 담배를 입에서 떼놓은 것이 더 보기 드문 골초였다. 담배 파이프나 꽁초가 입에서 떨어진 적이 없었다고, 젊은 시절에 뉴멕시코로 놀러 갔다가, 모닥불을 피워놓고 노숙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적이 있는데, 그때 처음으로 담배를 배웠다고 한다. 오펜하이머는 허기가 져서 몹시 지친 상태였는데, 누군가가 파이프를 권했고 처음으로 담배를 피우고는 그때부터 헤비스모커가 되었다고. 워낙 담배를 입에 물고 살아서 이미 30대부터 기관지가 좋지 않았는데, 담배가 몸에 나쁘다는 충고를 씹고 그냥 계속 담배를 물고 살았고 결국 담배 때문에 후두암에 걸려 사망했을 정도로 담배를 즐겨 피웠다. 담배가 핵무기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38]
- 이 인물에 대한 평전인《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43] 이 있는데 무려 1,000 페이지가 넘으며 번역판은 더 두껍다. 영문판은 가벼운 제지와 빽빽한 문단들 덕분에 번역판보다는 확연히 얇고 가볍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의 최형섭 교수[44] 가 번역했는데, 워낙 양이 방대하여 번역에만 수년 걸렸다고.
- 무한도전 정 총무가 쏜다 특집에서 하하가 이 책을 고르며 또 널리 알려지게 됐다. 영상. 하하는 단순히 두껍고 비싸 보여서 정준하의 계산을 헷갈리게 할 목적으로 고른 건데, 그 이전에 자신이 고른 책은 추후에 독후감을 쓰고 내용에 대한 퀴즈까지 풀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하하가 읽기엔 내용도 너무 방대하고 어려워서[39] 고른 직후에 멘붕 후에 2011년 3월 12일 무한도전 "정 총무의 책책책 책을 좀 읽읍시다" 편에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이름만으로 원고지 3장(600자) 중 4~5줄(80자~100자)을 채우고,[40] 오펜하이머의 아버지가 부자여서 많이 사줬을 것 같아 좋겠다거나 명문 대학을 간 게 부럽다고 하는 등[41] 초등학생보다도 못한 유치원생 수준의 독후감을 써서 큰 웃음 빅재미를 주었다. 하하가 독후감을 쓰던 중에 "등장인물이 1,000명 정도 되나 봐..."[42] 라고 했던 말도 명언이다. 당연하지만 평전이라 주위에 있었던 여러 사람들이 언급되다 보니 생기는 일. 허나 이 장면의 임팩트가 꽤나 컸던 덕에 해당 회차 방영 약 12년 후, 창작물 문단에도 나오듯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같은 책을 읽고 제작한 영화 오펜하이머가 개봉하면서 영화의 한국 홍보 일부를 하하가 맡게 되었다. 2023년 버전의 감상문 형식으로 진행한다는 듯하다.* 참고로, 방송에서는 분량상 일부분이 생략되었다. 풀버전은 다음과 같다.
- 생전에 공산당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절친한 친구가 미국 공산당의 당원이였고, 그의 첫사랑 중 한 명인 진 태들록이 당원이였다. 오펜하이머는 인생의 상당 기간 동안 "급진적", "사회주의적", "공산주의적"으로 간주되는 여러 단체에 기부를 했다. 자신의 얘기에 따르면, 그는 《피플스 월드》[45] 를 구독했으며 공식적으로 가입한 적은 없지만 "공산당과 상당히 가까웠다."고 한다. 이 때문에 공직에서 배제되었다.
- 히로시마 및 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지시한 해리 S. 트루먼 대통령과 단 한 번 독대했는데, "자신의 손에 피가 묻어있다."고 말했다. 트루먼은 정작 결정을 내린 것은 나라며 이를 불쾌해했는데, 오펜하이머에게 손수건을 건네주고 닦으라고 빈정거렸다는 설까지 있다. 오펜하이머를 내보낸 뒤에는 오펜하이머에게 피가 묻어봐야 자신의 절반도 되지 않을 것이라며 딘 애치슨에게 “다시는 저 애새끼마냥 질질 짜대는(crybaby) 개자식(son of bitch)을 내 방으로 들이지 마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46][47] 정작 오펜하이머와 만날 당시 트루먼은 "러시아는 원자폭탄을 영원히 만들지 못 할 것"이라고 단언하였고, 대통령이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 한다고 생각한 오펜하이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고 한다. 불과 4년 후에 소련이 원자폭탄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정말 어리석었던 근자감인 셈.
- 오펜하이머는 유대인이긴 했지만 유대교를 맹종하는 신자는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산스크리트어와 힌두교에 심취해 힌두교와 인도 문학에 대한 경외심을 자주 표현했다. 원폭 실험에 성공한 후 그는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됐다”며 자책했다고 하는데, 이 문구는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에 나오는 어구다. 오펜하이머는 하버드대 학부생 시절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면서 힌두교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정확히는 힌두교의 '철학'에 매료되었고, 범신론, 이신론적으로 신을 바라보았다.[48] 그가 전공한 물리학 분야인 양자역학과 우주 창조와 기원을 고찰하는 힌두교와 일맥상통한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힌두교를 포함한 특정한 종교를 가지진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오펜하이머의 종교가 다른 과학자들과는 달리 유명한 학술지나 뉴스에서 다뤄진 적이나 밝혀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5. 창작물[편집]
- 멸망의 창조(Fat Man And Little Boy): 1989년도 영화이며 주연급으로 비중높게 나온다. A특공대에서 머독을 맡은 배우이자 성우인 드와이트 슐츠가 연기했다. 이 영화는 미션, 킬링필드 감독으로 한때 유명했으나 2000년대 와서 잊혀진 감독 롤랑 조페 감독 영화. 주인공으로 폴 뉴먼이 실존인물 레슬리 그로브스를 맡았고 원제목을 봐도 알겠지만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에 쓰인 원폭인 팻맨과 리틀보이. 즉 이 원폭을 만들고 쏘는 여러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1989년 당시 한국 영화월간지 로드쇼에선 "뚱보와 꼬마"라는 직역으로 제목표기해 신작으로 소개했다. 멸망의 창조는 CIC 비디오로 나온 제목이다. 작품적으로 나쁘지 않으나, 흥행은 참패했다.
- 쥬라기 공원(Jurassic Park): 데니스 네드리 책상위 모니터에 사진이 붙어있다. '베이비 부머의 시작'이란 글귀와 함께.
-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에 등장하는 겔런 어소가 오펜하이머를 소재로 하였으며 배우인 매즈 미켈슨이 직접 이 사실을 인정하였다.
- 영화 붉은 10월에서 핵잠수함 '붉은 10월호'가 출항한 후, 정치장교 푸틴이 함장실을 점검하던 중 발견한 성경을 검열하면서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라는 주석을 발견하고 주인공 마르코 라미우스 대령을 추궁한다. 라미우스는 "한 미국인이 고대 힌두의 글귀를 인용한 부분인데, 그는 원자폭탄 제작에 기여를 했지만 나중에 공산주의자로 몰렸다."라고 답한다.
- 오페라 원자폭탄 박사(Doctor Atomic) : 2005년 초연된 존 쿨리지 애덤스의 현대 오페라. 트리니티 실험을 앞둔 오펜하이머와 주변 사람들의 고뇌를 다루었다. #뉴욕타임스의 소개
- 트리니티 - 신의 불을 훔친 인류 최초의 핵실험: 2012년 출판된 그래픽 노블. 이름 그대로 트리니티 실험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작중에서 해설역 및 주인공을 맡고 있다.
-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영화): 2014년 개봉한 영화. 다만 원작 소설에서 핵실험 성공 이후 침울해 하는 것과는 달리, 영화에서는 핵실험 성공을 좋아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 오펜하이머: 바로 위의 테넷을 만든 크리스토퍼 놀란의 2023년에 개봉한 영화. 재미있게도 오펜하이머가 언급된 테넷의 차기작의 소재가 오펜하이머가 되었다. 오펜하이머의 평전인《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원작으로 한 전기 영화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페르소나인 킬리언 머피가 오펜하이머 역에 캐스팅되었다.
- 아토믹 하트: 2023년에 출시된 비디오 게임으로, 주요 등장인물인 '드미트리 세르게예비치 세체노프' 박사가 한때 과학의 유용성에 대한 회의에 시달려 과학을 포기하려 했다가 이 원자폭탄을 개발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과학자들을 반면교사 삼아 과학을 포기하지 않게 한 계기로 작용했다고 언급된다.
- 하우스키퍼: 세계대전 종식을 위한 병기이자 당시 1억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네르투스 발명의 총 책임자이며 스토리 전체에 큰 파장을 일으킨 대부분의 사건들의 시작엔 이 인물이 있었다. 나치가 2차대전에서 승리한 세계라서 히틀러의 밑에서 폭탄을 만들었지만 히틀러를 망할 콧수염이라 부르는 모습을 보아 사상에는 동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순수하게 전쟁이 빨리 끝나길 원하는 마음에서 병기를 만들었지만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되자 죄책감을 느낀다. 자세한 건 문서 참고.
6. 어록[편집]
I can't think that it would be terrible of me to say — and it is occasionally true — 'that I need physics more than friends.'
스스로에게 이런 말을 해도 소름끼칠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종종 그것은 사실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나에겐 친구보단 물리학이 더 필요하다는 것 말이다.
동생 프랭크 오펜하이머(1912년 8월 14일 ~ 1985년 2월 3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If atomic bombs are to be added as new weapons to the arsenals of a warring world, or to the arsenals of the nations preparing for war, then the time will come when mankind will curse the names of Los Alamos and Hiroshima. The people of this world must unite or they will perish.
(전략)전쟁을 준비하는 국가, 혹은 전쟁 "중"인 세계의 무기고에 원자폭탄이 신무기로써 추가된다면, 인류가 로스 앨러모스와 히로시마라는 이름을 저주하는 날이 올 겁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하나로 단결하지 않으면 반드시 모두 멸망할 것입니다.(후략)
1945년 11월 16일, 미 육군과 미 해군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우수함"을 시상하는 자리에서 상을 받을 때 연설하며.
We knew the world would not be the same. Few people laughed, few people cried, most people were silent. I remembered the line from the Hindu scripture, the Bhagavad-Gita. Vishnu is trying to persuade the Prince that he should do his duty and to impress him takes on his multi-armed form and says, '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I suppose we all thought that, one way or another. '
우리는 세상이 다시는 예전 같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웃는 사람도, 우는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대다수는 침묵에 잠겼습니다. 저는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한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비슈누는 왕자가 그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설득하며, 그에게 감명을 주기 위해 자신의 여러 팔이 달린 형태를 취하고는 말했지요.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아마 우리 모두 어떤 식으로든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겁니다.
트리니티 핵실험에 대해 언급하며.
'"The ending of the war by this means, certainly cruel, was not undertaken lightly. But I am not, as of today, confident that a better course was then open. I have not a very good answer to this question."
(1분 20초 부터) 확실히 잔인한 이 수단에 의한 전쟁의 종식은 가볍게 착수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현재로서는 더 나은 길이 열렸는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한 좋은 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1965년 CBS와의 인터뷰에서
"Mr. President, I feel I have blood on my hands."
대통령 각하, 나는 내 손에 피가 묻었음을 느낍니다.
1945년 10월 백악관에서 트루먼 대통령에게.[49]
그가 생각했던 대로, 그의 첫 핵폭탄 트리니티(Trinity, 삼위일체)가 터진 이후, 인류는 자기 자신을 멸종시킬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 되고야 말았다.[50]
이 유명한 문구는 린킨 파크의 네 번째 앨범 A Thousand Suns의 수록곡 The Radiance에 인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고질라(2014)의 코믹콘 티저 예고편(소음주의)에서는 일부 구절이 인용되어 나왔다. 원작의 고지라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생각해보면 적절한 원작반영의 일환인 듯. 문명 5에서도 핵무기를 연구할 경우 해당 구절이 나온다.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의 메인화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를 통해 그의 계정에 접근할 수 있다. 단 CIA 서버가 아닌 Dreamland라는 서버에 계정이 있으므로 rlogin dreamland 명령어를 통해 로그인해야 한다. ID는 roppen. 패스워드는 trinity 나치 좀비 모드의 배경 스토리에 관련된 파일들을 열람할 수 있다.
폴아웃 4에선 DLC 파 하버를 진행할 때 동료 중 한 명인 닉 발렌타인과 가게 되는데 동행 중 원자의 아이들 교단의 본거지인 중핵(The Nucleus)에 있는 핵잠수함의 미사일을 터뜨릴 때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라는 말을 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