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제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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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제국 건국 이전
2.1. 모스크바 대공국 (1263–1547)
2.2. 루스 차르국 (1547–1721)
2.2.1. 로마노프 왕조 (1613–1917)
3. 러시아 제국 (1721–1917)
3.1. 표트르 대제
3.2. 예카테리나 2세
3.3. 유럽의 강대국
3.3.1. 나폴레옹 전쟁
3.3.2. 니콜라이 1세
3.3.2.1. 크림 전쟁
3.3.3. 근대화의 움직임
3.3.3.1. 알렉산드르 2세
3.3.3.1.1. 농노 해방령
3.3.3.1.2. 부정적인 면에 대한 반론
3.3.3.1.3. 대개혁, 그리고 반개혁
3.3.3.1.4. 영토 확장
3.3.4. 영국과의 그레이트 게임(1813–1907)
3.3.4.1. 직접적인 견제
3.3.4.2. 일본을 통한 간접적인 견제
3.4. 러시아 제국 후기
3.4.1. 니콜라이 2세
3.4.1.1. 피의 일요일
3.4.1.2. 러일전쟁 (1904–1905)의 패배
3.5. 러시아 제국의 멸망
3.5.1. 제1차 세계 대전



1. 개요[편집]



러시아 제국의 역사를 서술한 문서.


2. 제국 건국 이전[편집]


'러시아'라는 명칭 자체는 처음부터 쓰였다. 모스크바 대공국-루스 차르국-러시아 제국은 단절없이 이어진 단일 국가고, 오히려 후대 학자들이 편의상 사용하는 시대 구분에 더 가깝다.

2.1. 모스크바 대공국 (1263–1547)[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모스크바 대공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Ivan III.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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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3세
세례성사를 받는 블라디미르 대공[1]
러시아 제국의 시조는 키예프 대공국의 일국이었던 모스크바 대공국이다. 당시 러시아 지방은 하나의 왕국을 이루지 못하고 여러 개의 공국과 소국들로 잘게 나뉘어 있었으며, 이 소국들 중 가장 강력했던 왕국은 류리크 왕조키예프 대공국이었다. 키예프의 대공이었던 알렉산드르 넵스키의 막내 아들인 다닐 알렉산드로비치는 1263년에 새롭게 탄생한 모스크바 공국의 공작이 되어 모스크바로 부임했다. 이후 모스크바는 타타르의 멍에 시기에 몽골 제국의 하수인 노릇을 하면서 기존의 블라디미르-수즈달노브고로드 공화국 등을 집어삼키며 힘을 키워나갔고, 끊임없는 저항 끝에 드디어 이반 3세 시기에 몽골과의 예속 관계를 끊어내고 독립에 성공하였다.

이반 3세는 당시 모스크바 대공국의 최대 정적이었던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맞서 싸우면서 모스크바의 힘을 빠르게 길러나갔다. 43년에 달하는 이반 3세의 치세 동안 모스크바 대공국의 영토는 3배 가까이 늘어났으며 또한 동로마 제국의 황실 종친, 소피아 팔레올로기나[2]와 혼인하고 쌍두독수리 문장을 국가휘장으로 사용하면서 러시아가 제3의 로마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피난을 온 난민들로부터 선진적인 로마 문화를 흡수하면서 문화 발전을 이룩했고, 이 시기 즈음에 유입된 동방정교회를 정식 국교로 지정하면서 기독교 세계에 스스로 편입되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이반 3세는 옛 동로마 제국과의 접점을 주장하면서 이후 스스로를 전 루스의 대공이라고 선포했고, 이로 인하여 모스크바 대공국이 본격적으로 비상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그의 아들인 바실리 3세 역시 1512년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부터 스몰렌스크 지방을 빼앗는 등 여러 군공을 올렸고, 바실리 3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이반 뇌제는 중앙집권적인 정책을 펴며 스스로를 대공이 아닌 차르, 즉 황제라고 선포했다.


2.2. 루스 차르국 (1547–1721)[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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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황태자를 껴안고 있는 이반 뇌제[3]
모스크바를 점령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
중앙집권적인 왕국이라기보다는 그저 고만고만한 도시들의 집합체에 더 비슷했던 모스크바 대공국은 이반 4세[4] 시기에 그나마 제대로 된 왕국의 모습을 갖추었다. 3세에 대공위에 오른 이반 뇌제는 기존의 대공이라는 명칭 대신 차르의 칭호를 사용하면서 왕의 권위를 높였고[5], 1550년대에는 법전을 편찬하고 군대 정비, 지방관 제도를 다시 조정하는 등 행정 체계의 틀을 만들었다. 때문에 이 시기 이후의 러시아를 루스 차르국이라고 부른다. 이반 뇌제는 내치 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당시 러시아 지방은 유럽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미개하고 추운 벽지 정도의 인식만 있던 상황이었다. 이반 뇌제는 이같은 상황을 타파하기 위하여 잉글랜드 왕국네덜란드 공화국의 상인들과 무역을 텄으며, 군사적인 원정을 연달아 펼치면서 영토도 크게 넓혔다. 루스 차르국의 영토는 1584년까지 280만 제곱킬로미터에서 540 제곱킬로미터로 급격하게 증가했고 1552년에는 카잔 칸국아스트라한 칸국마저도 무릎 꿇리는 데에 성공하며 러시아 지역의 명실상부한 패자로 떠올랐다.

다만 발트해 연안의 지방들로 펼친 군사적 원정들은 상황이 훨씬 더 어려웠다. 1558년에 이반 뇌제가 서유럽과의 교역을 늘리고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리보니아를 침공하자 이에 자극을 받아 루스 차르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스웨덴, 덴마크 등 인근의 강대국들과 25년에 걸친 리보니아 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결국 이들을 모두 상대할 여력이 없던 이반 뇌제는 군을 물리고 발트해 방면으로의 영토 확장을 포기해야만 했다. 다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카잔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 시비르 칸국 등을 복속하면서 러시아의 땅덩어리 자체는 꾸준하게 늘어갔다.[6]

이반 뇌제는 선정과 폭정 사이를 오가는 불안정한 군주였다. 자신에게 청원하러 온 사람들에게 끓는 포도주를 퍼붓고 수염을 태워버리는 등 연산군 저리가라 할만한 악독한 짓을 했지만, 반대로 국정에 엄청나게 열성을 쏟아부으면서 국민들의 칭송을 들으며 1550년에는 러시아 최초의 전국회의를 열어 비판적인 목소리를 청취하고 시정을 약속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처럼 모순적인 존재였던 이반 뇌제는 명군과 폭군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군주였다. 이반 뇌제는 13세에 친정을 시작하자마자 자신을 학대하던 보야르의 지도자들 중 한명을 크렘린의 사냥개 관리자에게 던져주며 개밥으로 만들어버리면서 어릴 때부터 광기를 보여주었다. 그의 광기는 리보니아 전쟁이 지나치게 장기화되고 결정적으로 사랑하던 아내 아나스타시야[7]가 세상을 떠나며 점차 극대화되었다. 그는 귀족들을 협박하여 나라의 절반을 황제 직속 영토인 '오프리치니나'로 떼어갔다.[8] 게다가 집권 말기에는 광기에 빠져 이반 황태자를 때려죽이는 대참사를 일으키기도 했다.[9] 이렇게 광기에 빠져 살던 이반 뇌제는 1584년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이후 러시아는 혼란에 빠졌다.

이반 4세가 죽은 후 러시아는 동란 시대라고 불리는 동란의 시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차르가 사망한 틈을 노린 폴란드-리투아니아스웨덴 군대가 러시아 동부를 침공해 들어왔고, 때문에 러시아 북동부와 북부 지역은 초토화되어버렸다. 이반 뇌제의 아들인 표도르 1세가 후계를 남기지 못하고 1598년 세상을 뜨면서 러시아에는 정당한 제위 계승자가 사라지며 극도의 혼란상이 도래했다. 거기다가 1601년부터 1603년까지 약 3년여에 걸쳐 여름에 추운 날씨가 지속되며 농작물들이 말라죽었고, 이로 인해 엄청난 가뭄과 기아가 찾아왔다. 류리크 왕조의 혈통이 끊긴 모스크바는 표도르 1세의 아내 이리나 고두노바의 오빠인 보리스 고두노프가 차르로 선출되었다. 1598년부터 1605년까지 러시아를 다스린 보리스 고두노프는 흔들리는 러시아를 지키기 위해 노력을 다했으나, 일단 황실의 일원이 아니었기에 정통성이 떨어졌고 각종 자연재해와 귀족과의 갈등이 겹치면서 러시아는 갈수록 혼란스러워졌다. 보리스 고두노프 치세의 러시아는 동란 시대를 거치며 재앙에 가까운 나날을 보냈다.

이 불안정한 시기에 이반 4세의 막내 아들인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가 살아있다는 소문을 교묘히 활용해서 가짜 드미트리가 출현했다. 폴란드 귀족들의 지원을 받은 가짜 드미트리 1세는 보리스 고두노프의 죽음을 틈타 어리고 미약한 표도르 2세를 살해하고 모스크바를 장악했지만 10개월만에 민심을 잃고 쫓겨났고, 류리크 왕조의 머나먼 방계 출신인 바실리 4세가 즉위했다.[10] 그러나 직접 개입을 결심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사가 러시아 침공을 감행했고[11], 결국 1605년에 폴란드-러시아 전쟁이 일어났다. 바실리 4세는 칼 9세에게 켁스홀름[12] 일대의 라도가 카렐리야를 내주는 조건으로 지원을 받았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명장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Stanisław Żółkiewski 1547~1620)가 이끄는 후사르 기병대에 먼지나게 털렸다. 여기에 가짜 드미트리 1세 본인을 자처하는 가짜 드미트리 2세가[13] 나타나면서 러시아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결국 1610년 모스크바에 입성한 지그문트 3세는 바실리 4세를 폐위시키고 러시아 보야르들을 위협하여 자신의 맏아들 브와디스와프 왕자를 차르로 선출시켰다. 그러나 러시아 보야르들이 브와디스와프의 정교회 개종을 조건으로 내걸자 지그문트 3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러시아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대상인 쿠즈마 미닌과 보야르들 중 하나였던 드미트리 포자르스키가 이끄는 의용군이 결국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세임이 전비 지원을 거부하면서 1612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


2.2.1. 로마노프 왕조 (1613–1917)[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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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프 왕조의 시조인 미하일 1세
러시아의 영토확장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쫓아낸 러시아 귀족들은 전국회의를 열어 전후 수습과 새로운 차르 선출에 대해 논의했다. 당시 러시아의 귀족인 보야르들과 정교회의 사제들은 폴란드를 내쫓는 데에 큰 공헌을 한 드미트리 포자르스키를 견제하기 위해 최대한 세력도 없으면서 정통성은 가지고 있는 별볼일없는 사람을 황제로 내세우고 싶었고, 결국 전국회의에서는 1613년 류리크 왕조의 외척인 미하일 로마노프(Михаил Фёдорович Романов)를 차르로 선출했다.[14] 이 시점부터를 로마노프 왕조의 시작으로 본다.

새롭게 차르로 선출된 미하일 로마노프는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스웨덴과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러시아를 회복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특히 국내 안정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스웨덴이 왕조 분쟁으로 서로 싸우면서 러시아는 한숨 돌릴 틈을 얻을 수 있었다. 비록 1617년에 스웨덴에게 이조라와 라도가 카렐리야를, 1619년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스몰렌스크를 내주었지만 평화 조약을 맺으면서 국경 안정을 꾀할 수 있었다. 루스 차르국은 천천히 영토확장 정책을 펼쳐나갔다. 비록 미하일 로마노프 만년에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와 붙어서 패했지만, 1648년 우크라이나 카자크들이 일으킨 반란을 틈타 폴란드를 침공하여 드네프르강 동쪽의 우크라이나를 빠르게 러시아 영향권 내로 편입시켰다. 당연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뺏어먹는 것을 두고만 보고 있을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아니었기에 1654년부터 1667년까지 13년에 걸쳐 러시아-폴란드 전쟁이 터졌다. 이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기를 잡았고, 결국 1667년 안드루소보 조약으로 폴란드는 러시아에게 드네프르강 동안의 우크라이나 전역, 키예프, 스몰렌스크 등 막대한 영토를 내주고 말았다.

16세기 이반 뇌제 시기 이래 착실하게 진행되던 시베리아 개간은 17세기 로마노프 왕조 들어서도 계속되었다. 1640년대 말 경에 러시아는 태평양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북아메리카아시아를 잇는 베링 해협을 발견했다. 척박한 북쪽의 시베리아 동토들을 다 먹어치운 러시아는 조금 더 비옥하고 살기 좋은 남부까지 장악하기 위해 끊임없이 남진을 계속했지만...... 당시 러시아의 남쪽에는 세계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던 전성기 시절의 청나라가 버티고 있었기에 기대만큼 영토를 넓히지는 못했다. 남쪽으로 내려오려는 러시아와 이를 결사적으로 막으려는 청나라의 영토 다툼은 1680년대까지 계속되었고[15], 결국 1689년에 네르친스크 조약이 맺어지면서 러시아와 중국 사이의 국경 분쟁도 일단락된다.

로마노프 왕조 치하의 러시아는 사회적으로도 꽤나 많은 변혁을 거쳤다. 동란 시대의 지긋지긋한 내전에 질린 러시아의 보야르들은 로마노프 왕조에 협력하기로 결심하면서 자신들의 자치권 중 일부를 내놓았고, 왕실은 이를 바탕으로 약하기 그지없었던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강화된 왕권으로 중앙집권정책을 대대적으로 펼친 덕분에 로마노프 왕조는 옛 류리크 왕조가 꿈도 꾸지 못했을 정도의 왕권을 휘두를 수 있었고, 덕분에 러시아는 이전의 반쯤 도시국가와 부족들의 연합체에서 제대로 된 중앙집권적 국가로 거듭났다.

종교와 관련해서도 일들이 많았다. 1650년대에는 총대주교 니콘이 전례를 간소화하고 그리스어 원전과는 너무 달라진 교회 서적을 바로잡았으며, 성직자의 사목기능을 강조하는 등 종교의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자 러시아 정교회 내에 분열이 생겼으며, 각 교파와 지역에서는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정부는 개혁가 편에 서서 '고의식파'를 억압했다.


3. 러시아 제국 (1721–1917)[편집]



3.1. 표트르 대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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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대제의 초상화
바다를 바라보는 표트르 대제[16]
러시아는 1682년 표트르 대제라는 걸출한 명군이 즉위하면서 본격적인 대제국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즉위 직후부터 군대 개혁에 나선 표트르 대제는 유럽식으로 편제를 일원화하고 처음으로 해군을 창설했으며, 무기 기술이 뛰어난 서유럽에서 무기들을 들여와 군인들에게 보급했다. 또한 대륙국가에 머무르고 있던 러시아를 본격적인 해양국가로 만들기 위해 발트 해로 통하는 제대로 된 부동항을 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러시아가 부동항을 얻기 위해서는 발트해 연안을 독차지하고 있던 스웨덴을 쫓아내야만 했다. 대유럽 교역의 항시화와 안정적인 식량 수급을 위한 부동항 확보에 필사적이었던 러시아는 옛 숙적인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동맹을 맺으면서까지 스웨덴을 견제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아우구스트 2세가 스웨덴령 리보니아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대북방전쟁폴타바 전투를 기점으로 결국 1721년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면서 러시아는 핀란드 만으로 통하는 안정적인 항구와 부동항을 얻어낼 수 있었다.[17]

표트르 대제는 대북방전쟁으로 얻어낸 네바강 하류 이조라에 새로운 수도 건설을 계획했다. 지나치게 내륙에 있어 해상 교역을 통한 유럽과의 교류가 쉽지 않았던 모스크바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천도를 원했던 것이다. 이미 1703년부터 신수도 건설을 기획하고 있던 표트르 대제는 1712년에 신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천도했고, 그 이래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문화적 수도로 자리매김했다.[18] 표트르 대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천도 9년 후인 1721년, 마침내 대북방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전러시아의 황제로 즉위했고, 이를 네덜란드 공화국, 프로이센 왕국이 승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웨덴, 합스부르크 제국, 프랑스 왕국,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러시아의 황제국 지위를 인정해주면서 러시아는 공식적인 황제국으로 대접받게 되었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보통 러시아 제국의 성립 연도를 1721년으로 본다.

표트르 대제는 사회적으로도 대대적인 근대화 개혁 정책을 펼쳤다. 귀족(보야르)들에게 서유럽인들처럼 턱수염을 깎고, 서유럽식 의복을 입고 댄스와 파티에 참석하며 커피 마시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는 조치를 내렸다. 긴 턱수염을 야만적인 타타르의 상징으로 보던 서유럽인들의 시선을 의식했던 것이다.[19]

종교개혁도 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문해력과 조직력이 뛰어난 교회에게 행정의 일부를 맡기는 등 종교계가 공공 업무를 보는 일들이 많았다. 동시대 유럽 국가들에 비해서 행정력이 압도적으로 취약했던 러시아 역시 통제력 증진을 위해 이를 받아들이고자 했고,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 정교회를 공식적으로 국가 행정기구로 편입시켜 황제의 명령을 받들게 만들었다. 표트르는 정교회의 독단적인 행동을 원천차단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있던 총대주교청을 폐지했고, 대신 황제가 더 개입하기 편리한 '시노드', 즉 주교회의를 창설해 러시아 정교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표트르 대제 이래 러시아의 역대 황제들은 덕분에 종교계를 수족처럼 부리면서 왕권신수설 등을 포함해 교회를 자신의 권위를 높이는 선전도구 겸 농민들을 통제하는 고삐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정교가 생활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당시 러시아 농민들의 특성상 교회를 틀어쥔 황제에게 복종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20]

다만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의 개혁에 성공했던 이유에는 단순히 표트르의 개혁 정책과 의지 뿐만 아니라, 당대 러시아에 겹친 두 가지의 행운 때문이었다. 첫 번째 행운은 유럽의 군사력이 급격한 변혁기를 일단락하고 안정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기술을 외부에서 도입하는 것만으로도 그럭저럭 유럽의 군사기술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거대 국가로서의 이점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으므로 빠른 속도로 강대국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다. 두 번째 행운은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할 세력이 부재했다는 것인데, 이 전에 강성하던 폴란드는 크게 쇠약해져 있었고, 합스부르크 제국은 남으로는 오스만 제국과, 서로는 프랑스 왕국과 치열한 전쟁을 거듭했으며 훗날의 강대국인 프로이센 왕국이 아직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로 인해 러시아가 스웨덴을 격파하고 동유럽에서의 세력균형을 무너뜨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견제할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는데, 이는 한 나라가 강성해지면 주위의 다른 나라들이 연합해서 끌어내리는 것이 역사의 기본 패턴인 유럽에서 정말로 드문 현상이었다.[21]

러시아 근대화의 기틀을 놓은 표트르 대제는 1725년 사망했다. 당시 후계자인 황태손이 너무 어렸기에 표트르의 정부였던 예카테리나 1세가 대신 황제로 즉위한다. 그러나 예카테리나 1세는 몇년가지 못해 건강 악화로 사망했고, 그녀의 뒤를 이어 황태손이 표트르 2세로 제위를 물려받았다. 표트르 2세는 14살의 어린 나이로 천연두에 걸려 죽었고, 이로 인해 로마노프 왕가의 정통 남계 핏줄은 끊기고 말았다. 이후 안나 이바노브나, 이반 6세,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표트르 3세가 연이어 즉위했다. 이 시기 러시아는 워낙 많은 군주들이 죽거나 쿠데타로 쫓겨나면서 표트르 대제 시절 이룩해놓은 국력이 흔들리는 듯 보였다. 이들 중 그나마 옐리자베타 여제가 특기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옐리자베타 여제는 리보니아와 쿠를란트-젬갈렌 지역을 확실히 얻어내려는 목적으로 프로이센 왕국7년 전쟁을 벌였고, 표트르 사후 반동적인 보수화 정책을 막고 표트르 대제의 근대화, 개혁 정책을 이어받으며 나름대로의 치적을 쌓았다. 예카테리나 2세가 나타나기 이전까지의 러시아를 다스린 나머지 군주들은 별다른 업적도 남기지 않았고, 워낙 짧은 기간 동안만 재위한 탓에 별로 볼만한 것은 없다.


3.2. 예카테리나 2세[편집]


흔들리는 러시아를 다잡은 사람은 1762년 즉위한 예카테리나 2세, 즉 예카테리나 대제였다. 예카테리나 2세가 즉위하기 직전 러시아를 다스리던 차르는 표트르 3세였다. 그러나 표트르 3세는 국가기밀을 프로이센에 넘겨버리겠다라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등[22] 적국인 프로이센에 협력하는 것 같은 행태를 보이며 민심을 잃어버리고 있었고, 심지어 권력 유지의 핵심기반인 정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며 종교계의 지지까지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표트르 3세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이 극에 달하자 결국 1762년 그의 부인이었던 조피가 근위대를 데리고 반란을 일으켜 표트르 3세를 폐위시켰고, 새롭게 예카테리나 2세로 즉위했다.[23] 러시아 제국은 이 예카테리나 2세 시절에 다시 새롭게 비약할 힘을 얻어낸다.

예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 3세와 결혼한 독일 출신의 공주로, 자기 남편을 쫓아내고 황위에 올랐다는 근본적인 약점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준 귀족들의 비위를 맞춰 줘야만 했다. 때문에 예카테리나 2세는 귀족들의 권한을 대폭 강화해주었고, 농노들의 권리를 제한하고 거의 귀족들에게 예속된 노예 수준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표트르 대제 시절 실시한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을 폐기하고 귀족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하는 지방분권형식으로 나라를 다시 바꾼 것이다. 예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식 왕권강화, 서구식 개혁의 상징이었던 턱수염 제한 및 수염세(턱수염을 기르는 자에게 물리는 세금)를 폐지했고, 황제 직속 행정기구들을 축소하였으며 대부분의 행정업무들을 귀족의 재량에 맡겼다. 예카테리나 2세 시절 고착화된 귀족과 농노들 사이의 경직된 관계는 러시아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이때부터 시작된 사회적인 모순과 지나친 수탈은 이후 러시아에서 공산주의가 싹트는 바탕이 되었다.[24]

러시아는 예카테리나 2세 시절에 대대적인 영토 확장에 열을 올렸다. 예카테리나 2세가 어찌되었든 표트르 대제 사후 일어났던 혼란기를 끝내면서 온전히 국력을 외부로 투사할 수 있을 만한 조건이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러시아는 주변의 여러 지역들을 잇달아 병합하면서 거대한 규모로 팽창할 수 있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서구에서 무기를 사들이고 대규모 군사훈련을 진행하는 등 군대의 질 향상에도 노력을 기울였고, 군사 기술이 향상되자 시베리아 및 중앙아시아 정복과 진출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또한 1773년과 1795년에는 폴란드 분할에서 가장 큰 영역을 차지했고, 1783년에는 크림 칸국을 병합했다. 오스만 제국에 대해서도 공세를 시작해서 1792년에는 동으로는 캅카스 지방의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서로는 드네스트르강까지 이르렀다. 북으로는 1790년에 비록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3세[25]에게 막혔으나, 1796년에는 동부 조지아에 쳐들어온 페르시아카자르 왕조를 격퇴하고 캅카스 해안가의 페르시아 영향력을 일소시켰다.

앞에서 말했듯이 예카테리나 2세가 연이어 귀족들에게 지나칠 정도의 권한을 많이 실어주었기에 농노들 사이에서 정부에 대한 반감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거기다 러시아가 끊임없이 해외를 침공하면서 전쟁을 벌이자 엄청난 수준의 전비가 필요해졌고, 귀족들의 재산을 감히 뜯어내기는 힘들었기에 정부는 농노들을 쥐어짜서 이를 충당했다. 때문에 농노들은 깨어있는 시간 거의 대부분을 귀족 소유의 땅을 경작하면서 보냈고, 그 생활수준의 비참함은 산업혁명 시절의 웬만한 노동자와 비견될만한 수준이었다. 상황이 이랬으니 당연히 농노들 사이에서도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 1773년 예카테리나 2세가 농노와 토지를 따로 떼어 판매할 수 있는 법령을 통과시키자 농노들 사이에서 대규모 민란이 일어났고, 이들은 한때 모스크바 인근까지 점령하면서 '모든 지주를 매달아라'라는 구호를 외치고 다녔다. 농노들의 반란에 놀란 예카테리나 2세는 이들을 군대로 강력히 진압했으나, 이후에도 수 차례 대규모 농노 반란이 일어나는 등 예카테리나 2세 재위기 러시아에서는 내부적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26]

1799년에는 베링 해를 건너 아메리카 식민지를 경영하였고, 1813년 이란의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페르시아 북부를 차지하였다. 이후 청나라가 쇠퇴의 길을 걸으면서 위구르몽골에 영향력을 미쳤고,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연해주를 얻으면서 만주까지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결국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사활동으로 가장 큰 덕을 본 것은 프로이센도 영국도 아닌 러시아였던 셈이다.


3.3. 유럽의 강대국[편집]


표트르 대제의 뒤를 이어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넓히고 국력을 드높인 예카테리나 2세는 1796년 사망했다. 예카테리나 사후 그녀의 외아들인 파벨 1세가 새롭게 제위에 올랐다. 표트르 3세과 예카테리나 2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파벨 1세는 표트르 3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예카테리나 2세와 썩 순탄치는 못한, 껄끄러운 관계였다. 어린 시절 예카테리나 2세와 잠깐 동안 함께 지낸 적도 있지만, 아무래도 아버지를 쿠데타로 몰아내고 즉위한 어머니였기에 평범한 모자관계는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예카테리나 사후 황제가 된 파벨 1세는 즉위하자마자 연이어 실책을 남발하며 권력층들의 반감을 샀다. 당시 유럽에서는 프랑스 혁명이 터진 상황이었는데, 엄격한 전제군주정을 추구하던 파벨 1세는 공화정의 이념을 내세운 프랑스 혁명에 경악했고 결국 러시아 내에서 모든 프랑스풍 문물들을 금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연히 프랑스 문화를 선진적인 것으로 여기고 살던 귀족들은 이에 반발했다. 물론 전국민적으로 프랑스에 대한 반감이 퍼지면서 결국 어쩔 수 없이 프랑스식 생활양식을 버리기는 했지만, 귀족들이 황제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파벨 1세의 실책은 이에서 그치지 않았다. 전대 차르인 예카테리나 2세는 부족한 정통성을 만회하기 위해 신하들에게 많은 권한과 재산들을 뿌려댔지만, 아쉬울 게 없었던 파벨 1세는 오히려 귀족들이 대신 데리고 있던 국가 소유 농노들을 다시 환수하고 1주일에 4일은 지주에게 봉사해야 했던 농노들의 의무를 3일로 감축하고 남는 날에는 국영 토지에서 일하도록 만들어버렸다. 게다가 당시 전쟁영웅이었던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대원수를 박대하고 적국과 다름없던 프로이센군처럼 군대를 개혁하려 시도하면서 군대의 반감을 사는 최악의 수를 두고야 말았다. 결국 귀족과 군대 모두가 파벨 1세를 배신했고, 결국 파벨 1세는 궁전에서 암살당했다.

파벨 1세가 암살당한 이후 새로운 차르로 즉위한 사람은 파벨 1세의 장남인 알렉산드르 1세였다.[27] 당시 알렉산드르 1세는 아버지의 암살 계획도 알고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서 사실상 아버지의 암살을 방치했고, 때문에 암살 직후 상당한 죄책감을 안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어찌되었든 알렉산드르 1세가 즉위한 1801년은 호락호락한 시대가 아니었다. 당시 유럽은 한창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 제1제국이 휩쓸고 다니던 시절이었고,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이 나폴레옹의 위세 앞에 찍소리 못하고 엎드려 기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이념인 혁명과 인권 등의 사상을 널리 유럽에 퍼뜨리고 다녔고, 자유주의자이기는 했지만 엄연한 전제군주였던 알렉산드르 1세는 아이러니하게도 나폴레옹의 성장을 막아야만 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3.3.1. 나폴레옹 전쟁[편집]


나폴레옹과 그에 맞서는 타 유럽 국가들이 충돌한 나폴레옹 전쟁에서 처음에 러시아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일정 부분 거리를 유지했다. 다만 나폴레옹과 프랑스의 반대편에 서 있던 것만큼은 분명했기에 오스트리아가 SOS를 치자 러시아는 유럽의 균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참전하게 된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1세는 전쟁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는 책상물림이었기에 전술의 천재였던 나폴레옹 앞에서 처참하게 깨져나갔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대패하면서 어쩔 수 없이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패색이 짙어진 러시아는 프랑스와의 평화 조약인 틸지트 조약[28]을 맺었는데, 당시 러시아에 대해 개인적인 호감을 갖고 있던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유럽 지배의 동반자로 삼고 싶어했기에 틸지트 조약에서 프랑스와 러시아는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동등한 위치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29]

유럽 대륙 대부분을 무릎꿇린 나폴레옹에게 유일하게 남은 적수는 도버 해협 너머의 영국이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대륙 봉쇄령을 펼쳤는데, 영국의 공산물이 필수였던 러시아는 이를 무시하고 영국과 꾸준히 교역을 했다. 이는 당연히 나폴레옹의 심기를 건드렸고, 이 와중에 프랑스가 새롭게 합병한 영토들 중 알렉산드르 1세의 외가 친척이 다스리던 올덴부르크 공국이 포함되면서 이를 계기로 프랑스와 러시아의 관계는 완벽하게 파토나고야 만다. 알렉산드르 1세는 프랑스 대사를 소환하면서까지 프랑스의 올덴부르크 합병에 항의했고, 안 그래도 사사건건 엇나가는 러시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제대로 손봐주기 위해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켰다.

1812년 나폴레옹은 60만 대군을 이끌고 그 유명한 러시아 원정을 감행했고, 알렉산드르 1세도 오스만 제국과 빠르게 평화 협정을 맺어 프루트강 동쪽의 몰다비아 공국 영토를 빼앗는 선에서 러시아-튀르크 전쟁을 마무리했다. 초기에는 나폴레옹이 승승장구했다. 러시아의 최고사령관인 알렉산드르 1세의 타고난 무능함과 연이은 군사령관 인사 실패로 인해서 러시아군이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린 것이다. 결국 4일만에 빌나가 나폴레옹의 손에 떨어졌고, 얼마 가지 않은 그해 9월에 사실상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함께 러시아의 실질적 수도나 다름없던 모스크바가 무너져 내렸으며 러시아 인구 상당수가 프랑스 점령지 내에 살고 있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러시아에는 러시아의 겨울이라는 비장의 수가 있었다. 러시아는 본격적으로 청야전술을 펼치면서 프랑스군이 현지에서 보급이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따스하고 살기 좋은 프랑스에서 온 프랑스 군인들은 러시아의 혹독하기 짝이 없는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픽픽 쓰러져 나갔다. 나폴레옹은 호기롭게 쳐들어온 것과는 달리 필사적으로 눈보라를 헤치며 프랑스로 후퇴했고, 그 와중에 기세가 오른 러시아 제국군과 민병대는 끊임없이 후퇴하는 프랑스 군대를 때렸다.

프랑스는 러시아 원정을 통해서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일단 원정 초기에는 60만 명에 달하던 병력이 돌아올 때에는 9~12만 명이라는 초라한 수준으로 전락했다. 게다가 수많은 대포와 무기들을 원정 도중 상실했으며, 결정적으로 나폴레옹의 불패 신화가 깨지면서 유럽 곳곳에서 나폴레옹의 반대파들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결국 러시아에서 전력의 대부분을 날려먹은 나폴레옹은 점차 몰락의 길을 걸었고, 수많은 반나폴레옹 세력들이 군대를 모아 러시아와 함께 프랑스를 공격했다. 러시아와 스웨덴,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등 제6차 대프랑스 동맹군은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대패한 나폴레옹은 철저히 몰락했다. 반면 러시아와 그 동맹국들은 희희낙락하면서 유럽을 나폴레옹 등장 이전으로 되돌리기 위해 빈 회의를 열었다. 당연히 나폴레옹을 꺾는 데 가장 지분이 컸던 러시아의 목소리는 매우 강했고, 이를 기점으로 러시아는 폴란드 지역을 집어삼키는 동시에 유럽의 해방자로 칭송받으며 본격적인 유럽의 강대국으로 급부상했다.

나폴레옹 전쟁과 빈 회의 이후 러시아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커지자 유럽 국가들은 오히려 러시아의 패권주의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의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프랑스가 균형을 잡아주지 않으면 러시아가 그 앞잡이인 프로이센(적어도 메테르니히의 생각으로는 그랬다)을 앞세워서 독일 지역과 유럽의 패권을 장악할 것을 우려하게 되었다. 이는 무패였던 프랑스군을 최초로 대파한 러시아의 군사력에 유럽국가들의 과장된 불안감이 반영되었든 것이다.[30]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은 빈 체제에서 프랑스를 짓밟지 않고 오히려 프랑스의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적극적으로 인정한 이유 중 하나였다. 이 덕에 프랑스가 복수를 부르짖으며 난동을 피우지 않았다.[31] 100년 뒤의 조약과 상당히 비교되는 부분이다.

나폴레옹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던 러시아는 겉보기에는 이제 웬만한 유럽 강국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정도의 강국으로 급부상했지만, 실제로 그 속을 뜯어보면 유럽 국가들에 비해서 한참 내부적으로 뒤처진 상황이었다. 표트르 대제 이래 러시아의 고질적인 병폐였던 농노제가 아직도 유지되고 있어 사회적으로 가용한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서유럽의 국가들이 산업혁명과학혁명 시기를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대량생산의 시대에 접어든 것에 반해 러시아는 아직도 후진적인 수공업 경제체제에 머물러 있었다.

3.3.2. 니콜라이 1세[편집]


1825년 알렉산드르 1세가 사망하자 옛 파벨 1세의 차남이었던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이 즉위했으나 25일 만에 아우 니콜라이 1세에게 양위하였다. 1825년 즉위한 니콜라이 1세는 즉위 직후부터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마주한다. 데카브리스트의 난의 배경에는 나폴레옹 전쟁이 있었다. 당시 러시아 장교들은 나폴레옹 전쟁 참전을 위해 대거 서유럽에 투입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러시아보다 훨씬 자유롭고 활기찬 분위기인 서유럽의 자유주의적인 문화에 물들어 버린 것이다. 서유럽에 감명받은 엘리트 장교들은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러시아에서 그 경직성을 실감했고, 혁명이 발발하기 전에 지배층이 먼저 개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32] 1825년 12월 14일에 이들이 일으킨 데카브리스트의 난의 명분은 니콜라이 1세를 몰아내고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을 황제로 세운다는 것이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반란에 경악한 니콜라이 1세는 귀족들의 권력이 너무 강하여 이런 일이 발생한다 여기고 즉위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철저한 전제군주국으로서의 러시아 제국을 만들어 나갔다.[33] 다시는 반란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엄격한 검열 제도를 실시하여 대학과 고등교육기관의 교과서를 철저히 검열했고 언론의 자유를 제한했으며 곳곳에 헌병대를 깔아두면서 사회적으로도 촘촘한 감시망을 만들었다. 철저히 황제 중심의 권위주의적 정치를 펼친 니콜라이 1세는 소위 반동분자들을 시베리아의 유형소로 보냈고, 그의 이같은 노력(?) 덕분에 러시아에서는 귀족들의 권력이 약화됨과 동시에 자유주의적 바람이 어느 정도 수그러들었다.

니콜라이 1세는 유럽 대륙에도 많은 신경을 쏟았다.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과 함께 자유주의 억압과 군주정의 보존을 위한 모임인 신성동맹을 창설하여 적극적으로 유럽의 자유주의자들을 탄압했고, 때문에 '유럽의 헌병'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830년 프랑스에서 7월 혁명이 일어나고 이에 영향을 받아 러시아가 통치하던 폴란드 입헌왕국에서 1831년 11월 혁명이 터지자 니콜라이 1세는 이를 군대로 밀어버렸다. 러시아는 혁명 직후 더욱 가혹한 통치를 하면서 폴란드인들을 탄압했고, 결국 1863년에는 또다시 1월 혁명이 폴란드에서 대대적으로 터져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인의 자치권 요구를 들어줄 마음이 전혀 없었던 니콜라이는 이조차도 깔끔하게 쓸어버렸고, 폴란드는 이전보다도 더욱 비참한 삶을 살게 된다. 러시아는 자국 뿐만 아니라 타 유럽 국가에서도 자유주의, 민족주의를 억누르기 위해 애썼다. 1848년에 프랑스의 2월 혁명 직후 프랑스와 국교를 단절했고, 1849년에는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는 원군을 파병하기도 했을 정도로 니콜라이 1세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혐오는 엄청났다.

하지만 한편으로 니콜라이 1세는 점진적인 개혁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데카브리스트의 난 진압 후 데카브리스트 사상을 연구하는 부서를 만들어 그들의 주장을 검토하게 하기도 했고 황제원 제2부의 총책임자 미하일 스페란스키의 주도 하에 러시아의 성문법을 최신화하였으며[34], 재무장관 예고르 칸크린의 주도하에 화폐개혁도 실시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차르의 권력에 위협이 되는 농노 제도를 싫어했던 니콜라이 1세는 여러 위원회를 만들어 유럽 러시아 전역에서 농촌에 대한 통계자료를 수집하고 귀족들의 농노에 대한 지배력을 점차 약화시키며 농노제를 철폐해 나갔다.[35]


3.3.2.1. 크림 전쟁[편집]

유럽의 헌병이라는 칭호를 휘두르며 자유주의, 민족주의를 극도로 억압하던 니콜라이 1세는 결국 오스만 제국과 벌어졌던 크림 전쟁에서 무너졌다. 당시 니콜라이 1세는 옛날부터 이미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야금야금 잠식해가고 있었다. 페르시아카자르 왕조를 협박해 1813년 다게스탄, 그루지야 동부, 아제르바이잔을 뜯어냈고, 이때 얻어낸 그루지야 지역을 기점으로 쇠퇴해가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노리고 있었다. 1828년 일어난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간의 전쟁에서 러시아는 오스만 내의 그리스 정교 신도들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아나톨리아 반도 북동부 해안가를 침략했고, 이에 그대로 눌러앉으며 오스만 제국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나폴레옹을 꺾은 후 기세등등하던 러시아는 보스포루스 해협에 대한 자유로운 통행권, 오스만 내 정교회에 대한 권리 등을 요구하며 오스만 제국을 몰아붙였다. 사실 유럽인, 튀르크인들 모두 유럽의 강국으로 인정받던 러시아에 이미 막장 테크를 타는 오스만 제국이 세게 나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지나친 세력 확장과 자유주의 탄압으로 인해 불안을 느끼고 있던 영국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고, 군사든 무기든 오스만이 원하는 대로 퍼주겠다고 천명하면서 결국 영--오스만 연합군과 러시아 제국군 사이에서 1853년에 전쟁이 터졌으니 이를 크림 전쟁이라 부른다. 초기에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러시아였지만 연합군, 개중에서도 특히 당시 세계 최강이던 영국군의 포화세례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영국 해군태평양, 발트해 등 양면에서 러시아를 몰아붙이자 결국 러시아는 눈물을 머금고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해 패전을 인정했다. 나폴레옹 전쟁 승리 이래 축제 분위기 속에 빠져있던 러시아에게 크림 전쟁의 패배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특히 황태자 알렉산드르가 무기력한 협상을 벌이는 것을 바라만 봐야 했던 니콜라이 1세는 결국 실의에 빠져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을 정도.[36]


3.3.3. 근대화의 움직임[편집]



3.3.3.1. 알렉산드르 2세[편집]

니콜라이 1세가 크림 전쟁 패전의 충격으로 사망한 이후, 알렉산드르 2세가 1855년 새 황제로 즉위했다. 아버지를 대신해 파리 강화회의에서 패전의 쓴맛을 본 알렉산드르 2세는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더이상 아버지의 보수적인 정책과 점진적인 개혁을 그대로 답습했다가는 러시아가 영국, 프랑스 등 전통적인 서양의 강대국들과 비빌 수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에 알렉산드르 2세는 러시아 제국을 한 차례 갈아엎는 수준의 대대적 개혁을 단행한다. 알렉산드르 2세가 제일 먼저 손댄 것은 바로 농노 제도였다.


3.3.3.1.1. 농노 해방령[편집]

파일:Reading_of_the_Manifest_(Liberation_of_peasants)_-_Kustodiev,_1907.jpg
농노 해방령 포고식
사실 '전제정'인 러시아 제국에서 농노제 같은 '봉건정' 제도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전대 차르들도 농노제를 악으로 규정하고 그 폐해를 인지하고는 있었으나, 섣불리 귀족들로부터 농노를 빼앗는다면 귀족들이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 두려워했다.[37] 알렉산드르 2세의 아버지인 니콜라이 1세 또한 급진적 철폐 대신 점진적 철폐를 선택했다.

그러나 크림 전쟁 대패 이후 사회적으로 무언가 개혁해야만 한다는 분위기가 몰아쳤고, 러시아 내부에서 자본주의자들이 성장하며 더 많은 인력을 끌어모으기 위해 농노들을 해방하라는 압력이 강해졌으며 점점 더 많은 농민 폭동들이 일어남과 동시에 사회적으로도 인도주의 바람이 불자 마침내 농노 해방이 가능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는 이 기세를 몰아 착실하게 준비한 끝에 결국 1861년 2월 19일, "지주의 사유지에 거주하는 농민과 가내 농민들에 대한 농노제를 영원히 폐지한다"는 농노 해방령을 포고했고, 이로 인해 러시아의 농노제는 마침내 끝을 맞았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 역시 존재했다. 사실 농노 해방령은 굉장히 불충분한 개혁이자, 농민들에겐 기만이나 다름없는 정책이었다. 정부는 실제 토지의 절반 이상을 지주와 귀족들에게 그대로 남겨주고 나머지 절반만을 사들여 농민들에게 분배했다.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에게 주어진 땅은 전 농경지의 절반도 되지 않았으니 당연히 땅이 모자랐고, 농민들의 실점유 토지는 해방 전보다 20% 가량 감소했다. 게다가 지주에게 해방되었다는 명목을 내세우면서 정부는 농민들에게 가혹한 세율을 강요했다. 지나친 세금과 경제 파탄에 직면한 농민들은 어쩔 수 없이 전 주인들에게 빚을 지고 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농민들은 법률상으로만 속박되어 있지 않다 뿐이지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지주들에게 예속된 상황이었다. 또한 정부가 해방된 농민들에 대한 통제력 강화를 위해 농민 공동체인 미르의 권한을 대폭 강화시켰는데, 이 때문에 농민들은 공업 노동자로 마음대로 변신할 수도 없었으며 이는 러시아의 산업화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 거기다 정부는 재산의 54%를 정부에 빚지고 있던 귀족 지주들에게 상환금을 변제하고 남은 액수만 지급하여 귀족들 역시 정부에 기만당한 셈이 되었다.


3.3.3.1.2. 부정적인 면에 대한 반론[편집]

러시아 농노제 및 농민에 대한 나무위키의 관련 문서들은 대개 상기 내용들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해당 논리는 80년대 이전에 주류였던 전통주의적 사관이고 현재는 전통주의적 사관의 기본 구조를 따르는 학자들도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걸 인정하는 편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제정 러시아의 노동자 및 농민 빈곤, 농업 위기에 대한 전통주의적 관점은 20세기 초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이론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러시아의 농민들이 소수의 부농과 다수의 빈농으로 양극화와 '계급 분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점점 더 빈곤해지고 있는 대다수의 '농민 프롤레타리아'가 도시 노동자 계급에 합류하여 전위당의 지도 아래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38] 이러한 이론은 초기 소련 역사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졌고 서방의 반공주의 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39] 문제는 시대적 한계를 제외하더라도 레닌과 지지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인 지방자치단체(젬스트보)의 통계자료들이 신빙성이 낮으며 정치적 이유로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것이며, 레닌 자신부터가 이데올로기적 이유로 이런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즉 농민과 노동자 계급은 수동적이고 후진적인 피착취계급이자 미래의 혁명계층이어야만 했고 그 이외의 해석은 존재할 수 없었다.

일단 러시아 제국은 니콜라이 1세 이후로 봉건귀족들의 권리를 억제하는 전제군주정이 되었기에, 전제권력이 귀족을 견제하지 못할 정도로 약화된 시기나 전쟁, 흉년 등의 비상상황이 아닐 경우 귀족이 농노를 마음대로 죽이거나 학대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법적 측면에서는 단지 농노가 사회적 약자고 땅이 커서 행정력이 닿지 않는 곳이 많아서 법의 보호를 받을 기회가 적었던 것이지 법이 없었던건 아니었다. 반대로 대다수 귀족들이 농노를 가혹하게 착취했냐면 그건 또 아니다. 귀족도 자신 재산상의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라도 농노가 생계를 이어나가게 해줘야 했다. 또한 귀족들은 영지에 살지 않았고 영지 관리는 대리인[40]과 농민공동체 대표들이 협의해서 이루어졌다. 게다가 러시아 특유의 거대한 땅덩어리와 다양한 민족, 종교, 언어 구성 때문에 귀족의 농노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력은 타 유럽 국가들에 비해 크게 낮았다.[41] 때문에 귀족들도 굳이 억지로 통제하기보다는 유연하게 풀어주는게 많았고, 실제로 18세기 말에 중부지역에서는 농노의 1/4 이상이 공식 이동증을 발급받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 비공식적으로 이주한 사례가 훨씬 더 많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전쟁 같은 위기 상황이 아닌 이상에야 러시아 제국의 농노 이동성은 자유로웠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의 농노제는 귀족의 농노에 대한 통제력을 제한하려는 차르들, 농노와 귀족의 경제적 필요로 인해 이미 18세기부터 자연스럽게 해체 수순을 밟고 있었다. 1861년의 농노제 폐지는 그 가장 큰 전환점 중 하나였을 뿐이다. 오히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러시아 농노제란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닿지 않고 지방유력자들의 영향력이 강한 비러시아계가 많이 사는 변방 지역에서 더 많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상대적으로 열악한 농업 조건 때문에 러시아 농민들은 농노 시절에도 (전근대 농민 기준으로) 농업에 크게 종사하지 않았다. 러시아 농민은 직업구분이 아니라 신분구분이며, 때문에 농업을 가지고 농민을 평가하는건 처음부터 핀트를 잘못 잡은 주장이다. 농노가 해방되면서 토지를 받는데 두 가지 선택권이 있었다. 첫째는 토지상환금을 지불하지 않는 대신 최소크기의 토지만을 받는 것이고, 둘째는 토지상황금을 지불하면서 평균크기의 토지를 받는 것이다. 당시 농민 입장에서 굳이 돈을 벌자면 도시로 가서 노동자로 일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농업에 종사하더라도 일단 전자를 선택하고 부족한 양이 생기면 지주의 토지를 임대하는 편이 훨씬 더 싸게 먹혔다. 때문에 토지가 많든 적든 크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두번째로 애시당초 농민들은 토지상환금을 지불할 수 없으면 안냈고, 국가에서도 지속적으로 연기, 감면해주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면제시켰다.

현재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러시아 농노제 자체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러시아 농노제가 정치적, 사상적 이유로 지나치게 편향적으로 고착된 이미지가 크다는데 동의한다.[42] 물론 농노를 노예처럼 다루던 귀족들도 많았겠지만 반대로 타 유럽국가들에서 (설령 농노제가 없었어도) 농민이 이런 상황에 처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 시대에선 어느 나라든 농민은 착취당하는 존재가 맞지만 반대로 아무리 착취하고 예속해봐야 비슷비슷한 수준일 수 밖에 없다. 오히려 거대한 영토로 인한 물리적인 제약과 귀족을 견제하려는 차르의 존재로 인해 러시아 농노들이 타 유럽의 농민들보다 훨씬 더 나은 조건이었다. 러시아 농민들의 최대의 난적은 국가나 귀족의 착취가 아니라 농업에 부적합한 러시아의 자연환경이었고, 때문에 농노들은 귀족의 지원을 받아 비농업 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그 중에서는 많은 농노 신분 자본가와 지주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3.3.3.1.3. 대개혁, 그리고 반개혁[편집]

알렉산드르 2세 시기 최대의 사건이 농노 해방령이기는 했지만, 농노 해방령에 묻혀서 그렇지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 해방령 외에도 대격변이라고 할 만한 수준의 개혁 정책들을 연이어 내놓으면서 급격한 개혁을 펼쳤다. 1864년에 러시아 정부는 빈약하기 짝이 없었던 지방 자치단체들을 체계화하기 위해 '주, 군 지방자치기관에 관한 법령'을 제정하고 각지에 젬스트보(지방 의회)와 도시 의회를 설치했다. 의회는 기본적으로 지주, 도시 계급, 농민 이 3계급이 각각 의원을 선출하여 모여 만들어진 러시아의 지방의회로, 귀족과 지방 토호들을 밀어내고 지방 행정을 도맡았으며 관리 분야는 보건, 노동, 우편, 의료, 산업, 교도소 운영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져 있었다. 여러 계급, 직업들의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진 젬스트보는 이전의 귀족들의 경직된 통치에 비해서 훨씬 자율적이고 효율적인 행정이 가능했고, 덕분에 보험 제도, 우편 제도, 의료 제도 등이 빠른 속도로 개선될 수 있었다. 그러나 좋은 점만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젬스트보는 지방 관련 현안에만 권한이 있었기에 중앙에서 내려보낸 귀족 관리들과 사사건건 충돌하며 잡음을 냈고, 젬스트보의 의장직은 항상 귀족들이 꿰차고 있었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의원 선출 구조 자체가 유력자들과 귀족들에게 지나치게 유리한 구조라는 근본적인 한계 역시 존재했다.

재정 개혁도 진행했다. 당시 러시아는 크림 전쟁을 포함한 수많은 전쟁들로 인해서 이미 재정이 거의 파탄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1857년 한 해의 재정 적자만 무려 7,500만 루블이었다. 러시아의 경제력이 유럽보다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시를 핑계로 루블화를 지나치게 많이 찍어냈으니 재정이 급속도로 악화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1863년에 재무장관 타타리노프의 주도 하에 재정 개혁이 실시되었고, 모든 정부 기관에 예산안을 필수적으로 제출할 것을 요구했으며 해외 각국의 감사 제도를 도입하여 부정부패를 감시하고 정부의 지출을 공개하여 투명도를 높이고자 했다. 러시아 관료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러시아의 재무 상태는 개혁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그러나 균형 재정을 만드는 데에는 실패했는데, 일단 철도 건설 비용, 그리고 지주에게 주는 과도한 토지 보상금의 양이 엄청났을 뿐더러 알렉산드르 시기 러시아에서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정부패가 만연했기 때문이었다. 최종적으로 정부의 부채는 날로 늘어나기만 해서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1881년 러시아의 국가부채는 60억 루블에 달했고 결국 빚을 줄이는 데에는 아예 실패해 버렸다.

교육 개혁도 진행했다. 1862년 교육성 장관으로 취임한 골로브닌에 의해 대학법이 폐지되어 대학교의 권리(대학의 부분적인 자치, 총장이나 학장의 선출권 등)가 돌아왔고, 대학교는 더 이상 정부의 감시를 받지 않게 되었다. 더해서 대학 정원 제한을 폐지하며 청강생에게도 대학을 개방하였다. 덕분에 여러 도시에서 대학교가 신설됨과 동시에 특수 고등 교육 기관들이 설립되었다. 1864년 6월에는 신분 관계없이 모든 계급의 자녀들이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더해서 <인민 초등학교에 관한 법령>을 선포해 공립 초등학교를 세우고 사립학교의 설립도 허가하여 젬스트보들이 초등학교를 건립할 수 있게 되었다. 교사의 수요를 확충하기 위해 사범학교를 세워 교사를 양성하였고 11월에는 중등 교육 과정을 개설, 김나지야를 8년제 고전 중학교와 6년제 실업 학교로 분류했다. 그리고 여성 교육에도 관심을 쏟아 여성 중등 교육 과정을 만들고 여성 중학교를 설립함과 동시에 1863년에는 여교사 양성 교육 과정을 개설하였다. 1869년에는 대도시에 여성 고등 교육 과정을 만들고 1872년부터는 여의사들이 양성되었다. 교육 개혁으로 인해 라스노친지(잡계급인) 지식인들이 등장하고 문해율이 높아지는 등의 성과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문해율을 서방 국가들 수준으로 끌어올리지는 못했고, 교육 과정에서도 남녀간 불평등이 존재했으며 대학교의 권리가 보장되긴 했지만 대학생들이 단체를 조직할 권리는 없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당시 러시아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들 중 하나는 바로 사법 문제였다. 러시아의 사법 제도는 근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공평하고 후진적인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재판은 비공개로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피고도 데려놓지 않고 서류만으로 재판을 진행했다. 피고는 반론할 기회도 없었고 항소도 어려웠으며, 법은 신분에 따라 극도로 불평등하게 적용되었고 판사나 경찰은 피고들에게 협박이나 체벌, 고문도 거리낌없이 일삼았다. 알렉산드르 2세 시기의 지식인들은 이 상황을 좌시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르 2세는 서구의 사법제도를 받아들이자는 개혁파의 뜻을 받아들여 사법부를 행정부에서 독립시키고[43] 판사의 독립성을 보장해주었다. 또한 재판에 배심원 제도를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제소와 변론을 재판 과정에 포함시켰고 매질, 채찍질 등 가혹한 심문 과정을 배제했다. 덕분에 러시아는 제대로 된 법치국가의 길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고, 법원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확보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체벌은 폐지되었으나 농민들에게는 예외였고 이전보다 훨씬 덜해지긴 했지만 정부 고관들이 여전히 원하는 판결을 얻기 위해 판사를 협박하거나 회유하곤 했다는 한계점이 있었다. 더해서 혁명가들의 테러가 제국의 문제로 등극한 이후 정부는 혁명가들을 사법 개혁의 영향이 덜한 군사 법정에 세우는 꼼수를 부렸다.

크림 전쟁의 패배에서 엄청난 충격을 먹은 러시아는 군사 개혁을 단행했다. 그 대단했던 나폴레옹대육군을 분쇄하고 파리까지 진격했던 러시아 군대가 정작 크림 전쟁에서는 별 힘도 못쓰고 허망하게 패배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적대적인 인접국, 이송 능력 태부족, 숙련된 장교 부족, 농노제, 낙후된 군사 기술 등의 복합적인 이유들로 인해서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결국 1864년 드미트리 밀류틴 백작의 주도로 러시아는 전국을 10개의 군관구로 편성했고, 사관 양성 제도를 개혁한 것에 이어 20세 이상의 모든 러시아 성인 남성들에게 병역의 의무를 지워 안정적인 병력 수급이 가능토록 했다. 러시아 군대 최대 문제였던 물질적인 부분도 개혁에 나섰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의 기술자 실베스터 크른카를 영입해 머스킷 소총을 개량했고, 주철과 청동으로 만들던 대포를 철제 대포로 대체했다. 또한 군대의 체질 개선에 나서 구형 함선들을 퇴역시키고 흑해 함대를 재건하고 요새를 축성했다. 알렉산드르 2세 시기의 군제 개혁으로 인해 러시아 군대는 파리 강화조약으로 위축된 군력을 다시 강화할 수 있었으며, 러시아 제국은 본격적인 군사 대국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이 대개혁은 항상 한계를 지적받았고, 인민주의자들이 혁명 운동에 뛰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급기야 혁명가 드미트리 카라코조프의 차르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자 충격을 받은 알렉산드르 2세는 한동안 보수적으로 변해 강경 보수파 관료들을 등용하여 반개혁 정책을 시작하였다.[44] 하지만 이미 불붙은 혁명 운동을 막을 수는 없었고 이후 1878년부터 지속적으로 암살 위협에 시달린 알렉산드르 2세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다시금 개혁을 시작하기로 했다.


3.3.3.1.4. 영토 확장[편집]

위와 같은 알렉산드르 2세의 야심찬 개혁 덕택에 그의 재위기 러시아는 빠른 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전의 후진적인 봉건 국가에서 완전히 벗어나 근대 국가에 편입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러시아에까지 산업 혁명이 전파되었고, 대규모 기계공업의 성장과 함께 자본을 축적한 부르주아 계급이 성장했다. 러시아의 막대한 자원을 이용해서 금속 공업, 철강업, 석탄 공업 등이 크게 발전했고, 농노 해방령으로 인해 자유의 몸이 된 수많은 농민들을 공장 노동자로 받아들이며 러시아의 산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물론 부정적인 면도 있었다. 산업혁명 시기 노동자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러시아의 노동자들 역시 굉장히 비참한 삶을 살았다. 안 그래도 후진적인 면이 남아있던 러시아는 정경유착이 굉장히 심했기에 정부는 노동자의 권리를 거의 보장해 주지 않았다. 어쨌든 러시아의 산업계는 날로 탄탄해졌고, 이에 힘입어 금융업, 농업, 철도업 등이 연이어 발전하며 러시아의 국력은 크림 전쟁의 피해를 모두 회복하고도 남을 정도가 되었다. 내부적으로 안정을 찾았으니 러시아는 당연히 외국으로 힘을 투사하기를 원했고, 이는 러시아의 영토 확장으로 이어졌다.

알렉산드르 2세는 1858년 한창 쇠퇴해가던 청나라를 협박해 아무르 지역을 합병했으며 1860년에는 베이징 조약 중재의 대가로 연해주를 획득했다. 또한 1867년에는 북아메리카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러시아 영토인 알래스카(러시아령 아메리카)를 미국에 720만 달러에 넘겼다.[45] 1870년대 후반에는 또다시 오스만 제국과 충돌했다. 민족주의가 퍼져나가며 발칸 반도의 슬라브족들이 오스만에 반란을 일으켰고, 호시탐탐 유럽에 진출할 기회만을 노리던 러시아는 냉큼 이에 끼어들었다. 결국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했고, 러시아는 불가리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몬테네그로 반란군에 합세해 오스만에 맞섰다. 러시아는 승기를 잡고 불가리아를 오스만에서 완전히 뜯어내려 들었으나 러시아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영국이 러시아를 협박하며 결국 불가리아는 영토도 대폭 축소되었고 오스만의 형식적 봉신국으로 남겨둘 수 밖에 없었다.[46] 다만 아무리 영국일지라도 전쟁 이전으로 되돌리는 것만은 불가능했기에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가 오스만에서 독립하는 것만은 막지 않았다. 러시아는 이 전쟁에 참여한 대가로 바툼, 아르다한, 카르스 지역을 뜯어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난 후 아르다한과 카르스는 튀르키예에게 반환된다.


3.3.4. 영국과의 그레이트 게임(1813–1907)[편집]



3.3.4.1. 직접적인 견제[편집]

러시아 제국은 나폴레옹 전쟁 이래 유럽에 영향력을 확장할 기회를 노리면서 세력 확장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영국이 아니었다. 당시 세계 최강의 세력을 자랑하던 영국은 러시아의 영토 확장이 룰 브리타니아, 즉 자국의 세계패권을 위협할까 두려워했다. 결국 영국은 19세기 내내 러시아를 끊임없이 견제했고, 러시아와 영국 사이에서 일어난 이 신경전을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부른다. 영국은 러시아의 세력 확장에 사사건건 간섭했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 크림 전쟁(제 1차 동방전쟁, 1853–1856)에서 영국이 패전을 거듭하던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여 발칸 반도와 마르마라 해 지역까지 노리던 러시아를 공격하였다. 러시아는 영국의 개입으로 크림 반도까지 함락당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고 1856년 파리 조약으로 인해 크림 반도와 발칸 반도의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크림 전쟁으로 인한 재정난으로 러시아령 아메리카까지 미국에 매각해야 했다.
  • 러시아-튀르크 전쟁(제 2차 동방전쟁, 1877–1878)의 승전으로 발칸 반도에 영토와 슬라브 계열의 위성국을 확보하는 산 스테파노 조약를 체결했지만 영국의 개입으로 열린 베를린 회의를 통해 무위로 돌아갔다.
  •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1839–1842)도 러시아 제국의 남하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전쟁 이후 중앙아시아에 진출한 러시아 제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고, 이를 막기 위해 크림 반도를 통해 러시아를 공격하고 했으나 독일 제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래서 대신 이뤄진 것이 거문도 점령이었다.
  • 거문도 사건(1885)을 보면, 머나먼 동쪽의 조선에서도 영국의 직접 견제가 이루어졌을 정도라는 걸 알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를 넘어 인도양 진출이 영국과의 대치로 막히자 러시아는 옛날 자신들을 잔인하게 식민지배하던 몽골에게 복수를 하고자 이를 갈고 있었고, 위구르, 만주 등과 당시 최전성기를 한참 지난지 오래라 쇠퇴의 길을 걷는 중이던 청 북부와 전쟁하려고 했었다. 러시아가 중국 북부와 전쟁을 하려 하자 영국은 티베트를 진입하여 러시아의 진출을 견제했으며, 아편전쟁이후 영국은 홍콩을, 러시아는 연해주를 할양받는 등 영국은 해안지역과 장강을 비롯한 중국 남부 인근에서, 러시아는 중국 북부 인근에서 방어하면서 행사하였다. 이후 러시아는 대한제국 조정에 절영도조차를 요구하면서 한반도를 통한 남하정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영국이 이를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점령하였고, 러시아는 제주도를 비롯한 한반도의 섬들을 점령하며 영국에 대항하였다. 하지만 중국, 일본뿐만 아니라 영국까지 동아시아에서 견제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러시아는 한반도의 섬들에서 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한다.


3.3.4.2. 일본을 통한 간접적인 견제[편집]

영국의 대러견제는 거문도 이후로
  • 영일동맹(1902)을 체결했다. 영국은 그 전까지 유럽국가들과 '동맹'이 아닌 '협상'이라는 이름으로 관계를 수립했다. 비스마르크가 3제 동맹을 이끌어냈을때 영국은 독일과 '협상'으로 우호관계를 맺었고, 제1차 세계 대전도 프랑스,러시아와 동맹이 아닌 협상국을 형성했다. 이처럼 다른 국가와 거리를 두었던 영국이 아시아의 일본과 '동맹'을 맺은 것은 그만큼 러시아의 팽창을 전방위적으로 막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점차 한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일본은 38도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를 러시아와 분할하고자 하였으나, 러시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영일동맹과 미일관계의 증진으로 위협을 느낀 러시아는 일본에 39도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를 분할할 것을 제의했지만 일본은 무시하였다.

  • 러일전쟁(1904–1905)이 발발하였다. 영국이 동맹국인 일본을 지원하면서 일본에게 승리를 안겨준다. 러시아는 발트해의 발트함대를 투입하지만, 영국의 개입으로 발트함대가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과 전투를 치루어야 했다. 결국 러시아가 패배하면서 한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상실되었고, 이후 한일합방이 이뤄진다.


3.4. 러시아 제국 후기[편집]


적극적인 근대화 정책을 펼치며 러시아 제국의 개혁을 이끌었던 알렉산드르 2세는 1881년 살해당했다. 당시 알렉산드르 2세가 살해당한 시기의 러시아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러시아를 견제하는 각국 유럽 국가들의 행보로 인해서 러시아의 유럽 진출이 생각만큼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고, 영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 등 여러 열강들이 합심해 러시아를 쫓아내려 했기에 국내에서는 외교 고립 탈피에 실패한 차르에 대한 실망감이 만연한 상태였다. 게다가 알렉산드르 2세가 대대적인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펼치면서 자유주의, 급진주의적 사상가들과 혁명가들이 쏟아져 나왔고, 이들 중 가장 급진적인 자들은 아예 차르의 군주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세우기를 원했다. 차르의 외교 실패에 대중들이 실망하자 때가 무르익었다고 여긴 혁명가들은 테러를 기획, 알렉산드르 2세에게 수 차례 암살을 시도했고, 결국 1881년 폭탄을 던져 황제에게 중상을 입히는 데에 성공했다.[47] 부상당한 황제는[48] 궁전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사망했고, 그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르 3세가 즉위했다.

혁명가들은 제정을 폐지하기 위해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했지만 이는 오히려 러시아 근대화를 뒤로 후퇴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황제가 죽으면 시민들이 이를 기폭제로 삼아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는 혁명가들의 기대와는 달리 시민들은 오히려 황제의 처참한 죽음에 경악했고, 혁명가들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게다가 1881년 암살 직전의 알렉산드르 2세는 오히려 개혁 정책의 총사령탑인 최고집행위원회를 설치하고, 위원회의 의장 미하일 로리스멜리코프가 만든 입헌군주정의 토대를 확립할 수 있는 헌법인 '로리스멜리코프 헌법'을 통과시킬 계획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잘만 됐으면 러시아는 자연스레 입헌군주정과 근대화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혁명가들은 다급함 탓에 이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렸고, 결국 알렉산드르 2세 사후 급격히 보수적으로 변해버린 러시아 제국은 기나긴 몰락의 길을 걸었다.

1881년 즉위한 알렉산드르 3세는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49] 즉위 직후부터 강력한 자유주의 탄압 정책을 폈다. 그는 아버지가 실시했던 근대화 정책들 중 사실상 농노 해방령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정책들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렸고, 오직 차르 중심의 중앙집권에만 열을 올렸다. 게다가 아버지를 죽인 급진 개혁파들을 대단히 혐오하여 아예 일부 지도자들의 목을 날려버리기도 했을 정도였기에[50] 혁명가들은 움츠러들어 지하로 몰렸다. 다만 그 역시 19세기의 역동적인 분위기를 느끼고는 있었기에 산업화와 공업화에는 아버지처럼 꽤나 열심히 노력을 기울였다. 러시아 최고의 명재상들 중 하나로 꼽히는 세르게이 비테가 바로 이 알렉산드르 3세 시기의 사람이다. 러시아는 비테의 주도 하에 대규모의 군비 증강과 함께[51] 철강, 철도 확장 등에 크게 힘썼고, 비테와 그 전임자들인 니콜라이 분게, 이반 비시네그라드스키의 노력으로 재정 문제도 해결되었다.

외교적인 분야에서는 독일 제국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대단히 싫어했지만 여전히 삼제동맹은 유지했다. 그러나 독일에서 군국주의적 빌헬름 2세가 즉위하자 아예 독일과 손절하고 프랑스 제3공화국과 밀착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이때 프랑스의 차관을 빌려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깔았으며, 이는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발에 큰 원동력이 되어주기도 했다. 어쨌든 러시아는 점차 프랑스와 가까워졌고, 이는 얼마 있어 일어날 제1차 세계 대전삼국 협상의 밑바탕이 되어주었다. 다만 알렉산드르 3세는 철저한 평화주의자였던 탓에 그의 재위기 러시아에는 별다른 군사 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3.4.1. 니콜라이 2세[편집]


알렉산드르 3세는 1894년 급사했고, 그의 뒤를 이어 장남 니콜라이 2세가 즉위한다. 니콜라이 2세는 처음에는 젊다는 이유로 조부 알렉산드르 2세처럼 개혁에 앞장설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으나, 애초에 보수적이기 짝이 없었던 알렉산드르 3세와 그 가정교사에게서 교육을 받은 니콜라이 2세가 개혁적일 리가 없었고, 그는 즉위 직후부터 지방 젬스트보 의원들이 올린 탄원서를 단칼에 내치며 전제군주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52] 새 황제가 제 아버지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은, 꽉 막힌 전제군주라는 것을 깨달은 자유주의자들과 개혁주의적 보수파들은 대단히 실망했으며, 특히 알렉산드르 3세 치하에서 숨죽이고 살았던 자유주의자들의 실망감은 어마어마했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즉위하자마자 자유주의자들과 지방 의회를 잠재적인 적으로 돌렸고, 이들의 불만은 점점 커지다가 결국 폭발하고 만다.

하지만 니콜라이 2세의 행보는 매우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 자유주의자들은 귀족들이 주류였는데, 러시아 황족들 사이에서는 귀족들에게 양보했다가는 제국이 다시 귀족정 국가가 되어 군주가 귀족들의 눈치를 보고, 심하면 표트르 3세파벨 1세처럼 귀족들에 의해 황제가 갈아치워지는 일이 다시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러시아 제국민들도 '황제가 없으면 귀족들이 다시 농노제를 부활시키고 노동자들을 더욱 심하게 착취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인해 전제정에 오히려 우호적이었다.[53]


3.4.1.1. 피의 일요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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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저럭 러시아를 틀어쥐고 통치하던 니콜라이 2세의 평판에 치명타를 입힌 사건은 바로 피의 일요일 사건이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농노 해방령 이래 지나치게 많은 농민들과 높은 출산율이 합쳐져 농민들은 정말 비참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정부는 그 와중에 공업화를 위한 외화를 끌어오기 위해 지나친 수출장려 정책을 펼쳤고, 러시아의 가장 대표적인 생산품들 중 하나였던 농산물을 대거 해외에 팔아치우면서 정작 자국민들이 먹을 식량이 태부족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물가는 폭등했고, 도시 곳곳에서 굶어죽는 사람들이 폭증했다. 기회만을 노리던 공산주의자들과 반동분자들은 지하로 숨어들어 비밀 조직을 결성했고, 사회는 갈수록 흉흉해져만 갔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굶주린 시민들은 총파업을 진행,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황궁으로 행진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이때까지만 해도 황제 자체에 대한 반감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비참한 삶을 구제해 줄 자가 바로 '인자한 아버지'이신 차르라고 여겼다. 그러나 상황은 1905년 1월 22일 뒤집혔다. 황제의 근위대가 평화로운 시위를 벌이던 시민들에게 빵을 주는 대신 총알을 퍼부었고, 이 사격으로 몇천 명의 사람들이 숨졌다.[54]

피의 일요일 사건은 러시아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는데, 수백여 년 동안 내려오던 차르에 대한 신화가 박살났던 것이다. 분노한 민중들이 차르에게서 '인민의 아버지'가 아닌 '인민의 억압자'를 보기 시작하면서 차르 개인에 대한 숭배는 러시아 전역에서 사라졌고, 노동자들은 모스크바, 사라토프, 바르샤바 등지에서 폭동과 함께 총파업을 벌였다. 또한 전에는 나오지 않던 황실 폐지에 대한 목소리에 힘이 실릴 정도로 급진적 성향이 강해졌고, 정부의 도덕적 정통성은 완전히 무너졌다. 정작 사건 당시만 해도 사태파악이 안되던 정부 역시 사태가 확산되자 그 심각성을 깨닫고 10월 테제로 두마를 설립하고 겉으로나마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는 등 내부 안정에 모든 신경을 기울였다. 때문에 장기전으로 끌고 갔으면 충분히 이길 가능성이 컸던 러일전쟁황인종에게 패배한다는 치욕을 감수하고도 조기에 종결해버리기까지 했을 정도.


3.4.1.2. 러일전쟁 (1904–1905)의 패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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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적으로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흔들리던 러시아는 러일전쟁 패배라는 또다른 치명타를 맞고 휘청거렸다. 당시 러시아와 일본 제국만주사할린 일대를 두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세계를 주름잡는 엄연한 강대국들 중 하나였고, 반면 일본 제국은 근대화에 성공했다고는 하나 은연중에서는 저 먼 변방의 야만국들 중 하나로 평가되는 실정이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극동으로 뻗어나고자 했던 러시아 제국과 막 서쪽을 집어삼키려는 욕망으로 가득했던 일본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1904년 일본군뤼순을 기습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건방진 아시아 국가로만 일본을 깔보고 있던 러시아는 마음과는 달리 지독했던 뤼순 공방전에서 패배하고 봉천 지역까지 일본에 내주면서 패색이 짙어졌다. 아직 시베리아 철도가 완전히 완공되지 않았기에 제대로 된 보급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정규군도 제대로 지휘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러시아는 발트함대라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 쓰시마 해전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으나 결국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끄는 일본 해군에게 대패했고, 1905년 미국의 중재로 포츠머스 조약을 맺으며 굴욕적으로 패배했다.

러일전쟁의 패배는 러시아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게도 엄청난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일본의 국력과 군사력에 대해서 제대로 가늠해 본 적이 없었던 서구 사회가 아시아에서 일본의 존재를 실감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은 10년 전 청일전쟁의 승리에 이어 이 전쟁의 승리로 기고만장하면서 동북아시아로의 확장에 가속도를 붙였다. 러일전쟁의 패배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러시아는 무기력하게 일본에게 대한제국을 내주었고, 결국 대한제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일합방으로 일본에게 멸망당했다. 런던 등지에서는 언제 일본이 패배할 것인가를 두고 내기하고 있던 와중에 아예 러시아가 패배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엄청난 충격에 빠졌고, 일본을 재평가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한편 전쟁 당사자인 러시아는 충격이 더욱 심했다. 러시아는 만주의 이권을 모조리 빼앗겼고, 남사할린을 일본에 떼어주었으며 극동의 영향력이 크게 축소되었다. 게다가 29만 명에 달하는 군인들의 목숨이 허망하게 날아갔고, 안 그래도 평이 안 좋았던 니콜라이 2세는 러일전쟁 패배의 책임까지 떠안으며 평가가 수직 하락했다.[55]

3.5. 러시아 제국의 멸망[편집]



3.5.1. 제1차 세계 대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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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사라예보 사건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니콜라이 2세는 이 기회를 틈타 유럽 내에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발칸 반도정교회 신자들을 수호하고 슬라브족 국가인 세르비아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협상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그리고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식 명칭인 페트로그라드로 개칭되었다.

1914년 8월, 러시아 제국군동프로이센을 침공했고,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산하 제후국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의 영토 상당수를 점거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해 9월에 프랑스독일 제국의 공세에 밀리자 동맹국인 프랑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독일 동부의 실레시아를 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당시 러시아 군대는 한창 막장을 달리고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는 나름대로 전의를 불태우며 선전했지만, 정작 동맹국의 최고 정예군이었던 독일 제국군에게는 압도적인 병력을 밀어붙이고도 처참하게 관광을 다니며 밀리기에 바빴다.

대독일 전선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호기롭게 전쟁을 시작했던 것과는 달리, 국내 물자는 부족해져만 가고 전장에서는 매일 수많은 부상자와 사망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던 것이다. 상식적으로라면 세계 대전에 참전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상책이었겠지만, 평화적인 외교책을 추구했던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와는 달리 전쟁을 꺼리는 성향이 아니었던 니콜라이 2세에게 그런 방법이 눈에 찰 리가 없었다. 니콜라이 2세는 국내 사정 악화와 여론의 비토에도 불구하고 참전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발트 해와 흑해를 잡아쥐고 있는 독일 해군과 오스만 해군은 러시아로 향하는 식료품과 필수품들을 실은 선박들의 출입을 봉쇄했고, 러시아 국민들은 처절한 가난과 빈곤에 시달렸다. 전비를 감당하기 위해 재무성은 루블화를 찍어댔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으며 민생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한편 이를 통제해야 할 책임이 있던 니콜라이 2세는 오히려 전쟁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친히 수도에서 나와 전선에서 러시아군을 지휘하러 떠났고, 대신 수도의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가 섭정을 맡아 나라를 다스렸다.

알렉산드라 황후의 통치는 국민들의 반감을 샀다. 이 때 사람들의 가장 큰 반감을 샀던 인물이 바로 그 유명한 요승 그리고리 라스푸틴이었다. 라스푸틴은 황태자 알렉세이혈우병을 치료해준 것을 계기로 황후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던 인물이었고, 덕분에 황후의 뒤에서 나라를 자기 입맛대로 조정하며 안그래도 피폐해진 국민들을 더욱 자극했다.[56] 국민들 사이에서는 황후와 라스푸틴이 서로 내연 관계라는 등 온갖 문란한 소문들이 나돌았으며, 덕분에 황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궁정의 모두가 라스푸틴을 혐오했고 황후에게 그를 멀리하라 조언했지만, 황후는 들어먹지 않았다. 황제의 여동생인 올가 여대공, 황후의 둘째 언니 옐리자베타 대공비 등 황족들마저 황제와 황후를 만류했지만 그들은 끝까지 라스푸틴을 붙들어 두었고, 이는 안 그래도 최악을 향해 치닫던 황제에 대한 적개심에 불을 붙였다.

3.5.2. 러시아 혁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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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인민들은 오랜 전쟁에 지치다 못해 분노해 결국 혁명을 일으켰다. 1917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비보로크의 방직 공업 여성 노동자들과 푸틸로프 공장의 노동자들이 '전제군주제 타도', '빵을 달라' 등의 슬로건을 내걸고 파업을 시작했고, 10일에는 페트로그라드 전역에 총파업이 일어났다. 12일과 13일에는 총파업 진압을 명령받은 군대마저 등을 돌리고 제국 정부에 총을 겨누면서 결국 제국 정부는 민중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러시아는 급격한 혁명의 물결에 휩쓸린다.

12일에는 타브리다 궁전에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결성되었고 이 소비에트에서 멘셰비키사회혁명당이 다수를 차지했다. 페트로그라드에서의 봉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각지에서 노동자와 병사들이 중심이 된 소비에트들이 결성되었고 붉은 군대가 조직되었으며 황제가 임명한 판사들이 쫓겨나고 인민 판사들이 대신 들어섰다. 이를 2월 혁명이라 부른다.

한창 소비에트가 창설되고 있던 도중, 사회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던 자본가와 지주 세력을 기반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따로 세워졌다. 12일 밤에 러시아의 두마[57]에서 임시위원회를 선출하고 전장에 나가 있던 니콜라이 2세에게 황태자 알렉세이에게 양위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아들의 혈우병을 우려한 니콜라이 2세는 대신 남동생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에게 양위할 뜻을 내비쳤으나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미하일 대공이 이를 거부하면서 니콜라이 2세의 뜻은 무위로 돌아갔다. 결국 제위를 계승할 이가 없었으니 니콜라이 2세는 자연스레 폐위되었고, 3월 17일에 러시아 공화국이 들어서며 수백여년에 걸친 전제군주정은 마침내 막을 내리게 된다.[58]

두마 임시위원회와 소비에트 각료들은 서로 협의를 거쳐 3월 2일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입헌민주주의자이자 젬스트보 지도자였던 게오르기 리보프가 정부 수반으로 선출되었으며 '카데츠'라 불리는 입헌민주당과 10월당이 임시정부의 권력을 잡았다. 당시 소비에트의 주류였던 멘셰비키카를 마르크스의 '2단계 혁명론'에 따라 임시정부의 실권을 부르주아 세력들에게 사실상 넘겨주는 것을 용인했다. 다만 러시아 인구의 대부분을 확고하게 틀어쥔 소비에트의 위상은 당시 너무나도 높았기에 임시정부의 부르주아와 자본가들 역시 소비에트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독단적인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

러시아 공화국은 황제가 시작한 전쟁에서 악수를 연이어 두는 바람에 국민들의 지지를 잃어 오래가지 못하였고 다시 10월 혁명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공산국가(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독일을 이길 수는 없었고 결국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어 엄청난 영토를 내주는 등 사실상의 패배로 전쟁을 끝내고 말았다.
[1] 키예프 공국대공으로, 러시아의 역대 군주들 중 처음으로 세례성사를 받고 정교회로 개종했다. 세례명바실리오스(Βασίλειος)에서 유래한 바실리(Василий).[2]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남동생, 토마스 팔레올로고스의 딸이었다.[3] 일리야 레핀 작. 사실상 이반 뇌제를 묘사한 그림들 중 가장 유명한 그림. 아들을 죽인 아버지의 경악한 모습과 공포, 죄책감 등을 극도로 생생하게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4] 이반 뇌제라고도 한다. 공포정치를 펼친 탓에 폭군을 의미하는 뇌제라는 칭호가 붙었다.[5] 이반 뇌제는 옛 동로마 제국과의 연관성을 들어 스스로를 황제라고 불렀다. 때문에 대관식을 치를 때에도 동로마 제국의 대관식을 참고해서 치렀다고 한다.[6] 이중 시비르 칸국의 복속을 통해서 러시아는 본격적인 시베리아 지방으로 개척을 시작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원주민들에 대한 식민화를 통해서 인구를 늘릴 수 있었고, 시베리아인들은 상대적으로 선진적이었던 러시아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다만 러시아에서 보드카가 유입되어 음주량이 늘어나고 모피세를 걷어가는 등 시베리아 원주민들에게 긍정적인 면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7] 로마노프 가문 출신이다.[8] 다만 이건 단순한 광기가 아니라 이 땅을 자신에게 충성하는 엘리트 집단인 오프리치니크에게 나누어주어 황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었다.[9] 러시아의 대화가 일리야 레핀이 이반 뇌제가 죽은 황태자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 굉장히 유명하다.[10] 바실리 4세는 류리크 왕조의 핏줄을 이은 최후의 차르였다.[11] 지그문트 3세는 숙부 스웨덴 국왕 칼 9세에게 빼앗긴 스웨덴 왕위를 되찾을 목적으로 루스 차르국에서 핀란드로, 그단스크의 해군을 이용해 스웨덴으로 막강한 폴란드-리투아니아 기병 부대를 상륙시키겠다는 작전을 구상했었다. 루스 차르국은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침공 기지로 삼을 생각이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에게는 본심을 숨신채 정교회 이단을 가톨릭화하자는 명분을 앞세워 침공을 승인받았다.[12] 현재 러시아 프리오제르스크.[13] 물론 둘은 다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가짜 드미트리 1세의 생모가 이 헛소리를 증언해주면서 사람들이 그럴듯하게 받아들였다.[14] 미하일 로마노프는 자신이 생전에 황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조차 해 본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16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고, 제왕교육도 받은 적이 없었기에 실질적인 국사는 그 주변의 가신들과 수도사였던 부친이 맡아 처리했다.[15] 이때 벌어진 대표적인 전투가 바로 나선 정벌이다. 결과는 조선과 청연합군의 승리.[16] 표트르 대제 최대의 업적들 중 하나는 대륙 국가였던 러시아를 해양 국가의 길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표트르 대제는 해군을 창설하고 부동항을 얻기 위해 기를 쓰면서 러시아를 바다에 눈뜨게 만들었다.[17] 반대로 스웨덴 제국은 대북방전쟁의 패배를 계기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18] 이처럼 웅대한 포부로 시작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천도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 매년 3만 명이 넘는 인부들이 노예처럼 끌려와 추운 공사장에서 일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지치거나 얼어 죽었다. 때문에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두고 '뼈 위에 지은 도시'라고 칭했다.[19] 다만 서유럽인들도 많이 기르던 콧수염은 오히려 장려했다. 표트르 본인도 콧수염을 길렀을 정도.[20] 때문에 농민들은 자신들을 수탈하는 차르를 '자애로운 아버지'라고 부르며 찬양했다. 이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은 차르에 대한 신화는 1900년대 초반까지도 깨지지 않았다. 농민들이 차르에 대한 기대를 모조리 버린 것은 200년이 흐른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 발발 이후였을 정도였다.[21] 사실 영국도 러시아와 비슷하게 변두리에 있고 수비하기가 유리한 지형이어서 프랑스나 독일 등보다 상당히 유리한 조건에서 강력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둘은 19C–20C에 걸쳐 가장 강한 대립각을 형성한다. 또한 일본도 이런 좋은 조건이 다 갖춰져서 도움이 됐다고 평가된다.[22] 표트르 3세는 독일 출신이었고, 당시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대왕의 팬이었다.[23] 참고로 표트르 3세는 폐위되고 얼마 후 독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공식적인 사인은 복통 출혈로 인한 급사라고 하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없다.[24] 예카테리나 2세 본인은 계몽주의를 신봉하는 나름 개혁적인 인물이었다. 그녀는 '농노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농노들은 인간 이하의 무엇으로 보던 귀족들에게는 상상하기도 힘든 발언이었다. 다만 그녀의 주 지지 세력이 농노를 부리는 지주 계급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농노들을 억눌렀을 뿐.[25] 예카테리나 2세의 사촌동생이기도 했다.[26] 예카테리나 2세는 계몽주의 신봉자였기 때문에 반란 도중 사로잡힌 농노들을 최대한 빠르고 고통없게 자비로이 죽이라고 비밀리에 명하기도 했다. 이같은 행보는 한창 계몽주의가 휩쓸고 다니던 18세기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호감을 사기도 했지만, 농노들의 반란을 잠재우기에는 무리였다.[27] 파벨 1세는 즉위 직후 장자계승법으로 법제화했다.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예카테리나 2세 시절 반대파들이 자신을 제치고 손자인 알렉산드르를 제위에 올려놓으려 시도했던 기억이 있던 파벨 1세가 아예 장자계승을 법적으로 못박아둔 것이다.[28] 프로이센 왕국이 프랑스와 맺은 틸지트 조약과는 다른 조약이다.[29]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자기 편에 묶어두기 위해 꽤 노력을 했다. 1809년엔 스웨덴이 영국 쪽으로 기울자 러시아를 같은 편으로 묶어두려던 나폴레옹에게 핀란드 점유를 인정받고 1809년부터 핀란드 대공을 겸한다.[30] 사실 러시아의 승전은 그 국력에 기반했다기보다는 청야전에 초월적으로 유리한 지리 환경, 프랑스의 답없이 길어진 보급선 등이 일조한 결과로 보는 편이 맞다. 러시아 군사력의 실체는 크림 전쟁에서 드러난다. 물론 지리 환경을 잘 이용해먹는 것도 중요한 전략이니 승리를 날로 먹었다고 하긴 어렵다. 애초에 러시아 국토를 보고 저길 쳐들어갈 생각을 한 것 자체가 리스크가 큰 판단이다.[31] 물론 나폴레옹이 탈출하여 백일간 난동을 부리긴 했다.[32] 이들은 '구제동맹(Союз спасения)'을 창설하였는데, 구제동맹 안에서도 이견이 생겨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파벌, 공화국을 지지하는 파벌, 연방제를 지지하는 파벌로 분열되었다.[33] 이전의 러시아는 전제군주국이긴 했지만 그만큼 귀족들의 권력이 강했다.[34] 이후 스페란스키는 이 법은 계속 새 조항을 추가해야 한다고 설명했지만, 니콜라이 1세는 그 일은 후계자에게 맡기겠다고 거절했다.[35] 오히려 니콜라이 1세가 데카브리스트들보다 더 진보적인 면이 있었던 게, 해방된 농노를 위해 생계수단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주장은 데카브리스트들이 아닌 니콜라이 1세와 보수파 관료들의 입에서 나온 주장이었다. 정작 데카브리스트들은 농노 해방만 외쳤을 뿐 해방 이후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36] 그 외에도 러시아는 크림 전쟁의 패배로 많은 것을 내놓아야만 했다. 몰도바왈라키아 공국에 대한 영유권을 영구히 포기했으며, 도나우강의 통행권도 내주었으며 전쟁 이전 오스만에게 빼앗은 영토 모두를 다시 돌려주었다.[37] 실제로 러시아 황제들이 귀족 쿠데타에 의해 갈아치워지고 귀족 평의회에 의해 권력을 제한받던 시기인 18세기에 귀족들의 농노에 대한 제한이 사실상 없어졌다. 때문에 차르들은 농노제를 폐지함으로서 전제권력을 회복시킨다면 귀족이 혁명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판단했고, 실제로 러시아 혁명의 혁명가들 상당수가 몰락 귀족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였으므로 이는 어찌보면 정확히 들어맞은 셈이었다.[38] 이에 대해서는 레닌이 쓴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Развитие капитализма в России)'을 참고할 것[39] 마르크스주의의 영향 아래 있는 소련 학자들에게 차르 체제는 실패한 구체제였고, 반공주의적 서방 학자들에게 차르 체제는 (마찬가지로 실패한 혹은 실패할) 소련 체제의 모체였다.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공산주의자와 반공주의자가 같은 주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40] 중부지역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대리인을 농노 중에서 선출하거나 농민공동체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41] 반대로 귀족의 저택에서 같이 거주하거나 바로 옆에 사는 농노들의 경우 지주들이 직접적인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맞다. 그런데 이 경우는 결국 전체 농노의 소수에 불과했다. 게다가 이 케이스에서도 그냥 정부 당국에 고발해버린다는 선택지가 있었다. 18세기에만 해도 지주귀족이 지방당국 관리들을 매수하여 농노의 청원을 막아버리자 분노한 농노가 수도로 가서 중앙정부 관리들이나 차르에게 다이렉트로 고발을 때려버린 것이 있을 정도.[42] 당연한게 러시아 농민 대다수가 항상 빈곤하고 착취당했다는 사관의 직접적인 창시자가 바로 블라디미르 레닌 같은 혁명가들이나 냉전 시대 리처드 파이프스 같은 반공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43] 이전까지 러시아에는 삼권분립이라는 개념 따위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44] 하지만 국방장관이었던 드미트리 밀류틴은 개혁파였음에도 자리를 지켰는데, 알렉산드르 2세가 파벌 간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유임시킨 것이었다. 또한 강경 보수파들도 사법 개혁만큼은 어찌하지 못했다.[45] 1헥타르 당 5센트에 가까운 가격이었다. 다만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러시아가 알래스카의 가치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러시아도 알래스카의 가치를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워낙 멀어 관리가 어려웠던 탓에 최대 적국인 영국캐나다에게 빼앗길 가능성이 컸다. 영국에게 빼앗기느니 차라리 미국에게 팔아치우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던 것이다.[46]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독일 제국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빅엿을 먹었다. 당시 러시아는 전통적 우방으로 여겼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점차 거리가 멀어지면서 반대로 오스트리아의 적국인 독일 제국과 친선을 다지는 상황이었다. 러시아는 중재자로 나선 독일을 믿고 영국의 주최로 열린 베를린 회의에 참석했는데, 이 베를린 회의에서 독일이 러시아의 편을 들어주지 않으면서 배신당한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격노했고 독일과 러시아는 전쟁 직전의 상황까지 몰린다.[47] 참고로 황제는 테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수행원들을 챙겼다고 한다.[48] 양 다리와 한 팔이 날아갔고, 테러 직후는 거의 숨만 겨우 붙어있는 상황이었다.[49] 알렉산드르 3세는 아버지가 테러당한 장소에 피의 성당을 지어 아버지를 애도했다.[50] 참고로 이때 알렉산드르 3세가 처형한 혁명 지도자들 중 하나는 알렉산드르 일리치 울리야노프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사람의 남동생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즉 블라디미르 레닌이다. 레닌이 제정을 혐오하게 된 여러 이유들 중 하나.[51] 덕분에 러시아는 세계 1위의 육군과 3위 수준의 해군을 보유하는 군사 강국이 되었다.[52] 문제의 탄원서는 자유주의자들뿐만 아니라 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한 보수주의자들도 참여하여 작성되었기에 입헌군주정이나 공화정 얘기는 나오지도 않은, 매우 온건한 내용이었다. 애초에 당시 자유주의자들도 급진적 개혁은 바라지 않았다.[53] 자유주의 정치인이자 러시아 공화국의 외무장관 파벨 밀류코프도 당시의 자유주의를 '귀족적 자유주의(Дворянский либерализм)'라고 칭하며 자신의 자유주의와 선을 그었고, 귀족들은 황제에 의해 패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4] 당시 니콜라이 2세는 이 와중에 휴가를 즐긴답시고 가족들과 출타하고 있었다. 따라서 발포 명령 자체는 황제의 숙부인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 지시한 것이었으나, 황제 본인도 제 일기장에 수도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충직한 군인들이 이를 진압했다.라고 적을 정도로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했기에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55] 그 외에도 이는 삼국 협상의 탄생에 기여했다. 생각 외로 러시아가 처참하게 패배해버리자 영국은 그레이트 게임을 종결하고 영러협상을 통해 협상국을 차리게 된다.[56] 다만 현대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이 라스푸틴의 영향력은 그렇게 큰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57] 러시아의 중앙 의회. 당시에는 주로 자본가들이 세력을 잡고 있었다.[58]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은 10월 혁명 이후 권력을 잡은 볼셰비키에 의해 살해당했다. 너무나 상징성이 큰 존재였기에 도저히 놔둘 수가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총리가 이끌던 임시정부는 그나마 황실을 영국으로 피난시키려 시도했으나 성사되지 못했고, 결국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들은 시베리아 지역으로 유형된 후 볼셰비키가 보낸 병사들에게 모조리 총살당해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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