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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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왕국
Reino de Leó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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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레온 왕국 국장.svg
국기
국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Kingdom_of_Leon_1037.svg.png
910년 ~ 1230년
위치
스페인 카스티야 이 레온 지방
수도
레온
정치 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언어
레온어, 아스투리아스어,
중세 스페인어, 라틴어
종족
레온인, 아스투리아스인
종교
가톨릭
주요 사건
910년 건국
1230년 멸망
성립 이전
아스투리아스 왕국
멸망 이후
카스티야 연합 왕국

언어별 명칭
레온어
Reinu de Llïón
라틴어
Regnum Legionense
스페인어
Reino de León
포르투갈어
Reino de Leão
영어
Kingdom of Leon

1. 개요
2. 역사
2.1. 건국 배경
2.2. 아스투리아스 왕조
2.2.1. 세 형제
2.2.4. 혼란기
2.2.5. 아스투리아스 왕조의 단절
2.3. 히메네스 왕조
2.3.2. 형제간의 골육상쟁
2.3.4. 내전에 휘말린 왕국
2.4. 보르고냐 왕조
2.5. 카스티야 왕국에 병합되다
3. 언어





1. 개요[편집]


910년부터 1230년에 이르기까지 스페인에 존재했던 왕국.

현재 스페인의 행정 구역인 카스티야 이 레온, 칸타브리아, 아스투리아스, 갈리시아 지역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2. 역사[편집]



2.1. 건국 배경[편집]


레온 시는 기원전 29~19년 아우구스투스가 단행한 칸타브리아 전쟁에 투입된 제6 빅트리스 군단의 주둔지에서 기원한다. 서기 74년, 69년에 갈바 황제가 모집했던 제 7 게미나 군단은 이 곳을 영구 주둔지로 삼아 최근에 정복된 히스파니아 북서부 영토를 통제하고 인근의 거대한 광산에서 추출한 금의 운송을 수행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단순한 군사 기지로 쓰이던 이곳은 카스트라 레기오니스(Castra Legionis) 시로 발전했으며, 이 이름에서 '레온(Leon)'이라는 명칭이 파생되었다.[1]

레온은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후 수에비 왕국에 편입되었다가 586년 리우비길드 왕에 의해 정복된 이래 서고트 왕국에 소속되었다. 715년 우마이야 왕조가 서고트 왕국을 무너뜨리고 히스파니아를 정복했을 때 별다른 저항 없이 아랍 세력에 편입되었다. 아랍인들은 이곳에 베르베르인들을 이주시켜서 이베리아 반도에 유일하게 남은 기독교 국가인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압박하려 했지만, 740년 베르베르 대항거 때 베르베르인들이 아랍인들과 싸우기 위해 떠나버리면서 계획이 중단되었다.

그 후 레온은 기독교 세력과 무슬림 세력간의 잦은 전쟁으로 파괴되었다. 그러던 856년,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국왕 오르도뉴 1세는 오르도뉴 1세는 한 세기 동안 버려졌던 두에로 강과 칸타브리아 산맥 사이의 '두에로 사막'에 주민들을 이주시켜서 재개발을 단행하고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들을 재건했다. 이때 레온도 재건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아스투리아스 왕국 서부 일대의 핵심 도시로 자리잡았다.

909년, 아스투리아스 국왕 알폰수 3세의 장남 가르시아 1세는 카스티야인 무니오 누녜즈 백작의 딸 누냐와 결혼한 뒤 무니오의 선동에 따라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엔 알폰수 3세의 또다른 아들들인 오르도뉴와 프루엘라, 그리고 왕비인 히메나도 가세했다. 알폰소 3세는 반란군에게 붙잡힌 뒤 왕위는 유지했지만 실권을 완전히 빼앗기고 산 살바도르 데 발데디오스 인근의 볼리데스 마을로 보내졌다. 세 아들은 왕국의 수도를 아스투리아스에서 레온으로 이전하기로 합의했으며, 나라의 이름 역시 아스투리아스 왕국에서 레온 왕국으로 변경하기로 했다. 910년 12월 알폰수 3세가 사망한 뒤, 알폰수 3세의 세 아들 가르시아 1세, 오르도뉴 2세, 프루엘라 2세는 아버지의 왕국을 삼분하여 각각 레온 왕국, 갈리시아 왕국,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국왕을 칭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레온 왕국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2.2. 아스투리아스 왕조[편집]



2.2.1. 세 형제[편집]


레온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된 가르시아 1세는 두 동생 오르도뉴 2세, 프루엘라 2세의 주군으로 군림했다. 911년 군대를 이끌고 무슬림을 공격해 톨레도 또는 탈라베라나를 약탈했으며, 두에로 강 전선을 확고히 하기 위해 강변의 여러 도시에 인구를 대거 이주시켰다. 장인 무니오 누녜즈에게 로아 시 관리를 맡겼고, 또다른 카스티야 귀족 곤잘로 텔레즈는 오스마 시를 맡았으며, 부르고스 백작 곤잘로 페르난데스는 하자, 클루니아, 산 에스테반 데 고르마즈 시를 담당했다.

그러던 914년경 가르시아 1세가 사망했다. 가르시아 1세가 자식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갈리시아 국왕을 맡고 있던 오르도뉴 2세가 레온 왕국의 왕위를 겸임했다. 그는 916년 여름 레온의 왕으로서 군사 원정을 시작하여 마크나사트 알 아스남(Miknasat al Asnam, 현재 메리다)를 위협한 뒤 라 쿨레브라 또는 칼라트 알 하나시(Kalat al-Hanash)를 정복했다. 이후 주변의 총독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낸 뒤 많은 전리품과 포로를 챙기고 레온 왕국으로 귀환했다. 그는 원정이 성공한 것을 긴며해 레온 시에 도착한 직후 산타 마리아 데 레글라 데 레온 대성당을 건립해 기존의 레온 대성당을 대체하게 했다. 916년 여름 무슬림에 대항하는 새로운 원정대를 이끌고 메리다 시 외곽을 포위 공격했다. 코르도바에서 파견된 후우마이야 왕조군이 메리다를 구하기 위해 접근했지만, 오르도뉴 2세는 이를 격파하고 무슬림 사령관을 사로잡아 레온으로 끌고 갔다.

917년, 후우마이야 왕조 에미르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계속되는 기독교 세력의 공세로 동요하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팅기타니아와 모리타니아 일대를 포함한 전 지역에서 대군을 소집한 뒤 그해 8월 2일 훌리트 압둘하바트에게 군대를 맡겼다. 압둘하바트는 코르도바를 떠나 두에로 강둑으로 진군하면서 경로에 있는 기독교인의 땅을 약탈하고 파괴했다. 무슬림군이 산 에스테반 데 고르메스 마을 인근의 카스트로모로스에 숙영지를 세우고 쉬고 있을 때, 오르도뉴 2세가 이끄는 레온군이 갑자기 나타나 무슬림 진영을 급습했다. 무슬림군은 이 전투에서 막심한 피해를 입고[2] 코르도바로 패주했다. 오르도뉴 2세는 이 전투에서 전사한 압둘하바트의 유해를 확보한 뒤 산 에스테반 데 고르메즈 성벽에 매달게 했다.

918년 봄, 오르도뉴 2세는 팜플로나 왕국의 국왕 안초 1세와 연합하여 알안달루스의 북동부 행정구역인 알 타흐르 알 아일라(الثغر الأعلى, 상부 고지)를 공격했다. 그들은 나헤라 공략에 실패했지만, 바누 카시 일족에 영역에 속한 칼라호라, 아르네도, 비게라를 공략하고 발티에리 주변의 영지와 모스크를 파괴했다. 이에 분노한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그해 7월 8일 시종 바드르 이븐 아흐마드(Badr ibn Ahmad)에게 기독교 세력을 응징하라고 명령했다. 무슬림군은 무토니야로 진군한 뒤 918년 8월 145일과 16일 두 번의 전투에서 나바라-레온 연합군을 격파하여 많은 전리품을 챙긴 뒤 코르도바로 돌아와 무슬림들의 환호를 받았다.

919년 10월, 오르도뉴 2세는 군대를 동원해 국경으로 이동해 이듬해의 공세를 준비했다. 그러나 아브드 알 라흐만 3세가 즉시 친척 이스하크 무함마드 알 마르와니에게 군대를 맡겨 북부 국경을 수비하게 하자, 오르도뉴 2세는 적이 대비하는 상황에서 공세를 취해봤자 승산이 적다고 판단하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그 후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지하드를 선포하고 920년 6월 마르와니에게 대군을 맡겨 원정을 개시하게 했다. 마르와니가 이끄는 원정군은 톨레도, 과달라하라를 거쳐 메디나셀리로 진군했다. 이후 7월 8일 오스마와 산 에스테반 데 고르마즈를 탈환했으며, 연이어 부르고스, 클루니아, 투델라, 칼라호라를 공략했다.

무슬림군이 기세를 이어가 팜플로나 왕국의 수도 팜플로나로 진격하자, 오르도뉴 2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안초 1세와 합세했다. 양측은 비구에라에서 벌어진 첫번째 전투를 치렀다. 그 결과 승리를 거둔 무슬림군은 팜플로나 시에서 남서쪽으로 약 25km 떨어진 발데준케라 계곡에 자리잡았다. 920년 7월 26일, 무슬림군은 발데준케라 계곡에 침입한 레온-나바라 연합군을 다시 격파하고 투이와 살라망카의 주교인 헤르메길도와 두이실도를 체포했다. 기독교군 생존자들은 무에즈와 비구에라 요새로 피신했지만 두 곳 모두 얼마 안가 함락되었고,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생포된 기독교 장병들을 모조리 참수하라고 명령했다. 그 후 무슬림군은 코르도바로 철수하기 전 3주 동안 나바라 왕국의 평야 지대를 황폐화했다. 오르도뉴 2세는 이 뼈아픈 패전의 책임을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카스티야 백작 누뇨 페르난데스, 페르난도 안수레즈, 무니오 고메즈 등에게 돌리고 그들을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가 나중에 풀어줬다.

921년 봄, 오르도뉴 2세는 재차 군대를 소집한 뒤 과달라하라의 신틸리아로 진격해 그 일대를 황폐화했다. 이후 사르말론, 엘리프, 팔마세스 데 자드라케, 카스테혼 데 헤나레스 및 마그난자 성을 잇따라 공략한 뒤, 후우마이야 왕조군이 반격하기 전에 두에로 강을 건너 레온 왕국으로 돌아갔다. 오르도뉴 2세는 921년 8월 1일 사모라에 도착했을 때 아내 엘비라가 사망한 것을 알게 되었고, 922년 곤살로 베토테스 백작의 딸 아라곤타 곤살베스와 재혼했다. 923년 여름 안초 1세의 요청에 따라 다시 군대를 일으켜 안초 1세와 가세했다. 안초 1세가 비게라를 공략하는 동안 그는 나헤라를 공략했고, 바누 카시 가문의 일원인 무함마드 아브드 압둘라 이븐 루브 및 여러 무슬림 귀족들을 체포해 사형에 처했다.

레온 왕국으로 귀환한 오르도뉴 2세는 아라곤타 곤살베스와의 결혼을 무효화한 뒤 팜플로나 국왕 안초 1세의 딸 안초 사노이츠와 세번째로 결혼했으나 몇 개월 후인 924년 1월 18일에 사모라에서 사망했다. 그는 가르시아 1세와는 달리 여러 아들이 있었지만, 아스투리아스 국왕을 맡고 있던 프루엘라 2세가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레온과 갈리시아 전역을 장악해 세 왕국을 일시적으로 통합했다.

924년 후우마이야 왕조아브드 알 라흐만 3세가 군대를 일으켜 팜플로나 왕국으로 쳐들어오자, 프루엘라 2세는 카스티야 백작들을 파견해 팜플로나 국왕 안초 1세를 돕게 했다. 그러나 레온-팜플로나 연합군은 무슬림군에게 격파되었고, 팜플로나가 함락되었다. 그러나 후방에서 반란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접한 아브드 알 라흐만 3세가 점령지에 수비대를 배치하지 않은 채 철수했기 때문에, 안초 1세는 곧 돌아와서 잃어버렸던 영토를 도로 확보했다.

프루엘라 2세는 서고트 왕국 위티자 왕의 후손임을 자처하던 올문도(Olmundo)의 아들 게불도(Gebuldo)와 아레신도(Aresindo)를 살해하고, 그들과 가깝게 지내던 레온의 주교 프루니미오(Frunimio)를 추방해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그러다 925년 8월 나병에 시달린 끝에 사망했다.


2.2.2. 알폰수 프루엘라스알폰수 4세[편집]


프루엘라 2세 사후 장남 알폰수 프루엘라스가 왕위에 올랐지만, 전왕 오르도뉴 2세의 세 아들 산추 오르도녜스, 알폰수 4세, 라미루 2세의 반란에 직면했다. 산추는 그의 아내 고토 누녜스의 출생지인 갈리시아 귀족 대다수의 지원을 받았고, 알폰수는 아내 오네카의 친정인 팜플로나 왕국의 지원을 받았다. 그리고 라미루는 아내 아도신다 구티에레스와 관련된 포르투갈 귀족들의 지원을 받았다. 926년 초 오르도뉴 2세의 아들들과의 전쟁에서 패한 알폰수 프루엘라스는 두 동생과 함께 아스투리아스의 산악지대로 피신했고, 산추와 알폰수는 각각 갈리시아 왕국의 국왕과 레온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라미루는 코임브라를 비롯한 포르투갈 지역을 다스렸다.

얼마 후, 산추 오르도녜스는 레온 왕국까지 자신의 소유로 삼기 위해 알폰수 4세와 전쟁을 벌였다. 알폰수 4세는 이 전쟁에서 패배해 아스투리아스로 달아났다. 이후 알폰수 프루엘라스와 화해하고 그의 도움에 힘입어 산추 오르도녜스를 물리치고 레온 국왕에 복귀했다. 알폰수 프루엘라스는 알폰수 4세를 도운 대가로 아스투리아스 지역의 북부 해안과 산악 지대에서 왕 노릇을 하는 것을 용인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929년 여름 형 산추 오르도녜스가 사망하자, 알폰수 4세는 갈리시아를 레온 왕국에 편입시켰다.

931년 여름 알폰수 4세의 왕비 오네카가 사망했다. 자신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던 아내의 죽음으로 상심한 그는 왕위를 형제 라미루에게 넘기기로 하고, 사모라에서 귀족들을 소집해 자신의 결정을 밝인 뒤 사하군의 어느 수도원에 은거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안가서 양위한 것을 후회하고 복위를 꾀했다. 아스투리아스 산악지대에서 할거하던 알폰수 프루엘라스와 라미루 프루엘라스, 오르도뉴 프루엘라스는 오르도뉴 2세의 아들들간의 분쟁을 부추키기 위해 그를 지원했다.

932년 초, 톨레도에서 후우마이야 왕조군과 한창 대치중이던 라미루 2세는 알폰수 4세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첩보를 접하자 즉시 군대를 돌려 주동자들을 체포했다. 이때 아스투리아스 귀족들이 배신하는 바람에 알폰수 프루엘라스 역시 두 동생과 함께 라미루 2세에게 넘겨졌다. 라미루 2세는 알폰수 4세와 알폰수 프루엘라스, 라미루 프루엘라스, 오르도뉴 프루엘라스를 실명형에 처하고 산타 바실리사 데 루이포르코 수도원에 감금했다.


2.2.3. 라미루 2세[편집]


형제 알폰수 4세의 음모를 물리치고 레온 국왕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한 라미루 2세후우마이야 왕조에 넘어간 톨레도를 해방시키겠다고 선포하고 후우마이야 왕조의 요새 마게리타(현재 마드리드)를 공략했지만, 이곳을 지킬 만한 여건이 되지 않자 요새를 파괴하고 주변 지역을 약탈한 뒤 레온 왕구긍로 귀환했다. 933년 여름, 후우마이야 칼리파 아브드 알 라흐만 3세가 대군을 소집해 레온 왕국으로 진격했다. 카스티야 백작 페르난도 곤살레스로부터 이 소식을 접한 라미루 2세는 즉시 군대를 출동시켜 오스마에서 무슬림군을 상대로 크게 이기고 수천 명의 포로를 사로잡았다.

934년 여름, 또다른 강력한 무슬림 분견대가 북상했다. 그는 이에 맞서 싸웠지만 전세가 불리하자 산악지대로 퇴각했다. 아브드 알 라흐만 3세가 여세를 이어가 팜플로나 왕국을 침공하려 하자, 팜플로나 국왕 가르체아 1세 사노이츠의 섭정을 맡고 있던 토타 왕비가 아랍군 진영에 찾아와서 자신이 그의 고모라는 점을 상기시키며 군대를 물려달라고 요청했다.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다른 기독교 지도자들과의 관계를 끊고 무슬림들을 해치지 말며, 무슬림 포로들을 전원 석방시키고 코르도바에 조공을 바치며, 후우마이야 왕조군이 팜플로나를 통과하여 카스티야를 공격하는 것을 허용하라고 요구했다.

토타는 이를 받아들였고,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팜플로나 왕국의 영토를 빠르게 통과한 뒤 알라바와 카스티야를 공격해 각지를 파괴한 후 귀환했다. 하지만 라미루 2세는 군대를 재정비한 뒤 철수하는 적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이며 괴롭히다가 적보다 먼저 두에로 강에 도착한 뒤 오스마 요새를 공략하고 적이 협곡에 진입하기를 기다렸다.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오스마로 진입한 후우마이야 왕조군은 라미루 2세의 급습을 받고 수천 명의 사상자 및 포로를 낸 채 패퇴했다.

937년, 사라고사 타이파 아부 아히야는 후우마이야 왕조와의 모든 관계를 끊고 레온 왕국에 충성을 맹세했다. 이에 분노한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대군을 일으켜 칼라타유드를 공략하고 사라고사 주변 지역을 확보한 후 사라고사 시를 포위했다. 아부 아히야는 다시 후우마이야 왕조에 충성을 서약했고,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인질을 받아낸 후 코르도바로 돌아갔다.

939년 초, 라미루 2세는 산타렝에서 후우마이야 왕조의 지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무슬림들을 지원했지만 아브드 알 라흐만 3세가 급파한 무슬림군에게 패퇴했다.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승리의 여세를 이어가 레온 왕국을 끝장내기로 하고, 대군을 소집한 뒤 그해 여름에 레온 왕국 깊숙이 침입했다. 라미루 2세는 즉각 팜플로나 왕국, 아라곤 왕국과 손을 잡고 이에 대항했고, 939년 8월 시망카스 전투에서 후우마이야 왕조군을 궤멸시켰다.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가까스로 도주했고, 라미루 2세는 아브드 알 라흐만 3세가 항상 소지하고 다니던 쿠란을 비롯한 수많은 전리품을 확보했다.

라미루 2세는 여세를 이어가 왕국의 국경선을 두에로 강에서 토르메스 강으로 남하시키고 레데스마, 살라망카, 페냐란다 데 브라카몬테, 세풀베다 및 과드라미로를 잇따라 공략했다. 940년과 941년에 후우마이야 왕조와 2번의 휴전 협정을 맺었지만, 이후에도 후우마이야 왕조와의 소규모 접전이 벌어졌다. 942년 사라고사 토후국의 공격을 받은 팜플로나 왕국을 돕고자 카스티야 백작 페르난도 곤살레스를 파견했다. 팜플로나-카스티야 연합군은 그 해 4월 5일 투델라 전투에서 사라고사 타이파인 무함마드 이븐 하심을 격파했다.

라미루 2세는 무슬림과의 전쟁을 벌이는 것 외에도 행정 체계를 체계화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정복지에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사업을 집행하면서 그곳의 행정 체계를 빠른 시일에 갖추고자 노력했다. 또한 산 클라우디오 수도원을 복원하고 왕궁에 인접한 산 마르셀로와 산 살바도르 수도원을 궁정에 포함되도록 토목 공사를 벌였다. 여기에 영토 전역에 많은 수도원들을 건립해 기독교를 전파하고 지역 행정 관리를 자체적으로 수행하게 했다.

그러나 통치 말년에 그동안 그를 도와 무슬림군에 대항했던 카스티야 백작 페르난도 곤살레스와 갈등을 벌였다. 페르난도 곤살레스는 후우마이야 칼리파와 맺었던 휴전 협정을 위반하고 번번이 무슬림의 영토를 침략해 약탈을 자행하여 라미루 2세의 진노를 샀다. 또한 변경 지역에 레온 왕실군이 주둔하면서 자신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그는 무슬림들과 내통하며 레온 왕국에 반항했고, 후우마이야 왕조는 이 때를 틈타 레온 왕국을 공격했다. 940년, 아흐마드 이븐 야이아가 이끄는 무슬림군은 레온 평원으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했고, 944년 아흐마드 무함마드 이븐 아이야가 이끄는 무슬림군이 갈리시아의 심장부를 관통해 약탈을 자행했다.

라미루 2세는 무슬림군이 카스티야를 치지 않고 다른 곳을 습격하는 것을 보고 그가 무슬림들과 내통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에 944년 페르난도 곤살레스를 체포해 레온의 지하감옥에 투옥시키고 자신의 아들인 산초 1세를 카스티야 백작으로 봉했다. 3년 동안 구금되었던 페르난도 곤살레스는 결국 레온 왕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화해의 표시로 자신의 딸을 라미로 2세의 아들인 오르도뉴 3세와 결혼시켰다. 하지만 석방 후에도 라미루 2세에게 대한 반감을 간직한 그는 카스티야 동부로 피신한 뒤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무슬림들은 그런 그를 지원했고, 947년 사모라를 공격했다가 패퇴했으며 948년 갈리시아의 큰 도시인 오르티게이라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라미루 2세는 무슬림들이 갈리시아 등 레온 왕국의 서부 지역을 잇따라 공격하는 것을 방어하느라 카스티야에 별 신경을 쓰지 못했고, 페르난도 곤살레스는 이 때를 틈타 잃어버린 카스티야 영지를 지속적으로 공략했다. 결국 라미루 2세는 페르난도 곤살레스와 화해하기로 했다. 페르난도 곤살레스는 카스티야 백작으로 복위했고, 산초 1세는 레온 왕국으로 돌아갔다.

950년, 라미루 2세는 원정에 나서 탈라베라 데 라 레이나에서 무슬림군을 격파하고 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확보했다. 그러나 신체적으로 허약해진 그는 아들 오르도뉴 3세에게 통치를 맡기다가 951년 1월 5일 죽음이 임박하자 산 살바도르 데 팔라트 델 레이 성당에 들어가서 모든 귀족과 성직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복을 벗고 의식용 재를 머리 위에 뿌리면서 자신의 죄를 참회했다. 그는 1월을 넘기지 못한 채 사망했다.


2.2.4. 혼란기[편집]


라미루 2세 사후, 장남 오르도뉴 3세가 레온 국왕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복 형제 산추 1세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고 카스티야 백작 페르난도 페르난데스와 팜플로나 왕국이 이를 지원했다. 급기야 산추 1세의 반란군이 레온 성벽 앞까지 이르렀지만, 오르도뉴 3세는 이를 물리치고 산추 1세를 해외로 내보냈다. 여기에 갈리시아에서도 반란이 빗발쳤고, 후우마이야 왕조의 무슬림군이 연이어 습격을 가했지만, 오르도뉴 3세는 이를 어느정도 수습했고 리스본까지 공격하기도 했다. 이후 후우마이야 왕조 칼리파 아브드 알 라흐만 3세와 협의한 끝에 국경지대의 일부 요새를 넘기거나 파괴하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맺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오래 살지 못하고 956년에 사모라에서 사망했다.

오르도뉴 3세가 사망하자 산추 1세가 레온 왕국으로 돌아와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오르도뉴 3세가 후우마이야 왕조와 맺었던 휴전 협약을 무시하고 전쟁을 단행했다가 957년 패배했다. 이에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은 그가 지나치게 뚱뚱하다는 명분을 내걸고[3] 왕위에서 몰아내고 전 왕 알폰수 4세의 아들인 오르도뉴 4세를 왕으로 옹립했다. 산추 1세는 아내 테레사 안수레스와 함께 코르도바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유대인 의사이자 학자, 외교관이었던 하스다이 이븐 샤프루트(חסדאי אבן שפרוט)로부터 40일간 액체만 섭취하는 방식의 치료를 받아 비만 문제를 어느정도 해결했다.

959년 후우마이야 칼리파 아브드 알 라흐만 3세와 팜플로나 왕국 국왕 가르체아 1세 사노이츠는 산추 1세를 복위시키기 위해 연합군을 결성하여 레온 왕국으로 진격했다. 그들은 그 해 사모라를 공략했고, 960년에 카스티야 백작 페르난도 곤살레스를 격파하고 사로잡았다. 오르도뉴 4세는 연합군이 레온 시 목전에 이르자 아스투리아스로 달아났다. 이리하여 레온 왕위에 복위한 산추 1세는 후우마이야 왕조의 봉신이 되기를 자처하면서, 그들의 지원을 받아 아스투리아스로 달아난 오르도뉴 4세를 재차 공격했다. 오르도뉴 4세는 961년 부르고스로 달아난 뒤 알 라흐만 3세에게 자신을 복위시켜주면 레온 왕국의 남쪽 영토를 통째로 넘겨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알 라흐만 3세가 그해 10월에 죽으면서 무산되었다.

962년 알 라흐만 3세의 뒤를 이어 칼리파에 오른 알 하캄 2세는 오르도뉴 4세가 자신을 도와주면 레온 왕국 남쪽 영토를 지키고 있는 성채 10개를 할양하겠다는 제안을 받자 그를 코르도바로 불러들인 뒤 원정을 준비했다. 이에 산추 1세는 오르도뉴 4세를 돕지 않는다면 그 성채들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다가 오르도뉴 4세가 962년 또는 963년에 코르도바에서 사망하자, 산추 1세는 약속을 취소하고 팜플로나 왕국, 바르셀로나 백국과 연합하여 알 안달루스를 침공했다.

이에 분노한 알 하캄 2세는 963년 여름 친히 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고르마즈와 아티엔자를 점령했고, 사라고사 총독 야흐야 이븐 무함마드 알 투지비는 팜플로나 왕국을 공략했다. 여기에 슬라브계 장군 갈립 앗 시클라비는 나바라령 칼라호라를 점령하고 나바라 국왕 가르시아 산체스 1세를 격파했다. 그 후 레온 왕국과 팜플로나 왕국이 잇따라 사절을 보내 배상금을 바치며 평화 협정을 맺자고 호소하자, 알 하캄 2세는 이를 받아들이고 물러났다.

966년, 레온 시에 아브드 알 라흐만 3세 치세 때 순교한 성 펠라요를 기리기 위해 산 펠라요 수도원을 세웠다. 이 수도원은 왕실 수도원으로서 산 살바도르 데 팔라트 델 레이 수도원을 대체했다. 그러나 치세 말년에 갈리시아와 카스티야 귀족들의 반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면서 그들의 독립성이 강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레온 왕국의 성직자이자 학자였던 삼피로의 연대기에 따르면, 산추 1세는 포르투갈 백작 곤살루 멘데스가 바친 독이 든 사과를 먹고 독살당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 뜬 소문을 그대로 믿고 적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산추 1세 사후 아들 라미루 3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때 나이가 5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산추 1세의 누이이며 산살바도르 수녀원에서 수녀로 지내던 엘비라 라미레스의 섭정을 받았고, 어머니 테레사 안수레스는 오비에도의 산 펠라요 수녀원장이 되었다. 엘비라 라미레스는 후우마이야 왕조 칼리파 알 하캄 2세와 평화 협약을 갱신했고, 968년 바이킹이 갈리시아에 상륙했을 때 갈리시아 귀족 로센도에게 지휘권을 맡겨 바이킹을 물리치게 했다. 그러나 975년 6월 산 에스테반 데 고르마즈 성 공략에 착수했다가 6월 28일 알 하캄 2세의 부하 갈립 앗 시클라비의 구원군에게 격파당했다. 갈립은 여세를 이어가 7월 8일 두에로 강 남쪽 랑가 부근에서 카스티야 백작 가르시아 페르난데스를 격파했다. 이 패전으로 입지가 좁아진 그녀는 산살바도르 수녀원으로 돌아가야 했고, 테레사 안수레스가 수녀원에서 나와 섭정을 맡았다.

976년 10월 알 하캄 2세가 사망하고 11세의 히샴 2세가 칼리파에 선임되었다. 이에 후우마이야 왕조의 사령관 알 하지브 알 만수르가 실권을 잡았다. 그는 북아프리카 일대의 이드리스 왕조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후방을 안전하게 다지고 군 편제를 대대적으로 개혁한 뒤 북방의 기독교 국가들을 향한 대대적인 공세에 착수했다. 977년 살라망카와 쿠에야르가 공략되었고, 978년에는 팜플로나 왕국의 수도 팜플로나가 급습당했으며, 979년에는 세고비아가 함락되고 사모라가 습격당했다. 라미루 3세는 981년 팜플로나 국왕 안초 2세, 카스티야 백작 가르시아 페르난데스와 연합하여 알 만수르에 대적했지만 토르데실라(Tordesillas)에서 12km 떨어진 루에다(Rueda)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압도적인 패배를 당했다. 알 만수르는 여세를 이어가 아스토르가를 습격하여 레온 왕국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고, 982년에 수도인 레온에 입성하여 철저히 파괴했다.

알 만수르의 침략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는 왕을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한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귀족들은 982년경 오르도뉴 3세사생아 베르무두 2세를 갈리시아 왕으로 옹립하며 반기를 들었다. 베르무두 2세는 982년 봄과 여름에 갈리시아 전역을 공략하며 위세를 떨쳤다. 라미루 3세는 이를 진압하고자 출진했고, 983년 초 양자는 갈리시아의 안타스 데 울라 근처 포르텔라 데 아레나스에서 격돌했지만 양측 모두 막심한 피해를 입었을 뿐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베르무두 2세는 이후에도 갈리시아 왕을 자처했고, 라미루 3세는 레온으로 돌아가 무슬림군의 침략 방어에 전념했지만 985년 알 만수르의 무슬림군이 아스토르가를 재차 공략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985년 6월 26일 라미루 3세가 아스토르가에서 약 15km 떨어진 데스트리아나에서 병사했다. 그는 생전에 살다냐 백작 고메즈 디아즈의 딸은 산차 고메즈와 결혼하여 아들 오르도뉴 라미레스를 낳았다. 그러나 오르도뉴 라미레스는 라미루 3세가 사망했을 때 4살에 불과했고,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은 알 만수르의 침략이 계속 벌어지는 상황에서 어린 아이를 왕으로 세울 수는 없다고 보고 갈리시아 국왕 베르무두 2세를 레온 국왕으로 옹립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몬손과 살다냐 백국은 베르무두 2세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고 반항을 일삼았다.

986년, 알 만수르가 아스토르가로 쳐들어가 3번째로 공략했다. 987년에는 878년에 레온 왕국이 점령했던 코임브라를 수복했으며, 988년 레온 왕국의 수도 레온을 공략한 뒤 도시를 초토화했다. 베르무두 2세는 루고로 도망쳤다가 다시 사모라로 피신했다. 무슬림군은 이에 멈추지 않고 계속 공세를 감행해 994년 고르마즈, 코루냐 델 콘데를 공략했으며, 995년 살랸다를 습격했다.

베르무두 2세가 알 만수르의 연이은 침략에 대처하기 위해 레온 왕국의 동부에 군대를 집중시키자, 알 만수르는 역으로 레온 왕국의 서부로 쳐들어가서 997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공략하고 그곳의 대성당을 비롯한 도시 전체를 파괴하고 성당 대문을 가지고 가서 코르도바 모스크에 내걸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이베리아 반도 기독교 세력의 성지였기에, 그곳까지 유린되었다는 사실은 기독교인들에게 심대한 충격을 안겼다.

이렇듯 알 만수르에게 연이어 패배한 것에 분노한 귀족들은 모든 책임을 베르무두 2세에게 물으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한때 갈리시아로 1년간 피신했다가 레온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 뒤 귀족들을 용서하는 대가로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그러나 999년 통풍이 심해져서 말을 타고 다니는 게 불가능해져 들것에 의지해야 했다.


2.2.5. 아스투리아스 왕조의 단절[편집]


999년 베르무두 3세가 통풍에 시달리다가 사망한 뒤, 아들 알폰수 5세가 레온 왕위에 올랐다. 당시 나이가 5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어머니 엘비라 가르시아와 가정교사를 맡고 있던 포르투갈 백작 멘도 곤살베스섭정했다. 1008년 14살이 되었을 때 성년으로 인정받아 친정을 시작했다. 통치 초기엔 어머니 엘비라 가르시아의 영향을 받아 카스티야 백국과 우호관계를 이어갔지만, 1014년 카스티야 백작 산초 가르시아의 후원를 받던 바누 고메즈 가문이 레온 왕국에 반기를 들면서 관계가 악화되었다. 1017년 3월 산초 가르시아가 사망하면서 입지가 약화된 엘비라는 오비에도의 어느 수도원에 은거한 후 그 해에 사망했다. 알폰수 5세는 산초 백작이 사망한 뒤 지도자 선출에 난항을 겪고 있는 카스티야 백국을 침공해 케아 강과 피수에르 강 사이의 영토(현재 팔렌시아 지방)을 장악했다.

당시 후우마이야 왕조는 기독교 세력을 상대로 맹공을 펼치던 알 하지브 알 만수르가 1002년 사망한 뒤 내란에 휩싸여 있었다. 알폰수 5세는 이 때를 틈타 알 만수르의 침략으로 파괴된 레온 시를 재건하고 행정 체계를 개편하는 등 파탄에 빠진 국가를 되살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1017년 레온 대성당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푸에로 데 레온(Fuero de León, 레온 헌장)>이란 제목의 법률을 공포했다. 군주의 권한과 종교적 규제를 적시한 20개 계율에 레온 시의 생활을 규제하는 28개 계율이 결합된 이 법령은 레온 왕국 최초의 성문법으로서 기능했다.

20여 년간 왕국의 질서를 회복하고 군대를 육성하는데 힘을 기울인 알폰수 5세는 1028년 포르투갈 지역의 비세우를 공격했다. 그러나 그해 8월 7일 공성전을 지휘하던 중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이후 레온 왕위에 오른 베르무두 3세는 11살에 불과했기에, 계모이자 팜플로나 왕국 국왕 가르체아 2세 사노이츠의 딸인 우라카가 섭정했다. 그러나 알폰수 5세가 레온 헌장을 반포하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제한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귀족들이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루고 백작 오베코 루린데스가 먼저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고 그의 재산은 루고의 주교에 넘겨졌다. 오르비고, 갈리시아, 아스토르가 등 레온 왕국의 동부 영역에서도 그의 권위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팜플로나 국왕 안초 3세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레온 정부는 이를 막을 여력이 없었다.

1029년, 우라카 왕비는 팜플로나 왕국이 레온 왕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카스티야 백작 가르시아 산체스와 베르무두 3세의 누이인 산차의 결혼을 약혼을 주선했다. 그런데 가르시아 산체스가 결혼식을 치르러 레온으로 향했다가 카스티야에서 추방됐던 귀족의 아들들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가르시아 산체스가 후손을 두지 못한 채 죽자, 팜플로나 국왕 안초 3세는 시 카스티야 백작령을 점거한 뒤 자신의 아들이자 죽은 백작의 조카인 페르난도 1세를 카스티야 백작으로 세워서 카스티야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했다. 이후 레온 왕국의 수도 레온의 바로 위에 있는 차 강과 피수에르가 강 사이의 국경 지대를 점령하고, 전임 백작을 살해한 레온 왕국을 응징하겠다는 명분을 내걸어 레온으로 쳐들어갈 태세를 갖췄다.

1032년 중반 15세의 나이에 친정을 시작한 베르무두 3세는 안초 3세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누이 산차와 안초 3세의 아들 페르난도 사노이츠의 결혼을 주선하고 안초 3세가 빼앗아간 영토를 '지참금'으로 가지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안초 3세는 얼마 안가 레온 왕국과의 전쟁을 재개했고, 1034년 레온 왕국의 수도 레온과 사모라, 아스토르가 등을 함락시키고 베르무두 3세를 갈리시아로 축출한 뒤 스스로 레온 국왕을 겸임했다. 이리하여 레온과 아스토르가를 비롯한 레온 왕국의 동쪽 영역은 팜플로나 왕국의 영역에 들어갔고, 베르무두 3세는 오직 갈리시아 일대만 다스렸다.

1035년 10월, 카스티야, 아라곤, 레온 일대를 모조리 석권하며 '히스파니아의 렉스(Hispaniarum rex)'를 자칭하던 안초 3세가 사망했다. 그가 건설한 왕국은 아들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장남 가르체아 3세 사노이츠는 팜플로나 국왕이 되었고, 차남 페르난도 사노이츠는 카스티야 백작을 맡았으며, 삼남 온잘루 사노이츠는 소브라베와 리바고르자의 왕이 되었다. 베르무두 3세는 이 때를 틈타 레온 시를 탈환했지만, 안초 3세의 아들들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안초 3세의 딸 히메나 사노이츠와 결혼했다.

그러나 1037년, 카스티야 백작이자 매형인 페르난도 사노이츠는 그를 몰아내고 레온 국왕이 되기로 마음먹고 팜플로나 국왕이자 자신의 형인 가르체아 3세 사노이츠와 연합하여 레온 왕국으로 진격했다. 1037년 9월 4일, 양군은 타마론 계곡에서 맞붙었다. 베르무두 3세는 침략자들에 맞서 싸우던 중 전투의 열기에 지나치게 휩쓸린 나머지 적진에 무리하게 침투했다가 적병들에게 에워싸이고 말았다. 그는 곧 낙마했고, 창에 16번 찔러 사망했다. 베르무두 3세는 생전에 안초 3세의 딸 히메나 사노이츠와 결혼하여 아들 알폰수를 낳았지만, 알폰수는 며칠 만에 사망했다. 이리하여 아스투리아스 왕조는 단절되었고, 히메네스 왕조가 레온 왕국의 새로운 지배 가문이 되었다.


2.3. 히메네스 왕조[편집]



2.3.1. 페르난도 1세[편집]


페르난도 1세베르무두 3세를 처단한 뒤 레온 국왕이 되려 했다. 레온 왕국의 대표적인 귀족인 페르난도 플라네즈 백작은 찬탈자에게 도시를 양도할 수 없다며 거부했지만, 자신이 왕이 되더라도 그의 지위와 직책을 유지해주고 상당한 보상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자 이내 페르난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페르난도는 아내 산차와 함께 레온에 입성한 뒤 성 마리아 성당에서 레온 주교 세르반데스에 의해 레온 국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았다. 그는 고인이 된 장인 알폰수 5세가 부여한 레온 헌장을 재확인하고 서고트 왕국의 법전을 레온 왕국의 기본법으로서 계속 준수하도록 했으며, 왕국의 관습법과 귀족들의 권리 역시 존중하겠다고 밝혔다.

1043년, 아라곤 국왕 라미로 1세가 이복형 가르체아 3세 사노이츠가 소유한 팜플로냐 왕위를 빼앗을 의도를 품고 사라고사, 투델라, 우에스카 등 무슬림 토후국들과 함께 팜플로냐로 쳐들어갔다. 가르체아 3세 사노이츠는 페르난도와 동맹을 맺고 이에 대항했다. 양측은 타팔라에서 맞붙었고, 가르체아 3세-페르난도 연합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가르체아 3세는 수많은 무기와 보급물자를 노획했는데, 그 중 라미로가 타고 다녔던 검은 말을 노획해 자신에게 바친 알페레스(alférez: 중세 이베리아의 왕실 고위 관리) 오르티 사노이츠에게 오로비아 마을을 하사했다. 그 후 가르체아 3세와 라미로는 무니아도나의 중재하에 화해했고, 때마침 소브라베와 리바고르자의 왕 온잘루 사노이츠가 사망하자 라미로가 그 땅을 물려받게 했다.

1054년경 병환에 시달리던 가르체아 3세는 자기가 죽으면 페르난도가 자신의 아들들을 몰아내고 팜플로나 왕국을 삼키려 들 거라 예상하고, 병문안을 하러 온 페르난도를 체포해 카에 성에 가두었다. 하지만 페르난도는 간수를 매수해 극적으로 탈출한 뒤 레온 왕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가르체아 3세가 무슬림들과 연합하여 카스티야를 침공하자, 아라곤 백작 라미로 사노이츠와 함께 동맹을 맺고 대항했다. 양군은 아타푸에르카 계곡에서 맞붙었는데, 전투 도중에 가르체아 3세가 전사했다. 다만 팜플로나군은 해질 무렵까지 전투 대열을 유지했고, 왕의 시신을 수습한 뒤 팜플로나로 이송하여 안장했다.

그 후 팜플로나 왕국의 서쪽에 있던 많은 영주들이 페르난도에게 귀순했다. 이에 가르체아 3세의 뒤를 이어 팜플로나 왕위에 오른 안초 4세는 아라곤 왕을 칭한 라미로 1세와 동맹을 맺고 페르난도와 대립했다. 그러다가 1062년 12월 29일, 안초 4세와 페르난도는 그들의 국경을 확정짓는 조약에 서명했다. 페르난도는 카스티야의 단독 군주로 인정받았고, 안초 4세는 리오하, 알라바, 비스케이 등지를 돌려받았다.

한편, 페르난도는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국가들을 상대로 레콩키스타를 활발하게 전개했다. 1057년 포르투갈 북부의 라메고(Lamego)를 공략했으며, 뒤이어 두에로 강을 따라 진군해 몬데고 계곡을 확보했다. 1058년 7월 포르투갈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비제우(Viseu)를 접수하면서 대서양으로 진출할 발판이 마련되었다. 1060년, 페르난도는 무슬림의 치하에 있던 사라고사를 침공해 산 에스테반 데 고르마즈, 베를랑가, 바도르레이 등 여러 요새를 공략하고 톨레도와 사라고사 사이의 로마 가도까지 진격했다. 당시 사라고사의 에미르 아흐마드 알 무콰디르는 사라고사와 이웃한 토르토사와 전쟁을 치르던 중이었던 터라 이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결국 알 무콰디르는 지금까지 팜플로나 왕국에 보내던 조공을 레온 왕국에 보내고 충성을 서약하며, 페르난도가 빼앗아간 영토를 그대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사라고사를 복속시킨 뒤, 페르난도는 톨레도 에미르 야히아 이븐 이스마일 알 마문에게 관심을 돌렸다. 1062년, 페르난도는 톨레도 토후국으로 쳐들어가서 탈라마아를 공략하고 알칼라 데 헤나레스를 포위했다. 알 마문은 도저히 대항할 방도가 없다고 여기고 알 무콰디르처럼 레온 왕국을 주군으로 섬기고 매년 공물을 바치겠다고 맹세했고, 페르난도는 이에 만족해 본국으로 돌아갔다.

1063년, 세비야와 바다호스의 아랍 토후국들에 대한 대규모 약탈을 감행했고, 세비야와 바다호스 토후국들은 그가 철수하는 조건으로 내걸은 몸값을 고스란히 지불해야 했다. 1064년 1월 몬데고 강 어귀에 있던 코임브라(Coimbra)를 포위하고 6개월간 공성전을 치른 끝에 1064년 7월 25일에 함락시켰다. 페르난도는 모자라비아 백작 시스난도 다비디즈(Sisnando Davídiz)에게 코임브라를 비롯하여 대서양에서 두에로 강을 따라 이어지는 레온 왕국의 남쪽 국경 지대를 관장하게 했다.

1065년 발렌시아 토후국을 침공해 수 개월간 포위했지만 함락할 기미가 없는 데다 중병에 걸리자 철수하기로 했다. 이때 페르난도는 적이 추격할 것을 예상하고 파테르나에 병력을 매복시켰다. 발렌시아 에미르 아브드 알 말리크 이븐 아브드 아지즈 알 무샤파르는 레온 왕국군을 추격하다가 페르난도가 숨겨둔 매복병에 걸려 참패해 목숨을 잃었다. 이후 발렌시아는 톨레도 에미르 알 마문의 수중에 넘어갔다.

1065년 12월 24일에 레온에 도착한 페르난도는 산 이시도르 교회를 방문해 승리를 연이어 안겨준 하느님을 칭송했고, 성탄절 새벽에 거행된 미사에 참석해 영성체를 받았다. 12월 26일에는 주교, 대수도원장, 성직자들을 불러 왕의 망토와 면류관을 건네고 교회로 가져가라고 명령한 뒤, 성 이시도르의 유해가 담긴 관이 놓인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하느님에게 자신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해달라고 간청했다. 다음날인 12월 27일, 레온 왕국 히메네스 왕조의 초대 군주는 눈을 감았다.


2.3.2. 형제간의 골육상쟁[편집]


페르난도 1세는 생전에 상속인 사이에 왕실 소유물을 분배하는 것을 금지한 서고트 및 레온 법 대신 왕국을 분배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나바라 법 원칙을 따르라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이에 따라 장남 산초 2세는 카스티야를 물려받았고, 차남 알폰소 6세는 레온 왕국을 물려받았으며, 3남 가르시아 2세갈리시아를 물려받았다. 여기에 누이 우라카와 엘비라는 평생 결혼하지 않는 대가로 각각 사모라와 토로를 영지로 수여받고 왕실에 속한 모든 수도원의 수입 일부를 받을 권한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장남 산초 2세가 자신에게만 유산이 상속되어야 했는데 다른 형제들에게도 영토가 분배되어 버려서 카스티야에서만 왕 노릇하게 되었다는 불만을 품으면서, 형제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1067년 11월 7일 세 형제들을 중재하던 모후 산차 왕비가 사망하자, 산초 2세는 본격적으로 골육상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1068년 5월 1일 알폰소 6세가 바다호스 타이파국을 공격하느라 레온 왕국을 비워두자, 그는 이 때를 틈타 레온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이 소식을 접한 알폰소 6세는 바다호스 타이파 알 무자파르와 평화 협약을 체결한 뒤 레온 왕국으로 돌아왔다.

1068년 7월 19일 피수에르가 강 인근의 린타다 전투에서 양군이 맞붙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는 이 전투의 승자가 상대방의 왕국을 차지하기로 합의했다. 전투 결과 산초 2세가 승리했지만 알폰소 6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알폰소 6세가 1069년 5월 26일 아키텐 공작 기욤 8세의 딸 아그네스와 결혼했을 때 산초 2세가 결혼식에 참석한 것을 볼 때 곧 화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071년,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는 막내 동생 가르시아 2세가 다스리던 갈리시아를 분할 통치하기로 합의하고 힘을 합쳐 갈리시아로 쳐들어갔다. 갈리시아 2세는 두 형의 공세에 패배하고 포르투갈 중심부로 도주했다가 산타렝에서 산초 2세에게 체포되어 부르고스에 투옥되었다. 그 후 갈리시아는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에 의해 양분되었다. 포르투갈 백작령은 알폰소 6세의 레온 왕국으로 편입되었고, 갈리시아는 산초 2세의 카스티야 왕국에 편입되었다. 또한 양자는 3년간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그러나 산초 2세는 약속을 어기고 엘 시드와 함께 레온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알폰소 6세는 예상치 못한 기습 공격에 미처 대항하지 못하고 사로잡혔고, 산초 2세는 레온에 입성한 뒤 1072년 1월 12일 레온 국왕에 즉위했다. 그 후 여동생인 사모라의 우라카의 중재에 따라 알폰소 6세를 사하군 수도원에 유폐시켰지만, 알폰소 6세는 페드로 안수레스 등 몇몇 귀족들과 함께 탈출한 뒤 톨레도의 타이파 알 마문의 궁정에 망명한 뒤 그곳에 수 개월간 지냈다.

산초 2세는 자신을 왕으로 섬기기를 거부하는 레온 귀족들을 진압하는 한편, 누나 우라카 역시 자신에게 반기를 들 거라고 의심했다. 그는 우라카에게 사모라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전하라고 명령했으나 거절당하자 반역자와 밀통했다는 혐의를 씌우고 군대를 동원하여 사모라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던 1072년 8월 7일, 산초 2세는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전승에 따르면, 벨리도 돌포스(Vellido Dolfos)라는 귀족이 사모라에서 카스티야군 진영에 들어간 뒤 산초 2세에게 도시로 몰래 들어갈 수 있는 문으로 안내해주겠다고 했다. 산초 2세는 이를 믿고 그를 따라가다가 돌연 손에 쥐고 있던 황금 창을 빼앗기고 창에 복부를 찔러 사망했다. 돌포스는 엘 시드의 추격을 피해 곧바로 사모라로 돌아와서 우라카를 향해 "도냐 우라카, 약속을 이행할 때입니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나 중세 히스파니아 역사의 주요 사료로 취급되는 <로데리크의 역사(Historia Roderici)>에는 산초 2세의 사인이 암살이었다는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았기에, 많은 학자들은 산초 2세가 암살당했다는 이야기의 신빙성을 의심하며, 그가 공방전을 치르던 중 전사했거나 병에 걸려 죽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후대의 많은 전승과 연대기에는 알폰소 6세를 산초 2세 암살 사건의 배후라고 지목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설령 산초 2세가 암살당했다고 해도 당시 톨레도에 멀리 망명한 그가 산초 2세를 처단하는 데 관여하기 어렵다며, 사모라의 우라카가 배후라는 이야기가 더욱 그럴듯하다고 본다. 일각에서는 우라카가 알폰소 6세와 비밀 협의를 하고 산초 2세를 암살한 뒤 알폰소 6세를 왕으로 옹립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없다.

산초 2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알폰소 6세는 기존에 맡고 있던 레온 왕국에 더해 형이 군림했던 갈리시아-포르투갈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을 겸임했다. 13세기 후반에 카르데냐 수도사들이 작성한 연대기인 <카르데냐의 전설(Cardeña Legend)>에 따르면, 엘 시드는 모두가 보는 광장으로 알폰소를 부른 뒤 성경에 손을 얹고 자신이 형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만인에게 발표하라고 했다. 알폰소는 엘 시드의 지시에 따른 뒤 카스티야 국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로데리크의 역사> 등 신뢰성이 높은 사료들에서는 이 이야기가 전혀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 일화가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본다.

한편, 부르고스에 투옥되었다가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기로 하고 풀려난 후 세비야의 타이파 알 무타미드의 궁정으로 망명했던 가르시아 2세는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가 서로 전쟁을 벌이느라 자신에게 신경쓰지 못하는 틈을 타 세비야 타이파의 후원을 받으며 갈리시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1073년 2월 13일 자신과 만나서 협상하자는 알폰소 6세의 제의를 따랐다가 알폰소 6세가 파견한 군대에 체포된 뒤 루고 성에 투옥되어 17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090년 3월 22일에 사망했다. 이리하여 알폰소 6세는 레온, 카스티야, 갈리시아, 포르투갈의 유일한 군주가 되었다.


2.3.3. 알폰소 6세[편집]


알폰소 6세는 아버지의 왕국을 재통합한 뒤 망명 기간 동안 자신을 보호했던 톨레도의 타이파 알 마문과 굳건한 동맹을 맺고, 그와 함께 그라나다 토후국을 공격해 타격을 입힌 뒤 주변의 타이파들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상당량의 공물을 받았다. 또한 클뤼니 대수도원과의 우호 관계를 증진하기 위해 산 이시드로 데 두냐, 산티아고 데 아스투딜로, 산 후안 데 에르메데스 데 세라토 등 여러 수도원 건립을 허가했으며, 연간 2,000 디나르를 클뤼니 대수도원에 기부했다. 여기에 더해 클뤼니 수도원장 위그의 친척인 콩스탕스와 결혼했으며, 이후에도 새 아내를 정할 때마다 클뤼니 대수도원의 조언을 받았다.

그러던 1076년 6월 4일, 팜플로나 왕국의 국왕 안초 4세가 나바라 마을 인근의 페날렌에서 사냥하던 중 형제 라몬 가르세이츠가 고용한 암살자가 내지른 단검에 찔려 협곡 아래로 굴러 떨어져 사망했다. 라몬 가르세이츠는 팜플로나 왕국의 새 국왕이 되려 했지만, 귀족들이 형제를 살해한 그를 왕으로 받들기를 거부하자 사라고사 궁정으로 도주했다. 알폰소 6세는 이 때를 틈타 팜플로나 왕국으로 쳐들어가 비즈카이아, 기푸스코아 등 여러 영토를 빼앗아갔고, 아라곤 국왕 산초 라미레스는 팜플로나 귀족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팜플로나 국왕을 겸임했다. 1077년, 알폰소 6세는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를 자칭했다.

이 무렵, 알폰소 6세의 동맹자였던 알 마문은 코르도바에서 독살당했고, 뒤이어 톨레도 타이파가 된 알 카디르는 톨레도 시에 대한 통제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1079년 바다호스의 타이파인 알 무타와길 이븐 알 아프타스가 톨레도 타이파국을 향한 공세를 개시해 톨레토 타이파국이 점유하고 있던 코르도바 등 남쪽 영토를 빼앗았다. 알 카디르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알폰소 6세는 일단 엘 시드를 세비야로 보내 그들과 동맹을 맺고 바다호스 타이파국을 협공하는 방안을 모색하게 했다.

그런데 엘 시드는 그라나다 타이파국이 세비야를 침공하자 다른 카스티야 기사들과 함께 세비야와 손잡고 카브라 전투에서 그라나다군을 격파했다. 이때 그라나다군에 용병으로 고용되었던 가르시아 오르도녜스 백작과 다른 카스티야 귀족들은 포로로 잡혀 3일 동안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그 후 엘 시드는 군대를 이끌고 그라나다를 공격해 약탈을 자행한 뒤 귀환했다. 엘 시드가 허락 없이 타이파들간의 전쟁에 뛰어들고 카스티야 귀족들을 포로로 잡았다는 소식을 접한 알폰소 6세는 격분해 1080년 5월 8일 엘 시드를 추방했다.

1080년, 알 카디르가 톨레도 시민들의 반란으로 축출되었고 알 무타와킬이 톨레도에 입성하여 자기 영지로 삼았다. 이에 알폰소 6세는 알 카디르를 복위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바다호스 타이파국과의 전쟁을 감행했다. 1081년, 알폰소 6세는 마드리드와 탈라베라를 공략하고 에스칼로나에 요새를 건설했다. 1082년에는 코루체를 공략하고 알 카디르를 그곳에 안착시킨 뒤 톨레도를 압박했다.

이 무렵, 사라고사 타이파국에 속한 레우데 데 하이온 성채의 총독인 알부파크(Albufac)는 사라고사 타이파 알 무타만( Al-Mutaman)에 대항하는 알 무자파르(Al -Muzáffar)를 지지했다. 그는 알폰소 6세의 지원을 받아야만 승리할 수 있다고 여기고, 알폰소 6세에게 자신을 도와주면 이 요새를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루에다 데 하이온 성채는 하이온 강 계곡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알폰소 6세는 이를 받아들여 요새로 출진했다. 그러나 얼마 후 알 무자파르가 사망하자, 알부카프는 알 무타만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하고 기독교인들에게 요새를 내주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1083년 1월 6일, 알폰소 6세가 이끄는 군대가 루에다 성채에 입성했다. 이때 알부파크가 돌연 성문을 닫고 성안에 들어온 기독교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로 인해 산초 가르시아, 라미로 데 팜플로나, 곤살로 살바도레스 등 유력 귀족들이 살해되었다. 당시 후방에 있어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알폰소 6세는 격분해 사라고사와 전면전을 벌이려 했다. 하지만 알 무타만의 부하로 지내던 엘 시드가 "이 일은 알부파크가 타이파의 지시를 받지 않고 무단으로 벌인 짓이니 용서해달라고 청했고, 알폰소 6세는 엘 시드의 중재 아래 알부파크를 처형하고 배상금을 받고 루에다 요새를 넘겨받는 대가로 사라고사와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했다.

1084년 가을, 알폰소 6세는 톨레도 남쪽에 진영을 세워 톨레도를 지속적으로 괴롭히게 한 뒤 본국에 귀환했다가 1085년 3월 주력군을 이끌고 톨레도로 진군했다. 이후 2개월간 이어진 공방전 끝에, 주변 타이파들로부터 어떠한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톨레도 시민들은 그해 5월 6일에 생명, 재산, 자유 및 종교적 표현에 대한 보장을 약속받고 항복했다. 그는 "톨레도의 국왕"이라는 칭호를 추가하는 한편, 알바르 파네스에게 알 카디르가 발렌시아의 타이파가 되도록 발렌시아를 압박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면서 본인은 사라고사가 공물 지불을 중단했다는 이유를 들어 사라고사로 쳐들어가 1086년 봄 도시를 포위했다. 그해 3월 초 발렌시아는 알바르 파네스의 압박에 굴복하여 알 카디르를 타이파로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톨레도를 완전히 장악하고 발렌시아에 속국 군주를 세우는 데 성공한 알폰소 6세는 자신을 "두 종교의 황제"라고 칭했다. 그는 정복지의 무슬림들이 기꺼이 복종하게 하게 위해 그들의 재산을 존중하는 것 외에도 모스크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톨레도 대주교로 부임한 베르나르드 데 세디락은 왕의 뜻을 거부하고 모스크를 대성당으로 개조했다. 또한 알폰소 6세는 현지 기독교인들의 언어와 관습을 존중해야만 그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여겼기에, 새로 정복한 영토에 사는 주민들에게 라틴어와 로마 교회식 예배를 강요하라는 교황청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오 7세우르바노 2세로부터 강한 압박을 받자, 그들의 지원을 얻어낼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들의 뜻대로 이베리아 교회의 예배 방식을 로마 교회식으로 통합하고 오직 라틴어만 사용하게 했다.

알폰소 6세가 톨레도를 공략하고 발렌시아를 복속시키는 등 이베리아 반도 내 타이파국들을 상대로 강력한 압박을 행사하자,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군주들은 위기의식을 강하게 느꼈다. 급기야 카스티야군에게 포위된 사라고사의 타이파 알 무타미드는 모로코, 세네갈 등지를 장악한 무라비트 왕조의 에미르 유수프 이븐 타슈핀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유수프는 군대를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알헤시라스에 상륙했다. 이후 세비야로 진군해 세비야, 말라가 등 각지의 타이파들이 이끌고 온 군대와 합세한 뒤 바다호스로 행진했다.

알폰소 6세는 북아프리카에서 무슬림군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사라고사 포위를 풀고 발렌시아에서 군대를 소집하는 한편, 아라곤 국왕 산초 라미레스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이후 바다호스로 진군한 그는 1086년 10월 23일 사그라하스 또는 잘라카에서 유수프의 군대와 마주쳤다. 기독교측 기록에 따르면, 알폰소 6세는 레온과 카스티야 기병 1,500명을 포함해 약 2,500명의 병력을 이끌었으며, 이중 750명은 기사였다고 한다. 반면 무슬림측 사료에 따르면 6만에서 8만에 달했다고 한다. 유수프의 군대 규모는 3배에 달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규모는 기록이 미비해 불분명하다.

유수프는 전투를 개시하기 전에 "이슬람으로 개종하거나 조공을 바치거나 전투를 벌이는 것 중 하나를 택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알폰소 6세는 전투를 벌이겠다고 답한 뒤, 아라곤 왕국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전투를 미루자는 부하들의 제안을 뿌리치고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전투 초반엔 기독교군이 강력한 돌격을 감행해 많은 적을 사살했지만, 유수프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적절히 활용해 기독교군을 포위하면서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알폰소는 정강이뼈에 큰 상처를 입고 패주했고, 500명의 전사만이 목숨을 건진 채 왕의 뒤를 따라갔다.

유수프와의 전투에서 완패한 알폰소 6세는 톨레도에 돌아가 수성전을 준비했지만, 유수프는 본국에 있던 아들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후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부 기병대만 남기고 북아프리카로 돌아갔다. 일단 한시름을 놓게 된 그는 1086년 말 또는 1087년 초에 엘 시드와 화해하고 카스티야 왕국에 복귀시켰다. 이후 엘 시드에게 왕국의 동쪽 국경지대를 지키게 했고, 알바르 파네스에게 발렌시아와 톨레도 사이의 방위를 맡겼으며, 페드로 안수레스에게 서쪽 국경 방위를 맡겼다.

알폰소 6세는 유럽 각국과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이베리아 반도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해달라고 호소했다. 십자군 선포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부르고뉴의 레이몽과 앙리(엔히크 드 보르고냐) 등 부르고뉴 공국 출신 인사들이 상당수의 병사들을 이끌고 이베리아 반도에 진입했다. 그들은 1086년 또는 1087년에 투델라 공방전을 치렀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한편 1087년 또는 1088년에 갈리시아에서 루고 성에 갇힌 가르시아 2세의 복위를 노린 갈리시아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알폰소 6세는 이를 순조롭게 진압하고 갈리시아 지역의 주교 7명 중 2명을 해임하는 등 갈리시아 통치 체계를 개편했다.

1088년 유수프가 두번째로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와서 알레도를 포위했다. 그러나 사라고사 타이파 알 무타미드가 유수프가 이베리아 반도를 자신의 수중에 넣으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고 여기고 포위된 수비대에 보급품을 은밀히 공급했고, 이로 인해 알레도는 쉽사리 함락되지 않았다. 결국 알레도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한 유수프는 탈라베라 데 라 레이나와 마드리드를 일시적으로 공략했지만 과달라하라에서 격퇴당하자 코르도바로 물러났다가 북아프리카로 돌아갔다. 그 후 알폰소 6세는 타이파들을 자기 편으로 회유하고자 노력했고, 유수프를 경계하던 그라나다와 사라고사 등 여러 타이파들은 알폰소 6세에게 공물을 바치는 대가로 그의 보호를 받기로 했다. 그러나 세비야 에미르는 공물 납부를 거부했고, 카스티야군이 압박을 가하기 위해 공세를 가해오자 유수프에게 재차 구원을 요청했다.

1090년 6월, 유수프는 세 번째로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했다. 그는 타이파들이 기독교 군주에게 복종하는 등 종교적으로 해이해지고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고 주장하며, 교조적인 종교학자들의 지지를 명분삼아 타이파들을 공격했다. 그 결과 그라나다 (1090년), 세비야 & 알메리야 (1091년), 알리칸테 (1092년), 바다호스 (1094년) 등의 타이파들이 모조리 축출되고 무라비트 왕조가 이 도시들을 직할 통치했다. 알폰소 6세는 타이파들을 복위시키기 위해 유수프와 전쟁을 벌였지만 모든 전선에서 실패했다. 동쪽 방면에서는 제노바 함대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토르토사 공략에 실패했고, 남쪽에서는 발렌시아의 타이파 알 카디르가 반란으로 축출되었으며, 서쪽에서는 바다호스-카스티야 연합군이 유수프의 군대에게 연전연패해 리스본, 신트라, 산타렘 일대를 빼앗겼다. 오직 엘 시드만이 1094년 6월 발렌시아를 탈환하고 10월에 무라비트 왕조군을 격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096년 11월, 아라곤 국왕 페드로 1세가 우에스카를 포위 공격하던 중 우에스카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사라고사의 타이파 알 무스타인 빌라흐를 알코라즈 전투에서 격파했다. 이에 알폰소 6세는 봉신인 사라고사를 돕기 위해 친히 그곳으로 향했다. 유수프는 이 때를 틈타 알폰소 6세가 자리를 비운 톨레도로 쳐들어갔다. 알폰소 6세는 황급히 군대를 돌려 1097년 8월 15일 콘수에그라에서 유수프를 저지했다. 이어진 전투에서 기독교 전사들이 적 보병 대열을 돌파했지만, 기병으로 구성된 무라비트 양익이 기독교인들을 포위섬멸했다.

알폰소 6세는 콘수에그라 성으로 도피한 뒤 수백 명 밖에 안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압도적인 수로 몰아붙이는 적에 맞서 항전했다. 당시 성채에는 물과 식량이 거의 없었지만, 왕이 성벽 위에 몸소 나아가 사력을 다해 싸우는 것을 목격한 병사들은 전의를 끌어올리며 침략자에 맞서 싸웠다. 유수프는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8일 동안 성채를 공략하지 못하자 적 지원군이 도착할 것을 우려해 철수했다.

그 후 알폰소는 군대를 재건하고 국경 지대의 방비를 강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지만, 1099년 6월 유수프가 재차 대군을 이끌고 톨레도로 쳐들어왔을 때는 군대 재건이 덜 된 상태였기에 속절없이 밀려났다. 무슬림군은 톨레도를 지키던 성채 대부분을 공략했고, 1100년에 톨레도를 포위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하자 주변 지역을 철저히 약탈하고 돌아갔다. 이제 카스티야 왕국은 톨레도 남쪽 지역을 모조리 상실했고, 톨레도는 국경 도시가 되어버렸다. 알폰소 6세는 이에 대처하기 위해 1101년 살라망카와 아빌라에 요새를 새로 세워서 톨레도를 지키게 했고, 사위 엔히크 드 보르고냐에게 톨레도 수비를 맡겼다.

1102년 무라비트 왕조군이 발렌시아로 쳐들어왔다. 당시 발렌시아를 지키던 엘 시드는 1099년에 무슬림군과 싸우다 전사했고, 정부(情婦) 히메나가 발렌시아를 다스렸다. 히메나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알폰소 6세는 즉시 군대를 보냈다. 양측은 쿨레라 전투에서 막심한 손실을 입고 돌아갔다. 하지만 알폰소 6세는 적의 영역 주변에 튀어나온 형국인 발렌시아를 지키는 건 무리라고 여기고 히메나를 설득해 발렌시아에서 철수하게 했다. 기독교인들은 3~4월에 발렌시아를 파괴한 뒤 철수했고, 무라비트 왕조군은 5월에 발렌시아에 입성했다. 이렇듯 기독교인들이 갈수록 수세에 몰리자, 사라고사 타이파국은 알폰소 6세에게 더 이상 공물을 납부하지 않고 유수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발렌시아를 상실하면서 동쪽 국경 지대에 대한 압박이 가중되자, 알폰소 6세는 1104년 7월 메디나 셀리를 공략한 뒤 이곳을 요충지로 삼아 동쪽 국경을 지키게 했다. 이후 1104~1106년에 안달루시아 일대를 여러 차례 공격해 무슬림들에게 타격을 입혔다. 1108년 코르도바 총독이자 유수프의 아들인 타밈의 군대가 우클레스에 쳐들어왔다. 고령의 나이에 말을 타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진 알폰소 6세는 왕위 계승자로 지명한 아들 산초 알폰세스에게 군대를 맡겼다. 그러나 1108년 5월 30일 우클레스 전투에서 기독교군이 또다시 참패했고 산초 알폰세스는 전사했다. 알폰소 6세는 급히 군대를 수습한 뒤 무슬림군의 추가 공세에 대처하기 위해 남쪽 국경으로 향했지만, 무슬림군이 의외로 공세를 더 이어가지 않자 톨레도로 돌아갔다.

알폰소 6세는 생전에 여러 아내를 두었지만 우라카 외에는 자식을 보지 못했고, 정부로 삼은 여인들로부터 두 딸 엘비라, 테레사 데 레온를 두었다. 그는 클뤼니 수도원장 위그의 설득에 따라 정실 아내로부터 얻은 우라카를 부르고뉴의 레이몽과 결혼시키고 두 사람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왕위를 물려받게 했다. 또한 포르투갈 백작이 될 엔히크 드 보르고냐와 정부로부터 얻은 테레사의 결혼을 주선해, 그가 차기 후계자를 보좌하게 했다.

그러던 1093년, 알폰소 6세의 정부 중 한 명인 자이다가 아들 산초 알폰세스를 낳았다. 그는 친아들이 왕위를 물려받게 해주기로 마음먹고, 산초 알폰세스를 합법적인 아들로 삼았다. 그러나 1105년 부르고뉴의 레이몽과 우라카 부부가 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를 낳으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자이다와 그녀를 지지하는 귀족들은 산초 알폰세스가 성년에 가까우니 후계자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우라카와 부르고뉴 측 인사들은 알폰소 6세의 합법적인 자식은 오로지 우라카 뿐이며 그녀의 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야말로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알폰소 6세는 이 문제를 놓고 고심한 끝에 1107년 5월 레온에서 열린 왕실 회의에서 15살이 된 산초 알폰세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해 9월 레이몽이 사망한 후, 알폰소 6세는 딸 우라카를 갈리시아의 단독 영주로 삼고 알폰소 라이문데스를 갈리시아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리하여 후계 구도가 정해지는 듯했지만, 1108년 5월 30일 우클레스 전투에서 산초 알폰세스가 전사해버리면서 일이 어그러졌다.

알폰소 6세는 남쪽 국경으로 가서 무슬림의 추가 공세에 대한 방비를 수행한 뒤 톨레도로 귀환한 후 귀족들을 소집한 뒤 우라카가 자신의 뒤를 이어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고 통보했다. 그러면서 우라카를 재혼시킬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여러 후보가 우라카와 결혼하러 나섰는데, 많은 귀족과 성직자들은 라라 가문의 우두머리이자 알폰소 6세의 측근인 페드로 곤살레스 데 라라 백작이 적합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알폰소 6세는 신하였던 자가 자기 딸을 밀어내고 왕권을 행사할 것을 우려했고, 레온 귀족들과 카스티야 귀족 중 한 명을 택하면 다른 쪽이 반발할까 걱정했다.

알폰소 6세는 고심 끝에 아라곤 국왕 알폰소 1세를 딸의 결혼 상대로 낙점했다. 알폰소 1세는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 우라카와 같은 신분이고, 군사적 역량이 출중하고 용맹해서 무슬림들의 침략으로부터 레온과 카스티야 왕국을 거뜬히 지켜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 결혼에 대한 반대 여론이 상당했다. 우라카가 첫번째 남편 레이몽과 결혼한 뒤 산티아고로 돌아갔을 때 함께 했던 부르고뉴 출신의 프랑스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이 결혼으로 인해 약화될 것을 우려했고,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 역시 매사에 엄격하다는 평을 받던 아라곤 군주를 섬기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부르고뉴 출신 성직자들은 교황 파스칼 2세에게 알폰소 1세와 우라카는 팜플로나 왕국의 선왕 안초 3세의 증손자이니 근친상간이므로 결혼을 무효화해달라고 청원했다. 여기에 지난날 우라카에게 구혼했지만 알폰소 6세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했던 카스티야 백작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은 우라카가 알폰소와 결혼한 후에도 그녀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이렇듯 반대가 심했지만,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던 알폰소 6세는 이베리아 반도 기독교 세력이 승승장구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군사적 역량을 갖춘 알폰소 1세 아래 통합되어야 한다고 믿었기에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성사시켰다.

결국 알폰소 1세와 우라카는 레온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 이때 우라카와 알폰소는 결혼 계약서를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알폰소는 우라카에게 상당한 땅을 양도하며, 파문이나 친족 관계로 인해 그녀를 버리지 않곘다고 약속했다. 또한 양자는 상대방의 영토에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알폰소가 죽으면 우라카가 알폰소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그의 영지를 물려받고 우라카가 먼저 죽으면 역시 자식들이 그녀의 영지를 물려받기로 했다. 하지만 알폰소와 우라카 사이에서 자식을 얻지 못할 경우, 우라카가 이전 결혼에서 낳은 알폰소 라이문데스가 두 사람의 영지에 대한 상속권을 가지기로 했다. 그러나 테레사 데 레온과 엔히크는 자신들이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것에 불만을 품고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고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2.3.4. 내전에 휘말린 왕국[편집]


우라카와 알폰소 1세의 결혼을 성사시킨 직후인 1109년 7월 1일, 알폰소 6세가 톨레도에서 사망했다. 딸 우라카가 레온과 갈리시아, 그리고 카스티야의 여왕에 등극했고, 알폰소 1세와 공동으로 전히스파니아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콤포스텔라의 대주교 디에고 헬미레스와 알폰소 라이문데스의 가정교사를 맡던 트라바 백작이 귀족들을 선동해 알폰소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알폰소 1세는 아라곤과 팜플로나 군대를 이끌고 레온으로 진군해 몬테로소 성에서 반란군을 물리치고 주동자들을 체포해 사형에 처했다. 알폰소 1세는 이에 더해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아라곤과 팜플로나 귀족, 기사들에게 레온과 카스티야의 여러 요새와 성채를 접수하게 했으며, 1110년 내내 우라카의 영지인 레온과 카스티야를 돌며 공물을 받았다. 일부 학자들은 이 시기에 알폰소 1세가 발바네라, 산토 도밍고 데 라 칼하다, 산살바도르 데 오냐 등 여러 수도원에 기부한 것에 대해 그들의 지지를 받아내어 우라카를 따르는 귀족들을 견제하게 하려는 수단이라고 추정한다.

우라카는 남편의 이같은 행보에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라 여기고 분노했다. 그녀는 비스카야와 하로의 영주이자 가르시아 오르도녜스의 후계자인 디에고 로페스 데 하로에게 특권을 부여해 알폰소 1세에 적대하는 세력에 힘을 실어줬다.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은 귀족들은 알폰소 1세가 자기들 영지 내에 있는 도시들에게 특권을 부여하고 자기들에게 바쳐야 하는 세금을 면제해주는 것에도 반감을 품고 있던 터라, 우라카의 지원에 반색하며 알폰소 1세를 몰아내기 위한 음모를 본격적으로 꾸몄다.

사라고사 토후국의 타이파 알 무스타인은 알폰소 1세가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이 자신에게 복종시키는 문제에 전념하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군대를 일으켜 타우스테를 탈환하고 에브로 강 북쪽으로 진격했다. 이에 알폰소 1세는 즉각 대응에 나섰고, 1110년 1월 24일 발티에라 전투에서 무슬림군을 궤멸시키고 알 무스타인을 처단했다. 이후 사라고사 토후국은 쇠락했고, 그동안 사라고사 토후국의 지배를 받았던 도시들 상당수가 알폰소 1세의 봉신을 자처했다.

발티에라 전투의 승리로 알폰소 1세의 위세는 한층 더 강력해졌지만, 그와 우라카와의 갈등은 갈수록 심해졌다. 레온, 카스티야, 갈리시아에서 집필된 연대기들은 알폰소 1세가 우라카를 손과 발로 허구헌날 구타했다고 서술했다. 이 연대기들은 알폰소 1세에게 반감을 품은 인사들이 저술했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우라카와 알폰소 1세 부부간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에 1110년 여름 두 사람의 결혼은 근친상간이니 인정하기 어렵다는 교황청의 메시지가 도착하자, 카스티야 백작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을 비롯한 반 알폰소 세력은 우라카의 친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를 레온과 카스티야의 왕으로 받들고 우라카와 알폰소의 결혼을 무효로 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했다.

알폰소 1세는 이에 대응해 우라카를 긴급 체포한 뒤 그녀의 정신 상태가 통치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며 아라곤의 엘 카스텔리아 성채에 투옥시킨 뒤 레온과 카스티야의 반란자 토벌에 나섰다. 그는 몇 주 만에 팔렌시아, 부르고스, 오스마, 사하군, 아스토르가, 오렌세 등 레온 왕국의 여러 요충지를 장악했다. 그러나 점령지에서 약탈을 자행하는 바람에 민중들이 분노해 곳곳에서 봉기를 일으키면서 진군이 지연되었다. 그 사이에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은 엘 카스텔리아 성채를 습격해 우라카를 석방시킨 뒤 사하군 수도원에 이송시켰다가 다시 카스티야의 수도 부르고스로 데려왔다.

이 소식을 접한 알폰소는 군대를 돌려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의 영지가 있는 카스티야 남부로 진격했다. 1111년 4월 13일 교황에게 두 사람의 혼인 무효를 요청했던 톨레도 대주교 베르나르도를 축출한 뒤 아라곤 수비대를 톨레도에 배치했다. 이 무렵 포르투갈 백작이며 알폰소 6세의 또다른 딸인 테레사 데 레온의 남편인 엔히크 드 보르고냐가 우라카를 돕기 위해 진군하자, 알폰소는 엔히크에게 사절을 보내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일대를 가지게 해줄 테니 자기 편을 들라고 설득했다. 엔히크는 이에 혹해 알폰소를 지지하기로 했다.

1111년 9월 17일, 알폰소 라이문데스가 우라카로부터 갈리시아 왕위만 먼저 물려받았다. 1111년 10월 15일, 엔히크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이 카데스피나 전투에서 고메스 곤살레스를 처단했다. 우라카는 패전 소식을 듣자 부르고스에서 탈출한 뒤 또다른 지지자인 페드로 곤살레스 데 라라와 합류했다. 그 후 우라카 측은 엔히크에게 "우리 편을 들면 카스티야의 일부 영토와 레온의 사하군 북쪽에 있는 사모라, 케이아 등지를 추가로 갖게 해주겠다"고 제안했고, 엔히크는 이를 받아들여 우라카와 연합하여 알폰소를 공격했다. 알폰소는 엔히크의 갑작스러운 배신에 상당한 피해를 입고 페냐피엘로 후퇴한 뒤 엔히크와 우라카 연합군의 포위공격을 받았지만 끝까지 버텨냈다.

얼마 후, 우라카는 엔히크가 더 많은 영토를 달라고 요구한 것에 반감을 품고 알폰소 1세와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엔히크가 자모라를 접수하기 위해 출진한 사이, 우라카는 알폰소 1세와 내통해 팔렌시아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알폰소는 즉시 팔렌키아로 진군하다가 사하군에서 우라카 및 엔히크의 아내 테레사와 마주쳤다. 사하군은 곧 함락되었고, 테레사는 알폰소 1세의 마수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했다. 한편 우라카는 남편과 잠시 합류했다가 그의 위세를 두려워한 나머지 갈리시아 산맥으로 도피했다.

한편, 우라카의 지지자인 페드로 프루엘라스 데 트라바 백작과 대주교 디에고 헬미레스가 조직한 군대가 우라카의 어린 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와 함께 레온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그들은 알폰소가 1110년 원정 당시 공략했던 루고를 탈환한 뒤 수비대를 배치한 후 레온으로 계속 진군했다. 알폰소는 이 소식을 듣자 군대를 돌려 비아당고스 전투에서 궤멸시켰다. 페드로 프루엘라스는 체포되었고, 디에고 헬미레스는 어린 알폰소를 데리고 포르티 카스텔로 오르질리오네(forti Castello Orzilione)로 도주해 그곳에 숨어있던 우라카와 합류했다.

우라카가 갈리시아 산맥 깊숙히 숨은 뒤, 알폰소 1세는 레온, 카스티야 등지를 돌며 지지자들을 규합하려 했다. 그러나 1112년 5월 아스토르가로 찾아갔다가 엔히크의 갑작스런 급습을 받았다. 짧은 공성전 끝에 아스토르가가 함락되었고, 그는 케리온 강변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엔히크는 아스토르가 공성전 도중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아스토르가에서 사망했고, 포르투갈군은 본국으로 물러났다. 이후 우라카와 알폰소 1세는 1112년 여름 동안 휴전을 맺고 양자가 동의할 수 있는 평화 협약을 맺으려 애썼지만, 서로의 입장차가 커서 협의에 실패했다. 알폰소 1세는 어떻게든 레온과 카스티야를 장악하고자 아라곤 수비대들을 곳곳에 배치했지만, 현지인들의 비협조로 인해 좀처럼 통제하지 못한 데다 아라곤 귀족들마저 본국 귀환을 종용했다.

1112년 9월, 알폰소와의 협상이 무익하다고 여긴 우라카는 전쟁을 재개했다. 그녀는 케아 성을 공략하는 것으로 시작해 케리온 강 서쪽의 카스티야 영역을 탈환했다. 부르고스 남쪽의 두에로 상류 영토 역시 우라카의 권위를 받아들였다. 알폰소 1세는 점령지를 지키기 위해 다수의 병력을 곳곳에 배치했기 때문에 그녀의 공세를 저지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로 인정받기 위해 우라카와의 결혼을 이어가려 했으며, 교황 특사의 중재 제의를 거절했다.

1113년, 우라카는 갈리시아 귀족군과 함께 또다시 공세를 개시해 사하군과 카리온을 공략하고 부르고스를 포위했다. 알폰소 1세는 이에 맞서 라 호야로 진군해 반란 세력을 제압했고, 4월에 로스 아르코스로 진군해 부르고스에 포위된 지지자들을 도우려 했으나 실패했다. 여기에 남쪽에서는 알바르 파녜스가 이끄는 반란군이 톨레도를 공략했다. 이렇듯 기독교도들이 내전을 일삼자, 사라고사 토후국은 이 때를 틈타 반격을 개시했다. 무슬림군은 오레하 성을 공략하고 톨레도 주변 시골 지역을 약탈했다.

1113년 6월, 우라카는 부르고스를 손에 넣은 뒤 무슬림군의 위협에 시달리는 톨레도 구원에 착수했다. 이후 양자는 무슬림에 맞서 단합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1114년 팔렌시아에서 열린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우라카와 알폰소 1세는 교황청의 뜻에 따라 결혼을 무효화하기로 했고, 알폰소 1세는 아라곤과 팜플로나의 왕으로 군림하되 레온과 카스티야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바스크, 라 리오하, 부르고스, 소리아, 세고비아, 과달라하라, 및 툴레도 등 자신이 일전에 점령했던 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고, 우라카와 결별한 후에도 전히스파니아의 황제 칭호를 포기하지 않았다. 우라카 역시 사망할 때까지 전히스파니아의 여제를 자처했다.

1116년, 우라카는 갈리시아의 왕으로 세워둔 아들 알폰소에게 두에로 강 남쪽 땅과 톨레도 일대의 통치권도 양도했다. 젊은 알폰소는 이때부터 카스티야를 여전히 자신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탈취하려 드는 알폰소 1세를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라카의 배다른 누이 테레사가 그녀에게 반기를 들었다. 1116년, 테레사는 코임브라를 무슬림으로부터 지켜내는 데 성공한 뒤 교황 파스칼 2세로부터 "용감한 여왕"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러자 그녀는 이를 근거삼아 자신을 "알폰소의 딸이자 신에게 선택된 자"라고 명시한 문서를 발간했으며, 1117년부터는 아예 대놓고 여왕이라고 내세워서 일부는 포르투갈의 첫번째 군주로 보기도 한다.

우라카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테레사를 응징하기 위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군대를 모집했다. 이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주교 헬미레스와 산티아고 시의회가 세금 수취 문제로 갈등을 벌이자, 그녀는 이를 중재하려 했다. 그러나 불리한 처우를 받을 것을 두려워한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대성당의 탑에서 우라카 일행을 포위했다. 그녀는 폭도들 앞으로 끌려간 뒤 옷이 찢겨지고 돌에 얻어맞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다 군대가 투입되어 폭도들을 해산시키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그녀는 자신에게 수모를 준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했다. 이후 원정을 감행했지만 오히려 테레사의 추종자들에 의해 소브로소 성에서 포위되었다가 가까스로 탈출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철수했다. 다만 이 원정에서 토로와 사모라가 그녀의 수중에 넘어갔다.

이후 테레사에 대한 원정을 취소하고 레온으로 귀환한 우라카는 때마침 아들이 톨레도에 입성해 알폰소 1세의 세력을 축출한 덕분에 카스티야에서의 입지가 강해졌다. 이에 아들 알폰소가 후임 왕이 되는 것을 보장하는 탐브레 협약에 서명했다. 1118년, 우라카는 자치권을 무제한적으로 누리면서 알폰소 1세와 내통하는 귀족들을 제압하기 위해 카스티야 동부로 진군했다. 그해 6월에 세고비아에서 그녀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이후 갈리시아를 확고히 장악하고자 그곳으로 향하면서도 알 안달루스와 맞서는 톨레도 대주교에게 일부 병력을 보냈다.

1119년 1~3월, 우라카는 부르고스에 남아서 알폰소 1세의 대 무슬림 전쟁을 지원했다. 그러나 그녀의 전 집사 구테 페르난데스가 참여한 위험한 음모에 직면해야 했다. 구테 페르난데스는 우라카의 연인 페드로 곤살레스 데 라라 백작을 만실라 성에 잠시 가두고 레온에서 여왕의 지지자들과 시가전을 벌였다. 우라카는 이 반란을 가까스로 제압한 뒤 음모에 가담한 카스티야 귀족 여럿을 처벌하고 1119년 9월 알폰소 1세와 화해했다.

1120년, 우라카는 갈리시아로 진군한 뒤 그곳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페드로 프루엘라스의 추종자들을 헬미레스 주교와 함께 탄압했다. 그녀의 군대는 여세를 몰아 미뇨 강을 건너 테레사의 영지로 진입했다. 테레사는 레온-카스티아 연합군에게 참패한 뒤 브라가의 북동쪽에 있는 란호소 성에서 포위되었고, 우라카의 군대는 두오로 강 일대까지 평정했다. 그런데 이 일련의 성공에 취했기 때문인지, 우라카는 이 시점에서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녀는 디에고 헬미레스의 권세가 갈수록 커져 정책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행사하는 것이 거슬렸고, 장차 아들 알폰소를 등에 업고 자신을 정치에서 배제하려 들 거라고 의심했다. 결국 그녀는 1120년 7월 말에 아리아스 페레스를 통해 헬미레스를 카스트렐로에서 체포하여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권신이긴 했지만 그녀를 지금껏 따랐던 주교를 하루아침에 가둬버린 일은 심각한 후폭풍을 야기했다. 헬미레스의 추종자들이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여왕을 압박했고, 어머니가 자신을 해칠 지도 모른다고 여긴 알폰소는 산티아고 인근에 머물던 페드로 프루엘라스와 합세했다. 이로 인해 곤경에 처한 우라카는 얼마 후에 헬미레스를 석방했지만, 그로부터 빼앗은 영지와 성을 돌려주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헬미레스는 테레사와 그녀의 연인이 된 트레바 백작 페르난도 페레스의 편에 섰다. 그해 가을에는 주교를 체포하고 주교의 영지를 몰수했다는 소식에 진노한 교황 갈리스토 2세[4]가 우라카에게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1121년 봄, 우라카는 갈리시아로 행진한 뒤 헬미레스 주교와 프루엘라스 백작과 면담한 뒤 그들의 직위를 돌려주며 크리스마스 이전에 주교의 재산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두 사람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내전은 겨우 수습되었지만, 1121년 8월 사하군에서 개최된 의회에서 헬미레스의 지지자들과 여왕의 반대자들이 우라카를 몰아내고 알폰소를 새 왕으로 옹립하려 시도하는 등, 사건의 여파는 이어졌다. 게다가 여름에 아라곤의 알폰소 1세가 두에로 강 남쪽의 레온 왕국 영토인 올메도를 접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우라카는 테레사와 휴전을 맺기로 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1123년 3월 다시 갈리시아로 행차한 우라카는 헬미레스 주교와의 동맹을 갱신하는 대신 페드로 프루엘라스 백작과 그의 아들들을 체포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이후 남쪽으로 이동해 톨레도에 도착한 뒤 시구엔사를 향한 공세를 준비했다. 1124년 5월 25일, 헬미레스 주교가 우라카 여왕의 허락을 받고 산티아고에서 알폰소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1124년 여름, 테레사가 휴전을 파기하고 갈리시아로 쳐들어가 각지에서 약탈을 자행했다. 우라카는 이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테레사는 우라카가 사망할 때까지 지금의 포르투갈 북부와 갈리시아 일대를 석권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우라카는 1125년 늦봄에 아들과 갈리시아에서 마지막으로 대면한 뒤 카스티야로 떠나 말년을 보내다 1126년 3월 8일 리오 카리온 강변 살다냐에서 병사했다. 이리하여 히메네스 왕조는 단절되었고, 아들 알폰소 7세가 레온, 갈리시아, 카스티야 국왕에 선임되면서 보르고냐 왕조가 레온 왕국의 지배 가문이 되었다.


2.4. 보르고냐 왕조[편집]



2.4.1. 알폰소 7세[편집]


알폰소 7세는 왕위에 오른 직후 카스티야 왕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아라곤 국왕 알폰소 1세는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알폰소 7세가 자신이 무슬림과의 전쟁을 치르느라 바쁜 사이 카스티야 전역을 석권해버리자 현실을 받아들여 1128년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의 경계를 확정지은 타마라 평화협약을 체결했다.

알폰소 1세와 평화 협약을 맺은 뒤, 알폰소 7세는 우라카 치세 말년에 갈리시아를 침략하여 자기 영역으로 삼은 이모 테레사를 공격했다. 그의 군대는 포르투갈 백국으로 들어가서 그곳을 파괴한 뒤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은 뒤 테레사부터 자신을 주군으로 섬기게 한 후 레온으로 돌아가 1128년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3세의 딸 베렝겔라와 결혼했다. 그러나 1128년 6월 24일 상 마메데 전투에서 테레사의 아들인 아폰수 엔히크스가 알폰소 7세에게 굴복했던 어머니 테레사와 페드로 페르난데스 등 레온-카스티야 왕국군 장성들을 물리치면서, 알폰소 7세가 복속시켰던 포르투갈 백국이 또다시 독립했다. 아폰수 엔히크스는 1129년에 자신을 포르투갈 프린스라 선언하며 알폰소 7세에 대항했고, 1139년에는 아예 포르투갈 국왕을 칭했다.

1130년 바르셀로나 백작의 권세가 강해지는 것을 우려해 베렝겔라와의 결혼에 반대한 레온, 살라망카, 오비에도 주교들을 체포했다. 이에 귀족들은 대거 반발했고, 라라 백작이자 우라카 여왕의 애인이었던 페드로 곤살레스는 우라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페드로 페레스를 왕으로 옹립하고자 그들을 포섭해 반기를 들었다. 반란군은 한때 팔렌시아, 아스투리아스, 코얀사 등지에서 기세를 드높였지만, 오소리오 마르티네즈가 이끄는 정부군에게 패배했다. 알폰소 7세는 그해 6월에 팔렌시아를 공략하여 페드로 곤살레스를 축출하고 나머지 반란자들과 화해했다.

1134년 아라곤과 팜플로나 국왕 알폰소 1세가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는 자신이 팜플로나 대왕 안초 3세의 증손자이며 아라곤 왕국에도 상속권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아라곤과 팜플로나 귀족 모두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국왕을 독자적으로 세웠다. 그는 아라곤과 팜플로나 왕국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기 위해 1135년 5월 26일 레온 대성당에서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는 이 행사에서 처남인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았고, 팜플로나 국왕 가르체아 라미리츠, 톨로사 백작 알폰소 호르다네스, 가스코뉴 및 프랑스 남부의 여러 영주들, 우르겔 백작 에르멘골 6세, 루에다 데 하온의 영주이자 사라고사의 마지막 타이파 아브드 알 말리크의 아들 아흐메드 알 무스탄시르 사이프 알 다울라(자파둘라)도 행사에 참석했다. 그러나 아라곤 국왕 라미로 2세와 포르투갈 프린스 아폰수 1세는 참석하지 않았다.

이렇듯 아라곤 왕국과의 관계는 별로 좋지 않았지만, 1137년 바르셀로나 백작이자 그의 처남인 라몬 베렝게르 4세가 라미로 2세의 딸 페트로닐라와 결혼한 뒤 장인이 수도원에 은퇴한 뒤 아라곤 왕국의 통치를 주관하게 되면서 양국의 사이가 극적으로 호전되었다. 반면 포르투갈 왕국과의 전쟁은 이어졌다. 아폰수는 집권 이래로 포르투갈의 '프린스'를 칭하면서 알폰소 7세의 인정을 받고자 사절을 여러 차례 보냈다. 그러나 알폰소 7세가 그를 반역자로 간주하며 조금도 인정하려 들자 않자, 아폰수는 그가 주변 국가들과의 갈등을 매듭지은 후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 예상하고 선제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1137년, 그는 군대를 이끌고 갈리시아로 진격해 어머니의 옛 연인이었던 페드로 페르난데스 및 갈리시아 귀족들을 상대로 체르네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뒤 투이 등 일부 요새를 공략했다. 포르투갈과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었던 알폰소 7세는 어쩔 수 없이 투이 협약을 맺기로 했다. 이에 따르면, 아폰수는 전히스파니아의 황제 알폰소 7세의 충실한 친구가 될 것을 맹세했으며, 이번 전쟁에서 빼앗은 영토를 돌려주기로 했고, 무슬림 및 기독교 통치자와의 전쟁을 치르는 황제에게 군사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다. 한편 알폰소 7세는 그를 포르투갈 백작으로 인정하고 포르투갈을 다시 침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139년, 무라비트 왕조의 에미르 알리 이븐 유수프가 이끄는 무슬림군이 포르투갈로 쳐들어왔다. 아폰수는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을 이끌고 그들에 맞섰고, 그해 7월 25일 오우리케 전투에서 무슬림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그는 포르투갈 왕국의 건국을 선포하고 군대와 성직자들의 추대를 받아 포르투갈 초대 국왕에 선임되었다. 레온 왕국의 알폰소 7세가 이 소식에 격분해 아폰수를 참칭자라고 비난하자, 아폰수는 투이 협약을 깨고 갈리시아를 침공해 미뉴 강을 건너 발데베스 계곡의 여러 성채를 공략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알폰소 7세는 카스티야 백작들에게 나바라 국왕 가르체아 라미리츠를 방어하게 한 뒤 1140년 친히 대군을 이끌고 포르투갈로 출진해 진군로 주변의 마을들을 약탈하고 여러 성채를 함락했다.

아폰수는 즉시 역습을 가하여 적군 선봉장 라미루 프로일라스 백작을 격파하고 포로로 잡은뒤 발데베스 계곡에서 알폰소 7세와 본대와 대치했다. <황제 알폰소의 연대기>에 따르면, 양자는 펜하 다 레이하 성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는데, 포르투갈 진영이 좀더 높고 거친 지형에 자리잡았다. 이후 전투가 쉽게 결판나지 않고 양측의 여러 기사들이 생포되자, 포르투갈의 늙은 귀족들이 "기독교인끼리 무익한 전쟁을 이어간다면 무슬림들이 우리나라를 페허로 만들 것이니 이쯤에서 황제에게서 빼앗은 성들을 돌려주고 화친을 맺자"고 제안했다. 아폰수는 그들의 진언에 따라 알폰소 7세에게 휴전을 제안했고, 알폰소 7세 역시 희생이 갈수록 커지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기에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1143년, 알폰소 7세와 아폰수는 사모라 대성당에서 교황 대표 귀도 데 비코 추기경이 치켜보는 가운데 조약을 체결했다. 알폰소 7세는 아폰수가 포르투갈 국왕으로 군림하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고, 양자는 그동안 빼앗았던 영토를 돌려주기로 했다.

이후 레콩키스타에 전념하기로 한 그는 1138년 무라비트 왕조군을 격파한 것을 시작으로 1139년 오레자 요새를 공략했고 1142년에는 코리아를 공략했으며, 1144년에는 하옌과 코르도바를 점령했다. 여기에 알 안달루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모로코의 아틀라스 산맥 근처에서 발흥한 무와히드 왕조가 세력을 급격히 확장하면서, 무라비트 왕조는 급격히 몰락했다.

1145년 3월, 사라고사의 왕자 자파둘라는 알 안달루스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로 마음먹고 알폰소 7세의 지원을 받아 그라나다를 공략했다. 그러다가 무라비트 왕조의 알 안달루스 총독 이븐 가니야의 반격으로 그라나다를 빼앗기자 알폰소 7세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알폰소 7세는 지원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자파둘라는 카스티야군과 갈등을 벌인 끝에 그들과 전쟁을 벌이다 1146년 2월 5일 친칠라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에 알폰소 7세가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다가 이븐 가니야로부터 우베다와 바에자를 할양받고 충성 서약을 받은 뒤 철수했다.

카스티야 왕국의 권세가 갈수록 강해지자 위협을 느낀 메르톨라의 이븐 알 카시는 무와히드 왕조에 복속하며 원군을 요청했다. 무와히드 왕조의 지도자 아브드 알 무민은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1146년 5월 알헤시라스에 상륙했다. 무와히드군이 접근해오자, 이븐 가니야는 곧바로 무와히드 왕조에 항복했다. 이후 무와히드 왕조와 대치한 알폰소 7세는 1147년 알메리아 공략에 착수했다. 그는 이를 위해 나바라 왕국의 국왕 가르체아 라미리츠, 바르셀로나 백작이자 아라곤 왕국의 실권자 라몬 베렝게르 4세, 제노바 공화국 함대와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호소에 응한 프랑스 십자군의 지원을 받았다. 그 결과 그해 10월 알메리아 공략에 성공하면서, 카스티야 왕국은 처음으로 지중해 해상에 진출할 수 있었다.

1150년 11월 나바라 왕국의 국왕 가르체아 라미리츠가 사망하자, 알폰소 7세는 1151년 1월 27일 투딜렌에서 라몬 베렝게르 4세와 만나 나바라 왕국의 영역을 분할하기로 했다. 안초 6세는 아라곤과 카스티야 왕국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투딜렌 협약을 따르겠다고 맹세해야 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여동생 블랑카를 알폰소 7세의 장남인 산초와 결혼시킴으로써 알폰소 7세의 호의를 얻어내려 애썼다. 1153년 중반에는 소리아에서 알폰소 7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봉신 협약을 갱신했으며, 1157년 6월 2일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현재 팔렌시아)에서 알폰소 7세의 딸 산차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알폰소 7세는 1157년 중순에 라몬 베렝게르 4세와 레리다에서 만나서 나바라 왕국을 분할하기 위한 새로운 협약을 맺었다. 1157년, 무와히드 왕조가 알메리아를 습격해 순식간에 탈환했다. 알폰소 7세는 알메리아를 재정복하기 위해 원정에 착수했으나 실패하고 귀환하던 중 8월 21일에 사망했다.


2.4.2. 페르난두 2세[편집]


알폰소 7세는 생전에 큰 아들 산초 3세에게 카스티야 왕국을 물려주고, 작은 아들 페르난두 2세에게 레온과 갈리시아 왕국을 물려주겠다고 선언했다. 다만 레온과 갈리시아 왕국에 속해 있던 티에라 데 캄포스, 사하군, 아스투리아스 데 산티아나는 산초 3세에게 물려주기로 했다. 알폰소 7세 사후, 두 아들은 아버지의 생전 지시에 따라 영토를 분할했다. 1158년 5월 23일, 페르난두 2세와 산초 3세는 사하군 시에서 상호 원조 협약을 맺었다. 두 사람은 서로 힘을 합쳐 무슬림과의 전쟁을 이어가며, 알 안달루스를 정복한 후에는 니에블라에서 리스본까지 레온-갈리시아 연합 왕국이 차지하고 나머지 영토는 카스티야 왕국이 차지하기로 했다. 또한 둘 중 한 명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 다른 한 명이 형제의 영토를 관할하기로 했다.

1158년 8월, 산초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알폰소 8세가 3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라라 가문과 카스트로 가문의 인사들이 어린 왕을 대신하여 섭정했지만, 곧 최고 권력을 놓고 내전을 벌이면서 카스티야 왕국이 혼란에 빠졌다. 그는 이를 이용해 카스티야 왕국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야심을 품고 내전에 개입했다. 수세에 몰린 카스트로 가문의 가주 페르난도 로드리게스가 레온에 망명하자, 페르난두 2세는 그를 지원해 라라 가문과의 전쟁을 이어가게 했다. 여기에 1159년 카스티야 왕국을 안정시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대를 파견해 부르고스 시를 점거했다.

1160년 페르난도 로드리게스가 이끄는 카스트로 가문 추종자들은 바야돌리드 지방의 빌라브라마 마을 인근에서 벌어진 로브레갈 전투에서 페르난두 2세의 지원에 힘입어 누뇨 페레스 데 라라가 이끄는 라라 가문 추종자들을 격파하고 누뇨 페레스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장인 오소리오 마르티네스가 목숨을 잃는 등 막심한 피해를 입었고, 라라 가문은 여전히 알폰소 8세의 섭정직을 유지했다.

1160년 9월 카스트로 가문과 라라 가문간의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지만, 페르난도 2세는 페드로 로드리게스가 카스티야 왕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불허했다. 이에 분개한 페르난도 로드리게스는 기독교인과 무슬림인이 혼합된 군대를 이끌고 최근에 세워진 도시인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방문한 페르난두 2세를 포위했다. 페르난두 2세는 한때 목숨이 위험했지만, 살라망카와 사모라의 민병대가 구해주러 온 덕분에 포위망에서 벗어났다. 페르난두 2세는 페르난도 로드리게스와 곧 화해했고, 그를 쿠엘라르, 두냐스, 살라망카, 토로, 바야돌리드, 사모라의 총독으로 임명했다가 나중에는 아스투리아스와 베나벤테의 총독으로 선임했다.

1162년, 페르난두 2세는 카스티야로부터 톨레도를 무력으로 빼앗은 후 페르난도 로드리게스를 톨레도 총독으로 선임했다. 페르난두 2세에 대항할 여력이 없었던 라라 가문은 페르난두 2세가 톨레도와 세고비아를 자국의 영역을 삼는 것을 용인했다. 1164년 페르난도 로드리게스는 페르난두 2세의 지원에 힘입어 카스티야 왕국 깊숙이 진격해 그해 6월 또는 7월에 벌어진 우에테 전투에서 승리하고 적장인 만리케 페레즈 데 라라 백작을 전사시켰다. 그러나 라라 가문은 알폰소 8세를 호리타 데 로스 카네스로 피신시켰다가 다시 아빌라 시로 피신하면서 저항을 이어갔고, 페르난도 로드리게스는 알폰소 8세 확보에 실패하자 레온 왕국으로 돌아갔다.

1165년, 페르난두 2세는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1세의 딸 우라카와 결혼하고 평화 협약을 맺음으로써 선대 때부터 이어졌던 양국의 갈등을 종식하려 했다. 또한 이 시기에 라데스마와 사우다드 로드리고를 재건하고 주민들을 거주시키고 총독을 선임했다. 이에 과거에 라데스마 시를 소유했던 살라망카 주민들이 "우리의 땅을 우리의 동의 없이 빼앗아걌다"고 여기고 라데스마 총독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페르난두 2세는 이 소식을 듣자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반란군을 격파한 뒤 다시는 반역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내고 살라망카로 돌려보냈다.

아폰수 1세는 자국의 국경 인근에 있는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재건하는 것은 장차 그곳을 요새화해 포르투갈을 공격하려는 의도라고 의심했다. 그는 그 전에 선제 공격하기로 마음먹고, 1166년 아들 산슈 1세에게 군대를 맡겨 갈리시아를 침공하게 했다. 산슈 1세는 곧바로 갈리시아로 쳐들어가 여러 요충지를 공략했다. 여기에 무와히드 왕조가 알칸타라와 알부르케르케를 공략하며 톨레도를 위협하자, 페르난두 2세는 어쩔 수 없이 카스티야 왕국과의 전쟁을 끝내기로 했다. 1166년, 그는 라라 가문의 구성원들과 소리아에서 만나 톨레도를 카스티야 왕국에 돌려주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때 무슬림으로부터 톨레도 시를 방어하기 위해 우클레스 성채를 성전 기사단에 양도하기로 했다. 그는 나중에 카스티야 왕국 역시 아폰수 1세처럼 평화 협약을 깨뜨릴 것을 걱정해 나바라 왕국안초 6세와 투델라에서 만나서 알폰소 7세가 나바라 왕국으로부터 빼앗았던 영토를 되돌려주는 대가로 서로를 지원하기로 한 투델라 협약을 체결했다.

그리하여 카스티야 왕국과 화해한 페르난두 2세는 1168년 갈리시아로 달려가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포위 공격하던 포르투갈군을 급습해 격파했다. 하지만 아폰수 1세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 갈리시아를 침공해 투이 등 여러 성채를 공략하고 1169년에는 카세레스 시를 공격했다. 하지만 아폰수 1세는 곧 마음을 바꿔 일부 병력을 갈리시아에 남겨두고 무슬림의 지배를 받고 있던 바다호스 공략에 착수했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군의 전력이 분산되자, 페르난두 2세는 이 때를 틈타 군대를 끌어모아 갈리시아에 침투한 포르투갈군을 격파한 뒤 바다호스 공방전을 진두지휘하고 있던 아폰수 1세를 습격했다. 아폰수 1세는 급히 피신하려 했지만 도중에 낙마하는 바람에 다리가 부러진 채 사로잡혔다. 그 후 페르난두 2세는 바다호스를 마저 공략한 뒤 레온 왕국의 봉신 노릇을 하는 무슬림들에게 바다호스 성채를 맡겼다.

1070년, 페르난두 2세는 장인 아폰수 1세를 석방시키는 대가로 지난날 아폰수 1세가 레온-갈리시아 연합 왕국으로부터 빼앗았던 영토를 돌려받고 카세레스, 바다호스, 트루히요, 산타 크루스 데 라 시에라, 몬탄체스 시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중 트루히요, 몬탄체스, 산타 크루즈 데 라 시에라 등지는 페르난도 로드리게스의 영지가 되었다. 같은 해에 무와히드 왕조가 포르투갈의 도시인 산타렝을 포위하자, 페르난두 2세는 장인을 도우러 달려와서 무슬림군을 격파했다. 1173년 포르투갈을 공격했다가 아폰수 1세에게 패배한 무슬림군은 방향을 돌려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기습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의 의도를 조기에 파악한 페르난두 2세는 레온, 사모라, 갈리시아 등지에서 군대를 소집한 뒤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향해 진군하던 적을 역습해 대승을 거뒀다.

1175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페르난두 2세와 우라카 왕비가 사촌 관계[5]라는 이유로 결혼 무효를 선고했다. 물론 이것은 명목상일 뿐이고, 실제로는 포르투갈과 결혼 동맹을 이어가봐야 이득이 없겠다고 판단한 페르난두 2세가 결혼을 무효로 해달라고 요청한 것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알렉산데르 3세는 카스티야 왕국의 여인과 결혼해서 레온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이 하나로 힘을 합쳐서 레콩키스타를 완수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고 페르난두 2세 역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의 딸 엘레오노르를 왕비로 삼고 있었던 알폰소 8세는 레온 왕국보다는 잉글랜드와 손잡는 게 낫다고 여겼기에 무산되었다. 그 후 페르난두 2세는 1177년 8월에서 10월 사이에 어린 시절 자신을 가르쳤던 트레바 백작 페르난데 페레스와 테레사 데 레온사생아이자 누누 페레스 데 라라 백작의 미망인인 테레사 페르난데스와 결혼했다. 그는 이 결혼을 통해 카스티야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라라 가문과 갈리시아의 거물 귀족인 트리바 가문과 동시에 동맹을 맺을 수 있었다.

1178년, 카스티야 왕국의 연이은 침략에 시달리던 나바라 국왕 안초 6세의 구원 요청을 받은 페르난두 2세는 카스티야 왕국을 전격적으로 침략했다. 그는 알폰소 8세가 미처 대처하기 전에 카스트로헤리스, 두에나스를 공략했다. 알폰소 8세는 이에 맞서 포르투갈 왕국과 동맹을 맺었고, 아폰수 1세는 페르난두 2세가 다수의 병력을 카스티야 방면으로 보낸 틈을 타 아들 산슈 1세에게 군대를 맡겨 갈리시아를 공격해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1180년 페르난두 2세와 알폰소 8세는 토르데시아스 마을에서 만나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그 해 2월 6일 페르난두 2세의 두번째 왕비 테레사 페르난데스가 둘째 아들을 낳다가 사망하고 레온의 산 이시도르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통치 기간 동안 파드론, 리바다비아, 노이아, 카스트로 칼델라스, 폰테베드라, 투이, 루고 등 여러 영지를 수도원에 기부했으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종신 연금을 수여했다. 또한 1170년 카세레스 시에 산티아고 기사단이 선립되어 순례자들의 순례길을 지키고 무슬림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축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184년 무와히드 왕조 칼리파 아부 야쿱 유수프가 북아프리카에서 모집한 군대를 이끌고 포르투갈을 침공해 그 해 5월 산타렝에서 아폰수 1세를 포위했다. 이에 산티아고 기사단이 출격해 그해 6월 무슬림군을 격퇴했다. 이후 이전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순례하러 찾아오면서, 레온-갈리시아 연합 왕국의 경제가 상당히 호전되고 문화, 에술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1187년 5월, 페르난두 2세는 비스카의 영주 로페 디아스 데 하로의 딸이자 세온의 영주 누뇨 메넨데스의 미망인인 우라카 로페스와 결혼했다. 그는 새로 맞이한 아내에게 아길라르와 몬테아구도의 영주권을 주었다. 우라카 로페스는 적어도 1180년 5월부터 페르난두 2세의 정부였으며, 그와의 사이에서 가르시아 페르난데스, 알폰소 페르난데스, 산초 페르난데스를 낳았지만 오직 산초 페르난데스만이 유년기에 죽지 않았다. 1188년 1월, 페르난두 2세의 죽음이 임박하다는 것을 눈치챈 우라카는 그의 맏아들인 알폰수 9세를 몰아내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그는 알폰수 9세의 어머니 '포르투갈의 우라카'가 교황에 의해 결혼 무효 처리되었으니 알폰소 9세가 후계자로 인정받아서는 안 된다는 우라카 로페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알폰수 9세를 추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1188년 1월 22일 베나벤테에서 병사했다.

페르난두 2세 사후, 우라카 로페스는 자기 아들 산초 페르난데스를 새 국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페르난두 2세의 두번째 부인 테레사 페르난데스와 연관이 있던 라라 가문과 트라바 가문은 알폰수 9세를 지지했고, 다른 귀족과 성직자들 역시 오랫동안 왕위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왕자를 하루아침에 추방하고 어린 아이를 세울 수는 없다고 여겼다. 그 결과 알폰수 9세는 무사히 레온-갈리시아 연합 왕국의 국왕이 되었고, 우라카 로페스는 아들 산초와 함께 카스티야 왕국으로 피신했다.


2.4.3. 알폰수 9세[편집]


계모 우라카 로페스의 음모를 물리치고 레온 국왕에 선임된 알폰수 9세는 1188년 4월에 레온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주교와 레온, 오비에도, 살라망카, 시우다드 로드리고, 사모라, 아스토르가, 토로, 베나벤테, 레데스마 등 각 도시 대표들을 소집한 대규모 회의를 개최했다. 그는 이 회의에서 무슬림 세력과 카스티야, 포르투갈, 아라곤 등 이웃 국가들의 압박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면 국방을 강화해야 하며, 그러려면 세금을 더 많이 거둬야 하니 양해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서 세금을 늘리는 것을 동의해준다면 사법 행정을 개선하고 귀족들이 도시민들에게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금지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귀족들과 잦은 마찰을 벌이던 도시 대표들은 국왕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1188년 6월, 알폰수 9세는 카리온에서 카스티야 국왕이자 사촌인 알폰소 8세와 만나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려 했다. 알폰소 8세는 사촌을 기사로 선임하는 의식을 거행했고, 알폰수 9세는 카스티야 국왕의 손에 키스하고 검과 허리띠를 받았다. 이때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인 스와비아 공작 콘라드 역시 이 자리에 참석해 기사 작위를 받았다. 콘라드는 알폰소 8세의 딸인 베렝겔라와 결혼하고자 이곳에 찾아왔지만 카스티야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되었다. 이후 레온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은 상호 방위 협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알폰소 8세는 얼마 안가 협약을 깨고 레온 왕국으로 쳐들어가 발렌시아 데 돈 후안과 발데라스를 포함한 여러 영토를 공략했다. 여기에 포르투갈의 산슈 1세 역시 새 국왕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어수선한 레온 왕국을 공격해 갈리시아의 일부 영토를 공략했다. 이리하여 카스티야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에게 이중으로 전쟁을 치르게 된 그는 포르투갈 왕국과 화해하기로 했다. 그는 산슈 1세를 만나 평화 협약을 맺고 산슈 1세의 딸 테레사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산차, 페르난도, 둘세를 낳았다. 그러나 성직자들은 두 부부가 사촌 관계이니 결혼이 성립되지 않는다며 교황청에 재소했다.

한편,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는 알폰소 8세가 당초 나바라 왕국을 아라곤 왕국과 함께 분할하고 동맹을 맺기로 했던 협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아라곤 국경지대의 상당수가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에 반감을 품고 나바라 왕국, 레온 왕국, 포르투갈 왕국에 사신을 보내 반 카스티야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레온 왕국의 알폰수 9세와 포르투갈 왕국의 산슈 1세, 그리고 나바라 왕국의 안초 6세 역시 카스티야 왕국의 팽창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기에 이에 동의했다. 그들은 1191년 5월 12일 우에스카에서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나바라-레온-아라곤-포르투갈 4개국은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고, 한 국가가 공격당하면 다른 국가들이 즉시 원조하기로 했다.

우에스카 협정이 체결된 후, 나바라-아라곤 연합군이 카스티야 왕국을 침공하여 소리아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그러나 1192년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는 다른 연맹국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와 평화 협약을 맺으면서, 아라곤 왕국은 우에스카 협정에서 이탈했다. 여기에 1194년 나바라 국왕 안초 6세가 사망하고 뒤이어 왕위에 오른 안초 7세는 카스티야와 전쟁을 지속하고 싶지 않아 협정을 파기했다.

여기에 알폰수 9세가 갈수록 강성해지는 무와히드 왕조의 침공을 우려해 그들과 평화 협약을 맺은 것이 역효과를 초래했다. 교황 첼레스티노 3세는 알폰수 9세가 근친상간을 범하여 교회법을 위반하더니 이제는 이교도와 손잡기까지 했다며 레온 왕국에 파문과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면서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이들이 받는 것과 동일한 은총을 레온 왕국에 대항하여 싸우는 사람들에게 부여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러자 포르투갈 국왕 산슈 1세는 레온 왕국과 동맹을 끊고 갈리시아로 쳐들어가 투이와 폰테베드라를 공략했다.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 역시 레온 왕국의 남부를 공격하여 베나벤테를 포위했지만 함락에 실패했고, 뒤이어 북쪽으로 이동해 아스토르가를 공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푸엔테 카스트로를 공격해 며칠 만에 함락시키고 도시민들을 도륙한 뒤 레온 성벽에 도달했다. 알폰수 9세는 레온 시를 겨우 빠져나갔지만, 미처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 주민들은 노예로 팔려나가거나 도륙되었고, 유대인 구역과 회당은 파괴되었다.

1194년, 알폰수 9세는 무와히드 왕조의 군사 지원을 받으며 카스티야 왕국에 대한 반격에 착수했다. 그의 군대는 카리온까지 진군하면서 각지를 약탈하고 파괴해 레온 시의 참상을 복수했다. 이에 교황 사절이 양국의 갈등을 중재했고, 알폰수 9세와 알폰소 8세는 1194년 4월 20일 바야돌리드 지방의 토르데후모스에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카스티야 국왕은 페르난두 2세 사후 레온 왕국으로부터 빼앗은 알바, 루나, 포르티야, 발데라스, 볼라뇨스 등지를 돌려주기로 했으며, 알폰수 9세는 카스티야 국왕의 장녀 베렝겔라와 결혼하고 앞으로는 카스티야 왕국을 적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196년 알폰수 9세는 포르투갈의 테레사를 포르투갈로 돌려보냈다. 베렝겔라와의 결혼식은 1197년 12월 초 산타 마리아 데 바야돌리드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1195년,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는 무와히드 왕조의 칼리파 야쿱 알 만수르가 마라케시에서 중병을 앓고 있으며, 그의 동생인 알 안달루스 타이파 아부 야히아가 지중해를 건너 왕을 자칭하며 마라케시를 포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 때를 틈타 세비야를 공략하기로 마음먹고 공세를 개시했다. 하지만 야쿱은 아부 야히야의 반란을 신속하게 제압한 뒤, 이베리아 반도로 돌아와서 카스티야 왕국과의 일전을 준비했다. 알폰소 8세는 대규모 전투가 임박하자 레온 왕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알폰수 9세는 빼앗아갔던 영토를 돌려주기로 해놓고 아직 돌려주지 않은 점을 들며 지원을 보내길 거부했다.

결국 알폰소 8세는 단독으로 야쿱 알 만수르와 맞붙었고, 1195년 7월 19일 알라르코스 전투에서 참패했다. 야쿱은 여세를 몰아 말라곤, 베나벤테, 칼라트라바, 카라쿠엘, 토레 데 과달페르사 등 여러 성채를 함락하였다. 이제 툴레도로 향하는 길이 활짝 열려버리자, 알폰소 8세는 다시 한 번 레온 왕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알폰수 9세는 톨레도로 가서 알폰소 8세와 만나 이제라도 영토를 돌려준다면 군대를 파견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알폰소 8세는 이번에도 확답을 피했고, 알폰수 9세는 격분한 채 톨레도를 떠났다.

이후 야쿱의 군대는 2년간 엑스트레마두라, 타구스 계곡, 라 만차, 톨레도 주변을 초토화했고, 몬탄체스, 트루히요, 플라센시아, 탈라베라, 에스칼로나 등지를 약탈했다. 그러나 야쿱은 곧 북아프리카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이베리아 반도에 흥미를 잃고 1187년 수도 마라케시로 돌아간 뒤 1199년 2월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은 무함마드 앗 나시르는 이프리키야의 바누 가니야의 반란 진압에 몰두하느라 알 안달루스에 신경쓰지 못했고, 카스티야, 아라곤, 포르투갈 왕국은 이 때를 틈타 알 안달루스를 갉아먹었다.

1197년 12월 베렝겔라와의 결혼이 거행된 이래, 알폰수 9세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사촌간의 결혼은 무효이니 당장 헤어지라는 압박을 받았고, 여러 차례 파문 위협을 받았다. 그는 이교도와의 항쟁을 위해 이웃 국가들끼리 단합하고자 단행한 것이니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교황은 끝내 거부했다. 다만 그들의 자녀들이 왕위를 물려받을 권리는 인정받았다. 그는 베렝겔라와의 사이에서 세 아들과 두 딸을 낳았지만, 교황의 강요에 못 이겨 1204년 베렝겔라를 카스티야 왕국으로 돌려보냈다.

1212년 바누 가니야 진압에 성공한 앗 나시르는 이베리아 반도로 넘어가 톨레도와 코르도바 사이에 위치한 칼라트라바 기사단의 본부인 살바티에라를 공략했다. 이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에 사절을 보내 이교도와의 전쟁을 벌일 각오가 되어 있느냐고 물었다. 알폰수 9세는 확답을 피했지만, 알폰소 8세는 죽음을 각오하고 레콩키스타에 뛰어들겠다고 답했다. 이에 교황은 카스티야 국왕을 도울 십자군을 선포하고, 알비파 십자군을 이끌던 아르노 애므리를 교황 특사로 임명하였다. 알폰소 8세가 "내가 이교도들과 싸우고 있을 때 레온 국왕이 빼앗긴 영토를 되찾겠다며 빈 틈을 노릴까 걱정된다"고 호소하자, 아르노는 레온 등 이베리아 각국에 "카스티야인들이 이교도와 싸우는 동안 카스티야를 공격한다면 파문에 처하겠다"고 위협했다.

알폰수 9세는 카스티야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자신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신하들이 카스티야군과 함께 싸우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면서도 레온 왕국 국경 너머의 카스티야 점령지를 은밀히 탈환했다. 1212년 7월 12일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무함마드 앗 나시르의 무슬림군을 궤멸시키고 상당한 영토를 확보하고 귀환한 알폰소 8세는 자신이 거둔 대성과에 고무되었기에 알폰수 9세의 이같은 행동을 굳이 따져묻지 않았다. 그 대신 알폰수 9세와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2세를 초대하여 코임브라에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여기에 페냐피엘과 알만자를 레온 왕국에 돌려주기로 했다.

1214년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가 사망하고 10살의 엔리케 1세가 카스티야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1217년 6월 6일, 엔리케 1세는 팔렌시아의 에피스코팔 궁전에서 또래 아이들과 함께 놀다가 지붕 위에서 떨어진 타일에 머리를 직격당해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숨을 거두었다. 베렝겔라는 알폰수 9세가 엔리케 1세가 사망하면서 카스티야 왕실의 혈통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카스티야 왕위를 차지하려 들 것을 우려했다. 그녀는 일단 엔리케 1세가 죽었다는 것을 숨기고 알폰수 9세에게 아들 페르난도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아들이 올 때까지 임시로 카스티야 여왕을 맡았다.

알폰수 9세가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채 페르난도를 보내자, 베렝겔라는 곧바로 엔리케 1세의 사망을 대내외에 공개한 뒤 아들 페르난도 3세를 왕으로 옹립했다. 알폰수 9세는 베렝겔라가 자신을 속였다며 격분했고, 카스티야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엔리케 1세의 전 섭정이었던 알바로 누녜스 데 라라와 손잡고 카스티야를 전격 침공해 우루에냐, 비야가르시아, 카스트로 몬테, 아로요를 점령했다. 그 후 베렝겔라로부터 협상을 요청받자, 그는 베렝겔라와 재혼하고 그녀가 카스티야 여왕이 되는 것을 용인하며, 그와 베렝겔라가 죽고 난 뒤 페르난도가 레온과 카스티야의 유일한 왕으로 군림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카스티야인들이 제안을 거부하자, 알폰수 9세는 무력으로 밀어붙이기로 하고 부르고스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알폰수 9세는 알바로 누녜스의 조언에 따라 라구나 데 두에로, 토르케마다, 토르도마르를 거쳐 부르고스로 향하면서 각지를 약탈했다. 그러나 카스티야 민중들이 강한 적의를 드러내며 곳곳에서 유격전을 전개해 병력이 계속 소모되자, 그는 부르고스를 공략하기 어렵겠다고 판단하고 레온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는 돌아가는 동안 팔렌시아를 통과하면서 기론과 메네세스 가문의 영지를 초토화했다. 한편 페르난도 3세는 아빌라와 세고비아, 라라, 팔렌시아 일대의 지배권을 회복하고 그곳의 병력을 차출해 1217년 8월 중순 부르고스에 입성해 민중의 환호를 받고 8월 31일에 대관식을 거행했다.

1217년 9월 페르난도 3세가 부르고스를 떠나 팔렌시아로 향했을 때, 알바로 누녜스의 형제 페르난도가 레빌라 발레헤라에서 매복 공격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격퇴되었다. 알바로 누녜스는 에레루엘라 데 카스티야레라에서 또다른 매복 공격을 시도했지만, 수에로 텔레즈 데 메네세스가 이끄는 적군의 역습을 받고 사로잡혀 바야돌리드로 호송되었다. 그는 알라르콘, 카네테, 타리에고, 아마야 및 빌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 등 자신이 통제하는 요새들을 모조리 헌납해야 했다.

1217년 11월, 알폰수 9세는 풀려난 후 레온으로 망명한 알바로 누녜스와 함께 페르난도 3세와 만나 휴전 협정을 맺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알폰수 9세는 알바로 누녜스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1218년 봄 카스티야를 재차 침공해 메디나 데 리오세코 인근의 발데네브로 요새를 공략했다. 페르난도 3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로베 데이즈 데 하로, 알바로 디아즈 데 카메로스, 가르시아 페르난데스 데 빌라마요르를 파견해 레온 왕국을 침공하게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알폰수 9세와 라라 가문에게 격퇴되어 카스트레혼 데 라 페냐 요새로 퇴각했다. 알바로 누녜스는 이 요새를 포위하고 공성전을 이끌던 중 갑작스런 중병에 걸려 사망했고, 요새에 갇혔던 카스티야군은 적이 지휘관의 사망으로 어수선해진 틈을 타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강경파였던 알바로 누녜스가 사망한 뒤, 알폰수 9세와 페르난도 3세는 베렝겔라의 중재에 따라 평화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양자는 1218년 8월 26일 토로 협약을 체결했다. 페르난도 3세는 아버지의 종주권을 인정하기로 했고, 알폰수 9세는 빼앗았던 영토를 되돌려주고 다시는 카스티야 왕국을 적대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이 일로 부자간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그 후 알폰수 9세는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이후 쇠락해가는 무와히드 왕조를 공격하기로 했다. 1218년 말, 그는 카세레스를 공략하고자 가스코뉴 십자군과 칼라트라바와 알칸타라 기사단과 함께 출진했다. 그러나 3개월간 이어진 공방전에도 함락되지 않아 철수해야 했다. 이후 두번째 원정에 착수한 그는 브라가와 가마랑스에서 포르투갈인들의 공격을 받았지만 모두 격파했고, 1219년 6월 13일 포르투갈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뒤이어 세비야로 쳐들어가 적군을 격파하고 상당량의 전리품을 확보했다. 1221년 알칸타라 기사단이 발렌시아 데 알칸타라를 공략하자, 이에 자극을 받아 1222년 카세레스를 재차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1223년, 1225년, 1226년에 잇따라 카세레스를 공격했고, 1229년 마지막 공격에서 카세레스를 마침내 공략했다.

1230년, 알폰수 9세는 메리다를 포위하고 이 도시를 구하려고 달려오던 이븐 후드를 격파했다. 메리다 수비대는 구원군이 격파당하자 저항 의지를 상실하고 항복했고, 뒤이어 바다호스, 엘바스, 탈라베라 라 레알이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했다. 이렇게 많은 영토를 확보하고 귀환한 알폰수 9세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방문해 대 야고보에게 경의를 표한 뒤 레온으로 향하던 중 빌라누에바 데 사리아에서 중병에 걸렸고, 1230년 9월 24일에 사망했다.


2.5. 카스티야 왕국에 병합되다[편집]


알폰수 9세는 당초 첫 왕비 테레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페르난도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페르난도가 요절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베렝겔라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페르난도가 왕위 후계자로 거론되었지만, 페르난도가 이미 카스티야의 국왕인 점이 걸림돌이었다. 카스티야 왕국에 반감을 품고 있던 레온과 갈리시아 귀족들은 알폰수 9세에게 테레사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딸 산차와 둘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라고 권유했다. 알폰수 9세 역시 자신의 동의 없이 카스티야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준 베렝겔라와 감히 자신에게 대항한 페르난도 3세 모자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기에, 그들의 설득에 따랐다. 그리하여 알폰수 9세 사후 산차와 둘세가 레온과 갈리시아의 공동 여왕이 되었다.

그러나 다수의 성직자와 레온 시민들은 두 여왕을 인정하지 않고 페르난도 3세를 초청했다. 페르난도 3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와서 토로에 입성해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과 힘을 합쳐 레온과 갈리시아 귀족들을 제압했다. 이후 페르난도 3세의 어머니 베렝겔라가 산차와 둘세의 어머니인 포르투갈의 테레사와 협상한 끝에 1230년 12월 11일 베나벤테에서 연간 3만 메라베디(maravedí)에 달하는 거액의 연금과 토지를 받는 대가로 왕관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여생을 보내게 했다.

이리하여 레온 왕국은 카스티야 왕국에 병합되었고, 카스티야 연합 왕국이 탄생했다. 레온 귀족들은 이에 반감을 품어 2년간 저항을 이어갔지만, 끝내 페르난도 3세에게 토벌되었다. 1252년 페르난도 3세의 뒤를 이어 카스티야 왕위에 오른 알폰소 10세는 1275년 장남 페르난도가 에시아 전투에서 무와히드 왕조-나스르 왕조 연합군과 맞붙다 전사하자 페르난도의 아들들에게 레온 왕국을 물려주려 했다. 그러나 알폰소 10세의 둘째 아들 산초 4세가 연장자만이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다는 카스티야 관습법에 근거해 자신이 모든 영토를 상속받아야 한다며 반기를 들었다. 1282년 알폰소 10세는 산초 4세에게 굴복해 그를 유일한 왕위 후계자로 세웠다.

1284년 알폰소 10세가 사망한 뒤 카스티야 왕위에 오른 산초 4세는 조카들을 레온 왕위에 올리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을 모조리 토벌했다. 1295년 산초 4세가 사망한 뒤 9살된 아들 페르난도 4세가 왕위에 오르자, 페르난도의 삼촌 후안이 1296년 레온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레온, 갈리시아, 세비야의 왕을 칭했다. 그러나 카스티야 왕국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결국 1300년 페르난도 4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퇴위했다. 이후에도 레온 왕국을 부활시키기 위한 반란이 종종 일어났지만 모조리 진압되었다.

1386년, 제1대 랭커스터 백작 곤트의 존이 갈리시아에 쳐들어와 대다수 갈리시아 귀족들과 일부 레온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레온과 카스티야 국왕을 자칭했다. 그는 포르투갈 왕국과 동맹을 맺고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를 상대로 카스티야 전역을 장악하기 위한 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1387년 포르투갈군과 연합하여 카스티야를 향한 원정을 단행했다가 병력 대부분이 궤멸되는 참패를 당하면서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고, 결국 1388년 7월 카스티야군의 공세를 피해 아키텐으로 달아났다.

이후 레온 왕국의 독립을 꾀하는 움직임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카스티야 왕국과는 다른 정부 체계, 주화 및 법률을 유지하는 등 상당한 자치를 인정받았으며, 카스티야 국왕은 레온 왕국의 사자 문양을 연합 왕국의 대표적인 국장으로 활용했다. 이후 카스티야 왕국이 아라곤 왕국과 연합하면서 스페인 왕국이 탄생한 후에도 레온 왕국의 정부 체계는 유지되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베리아 반도를 강점한 것에 분노한 스페인군과 민중이 이베리아 반도 전쟁을 벌이던 1808년 6~9월, '훈타 파트리오티카 데 레온(Junta Patriotica de León: 레온 애국자회)'은 레온 왕국의 주권을 인수하고 프랑스군과의 전쟁을 주도했다.

1833년, 스페인 국무장관 하비에르 드 부르고스는 스페인 전역을 49개 주와 15개 지역으로 개편하고 중앙에서 파견한 관료들이 지방 행정을 책임지며, 모든 지방법을 스페인 법률로 정리한다는 내용의 <디비시온 테리토리얼 데 에스파냐(división territorial de españa, 스페인 영토 분할령)>을 반포했다. 이때 레온 왕국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레온 주, 살라망카 주, 사모라 주로 분할되었다.


3. 언어[편집]


레온 지역에는 레온어라는 고유의 말이 있었지만[6] 현재는 거의 사멸되어가고 있다. 아스투리아스어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어 아스투리아스-레온어로 함께 묶이기도 한다. 라틴어에서 유래된 서부 로망스어군의 일종으로 분류되고 스페인어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편이다. 카스티야 이 레온 지역의 비정부 기구를 중심으로 레온어를 보존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지만, 여전히 유네스코가 정한 소멸 위기 언어 중 하나다. 현재는 레온어로 된 광고까지 나오고 있다.


4. 역대 국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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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즉, 국장으로도 쓰던 레온(사자)이 아니고 사실은 레기온(군단)에서 유래된 도시명이라는 것.[2] 알 나시르 연대기에 따르면, 두에로 강둑에서 아티엔자와 파라쿨레오스 성에 이르는 평원 전체에 무슬림들의 시신이 쌓였다고 한다[3] 산추 1세는 매일 풍부한 수렵육과 건강에 해로운 다른 음식들로 구성된 27코스의 식사를 했고, 이로 인해 말에 탈 수 없을 정도로 비대했다고 한다.[4] 우라카의 첫 남편 레이몽의 형제였다.[5] 페르난두 2세와 우라카 부부의 할머니인 레온의 우라카와 포르투갈의 테레사 데 레온은 이복 자매였다.[6] 예를 들어 레온은 스페인어로 leˈon(레온)이지만 레온어로는 ʎiˈoŋ(리옹)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