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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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5ARYZvK4L2afx8AcWcf6kF-1.jpg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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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러시
RUSH

헌액 부문
공연자 (Performers)
멤버
게디 리, 알렉스 라이프슨, 닐 피어트
입성 연도
2013년
후보자격 연도
1999년
후보선정 연도
2013년















러시
Rush


파일:GettyImages-84885264.jpg


국적
[[캐나다|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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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결성
1968년 8월
[[캐나다|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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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온타리오주 토론토
데뷔
[[캐나다|
캐나다
display: none; display: 캐나다"
행정구
]]
1974년 3월 1일
(데뷔일로부터 18282일째)
데뷔 앨범
활동 시기
1968년 ~ 2018년
멤버
게디 리 (보컬, 베이스 기타, 신디사이저 등)
알렉스 라이프슨 (기타)
닐 피어트 (드럼)
장르
프로그레시브 메탈, 프로그레시브 록, 하드 록, 헤비 메탈
레이블
파일:애틀랜틱 레코드.png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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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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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특징
3. 역사
4. 인기
5. 구성원
5.1. 게디 리(Geddy Lee)
5.3. 닐 피어트(Neil Peart)
5.4. 존 룻세이(John Rutsey)
6. 디스코그래피
6.1. 밴드 결성
6.2. 프로그레시브 실험 시기[1]
6.3. 프로그레시브 중흥 시기
6.4. 실험 완성 시기
6.5. 신디사이저 실험 시기
6.6. 기타 강조 시기
6.7. 공백 이후 부활 시기
7. 기타



1. 개요[편집]



파일:rush gig.jpg

러시는 1968년에 결성되어 2018년에 해체된 캐나다록 밴드이다.


2. 특징[편집]


러시는 프로그레시브 록 역사상 가장 성공한 밴드 중 하나이자 헤비 메탈 밴드이다. 프로그레시브 메탈의 상징과도 같은 밴드로 일컬어진다.

멤버는 OC[2] 게디 리(Geddy Lee, 보컬, 베이스, 키보드), OC 알렉스 라이프슨(Alex Lifeson[3], 기타), OC 닐 피어트(Neil Peart, 드럼)[4]다. 1970-80년대가 전성기였지만, 2018년까지 현역으로 뛰었다.[5]

라이프슨과 피어트의 건강 문제로 2015년을 마지막으로 라이브 투어에서 은퇴했으며,[6] 결성 50주년인 2018년에 모든 활동을 중지한다고 선언했다. 결국 3년 반의 투병 끝에 현지 시간으로 2020년 1월 7일 피어트가 교모세포종으로 67세에 사망했다.#

3. 역사[편집]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서로 친해진 게디 리와 알렉스 라이프슨, 그리고 라이프슨의 친구인 존 룻세이(John Rutsey)가 스쿨밴드를 만들어 게디 리의 집 지하실에서 연습을 하게 되며 결성되었다. 이후 1974년 드러머였던 룻세이가 당뇨병 증세를 보여[7] 도중에 탈퇴하고 현재의 드러머인 닐 피어트가 합류하면서 자신들만의 색채를 찾기 시작했다.

이들이 처음 커버밴드로 활동을 시작하던 시기는 16세 때부터였고 매주 주말마다 시내에 있는 라이브 카페에서 공연을 했다고 한다.[8] 이 때 매니지먼트사의 눈에 들어 소속사를 가지게 되었다.

결국 12학년(고등학교 3학년) 때 이들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중퇴를 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를 피해 고향을 떠나서 캐나다로 이민을 왔던 부모들은 자식들이 학업에 정진하여 번듯한 직장을 가지기를 바랐지만, 학교를 그만두고 앞날이 불확실한 음악인의 길을 걷겠다고 하니 반대가 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이 데뷔 후 TV에 나오는 것을 보고, 부모들은 그제서야 왜 아이들이 학교를 그만뒀는지 알게 됐다고 한다.[9] 다만, 알렉스 라이프슨은 나이가 들면서 그래도 고등학교를 자퇴한 것에 대해 좀 후회하는 듯하다. 아마 나이가 들면서 다시 학구열에 생긴 듯하다.[10]

두 차례에 걸쳐 프로그레시브적 요소를 섞던 실험을 하던 러시는 이 두 앨범이 상업적으로 실패하자[11][12] 이제 돈이 되는 작품을 만들라는 레이블의 압박과 주변인들의 극렬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밴드를 접을 각오로 20분짜리 대곡 타이틀을 건 앨범 2112를 냈는데, 이 앨범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락의 세계에서 새로운 별로서 부상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무지막지하게 긴 곡을 라디오에서 틀어주기엔 무리가 따랐고[13], 공상과학 요소가 짙게 깔린 20분짜리 곡 '2112'는 당시 음악계 기득권층의 눈에는 '고등학교를 중퇴한 놈들이 같잖게 똑똑한 척' 하는 것으로 보였으며, 때문에 러시는 1970년대 당시 평론가들에게 줄기차게 까이는 동시에 대중 미디어 업계에서 거의 무시당하다시피 하였다. 당시 평단이 싫어했던 음악이 헤비메탈/하드 록, 그 중에서도 프로그레시브를 가장 싫어했다고 하는데, 이들이 보기에 헤비메탈/하드 록은 기품이 없는데다가 특히 프로그레시브는 제대로 교육도 받지 않은 락 스타들이 예술가 흉내를 내려고 하는 장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속사 측에서는 러시는 여타 유명 밴드들처럼 실력도 꿀리지 않고 공연 티켓도 늘 매진인데 뭐가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고 했고, 밴드 멤버 본인들은 러시가 다른 락밴드들처럼 확실한 밴드 이미지나 컨셉이 없어서 늘 이것저것 있어보이는 옷들을 주워 입고 사진을 찍거나 했던 것이 그러한 악평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한다.

물론 입소문을 듣고 라이브를 직접 본 팬들은 그런 평론가들 얘기엔 귀조차 기울이지 않았지만. 팬들 외에도 KISS를 비롯한 다른 프로 밴드들 역시 러시의 실력과 음악성에 대해 높이 평가하면서, 당시 메인스트림과 어울리지 않았던 그들의 스타일 때문에 평론가들이 줄기차게 까댄 부분이 안타깝다고 한다.[14]

그 후로 하드록에 다채로운 구성과 실험적인 연주, 지적인 가사를 가미하는 노력을 계속한 덕분에 1980년대에는 '킹 크림슨예스레드 제플린을 만났으니 그게 바로 러시다'라는 평을 거쳐 현재는 러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다. 기존에 만들어진 장르의 틀에 함부로 담을 수 없다는 식으로 숭배되다시피 한다.

러시의 곡은 처음 들어보면 단 세 사람이 내는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깊고 풍성한 느낌을 준다. 메탈리카의 기타리스트인 커크 해밋2112 앨범을 처음 듣고 대규모 슈퍼밴드라고 생각하고 앨범 표지를 봤는데 3인조 밴드라는 것을 알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실제로 밴드 구성원 하나하나가 자신의 분야에서 거의 기인의 경지에까지 다다랐기 때문. 알렉스와 게디는 라이브에서 각각 기타와 베이스를 치는 동시에 발로 이펙터와 건반을 조작하는 묘기를 부리는데, 이는 배경 트랙을 사용하지 않고 스튜디오에서 선보였던 음색과 효과를 그대로 재연하려는 밴드의 고집이라 할 수 있겠다.

곡의 가사와 주제는 주로 닐 피어트가 담당하는데, 철학적인 고찰에서부터 장대한 서사 구조, 현대인의 생활상과 사회상 등 깊이 있는 주제를 선호하는 편이다. 본디 성격이 내성적이었던 피어트 본인이 드러머이기 이전에 독서광이었다는 점은 서구에서 흔히 생각하는 "드러머는 때리고 부순다"는 고정 관념과 정면으로 대비되기도 한다.[15] 한 가지 예를 들자면, 피어트는 제2차 세계대전 말미에 미국이 계획한 원자폭탄 프로젝트였던 맨해튼 프로젝트와 그 결과였던 1945년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주제로 한 곡 Manhattan Project의 가사를 쓰기 위해 이와 관련된 책을 무려 10권이나 읽었다.[16][17]

1970년대에 공상 과학적인 프로그레시브 록 계열 대곡을 위주로 활약했던 러시는 1980년대에는 음악적인 실험의 일환으로 신디사이저 음이 짙게 깔린 뉴웨이브록을 연주하였고, 1990년대 이후 다시 기타의 비중을 높이면서 초창기 때의 모습과 1980년대 당시 실험의 결과를 버무린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선보이고 있다.

위에 적은 것처럼 사실상 프로그레시브 하드록, 프로그레시브 메탈을 완성시킨 밴드로, 이후 드림 씨어터[18][19]를 비롯한 수많은 프로그레시브 메탈 밴드들에게 엄청난 추앙을 받고 있다.[20] 또한 프로그레시브 메탈이 아니더라도 엔간한 메탈한다는 사람들은 거의 다 러시를 존경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미스터 빅의 리더 빌리 시언과 보컬 에릭 마틴, 밴드 그레이트 화이트, 기타리스트 조지 린치, 제이크 E. 리 등등으로 이들은 러시 트리뷰트 앨범에도 참여하였다.

메탈 쪽이 아니더라도 러시 이후의 세대 중 프로그레시브적인 실험성을 추구하는 록 밴드들 다수가 러시의 영향권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스매싱 펌킨스, 프라이머스, TOOL 등등.

2016년 게디와 알렉스의 고향인 토론토의 노스 욕(North York)에 'Lee & Lifeson Art Park'가 개장했다.

2018년 알렉스 라이프슨의 인터뷰에 따르면, 앨범과 투어 등 더이상 러시로서의 활동 계획이 없다고 했다. 사실 마지막 투어가 된 2015년 투어 때도 라이프슨의 건선성 관절염과 피어트의 만성 건염 등 건강 문제로 더 이상의 투어는 못 돌 것 같다고 밝힌 바 있다. 그래도 당시에는 앨범 작업 정도는 기대해봐도 좋다고 했었지만... 결국 2012년 Clockwork Angels가 마지막 앨범이 되었다.

2020년 1월 닐 피어트가 교모세포종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러시의 나머지 멤버들은 러시로서의 활동을 그만두었다. 이렇게 50년 넘는 밴드의 역사가 마감됐다.

2021년 러시의 이름을 딴 에일 맥주를 발매하였다. 멤버들이 제작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2022년부터는 공식활동 보단 자선 공연이나 후배들의 공연 특별 게스트로 간간히 나오곤 한다. 푸 파이터스 드러머인 테일러 호킨스의 사망으로 추모 공연이 열렸을 때 참여하기도 하였다.

4. 인기[편집]


사실 위에서 얘기하는 내용은 평론가나 저널리스트들이 주로 인용할만한 정보이고, 팬들이 러시에 보이는 가히 절대적인 충성심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실제로 러시가 신출내기 시절이었던 70년대, 모든 주류 매체(라디오, TV, 리뷰 잡지)로부터 동네북으로 줄기차게 까이던 러시가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팬들이 매체의 악평에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공연에 찾아오고 음반을 사주었기 때문이었으며,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자식과 후손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러시를 전수해주는 등 단순히 팬의 수준을 넘어선 사람들도 상당수이다. 따라서 이런 충성심이 나타날 수 있는 원인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겠다.

  • 공감이 가는 곡의 주제: 청자들이 곡을 듣고 "아... 이건 내 얘기구나" 하고 공감하게 된다. 러시의 첫번째 히트 곡인 Working Man은 처음 클리블랜드 라디오 송출 당시 수많은 노동 계층 청자들이 전화를 걸어 "내 사정을 이렇게 잘 이해해주는 노래가 지금까지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밴드냐, 레드 제플린 신보냐"고 문의할 정도였고[21], 2112는 정부에 의한 통제를 비판하는 내용, The Trees는 마치 인간의 정치상을 고발하는 듯한 내용, Subdivisions는 도시인의 애환을 부름과 더불어 당시 고등학교 왕따/Geek들에게 구세주와 같은 노래로, Spirit of Radio는 라디오를 듣는 청자에게, Red Barchetta는 일단 들어본 모든 자동차 광들에게 어필하는 등 일반인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이 많다.
러시의 팬이 되는 첫 단계가 바로 자신이 공감할 수 있는 노래를 찾아내는 것이라 회자되며, 실제로 많은 장년층(40~60대) 러쉬 팬들은 자신이 "처음 들은 러시 노래"를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러쉬의 모습을 비유하여 "러시는 만인의 친구"라 이야기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산 Subdivisions는 수준급으로 재창조되기도 하였다.

  • 곡이 전달하는 이야기: 러시의 또다른 별명 중 하나가 "이야기꾼"인 이유. 러쉬의 대곡은 전부 단편집처럼 문학적인 이야기를 하는 내용이며, 실제로 문학 작품을 바탕으로 곡을 작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말 그대로 개싸움 이야기인 By-Tor and the Snowdog, 아인 랜드의 소설 움츠린 아틀라스에서 소재를 따온 2112, 새뮤얼 쿨리지의 서사시 Kubla Khan[22]에서 영감을 얻은 Xanadu,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일인칭 시점으로 바라본 Cygnus X-1 Book 1: The Voyage, 전 앨범에서 내용이 이어지면서 두뇌의 좌/우뇌끼리의 싸움을 이야기하는 Cygnus X-1 Book 2: Hemispheres 등이 대표적.[23] 이러한 면을 좋아하는 팬들은 러쉬 팬들 중에서도 대곡과 1980년대 이전 작품을 가장 높게 쳐주는 경향이 있다.

  • 작곡 및 연주 실력: 밴드원 개개인의 연주 실력과 작곡 능력을 같은 음악가로써 높이 평가하는 부류이다. 록 밴드의 구성은 사정상 다양하지만 3명이라는 인원은 사실 단독 라이브가 가능한 최소 인원으로 기타, 베이스, 드럼과 보컬을 셋이서 커버해야하는 빡빡한 작업이지만, 그 3명만으로도 전혀 빈틈이 없는 음악을 보여주는데다 개인의 기량까지도 뮤지션들이 인정하는 일류 뮤지션일만큼 뛰어나다. 실제로 러쉬의 라이브곡은 스튜디오곡과 구별이 안될 정도로 연주 능력이 뛰어나다. 밴드 구성원이나 악기(기타/드럼/베이스/키보드, 심지어 우쿨렐레까지.)를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이 여기에 많이 속한다. 닐과 게디는 각기 드럼과 베이스 분야에서 신처럼 추앙받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가려져 보이는 알렉스 역시 수많은 잡지 커버 모델을 차지하고 웬만한 프로 기타리스트들조차 정말 각잡고 연습하지 않으면 커버하는 게 불가능한 난이도 높은 연주를 하기에 역시 존경받는다. 굳이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러쉬의 공연에서 에어 드럼을 치는 이유가 바로 그 것.
이 점을 특히 강조하는 팬들은 연주곡이나 연주 난이도가 높은 곡을 찾아서 듣고 따라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La Villa Strangiato처럼[24] 러쉬 스스로도 처음에 한번에 연주하기 어려워했던 고난이도 곡들에 더욱 악착같이 달라붙기도 한다. 단순히 러쉬의 곡을 듣는 차원을 넘어서 직접 커버를 하거나, 아예 커버 밴드를 설립하여 본업으로 공연을 하는 경우까지 자주 볼 수 있다. 러쉬 커버 밴드에 대한 다큐멘터리 참조.
이들은 데뷔 시절 때부터 캐나다의 레드 제플린이라고 불릴 정도로 실력파였지만, 밴드의 성공으로 인해 천문학적인 돈을 벌자 이들은 자신의 수입 대부분을 새 악기와 장비에 투자하였다고 한다. 이 때부터 닐 피어트의 드럼 세트의 몸집이 점점 불어나면서 어마무시해졌고, 이에 질세라 게디 리는 베이스를 치면서 키보드까지 연주를 하게 되었고, 라이프슨은 더 많은 기타, 이펙터와 앰프를 구입함에 따라 더욱 다양한 톤과 리프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날이 갈수록 러시란 밴드는 실력이 계속 느는 밴드가 되었다. 여담으로 이들이 실력이 늘면 늘수록 담당 프로듀서와 엔지니어들도 덩달아 실력이 늘었다고 한다. 전혀 해보지 않은 빡센 곡의 믹싱과 앨범 작업을 하다보니 자연스러운 현상.

  • 밴드원의 성격: 오직, 같은 음악가들 사이에서도 유지하기 쉽지 않은 초심, 즉 음악성과 관객의 즐거움을 먼저 추구하는 자세를 50년간 지킨 덕분에 많은 존경을 받는다. 데뷔초 KISS의 오프닝 밴드로 경험치를 쌓을 때 러시 멤버들을 데리고 다녔던 그리고 수많은 그루피들을 끼고 잔 KISS의 리더 진 시몬스는 "나 같이 못생긴 새끼도 공연하면 여자가 줄줄 붙었는데 러쉬는 그걸 일부러 피하고 다녔다. 그저 방 안에 있는 모습이 그리 신기할 수 없었다. 분명 게이도 아니었는데 말이지"라 회고하였고, 대대적으로 뜬 후에도 자만심이나 거만함을 보이는 일, 많은 음악가의 발목을 잡았던 약물이나 알콜 중독 등의 자기관리 실패가 전혀 없었다.[25][26][27]
가족 관계도 닐 피어트가 딸과 아내를 각각 사고와 병으로 떠나보냈던 사건을 제외하면 문제 없이 원만했던 편. 동료들간의 관계도 굉장히 원만한 편인데, 상기한대로 구성원들이 초심을 잘 지키고 있어서 물의를 일으킬만한 사고를 치지 않았기 때문에 팀 외적으로 인한 갈등요소가 굉장히 적었고, 서로가 서로를 잘 이해하고 배려하기 때문에 사이가 굉장히 좋다. 구성원끼리 서로 갈등이 생겨 해체하거나 갈라지는 밴드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도 나름 대단하다. 장난끼 많은 게디와 알렉스에 비해 닐 피어트는 수줍고 진지한 성격이나 이는 팬들과 밴드원들 사이에서 서로 이해되고 있는 부분이며, 공연에서는 이를 빌미로 닐 피어트를 실실 쪼개게 만들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28]

러쉬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남들이 너무 많이 들어서 지겹다", "목소리가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것 정도일 뿐, 그 외 위 네가지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정해주는 편이다.

밴드에 대한 충성심이 엄청 높다보니 러시가 20대일 때부터 팬이었던 사람들은 자기 자식들에게까지 록 음악을 러시로 입문시키고, 그 자식들도 자신들의 친구들에게 러시를 전파하게 되면서 팬들의 연령층은 세대를 가리지 않게 되었다. Subdivision처럼 어릴 때 소외받고 자랐던 팬들이 보란듯이 성장하여 사회적 성공을 이뤄 가족들과 친구들을 공연장에 함께 데리고 가게 되었고, 이는 날이 갈수록 밴드의 성공과 어마무시한 수입으로 연결되었다.

5. 구성원[편집]



5.1. 게디 리(Geddy Lee)[편집]



5.2. 알렉스 라이프슨(Alex Lifeson)[편집]



5.3. 닐 피어트(Neil Peart)[편집]




5.4. 존 룻세이(John Rutsey)[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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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알렉스 라이프슨, 게디 리, 존 룻세이
1952년 7월 23일 ~ 2008년 5월 11일

본명은 존 하워드 룻세이(John Howard Rutsey). 러시의 초창기 멤버이며 1974년까지 드러머로 활동했다.

밴드 결성 당시 알렉스 라이프슨의 친구였으며, 러시라는 밴드의 결성에 꽤나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초기 밴드의 방향성을 잡을 때 가장 적극적이고 진지하게 고민했으며, 작사·작곡도 자신이 대부분 하였다. 다만 완벽주의적인 성향이라 작성한 가사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처음부터 다시 적는 스타일이었다고.[29] 또한 드럼 실력도 꽤나 출중한 편이어서 어찌보면 닐 피어트와 유사한 면이 있다.

밴드명인 러시도 존의 남동생인 빌 룻세이가 지은 것으로, 리허설을 구경하던 중 문득 떠올린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나친 음주로 인한 당뇨를 앓고 있어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1974년 1집 녹음을 마친 뒤 동년 7월 25일 마지막 라이브 공연을 마치고 러시를 탈퇴한다. 존 본인이 라이브 공연을 하러 여기저기 이동하는 빡빡한 스케줄을 개인적으로 싫어했던 이유도 있었다.

탈퇴 이후에는 아마추어 보디빌더가 되었고 오랜 친구였던 라이프슨과도 종종 안부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로는 교류가 뜸해졌고, 라이프슨도 2000년대 초반 진행한 인터뷰에서 룻세이와 연락을 주고 받지 않은 지 오래됐다고 밝혔다.

2008년 5월 11일 사망했다. 사인은 당뇨 합병증으로, 집에서 잠을 자던 도중 급사했다고 한다. 게디와 라이프슨도 그의 비보에 추모 의사를 전했다.

6. 디스코그래피[편집]



6.1. 밴드 결성[편집]


1집: Rush (1974) - 대표곡: In The Mood, Working Man
1집 뮤직 비디오: In The Mood


6.2. 프로그레시브 실험 시기[30][편집]


2집: Fly By Night (1975) - 대표곡: Anthem, Fly By Night, By-Tor and the Snowdog[31]
2집 뮤직 비디오: Anthem, Fly By Night
3집: Carass of Steel (1975) - 대표곡: Bastille Day, The Necromancer, The Fountain of Lameneth


6.3. 프로그레시브 중흥 시기[편집]


4집: 2112 (1976) - 대표곡: 2112, A Passage to Bangkok, The Twilight Zone
4집 라이브: All the World's a Stage (1976)

5집: Farewell To Kings (1977) - 대표곡: A Farewell To Kings, Xanadu, Closer to the Heart, Cygnus X-1 Book I: The Voyage.
5집 뮤직 비디오: A Farewell To Kings, Xanadu, Closer To The Heart

6집: Hemispheres (1978) - 대표곡: Cygnus X-1 Book II: Hemispheres, Circumstances, The Trees, La Villa Strangiato. 앨범 전체.
6집 뮤직 비디오: Circumstances, The Trees


6.4. 실험 완성 시기[편집]


7집: Permanent Waves (1980) - 대표곡: The Spirit of Radio, Freewill, Jacob's Ladder, Entre Nous, Natural Science

8집: Moving Pictures (1981) - 대표곡: Tom Sawyer[32], Red Barchetta, YYZ[33](연주곡), Limelight, The Camera Eye, Witch Hunt, Vital Signs.
8집 뮤직 비디오: Tom Sawyer, Limelight, Vital Signs
8집 라이브: Exit...Stage Left (1981) (유튜브 채널 참고)


6.5. 신디사이저 실험 시기[편집]


멤버들과 팬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호불호가 갈렸던 시기였다. 심지어 알렉스 라이프슨 조차 신디사이저의 도입에 반대를 했었는데 이 당시만해도 기타 중심의 록 팬들은 신디사이저나 이를 자동으로 재생하는 시퀀서는 가짜 악기라는 인식이 상당히 강했다.[34] 적어도 딥 퍼플의 존 로드처럼 해몬드 오르간이라면 모를까 희한한 전자소리를 내는 신디사이저 사운드에 대해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그 이외에 신디사이저 때문에 기타의 역할을 가져갔다는 생각 때문에 더 반발이 심했다 한다.[35]

9집: Signals (1982) - 대표곡: Subdivisions[36], The Analog Kid, Chemistry, Digital Man, The Weapon, New World Man, Losing It, Countdown.
9집 뮤직 비디오: Subdivisions, Countdown

10집: Grace Under Pressure (1984) - 대표곡: Distant Early Warning, Afterimage, Red Sector A, The Enemy Within, Behind the Wheels
10집 뮤직 비디오: Distant Early Morning, Afterimage, The Enemy Within, The Body Electric
10집 라이브: Grace Under Pressure Tour (1984) (유튜브 채널 참고)

11집: Power Windows (1985) - 대표곡: The Big Money, Manhattan Project, Marathon, Territories, Middletown Dreams, Mystic Rhythms
11집 뮤직 비디오: The Big Money, Mystic Rhythms

12집: Hold Your Fire (1987) - 대표곡: Force Ten[37], Time Stand Still, Prime Mover, Lock and Key, Mission.
12집 뮤직 비디오: Time Stand Still, Lock and Key
12집 라이브: A Show of Hands (유튜브 채널 참고)

6.6. 기타 강조 시기[편집]


신디사이저 실험 시기 때 자신의 역할이 뒤로 물려났다고 계속 느낀 라이프슨이 다시 사운드의 메인이 되고 싶다 해서 다시 기타를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본인의 바램과 달리 이때가 제일 힘들었다고 하는데, 러시의 실력과 인기 때문에 많은 엔지니어들이 자신의 취향이나 성향을 라이프슨에게 자꾸 요구를 하였기 때문에 앨범 작업시 많은 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라이프슨 역시 게디 리처럼 다양한 페달이나 이펙터를 사용해서 소리를 만들어내는데, 프로듀서들은 그가 그런 부가적인 도구를 쓰지 않고 단순한 이펙트만 사용한 연주를 요구했다고 한다.

13집: Presto (1989) - 대표곡: Show Don't Tell, Chain Lightning, The Pass, Scars, Superconductor, Hand Over Fist
13집 뮤직 비디오: Show Don't Tell, The Pass, Superconductor
14집: Roll The Bones (1991) - 대표곡: Dreamline, Roll the Bones, Where's My Thing?, Ghost of a Chance
14집 뮤직 비디오: Roll The Bones
15집: Counterparts (1993) - 대표곡: Animate, Stick It Out, Nobody's Hero, Leave that Thing Alone(연주곡), Cold Fire
15집 뮤직 비디오: Stick It Out, Nobody's Hero
16집: Test For Echo (1996) - 대표곡: Test For Echo, Driven, Half the World, Virtuality, Resist[38], Limbo(연주곡)
16집 뮤직 비디오: Driven, Half The World

6.7. 공백 이후 부활 시기[편집]


1996년 말, 닐 피어트가 딸을 차 사고로 잃었고 아내 역시 병으로 사망하여서 안그래도 감수성이 예민한 닐 피어트에게 상당한 충격으로 왔었다. 모든 관계자들은 밴드가 이제 끝이구나라고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17집: Vapor Trails (2002) - 대표곡: One Little Victory, Ghost Rider[39], Secret Touch, Earthshine, Freeze
17집 라이브: Rush In Rio (2002).[40]
18집: Snakes And Arrows (2007) - 대표곡: Far Cry, The Larger Bowl(A Pathoum), Spindrift, The Main Monkey Business, Hope(연주곡), Malignant Narcissism(연주곡).
18집 뮤직 비디오: Far Cry, Malignant Narcissism
19집: Clockwork Angels (2012)[41] - 대표곡: Clockwork Angels, Headlong Flight


7. 기타[편집]


파일:external/i.kinja-img.com/17mz76i80hip2jpg.jpg
2012년 5월 16일 뉴욕 양키스토론토 블루제이스 경기에서 호세 바티스타구로다 히로키를 상대로 한 홈런 장면을 보고 놀라는 장면. 이 장면에서 게디 리는 관중석 부분 최좌측상단에 있다.
  • 러쉬 멤버들은 소문난 야빠들이다. 게디와 알렉스는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의 홈인 애너하임 스타디움에서 배팅볼을 쳐보기도 했으며, 이후에도 야구계에서 자주 초대 받기도 했다.[42] 특히 게디 리는 야구에 대한 사랑이 대단해서, 자신의 재산을 털어 야구단 구단주가 되고 싶다는 얘기를 하곤 했다. 실제로도 토론토 블루제이스로저스 센터 홈 경기 때 가끔 백넷 뒤 관중석(야구 중계시 투수-타자의 대결 때문에 노출빈도가 가장 높은 자리)에서 야구를 관람하는 장면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리고 게디는 자신이 수집한 니그로 리그(Negro League) 선수들의 사인볼 200여 개를 니그로 리그 박물관에 기증하기까지 했다고.MLB 공홈 출처

  • 너바나의 드러머이자, 푸 파이터스의 리더인 데이브 그롤이 상당히 존경하는 밴드인데, 명예의 전당 시상식에서 사회를 담당하면서 어릴적 러쉬를 입문했던 썰을 풀었었다. 처음에 2112 앨범을 친구의 추천으로 듣게 되면서 이 말도 안되는 음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감탄하면서 이들 LP 앨범 뒷면을 보는데 다 큰 어른 3명이 흰색 기모노 같은 복장을 입고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먹었다고 한다(...).

  • 뭔가 이미지가 안 맞을 것 같지만 록 밴드 KISS와는 매우 깊은 인연이 있다. 밴드 초창기 때는 당연히 신인 밴드가 단독 콘서트를 연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라 각종 락 페스티벌이나 다른 밴드들의 공연의 오프닝 밴드 섭외를 기다리면서 몇 달 동안 여러 주를 돌아다니면서 힘든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 KISS의 리더인 진 시몬스가 러시의 앨범을 듣게 되었고 "얘들 무슨 캐나다의 레드 제플린이냐?"라면서 요 근래에 본 신인들 중에 정말 최고라고 평했다. 러시가 제대로 된 스케쥴 없이 생계형 밴드로 지내고 있다는 말을 듣자 당장 섭외해서 자신네들 투어에 한동안 대리고 다녔다고 최소 50-60번의 공연의 오프닝을 담당했다고 한다. 이 당시의 KISS의 위세는 대단하였고 공연하는 즉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일 정도의 슈퍼 락스타였다. 이로서 러시는 이런 대선배들의 후원하에 고급 호텔에 지내면서 숙식을 하게 되었고, 오프닝 밴드에 대한 개런티와 대형 무대에서의 공연 경험을 쌓게 된다.[43]

  • 정치적인 노래도 많이 만들었던 만큼 여러 언론사와 잡지에서 정치적인 견해에 대한 질문을 받은 바가 있다. 닐 피어트는 소설가이자, 자유지상주의, 객관주의 철학자인 아인 랜드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며, 이러한 면은 2112, Anthem 같은 곡에서 드러난다. 몇몇 팬들은 피어트가 보수주의 성향에 보수당이나 공화당 지지자라고 보기도 하지만, 피어트가 몇몇 인터뷰에서 객관주의 노선과 거리를 두는 발언을 한 적이 있고, 미국 공화당을 비판하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또 자신을 좌파 자유지상주의자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따라서 멤버들은 자유주의 혹은 자유지상주의적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사회적으로 리버럴 성향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44]

  • 2016년 토론토 출신인 게디 리와 알렉스 라이프슨을 기념하는 리-라이프슨 아트 파크가 토론토 노스욕에 개장됐다.

  • 러시가 캐나다 내에서 워낙 신과 같은 대우를 받다보니, 캐나다인들 사이에서는 "신은 러시와 셀린 디옹을 캐나다에 주셨지만 밸런스 패치를 위해 저스틴 비버도 함께 보내셨다"라는 농담이 나돈다.

  • 영화에서는 빠졌지만 레디 플레이어 원의 원작 소설에서는 오아시스의 개발자 제임스 할리데이가 러시의 팬으로 나와 에그 찾기에서 나름 중요한 열쇠로 러시의 앨범들이 언급된다.[45]

  • 야구계에서 은퇴한 웬 키 큰 사진가 랜디 존슨을 투어 전속 사진가로 고용하기도 했다. 랜디 존슨 역시 평소 메탈 음악 애호가인데다가 드럼 연주도 즐겨서 접점이 있었는데, 랜디 존슨이 은퇴 후 프로사진가로 전업하면서 러시의 투어 때 부르곤 했다. 두 전설의 만남

[1] 닐 피어트가 합류하여 밴드의 성향이 본격적으로 바뀐 시기다.[2] Officer of the Order of Canada. 캐나다 훈장 2등급. 캐나다의 국익을 신장한 인물에게 주어지는 훈장. 음악가로서 최초로 받은 명예이다.[3] 본명은 알렉산다르 지보지노비치(Aleksandar Živojinović). 성을 직역하면 삶의 아들(Son of Life), 즉 Lifeson이 된다.[4] 닐 퍼트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닐 피어트로 발음한다.[5] 21세기 들어서의 대표곡은 에디 코크런의 로큰롤 고전을 리메이크한 Summertime Blues(러시의 버전의 경우 더 후와 블루치어의 리메이크 곡을 합친 것 같은 느낌이 난다.). 이 곡은 2004년 WWE 썸머슬램 주제곡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그리고 유튜브에 이들의 뮤직비디오나 공연 영상, 노래 등이 올라오면서 젊은 세대에게 재발견되어 음반 매장에 재고로 있던 쌍팔년도 러쉬 음반이 다시 팔리기도 하였다.[6] 라이프슨은 피킹이 힘들 정도였다고 하고, 피어트는 그 전부터 서너 시간의 공연에서 드럼을 꾸준하게 치는 것이 힘들 정도로 금방 지쳐버린다고 하였다. 그래서 라이브 때 최고의 컨디션으로 공연을 못 보여준다는 죄책감에 "차라리 탈퇴를 할 테니 새 멤버를 기용하라"고도 하였지만, 게디 리는 새 멤버들보다는 형제 같은 오랜 친구들과 같이 하고 싶었기 때문에 힘든 결정이지만 러시의 활동을 끝내자고 하였다.[7] 실력이 좋은 드러머였으나 원래 몸이 안 좋았던데다가 음주에 대한 절제가 없어서 당시 소속사에선 존 룻세이 때문에 밴드가 망할지도 모르고, 개인 건강을 위해서라도 밴드를 그만두게끔 설득하였다고 한다. 그 후 존 룻세이는 본인 건강에 대한 결점을 극복하기 위해 보디빌더가 되었고 그 후 토론토에 체육관을 운영하면서 살다가 2008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8] 하지만 당시 음주연령이 높았던 시기라 미성년자였던 이들이 몰래 공연을 하고 다니는 것을 학교에 들키면 안 됐다고...[9] 무명 기간도 짧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메이저 입성 후에는 전국구급 대스타가 되었다.[10] 이 부분은 자기 자식들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학교를 중퇴하고 밴드를 하고 전국구 대스타가 되었으니 학교를 그만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려는 자기 자식들을 설득시키기 상당히 어려웠는듯 하다.[11] 처음엔 멤버들 전원 다 엄청난 실력파였기 때문에 소위 BADASS스러운 퀄리티 높은 하드록 앨범을 만드려 했었지만, 닐 피어트의 문학적 지식과 음악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취향 덕분에 이러한 실험적인 결과물들이 나왔다. 밴드에서 게디와 알렉스는 원래부터 친구였지만 닐 피어트는 자신이 원년 멤버를 쫓아내고 밴드에 들어왔다는 생각에 스스로 계속 소외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게디와 알렉스는 닐을 안심시켜주기 위해 작사나 작곡 등 앨범 작업에 대한 그의 지분을 높였다.[12] 게디는 인터뷰에서 닐 피어트처럼 시적 소양이 깊은 사람은 처음 봤고, 그가 쓴 가사를 처음으로 봤을 때 접해보지 못했던 단어들을 보고 상당히 감탄을 하였으며, 이것으로 차별성을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13] 당시에는 비틀즈, 레드 제플린 같은 최고의 인기밴드를 빼면 20분은커녕 5분을 넘는 노래도 라디오에서 내보내기가 힘들었다. 당장 Bohemian Rhapsody 같은 곡도 길이가 6분이나 된다고 라디오는 물론 음반사에서도 퇴짜를 맞던 시절이었다. 6분짜리 곡도 이럴진데, 20분이나 되는 곡을 라디오에서 틀어줄 리가 없었다.[14] 비슷한 예시로 프레디 머큐리 사망 전까지 평론가들한테 까이고 까였다. 러시가 고등학교 중퇴자들이 똑똑한 척한다고 까였다면, 퀸은 대학물 먹은 애들이 자기들이 똑똑하다는 걸 보여주려 한다고 까였다(...).[15] 메슈가의 드러머 토마스 하케는 이런 점에서 닐 피어트의 판박이.[16] 이런 점에서 아이언 메이든의 팬들과 공유층을 서로 이루고 있는데, 두 밴드 모두 서사적인 요소가 강한 점이나 베이스의 테크니컬한 연주가 상당히 튄다는 점이 비슷해 러시 팬들이 아이언 메이든의 팬을 겸하는 경우도 많다.[17] 메탈리카, 드림 씨어터X JAPAN처럼 드러머가 밴드 리더 혹은 중심 멤버가 아닌 이상은 작곡은커녕 작사 쪽엔 손도 못댄다. 이런 상황에 드러머인 닐 피어트가 작사를 담당하는 것은 꽤나 이례적인 일. 이 때문에 푸 파이터스의 드러머인 테일러 호킨스가 명예의 전당에서 "대체 어떤 미친 밴드드러머한테 가사를 쓰게 하냐"고 드립을 쳤다. 밴드라는 그룹에서 드러머의 입지를 잘 보여주는 모습.[18] 드림씨어터의 1~2집 홍보문구가 '러시가 메탈리카를 만났다'이다. 러시의 홍보문구였던 '킹 크림슨+예스+레드 제플린'의 오마쥬.[19] 사실 자신들도 밝히듯 멤버 대부분이 러시의 광팬이며, 애초에 드림 시어터의 전신인 머제스티(Majesty)는 러시의 곡들을 커버하는 밴드였다.[20] 특히, 드림 씨어터의 드러머 마이크 포트노이는 2집 Images and Words까지 닐 피어트의 시그니처 드럼셋을 그대로 사용했을 정도로 러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21] 게디의 부모님이 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피해자로 종전 후 캐나다로 온 유대인-폴란드계 이민자, 알렉스의 부모님은 세르비아계 이민자로, 노동 계층으로서 힘겹게 가정을 꾸려가는 모습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22] 몽골의 황제 쿠빌라이 칸이 수도로 지은 도시 상도(上都)에 대한 환상을 노래함.[23] 아예 두 편을 합쳐서 Cygnus X-1 Duology(2연작)이라 하여 28분짜리 대곡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24] 주로 닐 피어트의 드럼. 각종 매체나 유튜브에서 가장 드럼이 어려운 곡을 꼽으라면 이 곡이 항상 top 3에 들어간다.[25] 이전의 한 공연 대기실에서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맘껏 주문하라는 에이전시 직원의 말을 듣고 평소부터 궁금해했던 독한 술들을 주문해서 공연 전에 들이켰는데,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공연을 한 후 엄청나게 숙취에 쩔었다고 한다. 이후 주색잡기는 철저하게 멀리하게 되었다고.[26] 게디 리와 알렉스 라이프슨은 예전부터 공연하는 것 이외에는 놀 줄도 몰랐고 닐 피어트 역시 친구가 거의 없다시피 자라서 이들은 흔한 락스타들의 놀이문화와 상당히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닐 피어트의 경우 투어를 가는 곳들은 대부분 대도시라 대형 서점들이 많아서 매우 좋았다고 한다.[27] 여담이지만 70년대를 주름잡던 음악가 중 마약 및 그루피 논란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음악가들(핑크 플로이드, 리치 블랙모어, 브라이언 메이)은 대부분 프로그레시브 록 성향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28] 닐 앞에서 기타/베이스를 치는데 방방 뛰어다닌다거나, 닐 피어트의 액션 피겨를 세운 후에 "얘가 진짜보다 좋은 이유는... 스위치가 있어서 끌 수 있기 때문이죠"라 한다거나, 베이스 앰프 자리에 세탁기와 자판기, 닭고기를 굽는 진짜 요리사를 둔다거나, 미디 페달에 바비 인형을 꽂는다거나. 닐도 이걸 보고 안쓰러웠던 나머지 이렇게 대꾸해주기도 한다.[29] 1집 음반을 제작할 시기 녹음 당일에 가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죄다 갈아엎었다가 게디 리가 급하게 작사를 해야 했던 적도 있다.[30] 닐 피어트가 합류하여 밴드의 성향이 본격적으로 바뀐 시기다.[31] 러쉬가 최초로 지은 7분 이상의 대곡. 이후 러쉬의 모든 대곡과 이어지는 최초의 실험이다. 당시 레코드 관계자들을 굉장히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했다.[32] 별명은 "캐나다의 진짜 국가".[33] 캐나다 토론토 피어슨 국제공항의 공항 코드다. 곡의 처음 시작 부분이 바로 YYZ를 모르스 부호로 옮긴 - . - - - . - - - - . .를 표현한 것이다. 오오 애향심! 오오[34] 오죽하면 퀸의 앨범에도 "우리는 신디사이저를 사용하지 않습니다"라고 표기해놨을 정도[35] 우스게소리가 아니라 1기타에 신디사이저가 있는 밴드들을 보면 신디사이저가 앵간한 리드 기타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예를들어 딥 퍼플은 해몬드 오르간이지만 라이브에 기타 사운드의 외적인 부분을 리드를하고, 드림씨어터 역시 키보드가 리드를 하는 경우가 꽤 있고, 스트라토바리우스는 신디사이저를 거의 메인으로 앞세운 밴드다.[36] 위에서도 설명이 되었지만, 도시 구조와 사회에서 그룹 모임에 끼지 못하는 외톨이들에 대한 노래로 비슷한 환경에서 성장한 이들에게 공감이 가는 노래. 허약한 체질 때문에 외톨이로 자랐던 닐 피어트의 경험에서 작사되었다[37] 신디사이저 실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인정해주는 명곡. 아예 베이스가 곡의 주역이기 때문이다.[38] 오랫만에 어쿠스틱 기타를 넣었다.[39] 닐 피어트가 딸을 사고로, 그리고 10달 후 아내를 병으로 잃은 후, 죽음을 각오하고 북미 대륙의 도로 8만km를 오토바이로 질주한 경험을 담은 노래. 96년 이후 새 정규 앨범이 발매되기까지 6년이란 시간이 걸린 이유가 바로 피어트가 가족을 잃은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피어트는 이 경험을 토대로 같은 제목의 책을 내기도 하였다. 리오 라이브에서 피어트의 연주 장면을 보면 평소 진지했던 모습이 더욱 진중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40] 북미/유럽 러쉬 팬들이 "우린 지금까지 너무 썰렁했나" 하고 반성하게 만들 정도로 관객 반응이 열광적이었다. 밴드 결성 28년만에 처음으로 브라질에 왔고, 음악을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국민성이 합쳐졌다. 아이언 메이든의 Rock In Rio 라이브와 더불어 강력히 추천받는 라이브 DVD이다.[41] 앨범 커버의 시계가 9시 12분을 가리키고 있는데 4집 앨범/타이틀 곡의 제목인 2112를 21시 12분으로 표현했다.[42] 대표적으로 게디는 1993년 올스타전에 캐나다 국가 독창자로 초청됐었다.[43] 이게 밴드로서 아주 중요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상당수의 소규모 관객의 무대에서 오는 압박과 수백 수천 명의 관객이 있는 무대에서 오는 압박감은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KISS의 단독 라이브 공연만 봐도 규모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러시는 이런 대규모의 관중 앞에서 공연을 하는 귀중한 경험을 신인 때부터 다져온 것이다.[44] 알렉스 라이프슨은 자신을 "사회자유주의" 성향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45] 주인공은 러시의 <시링스 신전의 사제들>에서 힌트를 얻어 이 단계를 클리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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