량스이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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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양사이.jpg
중화민국 18대 국무총리
정체
梁士詒
간체
梁士诒
한국식 독음
양사이
영문
Liang Shiyi

연손(燕孫)

익부(翼夫)
출생
1869년 5월 5일 청나라 광동성 삼수현
사망
1933년 4월 9일 중화민국 상하이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청나라 진사
직업
외교관, 관료, 정치가
국무총리
재임 기간

18대 1921년 12월 24일 ~ 1922년 1월 25일

1. 개요
2. 생애
2.1. 초기이력
2.3. 중화민국 국무총리
2.5. 국민혁명과 말년
3. 주요 경력
4. 참고문헌
5. 관련문서


1. 개요[편집]


청말의 관리이며 중화민국의 정치가. 중화민국 총리를 역임했으며 북양군벌 교통계의 수장을 지냈다. 북양정부의 최고 재정전문가로 '재신'(財神)이라는 별명이 있었으며 그가 축출된 후 북양정부는 멸망하는 순간까지 재정부족을 해결하지 못했다.


2. 생애[편집]



2.1. 초기이력[편집]


1869년 광동성 삼수에서 태어났다. 21세에 거인이 되었으며 25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북양서국 총판으로 벼슬길에 올라 우전부 좌참의, 한림원편수의 벼슬을 지냈으며 후일 중화민국 1대 국무총리가 되는 탕사오이를 따라 인도 제국에 파견되어 중영장조약을 체결하였다. 1907년 철로 총국장이 되었으며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여 위안스카이가 총리대신에 임명되자 그의 지시를 받고 탕사오이와 함께 청황실 퇴위 운동을 벌였고 자오빙쥔, 후웨이더 등과 함께 융유황후에게 루이 16세의 전례를 밟지 않기 위해 선통제를 퇴위시켜야 한다고 압박했다. 이에 청 황실은 량스이, 자오빙쥔, 후웨이더에게 위안스카이에게 잘 말해 청 황실의 목숨만은 붙여줄 것을 부탁했고 위안스카이는 쑨원과 협상, 임시대총통 자리를 넘겨받을 수 있었다.

량스이는 우전부장을 거쳐 1912년 중화민국 건국 이후 1912년 3월 총통 비서장이 되었다. 1912년 5월 교통은행 사장이 되었으며 1912년 8월, 위안스카이의 초청을 받은 쑨원이 쑨원-위안스카이 회담을 위해 베이징을 방문하자 위안스카이의 지시로 그를 영접하며 회담에 참여했다. 1913년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1], 1913년 5월 재정부차장 서리가 되었으며 위안스카이의 명으로 쑹자오런 암살 사건, 선후대차관 사건으로 들끓고 있는 국민당에 경고 메시지를 전했다. 계축전쟁이 진압되고 1913년 공민당을 조직해 위안스카이의 정식 대총통 당선을 이끌어 냈으며 1914년 중화민국 국회 해산이 단행된 이후 1914년 3월 10일 약법회의에 참여, 세무처 독판, 참정원 참정에 임명되었다. 북양군벌의 재정파 교통계와 광동계의 수장으로 문치파 안휘계의 수장 양사기와 대립했다.


2.2. 홍헌제제에서 호법전쟁까지[편집]


하지만 국회 해산 이후 차차 위안스카이의 총애를 잃게 되었는데 1915년 황제병에 걸린 위안스카이가 제제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영미의 신뢰를 받고 있고 막대한 재정권을 쥐고 있는 량스이를 이용하기 위해 육군차장 쉬수정, 교통차장 엽공작, 재정차장 장호 등이 철도국에서 횡령을 했다는 혐의를 씌워 탄핵했다. 그리고 위안스카이는 량스이에게 사건에서 그의 이름을 지웠다고 넌지시 알려주었고 황태자가 되고 싶었던 위안스카이의 아들 위안커딩이 제제를 도울 것을 요구하자 량스이는 교통계 동료들과 상의 후 군주제를 돕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그러자 교통계를 표적으로 한 수사는 대거 중단되고 엽공작 등은 관직이 회복되었다.

이후 제제운동을 이를 적극 지원하여 각종 청원회를 조직, 여론을 조작하였고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 단행에 이르렀으나 량치차오, 차이어, 탕지야오 등이 24시간 내로 량스이 등 제제파를 처벌하고 군주제 폐지를 요구하였다. 위안스카이가 이를 묵살하자 이들은 12월 25일 호국군을 조직하겨 거병했고 이것이 전국적인 호국전쟁으로 번졌다. 위안스카이는 량스이에게 차이어와 화해를 할 것을 지시하고 캉유웨이 등 명사들을 포섭하여 량치차오를 설득하려 했으나 호국군의 입장은 완고했다. 결국 3월 23일에 위안스카이가 제제를 취소하고 6월 6일에 사망하자 남방 군무원의 요구에 따라 제제의 수괴로 지목되어 대리총통 리위안훙이 량스이에게 수배령을 내렸다. 이에 량스이는 영국령 홍콩으로 도주했다.[2]이후 량치차오의 연구계와 더불어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주장했다. 위안스카이 사망 직전에는 쉬스창의 지시로 청실과 접촉하여 청나라의 복고를 꾀하기도 했으나 청황실에서 멸문지화를 두려워하여 거절하면서 무산되었다.

1917년 부원지쟁 과정에서 돤치루이가 면직되자 량스이는 량치차오 등과 함께 돤치루이를 지원하여 리위안훙 정권을 전복하고 임시 정부와 임시 국회로 대체하려 했다. 그런데 1917년 중재를 이유로 입경한 장쉰이 난데없이 선통제를 복위시켜 장훈복벽을 일으키자 돤치루이는 국무총리에 복직하여 복벽을 토벌했다. 돤치루이는 구국회 복구를 거부하며 새 내각을 조직, 일방적으로 세계대전 참전을 결정했다. 이에 쑨원이 광저우로 남하, 1차 호법운동을 전개하여 호법정부를 수립했고 돤치루이가 토벌령을 내리면서 호법전쟁이 일어났다. 이 혼란 와중에 량스이는 1918년 2월 사면되었고 6월에 교통은행 이사장, 국내 공채국 총재가 되었다.

1918년 펑궈장 대총통의 임기가 만료되어가는 와중 8월에 안복국회라 불리는 신국회가 소집되자 9월 22일에 개막된 참의원에서 119표를 얻어 안복국회 참의원 의장[3]으로 추대되었다.[4] 1918년 9월 4일 안복국회는 쉬스창을 새로운 대총통으로 추대했고 10월 10일 쉬스창이 대총통에 취임했다. 이후 톈진에서 평화촉진회를 결성하여 호법전쟁의 종결을 주장했으나 사회적으로 좋지 않은 평을 들었다. 1918년 11월 남북정부가 모두 정전령을 내리면서 호법전쟁은 종결되었다. 이때 량스이는 남방과의 화평을 위해 부총통 자리를 천춘쉬안이나 루룽팅같은 남방인사에게 줄 것을 주장했으나 돤치루이가 부총통 자리를 차오쿤에게 주려고 하면서 끝내 부총통은 정족수 부족으로 선출되지 못했다.


2.3. 중화민국 국무총리[편집]


이후 안직전쟁에서 국무총리 돤치루이안휘군벌 정권이 몰락하고 장쭤린봉천군벌차오쿤, 우페이푸직예군벌이 중앙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은 직계와 봉계의 지지를 동시에 받는 진윈펑을 국무총리로 추대했는데 진윈펑 내각은 1921년 12월에 경제위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총사퇴했다. 이때 국내은행단을 장악하고 있던 교통계는 총리 자리가 탐났기 때문에 진윈펑 내각의 붕괴를 방치하였고 엽공작이 장쭤린과 결탁했다.

이에 장쭤린은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통계의 수장인 량스이를 총리에게 맡기자고 량스이를 추천했다. 하지만 차오쿤과 우페이푸 모두 돤치루이와 가까웠던 량스이를 좋아하지 않았고 장쭤린이 량스이를 국무총리로 천거한 것이 장쭤린의 술수라고 생각했다. 이에 량스이는 자신이 총리가 되면 직계의 군비 문제를 조속히 해결해주겠다고 제안했고 우페이푸 등 직계도 량스이의 국무총리 임명에 동의했다. 이에 따라 12월 24일 량스이가 국무총리에 임명되었고 12월 25일 취임했다.

량스이는 외교총장에 옌후이칭, 내무총장에 고릉위, 재정총장에 장고, 육군총장에 포귀경, 해군종장에 이정신, 사법총장에 왕충후이, 교육총장에 황옌페이, 농상총장에 제요산, 교통총장에 엽공작을 임명하고 공약대로 직계에게 300만원의 군비를 조달해주고자 했으나 중화민국의 경제위기가 너무도 심각하여 자금을 조달할 수가 없었다. 이에 직계는 자신들이 속았다고 여겨 분노하고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량스이가 1922년 1월 1일 장쭤린의 건의에 따라 돤즈구이, 장수원, 진문운, 유순, 위종한, 취퉁펑안휘군벌의 주요 장령들을 대거 사면하면서 직계는 격노했다. 여기에 1월 5일 량스이가 베르사유 조약 문제로 전국민의 분노를 산 바가 있는 신교통계의 수령 조여림을 실업계 특사로 임명하고 육종여를 베이징 시정 독판에 임명하여 일본으로부터 천만원의 차관을 들이려 하면서 전국적으로 친일내각이라는 비난을 듣게 되었다.

량스이는 일본과 접촉, 교제철도를 회수하고 차관을 들여오려 했는데 우페이푸는 이것이 봉천파의 확대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려는 것으로 여기고[5] 폭발하여 1월 5일 량스이를 성토하는 전문을 보냈다. 일본과 차관 문제로 협상하고 있던 량스이는 우페이푸가 보낸 전문이 내각 조각에 대한 축전으로 여기고 읽어보았다 경악하였다.

량스이는 기회를 틈타 내각을 차지했다. 일본 대표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전일 의논한 것을 뒤집었는데 도쿄에서 주중국 일본 대사에 훈령한 것을 보면 외교부에 일본 차관을 요구토록 하고 일본이 추천한 사람을 쓰도록 했다. 량스이는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여론을 고려하지도 않고 있다. 외직 경험도 없는 사람이 제멋대로 일본의 요구를 허락하고 철로를 되찾기 위해 마침내 차관을 일으키고 주미 각 대표가 이를 따르도록 훈령하였다. 철로는 일본인 경영으로 귀속토록 하고 수천만원의 채권을 일으켰다. 역대 내각이 하지 못했던 것을 서슴없이 그가 했다. 지난날 인민들의 통곡이 쌓여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고집스럽게 일을 저질렀다.
국권이 희생되고 철도 운송권이 중단되는데 어찌 외인을 후대하고 어찌 조국을 원망하지 않겠는가? 량스이는 끼리끼리 무리짓는 것을 지원하고 조종하며 외세에 아첨하는 매국으로 이완용, 장방창이 되었으니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남녀논소 전국 인민은 이민족이 우리 강토를 침략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으니 간적을 물리치고 정의를 위해 용감히 앞으로 나가자. 모두가 지혜를 모드고 힘을 합쳐야만 한다. 바로 중국 대표에게 급전을 쳐 원래 계획을 밀고 나가도록 하자.

이는 정부를 토벌하자는 격문이나 다름없었고 당황한 량스이는 1월 6일 자신이 우페이푸의 전문을 보지 못한 것처럼 철도 건설비 준비 문제에 관해 정부에는 의견이 없으니 좋은 의견을 발표해달라고 요구하는 미전(微電)[6]을 쳤다.

2.4. 축출과 1차 직봉전쟁[편집]


하지만 강소독군 치셰위안, 호북독군 펑위샹, 산동독군 톈중위, 강서독군 진광원 등이 모두 우페이푸 지지를 통전하며 량스이를 비난했고 1월 7일 량스이는 철도 회수에는 현금 지불이 없어으며 국내외 차관 도입법에 따른 것이었다고 해명하면서 신내각은 산동 문제에 있어서 중국 대표의 주장에 완전히 찬성한다고 밝히며 매국 논란을 잠재우려 했지만 이미 여론은 우페이푸가 장악한 상태였다. 우페이푸는 다시 량스이를 비난하는 전문을 국민외교대표 여일장, 장몽린에게 보내 량스이 내각과 단절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오늘 아침 량스이가 특명 전권 대사에게 전문을 보냈는데 일본의 차관을 접수하고 중일이 공동관리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베이징 정부를 더욱 애석히 여기는 것은 일본의 차관을 더욱 많이 얻었고 이것을 각국의 신문들이 당당히 보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베이징은 그 요구를 이미 접수했다고 일본은 이야기하고 있다. 그동안 이의 저지를 위한 우리들의 노력은 전부 물거품이 되었다. (...) 무릇 그 나라에서 나는 음식을 먹고 그 나라에서 사는 자라면 마땅히 조국을 위해 같이 살고 같이 죽어야 할것이며 악당의 괴수들과는 한 하늘 아래 머리를 이고 살 수 없다. 만일 량스이가 일본 차관을 끌어오고 철도를 공동관리하도록 옹호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기꺼이 량스이의 주모자일 것이다. 즉, 나라의 공적이므로 우리 인민들이 당연히 공동으로 쳐 없애야 한다. 우페이푸는 인민을 위해 명을 받들어 반드시 적을 몰아낼 것이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우페이푸의 의견에 동조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1월 8일 상하이에서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여 량스이 내각을 규탄했고 베이징에서 외교 연합회 등 40개 단체가 연명하여 산동 문제 교섭, 일본 차관, 매국노 기용, 염여 차관 등 량스이 내각의 10대 죄상을 선포했다. 1월 12일, 우페이푸는 량스이와 단절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담은 전문을 다시 발표했다.

제비가 황손을 쪼고 있으니 한의 운명도 다했다. 이 사람을 제거하지 않으면 나라가 안정을 찾지 못할 것이다. 만일 부끄럽게도 그 자리에 연연한다면 얼굴 가죽이 두껍다고 할 것이다. 인민들에게 묻노니 누가 매국 내각인가를 알 것이다. (...) 량스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낯가죽 두꺼운 일이므로 빨리 끌어내야 한다.

이는 량스이를 측천무후에 빗대 나라를 말아먹고 있다는 비난이었다. 이에 장쭤린이 개입하여 량스이를 비호했다.

지난번 베이징에 가서 차오쿤 각하를 수행하며 내각을 빨리 구성토록 했습니다. 내각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국본은 하루아침에 안정되는게 아니므로 힘써 도와야 합니다. 교제(철로) 문제에 있어 량스이 내각이 이제 진행을 선포했는데 최근의 전문은 정황에 대한 진술을 하지 않아 우페이푸는 이해도 없이 마음대로 비방을 하고 있습니다. 전문 내용의 언어들은 적합하지 않은 말들이며 오로지 옳고 그름만을 불문하고 계속 공격만 하고 있습니다. 묻노니 당국자는 어찌해야 하는지, 나라 일은 어떻게 될 것인지 마땅히 정론을 모아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알려야 할 것입니다.

량스이도 우페이푸를 걸출한 인물로 칭송하며 자신의 입장에 대해 변명하며 우페이푸와 화해하려 했지만 우페이푸는 7일 이내에 물러날 것을 요구하는 싸늘한 답변을 보냈다. 이에 량스이도 분노하여 "비웃을테면 비웃어라. 좋은 자리는 내가 차지하고 앉아 있다. 용납할 수 없다."며 국무총리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에 우페이푸는 1월 19일 치셰위안, 진광원, 소요남, 톈중위, 자오티, 펑위샹과 연명으로 쉬스창에게 량스이를 파면할 것을 요구했다. 1월 20일 우페이푸가 호북독군 소요남에게 고급군관회의를 소집하여 량스이를 무력으로 몰아내기 위해 북상할 것을 지시했다. 량스이는 하야를 거부하면서 1월 20일 텐진으로 피신했고 쉬스창은 1월 25일 외교총장 옌후이칭을 국무총리 대리로 임명했다. 량스이 내각은 출범 28일만에 사실상 붕괴되었다.

이후 왕스전 등 원로들이 중재에 나섰으나 의견 차이를 좁힐 길이 없어 결국 4월 28일부터 직예군벌과 봉천군벌이 충돌하면서 1차 직봉전쟁이 발발했다. 1차 직봉전쟁에서 우페이푸는 거의 1주일만에 봉천군벌을 격파하고 중앙의 패권을 돈독하게 했다. 대총통 쉬스창은 우페이푸의 요구에 따라 장쭤린을 공직에서 면직하고 엽공작, 량스이, 장호삼 등을 전쟁의 수괴로 지목하여 체포령을 내렸다. 하지만 량스이의 친구였던 국무총리 서리 주자제가 량스이에게 전화로 달아나라고 전한 까닭에 량스이는 5월 7일 엽공작과 함께 체포령이 떨어지기 전에 일본 제국으로 망명했다.


2.5. 국민혁명과 말년[편집]


량스이의 축출 이후, 우페이푸는 구 교통계를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경한철로의 노동운동을 지원하고 노동법을 입법하였지만 노동운동이 너무 거세지자 1923년 2.7 사건을 일으켜 노동운동을 탄압했다. 직예군벌은 쉬스창이 정통성이 없다고 축출하고 리위안훙을 다시 총통으로 내세웠으나 그 역시 축출하고 1923년 10월 회선 사건으로 차오쿤을 대총통에 옹립했다.

1924년 9월, 절강독군 루융샹이 지배하고 있던 상하이를 뺴앗기 위해 강소독군 제섭원을 중심으로 강절전쟁이 일어나자 만주에서 절치부심하고 있던 장쭤린이 관내로 진출, 2차 직봉전쟁이 일어났다. 직예군벌 정권은 육군검열사 펑위샹이 일으킨 북경정변에 무너졌고 돤치루이가 임시집정에 추대되어 1924년 11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돤치루이는 1925년 2월 선후회의를 개최했는데 이때 량스이는 재정선후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26년 장쭤린에게 정치연토회 회장에 임명되었다. 1927년 세무처 감독을 맡았으나 장제스가 영도하는 중국 국민당이 북상해오자 그의 정치생명에도 끝이 다가왔다.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로 베이징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량스이는 영국령 홍콩으로 망명했고 상하이와 홍콩을 오가다가 1931년 만주사변이 터지고 국민정부 행정원이 이에 대응하기 위해 1932년 1월 18일에 설치한 국난회의의 일원이 되면서 상하이에 정착했다.

이후 상하이에서 거주하다가 1933년 상하이에서 병환으로 사망했다.


3. 주요 경력[편집]


중화민국 역대 국무총리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장.svg
대행

18대

대행
옌후이칭

량스이
(1921년 12월 24일 ~ 1922년 1월 25일)[7]

옌후이칭


4. 참고문헌[편집]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원세개 평전, 허우이제, 지호.


5. 관련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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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때 6개 당적을 동시 보유했는데 당시 중화민국 정계에서는 흔한 일이었다.[2] 량스이의 부재를 틈타 조여림의 신교통계가 성장하여 교통국을 지배하게 된다.[3] 부의장은 114표를 얻은 주계검.[4] 량스이와 주계검 모두 곧 사퇴하여 안복계에게 자리를 내주었다.[5] 우페이푸는 루융샹에게 전보를 보내 이것이 광동, 안휘, 복천이 연합하여 철도를 지배하고 중앙을 합병하려는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6] 5일 짜리 전보.[7] 공식적으로는 1922년 5월 5일까지 총리 재임.