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팔레스타인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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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적 관계
2.1. 고대
2.2. 중세
2.3. 근세
2.4. 근대
2.5. 20세기
2.6. 21세기
3. 교통 교류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레바논팔레스타인과의 관계.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모두 이스라엘에게 침략당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싫어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가자 지구의 하마스는 헤즈볼라와 긴밀한 동맹 관계를 맺었다. 다만 레바논은 여러 종교집단이 서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다종교 사회이다보니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타인 관련한 시각차도 진영이나 종교집단 관계에 따라 극명히 다른 편이다. 레바논 기독교인들 중 정교회 신도들은 무슬림들에게 유화적인 반면, 마론파들의 경우 팔레스타인인 난민 그리고 순니파 무슬림들과 매우 적대적인 관계이다. 애초에 헤즈볼라가 레바논에서 정권을 잡을 수 있던 배경에는 팔레스타인인 난민들이 유입되며 갑자기 증가한 이슬람 순니파 인구와 레바논 내에서 가장 경제력이나 외교력이 강한 마론파 인구 사이를 중재할 만한 집단이 바로 헤즈볼라밖에 없다는 점에 있었다.


2. 역사적 관계[편집]



2.1. 고대[편집]


로마 제국 시대 당시 오늘날 레바논 북부에서 튀르키예 동남부에 해당하는 지역은 시리아 코일레 속주(Provincia Syria Coele), 레바논의 나머지 지방과 시리아의 남쪽 지방은 시리아 포이니키아 속주(Provincia Syria Phoenicia)로 구획되었으며, 오늘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해당하는 지역은 유다이아 속주로 구획되었다. 유다이아 속주에서 로마 제국에 대항한 유대인들의 반란이 계속되면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유다이아 속주의 이름을 일부러 유대인들과 사이가 나쁜 시리아인들과 블레셋의 이름을 따서 시리아 팔레스티나 속주로 개명하였다. 이 팔레스티나라는 지명은 동로마 제국 시대에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고대 유대인들과 페니키아인들은 서로 종교는 달랐지만 고대 페니키아어와 히브리어가 매우 유사한 관계로 소통과 교류가 적지는 않았다. 포에니 전쟁에서 고대 카르타고가 멸망한 이후 상당수의 카르타고인들은 자신들이 믿던 바알과 타니트 등을 저주하고 유대교로 개종하는데, 특히 이집트와 레바논 해안을 오고가는 상인들 중에서 유대교로 개종하는 인구가 많았다. 유대교 역시 기독교와 이슬람교에 밀려 소수종교로 전락하기 이전에는 선교와 개종에 적극 노력을 기울이던 상황이었고, 유대인들과 이웃해 살던 그리스인과 페니키아인들 상당수가 유대교로 개종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로마 제국이 서기 4세기 이후 기독교화하면서 제국 내 유대교와 유대인들의 입지는 악화하기 시작한다. 동로마 제국의 팔레스티나 속주의 유대인 인구는 현지 유대인들이 박해를 견디지 못해 기독교로 개종하는 일이 지속되며 점차 감소하였다. 이렇게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 후손들 중 상당수는 후대 이슬람 제국의 정복 이후 지즈야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이슬람교로 개종하는데, 이렇게 기독교나 이슬람으로 개종한 현지인들은 오늘날 팔레스타인인의 기원이 된다.[1]

오늘날 레바논인들과 고대 페니키아인들의 유골을 하플로그룹 조사로 비교대조해본 결과로 레바논인들 특히 마론파 기독교인들은 고대 페니키아인들의 직계 후예나 다름없는 것으로 나왔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레바논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의 관계는 고대부터 서로 이어져 오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2.2. 중세[편집]


아랍 무슬림들의 군대가 동로마 제국 동부 영토를 정복하면서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일대는 이슬람 제국의 영토가 된다. 정통 칼리파 시대 이후 이슬람 제국을 차지한 우마이야 가문은 오늘날 시리아의 수도에 해당하는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삼고, 예루살렘을 별장 삼아서 거처하길 좋아했는데 여기에는 우마이야 가문이 헬레니즘 문화 애호가라는 점이 적잖이 작용하였다. 예루살렘이 아랍 무슬림 군대에게 정복당할 당시 이슬람 제국의 지도자였던 제2대 정통 칼리파 우마르는 현지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의 권리를 보장하였고, 이렇게 권리를 보장받은 팔레스티나 일대의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은 고대 로마 그리고 헬레니즘 문화 유산 관련 지식과 문화를 적잖이 보존하고 있던 상태였다. 우마이야 칼리파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세속적인 문화를 즐길 수 있는 놀이공간과도 같았다. 이슬람 제국이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시리아와 레바논, 팔레스타인 일대를 정복할 당시 시리아의 야코부스파 기독교인들은 동로마 제국 중앙의 칼케돈파 기독교인들과 서로 이단으로 정죄하며 갈등하던 상황이었고, 아랍 무슬림들의 정복을 적어도 초반에는 환영하던 입장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레바논 북부의 산악지대는 교통이 불편하였고 지리적으로도 다소 협소하여 아랍 무슬림들 관심 밖에 있었다. 이 지역에는 '왕당파'라는 이름의 말카파 기독교인들이 주로 거주하였는데, 이들은 합성론을 믿는 여타 레반트 지역 기독교인들과 갈등 끝에 레바논 산악지대로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우마이야 왕조가 몰락한 이후 압바스 칼리프조 그리고 파티마 왕조가 대립하던 시대가 되면 이집트 방향에서 드루즈교라 하여 일군의 소수종파 신도들이 다시 레바논 산악지대 일대로 피신해 자리를 잡는데 이 과정에서 레바논의 종교 지형은 팔레스타인 지역 못지 않게 복잡해졌다. 동로마 제국 중흥기 시절 요한네스 치미스케스가 지휘하는 동로마 제국 군대가 아바스 왕조의 군벌 정권이던 함단 왕조를 격파하고 레바논 북부 일대로 남하하였던 바 있었는데, 동로마 제국 군대는 아직 기독교인 인구가 많이 잔류하던 레바논 북부 일대까지는 성공적으로 접수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무슬림 인구가 많은 레바논 남부 지역 밑으로의 남하는 시도하지 못하였다.[2]

레바논 산악지대 주민들의 삶은 근교에 위치한 성지 예루살렘 때문에 끊임없이 변화와 위협을 겪었다. 예루살렘이 십자군 전쟁 당시 십자군들의 목표가 되면서 십자군들이 레바논을 거쳐 팔레스타인 방향으로 진군하였던 것이다. 전쟁 초창기 당시 십자군들은 레바논 주민들을 다 같은 무슬림인 줄 알고 학살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나, 이후 현지 상황을 파악하게 된 이후에는 드루즈교나 알라위파 신도들 그리고 말카 기독교인들을 신민으로 받아들이고 이들을 보조부대로 고용하기 시작한다. 팔레스타인이나 시리아 지역에서 현지인들이 십자군들에게 반감을 보였던 것과 다르게 레바논 산악지대 주민들이나 혹은 중동으로 이민 온 아르메니아인들은 십자군들에게 호의적이었고, 이들의 조력을 바탕으로 십자군 국가들이 레반트 지역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기도 했다.

맘루크 왕조에 의해 십자군 국가들이 차례로 멸망하고 십자군들이 중동에서 모두 축출될 당시 맘루크들은 십자군의 조력자였던 알라위파들을 완전히 무릎꿇렸으나 레바논 북부 산악지대의 드루즈교도들이나 기독교인들까지 완전히 제압하는 데까지는 힘을 쓰지 못했다. 맘루크 왕조는 십자군들을 제압한 이후 몽골 제국의 후신 일 칸국과 한동안 계속 전쟁을 치루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맘루크들은 자신들이 몽골군과 싸우는 동안 후방에서 십자군들이 다시 침공할 것을 우려하여 레바논의 항구도시들을 황폐화된 상태로 방치하였고, 이러한 지역들은 근세 오스만 제국 시대 들어서야 다시금 개발되기 시작한다.

2.3. 근세[편집]


오스만 제국이 16세기 초반 맘루크 왕조를 격파하고 레반트 지역을 정복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맘루크 왕조가 오스만 제국에 정기적으로 세금을 지불하는 조건 하에 이집트 일대를 계속 다스리는 것은 허용하였으나 레반트 지역은 현지의 반맘루크 그리고 반튀르크 감정을 고려하여, 맘루크 왕조에서 떼어내 현지 아랍인 지역유지들의 자치에 맡겼다.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레반트는 베네치아 그리고 프랑스나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들과 무역이 번영하였던 바,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시리아 일대의 현지 아랍계 기독교인들은 유럽 기독교인 상인들과 무역을 하며 부를 축적하였다. 다만 근세 당시 마론파 신도들은 이러한 대 유럽 무역에서 소외되어 있었고 레바논 북부 산악지대에서 무슬림들과 교류를 거부한채 고립된 자급자족 생활을 영위하던 편이었다.

2.4. 근대[편집]


마론파 신도들은 이웃 아랍인들의 영향으로 아랍어를 사용하긴 하였지만, 중세 이래 교황청 및 프랑스 등 유럽 가톨릭 세력과 교류에 더 관심이 많았고, 이는 오늘날 마론파들의 친서방 성향으로 그대로 연결된다. 근대 마론파 신도들은 기근 그리고 이웃한 드루즈교 신도들과의 전쟁으로 혼란한 시대를 보냈다. 이 과정에서 마론파 신도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던 것이 바로 프랑스였고, 마론파 신도들 입장에서 유럽 기독교 세력은 침략자가 아니라 자신들을 원조하는 구원자로 볼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이 전통 전례를 유지하되 교황수위권을 인정하는 동방 가톨릭교회로 편입된 것 역시 이러한 배경 하에서이다.

다른 한편으로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일대의 무슬림들이나 정교회 신도들 입장에서 유럽 기독교인들은 아랍인들을 수탈하는 사악한 제국주의 침략자였다. 서방에 대한 이러한 견해차이는 오늘날 레바논 내 여러 종파간의 갈등 그리고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인 난민 사이의 알력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2.5. 20세기[편집]


오스만 제국의 해체 과정에서 레바논시리아-레바논이라 하여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반면 팔레스타인 일대는 영국령 팔레스타인이라 하여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게 되었다. 독립 이후 팔레스타인 땅에는 신생국 이스라엘이 들어섰고, 레바논은 시리아와 갈라진 후 다시 영토 조정에 들어가 무슬림 다수 지역을 영토로 배정받은 결과 독립 이후 여러 종파들이 난립하는 다종교 국가가 되었다.

독립 이후 1970년대까지 레바논 경제는 호황을 누렸으나 중동전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영향 그리고 팔레스타인 난민 유입 등을 이유로 레바논 내전이 발발한 이후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한다. 이를 두고 레바논의 무슬림들 및 정교회 계열 교파 신도들은 이스라엘을 원흉으로 지목하고 증오했던 반면 마론파 신도들은 팔레스타인인 난민들을 레바논 내전의 장본인으로 여겨 이들을 배척하게 된다. 레바논으로 피난한 팔레스타인인들을 대상으로 한 사브라-샤틸라 학살을 주도한 세력 역시 마론파였다. 이렇게 레바논 내 국론이 분열하는 과정에서 그나마 이슬람 순니파와 마론파 기독교도들 사이를 중재할 대안으로 시아파 계열 헤즈볼라가 레바논의 실세 역할을 맏게 되었다.


2.6. 21세기[편집]


레바논의 헤즈볼라는 팔레스타인과 사이가 좋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주변 국가보다 더 잘 받아주기도 했다. 하지만 난민들과의 갈등도 상당히 심각했던 편이다. 특히 레바논 내 마론파 기독교인들이 순니파 무슬림 팔레스타인인 난민을 부정적으로 보는 편이다.

베이루트 항구 폭발 사고 이래 레바논의 경제 위기가 장기화하면서 레바논 내에서 친서방-친이스라엘 및 반팔레스타인 감정이 악화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팔레스타인이 밉다 이것보다는 이스라엘과 쓸데없는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제재로부터 해방돼서 1970년대 이전처럼 경제 좀 다시 정상적으로 굴려보자 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한다.


3. 교통 교류[편집]


두 나라들을 잇는 공항 노선이 없다.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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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팔레스타인의 농민이나 도회지 상인 아랍인과 네게브 사막의 베두인들은 생각보다 서로 연관성이 없다. 오죽하면 이스라엘 건국 당시 네게브 지방 베두인들은 이스라엘 군대에 편에 서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과 싸웠을 정도였다.[2] 동로마 제국은 무슬림 신민들을 다스리는 노하우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크레타 섬처럼 무슬림 인구가 소수인 지역을 정복하면 무슬림 주민들을 전부 다 죽이거나 추방하거나 강제개종시키는 편이었다. 그러나 대륙에서 이런 정책을 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