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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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1. 개요[편집]


1957년 3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서독,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제4공화국,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6개국이 체결한 조약. 이 조약을 통하여 오늘날 EU의 모태가 되는 유럽 경제 공동체(EEC)와 유럽투자은행이 출범하게 된다.


2. 역사[편집]


현대적인 개념의 유럽 연합을 처음 주창한 것은 전간기의 프랑스였다. 켈로그-브리앙 조약의 주역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외무장관 아리스티드 브리앙은 1929년 범유럽연합의 형성을 주장하였지만, 경제 대공황 및 파시즘의 대두로 인한 혼란 속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도 못한채 유야무야된다. 유럽 연합이 다시 주창된 것은 2차대전 이후였다. 전후 프랑스의 외무장관을 역임한 로베르 쉬망(Robert Schuman)[1]은 1950년 5월 이른바 쉬망 플랜이라는 것을 독일 측에 제안한다.

루르자르 지역의[2] 석탄‧철강을 프랑스와 독일이 공동개발하자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이 제안은 서독의 당시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로부터도 즉각적인 지지를 받았다. 쉬망의 제안은 독불 양국의 오랜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경제협력을 통한 평화체제를 구축하자는 제안으로 여겨졌다.[3] 여기에 베네룩스 3국이탈리아가 가세하면서 1951년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ECSC)가 등장한다. 양차 세계대전과 냉전으로 인하여 강대국에서 몰락한 프랑스는 경제 공동체 설립에 만족하지 않고, 자국의 유럽 내 종주권 회복을 위하여 적극적인 통합을 연이어 꾀하면서 유럽 방위 공동체(EDC)와 유럽 정치 공동체(EPC)를 제안한다.[4]

이후 서유럽의 재건이 서서히 진행되면서 경제력이 향상되자 ECSC의 기능을 확대해야 할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유럽 내에서 커졌고, 1955년 메시나, 그리고 1956년 에서 열린 유럽 각국들의 정상회담 끝에 1957년 로마 카피톨라노 언덕에서 ECSC를 유럽 경제 공동체(EEC)로 격상하며, 향후 12년에 걸쳐 무역장벽을 모두 제거해 공동시장을 구축한다는 로마 조약이 발인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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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혹은 로베르 슈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2] 지금은 루르와 자르가 둘 다 독일의 영토이지만, 1950년 당시만 하더라도 자르는 자르 보호령이라는 이름으로 독일로부터 분리되어있었고, 실질적으로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또한 루르는 루르 국제 통치령이라는 이름으로 명목상은 서독의 땅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서방 연합국의 관리를 받았었다.[3] 물론 프랑스가 순전히 선의에서 쉬망 플랜을 제안한 건 아니다. 이 무렵 냉전이 격화되고 여기에 한국전쟁까지 발발하면서 미국은 일본의 자위대와 마찬가지로 독일의 재무장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는데, 2차대전 종전으로부터 불과 5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던만큼 프랑스는 독일의 재무장에 대하여 굉장히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였다. 쉬망 플랜 제안의 이면에는 전쟁에 있어서 필수 물자인 철과 석탄을 독일이 어디에 사용하려는지 감시하려는 의도도 깔려있었다.[4] 이 중 유럽 방위 공동체의 경우에는 독일의 재무장을 사실상 용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좌파 정당의 주도 하에 프랑스 의회에서 부결된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당시 서독 수상으로 독일의 재무장을 열심히 추진했던 콘라트 아데나워 역시도 프랑스 의회에서의 EDC 부결에 대해 (겉으로는 낙담한 척 했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EDC가 도입되면 재무장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독일군은 프랑스군에 의해 종속되는 형태일텐데, (실제로 당시 프랑스 우파 정부가 노린게 이것이기도 했다.) EDC가 부결되면서 미국의 묵인 하에 독자적인 독일군을 창설하는게 가능해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