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나토 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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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이탈리아의 전 축구 선수.
2. 생애[2][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올미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버림받아 밀라노의 보육원으로 보내졌다가 크레마에서 양부모를 만났고 크레마에서 축구를 배웠다.
2.2. 선수 생활[편집]
2.2.1. 클럽[편집]
올미는 1931년 프리마 디비지오네[3] 소속의 AC 크레마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올미는 1933년부터 세리에 B 소속의 US 크레모네세로 팀을 옮겼지만 1935년, 크레모네세는 강등 결정전에서 칼초 포자에 0대1로 패하며 세리에 C로 미끄러졌다. 이듬해 크레모네세는 다시 세리에 B로 올라갔지만 올미는 다른 세리에 B 클럽 브레시아 칼초로 이적, 26경기에서 14골을 넣는 대활약을 보였다. 이에 암브로지아나 인테르가 올미에게 손을 내밀었고 올미는 그 손을 잡았다.
올미는 1937년 9월 12일, 루케세를 상대로 세리에 A와 암브로지아나 인테르에서의 첫 경기를 치렀고 암브로지아나는 루케세와 3대3으로 비겼다. 올미는 암브로지아나에서 4시즌동안 107경기에 출전했고 2회 세리에 A 우승과 1회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경험했다.
1941년에 올미는 유벤투스 FC로 이적해서 한번 더 코파 이탈리아에서 우승했고 이듬해에 다시 암브로지아나 인테르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 시즌에 암브로지아나에서 올미의 출전 횟수는 10회로 크게 줄었고 그는 초기 선수 생활을 보냈던 US 크레모네세에 복귀했다.
전쟁이 끝난 후 올미는 자신의 데뷔 클럽인 AC 크레마에서 1947년까지 선수 생활을 지속했다.
2.2.2. 국가대표[편집]
올미는 1938년 월드컵에 이탈리아 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하지만 올미의 출전 기회는 대회 내내 없었고 벤치에서 대표팀의 우승을 지켜보았다.
그는 1940년 4월 14일, 루마니아와의 경기에서 데뷔할 수 있었고 이후 2경기를 더 뛰었다.
3. 사생활[편집]
올미는 크레마 출신이자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조반나 크리벨리(Giovanna Crivelli)와 결혼, 세 명의 딸을 두었다.
4. 수상[편집]
4.1. 클럽[편집]
- 세리에 A 우승 2회: 1937-38, 1939-40(암브로시아나 인테르)
- 코파 이탈리아 우승 2회: 1938-39(암브로시아나 인테르), 1941-42(유벤투스 FC)
- 세리에 C 우승 1회: 1935-36(US 크레모네세)
- 세리에 A 준우승 1회: 1940-41(암브로시아나 인테르)
4.2. 국가대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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